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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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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22일 (수) 01:21 판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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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위치
브라질리아
상파울루
아르헨티나-브라질 국경의 이과수 폭포
세계문화유산인 식민지 도시 오루 프레투
아마존 열대우림

브라질(Brazil)은 남아메리카 중앙부에 있는 나라이다. 정식명칭은 브라질 연방 공화국(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이다. 대통령을 원수로 하는 연방 공화제로 22개 주와 4개 연방 직할시, 연방 특구인 수도 브라질리아(Brasilia)로 이루어져 있다. 칠레, 에콰도르를 제외한 모든 남아메리카 제국과 국경선을 접할 만큼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넓고, 세계에서도 러시아·캐나다·미국·중국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국가에 이를 만큼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유일하게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발전한 나라로 1822년 포르투갈 왕가를 받드는 왕국으로 독립하여 1888년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공화제가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유일의 포르투갈어 사용국으로 다인종·다문화 국가이다.

개요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연방국으로 남아메리카남반구에서 가장 넓은 나라이다.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브라질은 7,491킬로미터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에콰도르칠레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아메리카의 국가들과 국경을 접할 만큼 영토가 광대하여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47.3%를 덮고 있다. 유명한 것은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조니아 밀림, 정열적이기로 소문이 자자한 삼바춤과 삼바 축제, 그리고 축구이다.

2019년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 명목GDP 순위는 세계 9위, 1인당으로는 세계 평균에 못 미치는 79위이다. 2000년대 후반 이후 호황으로 2011년에는 프랑스, 영국을 턱밑까지 쫓는 7위였지만 이후 경제침체로 차이가 많이 벌어졌다. 인구와 영토가 한참 적은 한국과 비교해도 2010년 전후의 호황기 이외에는 전반적으로 근소우위지만 엎치락뒤치락하는 정도. 다만 월드컵 + 올림픽 + 코로나의 영향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많이 나빠지는 바람에 2021년 현재는 한국보다 약간 아래다.

IMF 투표권은 10위다.

같은 대륙에 있는 국가들을 압도하는 국력, 넒은 영토와 2억명이 넘는 방대한 인구, 다민족 국가라는 점 등에서 미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한국에서는 남미에서 브라질이 가장 잘 알려져있기 때문에 북미에서는 미국 남미에서는 브라질 이런 인식이 있으나 유럽에서는 최근 브라질보단 칠레 경제를 더 주의깊게 보고 있으며 아르헨티나가 더 많이 인식되어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러시아, 인도,중국 등과 함께 브릭스라고 불리며 독일, 일본, 인도와 함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G4의 일원이다.

남아메리카에서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나라다.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가 대부분인 라틴아메리카에서 스페인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나라이자, 가이아나(영어), 수리남(네덜란드어), 프랑스령 기아나(프랑스어) 등과 함께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어 아닌 언어를 쓰는 나라가 브라질인 셈이다. 그래도 두 언어 모두 이베로-로망스어로 원체 비슷한, 사투리 수준인 언어라 생으로 어느정도 대화가 통하기도 하며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기반한 라틴 문화권이라 스페인어 쓰는 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 사실 큰 차이는 없다. 인명, 지명 등 여러가지가 비슷한 편이다.

국가 상징

국호

브라질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아직 불분명하다. 국명 유래로는 브라질 나무(파우 브라질)가 제일 유력하다. 이 나무는 15~16세기만 해도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만 발견되어 왔으며 고급 옷감을 붉게 염색하는 재료로 쓰이기 때문에 이를 가공하여 가루를 만들어서 유럽으로 수출되곤 했다. 그러나 이후 신대륙 탐사를 나선 탐험가들에 의해 아마존 밀림지대에서 이 나무가 무진장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유럽인들은 이때서야 이 나무의 실제 모습을 보고 '붉은 나무'라는 뜻이 되는 pau-brasil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포르투갈어에서 브라질의 표기는 Brasil.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Brazil이라는 표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1911년 포르투갈어 정서법 개정 이전 표기가 Brazil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표기가 아직 Brazil을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

한국의 포르투갈어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브라질'로 표기되고 외교부 등도 이 표기를 쓴다. 주한 브라질 대사관 표기. 대한민국 외교부 국가 지역/정보. 이는 유럽 포르투갈어의 발음인 [bɾɐˈziɫ](브라질)을 따른 것이며, 브라질 포르투갈어에 대해서는 따로 원칙이 붙어있는데 이를 따르면 '브라지우'로 표기된다. 브라질 포르투갈어에서는 음절 끝의 l이 반모음화되기 때문인데 실제로 브라질 포르투갈어에서의 발음은 '[bɾaˈziw](브라지우)'에 가깝다.

국기

브라질 국기

브라질의 국기 이름은 "노랑과 초록"을 뜻하는 '아 아우리베르지'(포르투갈어: A Auriverde)이며, 최근의 국기는 1992년 5월 11일에 제정되었다. 국기 비율은 7:10이다.

초록 바탕에는 노란색 마름모가 있고 그 안에 파랑 원이 있으며 원 안에는 흰색 띠가 가로질러 있다. 초록은 농업과 산림 자원을, 노랑은 광업과 지하 자원을, 파랑은 하늘을 나타낸다.

천구의(天球儀) 안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은 브라질이 공화정을 선언한 1889년 11월 15일 8시 30분에 리우데자네이루의 하늘에 펼쳐진 것이라고 한다. 파랑 원 안에는 브라질을 구성하는 주와 연방구를 의미하는 27개의 별이 있다. 흰색 띠 안에는 "질서와 진보"(포르투갈어: Ordem e Progresso)라는 브라질의 포르투갈어 나라 표어가 초록색으로 씌어져 있다.

대학 교수인 하이문두 T. 멘지스(Raimundo T. Mendes)가 디자인하였다. 첫 국기는 1889년 11월 19일에 제정하였고 1960년과 1968년에 각각 수정되었으며, 1992년 5월 11일 브라질 헌법 제8421조에 의하여 다시 제정하였다.

기동전사 건담에 등장하는 지구연방군의 국기가 브라질의 국기를 매우 많이 닮았다.

국장

브라질 국장

브라질의 국장은 1889년 11월 19일에 제정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초록색과 노란색 두 가지 색의 별이 그려져 있으며 별 가운데에는 원 모양의 파란색 방패가 그려져 있다. 파란색 방패 안쪽에는 하얀색 남십자자리가 그려져 있으며 방패 바깥쪽에는 원 모양을 만든 27개의 하얀색 별이 그려져 있다. 27개의 별은 브라질을 구성하는 26개의 주와 1개의 연방구를 뜻한다.

별 뒤쪽에는 브라질의 대표적인 생산물인 커피와 담배 가지가 장식되어 있으며 별 아래쪽에는 칼이 장식되어 있다. 국장 아래쪽에 있는 파란색 리본 위쪽에는 브라질의 공식 명칭인 "브라질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이 쓰여져 있으며 리본 아래쪽에는 브라질 연방 공화국이 성립된 날짜인 1889년 11월 15일("15 de novembro de 1889")이 포르투갈어로 쓰여져 있다.

국가

브라질의 국가. 시인이자 언론인인 조아킹 오조리우 두키-이스트라다(Joaquim Osório Duque-Estrada, 1870-1927)가 작사하고 작곡가 겸 음악 교사 프란시스쿠 마누에우 다 시우바(Francisco Manuel da Silva, 1795-1865)가 작곡했다.

1822년에 포르투갈의 왕세자 동(Dom) 페드루가 황제 페드루 1세로 자처하면서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고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직후에는 이바리스투 다 베이가(Evaristo da Veiga)가 작사한 가사에 페드루 1세가 직접 곡을 붙인 독립의 노래(Hino da Independência)가 국가로 쓰였지만, 우루과이의 독립을 둘러싸고 아르헨티나와 벌인 500일 전쟁에서 안드로메다까지 관광당한 뒤 페드루 1세가 고국으로 도망가면서 국가 지위를 잃었다.

페드루 1세의 퇴위 직후 브라질 황실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모집했는데, 판사인 오비지우 사라이바(Ovídio Saraiva)가 쓴 가사에 시우바가 작곡한 곡이 새로운 국가로 지정되었다. 사라이바의 가사는 국민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해 얼마 못가 나가리되었지만, 음악은 당시 브라질에 유행하던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 풍의 흥겨운 선율 덕에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어 공식 행사에서 계속 주악되었다.

이후 1841년에 페드루 2세가 가사 공모전을 재차 열었지만, 여기서도 성과가 없어서 계속 무가사로 사용되다가 1889년에 마누에우 데오도루 다 폰세카(Manuel Deodoro da Fonseca)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로 제국이 붕괴되면서 군사 정부에서 새로운 국가 공모전을 개최했다. 여기서 레오포우두 미게스(Leopoldo Miguez)가 메데이루스 이 아우부케르키(Medeiros e Albuquerque)의 가사에 곡을 붙인 공화국 선포의 노래(Hino da Proclamação da República)가 당선되었는데, 막상 당선시켜놓고 국가로 제정하려고 하자 반발이 심해서 결국 없던 것으로 하고 말았다.

그래서 새롭게 수립된 브라질 공화국에서도 시우바의 곡이 계속 무가사 국가로 사용되었는데, 이후에도 계속 가사를 새로 붙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시도는 브라질 독립 100주년이었던 1922년에야 성공했는데, 1909년에 두키-이스트라다가 만든 가사가 공식 승인되었다.

브라질 헌법에 따르면 이 곡을 기악만으로 연주할 경우 1절만, 성악만으로 혹은 기악 반주에 성악을 더해 연주할 경우 1~2절을 모두 불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는 연주 시간 상 대개 1절만 부르며[2], 반대로 슬로바키아 출신 작곡가이자 지휘자, 편곡자인 페터 브라이너가 슬로바키아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해 낙소스에서 만든 세계 국가 대전집 음반에는 기악(관현악)만의 연주임에도 1~2절을 모두 연주한 버전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여담으로, 독립의 노래와 공화국 선포의 노래는 모두 국가는 아니지만 브라질 정부에 의해 국가로 공식 지정되어 지금도 준국가처럼 사용되고 있다.

지리

브라질의 지형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에 있는 세라도스오르가오스 국립공원
브라질 알라고아스 주 델미로구베야에 있는 상프란시스코 강 싱고 협곡

브라질은 남아메리카 최대의 국가로서 유역을 포함하면 8,514,876.6 km²에 달하며 남아메리카 대륙의 47.7%를 차지하고 있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남미에서 두 번째로 면적 큰 아르헨티나보다도 3배 이상 더 크다. 면적 상으로는 러시아, 캐나다,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에 속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세 번 째로 큰 나라이다. 브라질의 영토는 알래스카하와이를 제외한 미국 본토의 면적(약 808만 km²)보다 조금 더 크다.

브라질의 지형을 살펴보면 북부는 아마존강이 흐르는 세계 최대의 열대 우림 지대이며(아마존 분지), 이곳은 전 세계 산소의 25% 이상을 생산하고 있어 '지구의 허파'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 개발로 인해 환경 파괴가 지속되고 있어 아마존강 유역의 사막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중부에는 브라질 고원이 펼쳐져 있고 남부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최고봉은 베네수엘라와의 국경 근처 북부 기아나 고지의 피고 다 네블리나 산으로 해발 3,014m이다. 열대는 "Cerrado"라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져 있으며, 에마스 국립공원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북동부는 해안에서 대서양림이 아르헨티나 일부 지방까지 펼쳐져 자주 가뭄에 시달려 왔다.

