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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게임

해시넷
sykang001215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7월 29일 (수) 14: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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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게임(video game)는 사용자의 입력, 조작에 따라 컴퓨터게임기비디오 기술을 이용하여 글자그림, 소리 등 과정이나 결과를 출력하는 게임이다.

개요

실제로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의 내부 세계에 참여하고 그 형태를 조작할 수 있다. 게임은 특정한 체계(system)와 규칙(rule), 그리고 목적(objective)이 있어야 성립된다. 그 목표는 적 섬멸, 스테이지 클리어, 공주 구출, 특정 아이템 획득, 게임 세계관 알아내기 등 탐험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경쟁을 통해 남보다 뛰어난 플레이어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장애물이 존재하는데, 그 장애물의 난이도가 플레이어를 지루하게 만들거나, 포기하게 만들거나, 즐기게 하거나의 여부가 갈린다.

장르

비디오 게임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장르가 있다.

  • 롤플레잉 게임 (RPG)
  • 액션 게임
  • 대전형 격투 게임
  • 슈팅 게임
  • 어드벤처 게임
  • 시뮬레이션 게임
  • 스포츠 게임
  • 레이스 게임
  • 퍼즐 게임
  • 테이블 게임
  • 퀴즈 게임
  • 온라인 게임
  • 소셜 게임
  • 예술 형식으로서의 비디오 게임
  • 아트 게임

특징

  • 비디오 게임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인공지능이다. 비디오 게임에 등장한 적들의 움직임이 바로 원시적인 인공지능인 셈이다.
  • 비디오 게임은 현대 인류가 가장 많이 즐기는 여가 활동이다.
  •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임의로 연산된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으로 재미를 제공하며 일련의 학습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디지털의 특성상 널리 배포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교육이나 선전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역사

1940~1960년대

1947년 미국에서 텔레비전 기술자로 일하던 토머스 골드스미스와 에슬 레이 맨이라는 사람은 특허청에 '음극관 놀이 장치를 제출하는데, 이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미사일을 여러개의 손잡이로 제어하여 목표를 맞추는 간단한 방식의 게임 구동기였으며, 슈퍼컴퓨터 님로드(NIMROD)를 통해 플레이 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그러나 NIM은 디스플레이로 화면을 출력하는 방식이 아니었던 데다가 놀이보다는 군사용 프로그램적인 성향이 강했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최초의 게임으로 보고있지는 않는다.

이후 195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였던 알렉산더 더글러스라는 사람이 박사 학위논문의 실례로써 틱택토를 컴퓨터상으로 구현한 게임을 개발했지만, 게임 개발보다는 연구 목적을 바탕으로 두고 만든 게임이라 유유히 잊혀졌다.

역사상에 등장한 최초의 비디오 게임은 1958년 윌리엄 히긴보섬이라는 사람이 만든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로 알려져있다. 이 게임의 개발 목적은 자신의 연구소를 방문하던 손님들이 지루해하는 것을 보고 연구소에서 신호 계측에 사용하던 5인치 아날로그 오시로스코프에 간단한 회로와 간이 조종기를 연결하여 전시하려했다는 것이다. 지금 보면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정도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신선하고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며 연구소에서는 연구자의 발명품에 특허를 취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히긴보섬은 다른 개발에 대한 특허는 취득하였으나 게임에 대한 특허는 취득신청을 하지 않았는데, 이 결정이 훗날 게임 개발 시장에서 자칫 저작권 분쟁으로 일어날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유로운 인디 게임 개발환경의 구축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1972년은 게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던 해로, 우선 미국의 군수품 업체 소속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였던 랠프 헨리 베어는 TV에 추가장치를 달아 게임 시스템을 구현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되고, 시제품 제작에 착수하여 1968년 비디오 콘솔의 첫 프로토타입인 '브라운 박스(Brown Box)'를 개발하게 된다. 이를 눈여겨 본 마그나복스 사는 1972년 '오디세이'라는 이름으로 브라운 박스를 가정용 게임기로 상용화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이자 1세대 콘솔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로, 현재 게임의 역사에서 첫 번째 게임기로써 화자되는 기기이다. 이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당시 약 100달러 정도의 고가로 판매되었으며, 마그나복스의 대리점에서만 파는 소극적인 마케팅으로 인해 고객들은 오디세이가 마그나복스의 텔레비전에서만 작동된다고 생각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마그나복스가 게임기에 텔레비전을 끼워 팔아먹으려는 상술로 비춰지게 되었다. 이러한 마케팅 작전의 결과 마그나복스오디세이의 최종 판매 집계는 약 33만 대 정도의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고, 해당 게임기는 1975년에 단종하게 된다.

그 이후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생산을 종료한 뒤에도 아타리와 콜레코, 액티비전 등과 같은 회사들에게 특허 소송을 걸어 승소함으로써 게임에 대한 저작권의 개념을 확립하는데 일조하였다.

