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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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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단청

단청(丹靑)은 고청색·적색·황색·백색·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건축물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장식미술이다.[1]

개요[편집]

단확(丹雘)·단벽(丹碧)·단록(丹綠)·진채(眞彩)·당채(唐彩)·오채(五彩)·화채(畫彩)·단칠(丹漆)이라고도 한다.

건축물이나 기물(器物) 등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고, 재질의 조악성(粗惡性)을 은폐하는 한편, 그 대상물이 지닌 특수성과 위계성(位階性)을 강조하고 통일성과 다양성을 주는 구실을 한다.

주로 목조건축물에 채색으로 장식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 밖에도 석조건축물을 장엄하게 하거나 조상(造像)·공예품 등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여 장식하는 서(書), 회(繪), 화(畫) 등을 총칭하여 말하기도 한다.[1]

특징[편집]

오행설에 근거하여 오방색인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을 기본으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문양을 그려 넣는다. 보통 사찰에는 금단청, 궁궐에는 모로단청, 서원에는 긋기단청을 사용하였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전통미술공예학과에서 전통회화 전공을 선택하면 단청도 배울 수 있다. 현재 단청을 가르치는 대학은 문화대학교, 동국대학교 정도로 매우 드물다.

단청을 그리는 단청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다.[2]

명칭[편집]

기원전 한나라 시기의 문서에서 '단청'이라는 단어가 발견된다. 사기의 이사열전에서 이사가 올린 상소문을 따왔는데 거기에 이미 서촉단청(西蜀丹靑)이란 글귀가 나온다. 맥락 상 개요의 뜻이 아니라 개요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재료란 뜻으로 쓰인 듯 하지만 이미 단과 청으로 채색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국에서 단청이라는 용어는 그림이나 안료 또는 단책청사(丹冊靑史)의 줄임말로써 역사책을 뜻하거나, 단지청쇄(丹墀靑瑣)의 줄임말로써 궁궐을 뜻한다. 보통은 채화(彩畵) 또는 채회(彩繪)라고 부르는데 앞에 건축 또는 고건(古建)을 붙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따로 건물에 그리거나 채색하는 걸 뜻하는 말이 없어서 그냥 채색이라고 부른다.

목적[편집]

원래 주목적은 색을 칠하는 건물이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궁궐, 사찰, 서원 건축 등 공적이고 권위를 살려야 하는 건축에 많이 사용되었다. 실용적인 측면에선 나무에 벌레가 먹지 않게 하고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또 한국에서 건축재로 흔히 쓰이는 소나무의 균열을 감추고 건축의 결함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30~40년 정도마다 다시 그리곤 하였다.

원료[편집]

단청의 원료인 안료는 원래 진채 또는 암채라 하여 광물질(무기염류) 색감을 사용하였다. 또 단청이 무광택이므로 역광을 받아도 제 빛깔을 발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단청 특유의 옥색을 내고자 양록을 사용했는데, '양록'이란 바로 파리스 그린이다. 비소를 원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독성 문제로 1990년대에 일본에서도 생산을 금지하자 현재는 다른 안료를 혼합해서 사용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방식 단청은 원재료를 구해 도료를 만드는 과정이나 칠하는 데 드는 품이나 비용이 많이 드는 물건이다 보니 과거 민간에서는 단청을 칠하지 못해 기름을 칠하는 정도로 만족하였다. 화학안료를 많이 쓰는 현대에도 중소규모의 암자나 신당에는 불교용품점에서 파는 단청무늬 스티커(단청지)를 도배하는 경우가 있다.[2]

종류[편집]

가칠단청[편집]

가칠단청

가칠단청은 무늬 없이 단색으로 칠한 단청을 말한다. 주로 기둥은 붉은색 계통의 석간주 칠을 하고 나머지는 옥색인 뇌록을 칠한다. 뇌록가칠단청은 긋기단청, 모로단청, 금단청의 바탕면이 되기도 한다. 가칠단청만으로 끝내는 것은 단청 중에서는 가장 등급이 낮은 소박한 것인데 지금 남아 있는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다. 가칠단청은 화려한 의장성 보다는 방부의 목적에 충실한 단청이다.

