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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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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아랍어: مِصْر 미스르, 이집트 아랍어: مَصْر 마스르, 콥트어: Ⲭⲏⲙⲓ 키미, 영어: Egypt) 위치
카이로의 전경
기자
기자의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
카이로의 이븐 툴룬 모스크

이집트(아랍어: مِصْر 미스르, 이집트 아랍어: مَصْر 마스르, 콥트어: Ⲭⲏⲙⲓ 키미, 영어: Egypt)는 북아프리카서아시아시나이반도에 결쳐 있는 아랍 국가이자 지중해와 홍해의 연안국이다. 정식 명칭은 이집트 아랍 공화국(아랍어: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 이집트 아랍어: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굼후리야트 마스르 알아라비야, 영어 :Arab Republic of Egypt)이다. 시나이 반도를 통해 가자 지구이스라엘을 접하며 중동으로도 분류된다. 또한 리비아수단의 접경국이다. 수도는 카이로이다.

1882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 보호를 이유로 이집트 정부를 장악하였다. 1922년 이집트 왕국으로서 부분적으로 독립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운동과 반영국운동이 격화하면서 완전한 주권을 찾았다.

개요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에 의해 형성된 육교를 통해 아프리카 북동쪽과 아시아 남서쪽까지 걸쳐 있는 대륙 횡단 국가이다. 고대문명 발상지로, 16세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오늘날 아랍과 중동지역에서 정치적·문화적인 중심국가를 이룬다. 아랍에서는 '2개 해협' 또는 '국가'라는 뜻의 아랍어(語)인 '미스르(Misr)'라는 국명으로 부르며 현지 발음으로는 '마스르'라고도 한다.

이집트는 그 어떠한 국가들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약 5,000여 년 전부터 나일강가에서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30세기에 이르자 고대 이집트 문명은 문자, 농업, 도시화, 종교, 정부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대 타 지역에 비하여 압도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풍요로운 시대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이집트에 기자의 피라미드대스핑크스가 세워졌으며, 멤피스, 테베, 카르나크, 왕가의 계곡 같은 위대한 유산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후 이집트 문명은 점차 쇠퇴를 거듭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로마인, 아랍인, 오스만인, 누비아인들이 연이어 이집트를 침투하며 지배하였다. 이집트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으나,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며 점차 무슬림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며 7세기 경에 이르자 확실한 이슬람 국가로 돌아섰다.

현대 이집트의 역사는 1922년 경, 이집트가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는 독립 후 공화국을 세웠고, 1958년에는 시리아와 함께 아랍연합공화국을 세웠으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1961년에 소멸하였다. 이후 20세기 후반 내내 이집트는 극심한 종교적,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고,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에는 연이어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반복하며 가자 지구를 강제 점령하기도 하였다. 1978년에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가자 지구에서 물러났고, 이스라엘을 공인하며 평화 분위기를 붇돋았다. 그러나 이집트는 현재까지도 정치적 불안정을 거듭하고 있는데, 2011년 아랍의 봄 사태나 지속된 테러 사태, 경제불황 등 지속되는 악재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계속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는 현재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인권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집트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국어는 아랍어이다. 이집트는 1억 명이 넘는 인구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나이지리아와 에티오피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고 세계적으로도 13번째로 인구가 많다. 거의 대부분의 인구는 나일강 유역에 모여 살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나일 유역이 이집트 전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국토는 대부분이 척박한 사하라 사막에 속해있고,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다. 대략 절반의 인구가 도심지에 몰려 살고 있으며, 특히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나일강 삼각지의 대도시들에 산다.

이집트는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 세계에서 지역 강국 정도로 평가받는다. 중동에서 경제적으로도 규모가 큰 편이며 그 재원도 다양화되어 있으며, 그 잠재력이 상당하여 21세기에는 세계적으로도 발전이 주목되는 국가로 꼽히기도 한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에서 3번째로 거대한 경제규모를 보유하고 있으며, 명목 GDP로는 40번째, PPP로는 19번째로 거대한 경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는 UN의 창립 회원국이며, 아랍연맹, 아프리카 연합, 이슬람협력기구의 창립국이기도 하다.

국가 상징

국호

이집트의 정식 국호는 미스르 아랍 공화국(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이다. 이를 이집트의 공용어인 표준 아랍어로는 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Jumhūriyyat Miṣr al-ʿArabiyya), 이집트 아랍어로는 곰호레이예트 마스르 엘아라베이야(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ه / Gomhoreyyet Maṣr el-ʿArabeyya)로 읽는다. 국호상의 '아랍'은 과거 아랍 연합 공화국의 흔적이다. 이집트 왕국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수립됐던 1953년 당시에는 이집트 공화국(جمهورية مصر)이었는데, 공화정 수립의 주역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는 강경한 아랍 민족주의자로 아랍 전역의 통합을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시리아 제2공화국을 가맹시킨 뒤 아랍 연합 공화국으로 국호를 개칭했다. 나중에 시리아가 떨어져 나가면서 아랍 연합 공화국은 와해되지만 이집트는 계속 이 국호를 고수했다. 나세르가 죽은 뒤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다시 국호를 이집트로 환원하면서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이어 1971년 9월 2일에 국호를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라 했다. 현 시리아의 정식 국호와 국기 역시 연합 공화국 당시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어권에서는 이집트로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영어에서 유래한 외래지명이고 아랍어 토착지명은 미스르(مِصْر / Miṣr) 혹은 마스르(مَصْر‎ / Maṣr)라 한다. 셈어파 언어에서 이 어근 므스르( م ص ر‎ / m-ṣ-r)는 '지협·해협', '구역', '대도시', '문명'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중 대도시나 문명의 뜻으로 쓰였다면, 아주 옛날 이집트가 독보적인 문명으로 보였을 인근 셈족의 인식을 반영한다고 풀이해볼 수 있겠지만 이는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다른 셈어파 언어인 히브리어에서는 쌍수형 미츠라임(מִצְרָ֫יִם / Mitsráyim)의 형태로 쓰인다. 이것에 대해선 고대 이집트가 상이집트(나일강 상류), 하이집트(나일강 하류)로 나뉘어져 있던 것에 기인했으리라는 추정이 일반적이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검다'는 뜻을 가진 켐(kem)의 여성형 명사형인 케메트(Kemet)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자음 뿐인 이집트 문자 𓆎𓅓𓏏𓊖(km.t)를 현대 학자들이 읽을 때 편의상 모음을 e로 읽는 관행에 따른 표기로 당대 이집트어 발음과 차이가 있다. 쐐기 문자 등과의 대조를 통해 신왕국 이전까지 [ˈkuːmat](쿠마트)로 조음했을 것이라 본다.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후손인 콥트어로는 케머(Ⲭⲏⲙⲓ [ˈkʰeːmə] 또는 Ⲕⲏⲙⲉ [ˈkeːmə])라고 부른다. 당시 이집트에서 나일강이 범람하게 되면 상류에서 기름진 토양이 쓸려 내려왔는데 이 토양의 색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명칭인 이집트(Egypt [ˈiː.d͡ʒɪpt])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귑토스(Αἴγυπτος, 현대 그리스어로 에입토스·Αίγυπτος)의 라틴어 표기인 아이귑투스(Aegyptus, 교회 라틴어로 에집투스)가 중세 프랑스어 단어인 에집트(Egypte, 현대 프랑스어로 Égypte)의 형태를 거쳐 영국식 영어로 유입된 단어이다. 독일어로는 에귑텐(Ägypten·Aegypten)이라고 부른다. 이집트학계에서는 고전 이집트어로 '프타의 영혼, 카의 집'을 의미하는 ḥwt-kꜣ-ptḥ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한다. 지리학자 스트라본(Στράβων, 기원전 63/64년~기원후 24년경)은 이집트가 에게해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그리스 남쪽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그리스어 아이귑토스는 '에게해 아래'를 뜻하는 표현 아이가이우 휩티오스(Αἰγαίου ὑπτίως)가 한 단어로 축약된 것이라고 보았으나 이는 민간어원설로 여겨진다.

오래전의 가톨릭 성경에는 애급(埃及)이라는 이름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이집트의 한자 음차 표기이다. 출애급기(出埃及記)의 출애급 역시 이집트에서 나간다는 뜻이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표기가 변형된 애굽으로 사용돼 왔다. 1977년 출간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제목인 출애굽기에 한해서 애굽, 본문 내용상에서는 에집트라는 표기가 사용됐다. 이후 2005년에 출간된 가톨릭 새번역 성경에서는 출애굽기가 탈출기로, 에집트는 표준어인 이집트로 수정됐다. 반면 개신교 성경에서는 여전히 애굽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국기

이집트 국기
이집트 국장

현재의 국기(1984~) 기존에 사용하던 쿠라이시의 매 문장을 폐기하고 1984년 살라흐 앗딘의 독수리 국장을 새 국장으로 제정하고, 새 국장이 새겨진 새 국기를 채택하여 지금 현재까지도 사용 중이다.

이집트의 국기는 위로부터 빨간색·하얀색·검은색 가로 줄무늬의 3색기이며 가운데에는 살라딘의 수리라고 부르는 금색 이집트의 국장이 새겨져 있다.

빨강은 혁명과 투쟁에 의한 피를, 하양은 평화와 밝은 미래를, 검정은 칼리프 시대의 영광과 지난날의 암흑 시대를 상징한다. 비율은 2:3이다.

국장

이집트의 국장은 1984년에 제정되었다. 현재의 국장은 1958년부터 1971년까지 사용된 아랍 연합 공화국의 국장의 가운데에 그려진 방패에 그려져 있었던 두 개의 초록색 별 디자인을 제거한 형태의 디자인이다.

살라딘의 수리라고 부르는 금색 독수리 모양의 디자인 가운데에는 이집트의 국기를 구성하는 색인 빨간색, 하얀색, 검은색 세로 줄무늬가 그려진 방패가 그려져 있다. 독수리의 발톱 아래에 있는 두루마리에는 이집트의 공식 명칭인 "이집트 아랍 공화국"("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Gumhūriyyat Miṣr al-ʿArabiyyah")이 아랍어로 쓰여져 있다.

아랍 공화국 연방 시절이었던 1971년부터 1984년까지는 쿠라이시의 매라고 부르는 금색 매 모양의 디자인을 한 국장을 사용하였다.

국가

국가는 بلادي لك حبي و فؤادي (나의 조국, 나의 사랑과 마음은 그대를 위해)이다. 이 국가는 모하메드 유니스 알카디가 작사하고 사예드 다위시가 작곡했으며 1979년에 국가로 지정되었다.

지리

이집트의 나일강

이집트는 지중해와 인근하여 가자 지구를 통하여 팔레스타인과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이스라엘이 있다. 동쪽으로는 아카바만홍해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리비아가 있다. 아카바 만을 건너서는 요르단이 있으며, 홍해를 사이에 두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마주보고 있다. 또한 지중해를 건너서는 그리스, 터키, 키프로스 등과 마주하고 있기도 하다.

이집트는 면적이 100만1450 km²로, 전 세계에서 38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이는 중앙 아메리카 전역과 비슷한 넓이이며, 스페인의 2배, 영국의 4.1배, 미국 텍사스주와 캘리포니아주를 합한 크기와 비슷하다.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10배, 한반도의 4.5배 정도의 크기이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때문이 인구는 좁은 나일강 계곡과 삼각주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의 약 99%가 국토 면적의 5.5%에 집중되어 있다.

