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성벽

해시넷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창읍성 성벽
낙안읍성 성벽
남한산성

성벽(城壁)은 높이 둘러쌓아 만든 의 담벼락을 말한다.

개념[편집]

성(城)이란 보통 성벽(城壁)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넓다.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쌓았으나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나무로 만든 목책(木柵)과 돌로 쌓은 석축(石築), 벽돌로 쌓은 전축(磚築)도 생겼다.

전형적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다시 그 바깥에 네모꼴로 쌓은 곽(郭)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된다.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한다.

삼중인 경우에는 맨 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中城), 바깥을 외성이라고 하며, 만약 도성(都城)이면 왕성(王城)·궁성(宮城)·황성(皇城)이라 부르고, 그 바깥쪽의 것은 나성(羅城)이라 부른다.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의 성곽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산지가 많아 특히 산성(山城)이 발달하였으며, 네모꼴보다는 자연적인 포곡선(包谷線)을 형성하여 부정원형(不整圓形)이 많다. 옛말에 성(城)을 '잣'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의 성이 중국 계통이 아님을 알려 주는 것이다.

대체로 청동기시대에는 신전(神殿)이 나타나게 되거나 신성구역(神聖區域)이 있게 되며, 이때 신전을 포함하여 지배자의 거주지를 둘러싼 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의 성곽은 집락(集落)의 형성과 지배자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 곧 정치집단의 발생을 전제로 하므로 국가의 기원과 연계된다. 고전적 성곽발생 이론에 따르면, 농경집단이 유목집단의 약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대략 넓은 농경지를 가진 배후의 낮은 구릉 위에 쌓은 성곽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남부 시베리아 지방에서 만주 지방에 걸치는 도피용(逃避用) 목책(Gorodisthche)과 관련지어서, 일찍부터 방어용인 산성 위주의 성곽이 많이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곽은 성벽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시설을 포함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성곽에는 우선 성벽과 성황(城隍)주 04)이 있고 성문(城門)과 여장(女墻) 그리고 타첩(垛堞)·옹성(壅城 혹은 甕城)·곡성(曲城)·치성(雉城)·성우(城隅)·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 등이 있다.

성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곡행문(曲行門 : 안과 바깥이 S자 모양으로 굽어들며 들어가도록 된 문)·현문(懸門)주 05)·아치문(성문 모양이 아치형인 것)·사각문(四角門) 등이 있다. 보통 성문의 보호를 위하여 옹성이 성문의 바깥에 시설되는데, 옹성도 반원형·사각형·L자형 등의 종류가 있다.

성벽의 윗부분에는 몸이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감추고 사혈(射穴)주 06)을 통하여 외부의 적을 쏘는 시설로 여장이 있다. 여장은 타첩이라고도 하며, 평여장(平女墻)·볼록여장[凸女墻]·오목여장[凹女墻] 등의 종류가 있다. 성벽에 바싹 다가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로는 곡성과 치성, 그리고 성우(城隅)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성벽보다 바깥으로 내어 쌓은 것으로 네 모퉁이는 성우(서양 성곽의 redan에 해당)라 하고, 바깥으로 돌출한 모양이 반원형이면 곡성, 네모꼴이면 치성이라고 하는데, 망루(서양 성곽의 rampart)처럼 먼 곳을 관측할 수 있는 시설일 뿐만 아니라 성벽에 붙은 적을 사각(斜角)으로 공격한다.

이때 적이 치성이나 곡성에 바싹 다가붙을 때를 대비하여 따로 현안(懸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는 성벽에서 아래가 내려다보이도록 미석(眉石)주 07)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이밖에도 상황이 불리하여 몰래 성을 빠져나가거나, 적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곳에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가 적을 뒤로부터 공격하는 암문(暗門)이 시설되기도 한다.

성벽면 쌓기[편집]

  • 외면쌓기 : 성벽을 한쪽 면만을 쌓는 방식이다. 안을 의지하면서 바깥쪽을 쌓는 방식을 내탁이라 하고 바깥쪽을 쌓으면서 산에 의지하는 산탁이 있다.
  • 양면쌓기 : 성벽을 양쪽에 쌓는 방식이다. 협축이라고 하며 삼국시대의 성벽이나 만리장성과 중국의 평지성 대부분이 협축이다.
  • 들여쌓기 : 고구려성이 대표적이며 성벽면을 조금씩 들여쌓는 방식이다.
  • 규형(圭形) : '圭'자의 왼쪽 바깥면을 이으면 성벽이 비스듬히 오르는 곡선이 되다가 다시 내미는 형태이다. 수원 화성 축성 기록 『화성성역의궤』에는 이를 “밑에서 중간 부분까지 안으로 욱여들이어 그 모양이 마치 안으로 축소시킨 것처럼 쌓고, 허리에서부터 위로는 밖으로 약간 뻗은 듯하게 쌓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함경북도의 경성의 성벽에서 이미 실현된 바 있다.