브라질은 넓은 국토답게 위도도 넓게 분포해 있는데 북쪽 끝의 위도는 북위 5°16'18.0"이고 남쪽 끝의 위도는 남위 33°45'02"에 해당한다. 극남과 극북의 직선거리는 약 4,400km로 전 세계를 통틀어 남북으로 가장 긴 나라이다. 그리고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여러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프랑스령 기아나, 수리남,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우루과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즉,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모든 나라와 국경을 접한다.

남서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와의 국경 부근에는 유명한 이과수 폭포가 있고, 라플라타강 수계의 큰 강 파라나강이 흐른다. 다른 강으로는 네그로 강, 상프란시스쿠 강, 싱구 강, 마데이라 강과 타파조스 강이 있다. 또한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국경 부근은 세계 최대의 열대 습지인 판타나우 자연 보전 지역이 있다.

브라질 남부 세개 주는 브라질 고원에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팜파스(대평원)와 마이그레이션 지대가 되고, 전통적으로 목축업이 성행하여 가우슈도 존재한다. 남부는 코노 수르의 일부로 취급되기도 한다.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국토의 93%는 열대 지역에 속한다. 브라질의 기후는 북부의 열대 기후와 남회귀선이 지나는 상파울루 이남의 온대 기후로 나뉜다. 또한 열대 기후도 지역 특색에 따라 적도 기후, 열대, 스텝, 고지대성 열대, 그리고 아열대 기후로 나뉜다. 기온은 열대지역에서 연중 26도 이상 유지되며, 산타카타리나주 지방에는 겨울철(6 - 8월)에 눈이 내리기도 한다.

강우량은 대부분 지역이 연중 1,000에서 1,500mm이며 대부분 여름철인 9월부터 4월까지 내린다. 아마존 지역은 연중 2,000mm이상이며 벨렘 지역은 3,000mm까지 된다.

사계절 위도에 따라 계절이 다르지만, 일단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봄 : 09월 22일부터 12월 21일
  • 여름 : 12월 22일부터 03월 21일
  • 가을 : 03월 22일부터 06월 21일
  • 겨울 : 06월 22일부터 09월 21일

역사

선사시대에서부터 토착민이 살았지만 브라질의 역사는 보통 포르투갈인이 건너온 뒤의 역사를 일컫는다. 1500년에 인도를 향한 포르투갈 원정대의 총사령관이었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바이아주 남쪽 해안에 도착했고, 1530년부터 포르투갈 왕실이 새 땅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시행했다. 1548년에 총독부가 설치되었고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들이 세습 총독을 지내면서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식민지 경제는 브라질 나무 염료 추출과 유럽계 정착민과 토착민들 사이의 거래로 시작했지만 점차 수출을 위한 사탕수수 재배가 주를 이루는 형태로 바뀌었다. 사탕수수가 더 많이 재배되면서 브라질 땅이 구세계의 교역로에 편입되었고, 지주와 선교사, 자유 이민자와 많은 아프리카계 노예가 정착했다. 17세기 말에는 브라질 내륙지역 정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수많은 금광이 현재의 미나스제라이스, 고이아스, 마투그로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1789년에 포르투갈 왕실이 연체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데하마라는 세금 징수법을 발표하였고, 빌라 히카 (지금의 오루프레투) 지역에서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려는 미나스제라이스의 반란이 일어났다. 1792년에 반란이 실패했고 리더였던 치라덴치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1808년에 포르투갈 왕실이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브라질로 천도하면서 마리아 1세의 아들 주앙 6세가 섭정 왕자로서 항구를 개항하고, 공장 가동을 허락하고 브라질 은행을 설립했다. 1815년에는 포르투갈 왕국의 한 식민지였던 브라질 부왕령이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왕국으로 바뀌었으며, 당시 국왕이던 마리아 1세가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 국왕이 되었다. 1816년에는 마리아 1세의 죽음과 함께 섭정 왕자 주앙 6세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아들 페드루 4세를 섭정으로 브라질에 남겨놓은 채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822년 9월 7일에 페드루 4세가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며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그는 겨우 다섯 살이던 아들 페드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831년에 퇴위했다. 14세가 되던 1840년에 페드루 2세가 성년의 지위를 얻어 이듬해에 즉위하였고, 정권이 확실히 자리잡았으며, 1849년 프라이에이라의 반란을 끝으로 안정되었다. 같은 해에 노예 거래가 중단되었으며, 노예의 자리를 유럽계 이민자들이 매웠다. 지정학적인 맥락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함께 파라과이 전쟁에 참가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파라과이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흑인과 메스티소의 참전이 노예제 폐지 운동과 군주제 폐지 운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곧 1888년에 페드루 2세의 딸 황녀 이자베우가 황금법에 서명함으로써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노예 주인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황실은 마지막 지지 기반을 잃었다.

1889년에 육군원수 데오도루 다 폰세카가 공화정을 선포하고 구공화국이 시작되어 1930년에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지속했다. 그때부터 브라질 역사의 꽃인 산업화가 일어났고, 미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1964년에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가 군사 정변을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했다.

군사 정권은 국가 전복 세력과 부패에 대항한다는 구실로 헌법에 규정된 권리들을 억압하고 언론을 검열·탄압했으며 정당들을 해체하고 양당제를 도입했다. 군사 정권이 끝난 뒤 1889년에 상·하원의원이 헌법 제정 국민 의회에서 개인의 권리 보장을 더 강화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브라질은 다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며 국제무대에 우뚝 서고 있다.

카브랄 이전 시대

브라질 인디오

브라질 땅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고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지만, 미나스제라이스에서 발견된 화석 기록에 따르면 포르투갈인들이 "인디오"라 불렀던 원주민들은 브라질에서 적어도 8000년 이상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학, 언어학, 유전학계에서는 브라질 원주민들이 베링 육교를 건너거나 태평양 해안을 따라 아시아에서 왔다는 이론이 가장 널리 받아 들여진다.

브라질을 발견하기 이전에도 포르투갈스페인 사이에는 발견되거나 발견되지 않은 땅의 소유권에 대한 여러 가지 협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은 카보베르데 섬 서쪽 서경 43도 37분 지점을 기준으로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그어져, 조약상 경계선의 동쪽으로는 모두 포르투갈이, 서쪽의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차지하기 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다.

1500년에 포르투갈인이 브라질을 처음 발견했을 때, 브라질 땅(남아메리카 대륙의 동쪽 지역)에는 투피과라니, 마크루제, 아루아키 등 2,000여 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원주민이 2백만 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해안이나 큰 강가에서 사냥과 낚시, 수렵이나 이동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아메리카 대륙 북쪽의 안데스 산맥이 서쪽의 정착 농경 문명과 동쪽의 반유목민들 사이에서 상당히 강한 문화적 경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자 기록이나 기념비적 건축물도 남기지 않은 브라질의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다만 도자기 같은 유물들이 지역 문화 발달의 복잡한 패턴이나 내부 이동, 또는 몇몇 큰 부족 국가의 존재를 보여준다. 루이스 다 카마라 카스쿠두의 말에 따르면, 원주민 가운데 투피 족이 포르투갈인과 접촉한 첫 번째 민족이고, 이들의 언어와 문화가 맘루크, 메스티소, 그리고 포르투갈계 브라질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원주민을 문명에 때 묻지 않은 원시인으로 보았고, 곧 인종 간 결혼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원주민을 "문명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스페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홍역과 천연두, 결핵, 임질, 독감 등 원주민들에게 없었던 질병을 옮겼기 때문에 면역이 없던 원주민들 수만 명이 죽었다. 질병들은 원주민 간의 교역로를 따라 빠르게 퍼져 나갔고, 곧 유럽인들과 직접적인 접촉 없이도 부족들 모두가 전멸하다시피 했다.

포루투갈 식민지 시대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1500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지휘한 포루투갈 함대가 브라질 포르투세구루에 상륙하면서 300년이상 포루투갈 통치를 시작했다.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후, 이미 발견된 아메리카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브라질도 식민지화의 위협에 노출됐다. 1500년에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한 이후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다른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역사를 걷게 되었다. 초기 브라질에서는 기독교도로 개종한 이들에 의해 파우 브라질의 수출이 주요 산업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처음에 베라크루즈 섬으로 불렸던 브라질은 16세기에 들어서 브라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549년에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초대 브라질 총독으로 토메 데 수자가 사우바도르에 부임했다.

1580년 포르투갈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연합하자 브라질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공격을 받아 북동부의 일부가 네덜란드 공화국에게 점령되었다. 네덜란드는 1661년 철수하였다. 한편, 파우 브라질이 고갈된 이후 새로운 산업으로 북동부에 마데이라 제도에서 사탕수수가 도입되어 엔제뇨(설탕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력으로 먼저 인디오가 노예화된 후 인디오의 수가 부족하자 서부와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흑인 노예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포르투갈 농장주의 파젠다(농장)에서 혹사를 당했다.

브라질 내륙의 탐험은 상파울루의 반데이란테(노예사냥 탐험대)에 의해 17세기에 시작되었다. 반데이란테는 각지에 원정하여 현재 도시의 기반이 되는 마을을 많이 세웠지만, 남부와 파라과이까지 원정하여 예수회가 보호되고 있던 과라니 사람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런 가운데 힘든 강제노동에 참다못한 흑인 노예 중에는 브라질 오지로 도망쳐 주거지를 형성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주거지들을 '모캄보'나 '킬롬보'라고 불렀고, 이곳에서 아프리카 흑인들뿐만 아니라 인디오 원주민들도 있었다. 이러한 킬롬보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는 오늘 날의 알라고아스주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강가 즘바'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이후 그의 후계자인 '즘비'가 통치를 하였다. 이후 네덜란드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여러 차례 팔마레스를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1695년 유명한 사오 파울로 출신의 도밍고스 조르제 벨호가 가까스로 킬롬보 공략에 성공하여 즘비를 죽이고 이곳을 정복했다.

장 밥티스트 드브렛의 채찍질의 집행. 거의 500만 명의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 노예 무역 중에 브라질로 수입되었는데, 이는 그 어떤 나라보다 많은 수였다.

1680년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라플라타강 하구 좌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건너편에 콜로니아 데 세크라멘토를 건설했기 때문에 이후 반다 오리엔탈 지역은 독립 이후까지 계속되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권력 사이에 충돌의 장이 되었다. 또한, 남부에서는 라플라타 지역의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가우초라는 목동 집단이 생겨났다.