이집트는 서쪽에는 리비아, 남쪽에는 수단, 동쪽에는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과 접하고 있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두 대륙 사이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에는 수에즈 지협이 있으며, 이곳 수에즈 운하를 통해 홍해를 사이로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한다.

나일강 유역 외에 이집트 국토 경관의 대부분은 사막이다. 바람 때문에 높이 30m가 넘는 사구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집트는 사하라 사막과 리비아 사막의 일부에 속한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이들 사막은 "붉은 땅"으로 불렸으며, 서쪽의 위협에서 파라오의 고대 왕국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최저 해면하 134m의 카타라 저지와 거기에서 칼가를 통과하여 아스완에까지 이르는 대상 저지를 제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표고 200m 이상의 대지 또는 산지이다. 시나이반도에서 홍해 연안에 이르는 산지는 아프리카 지구대(地溝帶)에 연해 있다. 북서부에는 리비아 고원, 남서부에는 케빌 고원이 있다.

이집트의 도시로는 고대부터 대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아스완, 아시우트, 수도 카이로, 엘 마할라, 엘 쿠브라, 쿠푸의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 후르가다, 룩소르, 콤 옴보, 포트 사파가, 포트 사이드, 샴 엘 셰이크, 운하가 있는 수에즈, 자가지그, 알 미냐가 있다. 오아시스로는 바하리야, 엘 다클라, 파라프라, 엘 카르가, 시와가 있다. 보호 지역으로는 라스 모하메드 국립공원, 자라니크 보호구역, 시와가 있다.

지형

이집트의 지형은 국토의 면적에 비해 단순하다. 나일강 하곡(河谷)과 그 유역의 삼각주평야, 수에즈 운하 연안, 이곳을 제외한 넓은 사막지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나일강 하곡과 삼각주평야를 형성하는 나일강은 상류의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한 청(靑)나일과 아프리카 중동부 빅토리아호(湖)에서 발원한 백(白)나일에 합류하여 6,671km를 흘러 지중해로 유입하는 대하천이다. 아스완 이하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는 외래하천(外來河川)으로 그 지류의 대부분이 이집트 국내에 있다. 이 하천의 상류부는 여러 군데의 급경사를 이루면서 흐른다.

아스완에서 카이로까지는 양측에 사막으로 된 절벽을 끼고 너비 3~25km의 좁은 지역의 충적지 가운데를 띠[帶] 모양의 하천이 흘러간다. 카이로에서 그 하류 일대에 걸쳐 약 2만 4000㎢의 면적을 가진 대삼각주평야가 전개된다. 이 삼각주평야는 이 하천이 운반·퇴적한 물질로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하며, 퇴적층이 매우 두꺼운데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시추결과는 163m에도 기저(基底)의 암반에 달하지 못했다. 이 삼각주평야와 나일강 하곡평야는 곡창지대를 이루는 인구조밀지역이다.

하천 유수량의 조절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하천 유수량의 연변화(年變化)가 하안의 충적지에서 살고 있는 이집트인들에게 많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그 위협은 사라졌다. 아스완 남쪽으로 인공호인 나세르호가 생겨 이 인공호의 물을 이용하여 사막지방의 관개를 통한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나일강은 농경을 하는 농부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생명선이 되는 젖줄이다. 나일강 동쪽에 마자 고원과 갈랠라·키블리아 산지 등이 발달해 있다.

이 곳은 결정질(結晶質)의 암석과 석회암으로 된 단조로운 고원과 대지가 남쪽의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연이어 발달해 있다. 이 고원의 남부에 하마타 산지(1,977m)가 남서쪽을 향해서 점차로 높아져 해발고도 1,900m 정도에 이른다. 홍해안 쪽은 바다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해안을 따라서 가느다란 해안평야가 발달해 있다. 홍해의 수에즈만(灣)과 아카바만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시나이 반도가 있다. 이 반도는 남으로 갈수록 높아져서 카트리나산(2,637m)에 이르러 최고점이 된다.

사막과 암산으로 된 불모의 지역이기는 하나 석유자원의 매장으로 이집트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시나이 반도와 본토 사이의 수에즈 지협의 저지대에는 한무리의 호소들이 발달해 있다. 수에즈 운하는 이 호소들을 연결해서 굴착하여 만든 것이다. 나일강의 서쪽은 인간이 살기에는 어려운 사막이다. 파이윰 저지·카타라 저지 등에 분포한 오아시스들을 제외하면 거의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하다.

이들 저지에서는 석회암의 틈을 따라서 곳곳에 지하수가 용출하여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물 이외에도 샘을 파서 오아시스 관개농업에 이용한다. 집약적인 농경지가 발달하여 인구밀도가 높다. 바하리야·파라피라·다흘라·하르가·시와 등 5개의 오아시스가 유명하며 1600년경부터 이집트인에 의해 농경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기후

하얀 사막, 파라프라

이집트의 기후는 대부분의 지역이 건조기후에 속한다. 북회귀선이 이 나라의 남부를 지나고, 북부의 지중해연안은 대체로 북위 31°30'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일강 계곡과 지중해 연안의 좁은 해안지방을 제외하면 전국이 사막기후가 된다. 내륙으로 갈수록 건조가 심해지고 기온이 높아진다. 서부나 남부지방에서는 수년간 비가 오지 않은 지역도 있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겨울에 약간의 비가 내리는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기온도 1년을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로 나누고 있다. 4~10월은 고온이며 공기가 건조한 하계(夏季)이고, 11~3월의 동계(冬季)에는 낮에는 덥고 야간에는 서늘하다.

또한 환절기에는 남쪽에서 저기압이 진행되어 모래를 동반한 열풍이 내습해온다. 이것이 유명한 캄신이라는 바람이며 때로는 40℃ 이상의 고온을 몰고오는 남서의 열풍이다. 동계에는 지중해 방면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비를 다소 내리며 그 영향은 대체로 나일강 삼각주와 해안의 좁은 범위에 미치는 데 불과하다. 연강수량 100mm 이상이 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거의 비가 없는 지대로서 나일강의 혜택으로 관개 용수의 편의를 얻을 수 없는 곳은 곧 불모의 사막인 것이다. 기온의 교차가 매우 심하고 여름에는 사막에서 낮에 50℃ 이상의 극단적인 고온현상이 나타난다.

역사

이집트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풍요로운 나일강 제방과 나일강 삼각주 지역을 가지고 있다. 이 지역의 엄청난 농업 생산량으로 인해 이집트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헤게모니를 누려왔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대부분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로제타석이 발견되어 신성문자가 해독됨으로써 고대 이집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수 있었다.

플라이스토세에 서방의 대지 위에서 살던 사람들이 홀로세가 되어 사막화가 시작되자 나일 하곡에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 토지생산성이 높은 나일의 하곡 지방에서 이집트 문명이 개화하고, 유사시대에 들어와서는 30개의 왕조가 흥망했다. 기원전 321년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이 있었고, 그후에는 그리스인, 러시아인의 침입이 있었다. 7세기에는 아랍인이 침입하는 등 외침의 역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아랍인의 오랜 지배로 이집트는 아랍화어 이슬람 문화권에 끌려들어갔다. 19세기말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 있을 때 유럽군이 침입했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군이 들어왔고, 이어 프랑스군과 대항하는 영국 세력이 들어와 터키로부터 독립한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성립시켰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이집트의 전략적, 경제적 중요성이 더해져 1914년에는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형식적인 독립을 인정했으나 실질적인 점령상태는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제1차 중동 전쟁때 패인은 왕과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국민에게 절감시켜, 끝내 1952년 7월 23일에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것이 1952년 이집트 혁명의 시초가 된다.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 정권이 발족하면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세르 정권하에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영국군의 철수, 토지개혁 등이 단행되었다. 1958년 시리아와의 합병으로 나세르 아랍권 통일 구상의 첫단계인 아랍 연합 공화국이 발족했으나 3년 반 후 시리아는 분리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제3차 중동 전쟁에서 패해 시나이반도가자지구가 점령당했다. 1970년 대통령직을 승계한 안와르 사다트는 제4차 중동 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이스라엘 정책을 수정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82년에는 사다트의 평화노선을 계승한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시나이 반도를 반환받았다. 무바라크는 30년 가량 장기 집권하다가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일어난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인해 자진 사임한다.

선사시대와 고대 이집트

스핑크스와 기자의 대피라미드. 둘 다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작품이다.

나일강 유역에 있는 유적들을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이집트 지역에 인류가 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수렵채집인들과 어로인들은 점차 밀을 재배해는 농부들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8000년 경에 급격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며 기존의 농경지가 메말라붙고 거대한 사막으로 변해버리자 살아남은 농부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웠던 나일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도시를 세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6000년 경, 나일 계곡에 신석기가 도래하였다. 신석기 시대에 점차 부락들이 왕국의 형태를 띠며 독자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고, 크게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로 나뉘었다. 이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는 끊임없이 팽창했고, 결국 충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상이집트의 메네스 왕이 기원전 3150년 경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전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집트의 문화는 메네스 왕 이후 약 3,000여 년 동안 번성하였고, 동시대 전세계의 그 어떠한 곳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일 정도로 풍요로운 문명을 꽃피우며 국력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통일 후 찾아온 고왕국 시대는 기원전 2700년부터 220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때 기자의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여러 피라미드들이 대규모로 건축되었다.

이집트 제1중간기는 고왕국 시대가 끝나고 여러 세력들이 난립하며 다투던 혼란기로 약 1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혼란기도 결국 끝났고, 기원전 2040년 경에 새롭게 세워진 중왕국 시대에 들어서 이집트는 또다시 번성을 맞는다. 특히 아메넴하트 3세의 재위기에는 이전의 그 어떠한 파라오의 재위기에도 이루지 못한 전성기를 맞으며 국력의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중왕국은 외부에서 힉소스인들이 쳐들어오면서 그 끝을 맞았고, 힉소스인들은 나일강 하류 대부분을 정복하고 아바리스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도 아흐모세 1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에 의해 쫒겨 났고, 아흐모세 1세는 제18왕조를 개창하고 수도를 멤피스에서 테베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1550년부터 1070년까지 지속된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는 국력의 정점을 찍으며 전세계와 교역을 행했다. 이 시기 이집트는 남쪽으로는 리비아, 동쪽으로는 레반트까지 진출하였으며, 역대 왕조들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였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파라오들이 등장한 시기도 바로 이때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하트셉수트 여왕, 투트모세 3세, 아케나텐과 그의 아내인 네페르티티, 소년왕 투탕카멘, 이집트 최고 명군인 람세스 2세 등이 모두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이다. 이 시기에는 세계의 첫 유일신앙인 아텐 신앙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외국과의 잦은 접촉은 점차 이집트 사회에도 변혁을 불러오며 다양한 아이디어의 도입들을 촉진하기도 했다. 한편 신왕국도 점차 시간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리비아인, 누비아인, 아시리아인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결과적으로 몰아내고 다시 독립을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25년 경, 캄비세스 2세가 이끄는 강력한 페르시아인들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프삼티크 3세를 사로잡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캄비세스 2세는 파라오의 직함을 취했고, 이집트의 왕을 자처했으나 페르시아 수사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이집트를 통치하기를 택했다. 이후 기원전 525년부터 402년까지 지속된 이집트 제27왕조 기간 내내 이집트는 페르시아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페르시아의 황제는 자동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직도 동시에 겸했다. 기원전 5세기 내내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간혹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으나 페르시아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이집트 제30왕조는 이집트인들이 스스로 세운 최후의 왕조였으나, 결국 기원전 343년에 페르시아인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최후의 이집트인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는 전투에서 패배하며 완전히 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31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들도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몇 십년 밖에 지나지 않아 또다시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여 이들을 정복하고 만 것이다. 이후 마케도니아 출신의 장군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 부관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를 물려받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및 로마 시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강력한 헬레니즘 국가였으며, 동쪽으로는 남부 시리아, 서쪽으로는 키레나이카까지 뻗어나갔으며 남쪽으로는 누비아와 국경을 접했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수많은 상선들이 이집트의 항구들을 들락날락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이집트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를 파라오라 칭하였고, 후기로 갈수록 아예 이집트인들에게 동화되어 이집트식으로 옷을 입거나 신전에도 이집트식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지배자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연인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싸우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살하였고, 이후 내전에서 승리하나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계도 끊기고 말았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으나, 오히려 그 부는 여전했고 이집트는 광대한 로마 제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들 중 하나로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황제 속주로 남았다. 기독교는 1세기 경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재위기에 이르러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그 통치권이 옮겨갔고, 이때 수많은 이집트계 기독교인들이 박해되어 숙청되었다. 이 시기에 신약성서가 이집트어로 번역되었다.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 이후, 이집트 콥트 교회가 설립되었다.

