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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

해시넷
leejia1222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8월 17일 (화) 18:1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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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피씨통신)이란 개인용 컴퓨터(PC)를 다른 컴퓨터통신회선으로 연결하여 정보를 주고 받는 통신 방식을 말한다.[1]

개요

PC통신은 통신회선을 통해 호스트 컴퓨터에 접근해 축적된 정보를 검색, 추출, 호스트 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활용, PC 통신회원 상호 간 메시지, 데이터 교환, 온라인 상품 구매 및 서비스 예약, 주문 등 다양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인터넷과는 달리 호스트에 기능이 집중되어 있어서 호스트가 제공하는 데이터와 서비스만을 이용할 수 있다. 호스트가 제공하는 전자회의실, 전자게시판, 대화방 등과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 다자간 통신도 할 수 있었으며, 전자사서함 기능에 의해 발신자와 수신자가 편리한 시간에 메시지를 기록하고 꺼내 볼 수 있어서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통신으로 기대되었다. 또한 PC통신망은 회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폐쇄망이어서 통신 비밀을 확보하기가 쉽다. 다른 PC통신망이나 인터넷과는 호스트가 제공하는 게이트웨이를 통해 접속이 가능했다.[2]

역사

PC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과거에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컴퓨터를 집에 갖추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PC의 보급은 워드프로세서스프레드시트 등의 업무용 소프트웨어베이식(basic) 등의 프로그래밍 언어, 그리고 PC게임 등의 활성화와 같이 초기에는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보급과 활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지만, 전화선에 연결해서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있는 모뎀이라는 주변 기기가 개발되고 그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일반인들도 다양한 방식의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 중에서, 열정을 가진 일부는 주로 사람들이 모여서 글을 올리고, 읽고, 찾을 수 있는 게시판인 BBS(Bulletin Board System)라는 소프트웨어를 PC에 설치하고, 자신의 PC를 호스트로 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이렇게 호스트를 구성하고 서비스를 하기 위해 많은 비용과 자신들의 노력을 들였는데, 순전히 자발적인 열정에 의한 활동이었다. 놀랍게도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단시일 내에 폭발적으로 늘면서 전 세계에 BBS 바람이 일어나게 되었다. 호스트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모뎀이 필요했는데, 모뎀은 전화선을 이용해서 음성신호와 디지털 신호를 변환하는 장치로 모뎀을 이용해서 호스트에 접속할 때의 특유한 삑, 끽 거리는 사운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전화선을 통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속하기 때문에, 해당 전화선에 누군가 접속해 있으면 통화 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열성적인 BBS 호스트는 하나의 회선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전화회선과 모뎀, 호스트 PC 등을 확보해서 서비스를 하였다. BBS의 운영자는 흔히 시삽(sysop)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대규모의 BBS들을 모아서 서비스하는 PC통신 서비스의 동호회 운영자도 시삽이라고 불리게 된다.[3]

BBS

BBS는 한국어로 전자게시판 또는 전자게시판 시스템으로 불리는 접속 프로그램을 이용해 회선을 연결하고, 로그인 과정을 거쳐 가입자들이 시스템 내의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컴퓨터 시스템이다.[2] 사설 BBS는 개인 또는 단체가 운영하는 주로 비영리 목적으로 소규모 PC통신 서비스였다. 자발적으로 발생한 이러한 사설 BBS들은 상용 PC통신 서비스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PC통신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1] 최초의 BBS의 역사에 대해서는 캘리포니아와 시카고의 시스템들을 거론한다. 1973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는 터미널들을 유선으로 연결한 커뮤니티 메모리라는 BBS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성된다. 커뮤니티 메모리는 터미널의 사용자들이 동전을 넣고 연결을 한 뒤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BBS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네트워크 구성으로는 BBS라고 부르기 어렵지만, 키워드로 메시지를 태그 하거나 검색 등도 가능했으며, 글을 올리고 읽는 방식은 이후 만들어지는 BBS들과 거의 똑같았다. 전화선을 이용해서 모뎀으로 연결하는 BBS는 1978면 시카고에서 워드 크리스텐센과 랜디 수에스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들은 1978년 2월 16일 CBBS이라는 서비스를 오픈하는데, 이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BBS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3년 미국에는 6만 개가 넘는 BBS가 운영되었을 정도로 호황기를 맞게 되었고, PC를 이용한 컴퓨터 통신 또는 네트워크는 곧 BBS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BBS 문화는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다.[3]

