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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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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집
요정 내부 모습. 병풍이 둘러진 실내는 전통방식 그대로 좌식으로 마련되어 있다. 외국인 손님을 위한 쇼파형 룸도 있다.© 이보배 기자

기생집기생이 거처하며 술과 유흥을 제공하는 집을 말한다. 기방이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에는 기생이 교방(敎坊)에 속하여 노래와 춤을 맡아보았고, 조선 시대에는 약방(藥房)에 속하여 의녀(醫女)로서 행세하거나 상방(尙房)에 속하여 침선(針線)을 담당하였으므로 약방기생이라 하였다.

기방은 사극에서는 오늘날의 유흥주점 같은, 여러 기생들이 술상을 받는 손님들 곁에 하나씩 붙어 앉아 술을 따르고 메인이 되는 가무를 하는 기생이 따로 있고 술과 흥에 취하면 손님도 일어나 같이 춤추며 스킨쉽도 하는 식으로 표현하곤 하지만 실제 기방에는 보통 기생은 단 한 명이고 고객들은 그녀의 가무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기에 스킨쉽은 커녕 가까이 앉을 수도 없었다. 현대로 치면 지하 아이돌의 소극장 공연 혹은 디너쇼의 연예인과 더 유사했다.

요정[편집]

원래 요정은 우리나라 전통 기생집이었다. 한식으로 술상을 차려놓고 가야금이나 북, 장구 등을 연주하며 여성들이 술 시중을 들었다.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 일부 유명한 요정의 경우에는 정치적인 중대사항이 '요정'에서 결정되기도 했다. 때문에 '요정 정치'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서울에서 제일 먼저 문을 연 요정으로는 명월관을 비롯해 국일관, 송죽관 등이 있었고 당시에는 기업가, 정치인, 상인들이 주로 이용했다. 이때 손님들에게 내놓은 술은 대부분 청주였으며 접대를 하던 여인들은 기생으로 불렸다.

5·16 군사정변 전까지만 해도 고급 비밀요정이 서울 도처에 존재했다. 비밀요정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만 골라 은밀히 운영됐는데, 돈 많은 기업인들이 사업 관계로 교제하기 위해 만나 즐기는 장소 역할을 했다. 당시 운영되던 비밀요정은 주인마담과 통하는 사람들만 사전에 내통해 드나들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현재도 정통 요정들이 비밀스럽게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적인 스타일의 요정이 속속 등장해 현재 종로와 강남에도 몇몇의 비즈니스 요정이 운영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현재 요정에서는 전통주보다는 양주를 제공하며 손님 한 사람당 20만~25만원으로 비교적 저렴하게 운영되고 있다. 변치 않은 것은 젊은 아가씨들이 한복을 입고 손님을 접대한다는 것.

요즘의 비즈니스 요정에서는 예전처럼 가야금을 뜯고 창을 하지는 않는다. 대신 현대식으로 밴드를 준비해 손님들의 흥을 돋운다. 또 고급 술집을 이용할 때는 보통 식사를 거친 후 2차로 장소를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요정은 식사와 술과 음주 가무를 모두 한자리에서 해결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요정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아가씨들의 경우 대부분이 조용하고 다소곳한 편이다. 손님이 말을 걸기 전에는 먼저 말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위기가 무르익고 음주가무가 시작되면 색다른 서비스로 손님들을 공략한다.

현대판 요정은 12시에 영업을 종료하는 것이 상례다. 때문에 저녁 6~7시 정도에 식사를 하지 않고 가는 것이 좋다.

또 요정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당일 이용을 원한다면 오후 1~2시 이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손님은 대체적으로 교양 있는 남성들이 이용하는 편이다. 요즘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남성들도 요정을 자주 찾는다.[1]

기방의 손님과 운영자[편집]

조선시대 기방의 기부(妓夫·기둥서방)들은 초보 기생을 빨리 단련시키기 위해 수치스러운 술자리의 통과의례를 반드시 거치게 했다. 그림은 작자 미상의 '기방의 풍경'. 실제 기생집에서는 투전, 쌍륙, 골패와 같은 놀잇거리, 혹은 노래를 듣거나 했다. 사극에서 보여지는 기생집의 모습은 일제시대를 거쳐 왜곡된 모습이다.

TV 사극에 이따금 벼슬 높은 양반들이 기방을 찾아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무언가 좀 잘못된 것이다. 시정에 기방을 열고 손님을 받아 영업하는 것은 조선후기에 생긴 것이니, 조선전기에는 그런 장면이 나올 수가 없다.