중세

카이로에 위치한 공중교회. 3세기나 4세기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콥트 정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 중 하나이다.

로마 제국 이후 이집트의 패권을 넘겨 받은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 초 비잔티움-사산 전쟁에서 페르시아인들이 제국을 침공하여 1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점령한 것을 되찾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집트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아랍계 무슬림들이 비잔티움 군대를 이집트에서 꺾고 수니파 이슬람교를 전래시키기 시작하자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이집트인들은 수많은 종교들이 섞여 있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콥트 기독교, 이슬람교, 심지어는 수피교까지 수많은 종교를 믿고 있는 굉장히 다원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639년에는 이슬람의 2대 칼리프인 우마르가 4,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집트에 파견하였다. 이후 640년 경에 이르자 이 군대는 중간에 6,000명 정도를 더 불려 몸집을 키웠고, 헬리오폴리스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와 대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슬람 군대는 알렉산드리아로 향했고, 알렉산드리아가 641년 11월 8일에 항복협정에 조인하면서 이집트는 아랍인들의 손에 떨어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645년에 공세를 펼쳐 잠시 알렉산드리아를 되찾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646년에 다시 이슬람군에 빼앗겼다. 654년에는 콘스탄스 2세가 보낸 함대가 침몰하였고,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는 이집트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 무슬림들은 점령 직후 푸스타트라는 도시를 지어 이슬람의 이집트 수도로 삼았으나, 이 도시는 십자군 원정기에 불타고 말았다. 이후 986년에 카이로가 세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 세계 전체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로 떠오른다.

중세 파티마 시대의 카이로에 세워진 알아즈하르 모스크.

아바스 칼리파조

이집트는 아바스 칼리파조에 이르러 그 세금이 유독 과중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믿던 콥트교 신자들이 반발하여 아바스의 지배 4년 만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9세기 초에 들어서 압둘라 이븐 타히르의 재위기에 칼리프는 바그다드의 궁전에서 머무르고 이집트에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하게 하는 전통적인 지배 구조가 재확립되었다. 828년에는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고, 831년에는 콥트교도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점차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세력 다툼 등 복합적 요소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이집트에는 수많은 무슬림 장군들이 할거하여 나름대로 왕조를 세우고 아바스 칼리파조에 반란을 일으키곤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툴루니드 왕조와 이크시드 왕조 등이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와 맘루크

이집트의 무슬림들은 스스로 힘을 키운 이후, 아바스 칼리파조에서 독립하여 자치적인 왕국을 세웠는데,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파티마 칼리파조이다. 파티마 칼리파조는 카이로를 수도로 하여 약 6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장악하였다. 한편 쿠르드계의 아이유브 왕조가 끝나자, 군인 계급이었던 맘루크 계급이 1250년경 정권을 장악하여 이집트를 한시적으로 통치하였다. 13세기 말 즈음의 이집트는 홍해, 지중해를 통하여 활발한 교역을 통한 막강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도, 말레이시아, 동인도 등 세계 각국과 교류하였다. 한편 14세기 중반에는 세계를 덮친 흑사병의 피해로 인하여 이집트 전체 인구의 무려 40%가 사망하였다.

근대

오스만 제국

이집트를 정복한 셀림 1세(1470~1520)

오스만 제국은 1517년에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이후 1867년까지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내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시기 이집트는 점차 쇠퇴세를 걷게 되는데, 군비 증강과 군인 수 증가로 인하여 사회적, 경제적인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각종 역병들의 창궐로 인하여 이미 약해진 이집트 경제는 외국 자본들의 침입이 무력하였다. 점차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집트의 무역권들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그와중에 1687년부터 1731년 사이까지 무려 6번에 달하는 기근이 이집트를 덮치며 이집트는 갈수록 쇠퇴해갔다. 특히 심했던 1784년 대기근 때에는 이집트 전체 인구의 무려 6분의 1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상당히 다스리기 까다로운 지역이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상당한 국력과 아직도 남아있던 기존의 권력층인 맘루크 잔존 세력들 때문이었다. 이집트는 맘루크들의 자치 통치 하에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반자치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1798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침략하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이집트를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다스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가 영국에게 패배하자 이집트는 갑작스레 권력 공백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이집트에서는 오스만 제국, 이집트계 맘루크 계급, 마지막으로 오스만 제국을 등에 업은 알바니아계 상인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무함마드 알리 왕조

무함마드 알리 파샤

프랑스인들이 쫒겨난 이후, 이집트의 권력은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계 군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집트 총독’의 직위를 얻어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스만 제국과는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권력을 장악한 직후, 맘루크 계급들을 집단으로 숙청한 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고, 이 왕조는 1952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1820년대에 이집트에 솜 재배업이 유입되었으며, 이후 19세기 말까지 이집트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면화 산업의 영향으로 인하여 지주와 농노 사이의 권력 구조가 강화되었으며, 해외로의 면화 수출을 통하여 이집트 경제의 국제 사회 개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무함마드 알리 총독은 1820년대 초반에 수단 북부를, 1833년에 시리아를, 나중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 일부까지 이집트 내로 편입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리 총독이 결국 허약한 오스만 제국까지 집어삼키고 반서구적인 정책을 펼 것을 두려워한 서구 열강들은 그에게 대부분의 영토들을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알리 총독은 이후에도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각종 산업을 진흥시켰고 운하를 지었으며 각종 공무 제도들을 확충하며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알리 총독은 이집트를 점차 군국주의화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전체 인구의 4%에 달하는 사람들이 군대에서 복무할 정도로 비대한 군대를 운용하게 되었다. 이때 알리 총독의 정책이 마치 20세기 소련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알리 총독은 군대에도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농노들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를 단행하였으며 서구식 장교들을 초빙하여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의무교육을 통하여 군인에 대한 자긍심을 크게 고취시키도록 만들었으며, 일종의 세뇌교육을 시도하여 성인 남성들이 군대식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하였다. 한편 이 같은 군대식 개혁은 많은 부작용들도 불러왔다. 이집트는 중동이나 타 북아프리카계 국가들에 비하여 국민들의 기본적 수리력과 문해력이 부족했는데, 이는 교육이 오직 산업계와 군대에 한해서만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알리 총독은 1848년 9월에 그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에게 총독직을 물려주었고, 1848년 11월에는 그의 손자인 아바스 1세에게 직위가 넘어갔으며, 1854년에는 사이드 파샤에게, 1863년에는 이스마일 파샤에게 넘어갔다. 이스마일 파샤는 이집트에서 노예제를 금지하였으며, 과학과 농업 기술 발전을 장려하기도 했다.

알리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다만 1867년에는 '헤디위(Khedivate)', 즉 자치 봉신국의 지위를 얻어내었으며, 1914년에 오스만 제국이 완전히 파탄나기까지 이같은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편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대운하인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의 합작으로 1869년에 완공되었다. 유럽의 은행들이 운하의 건설을 진행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집트는 외국에 엄청난 양의 빚을 지게 되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부정부패 탓에 막대한 양의 돈이 관료들의 뒷주머니로 사라지며 이집트의 경제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정부는 재정을 보수하기 위하여 세금을 올렸고, 이는 사회적 불안정을 불러왔다. 1875년에 이스마일 파샤 총독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지분을 모두 영국에게 팔아치움으로서 겨우 이집트의 파산을 막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후 이집트 정부 내에 영국과 프랑스의 인사들이 대거 등용되는 등 양국의 내정간섭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가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도 겹쳤는데, 1880년대에 대대적인 가축 전염병이 돌았으며 홍수, 내전들이 겹겹이 터지며 이집트는 갈수록 외채에 의존하는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국민들은 알리 왕조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으며, 1879년에는 아흐메드 우라비를 중심으로 첫 민족주의 단체가 설립된다. 이후 이집트에서 알리 왕조와 국민들 간의 불화가 격화되자, 1882년에는 결국 영국이 이집트를 침공하였고, 이집트 군대를 꺾은 뒤 알리 왕조를 내세운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1899년에는 앵글로-이집트 합의에 의하여 수단이 이집트의 알리 왕조와 영국의 공동 통치 하에 놓일 것을 합의하였으나, 이는 말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수단을 지배하는 형국이었다. 1906년에 영국 장교들과 이집트 주민들 간의 불화가 곪아 터진 덴샤와이 사건(Denshawai incident)가 발생하자 상당수의 이집트 국민들은 아예 영국에서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집트 술탄국

1914년에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동맹국들의 편에서 참전하자, 안그래도 영국에 적대적이었던 알리 왕조아바스 2세는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였다. 결정 직후, 영국은 강제로 아바스 2세를 몰아내었고 그의 형제인 후세인 카멜을 대신 그 자리에 앉혔다.

후세인 카멜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이집트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독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는 완전한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트 당이 당시 전세계에 불어닥친 민족자결주의 열풍을 이집트 내에서 이끌었고, 선거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하였다. 영국은 와프트 당의 지도자들을 1919년 3월에 해외로 추방했는데, 이로 인한 국민들의 반발이 터져나오며 첫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집트인들의 반발이 하도 극심해지자, 영국 정부도 어쩔 수 없이 1922년 2월 22일에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집트 왕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직후, 이집트 술탄국은 이집트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었으며 당시 술탄이었던 푸아드 1세는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다만 명목상으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이집트 왕국에는 여전히 영국군이 주둔하였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롭게 수립된 정부는 1923년에 헌법을 도입하였으며 의회제도를 실시하기 위하여 선거를 진행하였다. 이 총선거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와프드 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와프드 당의 지도자였던 사아드 자글룰이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1936년에는 앵글로-이집트 조약이 맺어졌고, 마침내 영국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을 제외한 이집트 전역에서 철수하였다. 다만 이 조약에는 수단에 관련된 내용은 빠져있었고, 이에 따라 수단은 1899년 이래 이집트와 영국이 공동통치에 합의한 것이 암묵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다른 말로, 말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통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통치라는 뜻이다.

