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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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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종묘 정전(宗廟 正殿) 전경

종묘(宗廟, Jongmyo Shrine)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면적은 186,786 ㎡,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로3가역과 매우 가까워서, 11번 출구로 나가 조금(5~10 m)걸어가면 종묘가 앞에 보인다. 위치상으로 창덕궁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2011년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이 구간을 복원하면서 육교를 철거했다. 설로 궁의 동쪽에 종묘를 짓는다.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 경복궁(정궁)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다.

개요[편집]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와 헌종 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 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 때 처음 짓고 세조 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편집]

기원과[편집]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묘의 시초는 옛 중화권 국가인 상(은)나라에서 처음 그 개념을 정립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주나라 대에 이르러 《예기》에 실린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의 개념이 잡혔다.

주나라식 왕실 예법을 기록한 예기에는 "천자(天子)는 7묘, 제후(諸侯)는 5묘, 대부(가신)는 3묘, 그 밑에는 따로 사당을 두지 않는다." 라고 되어있다. 종묘의 세부 규칙은 더 많지만 기본적으로 이 문장이 종묘의 대표적 규칙이 되었다. 종묘에 안치된 천자는 묘호와 시호를 올려 찬양한다. 제후와 대부는 천자가 내려준 시호로만 공덕을 찬양한다. 묘호는 당나라 이전까지는 큰 공이 있는 천자에게만 올렸는데, 당 이후로는 모든 천자가 가지게 되었다. 천자의 공덕을 후대가 감히 논한다는 것이 맘에 안 들었던 진시황은 시호 제도를 없애 버린 적이 있다.

다만, 현재 중국 자금성 앞에 자리한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태묘는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기 시작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공원화되고 황실의 제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본고장에서 말살된 전통의 명맥을 어찌보면 한국의 종묘가 잇고 있는 셈. 결국 중국의 종묘제도가 구시대 착취의 상징 비슷한 뉘앙스로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며 박살난지라 중국학자들이 이 부분을 연구하려면 한국의 종묘를 연구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사의 시조묘[편집]

고대의 한국 왕조 또한 전통적인 시조묘(始祖廟)/조상숭배 신앙이 존재했다. 이런 시조묘, 시조상 등은 사서에서 중국의 종묘와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고조선 건국신화에서 건국자와 천신을 혈연적 관계로 묶은 것에 기초해 신단수를 천신 제사와 더불어 조상 제사를 지낸 성지로 보며, 고조선 때부터 시조 숭배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후 삼국시대 각 나라의 관련 기록에서 초기부터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든다.

'종묘(宗廟)'라는 단어가 한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였다. 동천왕 때 위나라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평양성을 새로 쌓으면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에 3세기까지 종묘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나와, 종묘라는 시설의 존재를 확실히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종묘는 이후 왕조처럼 완전한 유교식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시조묘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왕실이 아닌 유력 귀족 가문에서도 자신들만의 종묘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다른 근거로는 647년(보장왕 5년)에 동명왕모의 소상이 3일이나 눈에서 피를 흘렸다는 기록인데, 위패가 아닌 신상을 모셨다는 것 역시 중국식 유교의 종묘는 아니다.

백제의 경우 동명묘와 구태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 사서인 《책부원귀》, 《수서》에서는 구태설을 채택하여 '백제에서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시조 구태묘를 세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설을 채택하고 있으며, 온조왕 때 동명왕과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백제는 시조신 제사를 지내면서 동시에 천지신 제사를 올렸는데, 백제 법왕 때부터는 천지신 제사나 시조신 제사보다 불교의례가 중시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후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제사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멸망 당시 부여풍이 제사권만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짤막하게 나오는 것이 전부다.

신라에서도 초기부터 전통적 시조묘가 존재했으며, 이는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역할로 추정된다. 6세기에 시조묘를 대체하는 신궁(神宮)을 짓고 4계절마다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신궁은 신라 말기까지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제사를 크게 지내는 장소였다. 하지만 삼국의 어느 기록이나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는 아니다.