데이콤은 1984년 5월 천리안을 통해 전자사서함 서비스를 시작했다. 1985년 10월에 생활정보 데이터베이스, 1986년 9월에 화상정보 서비스, 1987년 4월 한글 전자사서함 한메일, 1988년 5월 문자정보 서비스 천리안2 를 개발해 제공했으며, 1990년 1월 PC 서브를 개통해 독립적으로 운영하다가 1992년 12월 천리안 2와 PC 서브를 통해 천리안으로 통합 운영했다. 한편 한국경제신문사는 1989년 11월 케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 PC통신㈜를 설립하면서 1992년 3월 서비스를 코텔로 변경했고, 같은 해 7월에 명칭을 하이텔로 변경했다.[2] 나우콤은 1994년 만들었다. 1994년 3월 북네트라는 이름의 책 전문 정보 서비스로 시작했으나, 이를 종합 PC통신 서비스로 확대했다. 초반에는 회사명을 딴 나우콤으로 불리다가 이용자들에게 서비스 명칭을 공모해 1994년 10월 상용화와 함께 나우누리라는 서비스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1996년 삼성SDS㈜는 유니텔을 개설했는데, 다른 PC통신 서비스가 VT(virtual terminal) 모드 서비스를 주력으로 한 것에 비해 유니원이라는 이름의 전용 GUI 클라이언트 사용을 권장하는 등 다른 시장 전략도 도입했다. 이러한 주요 BBS 사업자들 외에도 많은 사업자들이 존재했지만 대부분 사라졌다.[2] 대한민국의 사설 BBS로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더퍼스트(The first)와 1988년 5월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네트가 효시가 되었는데, 대구에서 4개의 접속 노드를 갖추어 다중 접속자를 지원한 달구벌이 개설되고, 이듬해에는 엠팔BBS가 개설되면서 초기의 열성적인 커뮤니티를 만들게 되었다. 당시 엠팔의 사용자들은 실제로 대한민국 인터넷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커뮤니티가 된다. 초창기에는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을 한글화해서 사용했지만,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한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 주인,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나왔으며, 1991년 최고의 BBS 호스트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최오길의 호룽불이 등장하면서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3]

사이트

1990년대에 국내에서 인기를 끌던 PC통신 서비스로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후발주자로는 채널아이, 넷츠고 등이 있었다. 이 중에 가장 먼저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바로 한국통신의 하이텔이다. 하이텔의 전신은 1988년에 시작된 케텔이었다. 케텔은 한국경제신문에서 처음 개발했으며, 뉴스, 게시판, 동호회, 채팅 등의 본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한 한국 PC통신 서비스의 원조다. 그러나 케텔은 무료 서비스였기 때문에 점차 운영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케텔은 1991년, 한국통신이 설립한 PC통신 서비스 업체인 '한국PC통신'에 인수되어 1992년 3월에는 코텔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만, 한국 PC통신의 모기업인 한국통신은 한국 PC통신이 붙인 코텔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기존 케텔 이용자들 역시 코털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이 이름에 거부감을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해 7월, 코텔은 하이텔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후부터 계속 이 이름을 쓰게 된다.[4]

