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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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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산업혁명(二次産業革命, Second Industrial Revolution). 포드 자동차 공장의 모습. 1914년 헨리포드가 자동차 공장에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하여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 절감을 실현. 포드 시스템은 사람이 부품을 들고 움직이던 작업 방법을 획기적으로 변경하여 부품이 컨베이어를 타고 사람에게로 오는 역발상 시스템이다. 즉 사람은 정형화된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대량생산 체제가 구축되면서 과거 특권층만이 탈 수 있던 자동차를 일반 서민도 탈 수 있게 되는 '마이 카'시대의 새 지평이 열렸다.

2차 산업혁명(二次産業革命, Second Industrial Revolution)은 19~20세기 초 전기에너지 기반의 대량생산 혁명이다.

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말 미국독일을 중심으로 진행된 철강, 화학, 자동차, 전기 등의 기술혁신을 가리킨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은 기술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경제 구조의 변혁을 야기하였다. 기계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가내수공업을 대신한 공장제가 주류를 이루는 공업사회로 변모하였다. 자본가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 시기였으며, 영국 등의 1차 산업혁명 주도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여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였다. 반면 미국, 독일 등은 1차 산업혁명의 시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겪었고,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세기 말부터 미국과 독일은 기술혁신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는데,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미국·독일 등 후발 주자가 중심이 되어 화학·철강·자동차·전기 등에서 일으킨 기술혁신을 1차 산업혁명과 구분하여 '2차 산업혁명'이라 부른다.

2차 산업혁명 시기에 진입하면서 강철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고, 인공염료의 개발로 다양한 색상이 의류·기계 등에 사용될 수 있었다. 또한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과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의 전류 전쟁(Current War)으로 유명한 전기의 본격적인 사용이 개시되어 공장과 교통수단의 동력원으로 채택되었다. 아울러 가솔린‧디젤 기관으로 알려진 내연기관의 개발, 전화·라디오·전신 등 통신수단의 발명,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로 대표되는 미국 정유 산업의 태동 등도 시작되었다. 농업 분야에서는 콤바인과 트랙터가 개발되어 적은 노동으로 대량의 작물을 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2차 산업혁명 시기의 기술혁신은 염료-유기화학, 전기-전자기학 등 과학의 성취에 기반하여 진행되었는데, 경험적인 면에 의존하였던 1차 산업혁명 시기의 기술혁신과의 두드러진 차이라 할 수 있다.

기술혁신 외에도 2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기업경영에도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는 노동자의 과업 설정, 과업 달성에 대한 성과급 지급, 관리에 적합한 기능별 직장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과학적 관리를 창안하였다. 헨리 포드(Henry Ford)는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시스템, 최저임금 1일 5달러, 1일 8시간 노동이라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기업경영은 대량생산과 대중소비의 결합을 추구한 것이다. 아울러 대불황(Great Depression)을 겪으면서 빈번하게 일어난 기업 간의 합병 등의 과정에서 대기업이 등장하였고, 대기업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시장을 직접 지배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2차 산업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특히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하루에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사람이 평균 100명에 달하였고, 하루 12~18시간을 노동해야 하였으며, 그에 따른 보수가 적어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노조를 설립하여 대항하였으나 노동자를 부품으로 생각하는 경향과 계속 공급되는 새로운 노동자들로 인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기술혁신에 따른 자원의 소비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가시화되었다. 오늘날에도 계속 문제가 되는 온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 런던과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발생한 스모그 등이 그것이다.

2차 산업혁명의 결과 미국과 독일의 경제력은 2차 산업혁명 말기인 20세기 초반에는 영국을 능가하였고, 일본·이탈리아·러시아 등 상대적인 후발 주자들도 산업화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2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과잉 생산과 구매력 저하 등이 벌어져 대공황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럼에도 2차 산업혁명은 위와 같이 다양한 기술혁신을 이루어 많은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된다.

개요[편집]

2차 산업혁명은 산업 혁명의 두 번째 단계를 표현하는 단어로 일반적으로 1865년부터 1900년까지로 정의된다. 이 기간에는 영국 외에도 독일, 미국의 공업 생산력이 급증해 영국과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들 국가의 기술 혁신을 강조할 때 특히 사용된다.

