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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8일 (수) 10:49 기준 최신판

캄페체 역사지구
캄페체 위치

캄페체(Campeche)는 멕시코 캄페체주주도이다. 공식 명칭은 산 프란시스코 데 캄페체(San Francisco de Campeche)이고 인구는 약 22만 명이다. 도시에는 해적과 해적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했던 옛 식민지 시대의 스페인 성벽과 요새가 많이 남아 있으며 199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

개요[편집]

캄페체는 멕시코 남동부, 멕시코만의 캄페체만(Bay of Campeche)의 해안가에 위치한다. 카리브해의 이 항구는 바다에서 오는 공격을 막도록 설계된 요새들과 외벽을 보존하고 있는 역사 지구이다. 캄페체는 스페인이 건설한 신대륙 식민지의 전형을 보여 주는 항구도시이다. 도시는 1540년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기존의 마야 도시인 칸페치(Can Pech) 꼭대기에 산프란시스코 데 캄페체(San Francisco de Campeche)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콜럼버스 이전 도시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다. 캄페체는 바로크 양식의 식민지 마을이 도시화된 과정을 보여 주는 사례로,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한 도시 계획이 특징이다. 또 역사 지구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는 방어벽은 카리브 해 군사 건축물의 영향을 받았다. 요새는 17세기와 18세기에 세워진 군사 건축물의 뛰어난 예로, 이 요새는 스페인이 해적의 공격에서 카리브 해의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전반적인 방어 체계의 일부이다. 도시는 옛 식민지 스페인풍의 도시 성벽의 대부분과 해적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했던 요새가 남아있다. 원래, 스페인 사람들이 성벽 안쪽에 살았으며, 반면에 아메리카 토착민은 외곽의 산 프란시스코, 과달루페, 산 로만 바리오스(barrios)에 살았다. 이 바리오스에 당시 교회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은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A구역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들이 밀집해 있다. B구역에는 이런 건축물들이 밀집해 있지는 않지만 과도기적, 방어적인 지역을 형성한다.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건축물 1,000여 개가 있는데, 이 중에는 성모 수태 성당(Cathedral of the Immaculate Conception)과 몇몇 성당, 토로(Toro) 극장, 기록 보관소가 있다. 산 호세(San Jose)와 산 미겔(San Miguel)의 요새, 산 루카스(San Lucas)·산 마티아스(San Matias)·산 루이스(San Luis)에 있는 포대 또한 대부분 유적지 안에 있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2]

역사[편집]

현대 도시인 산 프란시스코 데 캄페체(San Francisco de Campeche)는 1540년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Francisco de Montejo)에 의해 마야 추장의 옛 수도였던 칸 페치(Can Pech) 부지에 건설되었다. 캄페체시는 도시가 주요 요새를 건설할 때까지 해적과 약탈자에 의해 공포에 떨었다. 요새화는 1686년에 시작되어 1704년에 ​​완료되었다.

1517년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원정대는 캄페체에 도착한 최초의 스페인 원정대였으며, 그 대원들은 유카탄반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들 중 하나였다. 원정대는 2월 8일 쿠바섬을 떠나 3월 초 무헤레스섬과 카보 카토체에 도착했다. 그들은 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다.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íaz del Castillo) 는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작성한 원정대원 중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3월 22일 일요일 해안가의 한 마을을 발견하고 상륙했다고 기록했다. 이 마을은 같은 이름의 마야 도시 국가의 수도인 칸 페치(Can Pech)였다. 이 날은 마침 바르디아보흐의 성 나사로를 숭배하는 날이었는데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그 장소에 그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건설한 대부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캄페체시는 중앙 근처에 아르마스광장이 있는 그리드 계획을 기반으로 하는 표준 군사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광장 주변에는 캄페체 대성당, 관중석, 최고위 관리들의 집이 위치해 있었다. 스페인의 권력과 정의를 상징하는 기둥인 기둥이 광장 중앙에 서 있었다. 시장은 작은 광장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1542년에 왕은 인디언들을 왕위의 신민으로 삼는 자유를 확립하는 새로운 법을 선포했다. 노예제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다른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소포는 일정 수의 사람들을 스페인 사람에게 넘겨주었고 스페인 사람에게 현물과 노동력을 지불해야 했다. 위임받지 못한 자들은 왕의 관할하에 있었고 '왕실의 민족'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엔코미엔다스 에스파뇰(encomiendas español)의 원주민 지류는 사실상 노예제도에 해당하는 대우를 계속 받았다. 다양한 종교 단체의 수사들은 원주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의 자유를 보호하며 정복자들의 학대를 제한하기 위해 싸웠다. 이 덕분에 1547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원주민들의 개인적 자유를 위해 왕실 신분증을 발급했고, 그들의 이익이 충족되도록 하기 위해 유카탄 지방의 시청 시장을 만들었다.

