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론
주기론(主氣論)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양대 학파 가운데 하나이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성리학에서, 우주 만물의 존재 근원을 '기'(氣)로 보는 이이(李珥)의 학설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철학을 가리킨다. 즉 '기'(氣)만이 능동성을 가지고 발동할 수 있으므로 모든 현상은 기가 움직이는 데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이'(理)는 단순히 기를 주재하는 보편적 원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1][2]
개요[편집]
주기론은 '심즉기'(心卽氣)를 주장하는 이이가 '기발설'(氣發說)을 옹호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2대 분파 중의 하나이다. 조선왕조 성리학계의 일찍이 주기론을 주창한 것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이었다. 그후 얼마 동안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이와 그를 이은 율곡학파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공격하자 퇴계학파는 이기호발설을 옹호하며 율곡학파를 '주기파'(主氣派)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율곡학파도 이기호발설을 공격하며 자파의 이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보는 입장이 선명해져서 마지막에는 주기설을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리하여 이이는 최초로 '심시기'(心是氣)라는 말을 사용했다. 곧 이이는 '심(心)의 주된 작용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지각'(知覺)에 있으며, 이 지각은 이가 아니라 기에 속하는 것'이라 하여 '심시기'라고 하였다. 그후에 송시열은 이이의 해석을 따라 '심의 허령은 분명히 기'라고 하였고, 한원진(韓元震)은 '성(性)과 심을 구별하여 성이 이에 속한다고 한 이상 심은 기에 속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임성주(任聖周)는 '심즉기'가 진리일 뿐 아니라 심과 성은 둘이면서도 하나이므로 성도 기라는 입장을 취하고 우주나 심의 본체가 오로지 기 하나 뿐이라고 주장하여 주기론의 정점을 이루었다. 주기론에 속하는 학자는 임정주, 임성주(任靖周), 임노(任魯), 임헌회(任憲晦) 등이다.
이기일원론[편집]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은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기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離)'는 말로 정리한다.
존재의 본질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이를 중시해야 하므로 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고, 현실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천철학에서는 기를 중시해야 하므로 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고 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적 주장을 거부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강화하였고, 청나라 때의 학자 대진(戴震)은 '이는 기의 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명언함으로써 이의 초월성과 불변성을 부정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었다. 서경덕(徐敬德)은 '기 밖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李珥)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기일원론적 입장에 비중을 두었다.[3]
특징[편집]
주기론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에서 '이'와 '기'를 일원적으로 파악하고 기의 작용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주기'라는 말은 이황이 기대승과 '4단7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을 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주기론은 이이가 성혼과 '4단7정'에 관해 토론할 때 이황의 '이'와 '기'가 서로 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 특히 '이'가 작용한다는 부분을 비판하고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한 데서 출발한다. 이이의 견해는 '이'와 '기'가 실제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주리론과는 구분되지만, 이를 보편적인 근원으로 인정하는 점에서 주기론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이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 학자들 속에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계승하면서 점차 이에 비해 기의 작용을 강조하는 주기론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은 치밀한 이론으로 이황의 견해, 즉 마음을 이와 기의 결합으로 보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을 기라 하는 이이의 '심시기'(心是氣)를 옹호했다. 이것이 권상하(權尙夏)를 거쳐 한원진(韓元震)에 이르면, '심즉기(心卽氣)'로 변화하여 기의 작용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다음 세대의 임성주(任聖周)는 마음뿐만 아니라 성품까지도 기로 파악하는 유기론(唯氣論)으로 발전하고, 주자(朱子)의 이기론까지도 반박하는 극단적인 주기론에 이른다. 이후 임로(任魯), 임헌회(任憲晦)로 이어졌다. 주기론은 주리론과 조선 후기 내내 학문적, 정치적으로 대립, 발전했으며 정치 및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람의 의식이나 감정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심성 내부에 존재하는 기가 동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심성 내부의 기질을 선한 것으로 변화시키면 자연히 인간의 선한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심성론'(心性論)의 주요 논제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설명함에 있어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가 발동하여 된 것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측면만을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념적 윤리보다 실천적 윤리를 중시하는 이 견해는 서경덕(徐敬德)에서 비롯되어 이이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4]
주기론과 주리론[편집]
조선시대에는 성리학(性理學)이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 되는 주류 사상이었다. 성리학(性理學)은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중심 원리로 보고 우주와 자연, 인간, 사회의 존재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는 기본 이론체계이다.
