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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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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자동차(Shinjin)
신진자동차(Shinjin)
김창원(金昌源) 전 신진그룹 회장
김제원(金濟源)

신진자동차(Shinjin)는 1955년 설립된 신진그룹의 자동차 회사로 한국GM의 전신이다. 외환사정의 악화로 SKD부품수입이 도입금지된 1963년 5월 새나라자동차공업㈜가 문을 닫고 경기도 부평(현재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던 새나라자동차공업㈜의 현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은 1965년 김창원의 신진공업으로 소유주가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제휴해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려고 했으나 토요타가 1972년 주4원칙을 따라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계획은 공중분해되고 GM과 제휴하였다. 신진자동차는 제너럴 모터스(GM)과 합작으로 GM코리아를 설립했다. GM코리아는 1972년 '쉐보레'와 '레코드'를 양산하였고, 1976년 한국측 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하여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을 바꾸고 다시 1978년 산업은행의 보유지분을 대우그룹에 넘김으로써 대우자동차(현재 GM대우)가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진자동차는 ㈜거화로 바꾸고 쌍용 코란도를 1983년 처음 내놓고 생산하였으나, 회사 내부 갈등으로 웃지 못할 흑자도산으로 문을 닫으며 쌍용 코란도를 동아자동차(現 쌍용자동차)로 넘기는 계기를 맞았다.

개요[편집]

1955년부터 1984년까지 존재한 자동차 제조회사이자 자동차 전문 그룹이다. 자동차로 따지면 자일상용차, 한국GM, 타타대우상용차, 쌍용자동차의 전신격 되며, 법인 자체로 따지면 삼성건설의 전신이기도 하다. 한때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재벌로써 19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이자 최고의 자동차 그룹이었고 재계 2~3위를 다툴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신진자동차 역시도 당시 독과점의 폐해와 그로 인한 폭리를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 1969년 경향신문을 인수하여 산하에 두었고, 1968년 학교법인 신진학원을 세워 1970년 신진자동차공업고등학교를 세웠고, 1969년 신진장학회를 세워 사회공헌에도 힘썼다. 최전성기 시절 신진자동차그룹의 위상은 지금의 현대자동차그룹 정도의 위상이었다. 신진은 가난하던 시절 혜성처럼 등장하여 자동차의 꿈을 심어주며 재벌성을 급조했다가 급락한 대표적이 사례이다. 창업주인 김창원(金昌源) 회장이 50년대 후반에 큰 수를 내어 60년대에 왕국을 건설했다가 70년대를 다 채우지 못하고 거의 자멸의 길로 들어섰으니 한국 기업사의 비극이다.

역사[편집]

신진공업주식회사 국산자동차 및 부품전시회(1964)
코로나자동차 인도식(1966)
코로나자동차 5000대 생산 및 크라운 제1호 발주(1967)
신진자동차 작업광경(1970)
코로나70

신진공업사 설립[편집]

1955년 2월, 김창원은 부산 전포동에 있던 미군 정비창을 불하받아 공장을 세워 부속품을 만드는 한편 군용차와 민간차를 수리·제작하며 신진공업사를 설립하였다. 1957년 3월, 신진공업㈜로 법인 전환한 뒤 1960년에는 전포동 버스공장을 완공했으며, 1962년 10월 덕수궁 산업박람회에 출품한 마이크로버스가 상공부 장관상을 탄 것을 계기로 정부로부터 자동차를 정식으로 만들 수 있는 대형 및 중형자동차 조립공장 허가를 받았다. 신진공업사가 만든 노란색 25인승 마이크로버스는 큰 히트를 치며 1960년대 말 제대로 만든 대형버스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도시나 지방 여객수송자동차의 주류를 이루었다.

새나라자동차 등 인수[편집]

1962년 8월에 재일교포 박노정은 경기도 부평(현재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연간 6천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새나라자동차공업㈜을 설립하고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 모델을 SKD(Semi Knock Down : 반제품 형태로 들여와 조립 생산하는 방식)으로 들여와 '새나라호'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였다. 새나라자동차공업㈜는 설립과정과 닛산 블루버드의 수입 판매에 관련하여 당시 정부의 특혜시비 의혹에 휘말리며 (자동차 등 4대 의혹사건) 1963년 7월에 한일은행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3년에 미군 지프 폐차 부품을 이용해서 새나라 자동차의 닛산 블루버드 외형을 모방하여 만든 '신성호'라는 세단은 신진자동차 최초의 승용차였으나 재생부품을 사용하다 보니 조악한 품질과 새나라자동차보다 비싼 가격으로 판매가 매우 부진했다. 결국 300대를 판매하고 생산을 중단하였다.

