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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시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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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시공화국 위치

인구시공화국(인구시어: ГIалгIай Мохк 갈가이 모흐크,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Ингуше́тия 레스푸블리카 인구셰티야)은 러시아 연방 북캅카스연방관구에 속한 자치공화국이다. 인구셰티야 공화국이라고도 부른다. 인구시공화국은 체첸공화국에 인접해 있다.[1]

개요[편집]

인구시 공화국의 면적은 3,123km²이며 인구는 507,061명(2020년)이다. 러시아 연방주체 중에서 인구대비 무슬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에 속한다. 인구시 공화국은 북카프카스 산맥에 위치하며 체첸공화국와 동쪽으로 경계를 맺고있으며, 서쪽으로는 세베르나야오세티야(북오셰티야)와 이웃하고 있다. 수도는 마가스(Магас, Magas)이다.

전체인구의 94%가 인구시인, 4%가 체첸인이고, 이들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고 있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인구 중 96%. 소수의 러시아인들도 거주하고 있지만, 내전으로 대부분 인구셰티야 공화국을 떠났다.

잉구슈족은 역사·문화적으로 체첸족과 관련이 많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카자흐스탄러시아로 추방되었었는데 이 과정에서 약 20만 명이 사망했다. 이후 귀국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에 상당수가 거주한다. 잉구슈족 이외에 잉구이쉬어를 공용어로 하며 대부분의 잉구슈는 자신을 갈하지(Ghalghaaj)라고 부른다. 종교는 수니파 무슬림이 우세하다.[2][3]

자연환경[편집]

국토 면적의 대부분이 캅카스 산맥으로 대략 150km정도 뻗어 있다.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은 고라샨(Mt. Gora Shan, 4451m)이며, 주요 강은 아사(Assa)강과 순자(Sunzha)강이다. 일반적으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최저평균 기온은 -7oC, 최고평균기온은 22o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200mm정도 된다.

역사[편집]

잉구셰티야의 역사는 체첸과 관련이 깊다. 체첸과 잉구슈 두 민족은 모두 캅카스 인종이며 같은 나흐족(Nakh)의 일파로 7세기 경 동시에 이 지역에 나타났고, 그 후 10여 세기 동안 함께 이 지역을 장악해 온 캅카스 원거주민들이다. 9세기에서 12세기 사이 조지아(그루지야)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방문하여 잉구슈족을 기독교화하였는데 관련 유적지가 이를 말해준다. 이들은 높은 에 요새를 구축하며 스키타이족과 사르마트인, 그리고 몽골과 같은 북방 유목민들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었다.

한때 기독교인이었던 체첸인의 다수가 16세기에서 19세기의 300년 동안 다게스탄 등 다른 인근 지역으로부터 온 수니파 선교사들에 의해서 완전히 이슬람화 되었다. 17세기 이후, 이슬람은 체첸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18세기에 제정러시아는 오트만제국, 페르시아제국과 함께 캅카스 산맥 지역 지배를 둘러싸고 3파전을 벌였다. 이 전쟁 당시 동부에 거주하던 나흐족은 러시아에 격렬히 저항한 반면, 서부의 나흐족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후 러시아인들은 이 두 집단을 각각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고, 두 집단의 거주지역 중 큰 도시의 이름을 따라 동부의 나흐족을 '체첸', 서부의 나흐족을 '잉구슈'라 구별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체첸은 광적이고 분파적인 신비주의 수피형제단 운동을 통하여 러시아 정복세력과 전쟁하였다. 1785년 세이크 만수르 운동이 저항의 중심으로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잉구셰티야는 러시아식민지가 되었다. 이맘 샤밀에 의해 주도된 체첸의 반러시아 항쟁은 1858년까지 지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체첸은 러시아의 영토로 복속되었다. 1865년 약 4만명의 체첸인이 튀르키예로 추방되었고, 러시아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893년 그로즈니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바쿠로 통하는 철로가 체첸을 통과하여 개통되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인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에도 체첸 민족과 러시아 간에는 치열한 갈등이 있었다.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한 체첸인들은 자신들의 저항을 성전으로 규정하고 전투적인 이슬람 교단을 중심으로 해방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0월 혁명과 내전 시기에는 한때 인접한 다게스탄 지역에 이슬람국가인 '다게스탄 체첸 회교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구소련군이 이들을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구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혁명 후 레닌은 제정 러시아에 의해 짓밟혀 왔던 체첸의 굴종적 역사를 상기하여 '러시아 내 이슬람교도' 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체첸인을 비롯한 모든 이슬람교도들의 권리를 보장했다. 1936년에 이르러 체첸-잉구슈 두 자치구가 합병하여 체첸-잉구슈 자치공화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의 스탈린 베리야의 숙청바람으로 1937년 여름부터 1938년까지 체첸-잉구슈 자치 공화국을 포함한 북캅카스 전역에서 지식인과 지방당 간부들 총 10만 명이 체포되어 일부는 처형되고 나머지는 타지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1940년 초 체첸인과 잉구슈들은 하산 이스라일로프(Khassan Israilov)의 지휘로 구소련에 다시 저항했으나 1942년 말에 진압되고 말았다. 체첸인에 대한 러시아의 박해는 제2차대전 말기 또 다시 전개되었다. 당시 스탈린의 구소련당국은 체첸인들이 지역을 일시 점령했던 독일군에게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1944년 2월 체첸-잉구슈의 거의 전체에 해당하는 약 50만명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강제이주 대열에서 도망친 소수 사람들은 캅카스 산악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구소련군을 괴롭혔고, 강제이주와 게릴라 투쟁 과정에서 약 23만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 구 소련 당국의 민족 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체첸-잉구슈의 연대감을 복돋우며 고향으로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수피타리카스(Tariqas; brotherhoods) 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의 노력과 흐루시초프의 개혁노선에 힘입어 1957년 체첸 민족은 명예회복을 이루었고, 고향으로의 귀환이 허용되었으며 자치공화국으로 부활되었다. 구소련이 붕괴해 가던 중, 1991년 10월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러시아로부터 체첸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잉구슈 역시 1992년 10월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두 공화국은 1993년 12월 채택된 러시아 연방헌법에 의해각각 신생 러시아연방의 구성공화국으로 공식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산업[편집]

