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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해시넷
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5월 6일 (토) 20:08 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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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위치
수도 바르샤바
크라쿠프
브로츠와프
우치(Łódź)

폴란드(폴란드어: Polska, 영어: Poland)는 중앙유럽에 있는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폴란드 공화국(폴란드어: Rzeczpospolita Polska, 영어 : Republic of Poland )이다. 수도는 바르샤바(Warszawa, Warsaw)이다.

10세기에 국가가 성립되어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된 후 1918년 독립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고, 1945년 해방되었다.

개요

폴란드는 중부 유럽 발트해(海)에 면한 나라이다. 폴란드의 영토는 광대하여 북쪽의 발트해에서 남쪽의 수데텐 산맥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뻗어 있다. 북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러시아, 동쪽으로는 벨라루시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슬로바키아체코, 서쪽으로는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폴란드는 또한 덴마크, 스웨덴과 해양 경계를 공유하고 있다.

폴란드는 국토의 면적은 312,696km²이며 3천 8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유럽연합에서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폴란드는 16개의 주(voivodeships)로 구성되며 수도 이외에 크라쿠프, 우치(Łódź), 브로츠와프, 포즈난, 그단스크, 슈체친 등이 주요 도시이다.

현재의 폴란드 지역인 중부유럽 평원은 수천 년 전부터 많은 민족이 거주하였던 지역이다. 폴란드의 어원이 된 폴라녜라는 이름을 가진 부족을 이끌고 나라를 세운 것은 966년 미에슈코 1세 공작(Duke Mieszko I)이다. 그는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생활하던 이교도였던 폴란드 민족을 통합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1025년 폴란드왕국(Kingdom of Poland)이 세워져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1569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이 결성되어 17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와 약 7,500,000명의 인구를 가진 강대국으로 군림하였고 1791년에는 유럽국가 중 최초로 현대적 의미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급격한 국력 쇠퇴로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간 3차에 걸친 영토 분할을 통해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러시아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18년 베르사유조약을 통해 독립하여 짧은 기간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으로 중동유럽의 지역 강대국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독일에 점령당한 뒤 유대인 300만 명을 포함해 600만 명의 시민이 전쟁기간 중 사망하였다. 1949년 독일의 패퇴와 함께 소련의 진주로 공산화되었다가 1989년 자유노조(Solidarity Movement)가 중심이 된 독립운동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폴란드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폴란드는 체제 전환 이후 비교적 안정된 정치적 기반 위에서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였고 2004년 유럽연합(EU) 가입으로 중동유럽의 정치, 군사 및 경제적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가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냉전이 종결되자 결국 공산주의 정권도 무너지며 폴란드는 대통령제 민주 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냉전이 종식된 후에는 미국과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는 꽤나 발전한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 중앙유럽에서는 지역강국으로 분류된다. 명목 GDP로는 유럽 연합 내에서 6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PPP로 따질 때에는 5번째로 거대하다. 또한 삶의 질, 치안, 경제적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축에 속하며, 대학 교육과 공중 의료보험 체제도 EU 기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편이다. 총 16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폴란드는 솅겐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UN, NATO, OECD, 비셰그라드 그룹의 일원이기도 하다.

국가상징

국호

'폴란드(Poland)'는 영어 이름이며 폴란드어로는 '폴스카(Polska)'이다. '폴란드' 혹은 '폴스카'라는 이름은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부족 중 하나인 '폴란인(Polanie)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6세기에 오늘날 폴란드 비스와 강과 바르타 강 인근에 정착했던 부족이다. 일부 언어권에서는 슬라브 신화의 민족 이름이자 폴란드의 신화적 건국자의 이름인 레흐(Lech)의 이름을 딴 이름으로 칭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르메니아어 레하스탄(Լեհաստան / Lehastan)이나 오스만 제국 시기에 폴란드를 지칭했던 레히스탄(Lehistan)이 있다. 인접한 리투아니아어로는 렝키야(Lenkija), 사모기티아어로는 렝케예(Lėnkėjė), 헝가리어로는 렌젤로르사그(Lengyelország)라고 하며 이는 공통적으로 레흐 계통의 부족이었던 렝지안인(Lędzianie)의 명칭에서 유래한다. 과거 폴란드는 자국을 칭할 때 '레히아'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고[6] 오늘날 '레히아'는 한국에서 "조선"이나 "고려"라는 명칭이 쓰이는 것과 같이 단체나 기관들, 혹은 레히아 그단스크와 같이 축구 클럽의 명칭에 등장한다.

한자 음차로는 '파란(波蘭/波兰/Bōlán)'이라고 하지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북한 문화어에서는 이전까지 '파란'이라고 부르다가 1965년부터 현지어 명칭인 "뽈스까"로 표기를 바꿨다.

한편 폴란드의 정식 국호는 "제치포스폴리타 폴스카(Rzeczpospolita Polska)"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폴란드(폴스카) 공화국'이 된다. 제치포스폴리타(rzeczpospolita)는 공화국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푸블리카(res publica, '인민의 것')를 폴란드어로 직역한 것이다. 제치포스폴리타는 일반명사로서의 공화국이 아니라 폴란드인 주도로 건국된 공화국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쓰이며, 영어의 커먼웰스(commonwealth)와도 맥락이 닿는 표현이다. 오늘날 폴란드어로 일반명사로서의 공화국은 다른 유럽 언어들과 비슷하게 레푸블리카(republika)이다.

국기

폴란드 국기
폴란드 국장

폴란드 국기는 백색과 적색을 위아래로 배치한 이색기로, 폴란드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건국시조 레흐(Lech)가 석양을 맞으며 하늘을 나는 흰독수리를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폴란드 국장의 흰독수리 역시 연원이 같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19세기에 아예 나라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갈갈이 찢긴 후 독립운동을 펼칠 때 백색은 공화국의 존엄함을, 적색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식적으로 국기로 채택된 것은 1919년에 폴란드 제2공화국이 건국되었을 때이다.

위아래를 뒤집으면 인도네시아 또는 모나코 국기가 되지만 종횡비율이 저 두 국기와는 약간 다르다.

정부가 쓰는 국기에서는 상단에 국장이 포함된다.

국장

폴란드의 국장은 1295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현재의 국장은 1990년에 제정되었다. 빨간색 방패 안에는 금색 부리와 발톱을 가진 하얀색 독수리가 그려져 있으며 독수리의 머리 위에는 금색 왕관이 씌워져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국가

폴란드의 국가는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Mazurek Dąbrowskiego)"나 가사 첫소절에서 따온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Jeszcze Polska nie zginęła)"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작사 당시 폴란드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국에 의한 폴란드 분할로 인해 국가 자체가 사라진 상황이었고, 많은 폴란드의 애국지사들이 우방국이었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는데 시인이었던 유제프 비비츠키(Józef Wybicki)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전쟁으로 폴란드 분할의 주역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자, 프랑스로 망명한 폴란드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조국을 해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폴란드군에서 복무하던 장교들과 병사들 역시 대거 프랑스로 망명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에 비비츠키는 폴란드인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새로 편성하여 프랑스군 아래에서 싸우는 계획을 세웠다.

비비츠키는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1794년 봉기 당시 폴란드군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를 파리로 초대했고 곧바로 그들은 프랑스를 통치 중이던 총재정부에게 그들이 세운 폴란드 군단 계획을 보여주었다. 총재정부는 폴란드 군단 계획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당시 외국인의 프랑스군 복무를 금지한 프랑스 헌법상 폴란드인을 프랑스군으로 편성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총재정부는 일단 돔브로프스키를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보냈다. 다행히도 나폴레옹 역시 폴란드 군단 계획에 지지를 표했고 이에 폴란드 군단 계획은 탄력을 얻어 1797년 1월 프랑스의 위성국인 치살피나 공화국이 세워짐과 동시에 치살피나 공화국군 산하의 이탈리아 폴란드 군단(Legiony Polskie we Włoszech)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돔브로프스키는 폴란드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창설된 폴란드 군단은 곧바로 프랑스 측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고 돔브로프스키와 폴란드 군단은 단순히 오스트리아와 싸우는 것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폴란드까지 오스트리아를 가로질러 진격해 조국을 해방하기를 바랐다. 1797년 7월 폴란드 군단이 주둔 중이던 레조에밀리아를 방문한 비비츠키는 조국을 해방한다는 일념아래 싸우는 폴란드 군단의 모습을 보면서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그곳에서 "이탈리아 폴란드 군단의 노래(Pieśń Legionów Polskich we Włoszech)"라는 작품을 썼다. 비록 지금은 나라를 빼앗긴 상태이지만 폴란드인이 살아있고 그들이 조국의 이름 아래 싸우고 있는 한 폴란드라는 나라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비장한 내용의 가사와 민속적인 선율로 인해 곧바로 이 노래는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와 이역만리 떨어진 폴란드 본국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몇 년 후 나폴레옹이 독일·폴란드 원정을 통해 폴란드로 진격하면서 드디어 폴란드에게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과 러시아 제국군에 맞서 프랑스군을 지원할 폴란드군의 편성을 위해 돔브로프스키와 비비츠키를 폴란드로 파견했고 그렇게 포즈난에 입성한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비비츠키가 지은 바로 그 노래를 열창하는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폴란드 땅에는 독립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이 수립되었고 이 노래는 폴란드 전역에서 준국가 수준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바르샤바 공국이 수립되고 난 후의 노래는 멜로디는 바뀌지 않고 처음 그대로였지만 가사가 상당히 바뀌었는데 틸지트 조약으로 프랑스와 동맹관계가 된 러시아를 자극하는 내용의 4절이 빠지게 되었고 코시치우슈코에 대해 언급한 6절 역시 나폴레옹을 의심하던 코시치우슈코가 나폴레옹에게 협력하는 걸 거부하면서 그 영향으로 인해 삭제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회의의 결과 폴란드는 다시 3국에 분할되어 사라졌으나 이 노래는 여전히 폴란드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였다. 그 후 폴란드인이 유럽 전역으로 이주하면서 이 노래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서유럽에서는 나라 잃은 폴란드인들에 대한 동정의 징표였으며 중부유럽(특히 이 일대에 사는 슬라브족)에게는 독립 투쟁 당시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계속해서 불리는 이 노래에 대해 폴란드를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아예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정했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끈질기게도 살아남았고 1918년 마침내 폴란드 제2공화국이 독립하면서 실질적인 국가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26년 여러 후보곡들과의 경쟁 끝에 공식 국가로 지정되었다.

지리

폴란드의 지형도
폴란드 남부의 타트라산맥에 있는 모르스키 오코 호수
폴란드 마수리아 지역에 위치한 마수리안 호수 지구에는 2,000개 이상의 호수가 있다.
비스와강 또는 비스툴라강은 폴란드에서 가장 긴 강으로 전체 길이는 1,047km이다.

폴란드의 면적은 312,686㎦로 미국뉴멕시코주와 크기가 유사하며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프랑스, 스페인 등에 이어 9번째로 국토 면적이 큰 나라이다. 폴란드는 남북 간 지형이 현격히 다른 국가로 국토 면적의 98.52%는 평지로 구성되지만, 남부지역의 일부는 높은 산악지대로 구성된다. 이외에 국토면적의 1.48%는 강과 호수이다. 폴란드의 평균 고도는 173m이며 국토의 약 75%는 200m 이하로 비교적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다.

북부 지역은 발트해와 면하여 해안선 길이는 770km에 달하며, 대부분 완만한 해안과 호수 및 모래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트해 해안선을 따라 그단스크만(Gulf of Gdansk), 비스와석호(Vistula Lagoon)와 슈체친석호(Szczecin Lagoon)가 형성되어 있으며, 서쪽 지역은 포메라니아만(Bay of Pomerania)을 통해 독일과 국경이 갈린다. 북부 발트해에 스토빈스키 국립공원(Słowiński National Park)은 해안선을 따라 오랜 시간 바람과 파도에 의해 형성된 약 32.5km에 달하는 모래언덕으로 유명한데, 가장 높은 모래언덕은 해발 115m에 달해 독특한 풍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북부 지역은 빙하시대에 형성된 평탄한 지형의 북유럽 평원으로 모래와 양질의 토양으로 구성된 빙퇴석과 빙퇴석이 녹은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발트해와 만나는 비스와삼각주(Vistula delta)에 위치한 라즈키 엘브렝스키(Raczki Elbląskie) 지역은 빙퇴석 지형 특징으로 해발고도가 불과 1.8m에 불과하다. 남부지역은 북유럽 평원에 속하여 빙하시대에 강과 계곡으로 구성되었던 곳으로 현재는 산악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산악지역인 서쪽은 체코 북부까지 이어지는 수데티산맥(Sudetes), 그리고 동쪽은 카르파티아산맥타트라산맥이 위치하여 이를 경계로 슬로바키아와 국경선이 형성되었다.

타트라산맥은 고도 2,000m가 넘는 약 70여 개의 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높은 산은 해발 2,999m에 달하는 리시산(Mount Rysy)이다. 리시산은 해발 1,583m 지점에 검은 호수(Black Lake)로 불리는 차르니 스타호수(Czarny Staw)와 바다의 눈(Eye of the Sea)이라는 별칭을 가진 모르스키 오코호수(Morskie Oko)가 위치하여 장관을 이룬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페니나산맥(Pieniny Mountains)과 성십자가산맥(Holy Cross Mountains)이라는 의미를 지닌 시비엥토크시스키에산맥(Świętokrzyskie) 역시 타트라산맥과 함께 대표적 명소이다. 시비엥토크시스키에산맥의 위사산(Łysa Mountain)에 있는 수도원에는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로 만들어진 유품이 보관되어 성십자가산맥으로 불리게 되었다.

폴란드 서남부에서 체코 동북부에 걸쳐 있는 동브로바 분지(Dąbrowa Basin)에는 유럽 최대의 석탄산지인 슐레지엔(Silesian)이 위치하는데 역사적으로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던 지역이다. 약 40,000㎦에 달하는 슐레지엔 지역은 대부분 폴란드 영토에 걸쳐 있으며 체코와 독일도 일부 영토를 점한다. 슐레지엔은 유럽의 대표적인 석탄산지로 공업 발달에 의해 인구 밀도가 높아 3개국에 걸친 슐레지엔 인구는 8,000,000명에 달한다.

남부의 크라쿠프카토비체 사이에는 유럽에서 보기 드문 브웬도프스카사막(Błędów Desert)이 펼쳐져 있다. 브웬도프스카사막은 길이가 10km, 폭은 4km에 달하며 모래의 깊이는 평균 40m인데, 깊은 곳은 70m에 달한다. 독특한 점은 브웬도프스카사막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곳이 아니라 중세시대부터 석탄과 철강 채굴을 위해 숲을 밀어내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폴란드에서 가장 긴 강은 남북을 가로질러 1,047km에 달하는 비스와강으로 바르샤바크라쿠프 등 주요 도시들은 비스와강을 따라 조성된 도시들이다. 또한 854km에 달하는 서부의 오데르강(Oedr River)은 독일과 국경을 가르는 상징적인 강이다. 1990년대 초 독일 통일 시 당시 독일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은 오데르강 동쪽은 폴란드 영토로 통일 이후 영토권 주장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곳으로 폴란드에게는 그만큼 의미가 깊다. 비스와강과 오데르강은 모두 발트해로 이어지며, 강 유역을 따라 크고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다. 중세 이전에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이 비스와강과 오데르강을 따라 중동유럽을 침입하였고, 중세 이후에는 오데르강이 끝나는 북해의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조선산업이 발달하였다.

