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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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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東亞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신문 발행 업체인 동아일보사가 서울에서 발행한 한국의 일간 신문이다.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으며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앙 일간지 중에서는 서울신문(1904년 창간), 조선일보(1920년 3월 5일 창간)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 된 일간지이다.

개요[편집]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김성수를 대표로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사시 아래 창간되었다. 초대 사장은 박영효였고, 초대 주필은 김성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브나로드 운동, 연정회, 신간회 운동 등을 지원하였다.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이 된 그 해인 1940년 초 일제가 동아일보의 민주주의적 성향을 우려했음을 보여주는 비밀 문건들이 공개되기도 했다.[1] 해방 직후부터 우익 정당 한국민주당민주당 성형의 논조를 보여왔으며, 196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언론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 한국ABC협회 인증조사에 따르면 동앙리보의 유료부수는 707,346부이며 호남지역에서 한겨레와 구독률 1위를 다투고 있으나 서울 등에서는 3위에 그치고 있다. 과학대중잡지인 '과학동아'를 비롯한 '신동아', '여성동아', '어린이동아', '스포츠동아'등 월간 및 주간잡지와 단행본을 발행하고 있다.

대표이사[편집]

동아일보의 현 대표이사는 김재호이다. 그는 1964년 12월 5일 출생했다.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 김병관의 아들로, 2008년 3월 동아일보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현재는 동아일보와 채널A 겸영 대표이사 사장이다.

약력[편집]

  • 1983년 경복고등학교 졸업
  • 미국 보스턴 대학교 경영학 학사
  • 미국 테네시 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 1995년 동아일보 기획실 기자
  • 1996년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
  • 1999년 한국신문협회 기조협의회 이사
  • 1999년 동아일보 사장실 실장 상무이사
  • 2000년 동아일보 신문담당 전무이사
  • 2001년 동아일보 경영담당 대표이사 전무
  • 2006년 동아일보 인쇄인, 대표이사 부사장
  • 2008년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 동아일보 편집인, 발행인
  •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민간위원
  • 2010년 한국신문협회 회장
  • 2014년 채널A 대표이사 사장

사시[편집]

사시(社是)는 신문사의 창간 이념이다. 일반 기업으로 치면 기업주의 경영철학이나 경영이념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사시다. 그리고 그것이 회사의 경영방침이나 사원들의 행동지침으로 구체화된 것이 사훈이다.[2]

(1)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을 자임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한 전체로서의 2000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하니, 그 의사와 이상과 의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고자 한다.

(2)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이는 국체(國體)니 정체(政體)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다. 곧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척하고 인격의 고유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국내 정치에 적용하면 자유주의며, 국제정치에 적용하면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적용하면 평등주의요, 경제조직에 적용하면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가운데 친목과 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체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人道)를 승인한 가운데 평화와 연결(聯結)을 의미한다. ..(중략)..

(3)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함과 오묘함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하게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높이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며 생존의 가치라고 사유한 까닭이다.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3000리 강산 2000만 민중 가운데 실현하며 창달하게 하여 자유 발달의 국면을 잇고자 하는 것이니 첫째, 조선 민중의 각각 천성을 바르게 하여 서로 화합하는 일대 문화를 수립하도록 하며 둘째, 천하 만인이 각각 있을 곳을 얻어 상하와 천지(天地)가 함께 하는 일대 낙원을 건설함에 힘을 합치기를 원함이 동아일보의 주지(主旨)다.[3]

CI[편집]

1920년 창간 당시부터 사용해왔던 오래된 로고이며 타원 속에 한자 동녘 동(東)이 가로세로로 반복된 형태이다. 45도로 기울여 보면 버금 아(亞)자 형태도 드러나는 그 당시엔 보기 드물게 꽤 복합적이고 모던한 형태의 로고이다. 1920년 이후 단 한 번도 바뀌거나 폐기된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심벌마크이다. 조선일보중앙일보가 심벌마크를 교체해서 각각 C자형 로고나 J자 로고를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서 유일하게 심벌마크를 폐기하거나 변경한 적이 없는 사례를 가지고 있다.

