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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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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국기(1918년~1941년)
유고슬라비아 국기(1946년~1992년)
유고슬라비아 지도

유고슬라비아(세르보크로아트어: Jugoslavija / Југославија, 마케도니아어: Југославија, 슬로베니아어: Jugoslavija)는 1918년부터 1992년까지 존재했던 동남유럽중앙유럽의 옛 국가이다.

개요[편집]

  • 주도: 베오그라드
  • 면적: 255,804km²(1989년)
  • 인구: 23,657,623명(1990년)
  • 공용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 정치체제: 세습군주국 (1918–1941), 연방공화국 (1945–1992)

역사[편집]

6세기 경 남슬라브족발칸반도로 이주한 이래, 알렉산더 대왕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비롯한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한 이후로도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아 왔다.

13세기 무렵 게르만족슬라브족 간 문화의 교차점이었던 발칸반도에는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 작은 공국들이 형성됐으나, 역사적으로 주변국과의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기도 했다.

14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문명이 들어서자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이슬람교 등 3개 종교와 알바니아계, 그리스계, 터키계, 불가리아계, 세르비아ㆍ크로아티아계 등 5개 민족, 4개의 언어, 2개의 문자권이 혼재되면서 발칸반도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18세기 말 남슬라브족의 민족 해방 운동을 통해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 불가리아 공국 등이 단일 국가로 독립했으나, 마케도니아는 영토 확장을 위한 요충지로 잦은 침략을 받았다. 특히 1880년대부터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3국의 마케도니아 지배권 분쟁으로 인해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고, 마케도니아 영토는 그리스 왕국와 세르비아 왕국에 분할되었다.

모든 남슬라브족을 위한 단일 국가로서의 유고슬라비아라는 개념은 17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19세기의 일리리아 운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은 'jug'(남쪽)와 'slaveni'(슬라브인)를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지식인과 당시 망명 중이었던 세르비아 왕립 의회, 세르비아 왕가인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합작인 코르푸 선언의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과 세르비아 왕국이 통합하여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 성립되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베르사유 국가'라고 불렸다.

유고슬라비아 왕국[편집]

1928년 6월 20일, 세르브인 의원 푸니샤 라치치는 국가의회에서 야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 의원 5명을 총으로 쏴 그자리에서 의원 2명이 사망하고, 지도자 스체판 라디치가 몇 주 후 사망하였다. 1929년 1월 6일, 알렉산다르 1세는 헌법을 폐지하고, 정당을 금지하였으며 집행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국명을 유고슬라비아로 변경하였다. 그는 분리주의 경향이 억제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완화되기를 희망하였다. 1931년, 알렉산다르 1세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독재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다르 1세의 정책은 이후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절대적 통치자가 된 소련에서 비롯된 다른 유럽 열강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 세 정권 중 어느도 알렉산다르 1세가 추구한 정책을 선호하지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체결된 국제 조약을 개정하기를 원했고, 소련은 유럽에서 지위를 되찾고 보다 적극적인 국제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는 중앙집권형 유고슬라비아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적 지역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지방과 바노비나에 새로운 내부 경계가 그려졌다. 바노비나는 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거나 투옥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의 독재로, 비세르브인이 통일의 개념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는 영향을 불러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의 국기가 금지되었다.

1934년, 알렉산다르 1세는 프랑스를 공식 방문하던 도중 마르세유에서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 의해 암살당했다. 블라도 체르노젬스키는 이반 미하일로프의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기구에서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혁명 기구인 우스타샤와 협력한 숙련된 사수였다. 알렉산다르 1세의 사망 이후, 11살이었던 아들 페타르 2세와 그의 사촌인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가 이끄는 섭정평의회가 그의 뒤를 이었다.

