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호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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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호아성(베트남어: Khánh Hòa)은 베트남 남중부에 위치해 있는 성이다.[1][2][3][4]
개요[편집]
카인호아성의 면적은 5,199.62㎢이며 인구는 1,272,000명(2024)이다. 성도는 냐짱시이다. 북쪽으로 푸옌성, 남쪽으로 닌투언성, 서쪽으로 닥락성, 남서쪽으로 럼동성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남중국해와 맞닿아 있다.
카인호아성은 대한민국의 울산광역시와 자매 교류를 하고 있다. 냐짱시에서 북쪽으로 55Km 떨어진 닌호아현 닌푸옥에 한국 현대미포조선과 베트남 비나신이 합작한 현대 베트남 조선이 있다.
바오다이 황제(Bảo Đại)의 하계 별장, 냐짱 파스퇴르 연구소(Pasteur Institute of Nha Trang), 해양연구소(Institute of Oceanography), 백신 및 생물학 연구소(Institute of Vaccines and Biological Substances) 등이 소재한 곳이다. 카인호아성의 깜라인만(Cam Ranh Bay) 항구는 베트남 해안 중 해저 심해로 가장 가까운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베트남 내에서 잠수함 기지로 가장 적합한 장소로 평가된다. 또한 냐짱 북쪽에는 참파(Champa) 왕국의 고대 사원이 남아 있다. '카인호아(Khánh Hòa)'라는 이름은 본래 이 지역에 존재했던 참파 만달라(Mandala) 국가 '카우타라(Kauthara)'의 이름을 한자음식(漢字音式)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환경[편집]
카인호아성의 해안선은 대린(Đại Lãnh) 코뮌에서 깜라인만 남단까지 이어지며, 총연장 385km(약 239마일)에 이른다. 해안에는 수많은 하구, 석호, 강 어귀, 그리고 수백 개의 섬과 암초가 분포한다. 또한 껀호아성은 광대한 해역을 관할하고 있으며, 쯔엉사군도(스프래틀리 제도)는 성 산하 쯔엉사현(Trường Sa District)에 속한다. 해안선에는 대표적으로 반퐁만(Vân Phong Bay), 냐푸만(Nha Phu Bay), 냐짱만(Nha Trang Bay, 또 다른 이름은 꾸환만 Cù Huân), 깜라인만(Cam Ranh Bay) 등 4개의 주요 만(灣)이 형성되어 있다. 이 중 깜라인만은 약 200㎢(약 77평방마일) 면적에 달하며,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자연적 조건이 뛰어나 세계 3대 천연 항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만은 전략적 가치가 매우 커서 역사상 여러 강대국들이 해군기지로 활용해왔다. 반닌현(Vạn Ninh) 혼곰반도(Hòn Gốm Peninsula)에는 혼도이곶(Mũi Hòn Đôi)이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베트남 본토 최동단 지점이다.
카인호아성은 대부분 산악 지형이다. 가장 높은 산은 닥락성 경계에 위치한 봉푸산(Vọng Phu Mountain)으로, 해발 2,051m이다. 유일하게 넓은 평야 지역은 성 북부 닌호아(Ninh Hòa)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이로 인해 농업에 이용할 수 있는 토지가 많지 않다. 농지 면적은 87,100헥타르(약 215,230에이커)로, 성 전체 면적의 16.7%에 불과하여 남중부 연해 지역 중 가장 낮은 비율에 속한다. 대신 산림은 성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카인호아성은 온화한 기후를 자랑한다. 연평균 기온은 26.7℃이다. 계절은 뚜렷하게 구분되어, 4월부터 12월까지는 우기, 나머지 기간은 건기이다. 다만 냐짱에서는 우기가 2개월 정도로 짧다. 연평균 상대습도는 80.5%에 달한다. 냐짱에서 약 30km 떨어진 혼바산(Hòn Bà Mountain) 정상은 다랏(Đà Lạt)이나 사파(Sa Pa)와 유사한 시원한 고산 기후를 보인다.