또 양반은 기방에 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양반 중 무반은 기방에 드나들 수 있지만, 우리가 양반 하면 떠올리는 글 읽는 선비, 문관은 기방 출입이 금지다. 물론 집안 말아먹을 그런 파락호라면 상관없다. 오른쪽 그림에서 기생 오른쪽에 앉아 있는 노란 초립(草笠)을 쓴 사내가 보이는가? 이 사람이 바로 별감(別監)이다. 별감은 액정서란 관청에 소속된 하급 벼슬아치다. 별감은 왕명을 전달하고, 궁문과 궐문의 자물쇠와 임금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의 관리, 대궐 뜰에 자리를 까는 일 등을 맡는다. 별감은 임금에게 딸린 대전별감, 왕비에게 딸린 왕비전별감, 세자에게 딸린 세자궁별감이 있는데, 끗발은 대전별감이 가장 세다. 이 별감이 기방의 운영자이자 고객이었다. 기방의 운영자를 기부(妓夫), 곧 기둥서방이라고 한다. 기부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전(殿)의 별감, 포도청의 포교, 승정원의 사령(使令), 의금부의 나장(羅將), 궁방이나 왕실 외척의 겸인(人·청지기), 무사만이 기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의금부의 나장과 승정원 사령은 관기(官妓)의 기부가 될 수 없도록 하였다.

따라서 대원군 이전에는 위의 여섯 부류가 기부가 되어 기방을 운영할 수 있었고, 또 기방에 출입하는 단골이었던 것이다. 그림으로 확인을 해 보자. 왼쪽 그림에서 담장 밖에서 기생의 전송을 받고 있는 자주색 상의를 입은 사내가 곧 포도청의 포교다. 이 그림에 별감과 포교가 등장하는 데는 이런 내력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만이 기방의 고객은 아니었고, 각 관청의 서리, 역관이나 의관(醫官) 등의 중인, 시전(市廛) 상인 등도 기방을 찾았다. 대개 서울에 사는 양반도 상민도 아닌 중간층들이 기방의 고객이었던 것이다.[2]

기생[편집]

기생에는 서울 기생이 있고 지방 기생이 있다. 서울 기생은 지방 기생을 뽑아 올린 것이다. 성종 때 완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기생 150명과 연화대(蓮花臺) 10명, 의녀(醫女)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의 관비(官婢)에서 뽑아 서울로 올리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뽑힌 기생이 서울 기생이다. 이들은 장악원에 소속되어 춤과 노래를 배운다. 이들의 본래 임무는 국가와 궁중의 행사에 춤과 노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외에 기생들은 양반들의 연회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 경국대전을 개정하여 속대전을 만들었는데, 기생에 관한 조항에 변화가 있었다. 즉 지방 각 고을에서 3년에 한 번 기생을 뽑아 서울로 올려 보내는 조항이 없어지고,"진연(進宴·왕실 연회) 때 여기(女妓) 52명을 뽑아 올린다."라는 새 조항이 생긴다. 진연이 있을 때만 지방에서 52명을 선발했던 것이다. 물론 이 수는 왕의 명령에 의해 바뀔 수 있었다.

기생집의 안주상[편집]

MBN '고수의 비법 황금알'에서는 '한정식'이 기생집 안주상이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정식이 궁중 사람들이나 양반들이 먹던 전통 음식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을 상대하던 기생집의 안주상이라고 한다.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는 한정식의 형태가 한국 전통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한국 전통 식문화는 독상이라고 한다. 기생집의 정식 명칭이 요리옥(요정)으로 음식은 물론 연회도 즐길 수 있던 장소라며 음식 자체는 궁중, 양반가의 음식이지만 기존의 독상 문화에서 벗어났기에 그렇게 본다고 말했다.