이후 18세기에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골드 러시가 일어나, 브라질의 중심이 북동부에서 남서부로 이동하여 1763년 리우데자네이루가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다. 금광은 18세기 동안에 무려 30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였고,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더 많은 흑인 노예가 유입되었다. 한편 미나스의 중심지가 되었던 오루프레투(Ouro Preto)에서는 독창적인 바로크 문화가 번창했다. 반다 오리엔탈을 둘러싼 스페인과 충돌 후 18세기 말에는 계몽주의가 유럽에서 전해지면서,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의 영향을 받아 1789년 포르투갈에서 독립을 하려 했던 "미나스의 음모"가 발각되어, 주모자인 치라덴테스가 처형되었다. 이후 아이티 혁명의 영향을 받아 크리올 백인이나 물라토, 크레올 흑인(크레올로)에 의한 독립 운동이 진행되지만, 식민지 시대에 브라질에 대학이 설립되지 않은 등 지적 환경의 부족은 브라질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일부 지식인의 "음모"에 머물렀고, 대중적인 기반을 가진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는 브라질과 이스파노 아메리카 국가 독립의 정체성 차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라질의 독립

1822년 9월 7일 페드로 왕자(이후 황제 페드로 1세 )의 브라질 독립 선언

반도 전쟁은 1807년 장 주노(Jean-Andoche Junot)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 왕가는 리스본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천도하였고, 이후 리우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1815년 리우데자네이로는 브라질과 포르투갈 및 알가브레 연합알가르베 연합 왕국의 수도로 결정되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반다 오리엔탈의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이끄는 연방 동맹과 전투를 통해 반다 오리엔탈을 지배하였으며, 정복한 지역에 시스플라티나 주(Cisplatina)를 설립했다. 1820년 포르투갈을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국으로 변혁하려는 혁명이 일어나자,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앙 6세가 귀국을 요청했다.

1821년 포르투갈 왕궁은 리스본으로 귀환했지만, 섭정으로 잔류한 브라간사 왕가의 황태자 페드루를 죠제 보니파시오를 대표하는 브라질인 세력이 지지하여, 1822년 9월 7일에 페드루는 황제인 페드루 1세(재위 1823-1831)에 즉위하여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제정 시대

브라질의 독립은 브라간사 왕가의 황제라는 구심력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호세 데 산 마르틴, 미겔 이달고 등이 주장하는 공화제와 입헌군주제의 사상이 충돌하지 않았다. 이스파노 아메리카 국가가 분열하는 것과 달리 광대한 브라질 식민지 단일 단위로 새로운 주권 국가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 계층이 독립 후에도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정 시대는 처음부터 각 지방의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과 공화제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의 반란이 일어났다. 1820년대 북동부 페르남부쿠주에서는 적도 연맹의 반란이 일어났고, 최남단의 시스플라티나 주에서는 오리엔탈 주의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복귀를 요구한 33명의 오리엔탈 주 사람이 잠입하여 시스플라티나 주를 둘러싸고 시스플라티나 전쟁이 발발했다. 시스플라티나 주는 영국의 중재에 의해 1828년에 우루과이 오리엔탈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설명

1831년 페드루 1세가 퇴위하면서 지방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고, 최남단의 히우그란지두술 주에서 목장 주와 가우초가 반란을 일으켜 파라포스 전쟁이 발발했다. 1840년 페드루 2세 (브라질)가 즉위하면서 사태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며, 1848년 프라이에이라의 반란을 진압한 후, 브라질 사상 최초의 안정기가 찾아왔다. 페드루 2세는 영토 야심을 가지고 있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 개입하여, 그 결과 1864년에 파라과이의 시스코 소라노 로페즈 대통령은 브라질에 선전포고하여 파라과이 전쟁이 일어났지만, 카시아스 공이 이끄는 브라질 제국이 주체가 된 삼국동맹군은 파라과이를 격파했다.

한편, 독립 후에도 대농장의 의해 노예제도가 계속 유지되었지만, 미국의 남북 전쟁 후 서반구에서 노예제도를 채택한 독립 국가는 브라질 제국만 남았기 때문에 삼국동맹 전쟁 이후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에 의해 노예제도는 비판을 받았다. 삼국동맹 전쟁 이후 제도적으로 확립된 군의 청년장교(테넨테)들은 실증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점차적으로 노예제도의 폐지와 제정의 폐지를 포함한 국민운동이 싹텄다. 이 운동은 1888년으로 《황금법》이 공포되면서 서반구에서 마지막까지 유지되었던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페드루 2세는 노예제도의 폐지로 인해 대농장의 지원도 잃었고, 다음해 1889년 데오도로 다 폰세카 장군의 쿠데타로 인해 제정이 붕괴되었다.

구 공화국 시대

1889년에 일어난 공화제 혁명으로 브라질 제국은 공화제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에는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밀크커피)라고 불렸던 커피재배가 주된 산업인 상파울루주와 목축업을 기반으로 한 미나스제라이스주가 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관행이 생겼다. 또한 제정 시대부터 커피, 농장에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노예제 폐지 후 이민자의 유입 속도가 더욱 빨라져, 1908년에는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일본인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제출한 인종차별 철폐 방안에 찬성하는 등 인종차별 철폐에 적극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후, 1920년대에는 카페 콩 레이치 체제에 대한 비판이 높아져,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테스를 비롯한 테넨테(청년 장교)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했다. 이 테넨치즈모가 직접 국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1930년대의 정치 상황을 마련하게 했다.

바르가스 시대

1930년 혁명 당시의 게툴리오 바르가스(가운데)

1930년 카페 콩 레이치 체제에 대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히우그란지두술 주의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1930년 혁명을 일으켜, 독재 정치를 확립하려 했다. 1932년에는 상파울루 주 반 바르가스 세력에 의해 호헌 혁명이 발발하였고, 이 반란을 진압한 바르가스는 브라질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7년 바르가스는 쿠데타에 의해 이탈리아 파시즘에 영향을 받은 이스타두 노부(신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바르가스 시대에는 대학의 정비, 국가 주도의 공업화, 민족주의의 추진과 이민자 동화 정책,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이 진행되었다. 1942년에 바르가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했지만,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국민과 군 내부에서 강해져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5년 10월 13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다.

포퓰리즘의 시대

1946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이후 1950년 브라질 최초의 민주 선거를 통해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두 번째 집권한 바르가스는 파시즘 색상보다 좌파 포퓰리즘 색깔을 내세워 브라질 경제의 국민화가 진행되었지만, 군의 저항으로 바르가스는 1954년에 자살했다. 1956년 취임한 쥬세리노 쿠비세키 대통령은 "50년 발전을 5년에"라는 공약을 내걸고 개발 정책을 추진하여, 내륙의 고이아스 주에 새로운 수도 브라질리아를 건설한 후 1960년 리루데자네이로에서 수도를 옮겨왔다. 그러나 이 개발 정책으로 발생한 부채가 재정을 압박하여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다. 1961년 취임한 존 베우키오루 마르케스 골라르트 (일명 장고) 대통령은 이 같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1964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군사 독재 시대

1959년 새 수도인 브라질리아에 브라질 국회 건물 건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브라질 군부 세력들은 군부 지도자들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리고 여러 반대파 세력들과 야당 세력들을 추방이나 자격 박탈, 검열 내지는 고문 등의 방법으로 억압하면서 친미, 반공 노선의 외교 정책을 내걸어 외국 자본 도입에 의한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집권 초기 군사 정권은 이른바 브라질의 기적이라는 경제 호황을 이룩하며 90%대인 인플레이션을 10% 대까지 낮추고 실업률은 3% 이내의 완전고용을 이룩했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연 평균 10%를 넘기는 호황세를 보였다. 또한 당시 자동차와 텔레비전같은 물품이 중산층에게도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1970년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군부정권에서 각종 슬로건 홍보를 하는 데 이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 속에서도 이득을 챙긴 건 소수 부유층들이었고, 일반인들에게 돌아간 몫은 적었다. 정부는 자본 축적을 위해 임금 인상률을 물가상승률보다도 낮게 책정했는데 이로 인해서 실질 임금증가율은 경제성장률에 훨씬 못 미쳤고, 빈부격차가 급속히 증가하여 국민저축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득배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만큼 국민들의 저축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브라질 경제발전 자금의 대다수를 외채에 의존했기 때문에 나중에, 동시에 공업화에 따라 석유 수요가 크게 늘어났지만 오일 쇼크로 인해 한계를 맞이했고, 경제성장률은 6% 이내로 떨어지고 갚아야할 외채는 급속히 불어났고, 물가상승률 또한 다시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1967년, 코스타 이 시우바 장군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군사정권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1968년 6월 리우데자네이루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공산주의자들은 무장 투쟁에 들어갔다.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은 제도법 제5호를 선포해 의회를 폐쇄하고 반정부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이후 1969년 에밀리우 가하스타주 메디시 장군이 대통령에 올랐고, 메디시는 아마존 지역을 개발하려고 하였으나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1974년 취임한 에르네스투 가이제우 대통령은 일부 억압적인 정책을 완화하였으나 오일쇼크 등에 따른 불황과 초인플레이션, 외채 문제로 경제는 파탄 상태에 빠졌다. 집권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해서 이어져 군사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취임한 주앙 피게이레두 대통령은 브라질 군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이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브라질의 민주화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몇 년 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게이레두 정권 시절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의 비밀문서 1만 9400건이 파기되었다고 한다.[21] 한편,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0년대 들어 마이너스로 전환되었고, 1984년 인플레이션율은 223.8%까지 급증했으며, 대외채무도 910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신공화국 시대

1988년 헌법을 손에 들고 있는 율리시스 기마랑스(Ulysses Guimarães)
수년간의 초인플레이션 이후 브라질 경제에 안정을 가져다 준 25년간의 리얼 플랜을 기념하는 1헤알 동전.

1985년 1월 탄크레두 네베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1960년 이후 처음으로 당선된 민간인 대통령이며 1964년 군부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여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제6공화국) 하지만, 네베스는 취임도 하기 전에 갑자기 사망하고, 부통령 당선인인 조제 사르네이가 승계했다. 참고로 당시 브라질의 외채가 어느정도였냐면 브라질이 수백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었지만 하도 외채가 많아서 외채 상환에 다 썼던 상황이었다. 조제 사르네이는 1986년 2월,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기존의 크루제이루 화를 평가절하하여 크루자두 화를 도입했고, 물가와 임금동결, 환율고정을 실시했다. 일단 물가상승은 한숨을 돌리는 듯했지만 외채가 위낙에 막대했기 때문에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간의 격차가 커지고, 이로 인해 실질임금이 삭감되는 결과를 낳으면서 결국 물가통제는 실패했다. 결국 브라질 정부는 1987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된다.

1989년, 29년 만에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의 페르난두 콜로르가 대통령이 되어 경제 문제 해결을 내세웠으나, 초인플레이션은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콜로르마저 부패 스캔들로 탄핵되며 다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1995년 취임한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은 강력한 경제 개혁 정책을 폈고, 초기엔 초 인플레이션을 잡는 등 성과를 보이는 듯 했지만 이 저환율 정책이 무역적자를 유발시키고 경제자유화로 자본이 치고 빠져나가기 좋게 금융산업의 자유화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결국 다시 경제위기에 빠졌고 IMF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른다. 그리 좋은 평을 듣지 않았고, 사회 각 분야에 부패가 엄청났던 시절임은 여전하나 헤알화를 어느 정도 안정화시켰다는 점은 인정받기는 하다.