1930년대 후반의 국제 정치 정세는 주요 인물들 간의 편협한 태도, 전체주의 정권의 공격적인 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질서가 거점을 잃고 이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확신으로 특징지어졌다. 1939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지원과 압력으로, 크로아티아의 지도자 블라드코 마체크와 그의 당은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중요한 내부 자치정부가 있는 자치구)를 성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협정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명시했지만, 크로아티아는 서둘러 국제 관계에서 독립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왕국 전체가 연방화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로 인해 계획이 중단되었다.

1941년 3월 25일, 파울 왕자는 파시스트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고슬라비아가 전쟁에서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며 에서 삼국 조약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파울의 섭정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저버렸다. 고위 군 장교들도 조약에 반대하여, 3월 27일 국왕이 돌아오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육군 장군 두샨 시모비치는 권력을 장악하여 빈 대표단을 체포하고, 폴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17살이었던 페타르 2세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면서 섭정을 끝냈다. 이후 1941년 4월 6일, 아돌프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곧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전에 격퇴당했던 그리스 침공이 뒤따랐다.

제2차 세계대전[편집]

1941년 4월 6일 오전 5시 12분,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군대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였다.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은 베오그라드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도시를 폭격하였다. 4월 17일, 독일군의 침공에 대한 11일 간의 저항을 끝내며,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역 대표들은 베오그라드에서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30만 명 이상의 유고슬라비아 장교와 군인이 포로로 잡혔다.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고 분할하였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1929년 성립된 파시스트 민병대인 우스타샤에 의해 통치되는 나치 독일의 위성국로 성립되었다. 하지만, 1941년까지는 활동이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독일군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슬로베니아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다른 지역은 불가리아, 헝가리, 이탈리아가 점령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에 의해 50만여 명이 살해당했고, 25만여 명이 추방당했으며, 20만여 명은 가톨릭교로 강제로 개종당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집단학살)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은 공산주의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왕당파 체트니크 두 파벌로 구성되었으며, 파르티잔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에게만 승인을 받았다. 범유고슬라비아 성향의 파르티잔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끌었으며, 극단적 친세르비아 성향의 체트니크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끌었다.

파르티잔은 점령된 서유럽중앙유럽에서 가장 큰 저항군으로 발전하게 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체트니크는 처음에는 망명한 왕실 정부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내 추축국보다 파르티잔과 싸우는데 집중하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체트니크 운동은 전적으로 추축국의 보급에 의존하는 협력주의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 민병대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파르티잔은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점령군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승리는 네레트바 전투수체스카 전투였다.

1942년 11월 26일,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하치에서 소집되었다. 1943년 11월 29일, 평의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야이체에서 다시 소집되었으며, 전후 국가 조직의 기반을 마련하고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를 성립하였다. 이 날짜는 전쟁 이후 공화국의 날로서 기념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추축국을 1944년 세르비아에서, 1945년 유고슬라비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붉은 군대는 베오그라드 해방에 제한적인 지원을 제공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철수하였다. 1945년 5월, 파르티잔은 트리에스테와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의 일부를 점령한 후,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경 밖에서 연합군과 만났다. 하지만, 파르티잔은 같은 해 6월 다른 연합군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한 압력으로 인해 트리에스테에서 철수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옛 정부의 패권을 부정했던 파르티잔과, 국왕에게 충성하는 망명자들을 재결합시키려는 서방의 시도는 1944년 6월 티토-슈바시치 협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총리로 시작하여 독립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런던의 지원을 받았고, 80만여 명의 병력으로 가장 강력한 당파 세력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내 희생자에 대한 전후 공식 추정치는 170만 4,000명이다.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보골류브 코초비치가 1980년대에 수집한 후속 데이터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 수는 100만여 명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편집]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1945년 11월 11일, 선거에서 공산주의 주도의 인민전선 만이 투표에 참여하여 354석을 모두 확보하였다. 11월 29일, 아직 망명 중이던 유고슬라비아 국왕 페타르 2세가 유고슬라비아 제헌의회에 의해 폐위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었고, 모든 반대 요소는 제거되었다.