역사[편집]

  • 창간 초기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이듬해 1월 3개의 한국인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이 중 하나가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김성수를 비롯한 박영효, 김홍조, 장덕준 등을 중심으로 타블로이드판 4면 체제로 발간되었다. 설립자 김성수와 초대사장 박영효를 비롯한 창간 주도 인사들은 '민족주의(民族主義)', '민주주의(民主主義)', '문화주의(文化主義)'를 사시(社是)로 내걸었으며 이 3대 정신은 오늘날까지 동아일보의 핵심가치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창간 초기부터 강제정간의 압력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초반 조선총독부의 무단 통치를 비난한 기사는 수시로 문제가 되어 신문과 윤전기가 압수되는 수난을 여러 번 겪기도 했다. 1920년 9월 25일 일본 3종 신기를 비판한 9월 24일과 9월 25일의 기사 내용이 문제시되어 제1차 무기정간 처분을 당한다. 이후 4차 무기정간 처분을 당하고 여러번 윤전기와 발행 신문이 압수당하는 등의 일을 겪기도 한다. 이어 1920년 1월 10일에 정간이 해제되고 2월 21일부터 다시 발행한다.

  • 민족운동

창간 이래 동아일보는 한민족의 3.1 정신을 이어가고자 각종 민족운동에 앞장서왔다. 1920년대의 국산품 애용 운동, 언론집회압박 탄핵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 국내 대중적 민족운동과 민중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 동아일보가 민족 대변지라는 자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1931년 7월,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을 목표로하는 브나로드운동을 일제가 금하기 전까지 4년간 전국적으로 활발히 전개하였고, 문학작품공모(1925)를 통한 근대문학 계발에도 힘썼다. 1933년 4월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른 새로운 철자법을 채택하는 등 여러 사업을 통해 민족정신을 강화하고 민중 계몽에 열중했다.

1926년 3월 7일 국제농민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낸 3·1 만세운동 기념 기사들을 게재하였다가 제2차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동시에 이때 동아일보 주필이자 3.1운동에 가담한 민족대표 49인의 한사람인 송진우와 발행인 김철중 등에 징역 각 6월, 4월 실형이 언도되기도 했다. 그 뒤 항소로 취소되면서 4월 21일 다시 속간한다.

  • 여성 지위 향상 운동

동아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식민지 조선사회의 인습에 얽매어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을 일깨우고자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여성'면을 고정으로 두고 '신여성과 교육', '여성해방과 대가족제도', '여성과 직업' 등 여성의 권익 향상과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기획기사와 기고를 실었다. 또한 1933년 1월 일간 신문사로서는 최초로 여성 월간지 '신가정'('여성동아'의 전신)을 창간했다. '신가정'은 여성독자를 고려해 제목만 국한문을 섞어 쓰고, 그 외 모든 기사는 순 한글로 제작했다. 신가정은 여성지라는 특징을 살려 요리, 편물, 염색 등에 관한 각종 강습회를 열었다. 또한 부인 밤줍기 대회, 주부 야유회, 부인 고궁순례단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주부들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동아일보는 계몽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를 열어 여성들의 사회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1923년 열린 최초의 전국여자정구대회는 여성의 권리신장과 기회균등을 주장하기 위해서 열린 대회였다. 지금도 전국여자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이 대회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가장 오래된 사업이자 국내 스포츠를 통틀어 최장수 대회이기도 하다. 첫 대회가 열릴 당시는 유교적 전통이 굳어져 있었기에 이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의 차원을 넘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사회적 캠페인이었다. 이 외에도 1925년 3월 조선최초로 여성들의 공개적인 등장의 발판을 마련한 ‘전조선여자웅변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 운동이란 일제 치하였던 1931년 동아일보사가 주동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이다.[4] 이 당시 김성수, 송진우 등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농촌 계몽운동을 준비한다. 이는 농촌에도 소학교와 중등 학교를 세우고, 나아가 많은 고령자와 장년층을 위해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1930년 이후 서울을 비롯한 지방 각 학교에서 동맹휴학 등이 많이 일어났고, 날이 갈수록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감시가 심해져갔는데 이 무렵 새로운 학생 운동으로 등장한 것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하였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김성수, 송진우 등은 대학생들과 대학 출신 인텔리들에게 이를 호소했고, 이들의 호소에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활동을 하게 된다. 1931년 7월 학생들은 동아일보의 후원을 얻어 ‘브나로드’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계몽에 나섰다. ‘브나로드’란 원래 러시아어로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술을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고교와 전문대학생으로 구성되며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935년을 넘어서면서부터 한국의 민족운동은 모든 면에서 암흑기에 들어갔다.학생들은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 무기정간과 폐간