2002년 대선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 브라질 최초의 좌파계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계속 강력한 경제개혁 정책을 추구함과 동시에 성장하는 경제를 바탕으로 지역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였으며,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의 후임으로 지우마 호세프가 당선되어, 룰라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2013년 대규모 시위로 삐그덕거리더니 2015년 원자재값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인기가 워낙 없어 탄핵당하고, 미셰우 테메르가 승계했지만 부패 문제에다가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정책을 펴고 있어서 광범위한 반감을 사고 있다. 지우마 호세프 때에 터졌던 대규모 비리에 연루되었던 노동자당에 대한 국민들의 깊은 불신과 너무 높은 범죄율, 지우마 호세프 탄핵으로 인한 브라질 정당간의 의심과 분열로 인해 2018년 대선에선 '군사독재시기의 군인 출신'이자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되었다.

현재는 브릭스(BRICs)라고 불리는 세계경제의 신 성장동력으로 주목받는 국가. 하지만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치안부재 문제가 심각하다. 빈부격차의 경우는 국기에서 녹색 부분이 월 10달러 이하 소득자, 노란색이 월 100달러 이하 소득자, 보라색이 월 1,000달러 이하 소득자, 그리고 흰색이 월 100,000달러 이상 소득자라는 모 단체의 그림이 있을 정도. 그나마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시절을 거쳐가면서 빈곤층이 크게 줄고 헤알화 가치가 올라 나아졌긴 했지만, 그래봤자 브라질의 피파 랭킹과 유사한 정도.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지주와 자본가 집단 '코로넬리스'에 의해 1889년 왕정이 폐지되었고, 지금도 코로넬리스 계층은 엄청난 부를 구가하며 브라질 사회를 극악한 부익부 빈익빈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사실 브라질이 공화정으로 전환한 계기가 페드루 2세가 노예제를 폐지하자 분노한 기득권 세력이 군벌을 사주해 일어난 쿠데타 때문일 만큼 뿌리가 깊다.

지금도 브라질은 부패가 심각하지만 예전 브라질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1990년대에는 아예 사회전반 시스템이 모두 부패해서 경찰들조차 죄다 막장이었다. 예를 들자면 공무원은 뇌물이 없으면 휴가조차 갈 수가 없었고, 뇌물의 유무에 따라 견인차 활동구역이 늘었다 줄었다 했다.

설상가상으로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창궐과 자이르 보우소나루 행정부의 무능하고 안일한 대응, 특히 보우소나루 행정부의 트롤링이 병치되어 동년 6월엔 감염자가 100만 명을 돌파하며 수원시 인구만큼의 코로나19 피해자가 나왔다. 특히 6월 3주차에는 일일 신규 감염자 50,000명, 사망자 1,000여 명이 나오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 일변도로 갔다.

2022년 2월 8일, 브라질 연방선거법원은 중도우파 민주당과 강성우파 사회자유당이 제출한 합당안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정치

브라질 대통령 집무실
국회, 입법부
브라질 대법원은 주로 국가의 헌법재판소 역할을 한다.

브라질은 연방제, 대통령제에 기반한 민주주의 국가이다.

현재 브라질의 정치체제는 1988년에 전면 개정된 브라질 헌법을 기반으로 한다. 1988년 연방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했지만 의원내각제의 성격을 상당히 지니고 있다. 이는 제헌의원constituinte들이 의원내각제를 수립할 목적으로 채택한 조문들이 헌법에 존속한 까닭이다.

행정부

대통령과 부통령

브라질의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장은 대통령(Presidente da 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이다. 현임 대통령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이다. 또한 대통령이 유고 및 궐위시에 그의 권한을 대행할 부통령(Vice-Presidente da 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도 존재한다. 현임 부통령은 제라우두 알크민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 브라질에서 태어나자마자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어야 한다.
  • 35세 이상
  • 정당의 공천을 받아야 한다. (무소속은 금지)

내각 및 정부

연방행정부의 최고책임자는 연방대통령이며, 그 밑에 부통령이 있고, 각 부처 장관(ministro)과 차관(secretária-executivo), 그 아래 국장(secretário), 부국장(secretário-adjunto)이 있다. 연방행정부의 구성은 행정부처, 대통령비서실, 군부로 나뉘어 있다. 연방공공행정은 연방대통령에 직속되며 대통령은 각 부처 장관들의 보좌를 받아 직무를 수행한다. 각 부처 장관의 인선이나 해임에 해당하는 내각 구성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회의원은 각료를 겸직하지 않지만, 브라질은 대한민국과 유사하게 국회의원과 각료의 겸직이 가능하다. 장관의 직무는 관련 부처의 정책수립과 집행에 대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과 해당 부처를 관장하는 것이다. 또한 장관급에 해당하는 특별비서관은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브라질 연방정부의 조직구성은 연방대통령과 각 행정부처가 직접 연결되는 활동인 직접행정과, 연방정부에 관련을 두고 있지만 행정 및 재정적으로 독립된 공사나 재단과 같은 공공 또는 민간 단체들의 활동에 연관된 간접행정의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대통령이 임명한 각 부처 장관들은 대통령실(Presidência da República)에 연결된 각 행정기관의 소관 사무를 통할하고 소속 공무원을 지휘 감독한다. 연방정부의 주요 권한은 외국과의 외교관계, 국제교역, 이민정책수립, 국경획정, 국제기구 참여, 전쟁선포 및 강화, 국방, 계엄령 선포, 화폐 발행, 국가경제 및 사회발전 계획수립, 각 주 간의 통상관계 조정 등이다.

행정부는 입법부로부터 법 제정권을 위임받아 직접적으로 법을 제정하는 임시조치(medids provisórias)를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입법부가 의견 충돌로 인해 효율적인 입법절차가 어려워질 때 시민 사회의 요구가 있으면 대통령에게 직접 입법권을 부여하며 한시적인 법률효력을 갖는다. 연방관보와 대통령 메시지를 통해 의회에 통보한다. 공표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으면 법으로 전환할 수 있다.

브라질은 국회 제1정당의 의석이 전체의 20%에 불과한 다당제 국가이기에,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소속 정당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정당의 지지를 받아 출마하고,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연합을 구성한 정당들에 장관직을 일부 배분한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가 실질적으로 연립정부였다. 가령 지우마 호세프 정부의 경우 2016년 탄핵 사태 이전에는 국회 의석을 가진 10개 이상의 정당의 지지를 받았고 내각에 장관직이 있는 정당만 7개였다. 전임 자이르 보우소나루 정부도 국회 내 지지정당만 13개이며, 5개 정당에 장관직을 배분했다. 호세프 대통령이 쉽게 탄핵을 당했던 것도 호세프 정부에서 비리가 발견되자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정당들이 죄다 이탈해 순식간에 여소야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입법부

브라질의 입법부는 국가의회(Congresso Nacional do Brasil)이다. 양원제를 채택해 상원과 하원이 있다.

  • 상원(Senado Federal, 연방상원)

임기는 8년이며 81석이다. 브라질의 26개 주와 브라질리아에서 소선거구제 혹은 중선거구제로 선출되는데 미국 상원과 비슷하게 모든 상원의원이 새로 선출되지 않고 4년마다 어떤 해는 2/3(한 주에 2명)씩, 어떤 해는 1/3(한 주에 1명)씩 선출한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선거인 2018년 선거의 경우 전체 상원의원의 2/3을 뽑는 선거였다. 의원이 사직 및 당선 무효, 자격 박탈 등을 당하지 않는 이상 한 주에 있는 세 명의 상원의원이 동시에 선거를 치를 일은 없다. 한 주에서 1명만 뽑는다면 소선거구제가 적용되지만 만약 한 주에 2명 이상을 뽑아야 한다면 중선거구제가 되어 한 유권자가 두 명에게 표를 주는 것이 가능하며, 정당에서도 두 명의 후보를 내보내는 것이 가능하다.

  • 하원(Câmara dos Deputados, 대의원)

임기는 4년이며 513석이다. 브라질의 26개 주와 브라질리아를 선거구로 한 불구속명부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의원을 선출한다. 상원과 달리 모든 의원이 다같이 선거에 임한다. 의원 수는 인구에 비례해 할당되지만 인구에 상관없이 최소 의석이 8석, 최대 의석이 70석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이 상한과 하한이 너무 좁게 설정되어 있어, 인구 대비 의석이 가장 많은 호라이마(Roraima) 주가 약 5만 명 당 1석, 가장 적은 상파울루 주가 약 58만 명 당 1석으로 11.6:1이나 차이가 난다.

사법부

브라질법제도는 대륙법체제에 기반하며 헌법은 프랑스와 포르투갈, 민법은 프랑스, 형법 및 소송법은 이탈리아, 노동법은 이탈리아와 벨기에, 기업법과 소득세법은 미국, 유통세는 EU의 부가가치세법의 영향을 받았다. 브라질의 법은 전반적으로 로마-게르만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1804년 나폴레옹 법전과 1896년 독일 법전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사법부의 조직구성과 권한은 연방헌법에 규정되어 있으며 사법조직은 연방과 주州 단위로 크게 구성된다.

재판 내용에 따라 2개의 민 · 형사관할법원(주법원, 연방법원)과 3개의 특별법원(선거, 노동, 군사법원)으로 나뉜다. 3심제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에는 4개의 3심제법원(연방, 선거, 노동, 군사법원)과 1개의 2심제법원(주법원)으로 나뉜다. 1심과 2심 법관은 'Juiz(판사)'로 호칭하며 3심법원과 연방대법원 법관은 'Ministro(장관)'로 높여 부른다. 주고등법원 판사는 'desembargador(고등판사)'라는 별도의 명칭을 갖고있다. 1심과 2심 법원은 브라질 각 주에 산재해 있고, 수도 브라질리아에는 1, 2심을 맡은 연방특별구법원과 3심법원 및 연방대법원이 있다.

선거

브라질은 대선과 총선, 주지사 선거, 주의회 선거가 모두 같은 날 진행한다. 기초자치단체장 및 기초지자체 의회 선거는 4년마다 실행되며 대선 종료 2년 후에 치러지기 때문에 지방선거가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갖는다. 대통령처럼 주지사 선거, 유권자 20만 명 이상의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는 결선투표제가 적용되며, 재선과 중임은 가능하지만 3연임 이상은 금지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 직선제로 선출되며, 부통령은 항상 대통령과 한 조로 출마해서 당선되어야 한다. 결선투표제가 시행되어 1차 투표에서 50%를 넘는 후보가 당선되지만, 과반이 없으면 최상위후보 2명이 결선투표를 치러 승자가 당선된다. 1986년 이후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모든 대선이 결선투표를 치렀다.

의무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다. 투표에 응하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16세~18세 및 70세 이상인 국민은 해당되지 않는다.

브라질은 대통령중심제 국가이지만 국회는 정당 득표율에 따라서 각 정당별 당선자 숫자를 결정하는 완전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국회에 의석을 가진 정당이 27개에 달한다. 때문에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속한 정당 외의 다른 정당에도 협조를 구해야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대통령 후보가 선거에 출마할 때는 자신의 정당뿐만 아니라 다른 유력 정당들과 연합해 그들의 지지를 얻은 상태에서 출마하며 아예 정당연합의 이름도 따로 있다. 이런 식이라 부통령과 장관의 정당이 대통령의 정당과 다른 일이 다반사이다.