긋기단청[편집]

긋기단청

긋기단청은 가칠단청 한 위에 말구부분이나 가로방향으로 흑선과 백선을 넣는 것을 말한다. 선만 넣어줘도 정리된 느낌이 나며 목재가 휘었더라도 곧게 보이는 의장성도 갖는다. 긋기단청까지도 의장성보다는 부식방지의 단청 원래목적에 충실한 검소한 단청이다. 가칠과 긋기단청은 사당이나 검소함을 표방하고 있는 서원이나 향교건물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모로단청[편집]

모로단청

모로단청부터는 각종 문양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단청이다. 그러나 모로단청까지는 문양이 부재 전체를 채우지는 않는다. 서까래의 경우 끝부분, 보나 창방,평방 등의 가로부재는 부재의 양쪽 부분에만 머리초 문양이 들어가고 가운데는 긋기단청으로 마감된 단청이다. 모로단청은 궁궐 및 관영 건축물과 같이 화려한 건물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종교 건축물이 아닌 이상에는 모로단청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금단청[편집]

금단청

모로단청의 중간 긋기 부분인 계풍에 금문(錦紋)이나 별화(別畵)로 장식한 단청을 말한다. 금(金)으로 칠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계풍을 비단처럼 수놓았다 하여 금(錦)단청으로 불린다. 그러나 때로 보다 화려하게 하기 위하여 금분(金粉)을 바르는 고분법(高粉法)이 쓰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실전되었다. 금단청은 가장 고급스러운 단청으로 주로 사찰 불전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조의 궁궐도 모로단청에 그쳤던 것을 보면, 신의 집인 금당을 가장 화려하게 꾸미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주칠단청[편집]

붉은색과 흰색으로 칠한다. 고대에 한중일 공통으로 쓰던 양식인데 한국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사용했다. 물론 조선시대에서도 사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쓰는 양식이다.

역사[편집]

동아시아 단청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한나라 시기의 집 모양 토기에서도 실제 채색된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보통 고대의 단청은 오행설에 근거하여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을 기본으로 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 문양을 그려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언제 단청이 그려지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중반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무늬가 들어간 단청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삼국 중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백제, 신라, 멀리 일본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2]

삼국시대[편집]

백제 단청의 예상도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백제, 신라등의 유물에서 단청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는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단청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제외하면 남은 건축이나 건물 그림도 제대로 남아있는 게 없어서 이 시기 단청은 확실히 밝히기는 어렵다.

고구려 고분 등의 벽화 등을 근거로 덩굴무늬(당초문)와 상록하단의 초기 형태가 있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단청의 안료가 비싼 외국산 재료라는 점은 그 당시부터 지적된 사항이었는지 삼국사기에 '진골 이하는 오채로서 꾸미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단청을 제한하는 내용인 듯하다.

고대 중국의 기록에는 '단칠'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데, 단청과 옻칠이 가구와 건축을 장식하는 주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머리,다리 목받침을 보면 왕의 것은 검은 옻칠과 금 장식이, 왕비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단청을 칠한 것으로 옻칠이 더 권위 있는 장식 방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남아있는 호류지에서 삼국시대 단청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호류지는 백제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물이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건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지금은 호류지 금당의 단청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과거에는 불교 건축물답게 단청이 있었다. 조사한 결과로는 기둥 등 나무표면은 주홍색을 사용하였고, 난간에는 녹청색, 부재의 단면은 황토색, 벽은 백색, 개판은 호분색을 사용하였다. 또한 실내는 벽화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는 시텐노지 등을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다만, 이것이 반드시 백제의 단청과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거니와 신라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통일신라시대[편집]

백제 단청의 예상도

통일신라 당시 단청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건축물에 쓰였던 와당이나 전의 연화, 보상화, 당초문 등과 유사한 문양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특히 신라 통일기에 고구려에서 전래된 당초문과 연화문이 합하여 나타난 우아한 보상화문은후대 단청문양의 조형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시대[편집]