폴란드 전역에는 10,000여 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어 유럽에서는 핀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호수가 많은 나라이다. 신야르드호수(Lake Śniardwy), 마르레호수(Lake Mamry), 웸스코호수(Lake Łebsko) 등은 넓이가 100㎢에 달하는 광대한 호수이며 한자호수(Lake Hańcza)와 위그레호수(Wigry Lake) 등도 면적은 작지만 수심이 100m가 넘는 호수들이다.

기후와 생태

폴란드 연평균 기온

폴란드의 기후는 전역에 걸쳐 비교적 온화하며 남동부는 대륙성 그리고 북서부는 해양성 기후가 혼재하는데 서쪽으로 갈수록 기후가 온화하고 남쪽지역은 상대적으로 습도가 높다. 북서부의 항구도시 시비노우이시치에(Świnoujście)와 일대는 발트해의 영향으로 전형적인 해양성기후를 보인다. 폴란드의 연평균 기온은 7°C 수준이며 가장 더운 7~8월의 평균 기온은 14°C로 비교적 선선하지만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폴란드에서 기온이 온화한 지역은 남쪽의 실레지안(Silesian) 지역으로 여름철 7~8월 기온은 24°C~32°C 정도이지만 39°C까지 기온이 오른 기록이 있다. 반면에 위도상 국토 중앙에 위치한 수도인 바르샤바는 7월에는 13°C∼24°C 그리고 1월은 -6°C∼1°C 정도로 전형적인 중동부 북부지역의 기온을 보인다. 한편 폴란드의 가장 추운 1월 평균 기온은 3°C 정도이지만 북동부의 수발키(Suwałki)는 스칸디나비아와 시베리아의 찬 기온으로 1월 기온은 -6°C∼4°C 사이로 나타난다. 폴란드의 연평균 강우량은 64㎜ 정도이며 북쪽지역은 보다 건조해 50㎜ 그리고 남쪽의 산악지역은 135㎜로 지형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동쪽으로 갈수록 겨울철은 건조하여 여름보다 습도가 더 낮은 곳도 있다.

폴란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발트해의 넓은 해안가와 국토 전역에 10,000여 개에 달하는 호수로 유럽의 대표적인 철새도래지이기도 하다. 지구상에 약 40,000마리에 불과한 황새의 절반은 폴란드 북동부의 비아부자강(Biebrza River)와 바르타강 유역에 서식하여 정부에서 국립공원과 자연보호 지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한편 폴란드 전역에서 불 수 있는 가장 흔한 수목은 떡갈나무, 단풍나무, 너도밤나무 등이다. 폴란드 숲의 약 68.7%는 침엽수로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종이 북부지역에 넓게 분포한다.

또한 전역의 산림지역에는 붉은사슴, 노루, 멧돼지들이 서식하며 유럽에서 가장 큰 포유동물인 유럽들소와 야생소가 많았던 곳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사냥으로 야생소는 1627년에 멸종하였고, 유럽들소는 벨라루스와 국경을 맞댄 동부지역인 비야오기에자(Białowieża) 지역에 극소수 개체가 생존하고 있다. 비야오기에자 일대의 숲은 유럽에서 드물게 원시림이 보존된 곳으로 갈색곰 등 희귀한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남부의 타트라산맥과 베스키디산맥(Beskids)의 숲 속에는 회색 늑대와 유라시아 스라소니, 그리고 북쪽지역에는 큰사슴 개체군이 있다. 또한 동부의 마수리안호수(Masurian Lake)의 습지지역에서는 비버를 발견할 수 있다.

환경정책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과의 치열한 전투로 160㎢ 정도의 산림이 파괴되어 국토전역이 황폐해졌다. 이후 공산주의 시기에는 화학산업을 위시한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정책과 과도한 석탄채굴로 산림의 약 75%가 산성비의 영향으로 생육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92년에는 폴란드는 세계 12번째로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였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중반까지 공업지대가 밀집한 남부의 카토비체는 대기와 토양오염이 심각하였고, 발트해가 인접한 곳은 수질오염으로 10종의 포유동물과 6종의 조류가 멸종에 직면하였다.

문제를 인식한 정부는 산림복원과 환경개선에 주력하여 현재는 국토의 29.6%가 산림과 숲으로 가꾸어져 서유럽 국가와 유사한 수준까지 녹지가 늘었다. 2004년에 폴란드는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유럽연합의 농업정책에 따라 농업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휴경지를 산림으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폴란드에는 23개의 국립공원이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보존되는 면적은 3.145㎢로 국토 면적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국립공원은 대부분 남부의 산림지대와 북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국토 전역에 환경보호를 위해 123개 지역에 자연공원 조성을 목표로 한 장기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2019년 12월 유럽연합은 2050년까지 기후중립계획을 담은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을 채택하고, 1단계로 2030년까지 회원국의 온실가스 배출 규모를 1990년 대비 최소 55% 감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석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제구조인 폴란드는 이에 반발하여 유럽연합과 갈등을 빚어왔다. 폴란드는 자체적으로 2030년까지 석탄사용을 50%까지 줄이고 부족분을 신재생에너지원자력으로 대체하여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제로인 탄소 중립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폴란드의 장기계획은 산업구조 조정과 원전 건설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하므로 유럽연합으로부터의 재정지원 없이는 실현이 힘든 상황이다.

역사

원래 지금의 폴란드 땅에는 게르만족들이 살고 있었다. 10세기 경, 폴라니에족을 중심으로 폴란드 왕국이 형성되어 민족과 국토의 명칭이 생겨났다. 966년 가톨릭을 받아들이며 피아스트 왕조가 성립되었고 그니에즈노크라쿠프가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200여년의 공국 분할 시대를 거쳐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었다. 1385년, 피아스트 왕조에 이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연합 왕조인 야기에오 왕조(14∼16세기, 수도 크라쿠프)가 탄생하였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 발트해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16세기에는 유럽의 곡창 지대로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1573년 야기에오 왕조가 끝나고, 귀족들이 국왕을 선출하는 일종의 귀족 공화정이 등장하였고 1596년에 수도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이전했다. 그러나 자유 선거 채용과 바르샤바로 천도한 후, 귀족계급의 강대화와 투르크, 스웨덴과 전쟁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국운이 기울어졌다. 18세기 후반에 왕권의 강화와 국가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점진적으로 폴란드를 침입해 1795년 폴란드를 분할하여, 나폴레옹에 의한 바르샤바 공국 시대(1807~1815) 외에는 1795년부터 1918년까지 3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의 맞서 1830년 독립을 위한 혁명 정부를 조직, 봉기로 이어졌으나 독립투쟁은 실패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 중 월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1918년 독립하였다. 19세기의 독립운동의 전통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기회로 국가 재건을 수행한 것이다.[1] 그 뒤 바르바니파르토 소장이 지휘하는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1939년 나치 독일소련의 침략을 받고 서부지역은 나치 독일에, 동부는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다가 1945년 해방되었다. 해방 후 1947년 총선 결과 노동자당의 압승으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고, 냉전을 거치며 소련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나 경제 실정과 지도층의 부패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고, 1981년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민주화를 이루며 1990년 바웬사가 첫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 1999년에 NATO, 2004년에 EU에 각각 가입하였다.

선사 시대

기원전 8세기, 비스쿠핀에 있는 청동기 시대 , 루사티아 문화 정착지의 재건

폴란드에서는 대략 기원전 2400년부터 청동기가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750년 경에는 철기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폴란드 지역에서 루사티아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청동기와 철기에 걸쳐 발전하면서 폴란드 지역에서 번영을 이루었다. 이시기의 가장 유명한 폴란드 유적들 가운데에는 비스쿠핀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대략 기원전 748년 경의 목조 요새 유적이라고 전한다.

고대 시기에 현재 폴란드 지방에는 수많은 고대 부족들이 몰려와 살기 시작하였으며, 기원후 400년에서 500년에 이르자 켈트족, 스키타이족, 게르만족, 사르마티아인, 슬라브인 등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심지어 로마 군단의 기지까지 발견되면서 고대 로마의 문명권 내부에도 속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마 이 로마 군단은 호박을 채취하러 나간 로마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이 곳에 살던 슬라브인 등 여러 민족들은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그 생활상을 자세히 복원할 수 없다. 한편 폴란드 지방의 민족들은 전체적으로 로마 제국 등 라틴 문명권에 동화되지 않은 채로 살아갔으며, 996년에 미에슈코 1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모두 이교를 믿었다. 이후 폴란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 가톨릭이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이교의 영향력은 1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피아스트 왕조

미에슈코 1세 통치 하의 폴란드

폴란드는 1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피아스트 왕조 하에서 하나의 단일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폴란드의 첫 지도자는 미에슈코 1세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966년 경에는 폴란드 전체를 개종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몇 십년 동안 이교를 믿었던 폴란드인들이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1000년에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국왕이 미에슈코 1세의 정책을 받들어 수도이던 그니에즈노에서 그니에즈노 평의회를 열었으며, 폴란드 각지에 주교좌를 설치하여 기독교 선교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교의 세력은 강성하였으며, 사람들이 기독교에 반발하자 1038년의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 국왕 시절에는 수도를 그니에즈노에서 크라쿠프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1109년에 볼레스와프 3세가 훈츠펠드에서 독일의 하인리히 5세를 꺾었으며, 독일이 폴란드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내었다. 1138년에는 당시 국왕이던 볼레스와프 3세가 아들들에게 자신들의 땅을 나누어주면서 폴란드는 여러 작은 공작령으로 나뉘었다. 1226년에는 피아스트 가문의 공작들 중 하나였던 콘라트 1세가 튜턴 기사단에게 자신이 프러시아의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며, 튜턴 기사단은 이교도들을 정벌한 이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폴란드 지방에 머물렀다. 1264년에는 유대인들을 위한 법령을 반포하였고, 유대계 민족을 위하여 막대한 자치권을 허락해주면서 거의 '나라 안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였다.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라 평가받는 카지미에시 3세

13세기 중반에 피아스트 왕가의 헨리크 1세헨리크 2세를 거치면서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던 폴란드가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하였으나, 동쪽에서 몽골 제국이 쳐들어오고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크 2세가 전사하며 통일 폴란드의 시도는 막을 내렸다. 1320년에는 여러 공작들이 난립하던 와중에, 드디어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를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왕위를 그의 아들인 카지미에시 3세에게 물려주었다. 카지미에시 3세는 국가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유대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자치를 허락하였으며 법전을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는 등 수많은 문화 진흥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하여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군주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편 카지미에시 3세는 지속적으로 고등교육기관을 폴란드 내에 세우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결국 교황 우르바노 5세크라쿠프 대학의 설립을 인가하면서 폴란드의 문화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카지미에시 3세는 그의 아버지와 그가 폴란드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을 해준 귀족들에게 막대한 이권을 주었으며, 귀족들을 위한 법전을 제정하였으며 아예 귀족들의 법적 지위를 국법에 못박았다. 이후 카지미에시 3세가 1370년에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피아스트 왕조도 끝난다.

13세기와 14세기 동안 수많은 독일계, 덴마크계,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들이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또한 카지미에시 3세 재위기에 폴란드에서 유난히 친유대 정책을 펼쳤기에, 유럽에서 탄압받던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 등도 폴란드로 많이 이주했다. 한편 1347년부터 1351년까지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폴란드에 큰 피해를 미치지는 않았는데, 이는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가 전염병 발발 소식을 듣고 국경을 봉쇄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기에우워 왕조

그룬발트 전투는 독일 튜턴 기사단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1410년 7월 15일 폴란드 왕국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카지미에시 3세는 적자를 남기지 못했고, 폴란드의 왕위는 헝가리 국왕이 계승했다. 그러나 폴란드의 영주들이 헝가리와의 공동 통치 상태를 꺼렸고, 이로 인하여 헝가리 국왕이 1383년에 죽은 이후에는 앙주 왕가야드비가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였고, 1386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요가일라가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즉위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야기에우워 왕조는 중세 말부터 현대 초까지 폴란드를 통치하며 근현대 폴란드의 기틀을 잡은 왕조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결성하여 1368년에 결성된 이후 약 400여 년 동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지를 포함한 폴란드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당시 폴란드와 인접한 발트 해 유역에는 콘라트 1세가 이교도 정복을 위해 도움을 청한 이래 머물러 살고 있던 튜턴 기사단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이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1410년의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튜턴 기사단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튜턴 기사단에게 압도적 우세를 점했다. 이후 13년 전쟁을 치른 후, 드디어 카지미에시 4세가 튜턴 기사단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에 복속되게 된다. 야그에우워 왕조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유역에도 그 손을 뻗쳤으며,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대치하며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다. 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다.

크라쿠프의 바벨성은 1038년부터 1596년 바르샤바 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폴란드 왕 의 거처

당시 폴란드는 점차 농경에 기반을 한 봉건제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귀족이 대토지를 소유하며 그 권력이 대단히 강했으며, 나중에는 '니힐 노비'를 제정하여 대부분의 입법권을 국왕에게서 귀족 세력으로 가져오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국정은 점차 대귀족들이 장악하였다. 이 시기를 귀족들의 황금시기였다고 하여 '황금빛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에 유럽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종교 개혁 시기에 폴란드는 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종교적 관용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로 인하여 16세기 전반에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 관련 갈등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르네상스도 점차 폴란드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지그문트 1세지그문트 2세 재위기인 야그에우워 왕조 후기에 대대적인 계몽 운동이 일어났으며, 폴란드의 문화적 황금기를 맞았다. 1543년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태양중심설을 주창한 책이자 현대 천문학의 기틀을 놓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였으며, 또한 유명한 고전시인인 얀 코하노프스키도 이 때 활동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1619년 최대 규모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튜턴 기사단 정복 이후 세력을 크게 불려나갔다. 1569년의 루블린 연합으로 선거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거대한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만들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주로 귀족층들에 의하여 통치되던 나라로, 귀족 중심의 의회가 국왕을 제치고 대부분의 권력을 차지하였다. 한편 1573년에는 폴란드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나, 농노의 경우에는 여전히 귀족들의 탄압에 시달렸으며 각종 제재도 굉장히 많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성립된 이후, 폴란드에는 번영의 시대가 찾아왔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럽의 핵심 강대국들 중 하나로 떠오르며 그 문화의 꽃을 피웠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동부 유럽에서 거의 백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서부 등지에 유럽 문화를 전파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지그문트 3세브와디스와프 4세의 재위기에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제국 등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였으며, 여러 차례 코사크인들의 반란도 겪었다. 폴란드 군대가 클루시노 전투에서 러시아를 꺾고 모스크바까지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1611년에는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국왕에게 조공을 바치기까지 하였다. 데울리노 조약을 체결한 직후, 1620년대의 폴란드 영토는 거의 백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했다.

17세기 중반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본 정치 체제였던 귀족 과두정이 점차 균열을 일으켰다. 부정부패와 음모가 들끓었으며, 귀족 세력들은 서로에 대한 견제에만 몰두하며 정작 국가의 권력은 약해져만 갔다. 1648년에 코사크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차르에게 잃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인들이 쳐들어와 폴란드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후 17세기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하락세는 가속화하였고, 100여 년 동안 전체 1,1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400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나 전쟁으로 사망하였다. 다만 얀 3세의 재위기에 잠시 군사력을 다시 회복하였으며, 1683년에는 빈 포위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무공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얀 3세의 사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황금기는 마침내 완전히 끝났으며 폴란드는 지속적인 전쟁과 경제 파탄으로 신음하기 시작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쇠락세로 접어들었으며,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며 중앙 정부는 지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파벌을 만들어 싸웠고, 베틴 가문의 유약한 아우구스트 2세아우구스트 3세가 연달아 재위하며 국왕의 권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또한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대북방전쟁 이후 급격히 성장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상대적으로 더욱 약해졌다.