제2대 사주를 역임한 인촌 김성수는 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했고, 창씨개명 아이디어를 낸 총독부 학무국장이 직접 창씨개명을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20년 동안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4회, 발매금지처분 2000회 이상을 받았고 신문 전체가 압수되는 압수처분 89회와 기사삭제 연 2423회 등 제재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5]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족의 황국신민화를 내세워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했고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강제폐간되었다. 이 때까지 총 4차례의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했고, 그 밖에 수 차례의 검열과 압수 삭제 등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1920년~1929년 9년간 280일간의 정간처분을 받았고 300회의 차압과 판매금지처분을 당하였으며 경고, 견책을 수시로 당하였다. 송진우, 장덕수는 거의 매일같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출두하여 차압된 기사가 어디가 나쁘냐고 항의하고 논쟁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41년 폐간직전에 다가갈수록 친일적인 노선으로 옮겨져갔다.

  • 광복 이후

폐간 이후 5년 4개월이 지나고, 광복 3개월 반 만인 1945년 12월 1일 복간되었다. 1945년 12월에 열렸던 모스크바 3상 회의 내용중 '신탁통치'문제를 놓고 사전에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 동아일보는 창업주 김성수의 영향으로 한국민주당의 대표적인 언론 기관지이기도 하였다. 1955년 3월 신문의 오식(誤植,틀린 글자)이 문제가 되어 정간당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독재세력은 사전검열을 없앤 대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사실상 기자의 취재와 보도를 극도로 제한하여,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였다. 또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당시 조·석간제이던 신문발행을 단간제로 바꿀 것을 강요하여, 동아일보는 석간제로 바꾸어 간행하였다.

1972년에 유신헌법을 제정한 유신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이 심해지고, 1973년에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 요미우리 신문이 비난하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투쟁에 나섰다. 그러자 유신정권은 동아일보 광고주들에 압력을 넣어 무더기로 광고를 해약시켰다.(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점점 동아일보사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독자들은 유신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신의 돈을 들여서 광고 해약으로 비어있는 광고면에 백지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3월 12일, 경영진은 결국 정부에 굴복하였고, 유신정권을 비판하던 기자들을 해고하였다. 기자들은 사옥에서 농성에 나섰으나 3월 17일 내쫓겼다. 이후 동아일보는 친정부적 성향으로 돌아서게 되며, 해직된 기자들은 동아 자유언론수호 투쟁 위원회를 만들어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그 후 그들은 창간위원회에 가입하여 1988년에 '한겨레' 를 출범시켰다.

동아일보 창간 78년 만인 1993년 4월 1일 석간 신문에서 조간화 체제로 바꾸었고, 조간화 단행 6개월 만에 발행부수 200만부를 기록했다.