영국은 이집트를 북아프리카 지역의 세력 교두보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이탈리아독일을 상대로 한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하며 매우 중시하였다. 특히 동지중해의 핵심 거점이었던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 때문에 이집트를 중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이 운하를 통하여 영국 본국과 인도, 오스트레일리아와 교류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영국 정부와 상반되게 이집트 정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이집트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나치 독일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다만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으며 영국의 전쟁 지원국 정도로만 남았다. 1940년에는 이탈리아와도 국교를 단절하였으나, 심지어 이탈리아가 이집트를 침공하였을 때에도 이탈리아에게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파루크 국왕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영국을 특별히 돕지도 않았다. 이는 당시 이집트 엘리트층들의 의식구조와도 관련이 있었는데, 당시 이집트인들은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심정적으로는 추축국 측에 일부 공감하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40년 6월에는 국왕이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알리 마허 총리를 해임하였으며, 하샨 파샤 사브리 총리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1942년 2월, 영국의 마일스 램슨 경은 파루크 국왕에게 와프드 당이 주도하는 내각을 꾸리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자, 1942년 2월 4일에는 왕궁을 탱크와 병사로 포위한 후 국왕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며 새 내각 구성을 협박하였다. 국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친영 내각이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행위는 국왕은 진노케 하였으며, 영국의 입맛에 맞는 정부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 국민들과 군부의 신임마저 잃는 결과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에서조차도 상당수 철수하였으나, 전쟁 전후 시기에 이집트인들의 반영 감정은 갈수록 커지고만 있었다. 게다가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이집트 왕국이 처참한 패배를 맛보며 왕정에 대한 불신도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선거에도 와프드 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국왕은 강제로 모스타파 엘-나하스를 새 총리로 지명하였다. 1951년에는 이집트가 일방적으로 1936년의 앵글로-이집트 조약에서 탈퇴하였으며, 모든 영국군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영국은 당연히 이집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집트 관료들은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 기지로 향하는 식수를 끊어버렸으며 식량 반입도 거부하였다. 또한 이집트 인부들이 기지 내부로 들어가는 것 또한 막았으며 게릴라전을 펼치며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 기지는 반쯤은 전투 상황으로 변했으며, 마침내 1952년 1월 24일에 이집트 게릴라 군대가 경찰의 도움을 받아 기지를 기습하였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1월 25일에 보병과 탱크를 내보내 게릴라 군대를 돕고 있던 경찰에게 1시간을 주고 당장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경찰은 내무장관에게 연락했고, 항복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물어보았다. 내무장관은 ‘마지막 인원까지 싸워라’라고 답했고, 결국 이로 인하여 경찰서는 박살났으며 43명의 이집트 경찰이, 3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 이 사건은 이집트 전역에서 격분을 불러일으켰고, 다음 날인 1월 26일에는 카이로에서 '검은 토요일'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반영 시위가 일어나 카이로 일부가 불에 타 전소하기도 했다. 파루크 국왕은 와프드 당에게 시위의 책임을 돌렸고, 총리를 해임한 후 알리 마허 파샤를 새로운 총리직에 앉혔다.

1952년 7월 22일, 무하마드 나기브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파루크 1세는 그의 아들이wk 태어난 지 7달 밖에 되지 않은 푸아드 2세에게 양위하였다. 왕실은 며칠 후 이집트를 떠났고, 무하마드 압델 모네임을 중심으로 한 섭정위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섭정위원회는 명목상의 통치기구일 뿐이었고, 실권은 당연히 나기브와 나세르가 이끄는 혁명통치위원회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대중들은 쿠데타 이후에는 개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였고,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자유장교단은 마침내 왕정제와 1923년의 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으며 1953년 6월 18일에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나기브 장군이 첫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나세르가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현대

이집트 공화국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1952년의 혁명 이후, 이집트의 실권은 자유장교단과 군부에게 넘어갔다. 군부는 모든 정당들을 법적으로 금지하였으며, 1953년 6월 18일에 이집트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나기브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약 1년 반 정도를 대통령으로 지냈다.

그러나 나기브 대통령은 얼마 지나지 않은 1954년에 범아랍주의자이자 1952년 혁명의 실세였던 나세르에 의하여 강제로 하야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나기브 대통령이 사임한 후, 나세르가 새롭게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은 1956년까지 공석이었다.

1954년 10월에 이집트와 영국은 1899년의 앵글로-이집트 합의를 파기하고, 수단에게 독립을 주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는 1956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나세르 대통령은 1956년 6월에 취임하였으며, 영국군이 6월 13일에 수에즈 운하 지역에서 철수하자 곧바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하였다. 나세르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서방권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로 인하여 2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 등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운하를 점령하였으나, 이 전쟁이 더욱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과 소련 측에서 중재를 나섬으로써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합의하였다.

아랍연합공화국

1958년에 이집트와 시리아는 서로 국가를 합쳐 아랍연합공화국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1961년에 시리아가 탈퇴함으로써 3년만에 사라졌다. 아랍연합공화국은 북예멘과의 느슨한 연방을 이루고 있는 구조였으며, 1959년에는 가자 지구를 흡수하여 그 곳에 있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흡수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그 후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한편 나세르 대통령을 추종하는 자들이 모여 만든 정당인 아랍사회주의연합이 1962년에 창당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 이집트는 북예멘 내전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나세르 대통령은 예멘 공화국군을 지원하였고, 7만 명에 달하는 이집트 군인들과 화학무기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내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기전의 늪에 빠져들었으며, 이집트는 예멘 내젠에 갈수록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한편 1967년 5월, 소련은 나세르 대통령에게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는 이를 '근거가 없다'고 일축하였고, 나세르 대통령은 5월 14일에 시나이의 이스라엘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고, 유엔 평화유지군들을 시나이반도에서 몰아내고 해협을 막아 이스라엘 선박들의 통행을 막음으로써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5월 26일에는 아예 대놓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라고 선포하며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티란 해협을 막은 것을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공격했고, 이집트가 1948년부터 점유하고 있던 시나이반도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다. 이후 계엄령이 발동되었고, 이 계엄령은 2012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계엄령이 발동되자 경찰의 공권력이 엄청나게 커졌으며, 국민들의 권리가 제한되었으며 언론과 문화 검열이 아예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이집트 왕정이 1950년대에 몰락할 무렵, 이집트인들 가운데에서 상류층이라고 불릴 만한 인구는 50만 명이 채 안되었다. 중산층은 400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1,700만 명은 모두 하류층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적령기의 아이들 중 절반이 넘게 학교를 가지 않고 일터에서 일했다. 그러나 나세르 대통령이 이를 바꿔놓았는데, 대규모 토지 개혁과 분배 정책을 통하여 대학생 정원을 급속도로 늘렸으며 국영산업에 대한 대대적 투자로 인하여 극도의 사회적 유동성을 불어넣고 사회빈부격차를 완화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의 기간 동안 공립학교의 학생 수는 2배가 넘게 증가하였으며, 수 백만 명의 이집트 빈민들이 일자리와 교육을 통하여 서민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나세르가 1960년대 중후반부에 들어 독재의 면모를 보이고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는 등 악재가 이어지자, 이집트의 경제도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사회도 경직되며 나세르의 지지율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집트 아랍 공화국

1979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조인 후 메나헴 베긴, 지미 카터, 안와르 사다트.
사다트 대통령

1970년에 마침내 독재자였던 나세르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급사하였으며, 대통령직은 안와르 사다트에게 넘어갔다.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의 고문관들을 국외로 추방하고 소련의 사회주의 동맹에서 나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등 획기적인 면모들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규모 경제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1973년에는 시리아와 함께 4차 중동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을 예상하고 있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아랍 세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대가로 시나이반도를 다시 얻어내게 되었다.

1975년에 사다트 대통령은 나세르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철회하고 외국 투자를 장려, 정부 규제를 철폐하는 등 경제 자유화의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하여 세율이 하락하였고, 관세가 낮추어지며 일부 외국인 투자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투자는 저위험, 고수익의 사업들, 예를 들어 관광업이나 건설업 등에만 집중되었고 이집트의 인프라 투자는 갈수록 정체되었다. 사다트의 정책은 이집트 경제 현대화와 중산층 부양을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상류층들만을 살찌우는 결과를 낳았으며 곡류, 빵 등 기본적인 식량마저 부족해지며 1977년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7년에 사다트 대통령은 아랍사회주의연합을 해산시켰고, 국민민주당을 새롭게 창당하였다. 사다트 대통령은 1977년에 이스라엘에 역사적인 방문을 하였고, 이후에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에서부터 철수한다는 내용의 1979년의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맺었다. 사다트의 행동은 아랍 세계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이집트는 아랍 연맹에서 쫒겨나기까지 하였다. 다만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사다트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1981년 10월에는 사다트 대통령이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하여 암살당했다.

무바라크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호스니 무바라크가 유일 후보로 나서서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관계를 다시 악화시켰으며, 이를 통하여 아랍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했는데, 농업과 관련 산업이 발전을 하고는 있으나 인구의 급격한 증가분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규모의 기아와 실업이 발생하였고, 수많은 농촌 인구가 카이로와 같은 대도시에 유입되면서 거대한 크기의 슬럼가를 형성하는 등 사회 치안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986년 2월 25일, 경찰이 근무기간이 3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카이로의 호텔, 나이트클럽, 식당, 카지노 등이 습격당했으며, 타 도시들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일상 외출이 금지되었으며 군대가 나선 이후에도 질서가 회복되기까지 3일이나 걸렸으며 107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1980년대, 90년대, 2000년대에 이집트에서는 수많은 테러들이 일어났으며, 이집트 콥트교회 신자, 관광객, 정부 관료들을 상대로 한 테러가 빈번해졌다. 1990년대에는 이슬람 국단주의자 단체인 ‘알 가마 알 이슬라미야'가 대규모 테러 공격에 나서서 지식인들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폭력적인 테러를 행했다. 이로 인하여 이집트의 가장 주된 산업인 관광업에 엄청난 타격이 가해짐으로써 관광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무바라크의 통치기간 동안 이집트 정계는 국민민주당이 장악하였으며, 1993년에 기업독점법, 1995년에 언론법, 1999년 반정부방지법 등을 연이어 통과시키며 정부가 새로운 규제를 통과시키거나 형을 집행하는 데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고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들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말에는 정치적 탄압이 아예 공공연화되었으며, 정치적 야당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변해버린 채로 무바라크 대통령의 독재가 자행되었다. 1997년 11월 17일에는 룩소르 근처에서 테러가 일어나 62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대부분이 관광객이었다.