18세기 후반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대대적인 내부 개혁에 착수하였고, 이후 경제가 상당히 회복되고 인구가 늘어나며 교육의 질도 많이 개선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한 당시 수도였던 바르샤바가 역사적으로 폴란드 1의 항구도시였던 그단스크의 경제력을 능가하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도시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폴란드 분할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슬라프 2세 아우구스투스

1764년에 치러진 폴란드 국왕 선거에서,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스타니스와프 국왕은 입헌군주제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인물이었으며, 근대적 개혁에도 의지가 있는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때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의 정치적 동맹들 중 하나였으며,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였다. 국왕이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자, 1768년에 바르 동맹이 결성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러시아로부터 지켜내고 귀족들의 특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폴란드 국왕과 러시아를 몰아내고자 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시도로 위기감을 느낀 외세가 폴란드 내부로 밀고 들어왔고, 1772년에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1차 폴란드 분할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폴란드는 영토의 30%를 빼앗겼으며,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국민들이 폴란드 국적을 빼앗겼다. 1773년에는 폴란드 국왕이 유럽의 첫 정부 교육 정책인 국가교육조서를 반포하였으며, 1783년에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학대가 전면 금지되었다.

스타니스와프 국왕은 1788년 8월에 의회를 개회하였으며, 유럽 최초의 근대 헌법인 5월 3일 헌법을 채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헌법이 담고 있던 혁명적 내용들과,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내용에 경계심을 가진 폴란드 내의 귀족 세력들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다시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아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완전히 해체시켜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고, 1792년 5월에는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 국경 내부로 쳐들어오며 폴란드-러시아 전쟁이 터졌다.

폴란드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쳤으나, 패색이 짙어지고 국왕이 주화론자들에게 설득당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났다. 친러 성향의 귀족들이 정부를 장악하였으며, 폴란드의 재건을 두려워한 프러시아와 러시아는 결국 2차 폴란드 분할을 통하여 거의 대부분의 폴란드 영토를 빼앗아 갔으며 반속국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1795년에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반러시아 성향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였으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마지막으로 3차 분할하여 지도에서 폴란드 자체를 지워버렸다.

반란기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 왕국(파란색), 러시아 제국(갈색),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정(녹색)이 수행한 폴란드의 분할.

폴란드가 외세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고 난 이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폴란드에서는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1794년에는 폴란드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실패한 봉기였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장군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봉기를 이끌었던 코시치우슈코 장군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 장군 하에서 싸우기도 했으며, 대중적으로 인기도 많았으며 군재도 있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러시아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으며, 그마저 러시아 군대에게 진압당하자 폴란드는 이후 123년 동안 외세에게 지배당하게 된다.

1807년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시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만들어 폴란드인들의 국가를 다시 세웠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하자, 폴란드는 1815년의 빈 회의에서 다시 승전국들에게 찢겨 나갔다. 동부 지역은 러시아의 차르가 폴란드 입헌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스렸으며, 이 곳에는 그나마 자유주의적인 헌법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차르는 점차 시민권을 탄압하였으며, '폴란드'라는 이름 빼고는 거의 합병과 동일한 정책을 펼치며 폴란드 독립운동을 막았다. 한편 프러시아는 차지한 폴란드 영토에 대대적인 독일화 정책을 펼쳤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는 상대적으로 탄압이 덜해서, 특히 크라쿠프 자유시 등에서 폴란드 문화가 흥성했다.

외세 통치기 동안 폴란드인들에 대한 동화 작업과 탄압이 수없이 가해지자, 점차 지하에서 여러 봉기들이 조직되어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1830년에는 바르샤바에서 사관생도들의 주도로 11월 봉기가 일어나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에서 쫒아내 북쪽으로 일시 후퇴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약 7개월 동안 폴란드 반란군은 러시아 군대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프랑스나 미국과 같은 전통적 우방들이 협조를 거부하고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도 자국령 내에서의 반란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영토를 통한 물자 수송을 거부하면서 그 힘이 약화되었다. 결국 폴란드인들은 봉기 실패를 받아들였으며, 러시아에게 항복하고야 말았다. 봉기가 진압되자 폴란드 입헌왕국의 헌법마저도 사라졌으며,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되는 수순을 밟았다. 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던 시대인 1848년 혁명에서 폴란드인들도 봉기를 일으켰으며, 프러시아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단순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나, 이후 프러시아가 군대를 파견하는 등 사태가 격화하며 무력 투쟁으로 바뀐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혁명은 실패하였으며, 프러시아령 폴란드였던 포센 대공국이 완전히 프러시아에 병합되었다.

1863년에는 또다시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젊은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군대의 징집령에 반발하여 1월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정치인들과 군 장교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너무나 수적 열세였으며, 외국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게릴라전으로 맞설 수 밖에 없었으며, 주요 전투에서 승리한 적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한 무력 저항이 여러 차례 무력화되는 것을 지켜본 폴란드 시민들은 결국 무력 저항을 포기하고 경제적, 문화적 자강 운동을 펼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이후 폴란드 입헌왕국은 19세기 말에 급격히 산업화의 길을 걸었고, 러시아 제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발전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비록 폴란드가 이 시기에 외세에 지배당하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기는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대대적인 산업화현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이 지역에 대대적 경제 재건 정책을 펼쳤고, 특히 실레시아, 동 포메라니아 등지에서 공업의 발달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나중에 폴란드 제2공화국이 세워졌을 때에도 이 지역들이 공화국의 최고로 발달된 지역이었다고 한다.

폴란드 제2공화국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918년부터 1935년 5월 12일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 독립 운동의 영웅이자 폴란드 최초의 정치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전쟁에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자 승전국들은 당시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따라 폴란드가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당시 2백만 명의 폴란드인 병사들이 각기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국가들을 위하여 싸웠으며, 이들 중 45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1918년 11월에 독일과 평화협정이 맺어지면서 연합국 세력이 완전한 항복을 받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폴란드가 독립을 얻어내었으며, 이 시기의 폴란드를 폴란드 제2공화국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등을 포함한 일부 국가들은 폴란드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시 폴란드를 재점거하려 들었는데, 이로 인해 일어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군대가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소비에트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바르샤바 전투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는데, 이 전투로 인하여 공산주의가 유럽 쪽으로 침투하는 것을 잠시나마 막아낼 수 있었으며, 그 충격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조차도 공산주의의 세계화에 대하여 재고하게 만들 정도였다.

폴란드는 독립 이후 3국으로부터 돌려받은 영토들을 다시 하나로 융합하게 하는 데에 전력을 쏟았으며, 이전의 철도들을 제거하고 다시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 철도망이 깔렸으며 국제무역을 장려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데에 온 힘을 들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3국은 폴란드 내부에서 소요를 방지하고 군기를 잡기 위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하였는데, 이후 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침내 100여 년 만에 독립을 찾게 되면서 정치적인 대격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폴란드가 독립되고 난 직후, 수많은 해외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이 돌아왔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고국으로 돌아와 총리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해외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폴란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막 취임한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초대 대통령이 극우 민족주의자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폴란드 정계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1926년에는 폴란드의 독립을 이끈 군사영웅이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5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폴란드 정계의 혼란이 일단 가라앉게 된다. 피우스트스키는 극우, 극좌 세력들의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하였으며, ‘치유’ 정책을 펼치며 정치적 중도 세력들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1935년에 피우수트스키 총통이 사망하자, 다시 극단 세력들이 준동하기 시작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에 이르자 국내에서 공산주의, 극우 정당들이 판을 치면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1940년 10월 영국 전투 중 303 폴란드 전투기 편대의 조종사들.

1939년 9월 1일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7일에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9월 28일에는 바르샤바가 함락되었으며, 독-소 불가침 조약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서로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한 것에 따라 폴란드는 2개로 나뉘어 각각 독일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소련은 폴란드에 극심한 탄압을 가하면서 통제 정책을 펼쳤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에는 카틴 학살 등을 포함하여 조직적으로 수많은 폴란드인들을 숙청하며 공포 정치를 펴갔다. 독일도 폴란드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스 독일이 폴란드를 혹독하게 탄압하자 폴란드인들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연합국 세력에게 정보를 빼돌렸고, 나중에는 독일군의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유럽에서 4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병력을 세계대전에 투입하였으며, 폴란드인들은 서부 전선에서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휘를,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의 지휘를 받으며 전쟁에 참여하였다. 서부권에서는 북아프리카 원정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동부권에서는 바르샤바와 베를린 점령에도 기여하였다고 한다.

추방 경로와 학살 장소가 있는 독일 점령 폴란드 홀로코스트 지도. 주요 게토들은 노란색 별들로 표시되어 있다. 나치의 말살 수용소는 검은 사각형 안에 하얀 해골로 표시되어 있다. 1941년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의 국경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전쟁 내내 폴란드 국내에서도 수많은 반나치 무장단체들이 등장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대표적인 3대 저항단체들 가운데에 하나로 꼽히는 폴란드 국내군이 있었는데 세력이 가장 클 때에는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동원할 역량을 갖추었다. 최종적인 목표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다시 국내로 데려오는 것이었으며, 보통의 경우에는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성향이었다. 1944년 8월에는 소련이 바르샤바로 진격하기 직전에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켜 자주적인 폴란드 독립을 이루려 하기도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폴란드 점령지에 6개의 절멸수용소를 지었으며, 가장 대표적으로 트레블링카, 아우슈비츠, 마즈다네크 집단 수용소들이 있었다. 나치는 전 유럽에서 수 백만명의 유대인들을 실어와 이 집단 수용소에서 가스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폴란드 유대인의 90%에 달하는 3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사망하였으며, 180만 명에서 28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독일군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이들 중 10만 명 정도는 교수, 변호사, 의사, 귀족 등 전통적인 폴란드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바르샤바 봉기 동안에만 15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살해당했으며, 1939년과 1941년 사이에는 15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소련에 의하여 점령된 구역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또한 1943년과 1944년 사이에는 약 10만 명 정도가 볼히니아 지방에서 우크라이나 자치군(UPA)에 의하여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폴란드는 세계대전 동안 600만 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의 6분의 1 이상을 잃으며 가장 높은 비율의 인구 피해를 본 국가가 되었으며, 이들 중 절반이 전통적 폴란드 부유계급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1945년에는 폴란드의 국경이 서쪽으로 대거 후퇴하였다. 소련은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폴란드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국령으로 편입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폴란드의 영토는 거의 20% 가까이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폴란드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해야만 했다. 한편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도 이 영토는 다시 폴란드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대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는 오데르-나이세선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경선이 확립되고 이 국경선을 통하여 이전의 독일 영토가 대거 폴란드에 편입되면서 폴란드 자체가 서쪽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폴란드 인민공화국

전후 처리를 위하여 승전국들이 개최한 얄타 회담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하여 결국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공산주의 폴란드 임시정부의 수립이 승인되었다. 이는 누가 보아도 런던에 자리하던 폴란드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며, 이 행동을 폴란드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인 수많은 폴란드인들은 당연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944년에는 스탈린이 처칠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소련이 폴란드의 독립을 유지할 것이며, 민주적인 선거를 시행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폴란드의 속국화에 대한 의심을 풀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45년에 공산당 감시 하에서 치러진 부정선거에서 승리하며 폴란드의 권력을 틀어쥔 직후, 결국 소련과 공산당은 폴란드 자치를 부정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내정 간섭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소련은 폴란드에 새로운 공산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인근의 공산 정권들과 합쳐 동구권의 핵심 구성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1940년대에 소련은 심지어 대독 전쟁에서 싸운 독립 영웅들까지 탄압하며 극심한 스탈린주의식 탄압 정책을 펼치며 국민들의 인심을 잃었고, 1950년대까지는 수많은 유혈 시위들도 일어났다.

새롭게 세워진 폴란드 공산정권은 국민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전쟁 도중 점령한 폴란드의 동부 영토를 편입하는 것을 허가하였으며, 붉은 군대가 폴란드 내부에 영구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또한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조인된 바르샤바 조약으로 인하여 냉전이 극도로 심화하게 되면서 폴란드의 정치적 지위도 급격히 달라졌고, 폴란드는 서구권 국가들과는 급격히 멀어졌으며 반면 같은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구권 국가들과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새로운 공산정부는 1946년 2월에 소헌법을 채택하였고, 1952년에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1956년에는 소련을 등에 업고 대대적인 탄압을 펼쳤던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대통령이 집권하였다. 고무우카 대통령은 비에루트 대통령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유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정치범을 석방하는 등 일부 검열을 완화하기도 하였다. 한편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존속하던 기간 거의 내내 반공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구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여겨졌다.

1980년대에 갈수록 경제가 악화되고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폴란드 내부에서 점차 반정부적인 분위기가 강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가 설립되었으며, 점차 반정부 성향을 띠며 정부와 대척점에 서있는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연대는 1980년대의 탄압과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활동하였고, 나중에는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정당인 폴란드 연합노동자당을 꺾고 1989년의 부분적 자유선거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연대의 대통령 후보이자 당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는 결국 1990년의 대선에서 승리하였으며, 폴란드 공산당의 해체는 동구권에서의 공산주의 봉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화 이후

레흐 바웬사 폴란드 전 대통령

1990년대 초에는 레셰크 발체로비치 재정부 장관이 대대적인 충격 요법을 통하여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역시 타 구 공산권 국가들과 비슷하게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1995년에는 경제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회복하면서 1989년 이전의 GDP를 회복한 첫 구 공산권 국가로 떠오르기도 했다.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 이후 폴란드에서는 발언의 자유, 인터넷의 자유, 시민권, 정치권 등이 크게 신장하였으며,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91년에는 비셰그라드 그룹에 가입하고, 1999년에는 체코 및 헝가리와 함께 NATO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2003년 6월에는 국민 투표를 열어 EU에 가입할 지에 대한 여부를 선거에 부쳤고, 이에 가결되어 2004년 5월 1일에 정식 회원국으로 참여하였다. 다만 유로존에는 가입하지 않고, 기존 즈워티를 이용하고 있다.

폴란드는 2007년에 솅겐 조약에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폴란드의 서부 국경과 접하고 있는 EU 회원국 대부분과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졌다. 반면 동부 국경에 접하고 있는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은 EU에 가입하지 않아서 마음대로 이동하기에는 제약이 있다. 오히려 이 동쪽 국경선은 감시가 더욱 강화되는 중인데, 이로 인하여 ‘유럽의 요새화’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폴란드는 군사력 강화 목적의 일환으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과 비셰그라드 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약 3,000여 명의 군인들을 즉시 파병할 수 있는 상태로 두고 있다. 2010년 4월 10일에는 폴란드 대통령인 레흐 카친스키와 그와 동행한 89명의 폴란드 고위 공직자들이 카틴 학살을 추모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전원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여당이자 보수 우익 정당이었던 시민연단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2012년에는 유럽우주국에도 가입하였다. 2013년에는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폴란드 국무총리인 도날트 투스크가 유럽연합 상임의장에 지명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총리직을 사임하고 상임의장직에 올랐다.