'정식'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말이 아니라고 한다. 일본 말이다. 일정한 요리 종류를 정해 놓고 한 끼 식사가 되게 한 상차림이라고 하며, 일본인 입맛에 맞게 연회 상을 바탕으로 한식, 일식, 중식을 포함해 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쇠퇴한 요리옥을 계기로 정재계인들의 음식이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으로 대중화된 것이 현재 한정식의 탄생이라고 한다.[3]

현대판 기생집 장점[편집]

첫째 밥상에 음식 가짓수가 좀 된다. 맛도 동네 한정식 수준은 넘었다. 삼겹살, 회, 파전, 닭갈비 등등 단일종목으로 쩐져대는 익숙한 술자리가 아닌 상다리 휘어지는 한상 그득의 기쁨이 있다. 또한 동네 한정식의 단점인 맛있는거 한종목 더 달라구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왠간해서는 안 들린다 한상 그득 차려 놓고 배 채워가면서 반주삼아 안주빨세워 감서 제대로 쩐저대기에 기쁨이 크다. 되도 않는 말라 비틀어진 과일 안주에 마시는 양주 한병의 승질나는 술자리에서의 돈 아까움은 일단 없다.

둘째 술이 무한이다. 도수와 주종이 다양하다. 마음잡고 정한 술을 양껏 먹을 수 있게 리필을 해주는데 이런 아름다운 제도가 온 누리에 펼쳐지었으면 한다. 우리 사회 술자리의 특성 중 한갑부의 맘시롱에 가장 애를 태우는게 있다면 그 비싸고 좋은 양주를 대취해서야 마실 수 있고 그것도 맛을 음미하는 스트레이트나 온더락의 제대로가 아닌 폭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쭈욱 그 좋은 양주를 온전한 모습으로 달릴 수 있다. 그래서 좋다. 아쉬움이 있다면(물론 댕겼던 곳이 살림살이의 특성상 격이 낮은 곳 일수도 있겠으나) 전통주가 준비되어 있으나 좋아하는 더운술은 어렵다는 것이다. 숯불을 피워 자그마이 구멍을 낸 술화로에서 중탕으로 끓여내어 술국자로 퍼주는 뜨신 술은 역시 이곳에서도 맛보기 힘들다.[4]

수정동 정란각[편집]

부산 수정동 정란각

큐수지방의 건축 양식으로 실내에는 마루와 다다미방, 온돌방이 설치 되어 있다. 한때는 200명이 넘는 기생이 있었다 하며 일본인만 출입할 수 있는 기생집으로 해방후 한국인이 운영을 하였다 한다.

부산에는 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해 일제시대때 일본인이 많이 거주를 하였다. 그만큼 부산에는 일본풍의 집들이 도처에 있다.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제일관문이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수정동 범천동 가야 주례 대신동을 품안에 거느린 산을 우리들은 예로 부터 엄광산이라 불렀는데 일본인들이 부관페리호를 타고 부산항으로 올때 저 멀리 바다에서도 보인다하여 고원견산으로 불러 한때는 산명이 고원견산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 산아래 수정동에는 지금도 일본 풍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이름하여 정란각으로 쉬운말로 기생집이다. 큐수지방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일제시대때 일본인인 철도청장이 거주를 할 목적으로 지어져 별장으로 이용을 하였다 한다. 해방이후 한국인이 인수를 하여 정란각이란 기생집으로 영업을하였다 하며. 60~70년대에는 그래도 잘나간 방석집으로 200명이 넘는 많은 기생들이 있었다 한다. 내국인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 하며 주로 일본 관리들이 출입을 하였다 하는데 쉬운 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거나하게 차려 나와 질펀하게 놀고가는 그런집으로 현재에도 요식업의 문패가 붙어 있다. 1993년 영화 장군의 아들1편의 촬영 장소로 이용을 하였고 일본식 건물 답게 다다미방과 온돌방이 함께 되어 있다 . 지금은 근대문화 유산 33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어며 한 단면의 우리 역사를 볼 수 있는 것 같아 씁슬하다.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 부산진역 또는 버스는 부산일보 또는 고관입구에서 내려 고관입구 사거리 홍골길을 100m따라가면 된다. 새로운 주소는 홍골길195호[5]

각주[편집]

  1. 이보배 기자, 〈수준 높은 서비스에 화끈 언니들 술시중·밥시중〉, 《브레이크뉴스》, 2008-11-07
  2.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4)기생과 기방〉, 《서울신문》, 2008-11-10
  3. 박지은기자, 〈고수의 비법 황금알, 한정식이 기생집 안주상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을 상대하던 기생집의 안주상〉, 《소믈리에타임즈》, 2017-08-04
  4. 한갑부, 〈<신기생뎐> 풍류객 기생집을 노닐다. 내가 생각했던 쇼는 그 쇼가 아니었다.〉, 《티스토리》, 2011-02-18
  5. 이창우, 〈기생집〉, 《티스토리》, 2009-03-02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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