한국사의 유교적 종묘[편집]

신라[편집]

이후 고려조선의 종묘로 이어지는 중국식 유교적 형태의 종묘 제도의 도입은 통일신라 초기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통적 시조묘-신궁과 별개의 추모시설로 공존했으며, 상세한 기록을 통해 후대에 이어지는 완전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유교적 종묘시설의 위치는 첨성대 남쪽, 황남동 123-2번지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앞서서,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665년에 당나라에서 주도, 사실상 강요한 백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간의 취리산에서의 회맹을 기록한 금서철계(단서철권)의 반쪽을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게 했다고 하는데, 신문왕 이전에 이미 신라에 종묘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기록상 명확하게' 등장하는 건 좀 더 시간이 지나서 687년 신문왕 때 태조, 진지왕, 문흥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5위를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혜공왕(765 ~ 780) 때 이르러서 미추왕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삼고,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2위를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불천위로 정하는 동시에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제후식 오묘제 종묘를 만들었음에도 태조, 태종 같은 천자식 묘호를 올린 것 또한 신라 종묘의 특이점이다.

신라 하대를 연 선덕왕은 경덕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부친 개성대왕을 부묘했다. 성덕왕의 신위를 그대로 둔 이유는 선덕왕의 어머니 정의태후가 성덕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외가 쪽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성덕왕과 개성대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조부 흥평대왕과 부친 명덕대왕을 부묘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이후 애장왕 때는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혜충대왕, 부친 소성왕을 부묘했다. 애장왕 이후의 부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경주 황복사(皇福寺)지 삼층석탑의 1942년 해체 수리 중 발견된 사리함에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고 적힌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불교를 국가차원에서 숭상했던 나라답게 사찰이 종묘의 기능을 맡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에는 특정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또는 창건주가 자신의 개인적인 소원 성취를 위해 발원해 짓는 절을 원찰(願刹)이라고 불렀고, 신라에서 국왕들은 물론 고위 귀족들도 모두 이러한 원찰을 가지고 있었다. 원찰(원당)은 고려 시대는 물론 숭유억불을 기조로 삼았던 조선 시대까지 근근히 이어졌는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왕릉 관리를 맡기기 위해 지었던 흥천사나 왕실로부터 영녕릉과 광릉을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맡게 된 신륵사와 봉선사, 정릉 관리를 맡은 봉은사, 조선 정조가 현륭원 관리 및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창한 용주사도 원찰에 속한다. 왕실에서 발원해 지은 원찰(원당)의 경우는 사실상 '불교화된 종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발해[편집]

발해도 3성6부제와 같이 당의 제도를 다방면에서 수용한 나라이므로 종묘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발해라는 나라가 워낙에 자체적으로 남긴 문헌 자료가 없는 데다 관련 유적 발굴 결과도 발해의 종묘 흔적을 보여주는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2011년에 한국러시아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연해주 콕샤로브카 1평지성터에 대한 네 번째 발굴조사에서 '종묘'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발해 당대의 것이 아니라 10세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뒤에 현지에서 일어난 부흥세력이 지은 종묘의 흔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기호 교수에 따르면 해당 유적은 7묘제, 그러니까 천자국의 제도를 따라서 지어져 있다고 하며, 같은 시기 당나라(그리고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와 조선)에서 후한 명제 이래의 동당이실(同堂異室)에 따라 종묘를 지었던 것과는 달리 고대 주나라의 제도를 본따서 동당동실(同堂同室) 형식으로 태묘를 가운데 두고 그 앞으로 세로 2열로 소목을 배치한 구조였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유적에서는 쪽구들을 배치한 흔적도 확인되었는데,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처럼 모셔지는 공간이라서 살림집처럼 온돌을 설치한 것이라고. 중국의 주례 고공기에 따르면 종묘는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원칙에 따라 왕이 거주하는 궁성 동쪽에 짓도록 되어 있어서 발해에서 한때, 혹은 멸망 직전까지 수도로 기능했던 상경이나 동경 등의 유적에서 실제 발해 당시의 종묘 흔적이 발견된다면 동부 구역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고려[편집]

고려시대에 들어서 최초의 종묘 기록은 성종 7년 처음 오묘제(五廟祭)를 정하고 묘호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음 해 4월에 종묘 건설공사를 시작해 3년 뒤 공사를 마쳤다.

