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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조셉 퀴뇨는 1725년 2월 26일에 프랑스의 로렌주(Lorraine) 봬드 바꽁(Void-Vacon)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1770년에 스팀엔진 구동 차량 파디야베퍼를 개발하였으며 1772년에 루이 15세 국왕으로부터 개발품은 무기창고에 보관할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해마다 600리브라의 보상금을 지급해주는 포상을 받았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퀴뇨의 보상금은 못 받게 되었고 본인은 브리쉘(Brussels)로 추방되어 거기에서 빈곤하게 지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집권한 뒤에 퀴뇨는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보상금도 다시 받게 되었다. 1804년 10월 2일에 퀴뇨는 파리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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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조셉 퀴뇨는 1725년 2월 26일에 프랑스의 로렌주(Lorraine) 봬드 바꽁(Void-Vacon)에서 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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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1770년에 스팀엔진 구동 차량 파디야베퍼를 개발하였으며 1772년에 루이 15세 국왕으로부터 개발품은 무기창고에 보관할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해마다 600리브라의 보상금을 지급해주는 포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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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셀프-프로펠드 차량==
 
==첫 번째 셀프-프로펠드 차량==

2021년 4월 15일 (목) 17:04 판

니콜라-조셉 퀴뇨 증기엔진 구동 자동차 발명가
Nicolas-Joseph Cugnot

니콜라-조셉 퀴뇨(Nicolas-Joseph Cugnot)는 1770년에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증기엔진 구동 자동차를 개발한 인물이다. 칼 벤츠 이전에 100년을 앞서 말 없이 달리는 마차를 개발하였다.

생애

니콜라-조셉 퀴뇨는 1725년 2월 26일에 프랑스의 로렌주(Lorraine) 봬드 바꽁(Void-Vacon)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1770년에 스팀엔진 구동 차량 파디야베퍼를 개발하였으며 1772년에 루이 15세 국왕으로부터 개발품은 무기창고에 보관할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해마다 600리브라의 보상금을 지급해주는 포상을 받았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퀴뇨의 보상금은 못 받게 되었고 본인은 브리쉘(Brussels)로 추방되어 거기에서 빈곤하게 지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집권한 뒤에 퀴뇨는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보상금도 다시 받게 되었다. 1804년 10월 2일에 퀴뇨는 파리에서 별세하였다.

첫 번째 셀프-프로펠드 차량

파디야베퍼(fardier à vapeur)
스팀엔진 3륜 수레

1765년에 퀴뇨는 프랑스 나폴레옹군의 포병 대위로 복무하고 있었으며 포차의 견인을 목적으로 스팀엔진 구동 차량을 고안하게 되었다.

고안한 차량은 파디야베퍼(프랑스어 fardier à vapeur; 영어 steam dray)로 불리는 3개 휠의 수레에 스팀엔진을 탑재한 차량이었다. 1769년에 개발을 완성하였으며 세계 처음으로 래칫 배열방식을 적용하여 피스톤 왕복운동(reciprocating motion)을 회전운동(rotary motion)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하였다. 1770년에 파디야베퍼의 풀사이즈 버전이 구축되었으며 4톤의 부하에 시속 7.8km를 달릴 수 있었다. 차중은 2.5톤 정도였고 뒤에 2개의 바퀴를 달고 앞에 1개의 바퀴를 달았으며 앞 바퀴의 위치는 통상적으로 말이 서 있던 위치였다. 앞 바퀴는 스팀 보일러와 구동 메커니즘을 받쳐주었다. 동력부는 트레일러와 연접되고 두 손잡이로 조향을 실현하였다.

파디야베퍼는 무게 배분의 불균형으로 거친 지형과 가파른 언덕을 건널 때 불안하다고 보고되었으며 그 당시의 기준으로 평가할 때 보일러의 성능도 안 좋다고 보고 되었다. 차량은 25분 정도에 한 번씩 불을 달아야 하였으며 증기도 다시 올라오는 통에 차량 운송 속도와 이동거리에 영향을 받았다. 몇 번의 테스트를 거친 뒤 실용성이 안 좋은 관계로 프로젝트는 방치되었으며 프랑스군의 기계식 차량운송 실험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루이 15세 국왕은 개발품 자체는 무기창고에 보관해 둘 가치가 있으며 퀴뇨의 혁신적인 작업에 대한 포상으로 해마다 600리브라 보상금을 주기로 하였다.

2010년 파디야베퍼가 발명된 241년 뒤에 국립고등기술공예학교파리테크(Arts et Métiers ParisTech)의 학생들이 파디야베퍼의 복제품을 구축하였으며 정상적으로 가동되어 1760년에 테스트를 진행했던 컨셉과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복제품은 2010년 파리모터쇼에 전시되었으며 현재 퀴뇨의 고향 뫼즈주(Meuse) 봬드 바꽁에서 전시되고 있다.[1]

각주

  1. "Nicolas-Joseph Cugnot", Wikipedia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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