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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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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
크라쿠프 위치

크라쿠프(폴란드어: Kraków, 독일어: Krakau)는 폴란드 마워폴스카주의 주도이며, 비스와강에 접한 하항이다. 17세기 초반에 바르샤바수도를 옮길 때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수도였다. 크라쿠프는 전통적으로 폴란드의 학문, 경제, 문화 및 예술 생활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인용된 올드타운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폴란드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이다. [1]

개요[편집]

크라쿠프는 폴란드에서 바르샤바 다음가는 폴란드 제2의 도시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도시의 인구는 약 80만 명이며, 약 8백만 명의 추가 인원이 메인 광장 반경 100km 이내에 살고 있다. 도시의 기원은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다. 크라쿠프는 석기시대 정착지에서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바벨 언덕에서 작은 마을로 시작하여 965년에 이미 중부 유럽의 번화한 무역 중심지로 보고되었다. 크라쿠프에는 많은 중요한 기념물, 풍부한 건축물 및 교회가 있으며, 그 웅장함은 이탈리아, 독일 및 프랑스의 건축물과 일치한다. 언덕 위의 바벨 왕실 성은 폴란드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이며, 500년 동안 폴란드 군주의 석좌였다. 또한 주요 시장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 광장이다. 크라쿠프는 50여 개의 다국적기업이 활동하는 폴란드 경제의 요충지이다. 수도인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도시 전체가 파괴되어 구시가지를 포함한 도심지 전체가 다 재건된 것인 반면, 크라쿠프는 폴란드 침공 당시 시장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Stanisław Klimecki)의 용감한 행동(그의 행적은 '역사' 장에 후술), 그리고 폴란드 총독부의 수도가 되었다는 점 덕분에 전면적인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때문에 폴란드의 최고의 관광도시는 바르샤바가 아니라 이곳 크라쿠프이며, 세계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폴란드 도시이다. 1978년에 유네스코는 이 도시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구 시가지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크라쿠프는 2000년에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되었고 2013년에 공식적으로 유네스코 문학 도시로 승인되었다. 이 도시는 2016년 7월 세계 청소년의 날을 주최했다.[2]

크라쿠프는 폴란드는 물론이고 유럽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많이 간직한 도시이다. 시내 전역에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런 건물이 즐비하다. 이 중에서도 구시가지의 바벨언덕(Wawel Hill)에 위치한 바벨대성당(Wawel Cathedral)과 비스와강 옆에 지어진 왕궁(Royal Castle)은 크라쿠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구시가지에 있는 성모승천교회(St. Mary's Basilica)와 성 피터와폴교회(Saints Peter and Paul Church)도 유서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외에도 구시가지에는 중세시대 가장 큰 시장이었던 중앙시장광장(Rynek Główny)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라투슈초바탑(Wieża Ratuszowa) 등 많은 역사적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364년에 설립되어 중동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갖는 야기엘론스키대학교(Jagiellonian University)이 있다. 고풍스러운 유럽 문화를 간직한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5개의 자연 보호구역을 가진 도시다.[3]

역사[편집]

크라쿠프 지역에 인간이 정착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바벨성이 자리 잡은 바벨 언덕에서 구석기 인류의 정착지와 석기 제작 터가 발견되었다. 7세기경부터 슬라브족이 이 지역에 자리 잡았다. 크라쿠프라는 명칭은 서부 슬라브족의 전설적인 지도자의 이름 크라크(Krak)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0세기에는 중부 유럽의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965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상인 아브라함 벤 야곱이 ‘무역로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부유한 도시’라고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10세기에 피아스트왕조 치하 폴란드왕국에 편입되어 1038년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0~11세기에 걸쳐 요새와 성당들이 차례로 건설되었다.

1241년과 1259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287년 몽골의 3차 침공 때는 요새를 새로 구축하는 등 대비를 철저히 한 덕분에 격퇴할 수 있었다. 피아스트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지미에시(재위 1333~1370) 3세는 외교 · 국방과 학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364년 중부 유럽에서는 카렐대학(체코 프라하)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야기엘론스키 대학을 설립했다.

14세기 후반 피아스트왕조가 무너지고 새로 야기엘로니안왕조(1386~1596)가 출범했다. 새 왕조에서도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했다. 이탈리아 출신 왕비를 맞이한 지그문트 1세(재위 1506~1548) 시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와 학문과 문화예술을 꽃피워 16세기는 폴란드의 르네상스를 이뤘다. 야기엘로니안왕조의 마지막 왕인 지그문트 2세(재위 1548~1572)는 리투아니아와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1569년 루블린 연합조약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군주제 연합국가인 폴란드 · 리투아니아 왕국으로 합쳐진 양국은 외교정책은 공동으로 펼치되 군대 · 행정조직은 독자적으로 운용했다. 국왕은 양국의 귀족대표가 모여 선출했다. 1596년 지그문트 3세(재위 1587~1632) 는 왕궁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이전했다. 1611년 바르샤바가 왕국의 공식 수도로 지정되면서 크라쿠프가 폴란드 수도로 기능하던 시대는 끝났다.

