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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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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키우 위치
하르키우

하르키우(우크라이나어: Харків, 러시아어: Харьков, 영어: Kharkiv, 문화어: 하리꼬브)는 우크라이나 북동부의 도시이고 하르키우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143만 명으로 키이우에 이어 우크라이나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이다. 우크라이나의 공업의 중심지로 구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의 뒤를 잇는 제3의 공업도시였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4일 만에 러시아군이 시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간헐적인 폭격을 받고있다.[1]

개요[편집]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북동부에서 러시아 국경과 20km 떨어져 있다. 하르키우의 대략적인 크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24.3km, 서쪽에서 동쪽으로 25.2km이다. 하르키우의 지형을 기준으로 할 때, 도시는 조건부로 4개의 하위 구역과 4개의 상위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북동부의 하르키우강과 로판강, 우디강이 모이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강들은 하르키우에서 합류해 도네츠강(Donets)으로 흘러 들어간다. 숲과 언덕이 많으며, 도시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 해발 100m의 고지대에 속한다. 기후는 습한 대륙성으로,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편이고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연평균 기온은 7.5℃로, 1월에는 –30℃까지 내려갈 때도 있으며 7월의 평균 기온은 21℃이다. 하르키우는 중앙러시아 구릉의 남쪽 기슭, 북도네츠강 3개 지류의 합류점에 있는 철도, 도로 교통의 중심지이다. 1656년 우크라이나의 요새취락으로 건설되어 18세기에는 정기시(定期市)가 열리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철도 건설과 함께 기계, 식품공업이 발달하였으며 1918-1934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주도(主都)였다. 1934년까지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다. 주민은 우크라이나인 70%, 러시아인 29%, 유대인 1%이다. 현재 트랙터, 모터, 각종 전기기기, 광산용 기계, 공작기계, 섬유, 인쇄, 식품 공업용 기계 등을 생산하는 대기계 공업의 중심이다. 동시에 농업발전지역에 위치하므로 식육, 제분, 양조, 제과 공업도 활발하다.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교육, 문화의 선도적 도시이기도 하다. 1805년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하르키우 국립대학(V. N. Karazin Kharkiv National University)이 설립됐고 1812년에는 우크라이나 최초의 신문이 이 도시에서 발간됐다. 수십 개의 고등교육기관, 우크라이나 민족극장, 역사박물관 등 많은 문화시설이 있다.[2]

지리[편집]

하르키우는 하르키우강, 로판강, 우디강 유역에 위치해 있으며 우크라이나 북동부 시베르스키도네츠강 유역으로 흘러 들어간다. 역사적으로,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의 슬로보다우크라이나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주요 도시로 여겨진다. 하르키우의 대략적인 크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24.3km, 서쪽에서 동쪽으로 25.2km이다. 하르키우의 지형을 기준으로 할 때, 도시는 조건부로 4개의 하위 구역과 4개의 상위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해발 202m의 파티카트키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하르키우의 노보셀리브카로 94m이다.

하르키우는 하르키우, 로판, 우디, 네미슐랴강의 큰 계곡에 위치해 있다. 이 계곡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러시아 중부 고원과 도네츠크 저지 사이에 위치해 있다. 모든 강은 하르키우에서 서로 연결되어 도네츠크 북부 강으로 흘러간다. 콘크리트 댐과 금속 댐의 특별한 시스템은 하르키우의 강들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기술자들에 의해 설계되고 건설되었다. 하르키우는 매우 오래된 오크 나무들과 많은 꽃들이 있는 1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진 많은 수의 녹색 도시 공원들을 가지고 있다. 고리키 공원, 또는 막심 고리키 문화와 오락을 위한 중앙 공원은 하르키우의 가장 큰 공공 정원이다. 그 공원은 9개의 지역 아이들, 익스트림 스포츠, 가족 오락, 중세 지역, 오락 센터, 프랑스 공원, 케이블카, 운동장, 복고 공원을 가지고 있다.

역사[편집]

하르키우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키타이인(Scythian) 등의 유물도 발견되고 있다. 7세기경에는 슬라브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해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었으며 교역도 했다고 한다. 한동안 황폐했던 이 지역에 도시가 만들어진 것은 1654년이다. 드니프로(Dnipro)강 서쪽의 고지대인 우안 우크라이나(Right-bank Ukrine) 지역에서 살던 카자크와 그곳 농민들이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정착했다. 1656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임명된 지방관이 통치하기 시작하며 요새가 세워졌고, 러시아 제국 남서부 지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특히, 서쪽으로부터 온 다수의 우크라이나인 이주민과 북쪽으로부터 온 소수의 러시아인 이주민이 도시 건립 초기부터 함께 살면서 하르키우 특유의 문화를 형성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농업 종사자가 전체의 70%를 차지할 정도였으나, 19세기에 들어와 농노제가 붕괴되고 인근 지역이 개발되면서 하르키우는 러시아 제국 최대의 경제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모스크바에서부터 흑해(Black Sea)와 아조프해(Sea of Azov)를 잇는 간선철도가 1869년 이 도시에 개통된 것은 지역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르키우는 농기계에서부터 철도 엔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계류를 생산, 러시아 제국 전역에 공급하는 중심지가 됐다. 민족주의 운동도 활발했는데,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미콜라 미흐노프스키(Mykola Ivanovich Mikhnovsky)가 1900년 독립 우크라이나의 개념을 처음 선포한 곳도 이 도시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우크라이나어로 제작되는 신문들이 폐간되는 등 독립운동은 큰 탄압을 받았다.