본격적인 종묘제례가 시작되었으며, 처음엔 신라의 1세대당 1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였다. 하지만 성종 9년에 5묘 9실제를 채택하여 종묘에 9실을 설치하고 네 위패는 불천위로, 나머지 다섯 위패는 세대가 지날 때마다 옛 신위를 옮겼다.

지속적으로 9실제를 이용하다가 덕종 때 태조, 혜종, 현종 세 군주를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정했다. 예종 대엔 9실제를 썼다. 인종 대에 잠시 5묘제로 바뀌었지만 의종 대에 들어서서 천자식 7묘제로 개편, 구실을 만들어 신위를 보관한다. 또한 별묘를 만들어서 다른 군주들을 섬겼다.

이후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태묘를 재정비하게 되는데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경(개성)의 종묘는 무너져 버렸고 강도(江都)에 태묘를 다시 짓는다. 고려 고종태조, 혜종, 현종, 선종, 숙종, 예종, 인종, 신종, 강종 9명을 다시 모셨다.

이후 원종이 1270년 개경 환도하면서 7묘제 종묘를 재건설한다. 하지만 묘호 같은 천자식 예법은 아들 충렬왕 대부터 쓰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충렬왕 때 다시 5묘제로 바뀐다.

충선왕 때는 기존의 5실 외에 동서에 협실을 하나씩 두고 동실에는 문종과 명종을, 서실에는 혜종과 현종을 모셨다. 또한 공민왕 시기 이제현의 상소를 보면 강화도에서 나온 후 형식적으로는 1당 5실의 제도지만 실제로는 22개의 신주를 일렬로 모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의 종묘 건물을 3개의 실로 나누고, 실은 다시 방으로 나누는 동당이실이방 제도로서 조선의 종묘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고려사》엔 군주가 태묘에 제사 지내러 갈 때의 예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고려사 악지엔 태묘 악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종, 공민왕 대의 악장만이 남아있다.

예종은 태조, 혜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숙종 아홉 명을 모셨고 공민왕은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아홉 명을 모셨다.

고려의 종묘는 고려왕조가 멸망한뒤 새로운 왕조의 종묘 부지가 되어 헐리고 태조 이하 고려 국왕들의 위패는 배에 실어서 강에 띄웠는데, 강물에 떠내려가서 도착한 곳에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위패를 맡아 보관하게 된 것이 연천 숭의전(崇義殿)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이 숭의전도 현존하는 것은 6.25 전쟁 때 불타서 다시 지은 것.

조선[편집]

1909년 종묘 정전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궁궐을 짓는 일보다 먼저 서두른 공사가 바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건설이었다. 한양 천도가 확정되기 전에는 개경에 있던 고려의 태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으나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한양에 새로운 종묘를 짓기 시작했다. 같은해 12월 4일에 시작한 종묘 공사는 다음 해인 태조 4년(1395년) 9월 29일에 끝났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담 안쪽에 대실 7칸,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이 있었고 담 바깥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 5칸, 남행랑 9칸, 재궁 5칸 규모였다. 왕위를 미리 예상했는지 정도전이 24칸으로 정전 건물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성계가 더 늘려 달라고 졸라서 반 칸을 더 늘려 24칸 반으로 제일 처음부터 지었다는 설이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인 1990년대까지는 사실 마냥 매우 유명했다.