또한 1972년 놀런 부슈널이 게임 제작사 아타리를 설립하고, 곧이어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으로 기록된 퐁(PONG)을 출시하여 엄청난 판매고를올린 한해이기도했다. 퐁은 탁구를 모방한 2인 전용의 게임으로, '화면 상단에 점수계산 표시'시스템이 적용되어있었다. 같은 시기에 이미 비디오 게임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있었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개발자 랠프 베어가 퐁이 마그나복스사의 몇몇 게임들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아타리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부슈널은 그 특허를 70만 달러에 사겠다하였고, 베어는 게임 열풍이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부슈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하였다.

1980년대

1983년, 게임계 최대의 절망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게임 산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너나 할 거 없이 게임 산업에 뛰어들어 저퀄리티 게임들과 콘솔들을 양산하여 시장에 물량을 부어넣은 결과 소비자들의 불만이 터져버렸다. 소비자들의 불만이 많아지면서 게임에 대한 신뢰와 게임 산업의 시장 기반을 망가뜨리게 된 사건이다.

이렇게 게임 시장이 망하는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현재까지도 게임기를 개발하고있는 닌텐도세가가 이 시기에 게임시장에 뛰어들어 혁신적인 시도에 많이 도전함으로써 가까스로 게임 시장은 살아날 수 있었다. 이때 나온 게임 중 대표작이 바로 갤러그, 스트리트 파이터, 더블 드래곤이다. 게임 산업 부활의 시작은 바로 1983년 7월 15일, 일본의 닌텐도가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한 사건이었다. 출시한 게임기의 정식 명칭은 '패밀리 컴퓨터(Family Computer)'였으며 이후 패미컴으로 불리게 된다. 1883년 화투 및 트럼프 제작으로 시작해 장난감 회사로써 성장하던 닌텐도는 급변하는 시대상에 맞추어 전자오락 산업의 성장성에 주목하고, 패미컴을 선두로 게임시장에 야심차게 진출하였으나 마침 아타리가 망쳐놓은 게임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소비자들 입장에서 게임에 대한 여론은 영 좋지 못한 편이었다. 아타리 쇼크의 영향으로 당시 세간에 "비디오 게임은 해악"이라는 인식에 맞서, 닌텐도는 미국시장을 겨냥해 패미컴의 상표명을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로 변경하고 캐릭터 등을 추가하여 아이들에게 친숙한 느낌이 들고 "건전"해보이는 인식을 심는 방향의 접근을 택했다. 또한 닌텐도는 게임기에서 게임에 필요한 부분 이외의 기능은 모두 없애서 성능을 극대화시키고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중시하였으며, 당시에 아케이드 시장을 이끌어나가고 있던 몇몇 회사를 세컨드 파티로 영입했다. 또한 먼저 시안을 테스트해서 일정 이상의 퀄리티인 게임만 닌텐도 라이선스와 개발 허가를 주는 방식을 도입하는 등 전체적인 게임의 퀄리티를 높여서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다시 살려내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게임개발 업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서드파티 제도로,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로 거의 사장된 가정용 게임기 업계에 충분한 관리만 따르면 게임도 명품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서드파티를 통해 증명한 셈이다. 닌텐도는 85년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시작으로, 86년도엔 젤다의 전설과 악마성 드라큐라, 87년도에는 록맨과 파이널 판타지 까지 만들어냈다.

이러한 닌텐도의 독주를 막기 위해 많은 회사들이 품질 관리와 서드파티 운영을 중심으로 한 게임 산업의 재구축에 들어갔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85년 10월 일본의 세가가 자국 내에서 출시한 세가 마크 III라는 게임기다. 이전부터 게임 제작사로써 인지도를 쌓고있었던 세가는 1978년부터 미국의 비디오 게임 회사 고블린과 제휴하여 게임 기판의 제작과 아케이드 게임의 유통을 맡기 시작하면서 비디오 게임 분야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성능상으로는 세가가 우수했으나 이미 닌텐도가 구축해놓은 시장 장악력에 밀려 패배하고만다. 이후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세가는 1986년 6월 세가 마크 III를 케이스와 이름만 바꿔 세가 마스터 시스템(Sega Master System)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출시했고, 이는 이미 패미컴이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일본과 북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대히트를 침으로써, 세가가 가정용 콘솔의 중요도를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세가는 다시 가정용 기기의 개발에 착수. 단 2년 뒤인 1988년 10월 29일에 메가드라이브, 북미명 세가 제네시스로 불리는 게임기를 발매한다. 이는 세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16bit cpu를 장착한 게임기. 다만 액션 게임과 슈팅 게임 주류의 게임 발매와 세가의 홍보에 입힙어 출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미시장의 과반수를 점유하는 저력을 보이며, 닌텐도와 나란히 서기 이전까지는 게임시장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 게임기로 기록되었다.

