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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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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티야(Ossetia)는 남오세티야(South Ossetia)와 북오세티야(North Ossetia)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남오세티야는 공식적으로는 조지아에 속하는 자치공화국이지만, 조지아와 전쟁을 통해 승리하여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운영되고 있다. 북오세티야러시아북캅카스연방관구에 속한다. 남오세티야와 북오세티야 모두 캅카스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남오세티야는 남캅카스 지역에 속하고, 북오세티야는 북캅카스 지역에 속한다. 오세티야 주민들은 인종적으로 오세트인에 속하고, 언어는 오세트어를 사용하고, 문자는 러시아와 같은 키릴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종교는 대부분 정교회이지만, 일부 무슬림도 존재한다.

역사[편집]

지도[편집]

오세티야 주변 지도[편집]

남오세티야[편집]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 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오세트어: Республикӕ Хуссар Ирыстон—Паддзахад Алани 레스푸블리커 후사르 이러스톤-파자하드 알라니,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Южная Осетия —Государство Алания 레스푸블리카 유즈나야 오세티야-고수다르스트보 알라니야)이다. 압하지야와 함께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러시아와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나우루, 시리아 등 소수만이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조지아는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조지아의 법률에서는 남오세티야를 압하지야와 함께 "피점령 지역"으로 분류한다. 미국, 캐나다, 유럽 연합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가들, 유엔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제 기구에서는 남오세티야를 조지아의 일부로 여긴다.[2]

조지아 오세티야 분쟁[편집]

조지아-오세티야 분쟁은 1989년에 전개되어 1991~1992년 남오세티야 전쟁으로 발전한 조지아의 남오세티야 자치 지역에서의 민족적-정치적 충돌이다. 휴전이 체결과 무수한 평화적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 충돌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고, 소수의 무장 사건들이 계속된다. 2008년 8월, 조지아와 남오세티야 간의 외교적 긴장감과 충돌들은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을 발발하게 했다.

충돌의 발단[편집]

조지아와 오세티야의 충돌은 1918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조지아는 멘셰비키 통제 체제에 있었고, 반변에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관리권을 차지했다. 1920년 6월, 러시아가 지원하는 오세티야 군대는 조지아군과 국민 경호대를 공격했다. 조지아는 힘차게 대응했고 폭도들을 무력화 시켰으며 여러 오세트인 군락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2만명의 오세트인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로 피신하는 난민 신세가 되었다. 8개월 후, 붉은 군대는 대대적으로 조지아를 침입했고[2], 1922년에 남오세티야 자치주가 성립되었다.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수상에 의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시행될 때,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에서 민족주의 봉기가 야기되었고, 조지아는 독립을 향해 나아갔었는데 오세티야 국가주의 조직인 아데몬 니카스(인민 전선)의 반발에 부딪혔다. 1988년에 창립된 아데몬 니카스는 그 지역의 대 자치권을 요구했고 마침내는, 러시아의 북오세티야와 통일 되었다. 1989년 11월 10일, 남오세티야 최고 소비에트는 남오세티야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인 북오세티야 차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가 결합하는 결정을 공인했다. 그러나 이튿날, 조지아 SSR 최고 소비에트는 그 결정을 무효화했고 11월 23일, 즈비아드 감사쿠르디아가 이끄는 수 천명의 조지아 민족주의자들과 저항 세력의 지도자들이 회담을 열기위해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로 향했다. 오세티야는 도로에 방해물들을 집결시켰고 소비에트 부대의 간섭으로 두 시위대 간의 충돌은 모면했다. 소비에트 사령관은 조지아의 시위대를 철수하게끔 했다. 그러나 그 직후에 조지아와 오세티야 사이의 충돌에서 여러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1990년 초 쯤에 남오세티야군은 300~400명의 불충분하게 무장된 군인들만 갖고 있었지만, 6개월 후에는 그들의 수가 1,5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남오세티야 소규모 민병대의 주 보급원은 츠힌발리에 기지가 있는 헬리콥터 연대였다.[출처 필요] 인접 마을들에 거주하는 민족적으로 조지아인인 사람들은 메랍 코스타바 회라고 알려진 자주-방어군을 조직했다.[3]

조지아 최고 의회는 1990년 여름에 지역 당파들을 제외하고 법률을 채택했다. 그러함은 오세트인들에게는 아데몬 나카스에 대항하는 조짐으로 해석됐다. 1990년 9월 20일에, 남오세티야 자치주는 소비에트 연방의 독립 결정을 승인해 달라고 모스크바에게 호소하며 남오에티야 민주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선언했다. 1990년 10월에 조지아 최고 의회 선거가 열릴 때, 남오세티야인들은 그 선거를 배척했다. 1990년 12월 10일, 남오세티야가 그들만의 선거를 열었는데, 조지아는 그 선거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튿날에 조지아 최고 소비에트는 남오세티야의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고 남오세티야의 자치권을 박탈했다.[4]

1990년 9월 11일, 츠힌발리와 그 주변에서 유혈 사건들이 발생했다. 12월 12일, 조지아 정부는 츠한발리와 자바 구역에 국가 비상 사태를 발령했다. 오세티야 무장 단체들의 무장을 해체 시키기 위해서 조지아 경찰과 국가 경비대의 부대들이 그 지역에 파병되었다.