역사[편집]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선사시대부터 이미 사람이 현재의 카인호아(Khánh Hòa)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냐짱(Nha Trang) 만에 위치한 혼쩨(Hòn Tre) 섬에서 고고학자들은 괭이(cuốc)를 사용하는 농업 문명에 속하는 많은 석기 도구들을 발견하였다. 또한, 1979년 2월 카인선(Khánh Sơn) 현에서 발견된 카인선 석금(đàn đá) 유물은 이 지역에 기원전 1천년기 중엽경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바응오이(Ba Ngòi, 깜라인 Cam Ranh)에 위치한 솜껀(Xóm Cồn) 문화 유적의 발굴을 통해, 카인호아 지역에는 약 4,000년 전 철기시대 문화가 존재했으며, 사후인(Sa Huỳnh) 문화보다 더 일찍 발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후인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카인호아에는 디엔선(Diên Sơn), 빈떤(Bình Tân), 혼쩨(Hòn Tre), 닌떤(Ninh Thân) 등지에서 사후인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고고학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원후 초기에, 참파(Chăm Pa) 사람들의 두 주요 부족 중 하나인 까우족(Cau, 크라누카밤사 Kranukavamsa) 일부가 분리되어 소국을 세우고, 이를 남참(Nam Chăm) 소국이라 불렀다. 비문에는 판란(Panrăn) 혹은 판두랑가(Panduranga)로 기록되어 있다. 이 소국은 판란(현 퐁랑 Phan Rang, 판티엣 Phan Thiết 지역)과 까우타라(Kauthara, 현재의 카인호아 지역) 두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현재의 꽝남(Quảng Nam), 꽝응아이(Quảng Ngãi), 빈딘(Bình Định) 지역에는 북참(Bắc Chăm) 소국이 존재하였다. 이후 수세기에 걸친 내전 끝에 남참과 북참이 통합되어 참파 왕국이 탄생하였다. 8세기경 남참 지역이 우세해지면서 판두랑가 왕조(호안왕국, Hoàn Vương Quốc)가 성립되었고, 까우타라 지역은 번영하여 거대한 사원과 탑들이 건설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양포이나가르(Yang Pô Y Na Gar) 여신을 모시는 포나가르탑(Tháp Po Nagar)이다. 현재에도 카인호아 곳곳에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참어로 새겨진 많은 비문이 남아 있다.
1653년, 참파 왕 바땀(Bà Tấm 또는 바뻣 Bà Bật)이 푸옌(Phú Yên) 지역의 베트남인을 침탈하자, 응우옌 주군인 응우옌 푹떤(Nguyễn Phúc Tần)이 장수인 쯔엉푹흥(Trương Phúc Hùng)에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벌을 명하였다. 전투에서 참파군이 대패하자, 참파 왕은 아들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판랑(Phan Rang) 강에서 푸옌까지의 땅을 응우옌 주군에게 바쳤다. 이에 따라 새로이 타이카인(Thái Khang) 진이 설치되었고, 북부의 탄딘(Tân Định)과 꽝프억(Quảng Phước) 지역(현재 닌호아 Ninh Hòa 시와 반닌 Vạn Ninh 현)으로 구성된 타이카인부(Phủ Thái Khang)와, 남부의 푸억디엔(Phước Diên), 화쩌우(Hoa Châu), 빈쑤엉(Vĩnh Xương) 지역(현재 디엔카인 Diên Khánh, 깜람 Cam Lâm, 카인선 Khánh Sơn, 깜라인시 Cam Ranh, 냐짱시 Nha Trang 및 닌투언(Ninh Thuận) 북부 일부)을 포함한 디엔닌부(Phủ Diên Ninh)가 설치되어 흥록(興祿 Hùng Lộc)에게 통치가 맡겨졌다. 이로써 카인호아 지역은 베트남 영토로 편입되었고, 베트남인들의 마을 개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주로 딘강(Sông Dinh)과 까이강(Sông Cái) 하류 지역에 집중 거주하였다. 1690년, 타이카인부는 빈카인(Bình Khang)부로 개명되었고, 1742년에는 디엔닌부가 디엔카인(Phủ Diên Khánh)부로 변경되었다.