고려시대 단청의 예상도

고려시대의 단청색조는 외광을 강하게 받는 부재, 즉 기둥과 같은 곳에는 붉은 색을 칠하고 외광을 받지 않는 그늘진 곳, 즉 추녀나 천장부분에는 녹청색으로 칠하여 장식의 명도를 높여 이른바 상록하단의 원칙을 지켰다. 지금 남아있는 몇몇 고려시대 건축물이나 고려 불화 등지에서 이러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상류층 건물의 단청 재료는 옻칠을 활용하여 광택이 나는 붉은 주칠 등의 화려함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의 단청 문양은 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봉정사 극락전 등의 오래된 고려시대 사찰을 조사해보면 11세기 북송의 영조법식이란 책에 등장한 무늬와 유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원나라의 간섭기를 받으면서 기하학적 무늬가 많이 도입되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종 금속들로 서까래나 기둥을 장식하고, 자기로 기와를 구워 올리는 등의 사치를 부리는 모습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자기로 된 기와 등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편집]

경복궁 근정전 내부 단청의 모습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 때처럼 단청이 상당히 널리 쓰였고, 일반 민가에서도 돈만 있으면 단청 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단청 재료가 중국산이라 비싸고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세종 11년(1429)에 "공사옥우(公私屋宇)에는 주칠(朱漆)을 물용(勿用)케 하라"는 어명이 떨어지는 등 단청에 제한이 가해졌고, 이후로도 비슷한 명이 나와 계속 단청은 축소되었다. 검소함을 지향했던 유교의 영향이 강했기 때문. 각종 특수한 기와나 금속 장식 등 역시 조선시대에 와서 사라졌다.

이후 문종 때 모든 건물에 주칠을 금하였던 것을 완화하여 관청과 사찰, 표녀, 충신, 열녀 등의 사당에 단청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예종 원년(1469)에 만든 법령집 경국대전에 보면 "사찰 이외에 진채(眞彩)을 사용하는 자는 곤장 80대의 형에 처한다."라는 법이 정해지기도 했다. 다만 이전에 단청을 칠했던 민간주택 중에는 그대로 인정받은 경우도 있었는데, 대전의 쌍청당의 경우에는 민가인데도 단청이 남아있다.

즉 조선시대 대부분 기간 동안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민간 건축에서는 단청을 허용하지 않았고 위와 같이 종교 건축이나 공공 건축에만 허용됐다. 조선시대에 단청은 더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해 갖은금단청 등 양식이 등장했다. 특징은 모로단청을 쓴 왕실건축이나, 가칠단청에 그친 종묘 같은 국가의 핵심 건축물보다도 전국 각 지방의 유명 사찰들이 더 화려하고 정교한 금단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인사 대적광전의 단청은 오히려 경복궁, 창덕궁보다 더 색채가 화려하다. 비록 불교 교세가 줄어 건축의 규모는 조선 이전에 비해 줄었지만 유교적 기조에서 비교적 벗어난 불교 건축물이란 특성 덕에 오히려 왕실건축보다 더욱 화려한 것이 허용된, 세계적으로 특이한 사례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단청색조는 건물 내외의 장식에 따라 외부단청을 밝은 색 계통의 등황색을 현저하게 증가시켜 장식의 명도를 높였고, 내부단청은 광선의 명도가 외부의 단청보다 낮은 것을 고려하여 주로 녹청색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이 시기 들어와 단청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변화하였는데 단청의 단위 무늬의 구성과 장식구성이 매우 복잡해지고 다채로운 색조의 대비가 화려하게 된 점이다. 다시 말하면, 무늬의 구성형식이 세밀해지고 색조가 매우 표현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건물에 금속 장식등이 사라진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단청 중에서도 옻 단청이나 고분법 등 사치스러운 모습은 사라졌다. 그래도 근근히 이어져서 청평사 극락전에는 한국 유일의 옻 단청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사라졌다. 일본인 고건축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송광사의 국보인 국사전 실내 천장이 검은 옻칠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한의 건축문화'란 책에 실었었다. 실제로 국사전 천장은 검으며, 세종 시기에 일시적으로 단청이 금지되기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는 단청이다.

사실 성종-연산대의 간신 임사홍의 자택은 단청을 그렸으며 중종대의 대신 송일 역시 새로 지은 집에 단청을 그리는 등 사치했다는 이유로 사직하려 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권신 김안로의 집에서도 단청을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 한마디로 부유하고 권세가 높은 집안에서는 단청을 그리기도 했다는 말. 다만 이럴경우 사치를 했다는 이유로 좀 많이 까였고 명종대 장악원 정 김규가 단청을 비롯한 사치를 부리고 뇌물 등을 받은 죄로 탄핵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가면 서원의 단청 사치가 문제였던 듯하다. 영조 14년(1738) 병조판서 박문수의 상소에서는 서원을 지을때 '크게 서원을 창건하여 단청을 찬란하게 꾸민다'며 사치스러운 서원을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편집]

기본적으로는 조선시대 단청을 바탕으로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시기에 따라서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인 숭례문 역시 예외는 아니다.