USSR의 해체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1933년의 국경에에 관한 과거-몰로토프-리벤트롭 협정(프랭클린 D. 루즈벨트 정부가 그 해 말에 크렘린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함)을 합법적으로 승인했다.[5]. 그 덕분에, 조지 H. W. 부시 집행부는 발트 SSRs의 독립 영토 반환을 공개적으로 지원했지만, 1920년대부터 변하지 않는 USSR 지역들의 국경들을 갖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트랜스캅카스의 나머지 지역의 독립과 영토 분쟁은 소비에트 내부 체계와 관련된 문제로 여겨졌다.

2004년 긴장 표출[편집]

2004년에는 단기간의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며칠후에 협상에서 어색한 평화가 제안됐다. 2003년, 미헤일 사카시빌리가 대통령으로 당선 됐을 때, 그는 조지아의 중앙 통제 하에서 탈퇴한 두 지역을 완전히 되돌려 놓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그는 NATO를 택했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 특히 미국을 주요 동맹국으로 선택했으며, 그 변화로 그는 서방 국가들로부터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다. 미국은 조언 고문을 통해 "테러와의 전쟁"의 보호 아래서 공격에 대비하여 조지아군의 부적당한 전투 방식을 전문적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조지아는 군인의 수로 본다면 미국과 영국 다음인 세 번째로 큰 군사 합동 작전의 참전국이 되었다. 조지아는 미국, 이스라엘, 독일, 발트해 국가들에게 무료로 무기를 공급 받았다. 사카시빌리가 취임하고부터 나라의 국방 예산은 미국의 원조로 다시 충당되었고, 견실히 증가했다. 그 상황에서, 조지아의 탈퇴 공화국들과의 긴장 상태들은 고조되었다. 뒤이어 2004년 5월에, 또 다른 불충분하게-통제되는 아자라(아자르인은 민족적으로 조지아인에 가깝다.) 주에 진출한 대통령 미헤일 사카시빌리 정부는 그들의 관심을 남오세티야로 돌려놓았다. 2005년 사카시빌리는 조지아인 주민들과 오세트인 주민들 모두에게 박애주의 원조를 제안했고 광대한 지역 자치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새로운 평화적 노고[편집]

2005년 1월 26일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 의회 의원 총회(PACE)의 한 회기에서 미헤일 사카시빌리 조지아 대통령은 남오세티야 충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그의 제안은 헌법의 자유 보장에 따라 지역의 자주-통치자를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제도를 포함한 자치주의에 대한 폭넓은 방안이 포함되었다. 사카시빌리는 문화, 교육, 사회 정책, 공공 질서, 지역 자주-정부 기구, 환경 보호 등에 관한 안건들의 조정권은 남오세티야 의회에 있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남오세티야는 사법 제도에서 표현이 보장되는 헌법과 헌법상-사법부를 지닐 만큼의 국가 정부의 구성에 대하여 소리를 높였다. 조지아는 남오세티야 거주자들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처지를 개선해야 했다. 사카시빌리는 또한 그 충돌들에 관한 문제들의 해결에 있어서 국제 공동체가 더 "중요한" 그리고 "명백한" 역할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2006년 조지아 헬리콥터 공격[편집]

2006년 11월 3일, 남오세티야군은 조지아의 국무총리 이라클리 오크루아시빌리와 조지아 국군 부참모장을 태우고 분리주의자-점령 영토를 지나가던 조지아의 MI-8 헬리콥터에 화력을 퍼부었다. 남오세티야 당국의 보고에 의하면 조지아의 헬리콥터가 "격추"되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헬리콥터는 가벼운 손상만 입었고, 조지아 정부-통제 영토에 무사히 착륙했다. 그 후에, 남오세티야의 임원들은 조지아의 헬리콥터가 오세티야 영토 상공에 진입한 것은 "분명한 도발"이라며 병력들의 공격한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비밀 요원들에 우선하여 오크루아시빌리가 승선했기 때문에 항공기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주장은 기각되었다.

2006년 사건[편집]

2006년 10월 31일, 남오세티야 경찰은 조지아의 자바 구역에서 소규모 접전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한 단체에서 3명의 남성이 사살되었다고 보고했다. 그 단체에서 압수한 무기들은 살상용 저격 소총들, 총기류들, 유탄 발사기들, 수류탄들, 폭파 장치들이 포함돼 있었다. 투사들의 장구류들과 군장에서 나온 다른 물품들로는 이슬람권 언어로 된 문헌(한 책의 제목에는 "무자헤딘 규범서"라고 쓰여있었다), 자바 구역에 대한 지도들, 러시아의 평화유지군 군복 일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습득물에 대한 조사는 투사들이 사보타주를 이행할 계획을 무산시켰고, 그렇게 긴장이 고조되어 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 날짜를 2006년 11월로 앞당겼다. 남오세티야 당국은 그 투사들을 다수가 조지아의 판키시 계곡에서 살고 있는 키스트 체첸인로 판명했다. 남오세티야는 체첸인 용병들을 고용하여 그 지역에서 테러 공격을 자행하게 한 조지아를 고발했다. 러시아는 그에 앞서 조지아가 계곡에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고발했다. 조지아 측은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을 단호히 부인했다. 조지아 내무부 대변인 쇼타 키자니슈빌리아는 그 사건이 남오세티야의 "내부 분쟁"과 연관되었을 수 있었다고 추정했다.