성리학에서 '이'(理)와 '기'(氣)의 상호관계를 '이기불상리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이라고 설명하는데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세계관을 두고 이퇴계와 이율곡은 학문적으로 논쟁하였다.
이퇴계는 이율곡보다 35년 연상이었다. 이퇴계는 '이'(理)를 중시한 이념 중심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고 이율곡은 현실 중심의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였다.
이퇴계는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理)가 작용한 결과로 보았다.
즉, 남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거짓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을 축약해서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한다. 이퇴계는 이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이 이(理)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사람의 감정인 칠정(七情)은 '기'(氣)의 작용으로 보았다. 사람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희(喜), 로(怒), 애(愛), 락(樂), 애(哀), 오(惡), 욕(慾)의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일어난다고 보아서 기를 더 중요하게 본 것이다.
이퇴계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은 사람의 근본으로 지극한 선(善)이며 희(喜), 로(怒), 애(愛), 락(樂), 애(哀), 오(惡), 욕(慾)하는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은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퇴계는 우주의 기본원리인 이(理)를 중시하였으므로 이를 이념 중심의 주리론(主理論)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율곡은 이 세계의 일체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고, 그 형태는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고 표현하여 '기'(氣)가 발하면 '기'(氣) 위에 '이'(理)가 올라타 있는 상하의 구조로 보았다.
이율곡은 발하는 것은 '기'(氣)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理)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 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칠정이 생기고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것만을 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율곡은 당파(黨派)간 갈등이 국정을 혼란하게 한다고 보고 지나친 정쟁을 완화시키려고 노력 하였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정쟁을 조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인과 서인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은 모두 천재로 태어났다. 이퇴계는 6살 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논어'를 공부하였으며 19세 때 '성리대전'을 통독하고 이해하였다. 20세에 '주역'을 연구하였으며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에 요즘으로 치면 대학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퇴계는 정삼품 당상관인 부제학에 오르고,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며 67세에 예조판서에 임명 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그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율곡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는데 3세에 이미 글을 깨우쳤고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으며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어서 문필가의 뛰어난 소양을 보여주었다.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 15세 때에는 유교 경서와 다른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묘막에서 불교 서적을 읽고 3년상이 끝난 19세에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입산 1년 만에 환속하여 다시 성리학을 탐독하였다. 이율곡은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9번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이율곡은 평생동안 대사간을 9번이나 역임하고 결국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동인에 속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서인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율곡은 동인, 서인이 모두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들이므로 시국관, 환경, 의견의 차이, 개인의 사상, 관점 차이가 다를 수 있으므로 지나치게 비생산적인 논쟁을 중단하고, 같이 조정에서 생산적으로 국사와 민생문제를 논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동인과 서인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서 이율곡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율곡이 말하였듯이 사람들의 시국관, 환경, 의견의 차이, 개인의 사상, 관점 차이가 다를 수 있다. 다름을 존중하는 풍토위에서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리론에서 이타적인 사람의 선한 본성을 중시하였듯이 주기론에서도 사람의 선한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근원적인 출발점에 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들이 선한 본성으로 살게 하고 선한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한마음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5]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주기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주기파〉, 《위키백과》
- ↑ 〈이기일원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주기론(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 김성훈 수필가, 〈김성훈 칼럼(12)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 《뉴스N제주》, 2020-06-24
참고자료[편집]
- 〈주기파〉, 《위키백과》
- 〈주기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이기일원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주기론(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김성훈 수필가, 〈김성훈 칼럼(12)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 《뉴스N제주》, 2020-06-24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