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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에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 2녀 자식중의 첫 째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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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통천 송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도 지었으며 가난한 생활에서 탈피하고자 4번 가출을 하였으며 1933년에 했던 마지막 가출 때 인인천항만 공사장과 풍전엿공장(동양제과),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건물 공사장에서 막노동으로 지내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에 복흥상회(福興商會)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였다. 3년 뒤인 1938년에 복흥상회를 인수하고 쌀가게 경일상회를 개업하였으며 1939년에 변중석 여사와 결혼하였다. 경일상회는 개업해서 2년이 되는 1940년에 중일전쟁의 연고로 일본점령군 정부에서 식량배급제를 실시하면서 폐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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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차량정비기사이자 지인인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Art Servic)의 소식을 접하고 이를 인수하여 자동차 수리공장으로 운영하였으며 1942년 5월에 중소기업정리령(中小企業整理令)이 실행되면서 기업이 정리되었다. 그 뒤 황해북도 연산군 동부에 있는 홀동광산(笏洞鑛山)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 하다가 타인에 넘겼으며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고 건설업에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자본금 3,000만 원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3월에 현대상운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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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터지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나갔으며 전쟁기간과 전쟁직후에까지 그 당시 미군 통역장교이던 동생 전인영의 도움으로 미8군이 발주한 토목공사의 거의 전부를 맡아 부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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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사업에서 일을 맡아 1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제1한강교 복구공사와 인천제1도크 복구공사 등을 추진하였으며 1960년에 한국 건설업체중에서 도급한도액 1위를 차지하였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고 1965년에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으며 1967년에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에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 해외건설시장으로 진출하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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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으며 1973년 12월에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중공업에 진출하였다. 1977년에 전국경제인연합회 13대 회장을 맡아 1987년까지 5선 연임을 하였으며 1987년에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초빙되고 그 해에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일선에서 손을 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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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초에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아쉽게도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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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하였으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1999년 2월에 현대아산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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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으며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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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으며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가 선정하는 아시아의 영웅 리스트에 올랐으며 2008년에 DMZ 평화상 대상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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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9일 (수) 15:16 판

정주영(鄭周永, Chung Ju-yung)
현대그룹의 창업주
현대자동차㈜(Hyundai Motor Company)
기아자동차㈜(KIA Motors)

정주영(鄭周永, Chung Ju-yung)은 한국의 사업가이고 전직 정치인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이며 삼성그룹의 이병철 창업주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으로 인정받는다.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고 범현대가 특유의 기업 문화 때문에 왕회장이라는 별칭도 따라다닌다.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가지고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는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 속에서 한국이 이루어 낸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부호가 되었음에도 평생동안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기업인 중 하나였다.

1998년에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이며 2006년에 미국 타임스지가 평가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오른 인물이기고 하고 한국갤럽이 2019년에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리스트에서 기업인 신분으로는 최고 순위인 전체 6위에 오르기도 했다.

단순히 경제인을 넘어서 대한민국 건국 이후 대통령(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인정받는다.

생애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에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 2녀 자식중의 첫 째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1930년에 통천 송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도 지었으며 가난한 생활에서 탈피하고자 4번 가출을 하였으며 1933년에 했던 마지막 가출 때 인인천항만 공사장과 풍전엿공장(동양제과),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건물 공사장에서 막노동으로 지내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에 복흥상회(福興商會)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였다. 3년 뒤인 1938년에 복흥상회를 인수하고 쌀가게 경일상회를 개업하였으며 1939년에 변중석 여사와 결혼하였다. 경일상회는 개업해서 2년이 되는 1940년에 중일전쟁의 연고로 일본점령군 정부에서 식량배급제를 실시하면서 폐업하였다.

1940년에 차량정비기사이자 지인인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Art Servic)의 소식을 접하고 이를 인수하여 자동차 수리공장으로 운영하였으며 1942년 5월에 중소기업정리령(中小企業整理令)이 실행되면서 기업이 정리되었다. 그 뒤 황해북도 연산군 동부에 있는 홀동광산(笏洞鑛山)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 하다가 타인에 넘겼으며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고 건설업에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자본금 3,000만 원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3월에 현대상운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나갔으며 전쟁기간과 전쟁직후에까지 그 당시 미군 통역장교이던 동생 전인영의 도움으로 미8군이 발주한 토목공사의 거의 전부를 맡아 부를 쌓았다.

6.25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사업에서 일을 맡아 1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제1한강교 복구공사와 인천제1도크 복구공사 등을 추진하였으며 1960년에 한국 건설업체중에서 도급한도액 1위를 차지하였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고 1965년에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으며 1967년에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에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 해외건설시장으로 진출하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였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으며 1973년 12월에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중공업에 진출하였다. 1977년에 전국경제인연합회 13대 회장을 맡아 1987년까지 5선 연임을 하였으며 1987년에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초빙되고 그 해에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일선에서 손을 뗏다.

1992년 1월초에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아쉽게도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되었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하였으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1999년 2월에 현대아산도 설립했다.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으며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으며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가 선정하는 아시아의 영웅 리스트에 올랐으며 2008년에 DMZ 평화상 대상이 추서되었다.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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