태종은 종묘 앞에 인공으로 가산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한 뒤 一자 형식의 종묘 정전에 양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월랑을 잇대어 건축해 가운데가 길쭉한 ㄷ자 형식으로 바꾸었다. 월랑을 대는 것은 옛 제도(중화식)에 어긋나며 중국 사신들이 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웃을지 모른다고 대언 김여지가 간언하자 태종은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 종묘까지 뭐하러 들어 오겠냐. 와서 보더라도 그냥 '아, 이게 조선의 방식인가 보다' 하고 말지 비웃긴 왜 비웃냐!"하고는 그대로 월랑(越廊)을 짓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묘에는 정전(正殿)만 있었으나 세종 2년(1419년)에 정종이 세상을 떠나 신위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 기존의 정전 5실이 만원이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2년 뒤 정전 서쪽 곁에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을 세웠다.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이로써 중국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독특한 종묘 제도의 기본적인 형태가 정립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왕들은 점점 늘어나고 신위를 모실 종묘의 방이 점점 모자라자 명종 때 정전을 4칸 더 증축해 11칸으로 규모가 커졌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양으로 들어온 왜군들 중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 내 종묘에 집결,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비명횡사로 급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였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키고 남별궁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종묘를 제외한 궁궐들(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방화 시기와 주체는 명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에 반해, 종묘는 그 방화 시기와 주체가 명확하다.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겨우 끝났는데, 이때 정전(正殿)을 임진왜란 전의 조선의 제도로 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따를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전자로 하기로 결정하고 11칸 규모의 건물로 다시 지었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에 4칸을, 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이것이 정전의 마지막 증축이다.

영녕전은 선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후 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는 임금이 아닌 일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므로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숙종대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숭 복위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왕조 재위 임금 신위 총 25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정말 우연히도 영녕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실에 의민태자와 자행비의 신위를 모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전과 영녕전의 감실이 정확히 딱 채워져서 감실이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되었다. 영친왕 내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위를 추가할 일도 없기 때문에 마치 딱 맞춘 것처럼 일이 된 것.

이 외에도 정식으로 재위한 임금은 아니지만 덕종, 원종, 장조, 문조추존 임금들도 종묘에 모셔져 있다.

일제강점기[편집]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는 미명 아래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도로를 개통했다. 순종이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며 결사반대해 조선총독부도 어쩌지 못하다가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마자 바로 공사에 들어가 완성시켜버렸다. 이 도로가 바로 지금의 율곡로.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는 콘크리트 육교로 연결되었는데, 2011년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이 구간을 복원하면서 육교를 철거했다. 이때 끊어져 버린 구간이 다시 이어지는 데까지는 90년이나 걸렸다.

참고로 조선총독부에서 종묘 담장에 새긴 '쇼와 8년 3월 개축'이라는 문구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후, 안내판을 붙인채 존치하는 쪽으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모든 문구 위치에 붙은 것은 아니라 이후 국감에서 다시 문제제기가 되었다.

그 이후[편집]

1985년 종묘광장공원(宗廟廣場公圓)이 조성되었다.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한 정리 사업이었다. 그리고 1991년 민자 유치로 종묘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면서 임금이 종묘에 배향할 때 쓰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마르고 상당한 지하 유물이 멸실되었다. 당시 관점에는 비는 공간을 실용적으로 쓰자는 목적이었겠지만, 현재 기준에서 보면 세계유산 종묘 권역에 주차장을 건설하거나 세계 유산인 태릉에 선수촌을 건설하는 것은 기겁할 노릇이다.

2011년 5월 3일부터 853억 원을 들여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율곡로를 지하화하여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2010년 10월 착공한 율곡로 구조개선 공사 과정에서 문화재인 궁궐 담장 기초석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해 공사가 연기되어 2014년말 복원 완료 예정이었다. 그러나 설계, 공사 방식 변경으로 2020년 12월로 연기되었다.