모든 선거에서 전자투표를 시행한다. 투표소에 터치스크린이 달린 투표기기를 달아놓으면 유권자가 클릭하는 식. 그래서 개표가 진행되자마자 순식간에 개표율 90%대가 찍힌다. 출구조사가 의미없는 수준으로 선거 결과가 빨리 나오지만, 유권자 표본 샘플 조사는 필요하기 때문에 대선 1차 투표 때는 출구조사를 한다. 전자투표는 2000년부터 도입되었는데, 종전에 9일이나 걸리던 개표 과정을 12시간으로 단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부정선거를 염려하는 목소리는 있지만 현재까지 전자투표를 통한 선거 부정이 적발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2021년 자이르 보우소나르 대통령이 2022년 대선에서는 전자투표방식에서 종이투표지방식으로 바꾸려는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결국 하원에서 부결된다. 보우소나르 대통령은 2014년, 2018년 선거가 조작이 행해졌다는 이유로 전자투표 폐지를 주장하나 이를 입증할 근거를 제시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자투표 방식으로 선거가 치뤄져서 본인이 당선 되지 않는다면 선거승복을 거부하겠다는 포석을 깔았다.[8]

모든 선거에서 무소속의 출마가 금지되어 있다. 헌법에 공직선거 출마 자격으로 당적을 가질 것을 규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정당

대표적인 다당제 국가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당연히 다당제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의석을 가지고 있는 정당만 무려 27개다. 즉 일당제의 반대말로서의 다당제가 아니라 양당제의 반대말로서의 다당제라는 뜻. 2016년 탄핵 사태 이전의 브라질 내각만 봐도 노동당(PT), 브라질민주운동당(PMDB), 사회민주당(PSD), 브라질공산당(PCdoB), 브라질노동당(PTB), 진보당(PP), 브라질공화당(PRB)의 7개 정당이 장관직에 들어가 있고 장관직이 없는 연립여당까지 합하면 10개가 넘어가며, 스펙트럼만 봐도 공산당부터 우파 정당까지 매우 넓다. 의원들 또한 당에 대한 애정보다는 연정을 위한 이합집산에 치우친다. 브라질의 비례대표제는 이러한 경향을 더 부추기는데, 일단 봉쇄조항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2007년까지만 해도 하원의원(모두 비례대표)이 정당을 탈당하더라도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았다.

군사

브라질 해군의 기함인 PHM Atlântico 와 호위함 Liberal (F-43). . 2022 년 기준으로 항공모함 NAM Atlântico를 운영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유일한 해군이다.

브라질 병력수는 33만명, 예비군은 134만명이다. 국방비 순위는 10위~15위를 넘나든다. 발전한 항공우주산업을 바탕으로 프롭 기본훈련기 분야에서도 스위스의 필라투스와 함께 세계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 중이며 보잉에어버스에 이어 KC-390이라는 중형 수송기를 브라질 민간 항공기 생산업체인 엠브라에르가 개발했다. 그리고 브라질은 중남미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사강국이다. 아르헨티나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보니 서로를 가상의 주적으로 늘 대비하는 훈련을 하며 대응한다. 하지만 해군의 현대화는 비참한 수준으로 대만, 대한민국과 함께 2000년대까지 기어링급 구축함을 사용한 국가 중 하나였다. 2022년 현재까지도 21세기 해군력의 척도중 하나인 VLS를 탑재한 함선이 없는 건 물론이고, 대공미사일을 가진 함선조차 니테로이급과 22형이 전부라 상황이 좋지 않다. 그나마도 전투체계와 미사일이 현대전에는 맞지 않는 구형인 탓에 개함방공은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수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만다레급과 같은 신형함을 건조하려는 중이나, 코로나19 발 경제 위기로 인해 건조 작업이 조금씩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공군력도 공중급유기(KC-135R), 조기경보기, 공격헬기 Mi-35,이탈리아와 공동개발한 공격기인 AMX 등 비교적 괜찮은 수준이긴 하나, 정작 중요한 전술기 등이 부실한 것이 단점. 2017년 1월 현재, 브라질의 전투기는 F-5 개량형 43대로 부실한 수준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브라질 공군은 차기 전투기로 2013년 12월 그리펜 36대를 구매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추가도입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사브에서는 해군용 그리펜에 대한 언급도 나오고 있다.

브라질은 해외에도 유엔평화유지군을 보내는 나라인데, 아이티에서는 10년동안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다가 2017년 8월 31일에 주둔임무를 끝냈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평화유지군파병을 준비중이다.

하지만 2012년부터 브라질 정부가 경제난으로 국방예산을 축소하고 있어 브라질 군대도 사정이 좋지 않다. 2018년 대통령 선거에 더 강력한 군대를 공약으로 내세운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돼서 이야기가 달라지긴 커녕, 경제난이 더 심해져서 군비 축소는 여전하다.

2018년에 영국 해군이 퇴역시키는 오션급 강습상륙함을 구매했다.

한국처럼 징병제 국가이다. 다만 인구가 대한민국보다 많고 병력도 적어 징집대상자의 95.5%가 군대면제를 받는다.

프랑스의 기술지원으로 알바로 알베르토급 핵잠수함 건조에 들어갔다.

외교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에선 인구가 매우 많고 영토도 매우 큰 나라라서 주변국들에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그리고 지역강국이자 유엔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브라질의 상임이사국진출에 대해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은 반대하는 편이다.

이와는 반대로 UN에는 가입했지만, 분담금을 미납하면서 UN에선 총회 투표권을 상실할 위기를 겪고 있다.

경제 위기로 공관들도 철수하고 있다.

2020년 7월 16일에 브라질 국방부는 신 국방정책 보고서를 통해 남미가 더는 분쟁없는 지역이 아니며 긴장과 갈등이 고조돼 위기로 확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과는 브라질에 약 180만명이라는 해외 최대 규모의 일본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있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브라질은 G4 국가로서 일본과 함께 국제연합 상임이사국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08년 4월 28일, 781명의 일본인이 고베항에서 브라질 이민을 떠났다. 배는 50일의 항해 끝에 1908년 6월 18일 브라질에 도착했다. 이를 기념하는 100주년 행사가 2008년에 열렸다. 브라질에 일본 사람들이 건너가서 산 이유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였다.

브라질의 주 중에 하나이며 브라질 최남단에 위치한 주인 시스플라티나 주는 현재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여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대한관계

브라질은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교를 체결(1959년 10월 31일)한 나라이다. 서로가 지리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협력을 꾸준히 확대하여 양국은 포괄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하였다.

1962년 7월 11일 주브라질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71년 3월 대사관이 기존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리아로 이전하였다. 1970년 10월에는 상파울루 분관이 총영사관으로 승격되었다. 브라질은 1965년 5월 주한 상주 브라질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양국은 1963년 5월 무역협정을 시작으로 문화협정(1967년 10월), 이중과세방지협약(1991년 11월), 과학기술 협력협정(1992년 12월), 관광협력협정(1997년 11월), 범죄인 인도조약(2002년 2월), 국방협력협정(2008년 11월) 및 최근에는 이중과세방지협약 개정의정서(2018년 1월)까지 포괄적인 부문에서 협력을 지속해 오고 있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양국 수교이래 최초로 브라질을 방문하였고, 이후 노무현 대통령(2004년 11월), 이명박 대통령(2008년 11월, 2012년 6월), 박근혜 대통령(2015년 4월)이 브라질에 국빈 방문하였다. 브라질 대통령 가운데에서는 카르도주(Cardoso) 대통령(2001년 1월)과 룰라 대통령(2005년 5월)이 국빈 방한하였고, 룰라 대통령과 당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당선자(2010년 11월)가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브라질의 행정구역

2021년 기준 양국 교역은 약 113억불을 기록하였다. 브라질은 한국의 20위 교역국이며, 한국은 브라질의 6위 교역국이다. 한국의 대브라질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부품, 메모리반도체 등이며, 브라질로부터 철강, 원유, 대두, 닭고기 등 원자재를 주로 수입한다. 브라질 정부 및 정재계 인사들은 한국을 브라질의 주요 무역 대상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한국 기업의 브라질 시장 진출을 적극 환영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고도 성장은 교육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인한다는 인식하에 이들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행정구역

브라질은 26개의 주, 1개의 연방구, 그리고 5,570개의 자치체로 구성된 연방이다. 주 정부는 자치 행정 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세금을 징수하고 연방 정부에 의해 징수된 세금 중 일부를 받는다. 주지사와 유권자들이 직접 선출하는 단원제 입법기구를 가지고 있다. 또한 공동의 정의를 위한 독립된 법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정부는 미국보다 자체 법률을 제정할 자율성이 훨씬 적다. 예를 들어, 형법과 민법은 연방 양원제 의회에서만 표결될 수 있으며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주 및 연방구는 북부, 북동부, 중서부, 남동부 및 남부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브라질 지역은 정치적, 행정적 구분이 아닌 지리적 구분에 불과할 뿐 구체적인 형태의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브라질 지역은 법률로 정의되어 있지만, 주로 통계 목적과 개발 프로젝트에서 연방 자금의 분배를 정의하는 데 유용하다.

지방 자치단체는 주정부와 마찬가지로 자치행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세금을 징수하고 연방과 주정부가 징수하는 세금의 일부를 받는다. 각각 시장과 선출된 입법기관이 있지만 별도의 법정은 없다. 사실, 주정부가 조직한 법정은 코마르카(카운티)라고 불리는 단일 사법 행정 구역에 많은 자치체를 포함할 수 있다.

경제

상파울루는 브라질의 금융 도시이며, 메가 시티이다.
브라질 제2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
헤시피
벨루오리존치

자원도 풍부하고 인구 수도 세계 6위, 지정학적 위치도 남미에서 최적이고, 기술력도 개도국에서는 상위권이며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으로 따지면 명목 GDP 세계 12위, 구매력평가(PPP)는 세계 8위인 경제대국이다. 라틴아메리카 경제 규모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남미의 경제 대국이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2021년 기준 세계 8위의 산유국. 이란이나 쿠웨이트보다 석유가 많이 난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 당시 비슷한 입장의 이웃국 아르헨티나 못지 않은 경제위기를 겪었으나 아르헨티나와는 달리 산업화를 제대로 해냈고 경제회복에 성공하였다. 잠재력은 상당하지만 정치 및 사회구조가 불안하고 경기 변동에 취약한 원자재 수출 위주 산업구조가 안정적 경제성장을 방해해 10~20년 주기로 경제위기가 찾아온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도 초까지 브라질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외채 위기로 인한 1980년대의 소위 말하는 '잃어버린 10년', 그리고 1990년대 후반 금융위기를 맞이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브라질 경제는 룰라(Lula) 정부의 성공적 경제정책,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외국인투자 증가로 인해 2000년대 중반부터 견고한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2011년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원자재 수요 감소, 유로존 위기 등으로 인하여 성장세가 부진하기 시작하였다. 2014년 이후에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2017년 테메르(Temer) 정부에 들어서 3년만에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개발도상국 인 브라질은 약 1억 명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이다. 2021년 현재 14.4%의 높은 실업률. 외환보유액은 세계 10위다 . 상파울루의 B3는 브라질에서 가장 큰 증권거래소이다. 빈곤과 관련하여 전체 인구의 약 1.9%가 하루 $2.15로 생활하고 약 19%가 하루 $6.85로 생활한다. 브라질 경제는 고질적인 부패와 심각한 빈부격차 등 으로 고통받고 있다. 브라질 헤알은 국가 통화이다.

