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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데이비슨 록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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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년 7월 8일 ~ 1937년 5월 23일)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년 7월 8일 ~ 1937년 5월 23일)는 미국기업인이다. 석유 산업에서 이름을 떨쳐 석유왕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앤드루 카네기와 함께 대공황 이전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기업가였으며, 카네기 멜런 대학교를 설립한 앤드루 카네기, 밴더빌트 대학교를 설립한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처럼 시카고 대학교록펠러 대학교를 설립했다. 다만 동시에 당대 석유 산업의 90%를 독점한 독점왕으로 악명을 얻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에너지 회사를 보유했던 그의 영향으로 반독점법까지 만들어져서 현재는 시장 상태가 블루 오션이 아닌 이상은 한 기업이 산업을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요[편집]

미국의 사업가·대부호이다.

1870년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 석유 사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역대 세계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재산은 약 4090억 달러 한화 498조원 정도이다. 2010년 현재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엑슨모빌도 그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839년 7월 8일 뉴욕주에서 순회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1853년 가족을 따라 오하이오주로 이주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16세 때 클리블랜드에서 농산물 중개 상점에 근무하다 곧 자신의 중개 사업을 시작했다. 1859년 펜실베니아에서 석유 광맥이 발견되자, 1862년에 석유 정제업에 손을 대었다. 1870년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설립하고 뛰어난 경영 수완으로 얼마 안 되어 미국 최대의 정유 회사가 되었다.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조직하여 석유업의 독점적 지배를 확립하였으나, 반 트러스트 법 위반으로 인정되어 1899년 트러스트를 해산하였다. 이어서 뉴저지 스탠더드 석유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1911년 미국 대법원에 의해 해산을 명령받아 은퇴하였다(은퇴를 했지만 회사의 지분은 대부분 그가 소유했다). 그 후 자선 사업에 몰두하여 시카고 대학교를 설립하고, 록펠러 재단을 세워 병원·의학 연구소·교회·학교 등의 문화 사업에 전념하다 1937년 97세로 고인이 되었다. 그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존 D. 록펠러 2세가 사업을 계승하였으며, 부통령을 역임한 넬슨 록펠러 등 그의 많은 후손들이 정계·고위공무원·재계 출신으로 미국의 유명한 록펠러 가문을 형성했다.

생애[편집]

유소년기[편집]

1839년 7월 8일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와 어머니 엘리자 데이비슨 4남 3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정부 낸시 브라운 사이에서 얻은 두 딸까지 합하면 4남 5녀 중 셋째다.

록펠러는 그의 전기에서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이 문구만 보면 진짜 흙수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록펠러의 집안은 당시에도 중산층 이상[9]인 경제적으로 나쁘진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는 그 자신의 기적같은 성공을 더욱 포장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물론 유년 시절 대비 이후 재력가로서 엄청난 성공한 거다.

록펠러의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의사를 사칭하며 이상한 약장사까지 한 사기꾼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행동이 잦은 탕아였다. 이 아버지란 인간은 본처가 살아있을 때도 가정부랑 바람을 피워서 사생아를 두 명씩이나 뒀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아이들을 버리고 가명을 쓰고 캐나다로 도주해 젊은 여자랑 재혼해서 오랫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장사 수완 등의 교육은 혹독하게 시켰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용돈을 주는 대신에 파리를 잡으면 3센트, 쥐를 잡으면 5센트씩 주는 식으로 용돈벌이를 하게 시켰으며, 어머니의 직장에서 일손을 거드는 식으로 노동의 과정에서 경제관념을 익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는 어린 나이부터 수입 장부를 만들어 돈 버는 재미를 익혔다. 심지어 아버지는 성인이 된 록펠러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새 집에 들어가는 대가로 집세를 낼 정도였다. 또한 하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자기가 받아준다는 아버지의 말에 록펠러는 의심 없이 아버지 품으로 떨어졌으나, 아버지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아무도 믿지 말거라. 심지어 아버지인 나조차도. 마치 실제 야생에서 야생 동물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이런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록펠러는 일생 동안 엄청난 철두철미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 영향인지 훗날 철인으로 불리며 미국의 최고 부자가 된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한 달 앞둔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투신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작은 기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뭔가 큰 규모를 갖춘 업체에만 관심이 있었다" 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디딤돌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휴잇 & 터틀사의 경리 직원으로 채용된다. 록펠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고작 몇 년 전이었는데, 직후 대통령이 되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중퇴고 부통령은 장가 가기 전까지 문맹이었으니 고졸만 해도 당시 사회에선 나름 괜찮은 학력이었다.