1965년 새나라자동차공업㈜을 인수한 신진공업은 이듬해 상호를 신진자동차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부평공장에서 '코로나'(1966년)를 생산하였다. 코로나는 당시 승용차의 대명사로 불리며 1972년까지 4만4천248대가 생산되는 인기를 누렸다. 차 값은 83만 7,000원으로 당시 대통령 월급이 7만 8,000원, 쇠고기 한 근 200원, 택시 기본요금 60원 다방커피 40원이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비쌌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디자인이 예쁘고 한국의 도로사정에 잘 맞는 자동차로 부각되면서 국내 승용차 시장을 싹쓸이했다. 그후 신진자동차는 토요타자동차의 자체 개발1호로 유명한 중형차 "크라운" 을 조립, 생산하여 국내 고급차 시장의 문을 열었다. 소형차 "코로나"를 최고의 차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보다 차체가 크고 고급스러운 크라운은 큰 화제였다. 특히 1967년의 뉴크라운은 디자인을 네 번이나 바꾼 마지막 모델로 그야말로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집 한 채 값이 70 ~ 80 만원 하던 시절에 차 값이 무려 310만원이었다. 디자인이 당시로서는 초현대적이어서 재벌총수, 장관, 국회의원 등의 자가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1967년 5월~1972년 7월까지 총 3,840대가 생산되었다.[1]

1966년에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만든 FB100LK 가솔린 버스는 폐차 재생부품이 아닌 규격화된 신품 부품만을 사용하여 만든 국내 최초의 대량 생산 기성품 버스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내버스로 유명했고, 1968년에 내놓은 DB102LC 디젤 버스는 본격적으로 국내에 디젤엔진 버스 시대를 개막하면서 버스 = 디젤엔진 공식을 성립시키며 1970년대 초반에 가장 흔한 버스 중에 하나였다. 버스 이외에도 토요타, 히노자동차와의 기술제휴로 중대형 트럭도 만드는 등 그야말로 한때나마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싹쓸이하던 회사였다.

FB100LK 가솔린 버스, 코로나 승용차, DB102/105LC 디젤 버스의 성공 덕분에 본사는 사세확장에 나섰다. 1966년 신진자동차판매를 세우고 1968년 서울 양평동에 신진자동차운전학원을 세웠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는 하동환자동차까지도 인수 및 업무제휴하여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 그 외에 1970년대 초반까지 현대기아, 신원개발, 한국카이사알미늄, 대원안전유리공업, 대원강철공업, 코리아스파이서공업 등을 잇따라 세워 그룹을 형성시켰다.

한때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재벌로써 19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이자 최고의 자동차 그룹이었고 재계 2~3위를 다툴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신진자동차 역시도 당시 독과점의 폐해와 그로 인한 폭리를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 1969년 경향신문을 인수하여 산하에 두었고, 1968년 학교법인 신진학원을 세워 1970년 신진자동차공업고등학교를 세웠고, 1969년 신진장학회를 세워 사회공헌에도 힘썼다. 최전성기 시절 신진자동차그룹의 위상은 지금의 현대자동차그룹 정도의 위상이었다.

토요타자동차 철수[편집]

하지만 1969년에 적자투성이 업체 한국기계공업을 인수하면서 망조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저우 4원칙"을 발표하면서 토요타는 중국 진출을 노리기 위해 배신을 감행하며 철수하였고, 결국 1971년 미국 제너럴 모터스와 손잡아 부평공장을 지엠코리아로 분사시켰으나, 경영악화로 1976년에 한국기계와 세트로 한국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갔고, 신진알미늄 역시 율산무역으로 넘어갔다.

신원개발로 변경[편집]

반면 모기업 신진자동차공업은 1970년 미국 AMC와 손잡아 지프만 만들다가 1974년 지프사업부를 신진지프공업으로 분사시켰다. 1976년 현대기아와 신원개발을 합병한 후 건설업으로 전환하며 신원개발로 사명을 변경해 자동차와 거리가 먼 회사가 됐다. 이후 신진지프, 신원개발, 코리아스파이서, 신진학원까지 4개 정도만 남아서 불과 수년만에 재계 2~3위를 다투던 신진자동차그룹은 기업 규모가 순식간에 크게 쪼그라들어버린 초라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1978년 모기업 신원개발이 삼성그룹에 팔렸고, 마지막으로 남은 자동차 관련 계열사 ㈜거화와 코리아스파이서마저도 경영권 분쟁과 김창원 자신의 해외 도박 파문 등으로 흑자도산하면서 현재는 1개 소규모 학교법인 규모(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신진학원)에 불과한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 훗날 재단도 장남 김준식이 아닌 막내 김용식 에렉스F&B(구 동전개발) 창업주가 이어받아야 했다.