2005년 2월 말에 무바라크는 대통령 선거제 개정을 선포하였고, 1952년 이래 처음으로 다수의 후보가 등록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그러나 새 법에는 여전히 후보 등록에 대한 제약이 남아있었고, 이로 인해 무바라크는 손쉽게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투표율은 심지어 25%에도 못미쳤다. 또한 외국의 선거 감시인들은 선거에 부정이 있음을 경고하였으며, 무바라크 대통령은 선거가 끝난 후 후보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2006년에 휴먼라이츠워치는 정례적인 고문, 임의적 형벌, 재판의 부재, 부정부패 등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폭로하였다. 2007년에는 엠네스티에서 이집트가 고문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고 비난하였으며, 테러와의 전쟁에서 타 국가들이 이집트에 용의자를 보내 고문하도록 할 정도로 고문이 심각하다고 밝혔다. 이집트 외무장관은 급히 이 보고서를 반박하였다.

무르시 대통령

이슬람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 출신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2012년 6월 24일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12년 8월 2일에 이집트의 총리는 28명의 신인들로 구성된 35인의 내각 명단을 발표하였고, 이들 중 4명은 무슬림 형제단의 인사들이었다.

제헌의회에서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입김이 강해지자, 자유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은 의회에서 탈퇴하였으며 무슬림 형제단은 무르시 대통령을 지지하며 세를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다. 2012년 11월 22일에는 무르시 대통령이 제헌의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행정명령을 무조건적으로 시행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집트 전역에서 폭동과 시위가 일어났고, 2012년 12월 5일에는 만 명대에 달하는 무르시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충돌하여 소요가 일어났다. 무르시 대통령은 야당 대표들과의 회담을 제안하였으나, 2012년 12월 헌법 국민투표를 취소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2013년 쿠데타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은 샤리아에 기본한 정책들을 피고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입안하며 신임을 잃어나갔다. 결국 2013년 7월 3일에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이 이끄는 정부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여 쿠데타가 일어났고, 결국 군부가 모르시 대통령을 쫒아내고 과도 정부를 구성하였다. 2013년 7월 4일에는 68세의 헌법재판관인 아들리 만수르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으며, 새 정부는 성립 직후 무슬림 형제단의 인사들을 구금하거나 체포하였다. 체포된 이후 대부분의 인사들은 무기징역을 받거나 사형을 받았다.

2014년 1월 18일에 과도 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이 국민투표에서 98.1%의 압도적인 찬성을 받아 통과시켰다. 전체 유권자의 38.6%가 국민투표에 참가하였고, 이는 무르시 정부 기간의 최고 투표율인 33%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2007년 3월 19일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종교정당의 창립을 금지하였으며, 새로운 반테러법을 통과시켜 경찰의 임의 체포, 조사를 허용하였다. 또한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법적으로 선거를 감시할 수도 없도록 만들었다. 2009년에는 여당인 국민민주당의 대변인이 이집트의 정치 체계가 매우 복잡하며, 민주주의까지는 ‘갈길이 멀다’면서 현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실세는 군부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랍의 봄

2011년 1월 25일, 마침내 무바라크의 폭정에 반발하여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월 11일에는 드디어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하였고, 카이로에서 도망쳤다. 이 소식을 듣고 카이로의 광장에서는 대규모 축하 파티가 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군부최고위원회의 위원장인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가 사실상의 국가원수로 등극하였다. 2월 13일에는 군부가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헌법의 효력을 중지하였다.

3월 19일에는 개헌 국민투표가 열렸으며, 11월 28일에는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쫓겨난 이후 처음으로 의원선거가 열렸다. 투표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으며, 주된 소요 사태나 폭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엘시시 대통령

2014년 3월 26일, 이집트의 국방장관이자 육군원수였던 압둘팟타흐 시시가 군에서 은퇴한 뒤에 2014년 대선에서 뛸 것을 공언하였다. 2014년 5월에 실시된 여론조사는 엘 시시의 대승을 예측하였으며, 실제로도 압승을 거두며 2014년 6월 8일에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다만 무슬림 형제단과 일부 자유주의, 세속주의 정당들은 2014년 대선 자체를 보이콧하였다. 과도 정부가 심지어 선거 기간을 늘리면서까지 투표를 독려하였으나, 전체 유권자의 46%만이 투표에 참가하면서 2012년 대선의 52%보다 적은 수치를 띠었다.

2015년 12월에 새로운 총선이 열렸으며, 시시 대통령의 인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의회에 입성하면서 시시 대통령에게 훈풍을 불었다. 2016년에 이집트는 이탈리아 학자인 기울리오레게니의 살해 사건으로 인하여 이탈리아와의 외교 갈등을 빚었다. 2016년 4월에는 마테오 렌치 총리가 이탈리아 대사를 카이로에서부터 귀국시켰으며, 이집트가 조사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다고 강력히 비난하였다. 이탈리아 대사는 파올로 젠틸로니 총리에 의하여 2017년이 되어서야 다시 이집트로 돌아갔다.

시시 대통령은 2018년에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9년에 의회에 의하여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대통령의 권한과 군부의 권한을 늘리는 데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통령의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늘렸으며, 시시 대통령이 앞으로 2번 더 대통령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같은 안은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이집트는 2020년에 에티오피아 정부가 나일강 상류에 대규모 댐을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강력히 반발하며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이집트는 에티오피아가 댐을 세우면 나일강의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나일강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이집트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이집트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통령제 국가이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5년이며, 오직 입법권만 가지고 있다. 모하메드 모르시 대통령과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심해지자, 2013년 7월 3일에 압둘파타흐 시시 장군이 모르시 대통령을 쫓아내고 헌법의 효력을 중지할 것을 공포하였다. 50인으로 구성된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2014년 1월 18일에 채택되었다.

2013년에 프리덤 하우스는 이집트의 정치적 권리에 5점을 매겼고(7점이 가장 낮은 수치이며 1점이 가장 높은 수치이다.), 인권에 5점을 주었으며 전체적으로는 ‘부분적인 자유’라고 평가하였다. 이집트는 타 아랍 국가들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민족주의가 태동한 국가로, 19세기부터 민족주의 세력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20세기 초부터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범아랍주의를 표방하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민족주의 세력 외에도 무슬림 형제단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도 하류층을 중심으로 상당히 세를 떨치고 있다.

이집트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 제도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 첫 집회가 1866년에 열렸으나 1882년에 영국의 개입으로 폐지되었다. 영국은 식민통치기간 동안 오직 조언위원회, 즉 일종의 명목상의 의회만 허락하였으나, 이집트가 독립한 이후에는 입헌군주정을 골조로 한 의회제도가 다시 도입되었다.

1981년 이래, 호스니 무바라크의 가장 유력한 후계 후보로서, 그의 둘째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가말은 대통령 여당인 국민민주당(NDP) 부간사장 겸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장애 요소는 "대통령의 세습"이라는 세론의 반발이 여전히 거세다는 것이다.

2011년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진행된 이집트 혁명으로 30년간 집권해온 호스니 무바라크가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나,[16]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 세력의 발호에 따른 정치 혼란과 잦은 유혈 사태로 2013년 7월 3일 압둘팟타흐 시시(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무함마드 모르시 대통령이 축출되었다. 이후 쿠데타를 주도한 압둘팟타흐 시시가 2014년 6월 8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행정구역

이집트는 27개의 주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들은 또다시 읍, 면과 같은 하위 행정구역들로 나뉜다. 각 주들은 각각의 주도를 따로 가지고 있으며, 알렉산드리아 주처럼 주도와 주의 이름이 같은 구역들도 있다.

1차 행정구역은 알렉산드리아, 아스완, 룩소르, 아시우트, 부하이라, 베니수에프, 카이로(주), 다미에타, 케나, 다칼리아, 파이윰, 미니아, 무누피아, 알와디알자디드, 포트사이드, 자누브시나, 칼리우비아, 홍해(분쟁구역 미포함), 샤르키아, 소하그, 샤말시나, 수에즈로 이루어져 있다.

외교

군부가 이집트의 실권을 잡고 있어 상당수의 자원들을 독점하고 정부 예산도 최우선적으로 지원받고 있는 만큼, 이집트의 군대는 정치적, 실적으로도 매우 강력하며 이집트의 정부보다도 권한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스라엘 전 외교위원인 유발 슈테이니츠에 의하면, 이집트 공군은 거의 이스라엘 공군과 맞먹는 수의 현대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탱크, 대공포, 전함 등은 이스라엘 군대보다 훨씬 더 많은 규모라고 한다. 이집트는 정찰위성인 이집트삿 1호를 보유하면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몇 되지 않는 정찰위성 보유국이며, 2014년 4월에는 이집트삿 2호를 쏘아올리면서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인 정찰 행보를 보이기도 있다.

미국은 정기적으로 이집트에게 군군사 원조를 보내고 있으며, 2015년 기준으로 무려 13억 달러나 원조해주었다. 1989년에 이집트는 나토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들 중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 중 하나였던 이래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2013년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 대통령을 몰아낸 이래 오바마 행정부가 군부의 무슬림 형제단 탄압을 비판하고 무기 판매를 일시 중단하면서 관계가 약간 소원해져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공공의 적인 테러리즘에 맞서기 위하여 다시 미국과 이집트 간의 협력이 증대되고 있으며, 특히 공화당계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더더욱 관계가 호전되고 있다. 시시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9월에 UN 총회에서 회담을 가진 바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여행금지조치를 내린 아랍국가들의 명단 중에서 이집트가 없다는 점도 미국과 이집트 간의 관계가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미국 상하원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인권을 무시하고 군부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2017년 4월 3일에 시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으며, 8년 만에 워싱턴 D.C를 찾은 이집트 대통령이라는 명예를 안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시 대통령에게 경제 협력, 투자 등의 주제로 이야기를 하였으며, 미국과 이집트 간의 외교 정상화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집트 군부는 아예 독자적인 무기 공장을 따로 소유하고 있으며, 전세계에서 따로 무기들을 수입하고 있다. 특히 이전에 소련이 붕괴할 때에 대규모로 들여온 무기들을 점차 미국제 현대 무기로 대체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프랑스, 영국제 무기들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M1 에이브럼스 탱크로, 이는 이집트 내의 공장에서 생산하기도 한다. 또한 모르시 대통령이 쫓겨난 이후, 이집트와 러시아 관계도 굉장히 호전되었는데, 이후 러시아와의 군사적, 경제적 협력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중국과의 관계도 완화되었으며, 2014년에 이집트와 중국은 ‘포괄적전략적동반자’ 협정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2019년 7월에 이집트 대사를 포함한 37개국의 대사들이 UN에게 중국의 위구르 탄압을 중지하게 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적도 있다.

아랍 연맹의 본부가 카이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맹의 사무총장은 전통적으로 항상 이집트인이었다. 현재는 전 이집트 외무장관인 아흐메드 아볼 게이트가 맡고 있다. 아랍 연맹은 한때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 조약을 비판하는 의미에서 1978년에 본부를 이집트에서부터 튀니지로 옮겼으나, 1989년에 다시 카이로로 돌아왔다. 또한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아랍 왕국들은 모르시 대통령이 쫓겨난 이후 이집트에게 경제적 원조를 제공했다.