연혁[편집]

1920년 ~ 1980년
  • 1920.04.01. 창간호 발행.
  • 1931.07.21. 민중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 전개.
  • 1936.08.29.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 정간.
  • 1940.08.10.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한 강제 폐간.
  • 1945.12.01. 광복 이후 복간.
  • 1946.09.26. 철도파업에 인한 휴간.
  • 1946.06.27. 경성일보사 인쇄공 파업으로 인한 휴간.
  • 1950.06.28. 한국전쟁으로 인한 발행 중지.
  • 1950.10.04. 타블로이드 2개면으로 복간.
  • 1951.01.10. 1.4후퇴에 인한 부산에서 속간.
  • 1956.04.01. 국수전 주최.
  • 1964.07.15. 소년동아일보 창간.
  • 1967.01.28. 동아연감 창간.
  • 1974.12.20. 군사독재정권의 광고탄압으로 백지광고 시작.
  • 1975.03.08. 동아일보 해직 사태(5월 1일까지 순차적으로 기자 및 사원 113명 해직).
1980년 ~ 현재
  • 1980.11.30. 언론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을 한국방송공사에 매각.
  • 1981.10.02. 동아문화센터 개설.
  • 1990.07.20. 주말특집판 동아마당 발행.
  • 1992.10.27. 본사에 충청로 사옥으로 이전.
  • 1993.04.01. 석간신문에서 조간신문으로 전환.
  • 1994.04.01. CTS(컴퓨터 제작 시스템) 도입.
  • 1996.10.01. 인터넷 전자신문 "마이다스 동아일보"출범.
  • 1998.01.01. 가로쓰기 발행.
  • 2000.01.13. '마이다스 동아일보', '동아닷컴'으로 사명 변경.
  • 2000.12.15. 신문박물관 개관.
  • 2002.01.01. 동아일보 모바일 서비스 개시.
  • 2005.01.01. 오피니언면 후진 배치, 사회면 전진 배치.
  • 2005.04.25. 온•오프라인 통합뉴스룸 출범.
  • 2005.08.17. 충정로 32면 컬러 인쇄 체제 완료.
  • 2011.12.01. 종합편성채널 채널A 개국.
  • 2011.12.07.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DDMC) 착공
  • 2014.03.01.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코리아 창간
  • 2015.07.01. 채널A 플러스 개국[6]

계열사[편집]

  • 채널A : 채널A는 1960년 설립된 동아방송을 계승해 2011년 첫방송을 시작한 종합편성채널이다. 시청자만족도 9분기 연속 종편 1위를 기록하고, 종편에서 유일하게 국내외에서 19개의 상을 휩쓸었다.
  • 동아닷컴 : 1996년 인터넷 뉴스미디어로 출발한 동아닷컴은 동아미디어그룹의 디지털 창으로서 인터넷, 모바일을 통해 깊이 있고 정확한 뉴스를 전달한다.
  • 동아PDS : 동아 PDS는 동아미디어그룹의 잡지 정기구독 서비스를 전담하고 있다. 가정, 직장, 기업, 공공기관, 단체 등에 동아미디어그룹이 발행하는 각종 잡지를 정기구독 형태로 보급한다.
  • 디유넷 : 디유넷은 동아미디어그룹의 교육 및 IT계열사이다. e러닝 사업에서 시작해 교육과 포럼, IT및 방송서비스, 광고, 방송솔루션 개발 및 운영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식콘텐츠 서비스기업이다.
  • 스포츠동아 : 스포츠동아는 스포츠, 레저, 엔터테인먼트뿐 아니라 여행, 건강, 의학, 자동차, 식음료 등 생활경제 전반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스포츠신문을 만든다.
  • 동아E&D : 동아E&D는 출판물의 편집과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편집, 디자인 전문회사이다.
  • 동아이지에듀 : 동아이지에듀는 동아일보의 교육법인으로 믿을 수 있는 교육 컨텐츠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서비스를 개발하고, 다양한 교육회사들을 인큐베이팅한다.
  • 동아애드넷 : 동아애드넷은 동아일보의 전단광고, 휴먼배너 등 각종 홍보물을 기획하고 제작한다.
  • 동아MD : 동아미디어그룹의 마케팅 효율을 높이기 위해 동아MD는 신문 등의 출판물을 공장에서 국내외 900여개의 독자 센터까지 배송한다.
  • 미디어랩A : 미디어랩A는 채널A의 방송광고판매 전문회사이다.
  • 채널A 미디어텍 : 채널A 방송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미디어텍은 채널A 방송의 보도진행, 영상취재, 영상제작, 기술 지원 업무를 수행한다.
  • 스포엑스컴 : 스포츠 문화행사 토털 솔루션 기업인 스포엑스컴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문화사업을 선도해온 동아미디어그룹의 행사대행 자회사이다. 동아마라톤 등 각종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다.