17세기 중반 크라쿠프에 흑사병이 돌아 주민 2만 명가량이 사망했다. 이어 스웨덴군의 침공으로 약탈과 파괴를 당하기도 했다. 1794년부터 오스트리아제국령의 수도 역할을 했고, 1846~1918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지배권을 가진 크라쿠프 대공국의 수도였다. 폴란드 · 리투아니아 왕국은 18세기 후반 주변 3개국에게 3차례에 걸쳐 국토가 분할된 후 결국 나라를 잃었다. 3차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크라쿠프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 프랑스 황제가 몰락한 후 1815년 3월 열린 빈회의의 결정에 따라 자유도시가 되었다.

1846년 크라쿠프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자치권을 빼앗고 자국 영토로 합병했다. 망국의 설움에 시달리던 폴란드인들이 서유럽으로 이주 · 망명하는 통로 역할을 했던 자유도시 크라쿠프의 기능도 멈추었다. 오스트리아의 크라쿠프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이 패한 1918년 종식되었다. 전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조약 덕분에 폴란드는 1795년 망국 후 123년 만에 독립을 이루었다. 제2차 폴란드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크라쿠프는 폴란드 학문 ·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되찾았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 독일은 자국에 가까운 폴란드 땅은 ‘편입된 동부지역’이라며 합병하고 나머지 서부 점령지역은 총독부령으로 만들어 군정을 시행했다. 총독부 관할지역 인구는 모두 1200만 명에 이르렀는데 크라쿠프는 1939년 11월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총독부령의 수도였다. 이름도 크라쿠프의 독일어 발음인 크라카우(Krakau)로 바뀌었다.

나치 치하 크라쿠프에서는 폴란드인과 함께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됐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만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크라쿠프 게토의 생존자였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자기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크라쿠프 게토의 유대인 중에서 선발했다. 야기엘론스키 대학의 교수들을 비롯, 크라쿠프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은 독일 점령 초기에 체포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연합군은 독일 총독부가 설치되고 수많은 독일군이 주둔했는데도 불구하고 크라쿠프를 주요 폭격 대상에서 제외했다. 덕분에 파리 · 프라하 등 소수의 유럽 도시와 함께 대규모 파괴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45년 1월 18일 소련군이 크라쿠프에 진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에는 공산주의자가 다스리는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인민공화국 시절인 1954년 크라쿠프에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레닌제철소(현 센지미르 제철소)가 건설되었다. 유서 깊은 구시가지는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80년 조선소 노동자였던 레흐 바웬사가 자유연대노조를 출범시키면서 폴란드에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폴란드는 1989년 9월 7일 법적으로 민주화되어 폴란드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 한국과도 공식 수교했다. 민주화된 크라쿠프는 폴란드 제2 도시이자 경제 · 산업 · 문화예술 · 관광의 중심지로서 재도약하고 있다.[4]

경제 및 교통[편집]

크라쿠프는 24곳의 고등교육기관이 배출하는 우수한 노동력과 비교적 저렴한 임금을 배경으로 ‘유럽의 실리콘밸리’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글, 모토로라, IBM 등이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HSBC은행 · 로열 더치 셸 등 50여 다국적 기업이 진출해 있다.

크라쿠프에 R&D 본사를 운영 중인 국가는 영국, 아일랜드, 미국, 이스라엘, 핀란드, 노르웨이, 러시아, 덴마크, 스페인 등이다. 2016년 한국기업 포스코가 생활폐기물 발전소를 준공했다.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 전차가 주종이다. 또 1500여 대의 자전거를 150곳 대여소에서 운용하고,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 공유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도시 서쪽 11km 거리에 있는 크라쿠프 요한바오로 2세 국제공항과 80km 떨어진 카토비체 국제공항 등 두 곳의 국제공항이 있다.

경관[편집]

역사유적 도시답게 크라쿠프는 6,000여 곳의 사적지와 200만 점 이상의 예술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건물들도 로마네스크 · 고딕 · 르네상스 · 바로크 등 다채로운 양식을 자랑한다.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에는 바벨성(城), 성모 마리아 성당, 성베드로 · 바울 성당, 중세시장 광장 등이 있다.

11세기에 처음 건축돼 몇 차례 중건된 바벨 성내 대성당은 모두 41명의 왕이 대관식을 치른 곳이다. 고딕 양식의 성모 마리아 성당 주탑에서는 매 시간 트럼펫 소리가 흘러나온다. 13세기에 몽골군의 침입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전사했다는 전설 속의 경비병을 기리는 의미라고 한다.

바벨성은 도시 남쪽 비스와강 상류에 위치하며, 성의 역사는 9세기 초부터 시작된다. 성 내부에는 중세의 갑옷, 검, 장신구, 초상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황금색의 돔으로 덮인 지그문트 예배당(Kaplica Zygmuntowska)은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물로서, 대성당 내부에는 폴란드 왕의 석관과 가치 있는 예술품들이 있다. 근처에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경관이 수려하며 문 네 개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복도가 있다. 화재 후에 고딕 양식의 바벨성은 1502년부터 1536년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바벨성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크라쿠프 근교에는 나치 독일이 2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오슈비엥침(독일어로 아우슈비츠Auschwitz)수용소 박물관이 있다. 수용소는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오슈비엥침에서 3km 거리에는 규모가 훨씬 컸던 브졔진카(독일어로 비르케나우Birkenau) 제2수용소 박물관이 있다.[5]

지도[편집]

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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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크라쿠프〉, 《위키백과》
  2. 크라쿠프〉, 《나무위키》
  3. 크라쿠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크라쿠프〉, 《요다위키》
  5. 크라쿠프(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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