성벽의 구분[편집]

  • 기초 :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벽 기초다짐이다. 수원 화성의 경우 동북쪽 성벽은 땅 깊이 4척 5촌(1.35m) 너비 20척(6m)으로 파서 구덩이 안을 석저로써 강다짐하고 다음에 자갈과 물을 붓고 다진다. 두께는 5-6촌(60cm) 정도이다. 다음에는 파냈던 흙을 도로 3촌(9cm)쯤 넣고 다진 뒤에 다시 자갈을 넣고 흙으로 메우고 다진다. 이렇게 하기를 거듭하여 평지와 같은 정도가 되면 전석을 이어서 깔고 돌로 덮어 다진 뒤에 비로소 성석을 붙였다.
  • 체성 :성벽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기본이 되는 구성요소이다. 성벽에서 여장과 미석을 뺀 성벽 그 자체이다.
  • 미석 :체성 위에 눈썹처럼 성 밖으로 3촌(9cm) 정도 튀어나오게 하여 처마 모습을 하였다.
  • 여장 : 피한다는 의미의 타(垜)라고도 한다. 우리말로 화살받이를 뜻하는 ‘살받이’이다. 수원화성에서 1타는 높이 5척(1.5m), 너비 20척(6m)를 기준으로 하였다. 화성에는 1천여 개의 타가 성을 둘러싸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 타의 모임이 여장이다.
  • 총안 : 수원 화성에는 1타에 총을 가까이 쏠 수 있는 근총안 1개와 멀리 쏠 수 있는 원총안 2개로 이루어져 있다.
  • 근총안통천미석 : 타와 타 사이에 성벽 가까이 기어오르는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통돌을 뚫어 만든 방어시설물.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 현안(懸眼) : 성벽에 달라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물. 총과 화살, 화약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방어한다. 중국의 병서에 그 필요성이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이러한 시설이 만들어진 예가 없고 오직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성벽[편집]

중국 시안 명대성벽
스톤성벽
요크 성벽 남서쪽 문
무제크성벽
독산성벽
코토르성벽
아빌라 성벽
피란성벽
테오도시우스 성벽

명대성벽[편집]

명대성벽(明代城壁)은 중국의 성벽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고성으로, 1370년부터 1378년에 걸쳐 축조되었다. 아래폭 18m, 위폭 15m, 높이 12m의 두꺼운 성벽이 옛 도시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방으로 커다란 성문이 나 있다. 특이한 점은 각각의 문을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 지금은 입장권만 구입하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여러 개의 길 중에서 실크로드의 입구로 유명한 시먼(西門) 또는 안딩먼(安定門)으로 불리는 서쪽 문이 명대의 성루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성벽의 폭이 꽤 넓어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가기 좋다.

스톤성벽[편집]

크로아티아 스톤에 있는 성벽이다. 2개의 성벽이 있으며, 스톤이 두브로브니크공화국(Dubrovnik Republic)에 편입된 직후인 1475년과 1478년에 각각 건설되었다. 성벽 하나는 길이 980m이며 마을을 감싸고 있고 다른 하나는 마을은 물론 당시 아주 중요한 물품이었던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의 외곽에 건설되었다. 특히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로 펠예사츠 이스트무스(Peljesac Isthmus) 북쪽의 '작은 스톤(Little Ston)'에서 시작하여 만(灣)까지 이어진다. 세계에서 만리장성 다음으로 큰 성벽으로 총 길이는 5.5km이며 뒤쪽의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때는 이 긴 성벽에 총 40여 개의 탑이 있었다.