1973년의 전쟁과 이후의 평화 조약으로 인하여 이집트는 아랍 국가들 중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한 국가였다. 다만 여전히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적대적이다. 이집트는 중동에서의 중재자로 활동한 적이 매우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지원을 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하마스 정부와의 중재를 담당하고 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터키나 카타르가 이 역할을 대신 하고 있기도 하다. 이집트와 이란, 터키와 같은 비아랍 계열의 중동국가들 간의 관계는 종종 악화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이란과 충돌이 잦은데,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 조약과 걸프 만에 있는 이집트의 동맹국들과 이란의 충돌이 격화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터키도 또한 최근들어 이집트에서 금지되어 있는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도 일부 지원 움직임이 보이자 이집트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이집트는 비동맹 운동과 UN의 창립국이며, 프랑코포니의 회원국이다. 또한 전 총리였던 보트로스 보트로스 갈리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유엔 사무총장직을 맡기도 했다. 2008년에 이집트는 2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난민들을 받아들였으며, 특히 2만 명에 달하는 수단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이집트는 이들을 상대로 더 국경 검사를 엄격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집트와 이란은 1939년 양국에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축출된 팔라비 왕조에 이집트는 도피처를 제공하였다. 또한 1979년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하자 이란은 이집트와 단교를 선언하였다. 이후 이란은 시아파 무슬림 국가의 종주국으로 서방과 대립각을 세웠고, 수니파 무슬림이 많은 이집트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친서방 노선을 걸었다. 이집트는 2012년 9월 3일에 친이스라엘성향의 대사를 임명했다.[18] 이집트에서 반미시위가 일어났지만 미국은 경제원조하겠다고 밝혔다.[19] 러시아와는 40년만에 고위군사회담을 가지게 되면서 관계가 풀리고 있다.[20] 또한 이탈리아의 경우 2016년 당시 유학생이 억류되다가 숨진 사건이 있어 외교 관계가 인도에 버금가는 수준인 상태로 악화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한관계

이집트는 1963년 8월에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95년 4월에 수교하였다. 1967년, 1975년 중동전쟁 때 북한의 군사지원으로 친북한 외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외교관계로 발전, 1980년대 이후 실질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9년 2월 총리 김종필의 이집트 방문 후 4월에는 대통령 무바라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다.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항공협정, 1989년 문화·과학·기술협력협정, 1997년 투자보장협정, 1998년 무역협정, 1998년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에는 과학기술양해각서, 외교연구원간 협력의정서에 서명하고 원자력협력의정서에 가서명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 5억 1590만 달러, 대한수출 2억 597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납사, 동 및 합금, 원유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및 부품, 일반기계, 직물 등이다.

경제

첨단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2001년 조성된 업무지구, 스마트빌리지

2016년 기준 이집트의 GDP 순위는 37위이며,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뛰어넘어 2위이다. 여태까지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어서 3위였는데 2위까지 올라간 것이다. 물론 그래봤자 삶의 질은 여타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 비해 한참 밀린다고 한다.

중동 지역으로 한정해보면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이집트 정도가 지역경제강국의 자리를 다투고 있고 그 절반 정도 규모들인 이스라엘, 이라크, UAE 정도가 4강 3 중 정도이고 그리고 그 이하 여타 중동 국가들의 경제 규모는 미미하다.

하지만 2017년 자료에서는 이집트의 GDP 순위가 40위로 내려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다시 추월당했다.

나일 강 주변을 제외하곤 영토가 척박해 피라미드나 스핑크스같은 관광자원밖에 없다는 인상이 있으나 실제는 다르다. 이집트는 원유매장량이 전세계 0.5% 수준이고 천연가스 수출만 해도 세계 6위라는 놀라운 자원 부국이다. 수에즈 운하 통관료도 엄청나다. 2008년 21,415척이 통과했고, 통과료는 53억 달러에 이른다. 대추야자의 제 1의 생산국이기도 하다.

현재 이집트의 최대 경제 문제는 심각한 빈부 격차 문제이다. 현재 이집트의 물가는 일반 국민들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고공세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1인당 수입과 PPP는 여전히 정체 상태인 것도 고질적인 문제이다. 또한 지나치게 심각한 관료들의 부정부패도 이집트의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종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13년의 부패인식지수에서 이집트는 177개국들 가운데 114위로 매우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집트의 가장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은 오라스콤 그룹과 라야 통신사업이다. 특히 지난 몇 년간 IT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였는데, 수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마이크로소프트와 오라클 등의 기업들과 합작하면서 북아프리카와 유럽에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급격한 성공을 이룩한 것이다. 그 외에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IT 분야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현재 이집트의 사회는 매우 빈부 격차가 심한 상황으로, 이집트 전체 인구의 35%에서 40%가 매일 2달러가 안되는 수입으로 연명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2%에서 3% 정도만이 부유층에 겨우 속한다고 한다.

산업

이집트의 주요 산업인 농업은 나일강 계곡과 삼각주 평야 및 몇 군데의 오아시스 주변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행해진다. 공업으로는 석유 · 철광석 등이 산출된다.1959년에 국가계획 최고회의가 설치되어 제1차 5개년 계획과 긴급 3개년 계획을 입안하여 공업화와 개발에 의한 국민 소득의 증대를 도모했으나 중동 전쟁 같은 사건으로 차질이 생겼다. 1992년 ~ 1993년에는 규제완화, 토지개혁, 농산물 수출추진 등 제3차 5개년 경제사회개발계획에 박차를 가했다.이집트의 농경지는 대체로 나일 하곡·델타·오아시스 등지에 있다. 경지 총면적은 국토의 2.3%에 불과하며, 주민의 4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 면적당 생산력이 매우 높으며, 경제 작물로는 면화 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 밀 · 보리 · 쌀 · 콩 · 과실 ·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 · 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 면화는 섬유가 긴 종류가 많고 품질은 최고급이며 가장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총수출의 60%를 차지한다. 그런데 면제품은 가격경쟁에 있어서 타국에 앞지름을 당하고 있다. 토지개혁의 결과 대지주의 수는 줄었으나 경지 5페단 미만의 영세농민이 전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정부는 이들의 협동화를 추진시키고 있다.

인구의 높은 증가율로 인한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하여, 농지 조성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심층지하수를 끌어올려 사막을 관개(灌漑)하는 방식과 유수(流水)의 고도이용에 의한 토지개간 방식이 취해지고 있다. 이집트의 공업은 혁명 전에도 섬유공업, 식품공업 등이 있었으나 혁명 후에는 공업화 정책으로 철강, 정유, 기계, 자동차조립, 화학, 건재, 제지 등의 공업이 새로 일어났다.이집트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석유자원은 시나이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내 유전지대에서 생산되고 있다. 대부분은 국영정유공장에서 정제되는데 수에즈항을 중심으로 정유공업이 발달했다. 지금도 새로운 석유자원의 탐사가 진행되고 있다.석유 외에 철강·인광·망간 등의 지하자원이 있다. 공업화 추진의 원동력이 되는 전력 생산은 아스완 댐과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에 따라 크게 증가하였다. 북부의 카타라 저지(低地)에서는 지중해의 물을 끌어들여 낙차에 의한 대규모 발전이 계획되고 있다.

관광업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들 중 하나가 바로 관광업이다. 2008년 기준으로 1,280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집트를 방문하였고, 무려 11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화를 이집트에 풀어놓고 갔다. 이집트 전체 인구의 12% 가량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집트의 히샴 자아주 관광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2012년 기준으로 관광 사업이 94억 달러의 부가 수입을 내었고, 2011년의 90억 달러에 비하여 약간 증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는 기자의 피라미드들로, 고대 7대 불가사의들 중 유일하게 현존해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이집트는 약 3,0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중해에 접한 해안선이 있는데, 이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아카바 만, 룩소르, 라스 시디르, 다하브, 마르사 알람, 엘 세이크 등이 유명하다.

교통

소규모(小規模)의 것을 제외하고 교통기관은 전부 국영이다. 자동차교통의 발달에 따라 도로도 정비되고 있으며 철도는 1859년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 철도를 효시로, 카이로를 중심으로 해서 발달해 왔다. 총연장은 광궤(廣軌) 7,102km, 협궤(狹軌) 1,400km이다. 카이로 공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십자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국제항공의 요충이 되고 있다. 국도의 총연장은 2만 6,000km이며, 나일강은 수단에 이르는 내륙수로 교통로로서 농산물과 광산물의 수송을 주로 한다.[22] 보행자들을 위한 육교나 지하보도, 횡단보도 등이 거의 없는 이집트에서는 해마다 교통 사고로 숨진 사람이 8,000명에 이르고 있다. 차량들의 정비 불량과 난폭 운전, 낙후된 교통 기간 시설이 사고의 주범이다.[23]

현재 이집트의 플래그 캐리어이자 가장 거대한 항공사인 이집트에어는 1932년 이집트 사업가인 탈라트 하브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현재는 정부가 소유한 국영 항공사이다. 허브공항은 카이로 국제공항이며, 중동,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등 세계 각국의 75개가 넘는 공항들에 노선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이집트에어는 80여 기의 비행기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거대한 인공 운하로,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교역로로 손꼽히며 이집트 최대 수입원들 중 하나이다. 1869년 11월에 10년의 공사 끝에 처음으로 개통되었으며, 이후 선박들이 아프리카를 돌아갈 필요없이 곧바로 유럽과 아시아을 이어준다는 이점을 가지게 되며 세계 최대의 교역로들 중 하나로 떠올랐다.운하의 북쪽 시작점은 사이드 항이며, 남쪽 끝은 타우피크 항구이다. 수에즈 운하의 총 길이는 193.30km이며, 수심은 약 24m 정도 되며 2010년 기준으로 그 너비는 205m나 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북부의 출입용 운하가 22km 정도의 길이이며, 본 운하가 162.25km, 남부의 출입용 운하가 9km 정도 된다. 중간에 막는 댐이나 수문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덕분에 해수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2014년 8월 26일에는 신수에즈 운하에 대한 제안이 나왔으며, 2015년 7월에 기존의 운하를 더더욱 확장하며 드디어 신수에즈 운하가 완공되었다. 2015년 8월 6일에 외국 지도자들과 군부 인사들이 참여하여 완공식을 열기도 했다.

2021년 수에즈 운하에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호가 수에즈 운하에 걸려 운하가 막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문사회

인구

이집트의 인구 분포 지도

이집트는 전 국토가 사막이고 오직 강 하나에 의지해 1억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데서 나일강의 사기성을 알 수 있다. 나일강 유역에만 인구밀도가 유달리 높고 대부분 인구가 가늘고 길게 집중되어 있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사막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이나 칠레처럼 길쭉한 나라나 마찬가지인 인구분포를 보인다. 경지면적당 인구밀도는 일본에 이어 2위이나 인구증가율이 정체, 감소세인 일본과 달리 이집트는 꾸준히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어 조만간 일본을 제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는 인구가 30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게 19세기부터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20세기 들어 인구 1,000만명을 돌파하게 되었고 1950년에 2,000만명을 돌파했으며 1963년에 인구가 3,0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1975년에 인구 4,000만 명을 돌파한 시기때부터 식량 수출국[26] 에서 식량 수입국으로 돌아섰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여 2014년 기준으로 8,600만 명을 기록하여 독일보다 인구수가 많아졌으며, 2020년에는 1억을 돌파했다. 이슬람 아랍 동맹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반년만에 인구가 100만명 이상을 넘겼다.