창업, 그리고 석유왕이 되다.[편집]

1858년 연봉협상에 회사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대뜸 사업 파트너를 구해 자신들의 사업을 꾸려 나가기로 하는데, 이 당시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자본금이 부족했던 그는, 은행에서 닥치는 대로 엄청난 돈을 빌려서 큰 자본금을 만들어 사업에 투자하고, 이득이 나면 돈을 갚는 것보다는 재투자로 돌려서 더 큰 이득이 나온 다음에야 갚는 방식을 이용했다. 한 마디로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한참 높아야 가능한 무모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업은 성공했고, 꽤나 준수한 실적을 올렸다. 물론 록펠러가 본격적으로 거상이 되는 건 이후 닥친 남북전쟁과 이른바 재건 시기에 기회를 포착하고 빠르게 사업을 확장한 덕분이 컸다.

남북전쟁 당시 모건-록펠러-듀폰 커넥션의 일원이던 록펠러는 전쟁 이후 록펠러의 삶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최초의 유전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 당시 석유는 별로 가치가 없었던 물건이었으나, 곧 연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결과적으로 그 유전 지대는 꽤나 번성하게 된다.

유전이 발견된 초기만 하더라도 록펠러는 이쪽 관련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어느 순간 사람들이 석유 채굴에 눈을 돌리지만 진짜 돈이 되는 사업은 석유를 정제하는 정유사업이라는 걸 깨닫고 '이거다!' 라는 느낌을 받아 정유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석유 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할 무렵, 그는 동업자였던 모리스 클라크 외에 새뮤얼 앤드류스까지 끌여들여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록펠러는 사업 확장에 별 뜻을 보이지 않는 동업자인 클라크를 못 미더워했고, 결국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기업을 사기로 결정한다. 이때의 일화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는데,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고, 록펠러는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클라크에게 맞섰다.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입찰을 시작하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가서 4만, 5만, 6만 달러가 되었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동안 가격은 어느덧 7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7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모리스 클라크가 말했다.

"7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클라크는 손을 들었다. "이제 이 회사는 자네 것일세."

록펠러가 스스로는 말하기를, 이 날이 살아갈 길이 정해진 날이라고 표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놀라운 것은, 당시 불과 26살에 불과했음에도 상기된 7만 달러 이상의 회사 매입 자금을 신용 하나로 대출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클리블랜드 금융가에서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회사의 부채는 10만 달러가 넘어갔지만, 록펠러가 주장한 대로 당시는 긴축이 아니라 확장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고, 당해 연간 수입은 100만 달러였고 이듬해에는 200만 달러로 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록펠러는 자기의 회사가 얼마만큼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이 일했던 그 누구도 몰랐다. 또 이때 상당히 운이 좋기도 했는데, 바로 존 록펠러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형을 보고 자신도 뉴욕에서 석유 사업을 하며 꽤 규모를 키운 뒤에 형의 회사에 인수되는 방식으로 합병을 해준 것이었다. 윌리엄 록펠러는 이외에도 여러 사업을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서 그것을 스탠더드 오일에 투자하는 든든한 자금줄이 된다.

당시 그가 살던 클리블랜드는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자체는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였는데, 당시 철도업계의 1인자였던 코닐리어스 밴더빌트가 석유 운송을 장악할 요량으로 클리블랜드에 진출한다. 이는 그에게 둘도 없는 기회가 된다. 일단 석유를 생산하면 옮겨야 하는데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미국을 일으킨 거인들'에 의하면 밴더빌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차가 고장나서 아침 기차를 놓쳤고 그 기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생기자 이를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이후의 사업에서 무자비한 행보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19]

서서히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 와중에 록펠러는 그가 처음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을 여지를 제공한 악명 높은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리베이트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비단 정유업뿐만 아니라 철도 운송에도 손아귀를 뻗치기 시작한다. 그의 회사의 거대함으로 인해, 록펠러는 철도 업계에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록펠러는 리베이트 계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진 스탠더드 오일을 창설했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나오는 단가 절감뿐만 아니라, 리베이트 시스템으로 인한 운송비 절감에 힘입어 스탠다드 오일의 힘은 점점 강해져만 갔고, 그 영향력은 다른 업계에까지 미쳐,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그리고 밴더빌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톰 스콧에게 가장 큰 물량을 제공하는 고객으로서, 리베이트를 점점 올려가며 운송 요금을 후려쳐갔다.