캅카스 산맥의 북부 산록 끝에 자리잡고 있어 다른 인접 국가에 비하여 평지가 많은 편이다. 캅카스 산간지대 주민은 목축과 낙농업에 주로 종사하며 평지 주민과 농산물 거래를 한다. 자원으로는 석유, 천연가스, 이탄, 그리고 금속 등이 있다.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잉구셰티야는 석유화학 공업의 발달에 주력하였으나 여전히 많은 주민들은 곡식이나 과일 재배 등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 지방정부는 관광 산업의 발전을 꾀하려고 있다.

교통[편집]

영토가 크지 않기에 기차와 같은 교통 수단은 존재하지 않고, 한국의 버스와 같은 마르슈트카를 탄다.

사회 및 문화[편집]

잉구셰티야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잉구슈인은 절제심과 관대함이 강하며 대체적으로 예의가 바르다. 가부장제인 핵가족이 주를 이루며, 재산 상속권은 남편에게 있다. 가족으로서의 자격은 그 가족의 부(父)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가족은 씨족의 구성원이 된다. 씨족들이 모여 하나의 부족을 구성하며 결혼은 부족 내에서만 허용한다. 배우자의 선택권은 부모에게 있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연장자에 대한 예우는 깍뜻하여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며, 이들의 문화적 유산은 토착적인 카프카즈의 예술 및 지적 전통과 함께 한다.

잉구슈인(人)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종교를 통해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가족에 의한 정체성은 비잉구슈인들과의 결혼 비중이 늘어 그 중요성이 많이 상실되었지만, 종교에 의한 정체성은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통해서 더 강해졌다. 잉구슈인들과 체첸족은 구 소련지역에서 가장 독실한 무슬림 중의 하나로 강한 종교적 민족주의 성향을 띈다. 특히 1940년대 스탈린에 의한 강제 이주로 인해 민족적 반감이 강하게 남아있다. 폐허가 된 교회 건물들이 기독교의 흔적을 보여주지만 현재는 기독교인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일요일은 하나님의 날, 금요일은 마리아의 날이라는 풍습은 기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들의 의상은 서양식 계통을 따르며, 취미로 목공예, 옷감짜기, 모피생산 등을 즐긴다. 1994년 잉구쉬 주립대학이 오르드조니키제브스카야(Ordzhonikidzevskaya)에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대외분쟁[편집]

잉구셰티야의 최근 가장 큰 분쟁 중의 하나는 1992년에 발생한 오세티야-잉구셰티야 분쟁이다. 이 분쟁은 스탈린 정부에 의한 1940년 대 강제이주로 거슬려 올라가는데 당시 스탈린 정부는 잉구슈인들이 거주하던 프리고로드니(Prigorodnyi)지역을 오세티야에 넘겨주었다. 1957년 이후 이들이 다시 귀환하면서 이 지역의 반환요구가 주요 갈등의 원인이 되는데, 결국 1992년 잉구셰티야 공화국이 북오세티야에게 영토반환요구를 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진주로 인해 수많은 잉구슈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다. 이전쟁을 계기로 6만 여명의 잉구슈인들이 추방되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북오세티야 공화국〉, 《위키백과》
  2. 인구셰티야 공화국〉, 《나무위키》
  3. 잉구셰티야〉, 《네이버 지식백과》
  4. 잉구셰티야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캅카스 같이 보기[편집]

남캅카스 국가
북캅카스 지역
캅카스 도시
캅카스 지리
캅카스 문화
캅카스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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