이집트 땅 크기는 남한 면적 10배가 넘으니 큰 걱정은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이집트 땅 거의 전부(96% 이상)가 사람이 살기 불가능하거나 아주 힘든 무더운 사막이라는 것이다. 그 사막성 기후를 뺀 곳은 오스트리아 땅 면적(80,000km²)과 비슷하다. 통계로만 1,000만명이 넘게 모여사는 카이로의 인구밀도는 서울보다도 높다. 사막을 개간하려는 계획도 있기는 하고 진짜로 개간을 해서 녹지로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그 인구수가 어디로 가는건 아니고 인프라도 나름대로 갖추어져 있어 아프리카 기준으로는 상당한 경제대국이다. 문제는 그 인프라가 경제난으로 갈수록 약화되고 있으니 아프리카의 경제대국이라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이집트 제2의 도시이자 헬레니즘 제국까지 거슬러가는 오랜 고도이며, 북부 최고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400만명이 거주한다.

이런 나일강 유역에 인구의 85% 이상이 모여살고 있다 보니, 이집트는 인구 포화상태에 직면해 온갖 오염과 여러 개발에 얽힌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인구조절하고자 콘돔을 무상으로 주는 정책을 취했다가 되려 종교적인 엄청난 비난 속에 전면 철폐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출산율이 괄목할 정도로 떨어져 2000년대 후반에는 3까지 내려갔지만 이때부터 베이비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출산율이 3.5로 상승하고 다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중이다. 이집트는 2030년이면 인구가 1억 4,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2017년에 이미 인구가 9,800만명을 넘어서 1억명 인구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에 이집트의 인구는 1억명을 돌파했다. 카타르, 유럽 연합 등의 부자 나라로 인력이 수출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인구를 잘 이용하면 상당한 경제대국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인구 많은 게 마냥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문제. 특히 이집트 공교육이 개판이라 인구만 많다고 국가에 큰 도움이 안되고 갈수록 부담만 되고 있다. 더군다가 행정 체계나 인프라가 중국 수준이라도 되면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해서 해외 다국적 기업의 공장이라도 유치할 수 있겠지만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와 부정부패는 이마저도 가로막는 상황이다. 특히 인구증가로 인해 물과 식량의 부족이 심각해지고 있어[27] 이집트의 미래를 갈수록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그나마 최근들어 출산율이 2.72명(2020년 기준)으로 감소했으나 여전히 많다.

주민

베자족들의 모습

중동에서 제일, 아프리카에서는 3번째로 인구가 많다. 인구 대부분이 나일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은 이슬람의 전래이후 아랍화되어 그들의 정체성을 아랍인으로 본다. 이는 아라비아 아랍인들과의 혼혈 및 고대의 이집트인들이 아랍문화에 동화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들은 혈통적으로는 대체적으로 동질적이며 인종적으로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동부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기타 소수 민족으로는 아랍계 유목민인 베두인족들과 이집트 남단에 위치한 누비아인과 이집트 서쪽에 위치한 시와인들이 있다.

민족적으로는 이집트인들이 전체 인구의 99.7%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외에 다른 민족들 중에는 아바자인, 터키인, 그리스인, 베두인족과 기타 아랍 유목 민족 계열들이 있으며, 주로 시나이반도와 동부 사막 지역에 모여 살고 있다. 또한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시위족들이 시와 오아시스에 모여 살고 있으며, 누비아인들이 나일강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그 외에도 국가의 동남부 모서리 쪽에 모여 살고 있는 베자족 부족들이 있으며, 나일강 삼각주와 파이윰 지대에 모여 살고 있는 돔 부족들도 있으나 점차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들도 이집트인들에 융합되고 있다.

현재 이집트에는 500만 명 정도의 외국인들이 이주해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수단인들로 이들 중에서는 이미 몇 세대동안 이집트에서 살아온 이들도 있다. 이외로 이라크,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남수단, 에리트레아 등에서 온 국민들도 있다. 유엔난민기구는 무국적자, 난민 등 이집트로 여러 가지 이유로 도피해온 사람들이 대략 25만 명 정도가 있다고 추산했다. 2015년 기준으로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는 등록된 시리아계 난민들의 수만 117,000여 명으로, 이 것이 작년에 비하여 감소한 수치였다고 한다. 한편 수단계 난민들의 경우 28,000여 명 정도가 있다.

한때 이집트에서는 그리스계와 유대계 민족들이 상당히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이슬람화가 진행되면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는 과거에 비하여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남아있으나, 해외에서 이집트에 남아있는 유대계 유적들을 순례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곧잘 여행을 오고는 한다.

언어

공용어는 아랍어다. 그러나 이집트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아랍어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표준 아랍어(푸스하)와는 좀 다르다. 아랍어를 많이 쓰는 나라라도 교과서에서 배우는 아랍어는 뉴스나 강의 등 공식적인 생활에서나 쓸 뿐이고 실제로는 아랍어에 현지 문법과 어휘가 많이 들어간 아랍어 방언-암미야(이집트 아랍어)를 쓰는데, 이집트 역시 그러하다. 이집트 아랍어는 표준 아랍어와 어순이 다른 경우도 있고 ج 가 j 발음이 아닌 g 발음이 나는 등 차이가 크다. 고대 이집트 어순과 발음이 적용된 결과. 따라서 단순한 아랍어 방언이 아닌 중국의 광둥어처럼 '이집트어'로 분류되기도 한다.

여러 아랍어 방언 중 이집트 방언은 아랍인들이 비교적 잘 알아듣는 편인데, 이집트는 3억 정도 되는 아랍권 인구 중 1/3 가까이를 차지하고, 이집트인들이 아랍권 곳곳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으며, 또 중동에서 이집트 방송이 자주 방영되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고전 이집트어를 썼으며 이는 콥트어라는 언어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12세기부터 점차 아랍어 이집트 방언으로 대체되더니 18세기부터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현대에는 종교적이거나 학문적인 용도 정도로나 쓰이는 수준이다. 그리스어도 상당기간 쓰였던 적이 있었지만 일부 계층에서나 쓰이는 언어였고 이슬람 정복 이후로 12세기 무렵까지 학문용 언어로나 쓰이다가 점차 사라졌다. 다만 아랍어 이집트 방언에는 꽤나 영향을 끼쳐서 현재도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콥트어나 그리스어 단어들이 나오기도 한다.

주요 외국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이며 특히 영어는 대개 그럭저럭 통용된다. 중국어도 중국인 관광객의 급증으로 배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도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주요 해변 관광지인 후르가다와 샤름엘셰이크의 호텔에서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고 러시아어로 된 메뉴나 표지판도 별도로 존재한다. 비록 명목상이지만 이집트는 영국 보호시기인 1914년에 그동안 쓰던 '총독'(헤디브)호칭을 '왕'으로 바꿀때까지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했기 때문에 터키어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으며 의외로 터키계 성씨를 쓰는 이집트인들도 많이 보인다.

이집트도 프랑스의 지배를 잠시 받은 적이 있었고, 이후에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영연방에 가입하지는 않았고 프랑코포니에 가입했다.

교육

카이로 대학교

이집트의 문해율은 1996년 통계가 실시된 이래 꾸준히 높아지고 있으며, 문맹율은 1996년의 39.4%에서 2013년에는 25.9%로 상당히 감소하는 성과를 보았다. 2014년 7월 기준으로 성인의 문해율은 대략 73.9%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문맹율은 60대 이상의 고령층에서 가장 높은데, 60대 이상 고령층들의 문맹률은 거의 64.9%에 달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젊은 층들의 문맹률은 굉장히 낮은 편이어서, 15세와 24세 사이의 청년들의 문맹률은 8.6% 밖에 되지 않는다.

유럽식 교육제도는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처음으로 이집트에 도입하였으며, 주로 정부 관료들과 군 장교들을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이집트 식민통치기 동안 영국이 이집트인들의 교육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며 이집트인들의 교육 수준은 날로 질이 떨어져만 갔고, 심지어 이전에는 무료로 받을 수 있었던 공립교육 일부마저 모두 영리나 돈을 내고 들어야만 했다. 독립이 이루어진 이후, 1950년대에 나세르 대통령은 모든 이집트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공립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전격적 교육 조치는 타 아랍 세계에도 자극을 주었고, 타 아랍 국가들도 점차 이집트인 교사를 고용하여 자국 국민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친 전 국민적 공교육은 이집트의 교육 자원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갈시켜 버렸고, 공교육의 질은 날로 악화되었다. 이같은 휴유증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현재 이집트의 교사와 학생의 비율은 1대 50 정도로 극히 낮으며 성비도 매우 불균형하다.

이집트의 기본교육은 6년의 초등학교와 3년의 중급학교로 이루어진다. 6세 이상의 이집트 국적의 아이들은 모두 이 기본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9년 간의 기본 교과과정을 마치면, 학생들은 2개의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일반계 고등학교이며 나머지 하나는 기술계 고등학교이다. 보통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대학 등을 희망하는 학생들로, 졸업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만 좋은 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기술계 고등학교의 경우, 3년 동안 속성으로 기술을 배우고 졸업하는 경우와 아니면 5년 동안 재학하면서 좀 더 고급 기술을 배우고 졸업하는 경우가 있다. 기술계 고등학교의 학생들도 졸업시험을 쳐서 대학 등 상위 학교에 진학할 수는 있으나, 보통 이런 일은 굉장히 드물다.

이집트 최고 대학인 카이로 대학은 세계대학순위에서 대략 401위에서 500위 정도에 이르며, 그 외의 대학 평가지수에는 551위에서 600위 정도에 이른다. 그 외 그나마 유수의 대학인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와 아인 샴스 대학교는 701위 밖의 순위로 추정된다. 현재 이집트는 타 국가들에 비하여 열악한 고등교육 현실을 개선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교육 현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외일 과학기술도시(Zewail C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등이 있다.

종교

알렉산드리아의 세인트 마크 콥트 대성당

이집트는 아랍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무슬림 인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6번째로 거대한 무슬림 국가일 정도로 이슬람교가 압도적으로 득세하고 있는 국가이다. 전세계 무슬림의 5% 정도가 이집트인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영향력도 아직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체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국교는 수니파 이슬람교로, 이슬람교의 위상이 매우 높다. 그 외 종교들의 분포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엇갈리는 경우들이 많은데, 보통 전체 국민의 85%에서 90%가 무슬림이며, 10%에서 15% 정도가 콥트 정교회 신자들이며 나머지 1% 정도가 타 기독교 분파나 기타 종교를 믿는다고 전해진다.[37] 다만 다른 조사에서는 기독교 인구를 15%에서 20% 정도로 높게 잡기도 한다. 또한 수니파나 시아파 등 한 가지 종파로 딱히 분류할 수 없는 무슬림들도 꽤나 많아서, 대략 12% 정도의 무슬림들이 이 분류에 속한다.