2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것은 화학, 전기, 석유 및 철강 분야의 기술 혁신이다. 이 시기에 철도와 증기선이 획기적으로 발달했고 철강업에서는 베서머 법이나 지멘스의 평로가 등장했다. 이들 원자재를 바탕으로 소비재를 대량 생산하는 구조적 측면의 발전과 식료품 및 음료, 의류 등의 제조 기계와 더불어 가공, 운송수단의 혁신, 심지어 오락 분야에서도 영화, 라디오와 축음기가 개발되어 대중의 요구에 부응했다. 이런 혁신은 고용을 촉진시켰다.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한 발명은 증기 동력으로 회전하는 인쇄기이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발명된 무한 두루마리 제지 기계의 발명에서 발전해온 것이며 기계적 식자는 라이노 타입과 모노 타입이 도입되어 혁신이 일어났다. 이러한 혁신으로 1870년대 종이에 걸려 있던 관세가 철폐됐고, 생산 비용도 저렴해져 기술 관련 서적은 물론 정기 간행물이 줄을 이었다.

미국에서는 공구의 발전이 다른 기계에서 사용하는 정밀 부품 제조를 가능하게 했다. 소비재 생산을 위해 제조라인이라는 아이디어도 도입됐다. 18세기에 영국에서 개발된 증기기관은 유럽이나 기타 국가에서 산업 혁명의 진행과 함께 19세기에 걸쳐 천천히 보급됐지만 제2차 산업 혁명에서는 일부 국가에서 내연 기관의 실용화가 진행되어, 보급이 폭발적이었다.

1870년대의 프랑스는 초기 자동차의 원동력으로 내연 기관을 적용하는 시도가 진행됐으며 연료로 석탄 가스 대신 석유를 사용하는 자동차가 개발됐다. 또한 이후 미국의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시스템을 도입해 내연 기관을 대량 생산해 미국 사회를 본격적으로 변모시켰다. 이후 ‘가난한 이들의 다리’인 오토바이, 모터 보트 및 펌프가 개발됐다.

제2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보다 많은 도시 노동자가 공장 노동자로 전환됐으며 실업과 저임금 노동력이 일상화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화이트 칼라 노동자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해 노동조합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증가해 새로운 분쟁의 요소를 내재한다. 제2차 산업혁명은 독일과 미국의 부상이다. 독일이 제2차 산업 혁명 도중 유럽의 주요 공업국으로 부상했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째, 독일은 산업화에서 초창기 영국에 뒤쳐졌지만 공장 등은 영국을 모방함으로써 자본과 노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은 최신 기술을 사용해 진전을 이루었지만 영국은 비교적 오래된 기술을 계속 사용했다. 둘째, 화학 및 기초 연구의 발전은 독일 쪽이 영국보다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셋째, 독일은 카르텔(기업 연합)의 구조가 효율적으로 집약되어 유동 자산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70년에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로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이를 철도와 같은 기반 시설에 많은 투자를 한 것도 큰 효과를 보았다. 즉 새로운 제철 기술을 사용한 교통수단을 사용해 대형 시장에 제품을 공급할 수 있었으며 독일이 천연자원의 보고인 알자스로렌 지방을 합병해 많은 생산시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의 핵을 이루는데 이를 대변하는 것은 토머스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와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이끄는 전기의 이용이다.

일부 학자들은 생활시간과 작업시간의 연장이야말로 진정한 제2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전기가 인간의 의식주 생활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전기를 통해 생활이 편리해졌고 요리를 위한 에너지공급 방식이 전기에너지로 바뀌어 식생활이 바뀌었다. 의복이 바뀌고 주거공간이 바뀌는 데다 주택은 전기보일러 등으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전기는 밤과 낮을 사라지게 만들어 밤에도 낮과 같은 생활을 이어가게 만들었으며 작업시간을 연장시켰다. 또한 작업 공간이 확대되어 지상이나 지하 공간에서 활동이 가능해지자 작업시간의 연장과 함께 생산성이 높아지게 됐다.

특히 전기 사용은 다양한 전기제품 개발로 생활을 더욱 편하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생활문화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암흑세계를 밝은 세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1차 산업혁명의 증기기관 에너지는 석탄이었다. 석탄의 열효율은 일정하지 못했고 석탄공급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공간이 많이 필요한 것은 물론 공해도 만만치 않았다. 전기는 이러한 에너지 공급방식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석탄은 채굴부터 관리까지 많은 인력이 필요했지만 전기는 소수의 인력으로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했다.