2015년과 2019년 폴란드 총선에서는 보수적인 법과 정의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법과 정의당이 점차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EU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다. 2020년 폴란드 대선에서는 법과 정의당 출신의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690만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이 폴란드에 도착했다.

정치

헌법과 정부

폴란드 의회의 하원 Sejm
1791년에 채택된 5월 3일의 헌법은 유럽 최초의 근대 헌법이었다.

폴란드는 오랜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1791년 현대적인 헌법을 제정하였고, 1918년 폴란드 제2공화국 시대에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한 앞선 민주주의 전통을 갖는 나라이다. 폴란드는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1992년 임시 헌법을 제정하고, 1997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폴란드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로, 대통령은 국가수반이며 군통수권자이고, 5년마다 실행하는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대통령은 대외적으로 폴란드를 대표하는 국가수반으로 국제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대사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한다. 또한 군통수권자로서 각군의 사령관을 임명한다.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는 후보자가 과반수 이상의 표를 획득해야 한다. 만약 어느 한 후보도 후보가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하면 1, 2위 후보자 간 결선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한다. 2020년에 취임한 안제이 두다(Andrzej Duda) 대통령은 1차 선거에서 43.50% 득표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해 결선 투표에서 51.03%로 승리를 한 바있다. 대통령은 하원에서 통과한 입법에 대해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데, 이 경우 하원에서는 3/5 이상의 표결을 통해 대통령의 비토권을 기각시킬 수 있다.

총리(prime minister)는 정부수반으로 내각에 해당하는 국무이사회(Council of Ministers)를 구성하여 정부를 운영한다. 총리는 대통령이 하원(Sejm)의 다수파 간 연합에서 선임한다. 총리는 대통령에게 국무이사회 구성을 위한 인선을 건의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면 하원의 승인을 거친다. 이와 같이 대통령은 정부 즉, 국무이사회 구성에 관여하지만 대통령이 정부를 해산할 수는 없고, 하원에서 내각에 대해 불신임권을 발동할 때만 내각의 해산이 가능하다. 총리는 내각의 장관과 함께 정부를 운영하며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

바르샤바의 대통령궁

의회와 정당

폴란드는 양원제 의회로 하원(Sejm)과 상원(Senat)으로 구성된다. 하원은 4년마다 치러지는 선거로 선출된 4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하원의장(Marshal of the Sejm)이 회기를 주재한다. 하원은 헌법재판소 판사, 옴브즈맨 위원장, 감사원장, 중앙은행장 임명권을 갖는다. 하원은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전국에서 5% 이상의 표를 얻어야 의원을 배출할 수 있다.

한편 100명 정원의 상원은 4년마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다. 입법 제안은 하원과 상원에서 모두 통과해야 입법화되는데, 상원은 하원에서 통과된 입법을 수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만약 상원에서 입법이 거부되면 하원은 다수결 표결을 통해 상원의 결정을 기각할 수 있다. 상원과 하원이 모두 참석하는 국회(National Assembly)는 대통령의 취임선서, 국무재판소(State Tribunal)에 대통령 고발,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등 세가가지 사안에 한해서만 개최된다. 폴란드는 대통령 탄핵제도를 두지 않아 대통령에 대한 해임은 독립적인 사법기관인 국무재판소(State Tribunal)에 고발을 통해 진행된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선서 이외의 사안으로 상하원이 모두 모인 국회가 개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폴란드는 의원 선거마다 많은 정당이 난립하는 특징이 있다. 2019년 하원선거에서는 15개의 정당이 후보를 내세웠는데 중도우파 성향인 법과 정의당(PiS: Prawo i Sprawiedliwość)이 460석 중 235석을 점해 제1당으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법과 정의당은 2015년부터 제1당으로 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사법부의 독립성 제약과 유럽통합에 대한 비판적 노선으로 유럽의회에서 폴란드 정부에 대한 제재가 논의된 바 있다. 제2당은 134석을 점한 시민연합(Civic Coalition)으로 2019년 선거에서 134석을 점하였다. 시민연합은 북부와 서부지역에서 지지기반이 넓은 정당이다. 이외에 좌파(The Left), 폴란드연합(Polish Coalition), 연합(Confederation) 등 3개의 군소 정당이 각각 50석 미만을 점하고, 독일계 주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독일소수당(German Minority)이 1석을 점하고 있다.

행정

폴란드의 행정구역

폴란드의 행정구역은 16개의 주(voivodeships)와 380개의 구역(powiats), 2,487개의 자치시(gminas)로 세분되어 있다. 바르샤바와 같은 대도시는 단일의 구역으로 고도의 자치권을 갖는데, 폴란드 전역에 총 66개 도시가 구역으로 분류된다.

주(voivodeships)는 가장 큰 행정단위로 14세기부터 유지되어 온 폴란드의 기본 행정단위이다. 1998년 공공행정개혁법(Public Administrative Reform Act) 제정으로 기존 49구개로 세분화되었던 주가 16개로 통합되었다. 16개의 주의 주지사는 주의회(sejmik) 의원 중에서 후보자를 선정하여 제적의원 과반 이상의 표결을 통해 선출한다. 주지사는 정부의 내각과 유사한 주의 행정부를 구성하여 운영한다. 대부분의 주는 최대 2명의 부지사를 두고 있는데, 선출 절차는 주지사와 동일하다. 만약 주지사가 임기 내 헌법 및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경우 주의회는 제적의원 2/3의 표결로 신임을 물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중앙정부의 수상이 해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주는 380개의 구역(powiats)으로 나뉘고 다시 2,487개의 자치시(gminas)로 세분화된다. 그러나 360개의 구역 중 66개의 구는 대도시로서 자치시로 다시 나뉘지 않고 독립적인 자치시 형태로 운영된다. 폴란드의 구역은 주와 동일하게 14세기부터 이어진 행정단위로 선거로 선출된 이사회(council)에서 운영한다. 폴란드에서는 실질적인 행정은 최하위 행정단위인 자치시에서 담당하므로 구역의 권한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일부 구는 고등교육, 보건, 대중교통, 외국인에 대한 노동 허가, 차량 등록 등 여러 기능을 담당한다.

2,487개에 달하는 최하위 행정단위인 자치시(gminas)는 공산주의 시절인 1974년부터 많은 촌락과 마을을 묶어 만든 행정단위이다. 자치시는 320개의 소도시와 마을로 구성되며 이외에는 작은 촌락과 이보다 규모가 다소 큰 마을 등이 혼재된 곳이다. 자치시는 선거로 선출된 시장과 시이사회(municipal council)를 통해 운영된다.

한편 폴란드의 경찰조직은 중앙정부에서 관할하는 중앙경찰 이외에 자치시 경찰(Municipal City Guard)과 국경경찰(Border Guard)을 따로 두고 있는데 모두 내무행정부(Ministry of Interior and Administration)가 관할한다. 다만 자치시 경찰은 공식적으로는 내무행정부 산하이지만 해당 지방정부의 시이사회(City Council)가 통제·관리한다. 또한 폴란드는 국내에서 테러위협 등 국내안보를 다루는 내무안보국(Internal Security Agency)과 해외정보기구(AW: Agencja Wywiadu) 등 두 개의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사법부

폴란드 사법부와 법원은 독립되어 있으며 대법원(Supreme Court), 최고행정법원(Supreme Administrative Court),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Tribunal), 각 지역에 설치된 일반법원(Common Courts) 그리고 군사법원(Military Court) 등으로 구성된다. 판사는 대통령이 임명하며 판사는 임기를 두지 않는 종신직이다. 한편 하원은 상원의 승인을 받아 5년 임기의 옴브즈맨(ombudsman)으로 불리는 시민권리보호위원장(Commissioner for Civil Rights Protection)을 임명한다. 옴브즈맨은 법과 사회적 정의에 입각해 폴란드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감독하는 임무를 갖는다.

폴란드는 국무재판소(State Tribunal)를 별도의 독립적 사법기관으로 운영한다. 국무재판소는 헌법 위반, 대통령, 장관, 감사원장(President of the Supreme Chamber of Control), 중앙은행장, 중앙부처의 수장과 고위 공무원 등의 헌법질서 위반과 비리를 다루는 곳이다. 국무재판소는 판결을 통해 공직 박탈, 훈장 취소, 선거와 피선거권 박탈 그리고 형사범죄의 경우 이에 준하는 헝벌 등으로 제재를 가한다.

국방

폴란드 공군 F-16s

폴란드군의 임무는 영토 수호와 함께 국제적 차원에서 폴란드의 이익 수호로 특별히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서 군사적 목표를 공유한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유럽연합 내에서 안보방위정책 확대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며, 미국과 군사협력이 활발한 국가이다. 단적으로 폴란드는 2003년 이라크 전쟁시 유럽연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청을 수락하여 영국과 함께 독단적으로 참여한 바 있다. 또한 2020년에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주독일 미군의 유지비 문제로 독일과 갈등을 빚자 폴란드는 주둔비 전액 부담을 약속하며 미군의 폴란드 주둔을 요청한 바 있다.

폴란드군은 육해공 3군 체제에 특수부대(Wojska Specjalne)와 영토방위군(Territorial Defence Force) 등 다섯 개의 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평화 시 대통령은 군의 최고통수권자로 국방부장관과 각 군의 사령관 임명권을 행사한다. 2020년 기준 폴란드 정규군은 총 123,700명이며, 육군병력 절반을 점한다. 이외에 2019년 기준으로 공군 16,500명, 해군 7,000명, 특수부대, 3,500명, 영토방위군 21,700명의 병력이 있다. 폴란드는 2007년까지 징집제를 유지해 성인 남성은 9개월간 의무복무를 하였으나, 2008년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보병과 기계화 부대를 포함하여 육군 위주로 군이 운영된다. 반면에 공군은 가상 적국인 러시아를 겨냥해 발트지역의 영공 수호를 담당한다. 한편 폴란드 해군은 발트해에서 영토 방위와 순찰은 물론이고 해난구조활동과 해양지리 탐사 및 연구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중동유럽의 군사강국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로부터의 잠재적 위협으로 유럽연합 회원국 내에서 GDP 대비 방위비 지출비중이 큰 국가이다. 폴란드군의 최대 현안은 서유럽의 NATO 회원국에 준하는 군작전과 기동능력 향상, 공군력 강화 및 정예군의 양성이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폴란드는 2020~2035년 기간 총 1,330억 달러의 국방비를 배정하여 장기적인 군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2020년 기준 방위비 지출은 GDP 대비 2% 수준인 135억 달러에 달했다.

한편 폴란드는 주요 무기의 국산화를 위해 방위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대외수출에도 적극적이다. 2000년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에 따르면 폴란드의 방위산업 수출액은 4억 8,700백만 달러 규모로 중동유럽에서는 최대의 방위산업 수출국이다.

중동유럽 국가 중에서도 국제사회의 평화유지 활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국가로 폴란드군의 해외파병은 유서가 깊다. 폴란드는 공산주의 시절인 1953년 유엔평화유지자문관 자격으로 한반도의 중립국감독위원회(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에 참여하였다. 또한 1954~1975년 기간에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1973년에는 이스라엘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공산주의 붕괴 직후인 1990~1991년 기간에도 역시 유엔의 일원으로 이라크에 군병력을 파견하였다. 이후에도 폴란드는 2003년 제2차 이라크 전쟁에 2,500명의 전투병을 파견하여 당시 17개국에서 모인 병력을 지휘하였다. 2005년에는 파키스탄에서 NATO와 함께 작전에 참여하였고, 2007~2010년 기간에는 차드와 중앙아프리카에 평화유지군으로 병력을 파병하였다. 2019년 기준 중동, 발트지역, 발칸반도에 1,650명의 폴란드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외교

바르샤바에 위치한 외무부

폴란드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중간에 위치한 입지로 NATO의 핵심 회원국이며 중동유럽에서는 외교, 군사 및 경제부문에서 지역강국이다. 또한 국제사회에서는 한국, 튀르키예 등과 함께 중견국의 위상을 갖는 국가이다. 폴란드는 유럽통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공산주의 붕괴 이후인 1991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역통합기구인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에 가입하였다. 또한 같은 해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함께 정치경제협력체인 비세그라드(Visegrad)를 결성하였다. 폴란드는 1996년에 OECD 가입 이후 세계보건기구, 국제통화기금 등 주요 국제기구에 모두 가입하였으며, 2004년에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되었다.

폴란드 외교정책의 핵심은 러시아로부터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유럽안보협력기구(OSCE: Organis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와의 적극적 협력이다. 또한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NATO를 주도하는 미국과의 군사적 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은 폴란드의 안보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군사력을 증강하고 친나토와 친미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치, 경제측면에서 폴란드 외교정책 목표는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서 유럽국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폴란드의 이해 관철이다. 폴란드는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어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러시아와 접한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중동유럽 국가 중 가장 큰 경제규모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버금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으로 폴란드는 2014~2020년 기간 유럽연합이 낙후지역에 지원하는 구조기금(structural fund) 총액의 22.5%를 지원받았다. 폴란드의 인구가 유럽연합 인구의 7.6%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폴란드의 막대한 구조기금 수혜는 유럽연합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말해준다.

한편 폴란드는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11개국에 달하는 중동부 유럽 회원국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입지로 폴란드는 유럽연합에서 가장 비타협적이고, 지나치게 자국 이익을 내세운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폴란드의 이해가 걸린 농업, 이민, 에너지.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매 사안마다 서유럽 회원국과 의견충돌을 빚어왔다. 단적으로 2000년 들어 폴란드는 유럽연합의 강화된 이산화탄소 감축정책에 반발하여, 자국에게 예외를 요구하여 관철한 바 있다. 2015년 이후부터는 폴란드 집권당인 보수계열의 법과 정의당(PiS: Prawo i Sprawiedliwość)은 유럽연합이 배정한 난민 할당을 거부하면서 강경하게 대립하기도 하였다.

대한관계

한국과 폴란드는 1989년 11월에 수교하였고 같은 달 바르샤바에 주폴란드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으며, 이듬해 1990년 1월 서울에 주한폴란드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한편 폴란드는 북한과는 1948년 10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과 폴란드는 1989년 11월 수교 이후 양측에서 대통령과 총리 등 주요 인사들의 상호방문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한국 측에서는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과 2009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이 폴란드를 방문하였고 1996년 5월에는 이수성 국무총리 그리고 1998년 김종필 국무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하였다. 이외에도 외교, 통상, 문화 등 여러 부처의 장관들이 폴란드를 방문하였다.

