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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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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제의 유물 - 백제금동대향로
고구려 항아리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유물(遺物, Relic)은 과거 인류의 잔존물로, 유적에 비해 작고, 운반이 가능한 것들을 일컫는다. 유물은 조상들이 남긴 공예품이나 서적 등으로, 선사시대의 청동거울이나 조선 시대의 도자기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 유적은 유물과 혼동되는 용어 중 하나인데, 이는 조상들이 남긴 건물이나 건축물 등을 가리킨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나 보물 1호인 흥인지문이 유적에 속한다. 문화재는 유물과 유적 중에 역사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판단되어 지정된 것이며, 개인 등이 가진 유물이나 유적은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가치가 인정되면 절차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유물이나 유적을 문화재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문화재에는 유물과 유적만 있는 것은 아니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탈춤이나 판소리 등도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 문화재로 지정되게 된다.

유물은 도구나 예술 작품, 특히 고고학적 관심 대상과 같이 인간이 만들거나 모양을 부여한 항목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다. 고고학에서 이 단어는 특정 뉘앙스의 용어가 되었으며 고고학적 노력에 의해 회수된 대상으로 정의되며 문화적 관심을 갖는 문화적 유물일 수 있다.

유물은 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어인 반면, 박물관에서는 이와 동등한 일반 용어가 일반적으로 오브젝트(object)이고 미술사에서는 예술품 또는 조각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용어이다. 동일한 항목이 다른 맥락에서 모두 또는 이들 중 일부로 불릴 수 있으며 개별 개체 또는 유사한 개체 그룹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된다.

유물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때로는 생태 사실 및 기능과 혼동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때때로 고고학 유적지에서 함께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동하는 프로세스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컨텍스트에 존재할 수 있다. 유물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과학적 고고학을 통한 유물 분석 과정은 유물의 약탈과 수집에 의해 방해를 받을 수 있어 윤리적 논쟁을 촉발시킨다.

개요[편집]

유물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움직일 수 있는 잔존물이다. 유물은 과거의 인간들이 살아나가면서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도구로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얻어지며 이를 연구실로 옮겨 복원·정리된다. 유물은 재질에 따라 석기·토기·골기·목기·청동기·철기 등으로, 기능에 따라 가락바퀴·그물추·칼·화살촉·창·검·방울 등으로, 그리고 제작방법이나 형태 등에 의해서도 나누어진다. 유물의 연구는 형식분류, 과학적 분석 등을 통해 각각의 기능과 성격이 파악되며 이를 다른 지역과 비교함으로써 각 지역별 문화적 특성을 알 수 있다.

유물에는 당시의 도구로 사용된 인공유물(人工遺物, artifact) 이외에도 자연유물(自然遺物, ecofact)이 있다. 자연유물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직접 만들어지거나 변형되지 않았지만 과거 인간들의 활동에 관한 많은 지식을 제공한다. 자연유물에는 동물뼈·조개류와 같은 동물자료, 화분·씨앗 등의 식물자료, 그리고 토양과 같은 지질학적 자료 등이 있어 이들의 분석을 통해 과거의 환경, 식생, 자원 등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인공유물과 자연유물의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있다. 즉 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변형된 동물뼈(뒤지게, 골화살촉 등)가 있는데 이는 양쪽에 모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고고학이 성립될 당시에는 유물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지금은 유물뿐만 아니라 유구, 유적 등 고고학적 자료들 모두가 중요시되고 있어 그 비중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게는 여전히 유물이 귀중한 연구대상이다.

유물의 발굴[편집]

뉴스나 신문을 보면 '백제시대 유물 발굴'과 같은 기사를 가끔 볼 수 있다. 이처럼 유물이나 유적은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굴되기도 하고, 원래에 있던 문화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굴되기도 한다. 여기서 발굴은 땅 속이나 흙더미, 돌더미 등에 파묻힌 것을 찾아서 파낸다는 뜻이며, 체계적인 과정과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유물 발굴지인 서울의 풍납동 토성은 초기 백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인데, 1925년 한국에 있었던 대홍수로 그 모습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그러나 초기에는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1997년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땅을 파면서 그 안에 있던 유적과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건설이 중단되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은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조심스럽게 땅을 파헤쳐, 유물이나 유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호미나 붓 같은 작은 도구들로 섬세히 작업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추후 연구에 어려움이 없도록 사진과 동영상, 발굴일지에 하나하나 기록하게 되며, 최대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발굴하고, 발굴한 유물은 다시 연구실 등으로 옮겨져 체계적인 연구와 분석을 진행하게 된다. 이후에도 더 연구할 수 있거나 보존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발굴 현장은 최대한 원래 모습이 훼손되지 않게 보호하며, 사정이 있어 현장을 보존할 수 없는 경우는 발굴할 때의 사진과 기록 등을 참고하여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보존하면서 이동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유적이나 유물이 묻힌 곳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기 때문에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풍납동 토성의 경우 발굴과정에서 발굴단과 지역 주민 사이에 마찰이 있기도 하였으며, 경주에서는 자신 소유의 땅이어도 마음대로 집을 짓거나 개발하는데 제한이 있어 땅 주인들이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렇게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은 지역 주민이나 그 지역, 국가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양보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인 문화재 발굴, 보존 원칙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1]

고구려 유물[편집]

고구려 유물 - 금동관

유물이 출토되는 고구려의 고분은 구조상 도굴이 쉬운 탓에 많은 유물이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발굴을 명분으로 많은 유적이 파괴됐다. 고구려 유물은 다양한 종류의 금동공예품과 토기를 비롯한 기와·벽돌 등 소조품, 각종 철기 및 청동기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토기는 고구려 유물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시간적·공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 토기는 바닥이 납작한 평저기(平底器)가 많고, 고운 점토로 된 니질(泥質) 태토가 많으며, 표면색조는 황색·흑색·회색이 주를 이룬다.