제2차 산업혁명의 중요성은 일자리의 변화에 있다. 1차 산업혁명의 증기기관이 마부의 일자리를 바꾸었듯이 2차 산업혁명은 노동방식을 관리자 일자리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단순노동에서 기술노동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1·2차 산업혁명은 3·4차 산업혁명의 정보시대를 만드는데 촉진제가 됐다. 전기를 통한 정보혁명은 인류 생활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계기점이면서도 새로운 문화생활을 만든 원동력이다. 이동과 운송수단의 바퀴혁명이 전기로 인한 이동수단과 생산수단으로 바뀌면서 인류생활은 급속하게 변화됐다.

학자들은 1·2차 산업혁명을 인류의 3대 발명(불, 화폐, 바퀴) 중 하나인 바퀴혁명으로 부른다. 바퀴는 서로의 공간을 이어주는 관계를 만드는 발명이다. 전기는 낮과 밤을 이어준 생활의 바퀴와 같다. 1차 산업혁명은 마차 바퀴를 증기기관 바퀴로 바꾸었고 2차 산업혁명은 전기에너지를 통한 생활환경과 작업환경의 생산방식을 바꾸어주었다.[1]

2차 산업혁명 과학자들[편집]

왼쪽부터 새뮤얼 모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토머스 에디슨 (위키피디아)
모스 전신기 모형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

19세기 중반에 들어가면서 세계적으로 발명에 한계를 드러내다가 미국에서 전기(Electricity)에 의한 기술혁명이 다시 불붙는다. 역사가들은 이를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제2차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의 산업중심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게 된다.

미국에서 전기는 독립지도자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5~1790)에 의해 인지되었다. 그는 과학자이며 기술자였고, 번개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것을 이해해 피뢰침을 개발했다.

전기는 초기에 통신용으로 사용된다.

새뮤얼 모스(Samuel Morse, 1791~1872)는 예일대에 다닐 때 미술을 공부했으며 과도한 음주로 빚에 쪼달렸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초상화를 그리고 조각상을 만드는데 비범한 재주를 보였다.

1825년 모스는 워싱턴 D.C.에서 프랑스 라파예트 후작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에 "아내가 아프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즉시 매사추세츠 뉴헤이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까지 마친 뒤였다. 아내의 임종을 보지 못한데 자책감을 느낀 모스는 "어떻게 하면 소식을 빠르게,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을까"를 몰두하게 되었더 그러던 중에 1832년 이탈리아 유학을 하다 돌아오다가 배 위에서 전자기학(電磁氣學)을 알게 되어 1837년 모스 전신기를 만들었다.

그는 길거나 짧은 전류 신호를 보내는 송신기와 그 신호를 받는 수신기를 만들었고, 창의적 부호와 그 부호를 옮겨 적는 종이테이프를 개발했다. 1844년 5월 24일은 워싱턴 D.C.와 볼티모어 사이에 세계 최초로 전신이 공식 개통되었다. 1845년 모스는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고, 추가 선로를 부설했다.

그의 전신부호와 기술체계는 특허를 얻었으나, 곧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져 수많은 경쟁사들이 생겨났다. 모스는 특허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미국의 전신사업은 각 주로 확산되었다.

미국의 전신회사는 숱한 M&A를 거쳐 1860년 웨스턴 유니언으로 합쳐졌고, 포스털 전신회사와 경쟁했다. 웨스턴 유니언은 출범 초기에 2만2천개의 전신사무소에 132만3,200km의 전신선로를 연결했다.

전신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미국 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신문사들은 전신을 통해 뉴스 정보를 얻었고, 1847년 멕시코와의 전쟁 뉴스는 전신선로를 통해 빠르게 전달되었다. 뉴욕 금융시장에서 가격과 주문이 전신으로 이뤄졌고, 철도회사들은 열치시간과 지연에 관한 정보를 전신선로를 통해 신속하게 전달했다. 다국적 기업들은 전신에 의해 국제무역 거래를 진척시켰다. 이로써 전세계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여 지게 되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8~1922)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대학을 다닌후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주했다. 벨은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다. 어렸을 때 눈으로 음악을 읽을 수 있었고, 머릿속에 흐르는 음악의 선율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쌓길 바랬다.

벨은 보스턴 대학의 음성 생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전화기 만드는 실험을 구체적으로 진행했다. 그는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독립 100주년 만국박람회에 전화기를 출품해 최고 인기 품목으로 환영을 받았다. 이듬해인 1877년 자신의 이름을 딴 벨 전화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1880년 미국전화전신회사(American Telephone & Telegraph)로 재탄생했고, 오늘날 AT&T의 모체가 된다.