신춘문예[편집]

신춘문예란 매년 1월 1일 일간신문사가 새로운 작가의 작품을 뽑는 행사로 한국에만 유일하게 있는 문학신인 등용문이다. 신춘문예는 공모 형식으로 새로운 신인문학가를 발굴하고 새로운 문학작품을 독자 대중에게 널리 소개 할 수 있는 제도로서 한국 문단의 문학가 양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에서 제일 먼저 신춘문예를 시작한 신문은 조성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이다. 매일신문은 1914년 12월 10일자로 '신년문예 모집'을 공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최초의 신촌문예라 하면 1925년 동아일보에서 시작된 신춘문예를 말한다. 동아일보는 이 같은 제도를 광복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및 발전시키면서 수많은 문인을 발굴하였다. 소설가의 경우, 김동리, 천승세, 정연희, 한수산, 이문열, 이창동 등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이다. 시인은 서정주, 신동문, 이성부, 정희성 등이 있으며, 조남현, 최원식 등은 평론부문 당선자들이다.

역대 대표이사[편집]

  • 김성수 1919.10.09 - 1920.01.13
  • 박영효 1920.01.14 - 1920.07.01
  • 김성수 1920.07.01 - 1921.09.15
  • 송진우 1921.09.15 - 1924.04.25
  • 허헌 1924.04.25 - 1924.05 (직무대리)
  • 이승훈 1924.05 - 1924. 10
  • 김성수 1924. 10 - 1927. 10
  • 송진우 1927. 10 - 1936. 11. 11
  • 양원모 1936. 11.11 - 1937.05.31 (직무대리)
  • 백관수 1937.05.31 - 1940. 08
  • 송진우 1945.12.01 - 1945.12.30
  • 김성수 1945.12.31 - 1947.02.24
  • 최두선 1947.02.25 - 1963.08.01
  • 이희승 1963.08.02 -
  • 고재욱 1965 - 1968
  • 고재욱 1968 - 1971
  • 김상만 1971. 08 - 1975.02.28
  • 김상만 1975.03.01 - 1977
  • 이동욱 1977 - 1981.02.25
  • 김상기 1981.02.25 - 1982
  • 오재경 1982 - 1985.02.22
  • 김성열 1985.02.23 - 1989.03.26
  • 김병관 1989.03.27 - 1996.06.03
  • 오명 1996.06.04 - 2001.02.21
  • 김학준 2001.02.22 - 2008. 03. 07
  • 김재호 2008. 03. 07 -

논란[편집]

  •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박정희 정권기간 중 동아일보는 경향신문과 함께 야당성향을 보여왔다. 이는 동아일보의 창시자인 송진우, 김성수 등이 주동적으로 창당한 한민당이 민국당, 민주당 등으로 바뀌면서 친 민주당적 성향을 띈 것에서 연유한다.

데모, 인권회복 기도회, 노동자들의 쟁의, 야당의 체제비판 발언, 개헌문제 등 금기시되어 있던 여러 가지 유신반대 기사를 싣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동아일보의 기사에 대한 검열 등을 통해 동아일보 광고주에 대한 압력을 넣었고, 74년 12월 30일부터 정권의 압력을 받은 대 광고주들의 광고철회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974년 12월 26일자 기사부터는 일부가 광고란이 백지로 나갔는데, 이는 75년 7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동안 일반 국민 독자들은 수많은 '자유언론 격려광고'를 내며 동아일보를 지지했다. 그외 지식인, 학생, 종교인은 물론 일반 시민들과 주부들까지도 동아일보 백지광고에 참여하여 격려를 보냈다. 정부는 계속 언론에 압력을 놓았고 유신 정권의 압력을 받은 경영주들은 기자를 비롯한 사내 언론인들을 해고하게 되었다.