철기는 무기류와 마구류, 농공구류 및 용기류로 구분되는데 각각의 기능에 따라 서로 다른 재질의 철기를 사용하였으며, 제작 기법도 다양하다. 철제 무기와 마구의 발달은 전력의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기병전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금동공예의 대표적인 것으로 금동관(金銅冠) 및 관장식을 들 수 있다. 불꽃무늬맞새김금동관(火焰文透彫金銅冠)은 인동(忍冬)무늬를 맞새김한 테두리 위에 아홉 개의 불꽃무늬를 세워 장식하였으며, 테두리의 양쪽에는 옷고름과 같은 모양의 드리개 장식을 두 개 늘어뜨렸다.

고구려의 불상은 5~6점에 불과하지만 제작 연대와 제작 동기 등을 기록한 명문이 남아있는 예가 많아 중요하다.

고구려는 백제신라보다 먼저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국내성(國內城) 도읍기에 이미 기와제작기술을 받아들여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을 축조했다. 기와의 종류는 암키와, 수키와, 그리고 막새기와(瓦當)·반쪽막새기와(半瓦當)·치미기와(鴟尾) 등 다양하다.[2]

1000억원 짜리 유물[편집]

사트하토르이우네트의 펜던트
세켐카의 석상

'사트하토르이우네트의 펜던트'라고 하는 이 유물은 센우스레트 2세(재위 기원전 1897-1878년)라고 하는 중왕국 시대 파라오의 즉위명이 쓰여져 있는 '목걸이+펜던트'로, 1914년 센우스레트 2세의 딸인 사트하토르이우네트 공주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이때의 발굴은 플린더스 패트리와 가이 버튼이 맡았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 유물은 말 그대로 최고 수준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다양한 상징들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 첨부한 사진을 참고하자.

바로 이 목걸이를 ❬어쎄신 크리드 오리진❭이라는 게임 속에서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목에 걸고 있었다. 실재하는 목걸이를 게임 속에 구현한 것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건 고증 오류라고도 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대략 18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대의 목걸이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목걸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생전 동안에는 물론이고, 20세기 초반까지 무덤 속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 목걸이를 목에 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목걸이를 1000억원이 호가할 것이라고 추정한데는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

나름의 기준으로 삼은 구체적인 사례는, 2014년에 영국의 노스헴턴 박물관이 반쯤은 불법적으로 거래한 세켐카의 석상이다. 이 석상은 옥션에서 신원미상의 누군가에게 1530만 파운드, 그러니깐 당시 환율로는 300억원이 넘고 최근 환율로는 230억원 정도인 가격에 팔렸다. 이 석상의 경우에는 간단한 명문이 있어서 석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인이 가능하지만, 발굴을 통해서 입수된 유물은 아니라 유물의 정확한 출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고왕국 시대의 작품이라는 메리트는 있겠지만(일단 오래된 것이니깐, 5왕조 시대의 것이니 대략 기원전 2400년대 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석상의 학술적 가치는 아주 높은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런 석상 조차도 공식적으로 거래된 이집트 유물들 가운데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물론 최근에는 퀄리티 좋은 이집트 유물이 공개적으로 거래되는 사례 자체가 거의 없기는 하다.

저 정도의 유물, 거기에 출처도 분명하지 않고 미학적 완성도도 높지 않으며 그저 중급 귀족 정도와 관련이 있는 유물도 300억원인데, 사진 속 '목걸이+팬던트'는,

  • 파라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물건이고,
  • 황금과 준보석류로 만들어져 있어서 재료 자체의 값어치도 매우 높으며,
  • 미학적 완성도도 높다,
  • 거기에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 유물인 만큼,

그 가치는 사실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어려운 정도다. 그런 만큼, 당연히 그럴리는 없겠지만 (그래서도 안되고), 만약에라도 이 유물이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유명 옥션에 나온다면, 최소한 저 세켐카의 석상보다는 3-4배는 더 가격이 나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명 미술작품들, 피카소나 다빈치 등의 작품들이 3-4천억, 심지어는 5천억에도 팔리는 것을 보면 1천억원 정도는 가뿐이 넘을 것도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같은 건 조단위의 가격으로 팔릴지도…. 이 유물은 현재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대한민국 교육부, 〈유물, 유적의 발굴〉, 《티스토리》, 2015-08-05
  2.  〈고구려 유물〉,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4-09-01
  3. 곽민수 연구위원, 〈아무도 관심 없을 이집트 유물 이야기 #3 : 1000억원 짜리 유물〉, 《고대문명연구소》, 2020-10-0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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