천리안

천리안 2000 씨디롬

PC통신 대표 주자였던 천리안(Chollian)은 1982년 설립한 한국 데이터통신의 서비스다. 1984년 5월에 한국 데이터통신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해 1985년 9월에 PC통신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전에는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 등에서 업무용으로만 PC를 이용했으니 따지고 보면 개인 서비스의 시초인 셈이다. PC통신은 전화 모뎀으로 서로 자료를 주고받거나 방을 만들어 대화를 주고받는 서비스다. 이용자들을 중간에서 엮어주는 다리가 바로 천리안과 하이텔 같은 PC통신이다. PC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라 느린 속도와 1만 원의 요금, 이용한 정보에 붙는 정보이용료를 따로 내야 됨에도 파란 화면에 빠져드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1997년, 천리안은 유로 가입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5] 1991년 회사명을 데이콤으로 이름을 바꾼 한국 데이터통신은 1998년 한컴이 개발한 한글 검색엔진 ‘심마니’와 ‘씨넷’을 인수하며 변화를 모색한다. 하지만 변화의 성과를 내기도 전에 LG에 인수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LG 인터넷의 채널 아이와 천리안은 혼란을 겪으며 이용자들은 하나둘씩 등을 돌리자 LG는 채널 아이 서비스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2002년 LG가 설립한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이 천리안과 심마니 사업부를 넘겨받은 뒤, 2003년 3월 두 서비스를 통합해 심마니 CHOL을 출범시켰다. 천리안이 PC통신 꼬리표를 떼고 웹 기반의 인터넷 포털 서비스 업체로 변태를 마친 순간이다. 천리안은 이메일, 커뮤니티 등 기본 서비스와 일부 유료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웹 기반 유/무료 회원제를 도입했다. 게임 포털인 고인 돌스까지 더해 3개 사이트가 통합된 CHOL은 초기에 잠깐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인터넷 환경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한 신생 인터넷 기업과 치러야 했던 생존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태되기 시작했다. 2007년 8월 천리안은 천리안 2.0으로 이름을 바꾸고 완전한 포털 사이트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회원과 무료회원 구분 정책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정회원에게는 10GB의 이메일 용량과 디스크 팟 200MB, 영화 보기 무료 쿠폰, 매달 25건의 무료 문자 등이 제공된다. 무료회원도 대부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이메일 용량 제한 등의 차이가 있다. 천리안 2.0은 메일 중심의 커뮤니티 포털 사이트라고 말할 만큼 이메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02년에 이미 3D 아바타 메일 서비스를 시작하고, 외부 메일을 한 번에 열어 볼 수 있는 무한 수신 서비스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은 천리안을 30~40대를 중심의 전문 비즈니스 포털 사이트로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전문적인 이메일 서비스 확대에 힘쓰고 있다.[6]

하이텔

하이텔 멤버십 키트

하이텔(HiTEL)은 한국PC통신 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PC통신 서비스였다. 케텔(Ketel)이 하이텔로 서비스 명칭을 개명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던 시점에 한국통신은 157이라는 PSDN(Public Switched Data Network)를 운영하고 있었다. 케텔이 코텔로, 그리고 하이텔로 바뀌면서 기존 이용자들이 반발한 이유는 서비스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 PC통신은 케텔을 인수하면서 본래 무료 서비스였던 케텔을 유로화 한다고 발표했다. PC통신은 전화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쓰는 양만큼 전화 요금을 내야 한다. 여기에 월 서비스 이용료까지 부과한다고 하니 이용자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PC통신은 요금을 반드시 신용카드로만 내야 한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는데, 당시 케텔 이용자 중 상당수를 차지하던 학생들이 이에 크게 반발했다. 이에 이용자들은 한국PC통신 본사 앞에서 수개월간 촛불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한국PC통신은 이용자들의 일부 요구를 받아들여 가입비를 일정 기간 동안 면제하고 요금 수납 방식을 다양화하는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참고로 당시 케텔 이용자들의 벌인 시위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촛불 시위이기도 하다. 하이텔은 서비스 본격화 1년이 지난 1993년에는 가입자 수가 10만 명을 돌파했으며, 전성기인 1996년에는 100만 명의 가입자를 유지하기도 했다. 메인 게시판인 큰 마을에서는 각종 사회 이슈를 둘러싼 열띤 토론이 벌여져 언론도 이에 주목했으며, 대화방을 통해 모니터 너머의 다양한 사람들이 인연을 맺어 친구, 혹은 연인이 되기도 했다. 이 당시 하이텔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몇몇 이용자는 나중에 크게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4] 30대 이상의 인터넷 사용자 중에서는 아직도 하이텔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PC통신은 전화선을 통해 채팅을 하거나 자료를 나누고, 모임의 터전을 제공했는데, 지금의 인터넷 포털 역할을 했다. 1992년 서비스를 개시한 하이텔은 천리안과 함께 90년대 PC통신 역사의 중심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문자 위주의 PC통신은 인터넷 웹을 이용한 야후, 라이코스, 다음, 네이버 포털 사이트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변두리 서비스로 잊혀 갔다. 하이텔은 1999년 인터넷 서비스로 변화를 주고 2004년에는 한미르와 통합하면서 파란이라는 포털 사이트로 변신했으나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 사이트의 위력에 밀려서 결국 2007년 2월 28일 자로 서비스를 중지하게 된다.[7]