폴란드의 역대 대통령은 대부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94년 12월 레흐 바웬사 대통령, 2002년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Aleksander Kwaśniewski) 대통령, 2008년 12월 야로스와프 카친스키(Jarosław Kaczyński) 대통령 그리고 2013년 10월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2018년 2월에는 안제이 두다(Andrzej Duda)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참관을 위해 내한하였다. 이외에도 1996년 6월 예르지 버체크(Jerzy Buzek) 총리도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의 폴란드에 대한 무역규모는 2019년 기준 60억 9,000만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기계, 평판디스플레이, 자동차부품, 승용차 등이다. 한편 폴란드의 대한 수출은 2019년 기준 7억 7,000만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기타 금속광물, 전원장치, 도자기, 자동차부품, 의약품 등이다. 한국의 폴란드에 대한 투자는 2019년 누계 기준 31억 4,000만 달러이며 폴란드 내에 265개의 한국법인이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중 90%가 제조업 분야이다. 한국기업의 폴란드에 대한 투자는 전자, 가전, 자동차 등 서유럽 시장을 겨냥한 첨단 제조업에 집중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플랜트, 에너지 및 R&D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폴란드에 대한 수출과 투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유럽연합(EU)의 단일시장 수출을 위해 다수의 한국기업이 폴란드에 공장을 설립하고 투자를 확대하였기 때문이다. 폴란드 역시 경제발전을 위해 한국을 주요 통상 대상국으로 고려하여 적극적인 투자유인정책을 취하여 유럽에서 대한투자 규모가 가장 큰 국가가 되었다. 한국과 폴란드는 활발한 경제교류에 힘입어 동유럽 항공사로는 유일하게 2016년 10월부터 폴란드 로트(LOT)항공사가 한국에 취항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항공사는 상업적 이유로 아직 폴란드 정기노선을 개설하지 않고 있다.

경제

바르샤바 증권거래소

2018년 세계은행(World Bank)에서는 폴란드를 고소득 경제로 분류하였고, 역시 세계은행의 2020년 국가별 GDP 순위에서 폴란드의 명목 GDP는 세계 22위로 높은 수준이다. 2023년 폴란드는 국내 총생산 (GDP)은 명목 기준으로 유럽 연합에서 6위, 구매력 기준으로 5위이다. 1945년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철강, 조선, 자동차중공업이 발달하였는데 국영기업이 국내총생산의 약 70%를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경공업 부분은 크게 위축되어 산업 간 불균형이 심화된 경제구조였다.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되어 이듬해 1990년 민영화법이 제정되고 시장경제로 전환되면서 대표산업인 중공업은 경쟁력을 잃고 도산하거나 문을 닫았다. 중소기업 위주의 경공업 역시 자생력이 취약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90년 당시 폴란드 총리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는 대대적인 시장경제 전환을 단행하여 철도, 광산, 철강, 방위산업 등 경쟁력 없는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거나 폐쇄하였다. 이러한 산업구조 개편으로 1990년대 말부터는 점차 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등장하였다.

1990년대 초 경제체제 개혁의 성공에는 외국의 막대한 원조가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1989년 이후 유럽연합은 폴란드-헝가리 경제재건 원조프로그램(PHARE: Poland and Hungary: Assistance for Restructuring their Economies)을 마련하여 폴란드를 포함한 중동유럽국가에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이와 별도로 유럽연합은 농촌지역 개발과 환경, 교통 등 인프라 건설 프로그램을 통한 지원으로 폴란드는 빠른 시간 내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폴란드는 1990년대 말부터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성장이 본격화되었고,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유럽에서 경제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가 되었다. 2020년 기준 폴란드는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중 6번째로 경제규모가 큰 국가이다. 폴란드는 사회주의 경제 붕괴이후인 1989년부터 유로존의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까지 연평균 2.9%의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폴란드는 유로존 위기시 경제침체를 겪지 않은 유일한 유럽국가로 2011년에 무려 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폴란드는 1990년부터 2019년까지 약 30여 년간 GDP 규모는 7배로 확장되어 OECD 회원국 중에서 호주에 이어 경제성장이 가장 빠르게 진행된 국가가 되었다. 이 결과 폴란드는 2013년 기준 유럽연합 평균 GDP 대비 67% 수준에서 2018년에는 70%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유럽연합에 가입한 2004년 이후 폴란드의 경제성장은 유럽연합이 경제사회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지원하는 구조기금(structural fund)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폴란드는 2014∼2020년 기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받은 원조금액의 약 2배의 달하는 약 727억 달러에 달하는 구조기금을 받았다. 이러한 금액은 매년 폴란드 정부지출의 약 6∼10%에 달하는 큰 금액으로 폴란드 경제발전에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폴란드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유치 정책 역시 경제성장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폴란드는 1990년대 체제전환 직후부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경쟁적으로 우호적인 조세정책을 내세워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였다. 폴란드 중앙정부는 2011년부터 경제특구(Special Economic Zone)를 건설하여 투자 인센티브 및 조세감면 혜택을 주어 많은 기업을 유치하였다. 지방정부는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받은 구조기금을 활용하여 독립적인 투자유치 정책을 취하였다. 대표적으로 남부도시 체스토호바(Czestochowa)의 경우 고용주가 최저임금의 최소 150% 이상의 임금을 책정할 경우 세금을 면제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대부분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받은 구조기금 수혜에 기인하였다.

폴란드는 정부차원의 우호적인 조세정책 이외에도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중동유럽에서 상위 수준의 우수한 노동인력,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지리적 이점으로 다국적 기업들에게는 유럽시장을 겨냥한 최적의 제조업 생산기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폴란드는 유럽연합 회원국으로서 안정된 거시경제 환경과 3,800만 명에 달하는 건실한 내수시장이 큰 장점이다. 이외에도 폴란드는 유럽연합이 추진하는 범유럽 운송네트워크(trans-European transport)의 동유럽 거점이며, 도로와 철도망이 러시아와 이어져 유라시아 대륙의 물류거점으로 장점을 갖는다. 이러한 요인으로 폴란드는 매년 전 세계 주요 경제지와 조사기관에서 헝가리, 에스토니아 등과 함께 중동유럽 내에서 최고의 투자 적격지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폴란드의 경제 중심지는 바르샤바, 포즈난, 브로츠와프 등 3대 대도시이다. 이외에도 크라쿠프, 그단스크, 슈체친, 제슈프 등 중소도시도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이 진행되고 있다.

산업구조

폴란드의 산업구조는 2017년 기준 서비스 산업 62.3%, 제조업을 포함한 2차 산업 34.2% 이외에 농업부문은 3.5%로 서유럽과 유사한 산업국가군에 포함된다. 다만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 등 산업선진국과 비교하면 제조업 부분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는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중공업 위주의 산업구조였고, 2000년대 이후 유럽의 제조업 생산기지로 부상하면서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제조업 기업이 상당수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공산주의 시절까지 석탄, 철강과 금속, 화학, 기계, 섬유 등 주로 중공업 분야가 발달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는 석유화학, 기계장비, 전자, 전자부품,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조선, 가구 및 플라스틱 등이 대표적 산업이 되었다. 이외에 구리, 은, 석탄 등 1차 산업도 여전히 주요한 산업이다. 이들 산업은 대부분 외국계 기업의 직접투자를 통해 성장하였다.

대표적인 제조업 기업은 전기버스트램 생산업체인 솔라리스(Solaris), 전기와 디젤기관차 생산업체 페사(Pesa)와 네박(Newag), 조선기업인 그단스크조선소(Gdańsk Shipyard)와 슈체친조선소(Szczecin Shipyard), 군사장비기업인 우흐즈니크(Łucznik) 등이다. 올렌(Orlen)과 로토스그룹(Lotos Group)은 폴란드의 양대 석유화학과 에너지기업인데 2018년 합병으로 올렌&로토스그룹(Orlen&Lotos Group)으로 거대 에너지기업이 되었다. 헬리콥터와 비행기를 생산하는 항공산업기업인 PZL 스비드니크(PZL Świdnik)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기업이었는데, 2010년 이탈리아의의 세계적인 방위산업업체인 레오나르도(Leonardo)에 인수 되었다. 이와 같이 폴란드의 주요기업은 대부분 중공업 분야의 대기업이다. 이외에 유리와 도자기 제조업체 볼레스와비에츠(Bolesławiec)와 화장품기업 잉글롯(Inglot Cosmetics), 보드게임과 장남과 제조기업 트레플(Trefl) 등은 유럽시장에서 널리 알려진 업체이다.

2010년대 이후 기존의 제조업 위주의 성장전략을 탈피하여, IT 산업을 중심으로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폴란드 정부는 2016년 정부 산하에 스타트업 지원기관을 설립하고, 2018년에는 GDP의 0.033% 수준인 약 2억 1,600만 달러의 벤처캐피탈 기금을 스타트업 기업에게 지원하였다. 이러한 우호적인 환경조성으로 2019년 기준 약 130여 개의 벤처와 스타트업 기업이 영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 지원으로 폴란드는 IT 산업을 중심으로 연구개발 거점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비즈니스 서비스 및 금융산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폴란드는 중동유럽국가 중 인구가 가장 많고 고등교육기관 재학생은 인구가 약 2,000만 명 이상 상회하는 프랑스보다도 많아 고급인력이 풍부하다. 또한 폴란드는 영어, 독일어를 구사하는 인력이 많아 IT 산업을 중심으로 R&D 센터가 급증하고 있어 첨단산업 위주로 산업구조가 변화하고 있다.

정부의 첨단산업 육성정책으로 수도인 바르샤바에는 구글(Google) 캠퍼스 등 세계적인 IT 기업의 연구센터가 위치한다. 특히 제2의 도시 크라쿠프(Krakow)는 유럽의 실리콘밸리를 목표로 IT 산업을 중심으로 스타트업이 활성화되어 여러 세계적인 기업을 배출하였다. 크라쿠프에 본사를 둔 소프트웨어기업인 코머치(Comarch)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IT기업이다. 저전력 블루투스를 기반의 근거리 통신기술인 비콘(Beacon)의 선두기업인 에스티모트(Estimote)와 게임소프트개발기업 게임학(Gamehag) 등 다수의 스타트업 기업이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외에도 폴란드는 소프트웨어기업 네트구르(Netguru)와 반도체기업 알레그로(Allegro) 등 첨단산업에서도 많은 기업들이 있다. 폴란드는 유럽에서도 비디오게임 개발의 허브로 바르샤바를 위시해 여러 도시에 수백여 개의 게임개발 스튜디오가 위치하며, 이중 게임서비스기업 'GOG.com'와 'CD Projekt'은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기업이다.

바르샤바, 포즈난, 브로츠와프 등 주요 도시에는 네덜란드영국의 다국적 에너지 기업 로얄더치쉘(Royal Dutch Shell), 독일의 상용차 제조사 (MAN SE), 스위스 엔지니어링 기업 ABB, 핀란드 제지기업 스토라 엔조(Stora Enso), 프록터앤드갬블 등 세계적인 제조업 기업이 진출해 공장을 운영한다. 한국기업은 1990년대 초부터 폴란드를 중동유럽의 제조업 허브로 삼아 LG, 삼성 등 약 200여 개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진출해 있다. 2000년대 들어 폴란드의 풍부한 기술인력으로 구글, IBM, 제너럴일렉트릭, 모토로라, 시스코, 히타치, 아카마이 테크놀로지(Akamai Technologies) 등 IT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도 진출해 있다.

그러나 폴란드는 1990년대 이후 다국적기업 유치에 주력하여 자국 브랜드가 취약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따라 자국기업의 주요 산업과 수출품은 화장품, 식품 및 가구 등 여전히 경공업과 저부가가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관광업

올드 시티 자모치(Old City of Zamoch)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폴란드는 자유화, 그리고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부터 해외에서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2019년 기준으로 거의 2,100만 명의 관광객들이 폴란드를 찾았다. 이 덕분에 막대한 양의 외화를 폴란드에 가져다주고 있으며, 폴란드 서비스업에서 관광업이 현재에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폴란드의 유명관광지들은 굉장히 많은 편인데, 남쪽에는 험준한 만년설이 덮인 산들이 있기도 하며 북쪽에는 모래 깔린 해변이 있는 등 자연환경도 다양한 편이고, 도시들마다 시대별로 특색있는 건축양식들을 지닌 건축물들이 많아 인문적으로도 볼 것이 많다.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옛 황금기 시절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크라쿠프이다. 크라쿠프에서는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폴란드 국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하기도 할 정도로 유서깊은 도시이기에 그만큼 오래된 고적과 명승지들도 많은 것이다. 그 외에도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인 브로츠와프도 인기 있으며, 특히 난쟁이상과 시장, 마을회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들 중 하나인 브로츠와프 동물원 등 옛 건축물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편이다. 한편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볼만한 옛 건축물이 오히려 없는 편인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지나치게 많이 파괴되어 전후에 완전히 새롭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유명한 폴란드 문화도시에는 이 외에도 그단스크, 루블린, 포즈난 등이 있으며, 다크 투어리즘 관광지로는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등이 있다. 또한 13세기의 거대한 소금 광산과 그 내부의 미로도 유명하다.

폴란드는 뛰어난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스키, 산악 하이킹, 암벽등반, 세일링 등이 인기가 많으며, 주로 발트 해 연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러 오는 관광객들이 많다. 동부 지역에는 마수리안 호수와 비아워비에자 숲이 있으며, 남쪽에는 크르코노셰 산맥과 타트리 산맥 등이 솟아있다. 또한 동남쪽에는 피에니니 산과 비에슈자디 산맥 등이 버티고 있다. 폴란드에는 100여 개에 달하는 고성들이 남아있으며, 대부분이 실레시아 지방에 있다. 이들 중 가장 거대한 성은 폴란드 북중부에 자리한 말보르크 성이다.

에너지

베와토프 발전소.

2019년 폴란드의 에너지 소비는 석탄 45%, 석유 31%, 천연가스 17%, 수력발전신재생에너지 7%로 석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이다. 폴란드는 유럽에서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석탄 생산이 많은 국가로 100% 자급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유와 천연가스는 소량 채굴되지만 수요량에 턱없이 부족해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석탄은 폴란드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으로 세계 총 매장량의 약 3%를 점한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전력생산의 95%를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는데, 유럽연합의 온실가스배출 강화로 점차 소비를 줄이고 있는 추세이다. 2019년 기준 폴란드의 국내소비 원유의 97%는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경제발전에 따른 에너지 소비증가로 2009년 86%에 비해 수입 의존도가 높아졌다. 폴란드는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슬로바키아까지 총 연장 4,000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드루즈바(Druzhba)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받는다. 드루즈바 파이프라인은 '야말-유럽 파이프라인(Yamal-Europe Pipeline)'으로 더욱 널리 불린다.

폴란드는 2004년 유럽연합 가입 이전부터 탈러시아 에너지정책을 추진하여 왔다. 폴란드는 공산주의 시절부터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아 왔고, 2019년 기준 국내소비 천연가스의 80%를 러시아로부터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2006과 2009년 두 번에 걸친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분쟁에 따른 러시아의 일시적인 가스공급 중단사태를 겪었다. 또한 2019년 4~6월에는 야말-유럽 파이프라인 오염문제로 원유공급에 차질을 빚어 2020년 상반기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사태를 겪으며 폴란드는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수입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2011년 폴란드-체코, 2019년 폴란드-슬로바키아 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완공하였다. 2015년에는 폴란드가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는 천연가스 루트인 야말-유럽 파이프라인을 독일과 프랑스까지 연장하고 역방향 루트를 추가하여 최악의 상황에서도 국내수요의 약 50% 정도를 독일로부터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는 LNGLPG 소비를 늘려 천연가스 소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2015년 북부 발트해 도시인 시비노우이시치(Świnoujście)에 연간 소비규모의 약 1/4 정도를 비축할 수 있는 LNG 터미널을 완공하였다.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함께 셰일가스 유전이 많이 있다. 2007년 이후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엑손모빌(Exxon Mobil)과 탈리스만(Talisman Energy) 등에 100여 건이 넘는 셰일가스 채굴 허가를 내주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토양오염을 들어 유럽에서 셰일가스 채굴을 반대하여 폴란드와 갈등을 빚어 왔다. 단적으로 2014년 2월 유럽의회는 폴란드를 겨냥해 셰일가스 채굴 시 적용할 강화된 환경영향평가 법안을 통과시켜 폴란드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폴란드가 개발한 셰일가스 유전은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부분의 채굴사업은 중지되었다.