종묘의 정문 바로 앞에는 1985년부터 종묘광장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탑골공원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들의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각종 집회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어서 종묘 방문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었다. 1985년 공원 조성 당시 부터 공연장인 국악정, 대형버스 주차장, 무료급식소 등의 시설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데다가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들이 등장하면서 각종 소음과 고성방가, 무료급식소로 인해 꼬이는 노숙자들]로 난장판이었다. 종묘가 일종의 성역인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었을 정도. 결국 서울시가 2007년 종묘광장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국악정 및 매점, 자판기 등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시설을 일부 철거하고 광장 내부의 버스 주차장과 무료급식소를 외부로 이전했다. 그리고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등의 불법 상행위를 단속했다. 이어서 성역화 사업으로 어도, 홍살문, 하마비, 어정, 피맛길, 순라길 등의 문화재를 원형 복원 예정이며 발굴 조사 중이다. 원래 계획은 2010년경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종묘 앞 발굴 조사에서 예상 이상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와 2010년 발굴 조사 지역을 한 차례 확대하면서 2014년까지도 계속 발굴 조사 중이다. 유물 발굴로 종묘광장 정비사업은 2016년 12월까지 계획 된 상태다.

2016년 3월 말 종묘전교 복원 및 제세동천 복원 및 녹지 정비를 완료한 종묘 서측 광장을 개방했다. 이후 2016년 말까지 종묘 동측 광장을 신성림 조성 및 정비를 진행 했다.

2020년 5월부터 종묘 정전이 30년 만에 보수공사를 가지면서, 2022년에 재개방을 할 예정이다. 이번 공사는 2015년 안전 점검 당시에 일부에서 물이 새거나 파손이 부분이 많아서 전면 보수를 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정전에 모셔져 있던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가 2021년 6월 5일에 창덕궁 내 구 선원전으로 이전하는 이안식을 거행했다.

2022년 7월 20일,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이 시작(2011년 5월)된 지 11년, 율곡로가 개통된 지 90년 만에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로 8천㎡ 가량 수풀을 덮어 끊어졌던 녹지 축을 잇는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2일에 개방되었다. 새로 조성한 녹지공간엔 참나무와 소나무, 국수나무 등, 우리 고유의 나무를 심었으며 왕이 종묘를 방문할 때 이용했던 '북신문'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위로 길이 나 있어서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 사이에는 개방되어 들어갈 수 있으며, 북신문 앞에서는 철담장 너머로 작게 창경궁이 내다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를 오가듯 창경궁과 종묘 사이도 바로 오갈 수 있도록 할 듯.

건축물[편집]

정문 주변[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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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대문(外大門)

종묘의 정문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며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어 있고 그 좌우로는 종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 외대문은 전면 중앙에 난 돌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노면이 높아져 땅속에 묻히고 한동안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었다. 2009년 매몰된 외대문의 계단이 발굴되었다.지금은 외대문 주변을 전체적으로 낮춤으로써 외대문의 계단을 노출시켰고, 따라서 외대문으로 입장할 때엔 돌계단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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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묘루(望廟樓)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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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대청(香大廳)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향, 축, 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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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신당. 망묘루 동쪽에 있다. 하나의 종이에 두 위의 초상화를 같이 그려 놓았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명령을 내려 같이 세웠다고 한다. 신당 내부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駿馬圖) 세 점도 같이 있다.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56호
사진 설 명
종묘 어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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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정(御井)

종묘 앞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로, 왕들이 종묘를 참배하러 올 때 마셨던 우물이라 해서 어정이라 불린다.

어숙실[편집]

사진 설 명
어숙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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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숙실(御肅室)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왕세자 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정전 주변[편집]

대한민국 국보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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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正殿)

대한민국의 국보이다.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태조를 비롯하여 임금의 신주 19위, 왕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남쪽 중앙에는 혼과 향로를 모시는 신문(神門)이,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東門)이, 서쪽에는 악공, 일무원, 종사원 등이 출입하는 서문(西門)이 있다.

정전의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를 조성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정전의 신실로 통하는 신로(神路)가 남북으로 나 있어 사묘 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낸다.