1946년 1월 31일, 소련의 헌법을 모델로 한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의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6개의 공화국과 세르비아에 속해있던 자치주와 자치구가 성립되었다. 연방의 수도는 베오그라드였다. 이 정책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 정부, 그리고 여러 민족을 인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각 공화국들은 중앙 또는 측면에 붉은 별이 있는 슬라브 삼색기 또는 붉은 기 형태의 국기를 사용하였다.

이름 수도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스코페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티토그라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베오그라드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류블랴나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자그레브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 거리를 두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 하에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민주집중제를 노동자 자주 경영과 분권화로 대체하도록 헌법을 대폭 개정하였다. 공산당은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전년도 회의에서는 티토주의를 채택하였다.

1947년, 유럽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따라 마셜 플랜의 지원을 거부하였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처음에는 이를 따라 마셜 플랜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1948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다른 문제에서 단호하게 결별하여 유고슬라비아를 독립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내부적으로 이견이 갈렸지만, 마침내 동의하여 1949년에 소규모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훨씬 큰 규모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원조가 마셜 플랜의 일부는 아니었다.

1961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동구권과 NATO 국가 모두를 비판하고, 인도를 비롯한 다른 국가와 함께 비동맹 운동을 시작하여, 해산될 때까지 공식 소속으로 남아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편집]

1963년 4월 7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은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종신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각 공화국과 자치주는 자체적인 헌법, 대법원, 의회, 대통령과 총리을 가졌다.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최상위에는 대통령, 연방총리, 연방의회가 있었다(집단 대통령직은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뒤 구성됨). 또한,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각 공화국과 자치주의 공산주의자 동맹 총서기가 중요했다.

엄격하게 통제되는 시스템의 첫 균열은 베오그라드와 몇몇 대도시의 학생들이 1968년 세계적인 시위에 참여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일부 학생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학생들이 옳다"고 말하면서 시위를 점차 중단시켰다. 하지만 다음 해, 그는 대학과 공산당에서 시위자들을 해고함으로써 시위 지도자들을 처리하였다.

더 심각한 불복종의 징후는 1970년과 1971년의 크로아티아의 봄이었다. 자그레브의 학생들은 더 큰 시민 자유와 크로아티아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하였고,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정권은 대중의 항의를 억누르고 지도자들을 투옥시켰지만, 당내의 많은 크로아티아 주요 대표들은 국가 재건을 위해 당내에서 로비하며 묵묵히 이 대의를 지지하였다. 그 결과 1974년, 새로운 헌법이 비준되어 유고슬라비아의 개별 공화국과 세르비아의 각 지방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였다.

1974년,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이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뿐만 아니라,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메토히야(당시 지방의 지위였음)는 알바니아어와 헝가리어가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소수 언어가 되고, 자치주로 승격될 정도로 큰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보크로아트어는 베오그라드와 자그레브의 기준이 아닌 현지인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형태로 바뀌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인정된 소수 민족은 헝가리인과 이탈리아인이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는 세르비아의 일부였지만, 이들 자치주도 연방의 일부를 형성하여 중앙세르비아의 의회가 아닌 자치주를 대표하는 공동 의회를 갖는 독특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1980년대 말 공산주의의 붕괴로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자 유고슬라비아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87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 1991년 9월 8일: 국민투표에 따라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 1991년 10월 8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분리에 대한 7월 9일 모라토리엄이 종료되고,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 의회에서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이 날은 크로아티아의 독립기념일이다.)
  • 1992년 4월 6일: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독립을 완전히 승인하였다.
  • 1992년 4월 28일: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성립되었다.
  • 1995년 12월 14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크로아티아의 지도자들이 데이턴 협정에 서명하였다.
  • 2006년 5월, 몬테네그로 독립 국민투표가 통과되면서, 2006년 6월 몬테네그로는 독립국이 되었으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해체되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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