사업을 커지고 주머니는 두둑해져 가지만, 그의 절약과 검소함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자세는 전혀 변함이 없었는데, 그 대표적인 일화가 스탠더드 오일 창설 직후에 있다. 본인 소유의 정제소를 시찰하던 중 록펠러는 본인 회사 소유의 원유 운송용 나무통의 땜질이, 총 40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휘하 직원에게, "38번으로 해보시오."라는 말을 던지고 확인 결과, 38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 중에는 새는 것이 있었지만, 39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은 새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9번의 땜질 지시가 담긴 공문이 전 지사 및 사원에게 회람되게 된다. 장년~노년 즈음에, 관련하여 질문을 받은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걸로 꽤 많이 아꼈지."라고 회상하게 된다.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하나만 사주고 공유하게 하였고, 옷이 해지기 전에는 절대 새 옷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집에서 알바도 시켰는데 다른 일꾼들과 똑같은 인건비를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볼 때 분명 무리한 독과점으로 세간에서 욕도 많이 먹은 사람이지만, 문헌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국가나 법률도 믿지 않고 그냥 자기 신념대로 일을 처리한 사람으로 보이며 이는 석유 산업을 수직계열화하여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자리잡도록 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회사 이름이 STANDARD인 이유는 당시 등유 품질이 나빠 등불을 켜놓고 자다가 폭발로 화재가 나는 등 불순물이 많은 저질 등유가 많았는데 우수한 기본 품질을 유지하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이었으며, 땅에 파이프만 꽂으면 석유가 나오는 당시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석유 개발과 정유업에 뛰어들어 블랙홀로 빠질 수도 있는 석유 산업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초기에 쓸어버려 빨리 정착하게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1880년대 들어서 전 세계 원유 공급의 90%가량이 스탠더드 오일이 필라델피아를 통해 공급하고 있었고, 이를 본 다른 국가에서도 산유지를 찾아 원유를 채굴하기 시작한다. 즉, 석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록펠러는 43세에 미국 최고 부자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미국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기며 순식간에 뉴욕 재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철강 산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며 메사비 대광산을 매입하는 것을 필두로 철강 사업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그쪽에는 본좌인 앤드루 카네기가 버티고 있었고 둘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록펠러 쪽에서 철강 산업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면서, 마침 카네기의 사업을 인수한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스탠더드 오일 측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광산 채굴권을 "적절한 조건과 대우"를 받고 넘김으로써 록펠러 측에서는 모건의 철광산업 트러스트 형성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 와중에도 본업인 석유 사업은 꾸준히 성장하여 53세에 확고한 위치를 다진다.

반독점법과 해체[편집]

이후 미국의 주마다 있는 스탠더드 오일 사의 지점을 쪼개 새로운 법인을 만들고, 규제가 강한 뉴욕주보다 맨해튼에서 가깝고 규제도 상대적으로 약한 뉴저지주의 스탠더드 오일사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어떻게든 유지해보려고 했으나, 1911년 결국 스탠더드 오일은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해산 명령을 받게 되며 34개의 회사로 분리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합종연횡을 거쳐 현재도 존속중이며, 소위 7대 석유 메이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중 스탠더드 오일 오브 뉴저지(지주회사)는 현재 석유회사의 본좌인 엑슨, 뉴욕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ony: 스탠다드 오일 오브 뉴욕)는 이후 모빌이 되었다가 두 회사가 합병하여 엑슨모빌이 되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al: 스탠더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가 현재의 쉐브론(칼텍스)이다.