가장 큰 문제는 지형과 인프라 부족. 브라질의 땅은 엄청 넓지만 국토가 대부분 열대우림이거나 산세가 험하고 해변 바로 옆이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고원이라 도로를 내기 어려워 교통도 엄청 불편해 개발이 어려운 땅이다. 일부 해변 평지나 고원 평지에 도시가 발달했지만 도시간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화물수송의 60%는 수송비가 비싼 트럭 운송을 해야 하고 승객수송은 비행기로 해야 한다. 철도도 매우 부족하고 노후화가 심각하다. 그래서 농사나 광업 등 산업적으로는 개발이 힘들고 수송비가 너무 비싸 경쟁력이 낮다. 그래서 광대한 국토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있는 얼마 안되는 평지에 몰려 있는 대도시에 바글바글 모여 살아 도시 인구밀도가 엄청 높다.

공업

브라질의 엠브라에르는 전 세계 중소형 여객기 시장을 캐나다의 봄바르디어와 함께 양분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땅은 넓은데 길 닦기가 좋지 않은 곳이 많은 동네이다 보니 지역항공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확보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중소형 여객기 제작사가 크게 자랄 수 있었다. 그 외에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노동력이라는 이점으로 유치한 다국적 기업들이 자동차, 철강, 조선 등의 중공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광업

브라질 개발 초기에는 금과 다이아몬드가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돌아 유럽에서 한탕 노리고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론 별로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크고 아름다운 국토에는 많은 다른 지하자원이 묻혀 있다. 특히 미나스제라이스는 주 이름에 광물을 포함시켰을 정도로 광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철 생산이 세계적이다. 석유는 대서양의 해저유전에 상당한 양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를 브라질 최대의 기업으로 키울 정도로 석유 개발에도 의욕적이다.

2019년에 북동부 세르지피 주에 속한 대서양 연안에서 6개 천연가스 유전을 발견했다고 한다.

농업

마토 그로소의 론도노폴리스의 콩 작물

브라질은 국토는 넓지만 열대 지역도 많고 넓은 국토 대부분이 교통이 불편하고 개발이 어려워서 농업에 적합한 지역의 비율은 높지 않아 다른 대농업국보다 불리한 형편으로 자유시장경제 시기를 맞이했었다. 북쪽은 아마존 열대우림이고 그 남쪽의 중부 사배너 평야도 강우량이 많다보니 산성이 매우 높고 척박해 토질이 좋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면 수십년간 토질개량이 필요해 농업이 어려웠다. 동부와 동부 해안 대부분은 산세가 험해 평야가 거의 없다. 파라과이에 가까운 남서부 내륙고원의 평야는 아열대 지역 치고는 서늘하고 강수량도 적어 농사에 적합하지만 교통이 불편했다. 그래서 70년대 이전에는 농업생산이 부진해 아르헨티나 등 이웃나라에서 식량을 수입하던 국가였지만 중서부와 남서부 평야를 대규모로 개척해 현재의 농업대국으로 올라섰다.

세하두라 불리는,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 주변의 중서부 내륙 평야는 원래 토질이 대단히 척박하고 남서부 내륙고원의 평야는 교통이 불편했지만 넓이 자체가 워낙 넓다보니 대규모 개척으로 세계적인 농업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해변과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서 농지 개발이 쉽지않고 농산물 수송은 서쪽 국경을 건너 리오그란데 강을 거쳐야 하는 약점이 있었지만 전세계에서 농업 이민과 농업 투자을 받아들여 기업농의 대규모 투자로 개척하고 있다. 초거대 대규모 농업기업들이 인프라를 투자하고, 장기간에 걸쳐 석회석과 인회석 등을 객토하고, 수자원을 끌어오는 대공사를 수십년간 반복하여 토질을 개선해 농지를 개척하고 척박한 땅에 잘자라고 국제수요가 많은 콩 등 냉온대성 작물을 품종을 개량해 재배해 수출하고 있다. 자영농이 아닌 기업농 중심이라 브라질의 빈부격차에 일조를 하고 있다.

브라질은 중국,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대 농업국가 중 하나이자, 수출에서는 그들을 넘어선다고 평가되는 세계 최고의 농업수출 패권국가이다. 넓은 열대기후 지역이 포함된 나라로 크고 아름다운 국토에서 다량의 열대 작물을 생산해낸다.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농산물로는 열대 고원지역에서 잘자라는 커피가 꼽힌다. 세계 1위의 커피 생산국으로서, 커피의 기준 가격은 브라질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설정된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커피로 유명한 국가이다. 워낙 생산량이 많고 품질이 균일한 편이라 브랜드 커피를 만들 때 원료로 많이 들어가지만, 산토스나 세하도 등 특정 농장의 커피의 경우 상당히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밝고 균형잡힌 맛이지만, 커피 특유의 향이 진한 편이다.

국제 커피시장에서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60년대에 희한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커피가 대풍작을 이뤄 경제는 크게 성장했지만, 비탄력적인 재화인 커피의 시장가격이 대폭락하면서 오히려 국민들의 삶이 궁핍해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쌀 생산량은 20세기까지 브라질의 괴물같은 농업생산량에 비해 적었던 적이 있어 종종 흉년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쌀이 수입되어 쌀값 혼란이 있던 적도 있지만, 상술된 농지개발로 21세기부터는 쌀 역시 안정적으로 생산되어 미국에게 경제제재를 받는 베네수엘라를 돕기까지 할 정도이다. 베네수엘라의 석유가 미국의 위협으로 대량 수요국에게 수출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이를 인접국 브라질이 석유를 쌀과 바꿔주는 수준의 무역을 해서 브라질의 수요 이상으로 대량 수입한 다음, 이를 중국에 팔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도 어느정도 컸지만 미국의 경제제재 이후 베네수엘라의 브라질 경제의존도는 엄청나게 커졌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사탕수수는 커피가 뜨기 전에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작물이었다가 카리브해 지역에 그 주도권을 넘겨주기는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사탕수수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사탕수수를 바이오 에탄올에 활용하기 위해 생산을 더욱 늘리려고 한다.

과일은 좀 부진한 편이지만, 오렌지는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그래서 델몬트 관계자가 브라질까지 직접 가서 따봉이라는 말을 남기고 왔다. 대표적인 열대과일인 바나나 생산량은 세계 5위권이다.

콩 생산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본격 콩라인 그리고 수출은 세계 최대라고 한다. 식객에서도 나오는데 중국이 브라질 콩을 엄청나게 수입해오는 실정이라 브라질 눈치를 많이 볼 정도라고 한다.(중국이 콩 섭취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돼지고기 소비가 늘며 그 사료인 콩 소모도 늘었기 때문) 브라질은 가축 사육도 최근 엄청나게 늘리려고 하기 때문에 사료로 쓰는 콩 생산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세계적인 목축국이기도 하다. 특히 쇠고기 생산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1, 2위를 다투고 닭고기와 돼지고기는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생산국이다. 한국에는 호주산 쇠고기가 유명한 것에 비해 브라질 쇠고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브라질은 호주와 함께 세계 최대의 쇠고기 생산국과 수출국 자리를 다투는 나라이다. 광우병 걱정 없는 안전한 쇠고기라고 홍보하고 있었으나, 2012년 12월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브라질도 넓은 목장에서 풀을 먹여 소를 키운다. 특히 아직 개발이 덜 된 중서부 지방을 대대적으로 개척하여 소를 방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환경 파괴를 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지만 "우리 땅 우리가 개발한다는데 알 게 뭐야."라는 게 브라질의 태도.

돼지고기는 구제역 때문에 한국에 수입되지 않으나, 닭고기는 한국에 상당한 양이 수입되고 있다. 주한미군에서 병영식으로 지급되는 닭고기 상당수가 브라질산이다. 지구 반바퀴를 도는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부패의 위험이 없게 닭의 뼈 부분을 발라낸 정육, 즉 순살 부분을 냉동해서 수출한다, 그래서 뼈 없는 치킨과 가격이 같은 순살치킨이나 닭강정쪽에 매우 많은데 순살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산 뼈 있는 닭고기보다 싸다보니 애용한다. 그러나 냉동이라는 특성과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수입산인지라 대체적으로 순살인데 맛보다는 싼 맛으로 먹는다라는 평이 많은편.

2019년 농산물 수확량 역대 2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이 5년 안에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출국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브라질의 새 농지개발의 포텐셜이 미국보다 큰 것은 팩트이기에, 일부 전문가들쪽에서 과거부터 쭉 그런 의견이 나왔던 것이긴 한데, 하필 이후 브라질 경제가 코로나 19 사태로 큰 혼돈에 빠져 있고 코로나 변수를 생각 못하고 그전까지 농업 생산 증가량과 농지개발속도만 보고 연구 진행한 결과이니, 추가 농지개발이 예정대로 잘 이루어지고 경제회복도 잘 되어 그 목표가 이루어질지는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무역

2019년 기준, 브라질의 주요 수출대상국으로 1위는 중국, 2위 미국, 3위 네덜란드, 4위 아르헨티나, 5위 일본이며 우리나라는 10위를 기록하였다. 주요 수입대상국은 1위 중국, 2위 미국, 3위 아르헨티나, 4위 독일, 그리고 5위는 우리나라로 나타났다. 브라질은 2021년 기준으로 세계 24위의 수출국이자 26위의 수입국이다. 식품업계에서 브라질은 2019년 세계 2위의 가공식품 수출국이 되었다.

2019년 6월, 유럽연합(EU)과 메르코수르(Mercosur)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합의하였다. 또한 2019년 3월 브라질과 멕시코 간 자동차분야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서 자동차 및 부품 수출입에 대해 관세가 면제된다. 보우소나루(Bolsonaro) 정부 하 통상정책 기조는 시장개방, 무역협정 체결 및 관세인하에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다. 양자 및 다자간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수출 확대 및 해외투자유치를 촉진시키려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에너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파라나 강에 있는 이타이푸 댐
브라질은 세계 7위 풍력 에너지 생산국

브라질은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에너지 소비국이며 대부분의 에너지는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특히 수력과 에탄올로부터 얻는다. 이타이푸 댐은 세계 최대의 수력 발전소이며 그 외에 벨로몬테(Belo Monte) 및 투쿠루이 댐과 같은 다른 대형 발전소가 있다. 에탄올 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자동차는 1978년에 생산되었고 2005년에는 에탄올로 작동하는 최초의 항공기 엔진을 생산했다.

2021년 말 브라질은 설치된 수력(109.4GW) 및 바이오매스(15.8GW) 분야에서 세계 2위, 풍력(21.1GW)은 세계 7위, 태양광(13.0GW)은 세계 14위이다. 2021년 말 브라질은 중국,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4위(72TWh)의 풍력 에너지 생산국이 되었고, 세계 11위 태양 에너지 생산국(16.8TWh)이 되었다.