정전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이며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단청도 최소화해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길이가 101 m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단일 목조건축으로는 가장 길다. 신주로 모시는 임금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계속 방이 증축되어서 이러한 길어졌는데, 건축물의 조성 방법 중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전의 기둥을 잘 보면 미묘하게 오래된 정도가 다르다. 서쪽이 오래된 것. 신위는 가운데에 태조를 모시고 좌우에 후대 임금을 소(昭)와 목(穆)으로 삼아 배치하는 소목 제도가 아니라 서상(西上)의 원칙에 따라 서쪽부터 태조 이하 후대 임금을 모셨다.

'정전'이라는 이름은 여러 채로 구성된 건물군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지만, 종묘의 정전은 특정한 이름 없이 그냥 정전이다. 종묘의 정전에는 현판이 없다.

여담이지만 굉장히 큰 건물이라 어지간한 전문가용 렌즈로도 정전의 전체 모습 촬영이 불가능하다. 건물 크기도 크기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거리가 내삼문까지로 한정되어서 그렇다. 위의 사진처럼 건물 전체가 나온 사진들은 따로 찍어서 현상하며 이은 것들이다.

칠사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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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사당(七祀堂)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서쪽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국행지신(國行之神, 도로를 주관하는 신), 공려지신(公厲之神, 후사가 없는 제후의 신), 국문지신(國門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중류지신(中霤之神, 당실과 거처를 주관하는 신), 사조지신(司竈之神, 음식의 일을 주관하는 신), 사호지신(司戶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사명지신(司命之神, 사람의 선악에 따라 응보하는 신) 일곱 소신의 위패를 모시고 사계절에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계절에 따라 봄에는 사명과 호,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문과 여, 겨울에는 행과 중류를 모신다. 이들 중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五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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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당(功臣堂)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자리한 정면 1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시간이 흐르면서 정전이 증축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신당 또한 증축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임금의 생존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제1대 태조의 공신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의 공신 효문공(孝文公) 서정순(徐正淳)까지 모두 제왕 19위에 공신 83위의 위패가 모셔졌다.

종묘의 공신당에 모셔지는 공신은 '배향공신'이라 해서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공을 세운 28종류 공신과 성격이 다르다. 생전에 공적이 많은 사람을 해당 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선정한 건데, 이완용이 순종 묘정에 배향된 적도 있었다.

정전과는 달리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다.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추존 임금이기 때문에 배향공신이 없는데, 영녕전에 모셔지는 후대 임금들이 공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조상에게 올리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공신당이 없다고 해도 엄연히 영녕전에 모셔진 임금의 배향공신까지 포함하여 총 92명을 종묘 배향공신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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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방(守僕房)

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 방향으로 지어진 4칸짜리 맞배지붕 건물. 수복(守僕)이란 조선시대 종묘서(宗廟署)나 향실을 관장하던 교서관을 비롯해 단(壇), 능(陵), 궁(宮) 등에 소속되어 청소하는 일을 담당한 잡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수복방이란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 수복방의 앞에는 제사 때 음식 차림을 하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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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典祀廳)

정전의 동북쪽에 자리하며 종묘의 제사에 사용되는 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곳. 부엌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주(神廚)라고도 부른다. 마당을 중심으로 주위에 ㅁ자형 건물을 배치했다. 마당에는 제수를 준비하던 돌절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정전에 올릴 제수음식을 미리 검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 행각에는 온돌과 마루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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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祭井)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 전사청 동쪽에 자리하며, 네 면을 담장으로 두르고 남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일각문이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갑다고 한다.

악공청[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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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청(樂工廳)

종묘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준비, 연습하고 대기하는 곳. 정전과 영녕전 바깥 서남쪽에 각각 있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있다.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보다 규모가 작은 편.

영녕전 주변[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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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永寧殿)

대한민국의 보물이다. 정전에서 옮겨진 제왕과 왕후, 그리고 추존된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별묘(別廟)로 정면 16칸, 측면 4칸의 건물.