1917년 볼셰비키군에 점령된 하르키우는 1919년 출범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수도인 하르키우에는 고층빌딩과 교육, 과학 기관들이 더 많이 들어섰다. 이때 세워진 63m의 국영산업 건물은 당시 소련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1934년 수도가 키이브(Kyiv)로 바뀌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르키우의 인구는 약 700,000명으로 키이브의 인구보다 많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 나치군에 점령되면서 도시의 70% 가량이 파괴됐고, 주민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공동체를 자랑하던 하르키우의 유대인들은 나치 점령기 동안 30,000명 가까이 살해됐다. 전후 복구는 빠르게 진행됐다. 전쟁 전에 우랄지역으로 옮겨갔던 탱크제조시설이 돌아왔고, 1954년에는 공항이 건설됐다. 파괴된 도심 지역에는 스탈린 양식의 건물들이 다시 세워졌다. 1975년에는 지하철도 개통했다.

1991년 12월 1일 실시된 독립선언서 국민투표에서 76%의 투표율로 86%의 하르키우주의 분리독립이 찬성되었다. 소련의 붕괴는 하르키우 중공업을 통합된 소련 시장과 공급망에 묶어두었던 유대를 붕괴시키지는 않았지만 단절시키지도 않았고 러시아 석유, 광물 및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도 않았다. 하르키우와 동부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서는 서방세계의 새로운 경제 파트너 확보에 대한 제한된 전망과 새로운 국가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우려가 결합되어 러시아 연방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강조하는 정당과 후보들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새로운 세기에 이러한 것들은 지역당과 2006년 시의회 선거, 2007년 의회 선거 및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하르키우가 승리한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대통령 야망으로 대표되었다. 비록 키이우와 더 서쪽에 있는 지역사회에서 목격된 수준의 항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2012년 총선 이후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그의 당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조직적인 부패와 유럽 연합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전망을 방해한다는 비난 속에 하르키우에서 표면화되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특별 군사작전 개시 명령을 선언한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 북동부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주요 목표물이었으며 나흘만에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인 하르키우에 진입했다.[3]

경제[편집]

하르키우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러시아에서부터 이어지는 간선철도와 고속도로 등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발전해왔다. 우크라이나 첨단 산업의 중심지로 소련 붕괴 후 방위산업은 다소 위축됐지만 각종 기계, 전자산업체와 탱크, 항공기 등의 제조시설이 하르키우에 있다. 도시의 IT 전문가는 25,000명 가량 되는데 이 중 75%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련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IT 서비스의 내수시장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어서 하르키우의 기업들은 대부분 수출 지향적이다.[4]

하르키우 대학교[편집]

하르키우 대학교 또는 카라진 대학교(우크라이나어: Каразінський університет), 공식 명칭 V. N. 카라진 하르키우 국립 대학교(우크라이나어: Харківський національний університет імені В. Н. Каразіна)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대학 중 하나이며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초기 대학이다. 이 대학은 바실리 카라진의 노력으로 1804년에 설립되었으며, 서부에 위치한 르비프대학교(University of Lviv · 1661년 설립)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하르키우대학교의 학술조직은 21개 학부 및 단과대학으로 구성돼 있다. 재학생 가운데 외국인 유학생 비중이 약 25%에 달한다. 하르키우대학교는 2023년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QS의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541-550위권에 들었다. 신흥유럽중앙아시아(EECA)지역 대학 중에서는 69위에 올랐다. 2023년 타임스고등교육의 세계대학평가에서는 세계 1201-1500위권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물리학, 천문학과 컴퓨터과학 및 정보시스템 분야에 강점을 가진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학교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3월 2일, 러시아의 포격은 경제학부 건물을 강타했고 그 후 러시아의 포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3월 5일, 대학 체육관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3월 11일에는 물리공학부 건물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3월 18일에는 행정대학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3월 22일 현재, 그 대학의 언론 서비스에 따르면, 그 대학에는 온전한 건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동문과 교수 중 3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1908년 노벨생리 · 의학상을 수상한 일리야 메치니코프(1845~1916)는 4년의 이 대학 학사과정을 2년 만에 마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프랑스로 귀화했다. 196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레프 란다우(1908~1968)는 1932년부터 1937년 사이에 이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이먼 쿠즈네츠(1901~1985)도 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 미국으로 망명했다. 설립 이래 약 14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5][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하르키우〉, 《위키백과》
  2. 하르키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하르키우 주〉, 《요다위키》
  4. 하르키우(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5. 하르키우 대학교〉, 《위키백과》
  6. 카라진하르키우국립대학교(세계의 대학)〉,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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