나우누리

나우누리 초기화면

나우누리(Nownuri)는 나우콤에서 1994년 10월부터 서비한 PC통신망이었다. 1994년 3월 북네트라는 이름의 책 전문 정보 서비스로 시작하였으나, 두 달 후인 5월 종합 PC통신 서비스로 확대했다. 서비스 초기에는 회사명을 딴 나우콤으로 불리다가 이용자들에게 1994년 9월에 사용자들에게 서비스 명칭을 공모하여, 1994년 10월 상용화와 함께 나우누리라는 서비스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상용 PC 통신망 가운데 가장 먼저 14400bps 속도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후 나우누리 서비스는 2006년 나우콤에서 분사한 나우 에스엔티라는 회사로 이관되어 운영되었다. 1999년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으로 PC 통신의 이용자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빠른 속도로 쇠퇴하였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는 모뎀 접속은 제공되지 않았지만 텔넷을 통한 VT 접속은 가능했다. 하지만 네이버, 프리챌, 다음 등의 포털사이트의 출범과 확산, 트렌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나우누리는 하이텔에 이어서 2013년 1월 31일부터 서비스를 종료하겠다고 발표했다.[8]

유니텔

유니텔(Unitel)은 1996년 삼성SDS에서 개발한 PC통신 서비스이며 1999년 11월 29일부터 현재의 CI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타 PC통신 서비스가 VT 모드 서비스를 주력으로 한 것에 비하여 유니텔은 서비스 초기부터 유니윈이라는 이름의 윈도우 3.1 환경 기반 전용 GUI 클라이언트 사용이 필수였다. 초기에는 삼성그룹 직원 및 가족들에게 무료 ID를 배포하여 점유율을 높여간 사실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96년에는 12,800bps 속도의 모뎀을 주로 사용하던 시기여서, 유승준 뮤직비디오 AVI 파일 1개조차 몇 시간을 다운로드해야 하는 시대이었기에 몇 백 메가짜리 유니텔 접속 프로그램은 무료 설치 CD로 대량 배포되었다. PC통신이 널리 사용되던 시절, 인터넷 3시간 무료 서비스를 장점으로 부각시켜 영업하였다. PC통신 일변도에서 웹서핑이 서서히 퍼져가던 1990년대 중후반 PC통신이 서서히 저물어 가던 시기에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터넷 접속자를 가진 PC통신 서비스가 된다. 한국통신, 데이콤 등에 대부분의 사업자들은 인터넷 접속 요금을 PC통신 가입비와 별도로 받고 있었으나, 유니텔은 1997년 말부터 유니텔 월 이용 요금 1만 원만 지불하면 인터넷 웹브라우저의 인터넷 연결은 추가로 허락하는 PC통신 업계에서 최저가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다국적 IT기업의 인터넷 홈페이지조차 거의 없어서 PC통신 서비스가 없는 인터넷 접속만으로는 일상적인 네트워킹 생활을 꿈도 꿀 수 없었다. 또 웹서핑 초심자들에게 유니텔에서는 전혀 불필요하였지만, 한국통신, 데이콤 등에서 유용한 원클릭 인터넷 접속 유틸리티 프로그램들조차 모두 유로 프로그램이었다.[9]