영녕전(永寧殿)이라는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國以永寧 爰及苗裔(나라가 길이 평안하게 후손에게 물려지리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세종 3년(1421년)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34]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조금 덜 중요한 임금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 재위 중인 임금을 기준으로 5대 이전의 임금들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 원칙이고, 그 중 공적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인정된 임금들만 예외적으로 정전에 계속 모셔두는 것이다. 영녕전에는 제왕의 신주 16위, 왕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의 부재 처리나 건물 규모는 정전보다 약간 작지만 전반적인 공간 구성은 정전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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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고(祭器庫)

제례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영녕전 동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위패 배치[편집]

정전 (正殿)[편집]

묘실(廟室) 제왕 왕후 배향 공신
제1실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제2실 태종대왕(太宗大王) 원경왕후(元敬王后)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제3실 세종대왕(世宗大王) 소헌왕후(昭憲王后)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제4실 세조대왕(世祖大王) 정희왕후(貞熹王后) 권람, 한확, 한명회
제5실 성종대왕(成宗大王) 공혜왕후(恭惠王后) 신숙주, 정창손, 홍응
정현왕후(貞顯王后)
제6실 중종대왕(中宗大王) 단경왕후(端敬王后)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장경왕후(章敬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제8실 인조대왕(仁祖大王) 인렬왕후(仁烈王后)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장렬왕후(莊烈王后)
제9실 효종대왕(孝宗大王) 인선왕후(仁宣王后)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제10실 현종대왕(顯宗大王) 명성왕후(明聖王后)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제11실 숙종대왕(肅宗大王) 인경왕후(仁敬王后)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제12실 영조대왕(英祖大王) 정성왕후(貞聖王后)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정순왕후(貞純王后)
제13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제14실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제15실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남공철, 김로, 조병구
제16실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이상황, 조인영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제17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제18실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제19실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송근수, 서정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영녕전 (永寧殿)[편집]

묘실(廟室) 제왕 왕후 배향공신
제1실 목조대왕(穆祖大王) 효공왕후(孝恭王后)
제2실 익조대왕(翼祖大王) 정숙왕후(貞淑王后)
제3실 도조대왕(度祖大王) 경순왕후(敬順王后)
제4실 환조대왕(桓祖大王) 의혜왕후(懿惠王后)
제5실 정종대왕(定宗大王) 정안왕후(定安王后) 익안대군
제6실 문종대왕(文宗大王) 현덕왕후(顯德王后) 하연
제7실 단종대왕(端宗大王) 정순왕후(定順王后)
제8실 덕종대왕(德宗大王) 소혜왕후(昭惠王后)
제9실 예종대왕(睿宗大王) 장순왕후(章順王后) 박원형
안순왕후(安順王后)
제10실 인종대왕(仁宗大王) 인성왕후(仁聖王后) 홍언필, 김안국
제11실 명종대왕(明宗大王)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연원, 이언적
제12실 원종대왕(元宗大王) 인헌왕후(仁獻王后)
제13실 경종대왕(景宗大王) 단의왕후(端懿王后) 이유, 민진후
선의왕후(宣懿王后)
제14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효순소황후(孝順昭皇后)
제15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민백상, 이종성
제16실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永王) 의민황태자비(懿愍太子妃)

폐왕이 되었던 조선 연산군(10대)과 조선 광해군(15대)은 종묘 배향에서 제외되었다. 원래는 조선 단종(6대)도 폐왕으로 낙인되어서 제외되었으나 19대 조선 숙종 때 복위하여 묘호인 단종을 하사받음에 따라 이 때 종묘에 위패가 모셔졌다.

종묘제례[편집]

종묘제례

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조선 시대의 모든 제례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종묘 제례는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지내는 대향(大享, 四時大享)과 섣달 그믐에 지내는 납일제(臘日祭), 영녕전에서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사, 그리고 속절(俗節), 삭망에 치르는 향사(享祀) 외에 종묘에 와서 빌거나 고하는 기고(祈告) 의식,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새로운 물건이 나왔을 때 신물을 바치는 천신제(薦新祭), 그리고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종묘 영녕전에 와서 비는 알묘(謁廟) 의식 등이 있었다. 조선 시대 종묘 제례는 횃불과 초를 밝히고 한밤중에 봉행하였는데, 1969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올리다가 1971년 이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차례 올리고 있다.