삼성종합건설로 변경[편집]

1979년에는 삼성종합건설을 합병하여 회사명을 삼성종합건설로 변경하였다. 1993년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로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를 냈다.

㈜거화[편집]

거화는 1984년 11월 20일 동아자동차에 인수됨과 동시에 29년만에 창립자 일가와 결별하게 되었으나 동아자동차도 거화를 무리하게 인수합병한 것이 화가 되어서 쌍용그룹에 인수되어 쌍용자동차 SUV부문이 되었다. 현재도 남아있는 코란도라는 자동차 브랜드가 이 회사의 마지막 유산중에 하나인 셈이다. 코리아스파이서는 1985년 성신지주로 넘어간 후 1998년 '코리아정공'으로 바꿨으나, 2000년 위아에 매각된 후 2002년 한국DTS(현 현대트랜시스)에 합병됐다.

삼성건설로 변경[편집]

1993년 삼성종합건설은 회사명을 삼성건설로 변경하였다. 1995년 삼성물산에 합병하여 회사 자체가 사라졌다.

신진모델[편집]

신진 코로나 1500

Shinjin Corona 1500 1966~1972

 
신진 퍼블리카

Shinjin Publica 1967~1971

 
신진 크라운

Shinjin Crown 1967~1968

 
신진 뉴 크라운

Shinjin New Crown 1971~1972

 

GM코리아 모델[편집]

쉐보레1700

Chevrolet 1700 1972~1978

 
GM코리아 레코드 1900

GM Korea Rekord 1972~1978

 
GM Korea 레코드로얄

Rekord Royale 1975~1978

 

기타[편집]

사실 본래 신진자동차는 토요타가 아닌 미쓰비시 자동차와 1965년에 기술제휴를 하려고 했었으나, 이 과정에서 들여왔던 100대의 콜트 1500이 특혜 논란에 폭리 논란이 있었다. 명목상으로 기술검토용으로 도입했었으나 기술검토용으로 도입하기에는 100대라는 댓수는 너무 과했고 정부에서도 당시 파격적으로 면세 혜택을 주는 바람에 정경유착 의혹이 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진자동차도 이 콜트를 당시 돈으로 대당 35만원(1,300달러)에 도입해서 대당 84만원에 되팔이 하는 폭리까지도 취하였고 폭리로 취한 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번지는 바람에 일명 콜트 파동이라고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결국 신진자동차와 미쓰비시 자동차의 기술제휴는 취소되고, 그 와중에 토요타가 잽싸게 신진자동차를 꼬드기면서 기술제휴를 체결했다가 나중에 뒤통수 쳐버린 것이었다. 물론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토요타가 미쓰비시 자동차보다 당연히 기업 규모도 큰데다가 토요타 코로나가 미쓰비시 콜트 1500보다 상품성도 훨씬 좋고 훨씬 잘팔리는 차종이니 신진자동차 입장에서는 혹할 만도 했겠지만 그나마 미쓰비시 자동차가 국내 업체와 기술제휴했던 외국 자동차 제조사 중에서는 갑질이 가장 적었던 편에 속했기 때문에 콜트 파동만 아니었어도 신진자동차가 미쓰비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체결하여 운명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가[편집]

김창원 회장이 이룩한 신진자동차는 우리의 60년대 꿈이자 70년대 성취였다. 그러나 경험축적이 없고 제도가 미비하고 시장이 성숙되지 않았던 시절 한국산 자동차의 운명이 순탄할리 없었다. 한마디로 신진자동차가 시동을 걸어 잠시 거리를 질주하다가 GM코리아, 새한자동차, 대우차, 대우GM 등으로 여러 차례 팔자를 고쳐온 과거가 곧 김창원 회장의 화려했다가 비참하게 끝난 불운의 기업인생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신진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발전에 공헌한 선구적 발자취는 지워질 수 없다. 김창원 회장의 집념과 열정도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지금이야 신진차의 이름도 없이 사라졌지만 황무지에 자동차 산업의 씨앗을 뿌린 것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우리경제를 뒷받침해 주는 최고의 성장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진의 70년대는 자동차 종합그룹으로 재계의 정상급에 진입했었다. 신진자동차를 중심으로 신진지프, 현대스파이서, 현대기아, 대원안전유리, 대원철강, 하동환 자동차, 신진자동차 학원 등을 계열사로 거느렸으니 국내 유일의 자동차 그룹이었다. 여기에다 신원개발, 한국기계, 신진알루미늄, 경향신문, 동래골프장 등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당시 최대 재벌로 급성장했었다.

각주[편집]

  1. 홍익희 세종대 교수, 〈억척으로 엮어낸 자동차산업(1)...시발, 새나라, 신진 자동차〉, 《조선펍》, 2016-10-07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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