콘야 성벽[편집]

셀주크 시대에 건설된 성벽이다. 아나톨리아 셀주크 조가 콘야로 천도하기 전에 콘야에는 비잔틴 시대에 존재했던 성벽이 있었다. 이 성벽은 오늘날 알라엣딘 테페시(Alaeddin Tepesi)라고 알려진 언덕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이 성벽 내에 주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콘야가 셀주크의 수도로 천명된 1097년 이후에도 한동안 비잔틴 시대의 이 성벽을 이용하여 적을 방어했다. 콘야가 수도로서 기능하며 거주민이 증가하고 상업지구가 거대화되며 1221년 약 4km가량의 성벽을 새로 쌓게 된다. 새로운 성벽의 발달로 기존 성벽과 방어시설은 아성(牙城 : 방어를 위하여 요새화 된 탑)이 되며 콘야 성벽은 이중 구조를 이루게 된다. 콘야의 경우 상업지구가 성외에 존재하는 다른 셀주크 도시와는 달리 상업지구가 내성 쪽에 존재하였다. 알라엣딘 테페시 위에는 당시 성이었던 알라엣딘 쾨쉬퀴(Alaeddin Köşkü)가 존재했으며 그 외에도 마드라사와 모스크가 성내에 존재했다.

셀주크 시대 이후 카라만 왕조와 오스만 시대에도 콘야 성벽은 지속적해서 수리되고 도시를 보호하는 성벽으로 기능하였으나 19세기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콘야를 방문했던 여행가들의 스케치를 통해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성벽의 원형을 추정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내성 벽의 일부는 인제 미나렐리 메드레세(İnce Minareli Medrese) 박물관 건너편에 남아있어 보호되고 있으며 외성 벽 일부가 상가 뒤편에 남아있을 뿐이다.

본 성벽에는 원래 18개의 출입구가 있었으며 성벽은 인간, 천사, 물고기, 용, 사자, 쌍두 독수리 같은 다양한 문양이 양각으로 조각되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천사 조각으로 아치 형 입구 양쪽에 조각되어있었다. 쌍두독수리 조각은 셀주크의 상징이자 알라엣딘 케이쿠바드(I. Alaeddin Keykubad, 재위 : 1220년~1237년)를 대표하는 문양이다. 이 조각들은 성벽의 건설과 수리와 관련한 비문과 함께 콘야 인제 미나렐리 메드레세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콘야 성벽은 현재 거의 형태가 남아있지 않으나 당대의 석재 조각의 수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셀주크 시대의 도시화와 도시 발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요크성벽[편집]

영국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카운티(county) 요크에 있는 성벽이다. '바 성벽(Bar walls)' '로마 성벽(Roman walls)'이라고도 한다. 로마시대에 방어를 위해 처음 세워졌으며 당시에는 2km 길이의 정사각형 성벽이었다. 현재의 성벽은 중세에 재건축된 것으로, 총 길이 4.5km이다. 걸어서 돌아보는 데 2시간가량 소요되며, 특히 민스터 근처의 부잠바(북서쪽 문)와 몽크바(북동쪽 문) 사이의 경관이 좋다. 부잠바와 미클게이트(남서쪽 문) 앞에는 돌로 만든 중세 군인상이 서 있다.

19세기 초부터 복구와 유지가 어렵고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몇 차례나 성벽을 허물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세 개의 요새와 네 개의 성문이 무너졌지만 이후 성벽 보호를 위한 단체와 기금이 결성되어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

무제크성벽[편집]

스위스 루체른주 루체른에 있는 성벽이다. 예전에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구시가 뒤로 약 870m에 달하는 벽과 9개의 탑만 남아 있다. 중세도시 루체른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성벽은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고, 슈르메르·지트·맨리의 세 타워만이 여름 시즌에 한해 개방된다.

한스 루터(Hans Luter)가 만든 시계로 유명한 지트탑(Zytturm)의 이름은 탑 안에 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계는 1535년에 만들어졌고, 시계의 숫자 판이 매우 커서 바다의 어부들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시계의 종은 시청에 있는 시계보다 1분 전에 치도록 설계되어 있고, 탑의 높이는 31m이다.