종묘제례에 임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행사 집사관은 7일 전부터, 기타 제례 참석자는 3일 전부터 제계를 한다. 종묘 제례는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영접하고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다음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행해진다.

종묘제례악은 악(樂), 가(歌), 무(舞)를 갖추어 연주하는 음악이다. '악'은 악기의 편성과 연주, '가'는 악장의 구성과 가락, '무'는 일무(佾舞)의 의물(儀物)을 뜻한다. 음악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歌)로 구성된다.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악, 가, 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樂)이라 한다'고 한 것처럼, 종묘제례악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관람[편집]

  • 종묘는 본래 시간제 관람으로만 운영된다.
  • 매주 토·일요일, 매월마지막 수요일(문화가 있는날)
  • 명절 및 국경일에 한해 일반관람이 가능하다.
  • 매주 화요일은 휴관. 화요일이 공휴일(대체공휴일 포함)일 경우에는 개방하며, 그다음 날(비공휴일)이 휴관일.
  • 청소년단체(50명 이상)는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
매표 및 관람시간
  •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무료 입장
  • 02월~05월 매표 09:00~17:00 / 관람 09:00~18:00
  • 06월~08월 매표 09:00~17:30 / 관람 09:00~18:30
  • 09월~10월 매표 09:00~17:00 / 관람 09:00~18:00
  • 11월~01월 매표 09:00~16:30 / 관람 09:00~17:30
관람요금
대상 관람요금 통합관람권(종묘·4대궁) 비고
내국인 (만 25세-64세 이하)

외국인 (만 19세 이상-64세 이하)

1,000원 10,000원(구입일로부터 3개월 유효) 단체할인

없음

외국인 (만 7세 이상∼만 18세 이하) 500원 5,000원(구입일로부터 3개월 유효)
내국인(만24세 이하, 만65세 이상) 무료
  • 종로구 주민 50% 할인(관련 증빙 제시)

※ 문화가 있는 날은 무료입장.

관람정보
  • 1회 관람인원은 최대 200명이며,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 필요.
  • 10인 이상 단체가 예약 없이 오시면 입장이 제한될 수 있다.
  • 50명 이상 청소년단체는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해야 한다.
  • 예약하신 분은 관람권 구매 시 예약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 현장에서 관람권(예약 후 잔여분 + 현장 판매분)을 구매하실 수 있다.
  • 외국어 해설 시간에는 외국인을 동반하지 않은 내국인은 참여할 수 없다.
  • 문화재 해설 동영상 촬영 및 음성 녹음은 해당 문화재 해설사의 사전 동의가 꼭 필요하다.
  • 단체 해설 예약은 별도 해설이 아니며, 해당 시간의 다른 개별 관람객과 함께 참여한다.
  • 해설은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므로 초등학교 저학년 및 미취학 아동은 반드시 보호자의 관람 지도가 필요하다.
  •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종묘 및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 포함), 창경궁, 덕수궁)을 관람할 수 있다.

교통[편집]

지하철
  • 종로3가역에서 도보로 5분거리(1호선-11번, 3호선-8번, 5호선-8번 출구)
버스
  • 종로4가. 종묘(정류장 번호: 01-017/01-018)
(간 선) 101, 103, 143, 150, 201, 260, 270, 271, 370, 720, 721, N15, N26, N62
(지 선) 7212
(직 행) 9301
  • 종로4가. 종묘공원(정류장 번호: 01-539)
(마 을) 종로12
주차시설

종묘는 주차장을 운영하고 있지 않다.

  • 인근 주차장 안내 : 서울시설공단 종묘주차장(구·종묘주차장)
  • 위치: 종묘 앞 종묘공원 지하
  • 요금: 10분당 800원 (일급지 노외주차장 요금 적용)
  • 요금 및 이용문의: ☎ 02-741-5238
  • 종묘 관람에 따른 할인 혜택은 없음.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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