1771년, 떠이선(Tây Sơn) 형제가 응우옌 주군을 상대로 봉기하였다. 3년 만에 떠이선군은 꾸이년(Quy Nhơn)부터 빈투언(Bình Thuận)까지의 지역을 장악하였다. 응우옌군의 장수 떰푹합(Tống Phúc Hạp)이 군사를 이끌고 반격하여 빈투언과 디엔카인 지역을 탈환했지만, 곧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가 다시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1793년 7월, 응우옌푸까인(Nguyễn Phúc Ánh, 후일의 자롱제 Gia Long)이 대군을 이끌고 자딘(Gia Định)에서 출발하여 냐짱에 상륙, 디엔카인을 공격하였다. 떠이선군은 이를 막지 못하고 디엔카인과 빈카인을 포기하였다. 응우옌푸까인은 디엔카인에 성을 쌓고 조선소를 세웠다. 이후 떠이선군의 장수 쩐광지에우(Trần Quang Diệu)가 1794년과 1795년에 두 차례 재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802년,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킨 후 응우옌푸까인은 자롱(Gia Long) 황제로 즉위하였다. 1803년, 빈카인 진은 빈화(Bình Hòa) 진으로, 빈카인부는 빈화부(Phủ Bình Hòa)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행정 중심지를 디엔카인부로 옮겼다. 1808년, 진은 '쩐(Trấn)'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831년(명명제 Minh Mạng 12년)에는 '쩐 빈화'가 '카인호아성(Khánh Hòa)'으로 승격되었고, 빈화부는 닌호아부(Phủ Ninh Hòa)로 이름이 바뀌었다. 1884년,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와 파테노트르 조약(Hiệp ước Patenôtre)을 체결하면서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 들어갔다. 카인호아는 중부 지역에 속했으며, 남조(남 왕조) 행정기관과 프랑스 보호청이 병존하였다. 남조 관리는 주윤(week vũ), 안찰(án sát), 령병(ánh binh) 등이 있었으며, 디엔카인에 주둔하였다. 프랑스 측은 정사(chánh sứ), 부정사(phó sứ), 감병(giám binh)을 냐짱에 주둔시켰고, 이로써 냐짱은 점차 도시로 발전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 시기, 카인호아성의 성도는 디엔카인성채(Diên Khánh Citadel)에 있었으나, 1945년에 냐짱으로 이전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카인호아성은 남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 해군, 공군, 그리고 미 태평양 공군(USAF) 등의 주요 군사 활동 거점이었다. 특히 깜라인만과 냐짱 공군기지가 중심지였다. II 군단 본부(II Corps Headquarters)는 냐짱에 위치했으며, 장성, 참모장교, 정보부대, 남베트남군 연락장교 등이 주둔하였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베트남 전쟁의 종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은 1975년 10월 29일에 푸옌성과 카인호아성을 통합하여 푸껀성(Phú Khánh)을 신설하였다. 이후 1977년, 냐짱은 시(city)로 승격되었고, 1982년에는 쯔엉사군도(Trường Sa, 스프래틀리 제도)가 푸껀성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30일, 베트남 국회는 다시 결정을 번복하여 푸껀성을 푸옌성과 카인호아성으로 분리하였다.
산업[편집]
카인호아성은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성이다. 농업 부문은 비교적 작지만, 산업과 서비스 부문이 매우 강하다. 성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해변을 보유하고 있어 참(Chăm) 문화유산과 더불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식품 가공 산업은 규모가 크며, 특히 지역 어업 제품과 새우 양식장을 위한 식품을 가공하는 산업은 크다. 다른 산업 부문에서는 음료, 직물, 섬유, 종이 및 건축 자재를 생산한다.