2006년 경쟁 선거[편집]

2006년 11월 12일에 남오세티야에서는 두 경쟁 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가 개최되었다. 그 지역에서 분리주의자-통제 편은 데 팍도 대통령으로 에두아르트 코코이티를 재선출했고 조지아로부터의 독립에 투표했다. 조지아 통제 하의 지역에서, 트빌리시에서 돌아온 비공식적인 오세티야 반대파는 경쟁 선거를 조직하여 분리론자 정부의 이전 총리였던 드미트리 사나코예프를 "대안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조지아와 미래의 연방 정부 관리 조약을 체결하자는데 투표했다. 츠힌발리와 모스크바 양측은 조지아가 분쟁 지역에서 "꼭두각시 정부"를 설치하려 한다며 그 활동을 규탄했다.

조지아의 새로운 시도[편집]

2007년 5월 10일, 트빌리시-후원으로 드비트리 사나코예프가 조지아의 대통령에 의해 남오세티야의 일시적인 관리상의 실체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날, 사나코예프는 충돌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계획에 대한 윤곽이 담긴 내용을 조지아 의회에게 전달했다. 그 활동은 미국 국무부의 승인을 획득했지만[출처 필요], 츠힌발리의 데 팍도 당국에게 경종을 울렸다.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들은 무력을 써서라도 사나코예프 정부를 몰아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러시아의 반감을 샀다.

2007년 치텔루바니 미사일 사건[편집]

2007년 8월 7일, 트빌리시 북쪽으로 약 65 km(40마일) 거리에 있는 치텔루바니의 조지아-통제 마을에 미사일 한대가 떨어졌지만, 터지지는 않았다. 조지아의 사건 관계자는 두대의 러시아 전투기가 조지아의 재외 레이다 기지 부근을 표적으로 삼아 상공 영역을 침해해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남오세티야 당국들은 그 지역의 긴장상태를 부추기기 위해서 벌인 조지아의 거짓 깃발 작전의 실시를 고발했다. NATO 국가들(사카슈빌리의 주요 동맹국들)에서 구성된 두 조사 단체들은 전투기가 러시아에서 날아와 조지아 상공을 침범했지만, 러시아 사건 관계자들의 조사 자료를 예로들어, 폭파 결정을 취소했다고 보고했다.[3]

북오세티야[편집]

지리[편집]

북캅카스 산맥에 위치해 있다. 삼림이 공화국 면적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 면적: 8,000 km2
  • 접한 지역: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 (서쪽/북서쪽/북쪽), 스타브로폴 지방 (북쪽), 체첸 공화국 (북동쪽/동쪽), 인구시 공화국 (동쪽/남동쪽)
  • 접한 국가: 조지아 (남오세티야) (남동쪽/남쪽/남서쪽)
  • 최고점: 지마라 산, 4,780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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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렉 강이 흐른다.

역사[편집]

카바르디인들과의 충돌 때문에 오세트인들은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했고, 기존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대신 러시아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러시아인은 오세트인들이 무슬림이 많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정교회를 믿는 몇 안되는 종족 중 하나였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북코카서스의 오세트인 거주 지역은 1774년에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1784년에 블라디캅카스가 세워졌다. 1921년에 북오세티야는 산악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24년에 이 지역은 자치주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1936년에는 북오세티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СОАССР)이 되었다. 1922년에 남오세티야 자치주가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오세트인들은 2차 대전 동안 소련에 보여준 충성을 높게 평가받았다. 소련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잉구쉬인들의 영토를 빼앗아 오세트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하부민족인 디고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였다. 북오세티야 공화국은 주위 국가·지역과 영토분쟁이 많은 편이다. 1990년 조지아가 독립을 선언할 때 조지아에 속했던 남오세티야의 오세트인들이 그루지야에서 분리하여 북오세티야와 통합하려 하였다. 1992년 1월 남오세티야의 국민투표에서 통일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다. 그러나 조지아 정부는 이에 강경 대처했고, 남오세티야의 오세트인들이 북오세티야로 도피해왔다. 한편, 소련의 붕괴 이후 잉구쉬인들은 소련에 의해 몰수당했던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자 하여 1992~1994년 동안 북오세티야 공화국과 잉구쉬 공화국 사이에 수백 명이 죽는 무력 충돌이 있었다.[4]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오세티야〉, 《위키백과》
  2. 남오세티야〉, 《위키백과》
  3. 조지아-오세티야 분쟁〉, 《위키백과》
  4. 북오세티야 공화국〉,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캅카스 같이 보기[편집]

남캅카스 국가
북캅카스 지역
캅카스 도시
캅카스 지리
캅카스 문화
캅카스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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