멕시코만에 위치한 캄페체의 위치는 유카탄반도의 주요 항구로, 외국인과의 연결점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는 경제 호황과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그곳에서부터 일찍부터 우야몬(Uayamón), 사나브차칸(Xanabchakán), 무쿠이차칸(Mucuychacán)등 대규모 영지로 이어질 지역의 토착 제품인 염료 스틱이라고도 알려진 팔로 데 캄페체(palo de Campeche)의 화물이 포함되었다. 캄페체 항구는 조선소 산업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샌프란시스코 데 캄페체 시가 보유한 문장은 1777년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에 의해 부여되었으며 빌라라는 명칭에서 도시라는 명칭으로 승격되었다.[3]

캄페체 요새도시[편집]

캄페체 요새도시(Historic Fortified Town of Campeche)는 멕시코캄페체주의 주도 캄페체에 있는 요새화된 도시 유적을 가리킨다. 스페인 식민지시대의 도시 유적으로 북쪽으로 멕시코만과 접하고 있는 캄페체는 스페인 식민지시대의 전형적인 항구도시로서 스페인이 해적의 습격으로부터 카리브해의 항구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체계의 일부로 요새화되었다. 카리브해 지역의 군사 건축물의 영향을 반영하는 사례이자 바로크 양식의 작은 마을이 도시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유적지는 불규칙한 다각형을 띠며, 면적은 외벽으로 둘러싸인 45ha를 포함하여 총 181ha이다. 캄페체는 마야어로 '뱀과 진드기의 땅'이라는 뜻이며, 1540년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몬테호 엘 모소(Francisco Montejo El Mozo)가 건설하였다. 이 도시는 초기부터 유카탄반도와 과테말라의 페텐(Peten) 지역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 역할을 하였다. 16세기 후반에 카리브해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해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대규모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높이 6~8m에 두께 2.5m, 총 길이 2,536m의 성벽을 세워 도시를 에워쌌다. 또한 2곳의 언덕에 각각 산호세(San José) 요새와 산미겔(San Miguel) 요새를 설치하고, 사정거리가 긴 대포를 배치하여 도시를 수비하였다. 19세기 말에는 바다 쪽을 바라보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성벽의 일부를 허물고 주광장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성벽에는 '대지의 문(Puerta de la tierra)'과 '바다의 문(Puerta del mar)' 등 4개의 문을 설치하여 시가지 중심에 이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육각형의 성벽 모서리에 '대지의 문'을 지키는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와 산후안(San Juan), '바다의 문'을 지키는 산카를로스(San Carlos)와 누에스트라세뇨라데라솔레다드(Nuestra Señora de la Soledad)를 비롯하여 산티아고(Santiago)·산페드로(San Pedro)·산타로사(Santa Rosa) 등의 방어 거점을 설치하였다. 오늘날 산프란시스코는 국립인류학역사학연구소의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산카를로스는 시영 박물관으로, 누에스트라세뇨라데라솔레다드는 캄페체시 역사박물관으로, 산티아고는 식물원으로 사용되며, 산페드로는 과거에 교도소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밖에 산미겔 요새도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산호세 요새에는 당시의 선박과 무기 등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도시 계획은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하여 사면으로 뻗어 있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중앙 광장 주위를 정부 건물과 종교 건축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들이 밀집한 A구역과 A구역처럼 가치 있는 건축물이 밀집하지는 않지만 과도기적이고 방어적인 지대를 형성한 B구역으로 구분된다. 성모수태성당(Cathedral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을 비롯한 몇몇 성당 및 교회와 19세기에 건축된 토로(Toro) 극장, 기록보관소 등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축물 1,000여 개가 남아 있다.[4]

캄페체의 고대마야도시 칼라크물과 열대림 보호구역[편집]

캄페체의 고대마야도시 칼라크물과 열대림 보호구역은 멕시코 남동부 캄페체의 열대밀림지역에 있는 최대 규모의 고대 마야문명 유적이다. 마야문명의 예술적, 정치적, 영적인 발전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2002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멕시코 남동부 캄페체의 열대밀림지역에 있다. 최대 규모의 고대 마야문명 유적이다. 1931년 12월 29일 생물학자 사이러스 룬델(Cyrus L. Lundell)이 발견하였다. 칼라크물이라는 명칭은 '인접한 두 개의 피라미드 도시'라는 뜻이다. 마야어로 'Ca'는 '둘', 'Lak'는 '인접한', 'Mu'l은 '구조물 또는 피라미드'를 의미한다. 이후 40여 년 동안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넓은 정글의 가운데 있어 너무 고립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84∼1994년 윌리엄 폴란(William J. Folan)의 지휘 아래 캄페체 자치대학에서 발굴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 결과 칼라크물은 경제적·종교적으로 매우 강력하였으며, 이 지역을 지배하였던 티칼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는 증거들을 발견하였다. 514∼830년 사이에 만들어진 석비(石碑) 103점과 6,250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이 남아있다. 북쪽에는 성벽과 수로가 있다. 규모는 70㎢에 이르며, 핵심지역은 24㎢ 정도이다. 이러한 규모로 미루어보아 당시 5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기원전 400년~200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은 탑(12m)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칼라크물이 마야의 중요한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12세기 이상 이 지역을 장악한 칼라크물의 유적은 마야문명의 예술적·정치적·영적인 발전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또한 건축물과 그 배치가 잘 보존되어 있어 더욱 연구 가치가 높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캄페체〉, 《위키백과》
  2. 캄페체 (도시)〉, 《요다위키》
  3. "Campeche (city)", Wikipedia
  4. 캄페체 요새도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5. 캄페체의 고대마야도시 칼라크물과 열대림 보호구역〉,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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