독산성벽[편집]

경기도 화성군 오산면 지곶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둘레 약 3,600m. 사적 제140호. 지정면적 33,997㎡. 현재 석축의 약 400m가 남아있고 4개의 성문이 있다. 일명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한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도성(都城)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로 중요한 곳이다.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하는 이 산성은, 평지에서 돌출하여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남한산성과 용인의 석성산성 등과 함께 도성 방어를 위한 삼각체계를 형성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은 백제가 처음 쌓고,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27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만에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벽을 새로 쌓았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세마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선조 25년(1592) 12월에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勤王兵) 1만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 수만 명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자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白馬)를 산 위로 끌고 가 흰쌀을 말에 끼얹으며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말 씻길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때 말을 씻었던 높은 대를 세마대(洗馬臺)라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선조 35년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다시 성을 쌓았고, 정조 20년(1796) 화성(華城)의 축조와 함께 화성 방비를 위하여 새롭게 고쳐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벽은 외면이 장방형이나 방형의 석재로 약간 기울여 쌓아 매우 견고하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여 많은 군사가 주둔하기 어려운 것이 이 산성의 가장 큰 결점이었다.

1982년 전면 보수하여 현재 성의 전체 길이는 1.095㎞이며 성벽에는 방형의 치와 5개의 성문이 복원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조선 시대의 성벽은 삼국 시대의 성벽보다 5∼10m 안쪽에 쌓아졌음이 확인되었다. 성안에서는 백제의 토기류 및 신라와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나 조선 시대 후기의 유물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월성성벽[편집]

신라시대의 왕성(王城)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고, 성내(城內)에 건물지가 있다. 성벽은 문천(蚊川·沙川)의 북쪽 냇가에 있는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하므로서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는데,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101년(파사왕 22)에 쌓은 것으로 둘레는 1,023보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월성을 궁성으로 쌓은 뒤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왕성을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월성터(月城址)는 원래 충신인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는데, B.C. 19년(박혁거세 39) 석탈해(昔脫解)가 금성(金城)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南解王)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되었으며, 나라가 커짐에 따라 부근 일부가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문무왕 때는 안압지(雁鴨池)·임해전(臨海殿)·첨성대(瞻星臺) 일대가 편입되어 확장되는 등 신라의 중심지였다. 동서길이 900m, 남북길이 260m이며 성안에는 조선 시기의 석빙고가 남아 있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쌓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거의 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290년(유례왕 7) 큰 홍수로 인하여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왕 9)에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했다고 한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북문격인 귀정문·북문·인화문·현덕문·무평문·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망덕루·명학루·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 신하들과 외국 사신의 조하를 받거나 접견하던 조원전·삼궁(삼궁:대궁·양궁·사량궁)을 관할하던 내성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경주석씨의 시조를 모시는 숭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석탈해왕릉 남쪽으로 옮겨졌다.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일명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으로 호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성벽의 외곽으로 자연적인 해자와 인공을 가하여 안벽을 정연히 축조한 해자가 존재하고, 다시 외곽으로 건물지가 조밀하게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해자는 월성의 동문지에서 안압지 사이에서 너비 35-46m의 규모이고, 북쪽에서는 23-42m의 너비가 된다.

코토르성벽[편집]

몬테네그로의 중세도시 코토르를 보호하던 성벽이다. 성곽, 탑, 성채, 대문, 보루, 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고대국가 일리리아(Illyria)부터 시작하여 비잔티움, 베네치아 공화국 등을 거쳐 180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넘어가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리리쿰(Illyricum), 비잔티움, 베네치아와 오스트리아의 축성법이 혼합되어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구조는 대부분 베네치아 시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도시와 주변 지역은 197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나, 같은 해에 지진으로 훼손되며 세계 위험 유산(List of World Heritage Sites in Danger)으로도 등재되었다. 이후 적극적인 복구작업을 진행하여 2003년에 세계 위험 유산에서 해제되었다.

아빌라성벽[편집]

에스파냐 아빌라주(州) 아빌라에 있는 성벽이다. 아빌라 구시가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으로 중세 성채 도시 아빌라의 상징이다. 11세기 중반에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으며 보존이 잘되어 있다. 규모는 길이 2,526m, 높이 12m, 두께 3m이다. 성벽 중간 중간에 망루 역할을 했을 작은 탑들이 서 있고, 밖으로 통하는 8개의 문이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편집]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이 성벽의 높이는 약 12m나 되며 이중 삼중으로 건설되어 방패막 역할을 잘 하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후 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가장 훌륭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인 민정총독 안테미우스가 섭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안테미우스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더불어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투르크군도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제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가능했다.

피란 성벽[편집]

피란 성벽은 슬로베니아 남서부의 아드리아해 연안 마을인 피란의 방어벽이다. 성벽의 상당 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다. 피란의 경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명소이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성벽 문서는 관광지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