냐짱(Nha Trang)은 남중부 해안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 중심지이며, 꽝호아성 전체는 이 지역 산업 GDP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현지 수산물을 가공하거나 새우 양식장에 공급하는 식품 가공 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그 외에도 음료, 섬유, 직물, 제지, 건축 자재 제조 산업도 운영되고 있다. 산업 생산은 냐짱 주변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꽝호아성은 또한 이전 러시아 해군 기지였던 깜라인(Cam Ranh) 지역과 연계된 투자의 혜택도 크게 보았다. 깜라인에는 약 30개의 공장이 부속되어 있었다. 북부에서는 반퐁항(Vân Phong Port)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반퐁 경제구역(Vân Phong Economic Zone)이 개발 중이며, 새로운 주요 산업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2023년 카인호아성의 GRDP는 약 60,158억 동(약 24억 6,200만 달러)에 달하였다. 1인당 GRDP는 약 4,790만 동(약 1,964달러)이며, GRDP 성장률은 전년 대비 10.35%를 기록하였다.
사회[편집]
베트남의 공식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로마자로 적는다. 베트남어는 단철어(單綴語)로 성조에 6성이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가 추진되어 현재 한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꾸옥 응으(베트남어: quốc ngữ / 國語)로 불리는 이 로마자 표기는 1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으려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는 포르투갈어 철자법을 바탕으로 최초의 안남어 사전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어는 민난어처럼 동아시아의 언어들 중에서 중국어와 유사한 문자 체계에서 로마자로 변경한 흔치 않은 언어 중 하나이다. 이 로마자 표기법은 현지인들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45년 이후 베트남이 독립한 뒤 공식 표기법이 되었다.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최근 베트남 행정부의 개혁으로 영어는 제2 언어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영어 학습은 이제 대부분의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함께 또는 프랑스어를 대신하여 의무화되었다.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의 인기도 베트남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높아졌다.[5][6]
문화[편집]
공산주의 시대에 베트남의 문화적 삶은 정부가 통제하는 미디어와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십 년 동안 외국 문화의 영향은 차단되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의 문화를 음미하고 공유하는 것이 강조되었었다. 1990년대 이래로, 베트남은 일본, 유럽, 미국의 문화와 미디어에 대폭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에는 1945년 9월 2일에 하노이에서 설립된 국영방송국인 베트남의 소리가 있다.
베트남의 민속 의상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여성들이 입는 아오자이이다. 아오자이는 현재에는 명절이나 결혼 등 행사, 일상의상 등으로 입는다. 흰색 아오자이는 베트남 전역에서 여학생의 교복으로 지정된 경우가 많고 학생 이외에는 다양한 색상의 원단으로 아오 자이를 만들어 입는다. 예전에는 성별 구분 없이 아오자이를 입었으나 현재에는 여성용 의복으로 한정된다. 단, 전통 문화 행사에서는 남성이 입는 경우도 있다.
교통[편집]
카인호아성은 베트남의 주요 남북 교통 축을 따라 위치해 있다. 국도 1호선과 남북 철도(North–South Railway)가 성을 관통한다.[ 모든 통일 특급(Reunification Express) 열차와 일부 지역 열차가 냐짱역(Nha Trang Railway Station)에 정차한다.
해안 지역에 여러 천연 심해 항구를 보유한 덕분에 카인호아성은 심해항 개발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냐짱 항(Nha Trang Port, 관광 및 화물 항구)과 독렛 항(Dốc Lết Port, 조선 및 물류 항구)이 운영 중이다. 또한 일본 수미토모(Sumitomo)가 주도하는 일본 기업 컨소시엄이 약 150억 달러를 투자해 개발 중인 반퐁항(Vân Phong Port) 대규모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이 항구가 완공되면 10만 톤급 선박과 연간 1억 톤 규모의 화물 처리가 가능할 전망이다.
성 남부에는 깜라인 국제공항(Cam Ranh International Airport)이 위치해 있다.
교육[편집]
카인호아성은 베트남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중심지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는 다학제 대학인 냐짱대학교(Nha Trang University, 구 냐짱 수산대학교), 해군사관학교(Naval Academy), 공군사관학교(Air Force Officer Academy), 사범대학(Normal College), 유아교사 양성대학(Kindergarten Teacher's Training College), 예술관광대학(Arts and Tourism College) 등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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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카인호아성〉, 《위키백과》
- 〈카인호아성〉, 《나무위키》
- "Khánh Hòa", Wikipedia
- "Khánh Hòa province", Wikipedia
- 〈베트남〉, 《나무위키》
- 〈베트남〉,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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