운송교통

브라질은 고속도로가 발달하였고 철도는 다른 국가 및 다른 운송수단에 비해 그 비중이 낮다. 광활한 국토로 인해 항공운송 또한 매우 발달했고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가 대중화됨에 따라 브라질의 고속도로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화물 수송 및 여객의 85%가 육상수송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버스 또한 중요한 교통수단이며 침대, 화장실, 냉방시설을 완비한 장거리 버스 노선이 브라질 전역을 운행한다. 국내뿐 아니라 인근 국가인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로도 장거리 버스 노선이 운행된다.

브라질 철도는 총 12개의 노선 29,075km이며 광활한 국토에 비해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못했다. 철도 노선 대부분이 주로 해안지역을 운행하고 있다.

인문사회

인구구성과 민족

브라질의 인구는 2019년 기준 211,049,527명으로, 라틴아메리카 최대 규모이자 전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다. 브라질은 대표적인 다민족, 다인종 국가이다. 2017년 기준, 브라질의 백인 인구는 전체의 44.2%로, 물라토(mulato)의 46.7%보다 낮으며, 흑인은 8.2%, 그리고 아시안 및 원주민이 나머지를 구성한다. 브라질 인종 구분의 한 가지 특징은 미국의 경우 혈통을 기준으로 인종을 분류하는 반면, 브라질은 피부색과 같은 개인적 주관에 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혼혈이라 하더라도 피부색이 밝은 편에 속한다면 백인으로 본다.

브라질은 그 광대한 영토 만큼이나 지역적으로 인종적 특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브라질의 남부지역은 유럽 이민의 후손들이 주로 거주하며, 독일계, 네덜란드계, 이탈리아계, 스페인계, 포르투갈계, 프랑스계 등의 백인 비율이 높다. 반면 북동부 지역은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노예무역을 통해 들어온 아프리카계 후손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아시아인의 경우 일본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며, 그 이외에는 중국계, 한국계 등이 있다. 중동, 서남아시아에서 이주한 레바논계, 시리아계 후손들도 다수 존재하며, 이들은 주로 피부색에 따라 백인으로 분류된다.

브라질의 인종과 민족성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혼합성을 꼽을 수 있다. 1500년 4월 22일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에 의해 브라질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인디언, 유럽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가 인종의 도가니 속에서 혼합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 아내를 맞아들이며 까보클루(caboclo)라고 하는 새로운 인종을 만들었고, 이후 포르투갈계 백인과 아프리카계 여성 사이의 물라토라는 혼혈을 탄생시켰다. 현재 물라토(mulato)는 브라질 혼혈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수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해 현재 브라질 인종 구성에 있어 다수를 유지하고 있다.

언어

상파울루 포르투갈어 박물관

브라질의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며, 과거 포르투갈에 의한 식민 지배를 경험하여 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다. 포르투갈어는 사용자 수 기준 세계 6대 언어이며 유럽연합(EU), 메르코수르(Mercosul), 미주기구(OAS), 아프리카연합(AU), 포르투갈어 사용국공동체(CPLP) 등의 국제기구에서 공용어 및 실무어로 사용되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브라질인들은 영어와 프랑스어의 사용이 가능하나, 일반 브라질인들은 포르투갈어만 구사한다. 스페인과 문법체계 및 단어가 매우 유사하여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국민이 스페인어를 이해할 수 있다.

타 언어와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어도 다른 언어들 및 방언에 영향을 받으며 역사적인 진화과정을 거쳐 왔다. 현재 브라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는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로, 이는 유럽식 포르투갈어와 음운, 단어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는 브라질식 포르투갈어가 원주민 언어인 투피어(tupi),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통해 브라질에 건너온 아프리카어,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넘어온 수많은 이민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의 영향으로 인해 유럽식 포르투갈어와 구분되는 브라질식 포르투갈어가 만들어졌다.

현재 브라질의 포르투갈어에는 투피어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약 만 개의 투피어 단어가 포르투갈어에 잔존한다. 대표적으로 세계 3대 폭포로 유명한 이구아수(Iguaçu)도 투피어이다. 또한 아프리카어가 포르투갈어에 끼친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아프리카어 중 킴분도(quimbundo)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가장 많이 구사하던 언어로, 이로 인해 종교의식, 음식명, 악기명 등 일상생활 속 포르투갈어 어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삼바 또한 아프리카어이다.

종교

브라질의 종교는 2017년 기준 로마 가톨릭(55%), 개신교(27%) 및 그 외 기타(18%)로 구성되어 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 초기 브라질에 건너온 예수회 회원들의 교화와 헌신에 의해 현재까지 사회문화 곳곳에 가톨릭이 깊숙이 침투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복음주의(Evangelical), 조합교회(Christian Congregation), 오순절파(Pentecostal)와 같은 신교의 확산과 함께 아프리카 흑인 종교와 원주민 토속신앙 등의 영향력으로 인해 가톨릭 세력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또한 원주민의 전통과 흑인의 종교적 요소가 가톨릭과 혼종화되어 등장한 움반다(Umbanda), 칸돔블레와 같은 브라질 특유의 아프리카계 종교도 존재한다.

오늘날 브라질 가톨릭의 위상 약화는 사회적 불평등 구조에 기인한다. 가난과 고통에 빠진 브라질 사람들은 해방신학뿐 아니라 인간을 위로해 주는 힘을 가진 아프리카계 종교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이후 주 종교로 브라질의 사회, 문화 및 정치를 지배해 온 가톨릭은 여전히 브라질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종교이다.

교육

Curitiba에 위치한 브라질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하나인 파라나 연방대학교 역사적인 건물

브라질에 최초로 세워진 교육기관은 포르투갈 식민시절 예수회학교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엄격한 교육제도를 바탕으로 역사, 철학, 신학 등을 가르쳤다. 당시 예수회학교의 주요 목적은 가톨릭 선교 및 성직자 양성, 식민 통치를 위한 지도자 양성 등이었다.

교육 개혁은 1934년 제툴리우 바르가스 재임 당시 개정된 헌법에서 문맹 퇴치 및 초등교육을 위한 국가의 의무를 명시하면서 이루어졌다. 현재의 교육제도는 모든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초등교육을 보장한다. 이는 1996년 12월에 승인된 ‘국가 교육의 지도와 근본에 관한 법(Lei de Diretrizes e Bases da Educacao Nacional)’에 명시되어 있다. 이 법에 따라 브라질의 교육 시스템은 기본교육과 대학교육으로 나뉜다. 기본교육은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한 유아교육, 우리나라의 초등 및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초등교육,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개념인 중등교육, 이렇게 세 단계로 나뉜다. 대학교육은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 외에도 기술교육 및 직업훈련을 위해 각 주 및 시가 담당하는 기술교육과정이 있고, 장애인 교육을 담당하는 특별교육과정 또한 존재한다. 브라질은 2001년 '교육에 관한 국가계획(Plano Nacional da Educacao)'을 발표하며 교육정책 발전을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문맹 감소, 특별교육의 확대, 의무교육기간 9년 확대 등의 방안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연방헌법과 국가교육지침 및 기본법에 따르면 연방, 주, 연방구 및 자치단체가 각각의 교육시스템을 관리하고 조직해야 한다.이러한 각 공교육 시스템은 기금뿐만 아니라 메커니즘과 자금원을 관리하는 자체 유지보수를 책임진다. 헌법은 주 예산의 25%, 연방세 및 지방세의 18%를 교육비로 충당한다.

IBGE에 따르면 2019년 인구의 문맹률은 93.4%로 1130만명(인구 6.6%)이 여전히 문맹이며 리우데자네이루와 산타카타리나 같은 일부 주는 문맹률이 약 97%에 달하고 기능성 문맹률은 21.6%에 달했다.문맹은 인구의 13.87%가 문맹인 동북부가 더 높은 반면 남부 지역은은 3.3%가 문맹이다.

최근 2019 QS World University Ranking에 따르면 상파울루대학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우수한 대학교이다. 중남미 상위 20개 대학 중 8개 대학이 브라질 대학교이다. 대부분은 국립이다.

사회보장제도

콜로르(Collor) 대통령은 1988년 개정된 연방헌법에서 주창한 국가에 의한 사회권 보장, 사회권 보편화와는 반대로 공공복지 의무의 민영화와 최소국가의 실현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실시하였다. 1993년 사회보장법(Social Assistance Law)이 제정되며 지속적인 현금지급제도에 따라 빈곤층에게는 일정 수준의 생계를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Fernando Henrique Cardoso) 임기 내에서 더욱 더 힘을 얻었다.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를 기초로한 공공자산 민영화, 사회부조정책 부정, 사회정책 재정 축소 등으로 회귀하였다.

2003년 취임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이미 중남미 지역에서 패권을 장악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는 유지하되, 소득이전제도를 통하여 빈곤층의 소비력을 진작시킴으로써 사회통합을 실현하려 했다. 특히 룰라 대통령은 ‘보우사 파밀리아 프로그램(Bolsa Familia Transfer Program)’과 ‘포미 제로(Fome Zero)’ 정책을 통해 극심한 기아와 빈곤 해결을 위한 사회보장정책을 마련하였다.

룰라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2007~2010년)에 들어서 브라질의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사회보장정책을 더욱 확대 실시하게 된다. 특히 ‘보우사 파밀리아 프로그램(Bolsa Familia Transfer Program)’의 수혜 대상을 확대하여 1,200만 이상의 저소득층 가구가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룰라 대통령 임기 내 약 2,800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고 또한 3,600만명의 인구가 중산층으로 새로이 편입되었으며, 절대빈곤층 비율은 8.5%로 감소하였다.

2011년 룰라에 이어 브라질 대통령에 취임한 지우마 호세프는 첫 대국민 연설을 통해 ‘빈곤 없는 부국 건설’을 슬로건으로 제시하였으며, 빈곤 퇴치를 최우선 국정 과제로 상정하였다. 하지만 2016년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 이후 등장한 테메르(Temer) 정부는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사회보장개혁을 추진하였다.

브라질은 현재 여전히 기아로 허덕이는 인구가 상당수이다. 2021년 기준 브라질 인구의 15.5%에 해당하는 3,310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는 2014년부터 지속되어 온 경제위기 악화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증가 및 2020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에 기인한다.

문화

세계 최대 카니발인 리우 카니발 포르텔라삼바학교 퍼레이드

브라질의 핵심 문화는 포르투갈 문화에서 건너왔는데, 이는 포르투갈이 브라질 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상당히 오랫동안 지배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에 포르투갈어, 로마 가톨릭, 식민지 건축양식 등을 소개하였다. 그 외에도 브라질 문화는 아프리카 문화에도 큰 영향을 받았으며, 수많은 교류로 인하여 포르투갈을 제외한 스페인, 영국, 프랑스의 영향도 받았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독일, 일본, 유대인, 아랍 이민자들이 19세기 즈음에 브라질로 쏟아져 들어오며 문화적 교류를 하였고, 토착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도 섞여들어 언어와 음식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언어, 요리, 음악, 춤, 종교 등에 영향을 주었다. 브라질 예술은 16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초까지는 바로크 양식이 우세하였다. 이후 낭만주의, 모더니즘, 표현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의 순으로 발전하였다. 브라질의 영화계는 19세기 후반에 미디어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로 거슬러올라가며, 196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브라질 문화는 인디오라는 투피 과라니계의 원주민과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이민자 등이 유입되어 만들어낸 다양한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평가를 받는다. 예로부터 음악과 건축,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션이나 스포츠 선수, 예술가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광고 표현 등에서도 최근에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포르투갈의 문화와 브라질의 문화를 상징하는 말로 "사우다지"라는 말이 있다.