운송교통

브로츠와프 철도역 펜돌리노

폴란드는 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중동유럽 국가 중에서 철도와 도로망이 가장 잘 구축되어 있으며, 항공노선도 경제 성장에 힘입어 취항노선이 괄목하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발트해에 면하는 지리적 이점으로 오래 전부터 여러 항구들이 건설되었다. 도심의 교통수단은 버스, 트롤리버스 및 트램 등 전통적인 교통수단에 의존하며 수도인 바르샤바에만 유일하게 지하철이 운행된다.

철도는 폴란드의 핵심적인 운송망으로 모든 대도시 간에 노선이 연결되어 있으며, 2017년 기준 총 연장은 18,513km으로 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로 긴 철도망을 보유하고 있다. 폴란드의 주요 도시 간 노선은 폴란드 국영철도(PKP: Polish State Railways)에서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아 운영한다. 이외에 지방철도는 폴리조(Polregio) 등 여러 민영기업에서 관리한다. 한편 전국의 16개의 주(voivodeships) 중 5개 주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철도망을 관리한다. 폴란드 내에서도 서부와 북부는 과거 독일영토로 타 지역보다 철도망이 더욱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철도망이 빈약하다. 한편 국제선 철도노선은 체코, 독일,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영토인 칼라닌그라드(Kaliningrad) 노선이 운행된다.

바르샤바-크라쿠프 간 223km는 중동유럽에서 유일한 고속철이며 대부분의 노선은 시속 160km 미만의 일반 철도이다. 2014년부터 프랑스 고속철 제조사인 알스톰(Alstom)의 차량이 도입되어 일반철도 일부 구간에서 시속 200km의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당초 폴란드는 바르샤바-포즈난과 지선인 우치(Łódź)와 칼리시 연결노선은 시속 350km의 초고속철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예산문제로 취소되었다. 대신 폴란드 정부는 기존 철도노선의 개선사업으로 운행속도를 높이고 역사 현대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5년에 바르샤바-그단스크 노선은 유럽투자은행(EIB: European Investment Bank)으로부터 30억 달러의 차관을 빌려 열차운행 시간을 단축하고 역사 현대화 공사를 완료하였다.

도로 연장은 2011년 기준 412,263km이며 이 중 131,863km는 비포장도로이다. 폴란드 유럽연합으로부터 막대한 구조기금 수혜로 신설 도로망이 증가하였고 기존 도로망도 대부분 새롭게 정비되었다. 폴란드의 도로는 중앙정부, 주(voivodeships), 구역(powiats), 자치시(gminas) 도로 등 4단계로 세분화된 정부에서 관리한다. 각 정부에서 관리하는 도로연장은 중앙정부 18,801km, 주정부 28,476km, 구역 127,743km 그리고 자치시 237,244km로 도시 간 도로 이외에 대부분의 도로는 지방정부에서 관리한다. 폴란드의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는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며 2020년 기준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의 총연장은 4,146km 이다.

전국에 총 15개의 공항이 있으며 이중 바르샤바, 브로츠와프(Wrocław), 그단스크(Gdańsk), 카토비체(Katowice), 크라쿠프(Kraków) 및 포즈난(Poznań) 등 6개 도시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폴란드는 2012년 우크라이나와 유로 2020(Euro 2020)을 개최하면서 기존 국제공항을 보수하고 터미널을 확장하였다. 폴란드의 핵심 공항은 바르샤바의 프레데리크 쇼팽 국제공항(Frederic Chopin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폴란드 국적기인 로트항공사(LOT Polish Airlines)의 허브공항이다. 로토항공사는 1929년 기존 폴란드의 2개 항공사 간 합병으로 만들어진 역사가 오랜 항공사이다.

한편 EU의 서유럽 회원국은 1990년대부터 항공자유화정책(open sky policy)을 추진하여 항공시장은 완전한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폴란드 역시 1990년대부터 항공시장의 탈규제 조치를 단행해 대부분의 지방공항은 지방정부가 관할하고 있다. 또한 2004년 이후부터는 국가 간 항공협정에 따른 항공사 취항시스템을 폐기하였다.

해상운송 역시 폴란드의 주요한 교통 인프라로 주요 항구는 발트해의 그단스크항(Port of Gdańsk), 그드니아항(Port of Gdynia), 슈체친항(Port of Szczecin), 시비노우이시치에항(Port of Świnoujście) 등이다. 그단스크항과 시비노우이시치에항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으로 정기적인 여객선도 운항되며, 이외의 항구는 화물운송을 위한 항구이다.

무역

2018년 기준 폴란드의 경제규모는 세계 21위이며 수출규모는 세계 23위이고, 수입규모는 18위로 경제 규모에 비례한 무역규모를 갖는다. 또한 2019년 기준 GDP 대비 수출규모는 55.8% 그리고 수입은 GDP 대비 50.5%를 점한다. 폴란드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전자제품, 기계, 운송장비, 항공기, 선박 등 중공업 부분과 유제품, 육류, 가구 등 식품과 경공업 제품이다. 주요 수입품목은 원유,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기계, 운송장비, 광물자원, 원유정제와 합성윤할유 등의 화학제품과 의료약품, 가구 등이다. 수입품목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원유와 제조업 공장 운영을 위한 기계설비 및 원재료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2019년 기준 상위 수출국은 독일 27.5%, 체코 6.2%, 영국 6.0%, 프랑스 5.8%, 이탈리아 4.6% 등으로 체코를 제외하면 유럽연합 내 서유럽 국가에 수출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2019년 기준 주요 수입국은 독일 21.4%, 중국 12.3%, 러시아 6.5%, 이탈리아 5.0%, 네덜란드 3.8% 등이다. 수입 역시 독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수입규모도 크다. 러시아가 주된 수입국이 된 이유는 국내소비 천연가스를 대부분 러시아에서 들여오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2004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 갈수록 유럽연합에 대한 무역비중이 늘어 2020년 상반기 기준 전체 수출의 79% 그리고 수입의 64%가 유럽연합 내 회원국과의 거래이다.

대부분의 중동 유럽 국가들이 서유럽 주요 산업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지만 폴란드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독일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이러한 이유는 폴란드가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러시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서유럽에서 원부자재를 수입하여 폴란드에서 가공하여 인접국가에 재수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은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인건비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폴란드 현지 생산이 활발한 대표적인 산업이다. 이러한 수출구조로 폴란드의 주요 수출품은 대부분 서유럽 기업의 현지 생산이며, 순수한 폴란드 기업의 수출품목은 식품과 경공업 제품에 머물러 있다. 또한 서유럽의 제조업 기지라는 특징으로 폴란드는 2000년대 들어 거의 매년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고용노동

폴란드는 1990년대 말까지 체제 전환의 후유증으로 실업률이 10%에 달하였고 2000년에는 20%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2004년 유럽연합 가입과 함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이후 실업률은 8%로 낮아졌고, 2019년에는 3.2%로 유럽연합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폴란드 노동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서유럽으로 고급인력이 유출되는 현상이다. 1990년대부터 영국 등 서유럽으로 약 200만 명의 노동인력이 이동하였다. 그러나 2010년 들어 폴란드 경제의 지속적 성장으로 노동수요가 증가하고 임금 상승이 이루어지면서, 인력유출이 점차 둔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가 폴란드로 꾸준히 유입되어 노동인력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지는 않고 있다. 2017년 폴란드 통계청에 따르면 폴란드 내에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조지아 및 몰도바 등 비유럽연합 출신 노동자가 180만 명에 달한다. 이중 약 25만 명은 노동허가를 받아 장기체류가 가능한 근로자이며, 이외에 인력은 6개월 단기 근로자로, 농업, 건설 및 제조업 등 노동인력이 부족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폴란드는 출산율이 저조한 가운데 인구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장기적으로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전망된다. 2020년 기준 폴란드 출산율은 인구 1,000명당 8,9명으로 프랑스 11.9명 보다 낮아, 2020년 인구 증가율은 전년 대비 -0.19%로 역시 프랑스의 0.39%보다 낮은 수치이다.

인문사회

주민

폴란드 인구는 38,000,000명을 넘지만 넓은 영토로 인구밀도는 1㎢ 당 122명에 불과하며 출산율은 2020년 기준 1.44명으로 낮은 수준이다. 폴란드의 평균연령은 2018년 기준으로 41.1세로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라는 유럽국가의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폴란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수도인 바르샤바로 2019년 기준 1,790,658명이며, 인근의 외곽까지 포함하면 약 3,100,000명이 거주한다. 그러나 남쪽의 크라쿠프, 브로츠와프, 카토비체를 포함한 슐레지엔(Silesian) 지역의 인구는 5,300,000명에 달해 상대적으로 남쪽 지역에 인구가 더욱 많이 거주한다.

폴란드는 공산주의 시절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국가이면서 넓은 영토로 농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2004년 유럽연합 가입 조건중 하나가 농업규모의 축소로 농업지역의 농경지가 대거 휴경지로 전환되면서 많은 농촌인구의 이탈로 도시화가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폴란드 인구의 약 60% 정도만 도시에 거주하여 여타 서유럽에 비해 도시 인구 비중은 낮은 편이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유대인 등 이민족이 많이 거주한 다민족 국가였다. 1931년 인구통계에 따르면 폴란드인 68.9%, 우크라이나인 13.9%, 유대인 10%, 벨라루스 3.1%, 독일인 2.3% 나머지 2.8%는 리투아니아, 체코, 아르메니아인 이었다. 이외에도 20세기 초까지 폴란드에는 소규모의 러시아인과 집시들이 거주하는 공동체가 존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폴란드는 전 세계 유대인의 약 20%가 거주하여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가였으며 유럽에서는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1939년 조사에 따르면 폴란드의 유대인 인구는 3,500,000명으로 폴란드 전체 인구의 약 10%를 점하였는데 당시 미국은 유대인이 전체 인구 중 2% 미만이었다. 이와 같이 폴란드에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면서 제 2차 대전시 나치는 폴란드에서 유독 심하게 유대인을 탄압하였다. 이 결과 폴란드 유대인은 대부분 수용소로 보내져 처형되어 약 10%의 유대인만이 생존하여 미국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역사로 미국 내 유대인의 약 80%가 폴란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시 건국의 주체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2011년 기준 96.88%가 폴란드인이며 독일인 0.2%, 우크라이나인 0.1%, 기타 혹은 미확인 부류가 1.7%를 점한다.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 소수민족은 유대인, 타타르인, 아르메니안, 그리스인, 베트남인, 집시 등이다. 이와 같이 폴란드는 인구의 97%가 폴란드계로 다민족 국가에서 1세기만에 유럽에서 단일민족 구성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로 변화하였다.

폴란드인은 지역적으로 카슈비안(Kashubians), 슐레지엔(Silesians) 고라스(Gorals) 등 소수민족집단이 존재한다. 카슈비안인은 북부와 중부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집단으로 약 500,000명으로 추측되며 슐레지엔인은 남부지역에 약 850,000여 명 정도가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이외에 고라스인은 폴란드 남부 슬로바키아와 인접한 타트라산맥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독일의 침략으로 강제로 추방되어 거의 소멸한 민족집단이다. 카슈비안인과 슐레지엔인은 고유한 언어가 있으며 일부는 자신들이 민족적으로 폴란드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

서슬라브어파에 속하는 폴란드어를 쓰며, 동슬라브어파에 속하는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와는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격변화가 복잡한 것도 유명하다. 발음과 독음이 난해하기로 유명해서 외국인이 스펠링만 보고 발음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기본 영어를 아는 사람이 발음 그대로 읽으면 되는 스페인어나 기초지식이 약간 있으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독음이 가능한 독일어와는 다르다.

지역적으로는 서슬라브어파 소수언어인 실레시아어(실롱스크어), 카슈브어, 게르만어파 소수언어인 비미소리시어를 쓰는 사람이 있다. 동부에는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루신어를 쓰는 사용자도 존재한다.

주요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순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러시아어는 공산주의 시절 이래 가장 널리 교육해서 지금도 중장년층 이상은 상당수가 러시아어를 안다. 하지만 러시아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러시아어를 쓰면 싫어한다 카더라. 반러감정이 꽤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인접 강대국의 언어인지라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폴란드 내에 러시아계 폴란드인들이 있다보니 러시아어 사용이 생각보다 존재하는 편이다. 또한, 냉전 이후에 잠시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이 줄어들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배우는 사람이 늘어났다.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 및 벨라루스 서부와의 접경지대는 러시아어가 모어인 이들도 거주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 국민의 상당수는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젊은 사람들은 발음도 괜찮다. 그리고 독일어 역시 잘 통하는 편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프랑스어도 배우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코포니의 참관국으로도 가입하였다.

교육

야기엘론스키대학교(Jagiellonian University)

폴란드는 유럽에서도 학문과 교육에 각별히 역점을 둔 국가로 이미 12세기부터 크라쿠프에 도서관이 지어져 도서의 색인작업이 이루어져 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유럽의 문학작품을 접하였다. 1364년에는 카지미에시 3세(Casimir III the Great)가 중동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야기엘론스키대학교(Jagiellonian University)를 세워 이후 17세기까지 폴란드의 학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고등교육 수요가 폭증하여 기존의 유서 깊은 대학들이 규모가 확장되고, 새롭게 대학들이 설립되어 2029년 기준 전국에 500여개가 넘는 대학이 산재한다.

의무교육은 6세 유아의 유아원 과정 1년, 7세부터 시작하는 초등과정(Primary school) 6년, 초급중등과정(secondary education) 3년, 그리고 상급중등과정(Upper secondary education) 3년으로 구성되었다. 2016년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PiS)은 학교교육법을 개정하여 초급중등과정 3년을 폐지하기로 의결하였다. 이에 따라 폴란드 의무교육은 7세부터 시작하는 초등과정이 8년으로 연장되고, 상급중등과정 역시 4년으로 연장되어 2017년부터 점진적으로 시행되었으며, 2019년 9월부터 초급중등과정은 폐지되었다.

또한 학교교육법 개정으로 폴란드의 초중등 과정에서 2개의 외국어 교육이 의무화되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영어와 독일어를 전공하고 이외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이탈리아 등도 일부 학생이 배운다. 중등과정에서는 외국어 시험점수가 상급학교 진학 시 중요한 고려사항이므로 학생들은 외국어 교육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 이외에 폴란드에는 독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및 카슈비안(Kashubians) 등 소수민족을 위한 언어교육학교도 운영된다.

8년의 초등과정 중 초기 3년은 교사 1인이 전과목을 가르치며, 이후 5년은 학과별로 교사가 배정된다. 초등과정 8년을 마치면 모든 학교가 졸업시험을 치른다. 폴란드 초등과정의 특징은 학생 개인의 창의력과 사고보다는 객관적이며 사실적인 지식교육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2019년 9월 이전까지 유지되었던 초급중등과정은 김나지움(gimnazjum)으로 불리며 역사, 언어, 시민교육, 외국어, 수학, 물리학 및 예술 등 모든 학문을 가르치며 외국어 교육이 의무였다.