기능

전화망을 연결해 컴퓨터를 쓰던 PC통신망은 1995년 9월 25일 호남정유가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PC통신망을 이용하고 기업 포럼을 개설했다. 호유 기업 포럼은 고객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소비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고객의 제안과 불편사항을 신속히 파악하여 해결하며 고객 만족을 경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95년 9월경 기업 포럼을 개설한 기업은 130개 정도였다.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3곳에 개설하여 ‘GO HOYU’를 입력하면 호유 기업 포럼에 연결되었는데, 고객들에게 회사 전반에 대한 정보와 정유 관련 자료는 물론 스포츠, 레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또 이용자들이 회사 제품과 관련한 불편사항과 각종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었고, 기업 이미지와 제품에 관련한 고객 설문조사도 실시했다. 회사 주유 상품권과 PP카드 판매 업체를 지도상에 상세하게 표시, 안내해 주며 PC통신 주문 판매도 운영했다.[10]

채팅

1997년 나온 영화 '접속'에는 PC통신 세대의 삶이 담겨있다. 익명으로 상대방과 채팅하며 서로를 상상하던 그 당시의 추억이다. 이미지나 영상이 전혀 없고 텍스트만 주고받던 채팅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화면 너머의 주인공이 한석규와 전도연 이길 바라며 갑작스러운 만남인 ‘번개’가 유행하기도 했다. PC통신은 채팅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느린 속도에서 영상이나 그림을 주고받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텍스트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했고, 이모티콘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문자를 이용했다. PC통신은 유료 서비스라 별명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익명은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채팅 예절이 좋은 편이었다. 채팅으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게이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머드 게임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당시 유행했던 신의 손 이란 게임은 컴퓨터 교육 과정이 마련된 교육기관이 경진대회를 주최할 만큼 인기였다.[6]

동호회

PC통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호회다. 등산, 사진, 바둑 등 다양한 주제의 동호회가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모임에 빠져들었다. 특히 인기가 높았던 것은 천일야화나 검과 마법 같은 소설 동호회다. 동호회에 올라온 소설이 책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유명 회원은 드라마 작가로 진출하기도 했다. PC통신 시대의 동호회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의 나누던 문화와 추억은 인터넷 카페와 커뮤니티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6]

활용

서비스

개인용 컴퓨터나 워드 프로세서를 통신 회선을 통해 PC 통신 사업자의 주 컴퓨터와 연결하여, 호스트의 축적, 처리 기능을 이용하여 메시지나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 이러한 PC통신 기능을 이용하는 서비스는 크게 정보 교환(통신), 정보 제공(검색), 정보 처리(트랜잭션)의 3가지로 분류된다. 정보 교환 서비스는 PC 통신 회원 또는 가입자 상호 간의 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쌍방향 통신 서비스로서 이메일, 전자 회의실, 전자 게시판, 대화와 토론, 공개 자료실 등이 있다. 정보 제공 서비스는 PC 통신 가입자가 호스트에 접속하여 호스트에 축적되어 있는 정보를 제공받는 서비스로서 학술, 과학, 기술, 문헌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거나, 그 밖에 시사, 뉴스, 일기 예보, 증권 시세, 여행, 금융 정보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정보 처리 서비스는 예약, 주문 또는 대량의 데이터를 전송하는 서비스로, 항공 회사나 통신 판매 회사 등의 컴퓨터에 접속하여 항공권의 예약이나 상품 매매 등을 할 수 있다. 호텔 예약, 홈 쇼핑, 홈 뱅킹 등의 이용 분야로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다.[11]

문학

1990년대 PC통신망을 기반으로 창작, 유통, 소비되었던 문학, 통신 문학, PC 문학, 컴퓨터 통신 문학, 사이버문학 등이 있다. 대개 무명의 아마추어 작가에 의해 PC통신망의 동호회 게시판에 연재물 형식으로 게재되었던 소설들을 일컫는다. 보통 1회에 200자 원고지 20~30장 분량으로 연재되었다. 처음에는 SF 과학소설 일변도이었던 것이 점차 순수소설, 추리소설로 확대되었고, 여기에 시와 수필을 쓰는 여러 작가들이 합세하면서 점차 하나의 독특한 문학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중 유명한 작품들은 책으로 출판되거나 드라마로 제작되어 유명세를 치렀다. ‘통신 문학’, ‘PC 문학’, ‘컴퓨터 통신 문학’, ‘사이버문학’ 등 다양하게 불렸다.[12]