이집트는 7세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세가 가장 강했으나, 이후 이슬람교가 전래된 이후 점차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슬림들은 대략 1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사회 전반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이슬람 세계 전반을 좌우하는 지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현대 이집트에서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시기에 이슬람교가 국교가 되었으며 샤리아가 법의 기본 근거가 되는 등 이슬람의 세가 매우 강해졌다. 대략 1,500만 명 정도의 이집트인들이 이슬람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을 믿고 있으며, 수피즘 지도자들은 현재 이집트인들이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실제 신도 수는 1,500만 명보다도 많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집트는 현재 수니파 무슬림들이 강세이기는 하지만, 시아파 무슬림도 조금은 존재하고 있다. 현재 이집트의 수니파 무슬림의 수는 대략 100만 명에서 22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최대 300만 명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다. 19세기 등장한 이슬람 개혁주의 분파인 아마디파는 약 5만 명 정도에 이르고, 극보수적인 수니파 종파인 살라피파가 대략 500만 명에서 600만 명 정도에 이른다. 특히 카이로 지방에 이슬람 모스크들이 많이 모여있는 것으로 유명하여서, 별칭이 ‘1,000개 미나레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집트 기독교 신자들의 90%가 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 신자이다. 그 외에도 콥트 가톨릭 교회, 혹은 이집트 복음교회나 개신교회 등에 속해있다. 특히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와 같이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들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교회들도 찾아보기 쉬우며,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 가톨릭 등 타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종교들도 볼 수가 있다. 과거에는 그리스 민족이 이집트에 살면서 거대한 그리스 정교회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아르메니아인들도 거대한 규모의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도 한때는 이탈리아인들과 몰타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상당히 세를 자랑했었으나, 이슬람교를 추종하는 나세르 대통령과 민족주의 세력들이 득세하자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쪼그라들고 말았다.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의 고향으로, 정교회는 1세기에 창립되었으며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이다. 또한 969년에 개교한 알 아즈하르 대학교도 이집트에 있는데, 현재 알 아즈하르 대학교는 수니파 이슬람교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들 중 하나이기도 하며 세계적으로도 2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이집트는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오직 3개의 종교만을 인정하고 있다. 바하이교나 아마디 종파 등 타 종교들은 이집트인들에 의하여 배척받는 경우들이 많으며, 이들을 국가안보 위협 대상으로 간주하는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소수 종교들을 믿는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공인받고 신분증에도 이를 등록하기를 원했고, 결국 2008년에 법원에서 만일 신분증에 개인이 믿는 종교가 없으면 공백으로 두는 것도 허락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인구의 90%가 이슬람교 신자이고, 10%는 기독교 신자이다. 이슬람교 신자는 대부분 수니파이고, 기독교 신자 대부분은 이집트의 전통적 기독교인 콥트교에 속한다.

문화

파라오 투탕카멘의 가면

이집트는 상대적으로 문화 검열이 심한 아랍 세계와 중동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며 인구도 많은 덕택에, 아랍 계열 국가들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국가이다. 현재 아랍과 중동의 문화는 이집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집트가 50년대와 60년대에 확보한 중동 세계에서의 발언력 덕분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보통 외국인들은 이집트 문화라 하면 고대 이집트 문화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나, 현대 이집트는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오랫동안 영향을 받아왔기에 거의 아랍 문화와 유사한 부분이 오히려 더 많은 편이다. 다만 아예 고대 이집트와 단절된 것은 아니어서, 이집트에서 주로 쓰이는 아랍어 계열 방언인 이집트 아랍어는 고대 이집트어의 단어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19세기 초의 이집트 계몽주의자인 리파 알 타타위는 고대 이집트에 대한 향수를 기반으로 이집트 사회에 계몽주의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고대와 중세 이집트에 대한 재발견과 탐구를 목적으로 이집트학 학교를 세우고 이집트의 역사, 언어, 문화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이집트의 문화적 르네상스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절정을 찍었고, 이 시기에 무함마드 압두흐, 아흐메드 루트피 엘 사예드, 무함마드 루트피 고우마, 타우피크 엘 하킴, 루이스 아와드, 카심 아민 살라마 모우사, 타하 후세인, 마흐무드 모크타르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집트가 과학과 세속주의에 기반하여 개인의 자유를 더 보장하여 주는 사회로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물관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인만큼, 그 유적과 문화재들의 수도 압도적으로 방대하고 그 질도 굉장히 뛰어나다. 게다가 이집트가 몇 천년에 걸쳐 파라오의 시대, 로마 시대, 그리스 시대, 이슬람 시대 등 수많은 기간 동안 지중해 문명과 상호교류하면서 워낙 아름다운 문화의 중심지로 오랫동안 군림해왔기에, 많은 수의 유적들이 상당수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수의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현재 이집트에는 최소 60여 개의 대규모 박물관들이 존재한다.

이집트의 3대 박물관에는 이집트 박물관으로, 약 12만 점이 넘는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나머지에는 이집트 국립 군사박물관과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10월 6일 기념관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기자 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 이집트 대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 등이 있는데, 완공될 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고고학 박물관이며 압도적인 수의 이집트 유물들을 소장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은 2015년에 개장할 예정이며, 부지의 넓이는 50 헥타르에 이르고 기자 네크로폴리스 지구에서 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집트 유물부에서는 2015년 5월에 말하기를, 2018년 5월에 이르면 부분적 개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음식

이집트의 국민음식 쿠샤리

이집트의 음식들은 대부분 채소와 야채들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육류는 상대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알렉산드리아나 해안 도시들의 경우, 생선이나 다른 해산물들을 사용하여 음식들을 만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이집트 요리들은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곡물류들을 주로 활용하여 만드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가축을 기르기가 힘들었던 환경 때문에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비싼 육류보다는 상대적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들을 활용하여 음식들을 만들었던 탓이 크다.

이집트의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요리는 쌀과 렌틸콩, 마카로니를 섞어 만든 쿠사리가 있으며, 보통 볶은 양파를 올려 먹기도 한다. 그 외에도 뭉근하게 끓여 익힌 풀 메다메스가 대중적인 반찬이기도 하다. 이집트인들은 누에콩으로 타아메야(팔라펠)를 처음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이 것이 중동 세계로 퍼져나가고 결국에는 세계적인 요리가 되기도 했다. 코리안더와 함께 볶은 마늘을 닭과 주트 이파리를 섞어 만든 수프에 올려 먹기도 한다.

예술

룩소르 신전

이집트는 세계 최초로 체계적인 예술학과 건축학을 만들어낸 문명들 중 하나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약 5,000여 년 전 세계 그 어떠한 문명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당대에는 발달된 문명을 자랑하며 수많은 건축물들을 세웠다. 이들은 이미 수 천년 전에 현재는 ‘이집트 블루’라고 불리는 푸른색 염료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으며, 파라오들의 무덤에 화려한 색으로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 후세에 남겼다. 그 외에도 몇 천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들, 신전들, 무덤들을 여러 차례 지어 그 업적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고대 이집트 예술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조세르의 피라미드로, 당시의 천재 건축가이자 재상이었던 임호테프의 작품으로 고대 기술의 집합체라 보일 정도로 정교한 건축 기술로 지어졌다. 그 외에도 쿠푸의 대피라미드, 아부심벨 신전, 스핑크스 등 여러 건축물들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한편 현대 이집트의 경우에도 여러 건축학적 명작들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이집트 건축가인 하산 파티, 람세스 위사 와세프, 아이삭 파누스 등이 있다. 현재 이집트 예술의 중심은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이다.

축제

이집트에는 매년 2월 22일과 10월 22일에 아부심벨 신전에서 아부심벨 축제가 열린다. 이집트는 다양한 축제들을 여는데, 이들을 이집트어로는 '물리드'라고 부른다. 주로 콥트교나 수피교의 성인들을 기리는 종교적인 행사가 많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행사의 개념으로 축제를 즐긴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명절인 라마단은 이집트에서 상당히 독특하게 치러지는데, 소리, 빛 등으로 화려하게 도시를 치장하고 있으며 굉장히 성대하게 라마단을 기념하기 때문에 타 무슬림들이 일부러 라마단을 치르러 이집트로 여행을 올 정도이다.

이집트는 수 천년 동안 내려온 고대의 봄 축제인 ‘'샴 엘 나심(Sham en Nisim)'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4월과 5월 사이에 치러진다.

문학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랍어 작가 나귀브 마후즈

이집트 문학은 그 기원을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가며 가장 오래된 문학 중 하나이다. 사실 이집트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 즉 책을 발전시킨 최초의 [문화였다. 그것은 이집트 생활에서 중요한 문화적 요소이다. 이집트 소설가들과 시인들은 아랍 문학의 현대 스타일을 실험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고, 그들이 개발한 형태는 아랍 세계 전역에서 널리 모방되어 왔다. 무함마드 후세인 헤이칼의 이집트 최초의 현대 소설 자이납은 1913년 이집트어로 출판되었다. 이집트 소설가 나귀브 마후즈(Naguib Mahfouz)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랍어 작가였다. 이집트 여성 작가로는 페미니스트 운동으로 잘 알려진 나왈 엘 사다위( Nawal El Saadawi)와 여성과 전통에 관해 글을 쓰는 알리파 리파트(Alifa Rifaat) 가 있다.

모국어 시는 아마도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학 장르로 아흐메드 푸아드 네그름(파구미), 살라 자힌, 압델 라흐만 엘-아브누디의 작품으로 대표된다.

스포츠

이집트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축구이다. 카이로에서 열리는 친선축기경기인 ‘카이로 더비(Cairo Derby)'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기많고 격렬한 축구 경기들 중 하나이며, BBC도 이 카이로 더비를 세계에서 가장 험한 7개의 더비들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였다.] 또한 이집트의 대표 축구팀인 알 아흘리는 20세기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성공적인 축구 팀들 중 하나로, 현재는 최대 라이벌인 자말레크 SC와 힘을 겨루고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 최대의 라이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만 알 아흘리 측이 훨씬 더 유명세가 있어서, 20번 넘는 우승을 거두었으며 이탈리아의 AC 밀란과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를 추월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국제전 트로피를 거머쥐기까지도 했다.

이집트 축구국가대표팀은 애칭으로 '파라오'라고 불리기도 하며, 2006년, 2008년, 2010년에는 연속으로 우승하였으며 전체적으로는 아프리카 컵에서 7번이나 우승을 거머쥔 적이 있다. 아프리카 내에서는 최강 팀으로 평가받으며, FIFA 랭킹에서도 10위 권 내의 강팀이라고 분류된다. 이집트는 FIFA 월드컵에 3차례 나갔으며, 2018 FIFA 월드컵에서는 최고 선수인 모하메드 살라흐가 2골을 넣어 FIFA 월드컵 진출권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집트 유소년 대표팀은 2001년 FIFA 유소년 월드컵에서 동메달을 딴 바 있으며, 1928년과 1964년 올림픽 때에도 4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이집트에서 스쿼시와 테니스도 인기가 많다. 이집트 스쿼시 대표팀은 1930년대 이래 꾸준히 강한 실력을 보여왔으며, 2001년에는 국가 핸드볼 대표팀이 4위를 차지하며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이집트는 아프리카 남자 핸드볼 챔피언십에서 5번이나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아프리카 최대 강팀으로 인정받았으며, 2013년에는 지중해 챔피언십에도 우승했으며 2004년 비치핸드볼 챔피언십에서 승리했고 2010년 하계 유소년 올림픽에서도 승리했다. 이집트 농구 국가대표팀은 아프리카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아프리카 챔피언십에서도 16개의 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이집트는 1912년 이래 꾸준하게 하계 올림픽에 참여하였으며, 1951년의 1회 지중해 게임을 포함하여 여러 국제경기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1991년에는 아프리카 게임을 개최하였고, 2009년에는 FIFA U-20 월드컵, 그리고 1953년, 1965년, 2007년에는 팬아랍 게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집트 지도

이집트 주변 지도

북아프리카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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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국가 가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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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국가 가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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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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