한편 북미의 PC 게임은 아타리 쇼크에서도 살아남았다. 1982년 등장한 8비트 컴퓨터인 코모도어 64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가정용 PC 시장을 휩쓸었고, 그 이전에 등장했던 Apple II와 함께 북미 PC 게임 시장의 양대 하드웨어로 등극, PC 게임의 8비트 시대를 이끌었다. 아타리 쇼크 이후 닌텐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콘솔 게임의 수요가 상당수 PC로 흘러갔고, 북미 게임 제작사는 대거 PC로 게임을 출시했다.

PC는 당시 여러 하드웨어가 있었지만 어느 하드웨어도 닌텐도식의 서드파티 룰을 강요하지 않았고, 아타리식의 출시 룰을 강요하지 않았다. 즉 PC 게임 제작 환경은 제작사에게 가장 큰 자유가 주어진 시장이었다. 품질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저질의 게임이 나올 가능성이 컸지만, 반대로 하드웨어 제조사의 간섭으로 저질 게임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으므로 양질의 게임이 나올 가능성도 컸다.

이런 자유로운 환경은 명작급의 게임이 대거 출시되는 결과로 나타났고, PC 게임은 북미 게임 시장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하게 된다. PC 게임은 기본 인터페이스가 키보드였기 때문에 콘솔과는 다른 영역을 점차로 개척해 나갔다. SSI사는 워 게임을 모티브로 한 각종 전략 게임 시리즈를 내놓으며 전략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했고, 게임 제작자 윌 라이트는 맵 에디터에 도시 건설 요소를 집어넣은 심시티를 내놓으며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창시했다. RPG는 울티마 시리즈,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 등의 수많은 명작이 나오면서 JRPG와는 차별화된 WRPG 장르를 구축했고, 어드벤처는 시에라를 세운 켄 윌리엄스와 로베르타 윌리엄스 부부가 최초의 그래픽 퍼즐 어드벤처 게임인 미스테리 하우스를 내놓으며 북미식 퍼즐 어드벤처 장르를 개척했다.

또한 1980년대 말 PC, 거치형 콘솔, 휴대용 콘솔, 아케이드 등등 기종을 뛰어넘어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퍼즐 게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테트리스다. 1984년 소련의 프로그래머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만든 테트리스는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알려졌고, 당시 존재하던 거의 모든 기기에 이식되면서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닌텐도도 게임보이용으로 테트리스를 출시했고, 게임보이 사상 최고의 판매량(3500만장)을 기록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88년 하이콤이 설립되면서 게임시장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1990년의 게임의 역사는 11월 경에 닌텐도에서 패미컴의 후계기인 슈퍼 패미컴을 발매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3D 주류의 5세대 게임기가 등장하면서 최후의 16비트 게임기이자 최고의 16비트 게임기라는 칭호를 갖게 될 이 게임기는 닌텐도의 서드파티가 가진 노하우와 그래픽, 사운드 모두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사양에 입힙어 2D 게임 제작수준의 절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게 된다. 오늘날 게임 컨트롤러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LR버튼 또한 이때 닌텐도가 슈퍼패미컴에 처음 시도하여 그립감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90년대에 들어서부터 게임 산업이 성장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게 되는데, 먼저 1992년 삼성전자에서 국내용으로 메가드라이브용 콘솔케임 우주 거북선을 출시한다. 비록 1988년에 발매되어 89년도에 메가드라이브로 이식되었던 타이토 사의 타수진의 이미테이션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당시로썬 몇 안되는 국내 기술로 자체 개발된 해외 콘솔용 게임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1992년 4월 20일에는 한국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업고 소프트액션 사에서 폭스 레인저를 출시한다. 폭스레인저는 최초의 상업용 PC게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국산 게임 중 판매량 1만 카피를 달성한다. 폭스레인저의 성공은 한국 게임의 상업성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였다. 또한 92년 말에는 자사에서 자체 패러디 게임인 "박스 레인저"를 내놓았는데, 이 게임도 국내 최초의 자사 패러디 게임이자 음성출력 지원 게임이라는 기록을 가진 게임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게임 산업 시장이 발돋움하는 동안 1993년엔 아타리가 아타리 재규어라는 64비트 게임기를 출시하였으나 이미 망쳐놓은 이미지 때문에 아타리는 명운이 많이 기운 상태가 되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이 경쟁해야하는 5세대 게임기들의 라인업은 세가 새턴, 닌텐도 64, 플레이스테이션 등이 있었다. 이 네 콘솔들로 인해 재규어는 일본 게임기들에 밀려 묻히게 되고, 같은 시기에 699달러라는 까무러칠 만한 가격의 3DO라는 공통 규격의 게임기와 경쟁하는 신세가 된 끝에 실패하게 된다. 해당 게임기는 총 500만 대가 판매되었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타리 최후의 게임기가 되었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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