변화

한국에서 실제 인터넷의 시작은 1982년 서울대학교한국 전자 기술연구소 간의 컴퓨터 간 연결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연결에 성공하며 당시 연결된 인터넷은 TCP/IP를 기반으로 FTP, 텔넷(Telnet) 등의 응용 프로토콜을 사용하는 SDN으로 구축되었다. SDN을 통해 당시 미국의 폐쇄적인 인터넷 정책을 바꾸게 되면서 세계 인터넷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SDN을 통해 개방된 인터넷은 곧 인터넷 상용화에 불을 지피며 한국에는 여러 PC통신 서비스 회사들이 탄생함과 동시에 활성화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 탄생한 PC통신으로는 케텔, 나우누리, 유니텔 등이며 영화 접속에서도 나타나며 젊은이들의 새로운 도구로 등장한다. 이런 PC통신은 오프라인으로만 진행되던 동호회 및 엽서 등을 채팅과 동호회, 전자사서함 등으로 사용자 간의 정보를 나누며 또한 세상과 소통하는 장으로써 요즈음의 온라인 커뮤니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의 인터넷은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된다. PC통신과는 다른 검색서비스 업체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1995년 국내 최초의 검색서비스인 코시크가 오픈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두루넷이 국내 최초의 초고속인터넷을 서비스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인 1999년에는 하나로 통신과 한국통신이 ADSL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면서 인터넷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당시에 등장한 포털사이트는 네이버와 다음 그리고 드림 위지, 네이트 등 인터넷을 하면서 한 번쯤은 들어볼 만한 사이트 들이다. 1990년대는 포털 사이트의 대거 등장으로 인해 한국의 인터넷 환경이 다양성을 띠게 된다면, 2000년대는 카페, 블로그 등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등장하게 된다. 2000년 초 프리챌이 등장하였고, 2002년에는 한국 최초의 블로그가 오픈하면서, 그리고 싸이월드도 인터넷상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모바일 시대에 변화 실패로 인해 지금은 다른 SNS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2000년대 후반, 새로운 통신기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터넷상에서 다양한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모바일 통신을 확장하게 되고, 또한 이를 통해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근 및 실시간 정보검색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SNS에 가장 최적화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모바일 통신의 발달은 기존 PC통신을 위축시키며 변화에 실패한 많은 서비스들은 다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게 된다.[13]

서비스 종료

PC통신이 30여 년의 임무를 마치고 완전한 종말을 맞았다. PC통신 서비스인 014XY 서비스가 2017년 8월 31일 완전히 종료됐다. 014XY는 014로 시작하는 5자리 숫자로 구성된 PC통신 전용 전기통신번호다. 과거 한국통신 시절 ㈜케이티는 PC통신 게이트웨이의 주인이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위해 톨게이트를 거치는 것처럼 그때 그 시절 014 번호판을 단 다양한 PC통신 사업자들은 ㈜케이티가 관리하던 게이트웨이를 통과해야 했다. 이제 ㈜케이티가 게이트웨이를 닫고 수명이 끝난 014XY번호를 모두 정부에 반납한다. 남아 있던 인프라가 모두 정리되면서 PC통신의 마지막 자취가 뒤안길로 사라지는 셈이다. PC통신은 1980년대 PC를 통해 통신한다는 개념을 정착시킨 후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이 활약하던 90년대 초반 황금기를 누렸다. PC통신 동호회가 만들어 간 게시판 문화는 지금의 웹 소설, 웹툰으로 진화한 PC 문학의 원천이기도 했다.[14] 1996년 당시 PC통신 소비자들의 가장 큰 불만이 접속 지연, 접속 상태 불안전 등 서비스 장애가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접속만 끊기지 않길 바라던 때였다. 1994년 국내 최초 인터넷 상용 서비스 ㈜케이티의 코넷을 시작으로 ‘유쾌, 상쾌, 통쾌’,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등 개성 있는 광고 문구들을 앞세운 속도 경쟁이 시작됐다. 현재는 PC통신보다 30만 배 더 빠른 기가인터넷도 상용화돼 있다.[15]

각주

  1. 1.0 1.1 PC통신〉, 《위키백과》
  2. 2.0 2.1 2.2 2.3 PC통신〉,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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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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