4년의 중등과정은 고등교육기관 진학을 위한 4년 과정의 고등학교(liceum)와 노동시장과 연계된 5년 과정의 기술학교(technikum)로 나뉜다. 이외에도 2년 과정의 요리, 미용, 자동차 정비 등 실무 위주의 직업교육학교가 별도로 운영된다. 고등학교와 기술학교는 모두 졸업시험(matura)을 통과해야 학업 이수가 인정되며 졸업시험 점수를 통해 대학 진학이 결정된다.

폴란드의 대학은 3년 과정의 학사와 2년 과정의 석사 그리고 3년 과정의 박사로 구성된다. 석사 과정으로 운영되는 의학과 약학 등 일부 전공은 4~6년으로 수학기간이 더욱 길다. 학사와 석사는 이수학점과 학점부여 방식 등 구체적 운영은 유럽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실행하는 볼로냐 프로세스(Bologna Process)에 준한다. 이외에 초등과정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이 3년 과정으로 별도로 운영된다.

폴란드의 고등교육은 과학고등교육부(Ministry of Science and Higher Education)에서 초중등 교육과 별도로 분리하여 담당한다. 약 500여 개에 달하는 폴란드의 대학은 인문, 공학, 의학, 경제학, 농업, 군사 및 예술 등 모든 학문을 다루며, 특정 학문에 특화된 대학들도 많이 있다. 고등교육기관의 규모와 국제적 평가를 종합하면 폴란드의 대학은 중동 유럽에서 가장 학문 수준이 높다. 단적으로 2018년 OECD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폴란드의 고등교육 시스템은 OECD 평균 수준을 상회하며, 학생들의 학업 성취는 OECD에서 최상위로 평가한 바 있다.

바르샤바대학교(University of Warsaw) 브로츠와프대학교(University of Wrocław), 그단스크공과대학교(University of Technology in Gdańsk) 등은 세계적으로 학문수준을 인정받는 폴란드의 대표적인 대학교이다. 1816년에 설립된 바르샤바대학교는 2020년 기준 24개의 단과대학교와 30여개의 연구소가 운영되며 7,500명의 교직원과 40,500명의 학생을 보유한 대규모 대학교이다. 유럽연합의 과학기술정책 프로그램을 비롯해 유럽 내 연구소와 대학 간 약 1,400여 개에 달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싱크탱크와 R&D 센터의 기능도 수행하는 폴란드의 핵심 대학교이다.

이외에 1702년에 세워진 브로츠와프대학교는 2020년 기준 22,600여 명의 학생과 3,300명의 교직원이 있으며, 44개의 학과 중 법학, 사회학, 생명공학 등에서 유럽에서 상위에 위치하는 대학교이다. 그단스크공과대학교는 여러 세계적인 대학평가기관에서 선정한 세계 1,000개 대학 내에 위치하는 명문 공과대학교로, 공학 이외에 경제, 금융, 경영학 등 실용학문 분야도 개설되어 있다. 그단스크공과대학교는 2020년 기준 9개 단과대학교에 15,000여 명의 학생과 1,300여명의 교직원이 재직한다.

사회보장

폴란드는 헌법에 의해 모든 국민은 질병, 은퇴 등의 비자발적 사유로 노동이 불가능 할 경우 성별, 교육수준, 고용 유무 등과 관계없이 사회적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폴란드는 18세기 후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시대부터 사회복지를 위한 법률을 제정할 정도로 사회안전 시스템이 오랜 연원을 갖는 국가이다. 이러한 전통으로 공산주의 붕괴 직전인 1980년대 말 사회보장비용 지출은 국내총생산 대비 22% 수준에 달하였다. 이후 체제 전환 과정에서 재원 부족으로 사회안전망이 위축되었으나 200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사회보장비 지출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2018년 기준 폴란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보장비용 지출 규모는 19.2%로 체코 17.9%, 헝가리 17.1%와 비교하여 다소 앞서지만, 유럽연합 27개국 평균 26.7%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폴란드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사회보험, 고령자 연금, 질병과 실직 등의 사유로 경제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개인과 가구에 대한 사회적 지원 등 사회안전을 위한 공적 서비스 성격을 갖는다. 폴란드의 사회보장은 복지시스템 총괄 실무기구인 사회보장기구(Social Insurance Institution)에서 담당한다. 사회보장기구는 이미 1930년대 만들어졌던 기구로 체제 전환 직후인 1993년 사회보험법 개정을 통해 5개로 분할되었던 사회보장 기관을 통합하면서 재출범한 기구이다. 사회보장기구는 노령연금보험과 장애와 유족연금보험 등 사회보험과 재활, 질병, 편모가정 수당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재정 지원을 담당한다.

이 외에도 폴란드는 가족노동사회정책부(Ministry of Family, Labour and Social Policy)에서도 실업과 직업교육 등의 지원정책을 실시한다. 지방정부 역시 지역사회정책센터(Community Social Policy Centre)와 지역노동사무소(Local and Regional Labour Office)에서 저소득 가정과 실직에 따른 경제적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폴란드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가톨릭교회가 여러 공적 서비스 활동에도 적극적인 국가로 교회와 NGO 등을 통해서도 부족한 사회적 서비스를 지원한다. 폴란드의 사회보장 재정은 정부재정과 연금대상자들이 납부하는 재원으로 조성된 사회보장기금(Social Insurance Fund), 농업사회보장기금(Agricultural Social Insurance Fund)과 국가의료기금(National Health Fund) 등 여러 사회기금을 통해 운영되며 기금 운영은 사회보장기구에서 담당한다.

폴란드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노령연금보험(old-age pension insurance), 장애와 유족연금보험(disability and survivors’ pension insurance), 질병보험(sickness insurance), 산재보험(work accident insurance) 등 4개의 공적연금을 기본으로 한다. 4대 공적연금은 농업부문 종사자를 포함하여 모든 근로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며 각각의 보험은 법률에 의해 가입 예외자가 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이 4개의 공적연금은 사회보장의 근간으로 2018년 기준 전 국민의 40%를 상회하는 1,580만 명이 가입되어 있고, 760만 명이 연금수혜 해택을 받고 있다.

미디어

폴란드는 1937년부터 TV 방송을 개시하였고 1952년 이후 공산당이 감독하는 공영 TV 방송이 운영되었으며, 1971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었다. 폴란드는 2001년부터 바르샤바를 시작으로 디지털 TV 방송을 송출하고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2013년에는 기존 아날로그 방송을 완전히 종료하였다.

미디어는 공영방송인 TVP과 여러 개의 상업방송 그리고 스포츠, 뉴스 전문채널 등으로 나뉜다. 공영방송인 TVP는 폴란드 전역을 대상으로 한 TVP 1과 TVP 2 등 2개의 채널과 16개의 주(voivodeships)에서 각기 운영하는 TVP 3 채널로 구성되며 수신료와 정부 지원으로 운영된다. TVP는 해외의 폴란드인을 대상으로한 폴란드 방송인 TVP Polonia와 TVP Sport 등 특화된 여러 개의 채널을 별도로 운영한다.

폴란드는 전 세계 미디어 그룹의 각축장으로 미국영국의 주요 미디어사가 폴란드에서 서비스를 한다. 폴란드의 최대 규모의 미디어그룹인 폴세트그룹(Polsat Group)은 Polsat News 등 약 60여 개의 채널을 운영한다. 이외에 미국의 미디어그룹 디스커버리(TVN Discovery)와 프랑스 방송을 방영하는 카날-폴스카(Canal+ Polska), 영화전문채널 키노 폴스카 TV(Kino Polska TV) 등 다양한 국내외 미디어 그룹이 방송 서비스를 한다.

폴란드는 여러 중동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와 유사하게 1989년 이전까지 언론은 중앙정부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으나, 체제 전환 이후 독립적인 언론사가 대거 설립되었다. 폴란드 내에서 발행부수와 영향력을 기준으로 4대 주요 일간지는 팍트(Fakt), 수퍼엑스프레스(Super Express), 가제타 브보르차(GW: Gazeta Wyborcza) 그리고 제츠포스폴리타(Rzeczpospolita)이다. 가장 발행 부수가 많은 팍트는 철저한 대중지로 수퍼엑스프레스와 가제타 브로르차 보다 발행부수가 약 2배에 달한다. 그러나 폴란드를 대표하는 정론지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최초로 발간된 신문인 가제타 브로르차이다.

1989년 5월 폴란드 언론기업인 아고라(Agora)가 바르샤바에서 창간한 가제타 브보르차(GW: Gazeta Wyborcza)는 '연대 없이 자유도 없다(There's no freedom without Solidarity)'를 내걸고 창간한 유력지이다. 본 신문은 현재까지도 사회민주주의 기치를 내걸고 정치, 국제관계 및 일반적인 사회기사를 게재하는 종합 일간지이다. 한편 1920년에 창간되었다가 공산주의 시절 폐간되었다 재창간 한 제츠포스폴리타(RZ: Rzeczpospolita)는 '공화국(the Republic)'을 의미하며, 신문의 명칭은 전통적인 폴란드의 국명인 '폴란드 공화국(Rzeczpospolita Polska0)'을 줄인 것이다. 제츠포스폴리타는 온건보수성향의 신문사로 영국의 더 타임즈(The Times)와 비교된다.

이민과 디아스포라

폴란드는 아일랜드, 리투아니아, 아르메니아 등과 함께 전쟁과 빈곤 등으로 타국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한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국가이다. 폴란드는 전쟁으로 국경선 변경, 자발적 혹은 타의해 의한 추방 그리고 경제적 이유의 이민을 포함해 전 세계에 약 2천만 명의 폴란드인이 흩어져 있다. 해외의 폴란드인과 그 후손들은 서유럽 여러 국가와 미국, 호주, 브라질 등에 주로 분포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도 소규모의 폴란드인 공동체가 존재한다.

폴란드인의 해외이주 역사는 17세기부터 시작되어 미국을 건국한 유럽인 중에는 폴란드인이 상당수 있었다. 18세기 들어서 폴란드가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되면서 많은 폴란드인이 해외로 떠났다. 20세기 이후에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폴란드인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에는 나치의 침공으로 폴란드에서만 3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생존자들은 대부분 미국과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도 일자리를 찾아 약 200만 명의 폴란드인이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중에는 단기 노동자도 있지만 영구 정착한 폴란드인도 적지 않다.

폴란드인과 후손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국가는 미국으로 폴란드계가 약 1,000만 명에 이른다. 19∼20세기에 전쟁과 경제적 빈곤을 비해 많은 폴란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시카고는 바르샤바 다음으로 폴란드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시카고에 정착한 폴란드인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미국폴란드협회(Polish American Association)를 결성하여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이외에도 피츠버그(Pittsburgh), 클리블랜드(Cleveland), 디트로이트(Detroit) 등 미국의 동북부 지역에도 많은 폴란드인이 정착하였다.

독일에도 폴란드인이 약 200만 명 이상 거주하는데, 18세기 폴란드 영토가 프러시아로 병합되면서 많은 폴란드인이 타의에 의해 독일영토 내 외국인이 되었고, 19세기에도 노동이민이 이어졌다. 이후 1990년대부터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층이 일자리를 찾아 독일로 대거 이주하였다. 이외에도 영국과 프랑스에도 각각 100만 명 규모의 폴란드인이 거주하는데 상당수가 1990년대 이후의 노동이민이다. 한편 유럽에서 가장 큰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폴란드 유대인들 역시 2차 대전을 겪으며 전 세계로 이주하였다. 폴란드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의 주역이 되었고, 미국에서는 정치, 경제 및 학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초대 총리를 지낸 다비드 벤구리 (David Ben-Gurion)와 3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대표적인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1990년대 이후 약 200만 명 이상의 노동인력이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는데 역으로, 이에 비례한 규모로 외국인이 이주하여 디아스포라와 이민 유입이 공존하는 독특한 국가가 되었다. 폴란드는 17세기 이후 러시아와 독일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외국인에게 관대한 국가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폴란드는 2018년 유럽연합이 늘어나는 난민으로 회원국에게 난민 할당을 결정하자, 국가 주권의 도전으로 간주하여 노골적으로 저항하였다.

폴란드는 1990년대 초부터 난민이 소수 유입되었지만 정치적 논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4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난민유입이 증가하는 가운데 2015년 강경한 보수노선을 내건 법과 정의당(Law and Justice Party)이 집권하면서 난민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폴란드 정부는 외국인 유입은 노동시장의 수요를 고려한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EU의 난민할당 시스템을 거부하고 있다. 폴란드 국민 역시 특별히 이슬람 난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어 사실상 노동인력 유입 이외의 이민과 난민은 수용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폴란드 정부의 강경한 입장은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아 반이민을 표방한 정당이 지지를 얻고 의회 다수 세력을 점하여, 정치권은 더욱 우경화되어 가고 있다.

2004년 폴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가파른 경제성장으로 우크라이나 등 인근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노동이민이 급증하고 있는데 폴란드의 공식적인 인구통계에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 2017년 유럽 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폴란드 내에서 노동허가를 받아 장기 거주하는 외국인은 약 68만 명이다. 또한 2017년 폴란드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폴란드 내 외국인 노동자는 1,700,0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는 노동허가를 요하지 않은 6개월 미만 단기노동자를 포함한 수치이며, 이외에 불법 노동자를 포함하면 200만 명에 육박 할 것으로 추정된다.

폴란드에 일자리를 찾아 온 이민자들의 국적은 우크라이나가 압도적으로 많아 2019년 기준 125만 명에 달하며 이외에 벨라루스, 러시아, 베트남, 중국, 인도 등 비 유럽연합 국가출신이 대부분이다.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인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으로 급증하였다. 2015~2017년 기간 폴란드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우크라이나인은 40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극소수이고, 대부분 경제적 이유의 노동이민이다. 200만 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은 대부분 기술이 없는 단순 노동자로 낮은 임금을 무기로 폴란드 저임금 직종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폴란드 내 저임금 노동자들은 보다 임금이 많은 서유럽으로 이동하거나 실직 위기에 있어 노동시장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화

폴란드의 상징인 백색 독수리

폴란드 고유의 문화가 태동한 것은 약 1,000년 전으로 교역 및 전쟁 등을 통한 끊임없는 교류로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체코헝가리, 서유럽의 프랑스, 독일오스트리아, 남부 유럽의 이탈리아오스만튀르크 그리고 동부 유럽의 러시아, 벨라루스우크라이나의 문화가 융합되어 폴란드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특히 폴란드는 국경을 접한 리투아니아와 13 ~ 19세기 동안 연맹과 연합 형태를 유지하여 종교와 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하다. 또한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한 국가로 유대인의 전통과 문화도 폴란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3~17세기 경제적으로 융성하던 시기에 특별히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랑스 및 독일 등에서 온 예술가들을 우대하고, 그들이 전래한 문화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유럽의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용광로가 되었고, 15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문명화된 국가로 문화와 학문이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은 전통문화유산이 파괴되었고, 40년 이상 공산주의 통치를 겪으며 공업화와 도시화로 농촌지역의 오래된 전통들이 소멸의 위기를 겪었다. 지역의 전통의상, 방언, 민화와 공예품 그리고 종교음악 축제 등 오랜 시간 이어져온 문화유산이 공산주의 시절 도시를 중심으로 한 획일적이며 집단적 문화와 통제된 언론으로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공산주의 시절 체제 도전에 위험이 없는 전통음악과 춤은 장려되어 폴란드 전통음악 그룹 마좁세(Mazowsze)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칼아리아 제브르지도우카(Kalwaria Zebrzydowska)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 폴란드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가톨릭교회가 매년 종교행사를 거행하면서 해당 지역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를 보존하였다. 이외 체스토호바(Częstochowa), 란쯔코로나(Lanckorona), 피에카리실롱스키에(Piekary Śląskie) 등 소도시에서 이러한 종교활동으로 지역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2차 대전 이전의 문화와 전통 복원이 이루어졌다. 폴란드의 전통문화는 대부분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년, 부활절과 부활절 월요일, 노동절, 독립기념일 등 정부가 정한 13일에 달하는 공휴일이 있지만, 기독교에서 유래한 기념일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법정 공휴일은 아니지만 연중 가장 의미 있는 날로 각 가정에서는 트리 장식을 하고 음식을 차려 가족 및 지인들과 만찬을 즐긴다. 또한 폴란드인들에게 사순절 전의 마지막 목요일은 이른바 '기름진 목요일(Fat Thursday)'로 불리며 크리스마스 이브 만큼 중요한 날이다. 부활절 역시 여타 기독교 전통을 가진 국가와 유사하게 큰 의미를 갖고 다양한 종교행사가 개최된다.

