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png 의견.png

레이쥔

해시넷
leejia1222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27일 (수) 16:44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샤오미(小米, Xiaomi)

레이쥔(雷军, léi jūn)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업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전자회사 중 하나인 샤오미(Xiaomi)의 창업자이다.

생애

샤오미 창립자 겸 CEO인 레이쥔은 1969년 중국 후베이성에서 태어나 쟈오완 촌에서 9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창의력이 뛰어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곧잘 생각했고 발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고향 학교의 선생이었고 그탓인지 레이쥔은 늘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아쉽게도 한번도 1등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레이쥔은 멘양 사범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지역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멘양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87년 대학 입학시험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우한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레이쥔은 대학 입학시험 점수로 칭화대학(清华大学)에 갈 수 있었지만 붙지 못할까 두려워 우한대학에 지원했다. 입학시험 점수보다 낮은 대학에 입학한 것이 아쉬워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시절, 그는 빌게이츠스티브잡스를 다룬 ‘실리콘밸리의 불’ 이라는 책을 접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 책을 읽고 스티브잡스의 기업가 정신 등 많은 것을 느끼고 세계 최고 IT기업을 세우자는 목표를 다졌다.

레이쥔은 초중고 학창시절처럼 대학에서 역시 총명하고 활발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교수들의 총애를 받았다. 2년 만에 졸업에 필요한 대학 4년의 전 과정을 마치고, 대학교 2학년 때에는 이미 컴퓨터 백신 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심지어 후베이 성 공안국에 초빙되어 강의를 하기도 했다. 레이쥔은 2학년 때부터 우한 전자상가에서 현장 실무자들과 기술 교류를 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 있어 많은 도움을 준 시기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전자상가에서 만난 훗날 킹소프트의 부회장이 되는 왕촨궈와 리루슝과 함께 중국어 입력시스템인 진산 한카를 모방한 제품을 발명해 싼써라는 회사를 창업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기술유출로 인해 실패했다. 동료의 배신으로 절치부심을 하던 중 추보쥔을 만나 이듬해인 1992년 킹소프트 창립에 참여하였다. 레이쥔은 한 인터뷰에서 그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헛되이 보내지 않은 시기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그래머로서의 꿈을 위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과학연구소를 떠나 킹소프트에 입사한다. 오랫동안 킹소프트에 몸 담아 일하며 베이징 킹소프트 연구개발부의 최고책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킹소프트의 상장에 크게 기여해 2007년 킹소프트에서 가장 빛나는 한 해를 맞이했지만, 회사에 남지 않고 오히려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사 이후 레이쥔은 앤젤투자자가 되어 중국의 다양한 IT기업에 투자하는 사업을 했다. 사실은 퇴사 전 제 3자 지불 플랫폼으로 사업을 시작한 라카라에 처음으로 투자를 했었다. 그 이후 뒤완이라는 기업에 개인 명의로 1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는 그가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한 사업이다. 퇴사 직전인 2006년에는 렌샹 투자회사 부회장 위융푸의 추천으로 UC웹(UCWeb)에 투자했다. 퇴사 후에는 UC웹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는 여러 회사에 투자를 하며 엔젤투자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모바일 의료 서비스 애플리케이션 하오다이푸, 비즈니스네트워크 서비스 따지에왕, 모바일 회사 예커, 신발 쇼핑몰 러타오등 그가 투자한 기업 모두 몇 년간의 발전을 거쳐 성공적인 기업이 되었다. 레이쥔은 퇴사후 얼마안가 2007년에 일상이 무료해지고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며 방황했다. 이른 은퇴로 인한 한가한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심적으로 정말 불안한 상황 속에서 UC웹의 대표 재직 요청에 응한 것이다. 이러한 삶이 계속되던 중 2009년 12월 16일 레이쥔은 베이징의 한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생일파티 자리를 빌어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자신의 처지를 모두 털어놓고 파티를 마친뒤 레이쥔은 지난 삶을 돌이켜 생각해보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찾게 되는 발판을 마련한다. 어쩌면 생일파티가 중국 스마트폰 시장을 뒤흔드는 비즈니스 청사진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이다.

레이쥔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마트폰으로 정한 후 스마트폰 사업을 위해 능력 있는 인재들을 찾아 총 7명으로 구성된 관리팀을 꾸렸다. 초기에는 회사이름을 소미(小米)라고 지었다. 좁쌀이라는 뜻으로, 초창기에 직원들과 좁쌀로 만든 죽을 먹으며 사업을 꾸려나가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그는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 샤오미만의 특성을 갖춘 MIUI(안드로이드에 기반한 변형 운영체제)와 미랴오(모바일 SNS 플랫폼)를 개발해 모바일 인터넷 분야에 진출하는 데 두 개의 중요한 수단을 마련했다. 스마트폰은 사실상 레이쥔이 모바일 인터넷 분야로 진출하는 매개체일 뿐이었다. 2011년 8월 16일 샤오미 스마트폰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2012년 5월 18일 샤오미 청춘판 스마트폰, 2012년 10월 샤오미 2세대를 차례로 발표하며 샤오미의 영향력을 펼쳐나갔다. 레이쥔은 프레젠테이션 현장에 스티브잡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등장하며 스티브잡스의 정신을 이어갔다.[1]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레이 쥔을 중국의 스티브 잡스라고 표현했다.[2] 레이쥔은 2012년에 베이징시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 전국인민대표대회 광저우시 대표에 선출되기도 했다.[3]

명언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며 결국 ‘세계 최고의 IT 기업가’가 되겠다는 어렸을적 꿈을 이룬 레이쥔은 스스로 갈고 닦으면 태풍이 다가오는 위기의 순간에도 거뜬히 날아오를 수 있다는 의미로 “태풍의 길목에 서면 돼지도 날 수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별명

샤오미 CEO인 레이 쥔의 별명은 ‘레이 잡스’다. 레이 쥔에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를 더한 말이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레이 쥔을 ‘중국의 스티브 잡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레이 쥔은 새 제품을 공개하는 발표 행사 때 스티브 잡스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원 모어 씽(One more thing)”을 외치는 등 잡스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입히려는 노력을 한다. 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스티브 잡스를 꼽는다. 레이 쥔은 자신뿐 아니라 샤오미에도 애플의 이미지를 입히려 노력한다. 우선 스마트폰과 태블릿 디자인은 애플의 아이폰아이패드와 언뜻 보면 헛갈릴 정도로 닮아 있다. 소프트웨어 미유아이(MiUI) 역시 환경만 안드로이드 기반일 뿐 다른 모든 건 iOS와 상당히 비슷하다. 이렇게 애플을 보고 자란 샤오미는 이제 중국에서만큼은 애플보다 몸집을 키웠다. 2013년 이미 중국내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따라 잡았다.[4]

각주

  1. 이주형 기자, 〈(이주형 기자의 세계 대부호 15) 레이쥔 샤오미 회장〉, 《CEO뉴스》, 2022-07-21
  2. 이민재 기자, 〈샤오미의 레이쥔은 어떻게 '중국의 잡스'가 됐나〉, 《비즈니스포스트》, 2014-07-14
  3. 레이쥔〉, 《나무위키》
  4. 권혜미 기자, 〈샤오미 - 사과 열매를 먹고 자란 좁쌀〉, 《블로터》, 2014-11-26

참고자료

같이 보기


  의견.png 의견.png 이 레이쥔 문서는 인터넷 기업가에 관한 글로서 내용 추가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