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편집하기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아이디(ID)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편집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저장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1번째 줄: 1번째 줄:
 
{{레반트 위치 지도}}
 
{{레반트 위치 지도}}
 
[[파일:이스라엘 위치.png|썸네일|300픽셀|'''이스라엘'''(히브리어: ישראל, 아랍어: إسرائيل 이스라일, 영어: Israel) 위치]]
 
[[파일:이스라엘 위치.png|썸네일|300픽셀|'''이스라엘'''(히브리어: ישראל, 아랍어: إسرائيل 이스라일, 영어: Israel) 위치]]
[[파일:예루살렘.jpg|썸네일|300픽셀|예루살렘]]
 
 
[[파일:텔아비브.jpg|썸네일|300픽셀|텔아비브]]
 
[[파일:텔아비브.jpg|썸네일|300픽셀|텔아비브]]
 
[[파일:하이파.jpg|썸네일|300픽셀|하이파]]
 
[[파일:하이파.jpg|썸네일|300픽셀|하이파]]
106번째 줄: 105번째 줄:
  
 
== 역사 ==
 
== 역사 ==
[[파일: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png|썸네일|300픽셀|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
 
 
유대민족의 역사는 기원전 17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중 2천 년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으로 돌아와 야훼 신앙을 확립했다. 기원전 11세기에 건국된 이스라엘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가 각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차례대로 멸망하면서 유대인의 이산이 시작되었다. 영국위임통치기에 서서히 유대인의 유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이 선포된 직후 전 세계에 이산되어 있던 상당수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유대민족의 역사는 기원전 17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중 2천 년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으로 돌아와 야훼 신앙을 확립했다. 기원전 11세기에 건국된 이스라엘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가 각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차례대로 멸망하면서 유대인의 이산이 시작되었다. 영국위임통치기에 서서히 유대인의 유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이 선포된 직후 전 세계에 이산되어 있던 상당수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 고대 및 중세 ===
 
=== 고대 및 중세 ===
114번째 줄: 112번째 줄:
  
 
기원전 538년 바빌론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와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 후 4세기 동안 페르시아(기원전 538~333),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32~142), 하몬스 왕조(기원전 142~63)의 지배를 받았으며, 비교적 정치적 통합 하에 유대인의 생활은 풍요로운 편이었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와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 후 4세기 동안 페르시아(기원전 538~333),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32~142), 하몬스 왕조(기원전 142~63)의 지배를 받았으며, 비교적 정치적 통합 하에 유대인의 생활은 풍요로운 편이었다.
 
====  로마의 지배와 아랍의 통치 ====
 
[[파일:예루살렘 공방전(1099년).jpg|썸네일|300픽셀|예루살렘 공방전(1099년)]]
 
로마 지배기인 기원전 63에서 313년 사이에는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가 함락됨으로써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4세기 말 비잔틴 제국 창건으로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화가 되었다가(313~636), 614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잠시 해방되었으나 비잔틴 군대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여 유대인은 다시 추방되었다.
 
 
636년에서 1099년 사이에 4세기 동안은 아랍이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여 예루살렘에 '바위 사원'을 세웠다. 이스라엘 땅은 12-13세기에 아랍과 십자군에게 번갈아 점령되다가 1517년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 뒤 이집트 무하마드 알리의 통치를 받다가 1840년부터 1917년 사이에 다시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 근현대 ===
 
=== 근현대 ===
[[파일: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을 선포하는 다비드 벤구리온.jpg|썸네일|300픽셀|left|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을 선포하는 다비드 벤구리온]]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7년 11월 2일 영국이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을 발표하면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했으며, 1918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 1920년에 위임통치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유럽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독특한 공동체 조합 형태의 농촌 거주집단인 키부츠와 모샤브를 세우고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는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시온주의 운동이 급속히 전개되면서 유대인의 이주가 급증했고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7년 11월 2일 영국이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을 발표하면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했으며, 1918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 1920년에 위임통치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유럽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독특한 공동체 조합 형태의 농촌 거주집단인 키부츠와 모샤브를 세우고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는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시온주의 운동이 급속히 전개되면서 유대인의 이주가 급증했고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147번째 줄: 138번째 줄:
  
 
1991년 걸프전 당시 PLO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지원했다. 대중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격을 자제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1991년 걸프전 당시 PLO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지원했다. 대중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격을 자제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파일:시몬 페레스 (왼쪽)와 이츠하크 라빈 (가운데),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오른쪽).jpg|썸네일|300픽셀|시몬 페레스 (왼쪽)와 이츠하크 라빈 (가운데),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오른쪽),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에 서명하기 전.]]
+
[[파일:File.png|썸네일|300픽셀|시몬 페레스 (왼쪽)와 이츠하크 라빈 (가운데),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오른쪽),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에 서명하기 전.]]
[[파일:디스코텍 학살현장.jpg|썸네일|300픽셀|이스라엘인 21명이 사망한 2001년 텔아비브 돌핀리움 디스코텍 학살 현장.]]
+
[[파일:File.png|썸네일|300픽셀|설명]]
 
1992년, [[이츠하크 라빈]]은 그의 당이 이스라엘의 이웃 국가들과의 타협을 촉구한 선거에 이어 총리가 되었다. 이듬해 이스라엘 대표 [[시몬 페레스]]와 PLO 대표 [[마흐무드 압바스]]는 오슬로 협정에 서명하여 팔레스타인 국가 당국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일부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PLO는 또한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테러리즘 종식을 약속했다.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두 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이스라엘 정착촌과 검문소의 지속과 경제 상황의 악화로 이 협정에 대한 아랍인들의 지지는 타격을 입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자살 공격으로 인해 협정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중의 지지는 시들해졌다.1995년 11월, 이츠하크 라빈은 협정에 반대했던 극우 유대인 이갈 아미르에 의해 평화 집회를 떠났다가 암살당했다.
 
1992년, [[이츠하크 라빈]]은 그의 당이 이스라엘의 이웃 국가들과의 타협을 촉구한 선거에 이어 총리가 되었다. 이듬해 이스라엘 대표 [[시몬 페레스]]와 PLO 대표 [[마흐무드 압바스]]는 오슬로 협정에 서명하여 팔레스타인 국가 당국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일부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PLO는 또한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테러리즘 종식을 약속했다.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두 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이스라엘 정착촌과 검문소의 지속과 경제 상황의 악화로 이 협정에 대한 아랍인들의 지지는 타격을 입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자살 공격으로 인해 협정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중의 지지는 시들해졌다.1995년 11월, 이츠하크 라빈은 협정에 반대했던 극우 유대인 이갈 아미르에 의해 평화 집회를 떠났다가 암살당했다.
  

해시넷에서의 모든 기여는 다른 기여자가 편집, 수정, 삭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해시넷:저작권 문서를 보세요).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