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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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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지도(行政地圖)란 행정에 필요한 세부사항을 표시한 지도를 말한다. 행정기관의 정책 수립의 기초자료 및 지역 주민들의 안내 자료로 활용된다.

군현 지도[편집]

해동지도 용담현지도

군현 지도는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으로서 통치의 기본 단위였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단위로 제작된 지도이다. 이는 조선 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문화・사회・정치・경제 등 모든 면에서 바탕을 이루는 행정 단위이자 문화 단위로, 군현 지도의 발달은 조선 후기 지도 제작에서 보이는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이다. 군현 지도의 양적인 증가, 군현 지도 제작과 이용 주체의 다양화, 지도 제작 기법의 변화 등 여러 면에서 조선 후기 군현 지도의 내용과 형태에 발전적인 측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군현 지도는 지도를 제작한 주체에 따라 관찬지도와 사찬지도로 나뉘며, 표현 양식에 따라 회화식 지도와 기호식 지도, 그리고 방안의 크기에 따라 축척이 적용된 대축척 지도와 소축척 지도로, 판종에 따라 목판본과 필사본으로 나누는 등 다양하다.

회화식 군현 지도

회화식 군현 지도는 대부분 지역의 모습을 산수화식으로 그린 지도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지승』, 『1872년 지방도』, 『경주도회』, 『여지도』 등이 있다.

우리나라 고지도의 경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작자와 제작 시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지도에 반영된 지명이나 지리 정보, 또는 지도의 형식을 통해 그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회화식 군현 지도 가운데 『여지도』, 『경주도회』, 『해동지도』는 18세기 중반에의 조선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해동지도』 이후 『지승』이 1776년 이후의 모습을, 『광여도』는 19세기 전반의 모습을, 그리고 『1872년 지방도』는 19세기 당시 모습을 담고 있다.

제작 시기와 그 목적에 따라 지리 정보 및 표현 방법 다소 차이가 있지만, 회화식 군현 지도 대부분은 『지승』과 같이 산지 표현에 회화적 기법을 접목하여 예술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읍치의 모습, 읍치 내에 위치한 주요 건물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잘 모르는 지역을 이해하기 쉽게 보여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회화식 지도에는 지도를 제작한 사람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의 진산을 지도의 위쪽에 배치하기 위해 지리상 남쪽이 지도의 북쪽에 위치하기도 하며, 각 군현의 읍치가 다른 방리(方里)보다 크게 확대되어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생략하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나 알리고 싶은 정보를 보다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시대 회화식 지도는 기호식 지도가 제작된 이후에도 지속해서 제작되었다.

기호식 군현 지도

군현 지도의 또 다른 유형은 기호식 지도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비변사인방안지도』와 『조선지도』는 기호식 지도이자 일정한 축척이 반영된 방안지도이다. 『비변사인방안지도』의 경우 4책의 고령 지도에 1745년에 만들어진 개호정(開湖亭)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5책의 창원 지도에는 1760년(영조 36)에 설치된 반산창(盤山倉)이라는 조창(漕倉)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이전까지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지도』는 『비변사인방안지도』와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중반에 제작되었으나, 『비변사인방안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은 지리 정보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함경도 회령에 1745년(영조 21)에 혁파된 호타리보(胡打里堡)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1750년(영조 26)에 경기도 마전에 세워진 미강서원(眉江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지리 정보를 통해 두 지도의 선후 관계를 밝히기는 충분하지 않지만, 『조선지도』에 『비변사인방안지도』에서 반영되지 못했던 1750년대 조선 사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기호식 군현 지도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방안 위에 군현을 그리고, 정해진 기호를 사용하여 지리 정보를 표시한다. 20리 방안 위에 그려진 『조선지도』의 가장 큰 장점은 전국의 모든 군현 지도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이로써 전국의 각 군현 지도를 연결하면 지역별, 도별, 나아가 전국지도로 합해 볼 수 있고 또 나누어 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한 축척을 가진 군현 지도들의 발달이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 지도 제작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도별 지도[편집]

삼한일람도

군현보다 큰 지역을 대상으로 제작된 지도가 도(道) 단위로 제작된 도별 지도이다. 도는 행정 단위로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체계였으나,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일정한 문화적 단위로 가능하게 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도라는 울타리에 적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도에 반영된 지리 정보를 바탕으로 그 제작 시기를 추정해보면, 『삼한일람도』가 17세기 말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팔도분도』가 1776년 이전 상황을, 『조선팔도지도』가 1776∼1787년 상황을 반영하면서 18세기 조선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역도』가 1800년대 초반의 모습을, 『동국여도』가 1800∼1822년 조선 사회의 지리 정보를 담아 제작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5종의 지도는 조선 시대에 제작된 도별 지도의 유형 중 군현의 상대적 위치와 산천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제작된 '동람도' 유형과 비교하여 사실적이고 과학적으로 제작된 도별 지도이다. 그리고 이 지도들은 조선 후기 정상기(鄭尙驥)[1678∼1752]의 『동국지도(東國地圖)』의 유형으로, 일정한 축척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전도[편집]

『대동여지도』는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 군현 지도와 일정한 축척으로 제작된 도별 지도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대축척 조선 전도이다. 지도는 제작한 주체에 따라, 혹은 지역 범위에 따라 정보 내용이 다르게 반영된다. 따라서 한 지역의 모습을 파악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지역을 중심으로 자세히 그려진 군현 지도에서부터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도별 지도, 더 나아가 전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시기별 모습과 그 안에 반영된 사회를 살펴본다면, 옛 지도를 통해 그 지역의 특징과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1]

각주[편집]

  1. 고지도〉,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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