모스의 전신기와 벨의 전화기는 기술적으로 보면 비슷하다. 그러나 전달체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신기는 부호로 전달되고, 전화기는 음성 자체를 전달했다. 부호는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지만 음성은 감정을 전달할수 있다. 이 차이는 전화가 전신을 누르고 대중통신수단으로 떠오르는 결정적 배경이 된다.

벨은 모스가 특허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사업을 키우지 못한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벨은 처음부터 특허관리를 변호사와 특허전문가들에게 맡겼다. 그가 고용한 전문가들은 일을 잘 해 냈다. 전신사업이 후에 수많은 경쟁업체들이 합병을 하는 과정을 거친 것과 달리 전화사업은 벨 회사에 의해 단일 구조로 확장되었다. 벨 회사는 16년간 특허기간(1877~1893) 내에 지역전화사업자에게 사업허가를 내주고, 전화교환기등 장비를 임대해 줬다. 미국의 전화사업은 벨 회사가 정점에 있고, 지역사업자가 하청을 받는 구조로 발전했다. 따라서 전화 기술도 일찍부터 표준화되었다.

벨 회사는 설립 첫해에 3천대의 전화를 설치했다. 미국인 1만명당 한 대 꼴이었다. 그러던 것이 1880년대에 6만대로 늘어났고, 1893년에는 26만대의 전화가 설치되어 미국인 250명당 한 대의 전화를 갖게 되었다.

초기 전화는 기업들이 활용했다. 1891년 뉴욕-뉴저지 전화회사는 병원 937곳, 약국 401곳, 주점 363곳, 법률사무소 146곳, 인쇄소 100곳에 전화를 놓았다.

벨사의 전화특허가 만료된 후, 많은 독립 전화회사들이 생겨나 1902년에 9천개의 전화회사가 우후죽순처럼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벨 회사의 틈새를 노렸다.

벨사의 약점은 교환수가 대화를 엿들어 통화자들의 신경을 거슬렀다는 점이다. 경쟁사들은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통화자들이 직접 상대방을 연결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또 벨사가 무시해온 농가를 파고들어 시장을 확대하기도 했다.

전화산업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요금 인하가 동반되었다. 1880년대에 뉴욕에서 전화 1000통에 150 달러였던 것이 1915년에 51달러로 인하되었다. 전화요금 인하는 중산층으로 전화기를 보급시켰고, 1920년대엔 미국 전역에서 1천3백만대의 전화가 사용되었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전기가 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연구해 냈다.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는 1831년에 전류와 자기장, 에너지의 법칙을 이용해 도체의 주위에 코일을 감아 회전시켜 전류를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발전기를 개발해 냈다.

곧이어 유럽에서는 도선 사이에 간극을 두고 전기를 공급해 스파크를 일으켜 빛을 내는 아크등(arc lamp)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 아크등은 186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등대에서 가동되었고. 몇 년후 미국에서 가로등으로 쓰였다. 하지만 초기 아크등은 스파크가 생길 때 터져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진공상태에 필라멘트를 이용해 빛을 발생시키는 백열등이 나왔는데, 필라멘트가 빨리 산화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전기 분야의 선두주자는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었다. 에디슨은 1878년부터 전기조명 연구를 시작해 자신의 백열등을 발명했다. 그는 전기관련 제품들을 연달아 발명했는데, 전등 이외에 주식가격 전송기, 발전기, 축음기, 사진기, 초기 라디오등도 개발했다.

에디슨은 전기에 관한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다. 1880년 에디슨은 뉴욕에디슨 전기조명회사를 설립해 발전에서 송전, 전기계측, 전등에 이르기까지 자사 제품 일체를 이용해 수요자에게 전기와 전기제품을 공급했다. 에디슨의 전기회사는 숱한 M&A를 거쳐 오늘의 제너럴일렉트릭(GE)의 모태가 되었다.

미국의 발전소는 1882년 1개였지만, 1902년 2,250개, 1920년엔 4천개로 팽창했다. 1920년대엔 미국 가정의 3분의1 이상에 전기가 공급되었고, 곧이어 전기선풍기, 다리미, 청소기가 20세기 초반에 개발되어 보급되었다.