이때 억울하게 해고당한 기자와 임원들의 처우에 동아일보사가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 전교조 명단 불법 공개 문제

2010년 4월 법원은 전교조 가입 교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조전혁 의원에 대한 명단공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명단을 공개하지 말라고 결정했지만 조전혁 의원은 이를 무시하고 명단을 공개했으며, 이러한 불법적인 명단 공개에 동아일보의 인터넷 사이트인 동아닷컴도 가담했다.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조전혁 의원과 동아일보사에 대해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2011년 7월 26일 조전혁 의원은 일인당 10만원 씩 모두 3억 4천만원을, 동아일보사는 일인당 8만원 씩 모두 2억 7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7]

  • 신문고시 위반

신문판매고시는 신문구독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연간 유료신문 대금(18만원)의 20%(3만6000원)을 초과하는 액수의 공짜신문이나 경품을 제공하는 행위를 불공정거래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08년 5월 서울지역 지국 중 40곳을 대상으로 신문고시 위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위반율은 100%, 조선일보는 97.5%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 김정남의 천안함 발언 오보

조선일보는 2012년 1월 17일자 1면에서 김정남이 일본 <도쿄신문>의 고미 요지 편집위원과 지난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을 <월간조선>이 입수했다며 이를 토대로 김정남의 발언을 보도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김정남이)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서는 "북조선 입장에서는 서해 5도 지역이 교전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핵, 선군정치 모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국내에서 천안함 사건의 진상에 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와중에 나온 이러한 보도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의 이러한 보도내용을 토대로 한 18일치 사설에서 "국내 종북(從北)좌파 세력은 북한 권력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김정남의 이런 폭로를 듣고도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계속 주장할 것인가."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사가 나간 이후 김정남과 전자우편을 주고 받은 당사자인 고미 요지 편집위원은 자신이 김정남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의 어디에도 천안함에 관한 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왔다. 결국 조선일보는 천안함 사건에 관해 그것이 북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김정남이 주장했다는 보도는 오보였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사설을 썼던 동아일보는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있다.

  • 쌍룡역 허위보도

2013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는 "하루 승객 15명인 역에 역무원 17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쌍룡역에 대해 "2010년 한 해 철도 운송수입이 1400만 원에 그쳤다. 반면에 같은 해 이 역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지급된 인건비는 11억3900만 원으로 역 수입의 81.3배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을 구조조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강성노조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노컷뉴스 취재 결과 이는 사실과 달랐다. 철도청통합정보시스템에 의하면 쌍룡역의 2010년 수입은 1400만원이 아니라 96억 1,500만 원이었다. 화물 수입 95억 9,600만 원에 여객 수입 1,900만 원을 합한 금액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100억원에 가까운 화물 수입은 누락시킨 채 여객운송 수입만을 쌍룡역의 수입인 것처럼 보도한 것이었다. 또한 2014년 현재 15명이 근무 중이지만 3조 2교대로 운영되므로 실제 투입인원은 5명이라는 사실도 누락시켰다.

각주[편집]

  1. 서정보, 〈1940년에도 동아-조선, 거칠게 민족의식 고취〉, 《네이버 뉴스》, 2004-06-29
  2. 바람의이야기, 〈10개 중앙 일간지의 사시와 사훈〉, 《다음 블로그》, 2015-03-04
  3. <동아일보> 창간사〉, 《우리역사넷》
  4. 향진, 〈브나로드 운동〉, 《다음 블로그》, 2015-12-02
  5. 이승헌기자, 〈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 《동아일보》, 2009-09-18
  6. 도무재닷컴, 〈동아일보 연혁(역사)〉, 《티스토리》, 2017-01-13
  7. 송고, 〈'전교조 명단 공개' 조전혁 의원 3억 배상〉, 《연합뉴스》, 2011-07-2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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