그런데 이 해체 결정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게 분리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 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왜냐하면 독점 상태에서 경쟁사를 말려죽이기 위해 갤런당 6센트라는 염가에 팔고 있었는데, 더 이상 독점 상태가 아니니 새로 쪼개진 회사들이 너도나도 가격을 올려 40센트 가까이 폭등한 것이다. 퍼센트로 따지면 거의 700% 가까운 폭등이었다. 이는 물가의 상승을 불러와 미국 서민들에게는 고통을, 당사자 록펠러를 비롯한 주주들에게는 희열을, 그리고 루스벨트 행정부에게는 지지율 폭락이라는 폭탄을 안겨주게 되었다. 게다가 원래 스탠더드 오일 전체 지분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던 록펠러는 새로 탄생한 34개 사의 지분을 골고루 소유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기업분할로 인해 스탠더드 오일이 존속했을 경우보다 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조적으로 국정 회의에서 "요즘 월 스트리트에서는 '자비로운 하나님, 제발 한 번만 더 해체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를 한다는군."이라고 언급했을 정도. 심지어 록펠러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해산될 즈음 같이 골프를 치던 친한 목사님에게 돈 벌고 싶으면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두라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쪼개버린 덕에 유럽계 석유 회사들은 쾌재를 부르게 되었고, 쪼개진 스탠더드 오일사의 일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실제 해산되기 전 스탠더드 오일은 거의 전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을 장악한 이후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최대주주인 로열 더치 쉘, 알프레드 노벨 일가가 운영하는 러시아의 브라노벨과 경쟁을 벌여 결국 승리했는데, 이 이후의 세계 석유시장은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한 기업이 독점했던 셈. 이런 록펠러 시대의 스탠더드 오일은 당시 미국에 만연했던 트러스트나 독과점 기업들과 비교하더라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사례였다. 일례로 JP모건의 US스틸조차도 미국 철강업을 80% 선에서 독점하는 데 그쳤다.

시한부 선고와 자선사업 시작[편집]

록펠러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탈모증과 비슷한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 받았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아들아, 곧 세상을 떠날 텐데 네 마음껏 하나님께 바치고, 자선 사업이나 하고 가렴."이라고 말했고, 록펠러는 그때부터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자선사업을 시작하였다. 록펠러는 이때 가슴이 확 트이면서 행복을 느꼈다고. 록펠러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 후 40년이나 더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리버사이드 교회를 세웠다.

사실 50대 중반부터 이미 록펠러는 과도한 다툼과 경쟁 때문인지 스트레스성 소화불량 및 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때문에 록펠러 본인도 50대 이후부턴 동생들과 아들한테 사업을 넘기고 그냥 가진 돈으로 편하게 살고 싶어했다.

실제 20세기 들어 록펠러는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상태였고, 가문과 기업의 실질적인 지휘는 아들인 록펠러 주니어가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4년, 월급을 올려 달라는 광부들의 파업 현장에 회사가 고용한 경비원들과 주지사가 파병한 주 방위군이 총질을 해서 2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러들로 학살 사태가 일어난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미 연방군을 파견해 이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때 7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런저런 여파로 우울증이 심해지던 록펠러는 프레드릭 테일러 게이츠라는 교회 목사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지요.' 라는 말을 듣게 되고 남은 1년 동안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 고아원, 도서관을 세우고 연약한 자를 돕는 일 등을 하게 된다. 다만 자선사업에서도 입지가 나쁜 곳보단 될만한 학교를 지원하는 편이었고, 연장선상인지 록펠러 재단도 의학과 과학 등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는 데 집중했다.

노년의 록펠러는 죽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골프를 칠 정도로 정정했고, 죽기 4일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를 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1937년 5월 23일 오전 4시 5분 플로리다주 오몬드 비치의 별장에서 잠을 자다가 동맥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7세.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히 장수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록펠러는 1839년생이므로 매우 장수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인물 사진이 막 만들어지던 시절에 태어난 인물이 유성 영화 상용화 후에도 1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다.

시한부 판정 이후 1년 밖에 못 살 거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한부 판정 이후 43년이나 더 살았다. 막내 손자인 데이비드 록펠러(1915년생)가 성인이 되고 2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살아있었다.

이후 록펠러의 기업과 재산은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에게 상속되었고 그의 가문은 재력을 바탕으로 유력가로 거듭나게 된다. 정치계에 입문한 후손도 나왔는데 뉴욕 주지사에 네 차례 당선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부통령이 된 손자 넬슨 록펠러가 대표적이다. 록펠러 가문의 당주는 1915년생인 데이비드 록펠러며 그는 2017년 3월 20일 10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뒤를 이을 당주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데이비드 록펠러의 장남이자 록펠러 재단 이사회 일원인 1941년생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David Rockefeller Junior)가 유력하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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