문화재가 아닌 현대에 새로 짓는 전통 건축물 중에서는 더 이상 조선시대 처럼 제도적인 제약이 없기 때문에 굳이 조선시대 스타일 단청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우도 많으며 건물 전체를 개금, 그러니까 금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금칠 단청을 마냥 돈지랄로만 볼 수는 없다. 생각보다 실용적인 효과도 있다. 전통 방식으로 단청을 칠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 세월이 지나면 색이 바래서 다시 칠하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금은 거의 화학적으로 부식되지 않으므로 건물에 금을 덮으면 관리비용이 오히려 적게 들어서 개금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욱 돈을 아낄 수 있다. 그리고 얼핏 보면 금을 어마어마하게 쓰는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금을 아주 얇게 펴는 방식이라 '보기보다는' 금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또한 하나의 문화양식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에 새롭게 만든 건축물이 세월이 흘러 미래에 새로운 문화재로 지정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역사학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고대 건축을 복원한답시고 하기만 하면 일단 무조건 조선시대 단청을 그려놔서 조선시대 건축물로 만든다고 까인다. 고려시대 이전의 건축물에까지 조선식 단청을 입히는 복원방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전하다. 이러한 부분은 조선시대 이전 단청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색상, 염료 재작, 단청 기법 등의 상세한 복원에 난관이 많아 그나마 자료가 많은 조선시대 방식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복원이 불가능한 단청을 안 하는 선택지도 있지만 미관상 문제나 목재 건물의 방충, 내구성 문제 등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반면 단청 전문가들도 이게 틀린 방식인 줄은 알지만 대중들의 시선을 의식해 가장 인지도 있는 한국 단청인 조선시대 양식 단청을 칠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어 주칠단청 처럼 빨간 기둥과 하얀 벽으로 칠하고 금으로 장식하는 양식은 과거 한중일 모두 사용했던 방식이지만 잘 모르는 현대인들은 주칠단청으로 만든 한옥을 보고 왜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칠단정 인지도가 늘어나면 해결될 문제라고 기대해 봄 직하다. 항상 고증 논란이 따라다니는 연애사극, 퓨전사극 드라마들은 반대로 보면 새로운 양식의 시험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완벽한 고증은 아니었더라도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붉은색 주칠단청을 적용한 한옥을 보여주었다.[2]

단청의 사상[편집]

건조물에 조영사상이 있듯이 단청도 사상에 바탕을 두고 생성 발전하였다. 단청의 사상은 조영사상과 한 가지로 음양(陰陽)과 오행설(五行說)에 기조(基調)를 두고 있다. 오행의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는 각기 전속된 상징을 갖고 있다.

목(木): 춘(春) ― 동방(東方) ― 청색(靑色)

화(火): 하(夏) ― 남방(南方) ― 적색(赤色)

토(土): 토용(土用) ― 중앙(中央) ― 황색(黃色)

금(金): 추(秋) ― 서방(西方) ― 백색(白色)

수(水): 동(冬) ― 북방(北方) ― 흑색(黑色)

여기의 청, 적, 황, 백, 흑은 단청의 5채(五彩)로 기본색이 된다. 이 기본색이 음양에 맞추어 조색(調色)되면 중간색이 나오고 5색과 중간색을 음양에 따라 배색하면 단청의 색감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색감에는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가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3]

단청의 시공[편집]

1.가칠(假漆); 바탕색을 바른다. 바탕색에는 네 가지가 있다. ① 금박(金箔) 바탕, ② 목부(木部) 바탕, ③ 연왕 바탕, ④ 사벽(沙壁) 바탕.

2.안료를 조색(調色)한다. ① 백토(白土)에 잘 끓인 아교(부레풀) 물을 붓고 골고루 개어서 쓴다. 백토는 물에 앙금을 가라앉혀 수비(水飛)한 아주 잔 정물(淨物)만을 사용한다. 이것이 모든 조색의 기본이 된다. ② 연분(鉛粉)은 아주 잘게 하고 정농수(精濃水)에 타서 화성제(和成劑)를 만든다. 이것을 뜨거운 물에 부어 녹이고 나서 더운 물을 부면서 잘 익혀, 갈아서 묽거나 진하지 않게 한다.

