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마스지로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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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는 1905년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뒤 군 복무와 타 회사 근무를 하다가 큐슈탄광기선(九州炭鉱汽船)에 편입되어 기사로 지내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사장인 덴켄지로(田健治郎) 남작(男爵)과 임원인 타케우치아키라타로우(竹内明太郎)가 그의 실력을 인정해주었으며 후에 자동차 사업을 제안할 때 후원으로 나서 투자를 해주었다. 같은 시기에 체신성(遞信省)에서 기사로 지내던 한 고향, 한 학년 친구 아오야마 로쿠로(青山禄郎)도 자동차 사업에 관심이 있어 참여하였으며 이로서 1911년에 카이신샤자동차공장(快進社自動車工場)을 설립하였다. 비록 122평방미터의 건축면적에 공인 6명, 공작기계 5대, 공장동력 5마력인 자그마한 규모의 공장 같았으나 관영공장에서 보기 힘든 미국 브라운앤사프(Brown & Sharpe)사의 최고급 공작기계와 모교에서 연국시제작을 추진한 선반 등은 준비단계에 있었다.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는 1905년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뒤 군 복무와 타 회사 근무를 하다가 큐슈탄광기선(九州炭鉱汽船)에 편입되어 기사로 지내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사장인 덴켄지로(田健治郎) 남작(男爵)과 임원인 타케우치아키라타로우(竹内明太郎)가 그의 실력을 인정해주었으며 후에 자동차 사업을 제안할 때 후원으로 나서 투자를 해주었다. 같은 시기에 체신성(遞信省)에서 기사로 지내던 한 고향, 한 학년 친구 아오야마 로쿠로(青山禄郎)도 자동차 사업에 관심이 있어 참여하였으며 이로서 1911년에 카이신샤자동차공장(快進社自動車工場)을 설립하였다. 비록 122평방미터의 건축면적에 공인 6명, 공작기계 5대, 공장동력 5마력인 자그마한 규모의 공장 같았으나 관영공장에서 보기 힘든 미국 브라운앤사프(Brown & Sharpe)사의 최고급 공작기계와 모교에서 연국시제작을 추진한 선반 등은 준비단계에 있었다.
  
초기에는 자동차수리와 수입차 조립판매를 추진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일본산 자동차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에 개최된 토쿄타이쇼오박람회(東京大正博覧会)에 15마력 수냉각 V형 2기통 엔진을 탑재한 소형승용차 DAT를 내놓았으며 동메달을 수상하였다. 자동차명 DAT는 은인들인 덴켄지로(田健治郎), 아오야마 로쿠로(青山禄郎), 타케우치아키라타로우(竹内明太郎)의 이름 첫자모를 따서 정하였다. 그 뒤 1922년에 개최된 헤이와박함회(平和博覧会)에 직열 L형 4기통 15.8마력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와 튜닝화물차를 내놓고 금메달을 수상한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는 자사 실력에 자신을 얻고 나카사키무라(長崎村)에 부지 6,000坪(19,834평방미터)의 큰 공장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자동차제조를 개시하였다. 하지만 경기불황, 지진재해 및 포드의 일본진출 등의 영향으로 카이신샤(快進社)의 경영은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1925년에 카이신샤(快進社)를 해산하고 DAT자동차상회에 조직을 축소하였다가 이듬해에 大阪(오사카)의 지쯔요오자동차제조주식회사(実用自動車製造株式会社)와 합병을 추진하고 DAT자동차제조주식회사(ダット自動車製造株式会社)를 설립하였다. 오사카에 중심을 이전한 DAT에서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은 DAT51형, 61형, 71형 군용트럭개발에 참여하다가 1931년에 사직하고 토쿄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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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자동차수리와 수입차 조립판매를 추진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일본산 자동차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에 개최된 토쿄타이쇼오박람회(東京大正博覧会)에 15마력 수냉각 V형 2기통 엔진을 탑재한 소형승용차 DAT를 내놓았으며 동메달을 수상하였다. 자동차명 DAT는 은인들인 덴켄지로(田健治郎), 아오야마 로쿠로(青山禄郎), 타케우치아키라타로우(竹内明太郎)의 이름 첫자모를 따서 정하였다. 그 뒤1922년에 개최된 헤이와박함회(平和博覧会)에 직열 L형 4기통 15.8마력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와 튜닝화물차를 내놓고 금메달을 수상한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는 자사 실력에 자신을 얻고 나카사키무라(長崎村)에 부지 6,000坪(19,834평방미터)의 큰 공장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자동차제조를 개시하였다. 하지만 경기불황, 지진재해 및 포드의 일본진출 등의 영향으로 카이신샤(快進社)의 경영은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1925년에 카이신샤(快進社)를 해산하고 DAT자동차상회에 조직을 축소하였다가 이듬해에 大阪(오사카)의 지쯔요오자동차제조주식회사(実用自動車製造株式会社)와 합병을 추진하고 DAT자동차제조주식회사(ダット自動車製造株式会社)를 설립하였다. 오사카에 중심을 이전한 DAT에서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은 DAT51형, 61형, 71형 군용트럭개발에 참여하다가 1931년에 사직하고 토쿄로 귀환하였다.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이 토쿄로 귀환한 뒤 고토오케에키(後藤敬義)를 리더라 한 개발팀은 지쯔요오자동차제조주식회사(実用自動車製造株式会社) Rira 1호의 섀시를 기반으로 DAT의 엔진과 기타 부품을 활용하여 수냉각식 직열 4기통 750cc 4인승 승용차의 시제작을 추진하였으며 후에 내무성(内務省) 소형자동차 규격 개정에 따라 495cc의 1인승 소형승용차로 개발을 완성하였다. 이가 전쟁전에 일본의 국민자동차로 불리웠던 DAT SUN(ダットサン)이 었다. 1932년에 출시할 때 차명은 DAT SUN이었지만 시제작차는 하시모토가 개발했던 DAT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DAT SON으로 불리웠다.<ref name="橋本"></ref>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増治郎)이 토쿄로 귀환한 뒤 고토오케에키(後藤敬義)를 리더라 한 개발팀은 지쯔요오자동차제조주식회사(実用自動車製造株式会社) Rira 1호의 섀시를 기반으로 DAT의 엔진과 기타 부품을 활용하여 수냉각식 직열 4기통 750cc 4인승 승용차의 시제작을 추진하였으며 후에 내무성(内務省) 소형자동차 규격 개정에 따라 495cc의 1인승 소형승용차로 개발을 완성하였다. 이가 전쟁전에 일본의 국민자동차로 불리웠던 DAT SUN(ダットサン)이 었다. 1932년에 출시할 때 차명은 DAT SUN이었지만 시제작차는 하시모토가 개발했던 DAT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DAT SON으로 불리웠다.<ref name="橋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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