문학

아담 미츠키에비치(좌)와 조셉 콘래드(우)

폴란드 문학의 태동은 12세기부터이며 18세기까지 많은 문학작품들이 라틴어로 쓰였다. 전통적으로 폴란드 문학은 소설보다는 시와 극작 부분이 활발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고, 정치적, 사회적 풍자가 가득한 작품들이 많다. 폴란드어로 된 가장 오래된 원고는 13세기 후반에 홀리크로스수도원(Holy Cross Monastery)에서 쓰인 성십자가 설교(Holy Cross Sermons)이다. 1443년부터 시작해 1455년에 완성된 소피아여왕의 성경(Bible of Queen Sophia)은 라틴어를 폴란드어로 번역한 최초의 구약성서로 폴란드어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470년경에는 인쇄소가 들어서 1474년에 인쇄된 천문학 달력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15세기까지 성경과 역사서 등은 라틴어로 쓰였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 얀 코하노프스키(Jan Kochanowski)는 모든 작품을 폴란드어 써 본격적으로 폴란드 문학의 시대를 열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기교적인 문체를 즐겨 쓴 시인 얀 안제이 모르슈틴(Jan Andrzej Morsztyn) 그리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사마티안(sarmatian)의 문화를 담은 소설가 얀 흐리조스톰 파섹(Jan Chryzostom Pasek)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176년에는 대주교 이그나치 크라시키(Ignacy Krasicki)가 최초의 폴란드어 소설 《니콜라스 위즈덤의 모험(Adventures of Mr. Nicholas Wisdom)》을 발표하였다. 이후 18세기 들어 3명의 위대한 낭만파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 지그문트 크라신스키(Zygmunt Krasiński) 그리고 율리우시 스워바츠키(Juliusz Słowacki)가 활동하며 폴란드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

19세기는 폴란드가 분할되어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기로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1834년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장편 서사시 〈판 타데우시(Pan Tadeusz)〉를 발표하여 이후 모든 폴란드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우는 국민시가 되었다. 폴란드 출신이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영국에서 활동한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영어로 소설을 발표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조셉 콘래드가 1902년에 발표한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은 20세기 영국소설의 대표작으로, 1979년 프랜시스 코플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의 원작이 되었다.

20세기 들어 폴란드에서는 뛰어난 작가들이 배출되어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Władysław Reymont),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Isaac Bashevis Singer), 체스와프 미워시 (Czesław Miłosz),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ława Szymborska) 등 여러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폴란드는 특히 판타지와 SF소설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아 스타니스와프 렘(Stanisław Lem)과 안제이 삽코프스키(Andrzej Sapkowski) 등 여러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안제이 삽코프스키의 작품 《더 위쳐(The Witcher)》는 비디오 게임으로도 제작되어 더욱 널리 알려졌다.

미술

폴란드의 미술은 유럽의 여러 미술사조를 도입하되 폴란드만의 주제와 특징을 내세운 화풍이 발전하였고, 19세기 이후부터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화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9세기 화가 얀 마테이코는 폴란드의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작품으로 국민화가로 추앙받는다. 얀 마테이코는 그룬발트전투(Battle of Grunwald) 등 역사적인 전투와 영웅을 다룬 작품을 많이 그렸고, 그가 1918년 크라쿠프에 설립한 얀 마테이코 미술학교(Jan Matejko Academy of Fine Arts)에서는 많은 미술가들을 배출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술계는 폴란드 상징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체크 말체프스키와 요제프 메호페르(Józef Mehoffer) 등 여러 미술가들이 '젊은 폴란드(Young Poland) 운동'을 통해 현대미술을 개척하였다. 20세기 들어 폴란드 미술은 입체파로 대표되는 타데우시 마코우스키(Tadeusz Makowski), 전위적인 미술가 헨릭 스타제스키(Henryk Stażewski)와 타데우스 마코프스키(Tadeusz Makowski) 등 여러 미술가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음악

프레데리크 쇼팽

폴란드 남부 스타리송치(Stary Sącz)에서 발견된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과 관련된 13세기의 작곡 원고는 폴란드 음악의 원류로 여겨진다. 또한 10세기부터 작곡가 미상으로 전해져 내려온 '신의 어머니(Mother of God)'라는 의미를 가진 찬송가 〈보구로지짜(Bogurodzica)〉와 크리스마스 캐롤송인 〈신의 탄생(God Is Born)〉은 폴란드 음악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15세기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 연주자 니콜와리라 돔스키(Mikołaj Radomski)는 이탈리아 뮤지컬과 폴란드의 전통민요를 융합한 음악으로 폴란드 음악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교회 예배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협주곡이 많이 작곡되었으며, 18세기 들어서는 폴란드 고전음악을 대표하는 폴로네즈(polonaise)로 불리는 기악곡 형태의 음악이 완성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작곡가 보이치에크 보구스와프스키(Wojciech Bogusławski)가 폴란드 최초의 오페라 《크라쿠프의 고지대 사람들(Krakowiacy i Górale)》을 발표하였다.

19세기 위대한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의 존재로 폴란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과 함께 고전음악을 대표하는 국가가 되었다. 1810년 바르샤바 인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프레데리크 쇼팽은 폴란드를 대표하는 음악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피아노 작곡가이며 연주자로 추앙받는다. 쇼팽은 생전에 아름답고 독창적인 선율이 담긴 200여 개의 피아노곡을 작곡하였고, 예술적인 즉흥연주로도 명성을 얻었다. 카롤 시마노프스키(Karol Szymanowski) 등 많은 폴란드 음악가들이 쇼팽의 영향을 받았고, 폴란드의 관문인 바르샤바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붙여 명명하였다.

폴란드 음악은 클래식뿐 아니라 전통민요도 오랜 역사를 갖고, 남부의 휴양지 자코파네(Zakopane)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시절에도 맥이 끊기지 않고 전승되어 현대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20세기 들어 재즈, 락과 팝 음악이 대중적으로 널리 인기를 얻고, 특히 재즈가 많은 사랑을 받으며,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는 메탈음악도 탄탄한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다. 폴란드는 연중 많은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오프너 페스티벌(Open'er Festival), 오플레 페스티벌(National Festival of Polish Song in Opole), 소폿 페스티벌(Sopot Festival) 등은 유럽에서도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다.

건축

고딕 양식의 성모마리아 승천 대성당

폴란드는 13세기 이후 경제적 번영을 누리면서 이탈리아로부터 많은 건축가를 초빙해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왕궁과 교회를 많이 건축하였다. 이후 18세기부터는 전쟁과 외세의 지배로 많은 건축물이 파괴되었지만 상당수의 교회, 성과 왕궁 등은 보존되었다. 특히 크라쿠프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이 점령한 중동 유럽지역의 행정부(General Government)가 들어서 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바르샤바의 경우 2차 대전 시 철저하게 파괴되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구시가지 내 바르샤바 왕궁(Royal Castle of Warsaw)을 포함해 대부분의 건축물이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그단스크의 중세풍 구시가지 역시 바르샤바와 같이 전쟁 후 복원되었다.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등 폴란드 주요 도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및 신고전주의 등 유럽의 모든 건축양식을 한데 모아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단스크(Gdansk)는 13세기 이후 북유럽 도시 간 연맹인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일원으바로 번영했던 곳으로, 고딕풍의 도시로 유명하며 시내의 성 메리교회(St. Mary's Church)는 고딕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폴란드는 특히 화려한 장식과 아케이드 형태의 회랑으로 연결되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많다. 크라쿠프의 성 안드리아교회(St. Andrew's Church), 바르샤바의 빌라누프 궁전(Wilanów Palace), 포즈난의 시청(City Hall in Poznań) 등은 폴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크라쿠프의 세인트메리 대성당

한편 크라쿠프는 바벨대성당(Wawel Cathedral), 왕궁(Royal Castle), 성모승천교회(St. Mary's Basilica)와 라투슈초바탑(Wieża Ratuszowa) 등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많은 건축물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북동부의 도시 비아위스토크(Białystok)의 브라니키궁전(Branicki Palace)은 17세기의 전형적인 폴란드 바로크 양식을 보여주며, 바르샤바 아일궁전(Palace on the Isle)과 바르샤바 대극장(Great Theater)은 18세기 말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한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20세기에 건축된 바르샤바의 문화과학궁전(Palace of Culture and Science)은 스탈린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유명하다.

영화

폴란드의 영화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20세기 들어 로만 폴란스키, 안제이 바이다, 새뮤얼 골드윈 등 폴란드 출신의 영화감독들이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초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기의 전성기를 연 여배우 폴라 네그리 역시 폴란드 출신이다.

1945년 폴란드 공산당은 국영 영화사인 필름 폴스키(Film Polski)를 설립하고 1960년 《튜튼기사단(Knights of the Teutonic Order)》을 제작해 소련과 프랑스 등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1970년대 공산주의 시절에 영화감독 예르지 호프만(Jerzy Hoffman)과 안제이 바이다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안제이 바이다가 감독한 《약속의 땅(Promised Land)》은 냉전시기 공산주의 국가의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97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2000년대 들어 폴란드 출신 영화감독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2013년 폴란드 영화감독 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Paweł Pawlikowski)의 영화 《이다(Ida)》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비롯해 유럽의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하였다. 폴란드 출신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는 2003년 아카데미 감독상, 남우주연, 각본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폴란드는 또한 20세기 영화산업의 기술적 혁신과 비즈니스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894년 폴란드 발명가 카지미에즈 프루진스키(Kazimierz Prószyński)는 세계 최초로 카메라를 만들었고 영화 영사기도 제작하였다. 1897년에는 폴란드 발명가 얀 스세파닉크(Jan Szczepanik)가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영상과 이미지를 송출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하여 TV 시대의 문을 열었다. 또한 20세기 영화산업을 일으킨 대표적인 영화사인 할리우드의 워너브라더스(Warner Bros)는 1923년에 폴란드 이민자 출신인 할리 워너(Harry Warner), 알버트 워너(Albert Warner), 샘 워너(Sam Warner) 잭 워너(Jack Warner) 등 4명의 형제가 설립하였다. 이들 형제는 각각 영화제작, 배포, 극장운영, 기술감독 등을 맡아 무성영화시대의 전성기를 열었고, 1927년에는 영화에 음성을 입히는 기술적 혁신을 이루었다.

음식

폴란드 음식
폴란드에서 유래한 음식인 베이글

폴란드 전통요리는 프랑스, 이탈리아 및 튀르키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폴란드는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로 유대인의 음식문화도 폴란드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폴란드가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되면서 헝가리, 독일과 체코의 요리도 폴란드 음식문화에 영항을 미쳐 전통요리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해졌다. 이와 같이 폴란드는 다양한 나라의 음식문화가 융합되어 폴란드만의 독특한 요리 스타일이 만들어져 ‘폴란드식(Polonaise)’ 혹은 '폴란드 스타일의 소스장식(Polish-styled garnish)'이라고도 한다.

중세 이후 폴란드 음식은 대부분 밀과 고기를 기반으로 허브, 꿀, 향신료를 가미하는 요리가 발달하였다. 폴란드 음식은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기본 음식으로 지역에 따라 소고기도 많이 즐기며, 전반적으로 양이 푸짐하며 대부분의 음식에 시큼한 소스, 버터와 크림이 첨가된다. 또한 여러 음식에 지방과 밀가루를 섞어 걸쭉하게 섞은 루(roux)와 달걀도 많이 들어간다. 이외에 고기 위주의 메인 요리에 야채와 버섯이 곁들어지고, 귀리 역시 즐겨 먹으며 각종 수프와 감자튀김도 즐긴다.

쿠르스키(kluski)로 불리는 스파게티와 유사한 형태의 국수와 우유에 곡물을 넣어 끓인 폴란드식 시리얼인 카샤(Kasha)도 대중적인 음식이다. 폴란드는 많은 종류의 빵이 있는데, 폴란드 전통빵 베이글(bagel)은 세계적으로 대중화되었다. 폴란드인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위길리아(Wigilia)로 불리는 저녁 만찬을 즐기며 부활절 아침식사도 전통적으로 중요하다.

폴란드는 13세기부터 전해져 내려온 벌꿀술을 많이 마시며, 맥주와 보드카 역시 대중적인 술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같이 와인을 즐겨 마시지는 않는다. 보드카는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대중적인 술이지만 여러 역사적인 문헌에는 보드카가 폴란드에서 유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유럽에서 전래된 커피가 널리 퍼져 현대에도 즐겨 마시며, 미네랄워터와 각종 과일주스, 버터밀크도 널리 즐긴다.

스포츠

폴란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은 배구축구이며, 여러 차례 국제전에도 출전한 경험이 있다. 그 외에도 육상경기, 농구, 핸드볼, 복싱, MMA, 모터사이클, 스키점프, 스키, 아이스하키, 테니스, 펜싱, 수영, 역도 등이 인기가 많다.

폴란드 축구의 황금기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까지로, 이때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1974년과 1982년 FIFA 월드컵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면서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쓰곤 하였다. 1972년 하계 올림픽에는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976년 올림픽과 1992년 올림픽에도 각각 은메달을 목에 걸기도 하였다. 2012년에는 UEFA 유럽 축구 챔피언십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19년 기준으로 폴란드 남자 배구 국가대표팀은 세계 랭킹 3위로 굉장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차지하였으며, 1974년, 2014년, 2018년 FIVB 챔피언십에서도 금메달을 따낸 바 있다. 또한 폴란드 출신인 마리우스 푸지아노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사들 중 하나로, 2008년에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는 타이틀을 5번 이어 따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명성을 누리기도 하였다. 폴란드는 토마시 골롭, 즈말즐리크 등 쟁쟁한 세계구급 선수들 덕에 모터사이클 레이싱에서도 선두 국가로 이름을 날린 바 있다. 폴란드 모터사이클 국가대표팀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팀들 중 하나이다. 폴란드는 산악 분야에서도 나름 이름이 있는데, 폴란드 출신의 산악인들이 히말라야 등과 그 최고봉들을 연이어 등정하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또한 폴란드의 산지는 워낙 그 산세가 험준하고 아름다워 산악인들만의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하이킹, 절벽오르기, 스키, 산악자전거 등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여름의 경우에는 수영, 카누, 카약, 항해, 윈드서핑, 낚시 등 물놀이가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많이 일어난다.

폴란드 지도

폴란드 주변 지도

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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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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