또 에디슨은 백열 전구를 개발하던 중 진공상태에서 금속을 가열하면 전류가 흐르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를 에디슨 효과(Edison effect)라고 하는데, 에디슨은 전구 발명에만 집중하느라, 에디슨 효과의 과학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에디슨 효과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영국의 물리학자 오언 리처드슨(Owen Willans Richardson)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리처드슨은 진공상태에서 금속 필라멘트를 가열하면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것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했다.

곧이어 영국의 엔지니어 존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 1849~1945)에 의해 1904년 11월 16일 진공관(vacuum tube)이 발견되었다. 플레밍이 만든 이극 진공관(diode)은 3극, 4극으로 진화되었고, 20세기 들어 트랜지스터, 반도체로 이어져 오늘날 전자공학에 이르게 된다.[2]

기술혁신[편집]

  • 백열등/형광등 :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사실 에디슨이 한 것은 필라멘트 재료만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디슨이 개량한 전구는 최초로 상업적인 전구라 할 수 있다. 1852년 조지 스토크스는 형석이 자외선을 받아 빛을 내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형광이라 불렀다. 1901년 수은등이 개발되었고 형광물질의 꾸준한 개발을 거쳐 1939년에 형광등이 개발됐다. 백열전구와 달리 고효율이라 아직도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나중에 LED의 발명에도 기여를 한다.
  • 건전지(1차 전지, 2차 전지) :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가 전지를 개발하였다. 1836년에 다니엘 전지가 개발되었고 1859년 납축전지가 개발되었다. 1886년 카를 가스너가 최초의 건전지를 개발했다.
  • 교류 전기 : 물리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1831년 최초로 전자기유도를 발견했다. 이를 응용하여 유럽에서 교류송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고 사업가능성을 느낀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1886년 미국에서도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 믿고 니콜라 테슬라 및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교류 송전을 개량하여 경제성있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걸로 초대박을 치고 에디슨의 직류전기와 테슬라의 교류전기가 경쟁을 하게 되는데 이를 전류전쟁이라고도 한다.
  • 모터(전동기) : 1866년 베르너 폰 지멘스가 발전기(다이나모)의 원리를 발견하여 1867년 특허를 냈다. 그 후 발전기는 전동기로도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산업계는 전원의 제약에서 해방됐다.
  • 컨베이어 벨트 : 과거에도 통조림등 일부 제조업에서 쓰였지만 1908년 헨리 포드가 자동차 생산에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됐다.
  • 강철 : 1855년 헨리 베세머가 전로를 개발하여 강철을 빠른 시간에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856년 빌헬름 지멘스는 평로(Open hearth furnace)를 고안하였고 1864년 피에르 에밀 마르탱과 함께 강철의 품질을 크게 높이는데 성공했다.
  • 영화 : 1888년 루이 르 프린스가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한다. 1889년 토마스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한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대중에게 소개된 실질적인 최초의 영화라 볼 수 있다.
  • 라디오
  • 전화기
  • 텔레비전
  • 플라스틱
  • 자동차 : 1769년 퀴뇨가 자동차를 만들었다. 우리가 아는 가솔린 자동차는 벤츠가 1885년에 자신이 만든 차를 특허내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비행기 : 라이트형제가 1903년 처음으로 비행기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이는 인간 최초의 동력비행이다.
  • 합성고무 :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호프만은 1909년 최초의 합성고무 '폴리이소프렌'을 개발한다.
  • 화학비료
  • 에어컨 : 1820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암모니아를 압축, 액화시키면 암모니아가 기화할때 열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851년 미국의 의사 존 고리(John Gorrie)는 얼음을 만드는 기계로 특허를 취득한다. 1902년 윌리스 캐리어는 온습도 조절이 가능한 최초의 현대적 에어컨을 만든다.
  • 세탁기 : 수동 세탁기는 1800년대에 개발되었다. 전기 세탁기는 1904년 신문 광고에 등장하며 1911년 월풀사에서 자동 세탁기를 만들었고 1927 캐나다의 비티 브라더스(Beatty Brothers)사에서 빨랫감을 휘저어 섞는 교반식 세탁기를 발명한다.

각주[편집]

  1.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인협회장, 〈<이종호의 포스트 펜데믹 로드맵⑭> 제2차 산업혁명이 기술노동 사회 만들어〉, 《월드코리안뉴스》, 2021-09-11
  2. 김현민 기자, 〈전기가 일으킨 2차 산업혁명…미국, 유럽 앞서다〉, 《아틀라스》, 2020-01-01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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