건축

연방 수도를 위해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가 설계한 브라질리아 대성당은 현대 건축의 한 예이다.

브라질 건축은 유럽 건축의 양식, 그중에서도 포르투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500년에 페드로 카브랄이 브라질에 도착한 이래, 브라질에서는 포르투갈 식민지 양식의 건물들이 대대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이후 몇 세기 동안 꾸준히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브라질 제국 시기동안, 브라질은 유럽의 최신 양식을 따라 신고전주의와 고딕복고양식을 받아들였다. 20세기에 이르자 본격적으로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들을 실험적으로 짓기 시작하였다.

브라질의 식민지 건축은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브라질을 발견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16세기 초에 거슬러올라간다. 포르투갈 정착자들은 유럽에서 자신들이 살던 건축물과 똑같은 건물들을 지어 브라질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교회, 성당, 요새 등을 다수 지어 자신들을 보호하였다. 19세기 동안 브라질 건축계에는 신고전주의와 고딕 복고양식이 들어왔고, 이 양식들이 브라질 고유 문화와 섞이며 브라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1950년대에는 브라질리아에 새로운 수도가 건설되며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수도의 설계사들은 정부 빌딩, 교회, 민간 건물들을 모두 모더니즘 양식의 깔끔한 분위기로 지었다.

음악

보사노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톰 조빔과 MPB의 대표주자 중 한 명인 치코 부아르케

브라질 음악은 유럽과 아프리카 음악이 섞여 만들어졌다. 19세기까지 포르투갈에서 유입된 음악들이 브라질 음악계를 장악하였다. 물론 모든 브라질 음악이 유럽 양식은 아니었으나, 거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럽 음악이 대세였던 것이다. 이후 아프리카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오며 아프리카의 풍부한 음색과 음악이 섞여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아프리카의 독특한 음악적 다양성과 리듬이 섞이면서 귀족 중심의 유럽 음악이 득세하던 브라질에서는 20세기부터 대중음악과 민속 음악들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중 음악은 18세기 후반부터 점차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특히 이때 시작된 삼바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이 들어와 만들어진 마라카투 춤과 아포세 춤은 점차 브라질 카니발을 통하여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운동인 카포에이라도 본디 카포에이라 음악이라고 불리는 고유한 음악과 함께 연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질에서 매우 유명한 음악 장르인 ‘초로’는 19세기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래하였는데, 빠르고 경쾌한 리듬을 기본으로 하며 즉흥적, 역동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보사 노바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급격히 발전하여 대중화된 브라질 음악 장르인데, '보사 노바'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새 유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보사 노바는 삼바와 재즈의 혼합으로, 196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팬들을 가지고 있다.

문학

브라질 문학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번째 포르투갈 탐험가들의 브라질에서 Pêro Vaz de Caminha 같은 글을 보면, 동물군, 식물군, 고유의 토착 인구의 해설 설명으로 가득차 유럽 독자들 매료시켰다. 브라질은 낭만 주의에 중요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소설가 Joaquim Manuel de Macedo와 José de Alencar처럼 사랑과 고통에 대해 소설을 썼다. Alencar는 그의 긴 경력에서 O Guarani, Iracema and Ubirajara 와 같은 현지우선주의 소설에서 원주민들을 영웅으로 다루었다. 중요한 작품을 만들었다. Machado de Assis는, 사실상 모든 장르의 비평가와 전 세계 국제적 위신을 얻길 위하여 계속해서 썼다.

현재 브라질 모더니즘은, 현대 미술의 금주에 의해 1922년에 경험했듯이 민족주의적 전위 문학과 함께 염려하고 있었다. 반면 Post-Modernism은 Cabral de Melo Neto, Carlos Drummond de Andrade, Vinicius de Moraes 같은 기업가들, Cora Coralina, Graciliano Ramos, Cecília Meireles 그리고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가인 Jorge Amado, João Guimarães Ros, Clarice Lispector와 Manuel Bandeira처럼 뚜렷한 시인들 중 한세대를 가져왔다.

축제 및 행사

브라질을 대표하는 축제로 리우 카니발(Carnaval do Rio de Janeiro)를 꼽을 수 있다. 매년 사순절을 앞둔 2월 말~3월 초에 약 4~5일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되는 삼바축제로서, 일본의 삿포로 눈 축제,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와 함께 세계 3대 축제로 손꼽힌다.

카니발은 리우데자네이루 외에도 상파울루, 사우바도르, 헤시페에서도 열리나, 리우 카니발이 가장 성대하게 개최되기 때문에 브라질을 대표하는 축제로 불리운다. 해마다 수치가 차이가 있기는 하나, 평균적으로 매년 리우 카니발 기간에 전 세계에서 6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으며 브라질 국내 관광객 또한 25만 명에 이른다.

스포츠

2016년 하계 올림픽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시상대에 올랐다.

브라질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스포츠 강국이다. 대표적인 인기 스포츠는 축구, 배구, F1과 브라질리언 주짓수(Brazilian Jiu-Jitsu)이며, 이 종목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특히 축구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스포츠이다. 브라질 문화의 한 요소라고 불리울만큼 축구는 브라질의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브라질인들은 생활의 즐거움을 축구에서 찾으며, 국가대표 경기뿐만 아니라 브라질 프로축구 리그에 대한 열광도 상상을 초월한다. 브라질 국내 리그에서는 '브라질 챔피언십(Campenato Brasileiro)'과 '브라질 컵(Copa do Brasil)' 뿐만 아니라 주 대항 축구대회가 개최된다.

브라질은 1958년 스위스 월드컵, 1962년 칠레 월드컵, 1970년 멕시코 월드컵, 1994년 미국 월드컵,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에서 우승하며 세계 최대 월드컵 우승국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또한 지난 1950년과 2014년 FIFA 월드컵을 국내에서 개최하였으며, 2016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음식

브라질식 페이조아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의 식사였다는 페이조아다와 목동의 고기 요리였던 슈하스쿠, 바이아 지방의 모케카, 바타바, 카루루, 미나스 지방 투투 아 미네이라 이외에 또 러시아 계열의 요리인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브라질 풍으로 융합되었다. 브라질 풍의 크로켓인 코시냐나 아랍계의 키비, 파스테우(브라질 풍의 튀김 만두) 등 풍부한 고기와 야채, 해산물을 기본으로 한 브라질 요리를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다. 남부 세 국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라플라타 주와 문화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과라니인들에게서 유래된 마테를 마시는 전통이 있다. 또한, 유럽 등에서 온 이민지들과 20세기 이후 일본인을 비롯한 아시아 이민자 등 다양한 인종이 융합되어 도시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와 독일 요리, 중국 요리와 일본 요리 등 다양한 나라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이탈리아 요리 수준은 높게 평가받고 있다. 주로 독일계 이민자들이 가져온 맥주를 생산, 수출하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브라질에서 가열 처리한 세르베자 외에도 생맥주를 매우 선호하지만, 맥주 브랜드도 상당수가 있다.

브라질의 음식들은 지역마다 모두 지방색이 달라 매우 독특한데, 특히 여러 토착민들과 이민자들이 어우러져 자신들만의 음식들을 재창조해낸 것이다.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국민 음식들 중 하나는 페이조아다로, 돼지고기나 쇠고기 등을 넣어만든 전통 스튜와 비슷하다. 그 외에도 지역적인 특색요리에는 빵과 새우 등을 이용한 바타파, 해산물 스튜인 모쿠에카,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옥수수 요리 폴렌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콩 튀김요리인 아카라제 등이 유명하다. 브라질 국민들은 사탕수수 즙을 발효시켜 만든 술인 카샤사를 즐겨 마신다. 카샤사는 국민 칵테일인 카이피리냐의 원재료이기도 하다. 브라질인들의 주식은 대부분 쌀과 콩, 쇠고기, 샐러드, 프렌치프라이와 계란 등이다. 보통 카사바 가루, 튀긴 감자, 튀긴 카사바, 튀긴 바나나, 튀긴 고기, 치즈 등과 함께 점심에 먹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도 이 재료들을 사용하여 요리를 제공한다. 유명한 간식으로는 튀긴 파스트리인 파스텔, 닭고기 크로켓과 비슷한 코친하, 카사바 가루와 치즈로 만든 치즈 빵, 레바논식 파스트리의 변종인 에스피라, 아랍 요리에서 건너온 키베, 크로켓과 비슷한 엠파나다, 새우 등으로 속을 채운 소금 파이 등이 있다. 브라질은 풍부한 디저트 문화로도 유명한데, 특히 초콜릿 퍼지, 롤케이크, 코코넛 음료, 코코넛 트러플 등이 유명하다. 땅콩도 주로 쓰이는 디저트 재료로, 땅콩 캔디인 파코카, 사탕수수를 굳힌 라파두라, 전통 사탕인 페-데-몰레케 등을 만들 때 쓰인다. 사람들이 주로 먹는 과일들에는 망고, 파파야, 코코아, 캐슈넛, 구아바, 오렌지, 라임, 패션프루트, 파인애플 등이 있으며, 주로 주스로 먹으나 초콜릿, 아이스팝, 혹은 아이스크림으로도 만들어먹는다.또한 기후가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지역마다 먹는 음식이 다르다.

극장

브라질의 극장들은 16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포교의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극장들을 대대적으로 세우며 시작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들어서는 점차 이 극장들이 발전을 거듭하였고, 유럽의 배우들이 건너와 왕실, 혹은 상류층들을 위해 공연을 펼쳤다. 19세기에는 극본가 루이스 카를로스 마르틴스 페나가 나타나 동시대의 사회를 비판하고 사람들의 삶을 잘 표현하면서 극장계를 크게 진흥시켰다. 이 당시에는 주로 의상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으며, 극본도 재치있거나 풍자조의 문체로 많이 썼다. 페나 외에도 안토니아 곤칼베스 디아스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19세기에 극장의 발전과 함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도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브라질의 연출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고메스는 ‘일 구아라니’와 같은 오페라 작품들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세기 말, 오케스트라 형식의 극장들은 매우 대중화되었으며, 치킨하 곤자가 등의 작곡가들이 등장하며 매우 아름다운 곡들을 남겼다.

20세기 초에 브라질에서는 수많은 극장들, 사업가들, 배우들이 활동하였으나, 역설적으로 무대의 질 자체는 갈수록 떨어졌다. 그러던 중 1940년대에 들어서야 브라질 극장은 부흥기를 맞았으며, 이탈리아와 유럽의 배우들이 들어와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질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는 점차 사회적, 종교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하였으며, 정식으로 배우 학교들이 세워지며 배우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에는 아리아노 수아수나 등이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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