3.가칠법(假漆法) 이상의 조색과 안료로 무늬 놓을 바탕색을 칠한다. ① 청·녹색 바탕, ② 홍색(紅色) 바탕, ③ 백색(白色) 바탕

4.초상(草像)-바탕색이 칠하여졌으면 결정된 무늬를 초칠하여 채색할 도안을 표현한다(초칠).

5.기화(起畵)-초상(草像)에 따라 채색한다. 채색은 자필로 진한 색은 안쪽에, 엷은 색은 밖으로 가도록 하고 바자휘에 고분(高粉) 하고 휘의 윤곽에 묵선(墨線)으로 골채 한 후 백분(白粉)으로 물걷기 한다.

6.도유(塗油)-동유(桐油)나 진유(眞油) 또는 법유(法油)로 채색된 부분을 바른다. 동유(桐油)는 방수성분(防水性分)이 강하고 진유(眞油)는 방충(防忠)에 효과가 있다.[3]

단청의 시문[편집]

연화(連華)와 석류(石榴)를 중심 무늬로 하고 그 주위에 첩운문(疊暈文)을 그려 윤곽을 형성한다. 중심 무늬와 휘가 하나로 그려지기도 하고 그것이 둘 혹은 셋 반복되어서 그려지기도 한다. 이를 총칭하여 머리초라고 부른다. 한 머리초에 중심권 무늬가 둘 반복된 것은 장구머리초라고 하고 장구머리초 좌우로 또 반복하면 이것을 겹장구머리초라고 한다. 또 머리초에 그려지는 중심무늬에 형태에 따라 방석머리초, 병머리초, 녹화머리초, 온녹화머리초, 겹녹화머리초, 반바탕머리초, 온바탕머리초, 반머리초라고 나누어 부른다. 머리초 끝에 여러 빛깔의 색선(色線)이 얼기설기 짜여진다. 이런 색색의 띠를 휘(暉)라 부른다.

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휘는 대부분 초빛과 이빛 즉 엷은 색과 진한 색이 나란히 칠하여져 있는데 이것을 바름질이라 한다. 휘가 한 가닥의 색이면 단휘, 두 가지 색이면 2휘, 세 가지면 3휘, 넷·다섯·여섯해서 여섯이면 6휘가 된다. 휘 끝에 삼엽문(三葉文)을 두기도 한다. 이것을 쇠첩이라 해서 머리초의 끝막음을 의미한다. 쇠첩 안통에는 먹당기 들여서 끝을 맺는다. 때에 따라서 색항아리를 두기도 하는데 이 방식은 연대가 뒤지는 시대에 주로 유행하였다. 머리초는 주로 기둥으로부터 그려지기 시작한다. 기둥과 머리초와의 간격에 직선으로 그린 휘가 있다. 이것을 직휘라고 한다. 기둥에는 창방, 평방, 장여, 도리와 대들보가 결구(結構)된다. 따라서 머리초도 각 부재(部材)에 따라 제각기 그려지기 시작한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각 부재(部材)의 몸체는 머리초가 짧기 때문에 공지(空地)로 남는다. 긋기모루일 때는 여기에 긋기를 하고 금모루단청일 때는 금무늬를 베푼다. 금무늬 대신에 별화(別畵)를 그리는 수도 있다. 기둥머리에서 아래로 향한 단청무늬가 놓이기도 한다. 이것을 주의(柱衣)라고 부르는데 주의에는 중심 무늬로 화불(化佛)을 놓기도 한다. 기둥과 떨어진 곳에 있는 목부(木部)의 무늬는 따로따로의 개별적인 무늬로 장식된다.[3]

논란[편집]

2013년 숭례문 복원이 완료되었는데,숭례문의 단청이 벗겨지는 사건으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1.0 1.1 단청〉, 《네이버지식백과》
  2. 2.0 2.1 2.2 2.3 단청〉, 《나무위키》
  3. 3.0 3.1 3.2 단청〉,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단청〉, 《네이버지식백과》
  • 단청〉, 《위키백과》
  • 단청〉,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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