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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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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양(案內孃)은 버스 승객안전편의를 위한 안내직업으로 삼는 여성을 부르던 말이다.

개요[편집]

안내양은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를 안내하고 승객으로부터 버스 요금 징수와 버스의 출입문을 열고 닫는 직업의 여성이다. 안내의 범위는 넓지만 주로 버스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는 안내자를 말한다. 버스 안내양에는 시내버스·고속버스·관광버스 안내양이 있는데, 오늘날에는 시내버스 안내양과 고속버스 안내양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고속버스 안내양은 차량의 방송시설을 이용해 안전에 대한 승객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을 주된 봉사 내용으로 하며, 관광버스 안내양은 관광지 소개와 설명을 가장 큰 노릇으로 삼았다. 대한민국 버스 안내양은 1920년대 후반, 서울부영버스가 운행하면서 처음으로 여차장이라는 이름을 등장시켰는데, 1930년 당시 서울의 여차장 수가 48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여차장 복장은 치마에 허리띠를 맨 양복 형태의 제복을 입었으며 가죽 장화에 가죽 가방을 메었다고 한다. 안내양 자격을 보면, 과거 시내버스 안내양은 일정 수준의 학력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고속버스와 관광버스 안내양의 경우에는 고졸 이상의 학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언어구사 능력, 사교술, 장시간 여행과 다양한 승객과의 대인관계에 필요한 인내력 등이 상당히 중시된다. 국내에는 자격증 제도가 없으나 외국인 전용 관광버스에 종사하는 안내원의 경우는 통역안내원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1차와 2차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이들의 작업조건은 승객의 상태에 맞추어야 하므로, 예를 들어 봄·가을 그리고 휴가철에는 관광객이 많으므로 출장이 잦으며, 한 번 출장을 떠나면 장기간 체류하거나 또는 수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원만한 대인관계 및 타지 적응력 등이 특히 중요하다. 오랜 시간 차를 타거나 걷는 경우가 많으므로 차멀미를 한다거나 하체가 약한 사람은 적격자라고 할 수 없다. 1987년 말에는 안내양이 3만여 명에 달하였으나, 그 후 서울을 비롯한 도시지역에서는 승객 스스로가 요금을 내고 타는 자율버스가 등장하면서 거의 사라졌다.[1]

등장배경[편집]

국내의 안내양은 1920년대 후반 처음 등장했다. 당시 시청버스였던 서울부영버스에 처음으로 버스안내양이 등장했다. 여차장이라고 부르던 그때 버스걸이라는 명칭도 등장하는데, 1928년 4월 22일 서울시청에서 운행하던 정식 시내버스 등장소식과 함께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일본에 주문하였던 버스 10대도 도착하였고 버스걸과 운전자의 채용도 전부 완료하였으므로, 봄날의 꽃빛이 아주 무르녹는 오는 4월 22일 아침부터 영업을 개시하기로 되었다." 당시에 버스걸들은 매우 진취적이고 신식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들이었다. 양장 차림의 유니폼을 입고, 앞에는 차표 가방을 맨 채 승객들에게 표를 끓어주면서 살짝 미소를 짓는 버스걸의 인기는 금세 하늘로 치솟았다. 최고의 지성인으로 자부하던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버스걸은 신부 후보감으로 첫손에 꼽혔다고 한다. 운전기사가 최고의 신랑감 후보이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 일이다. 1930년 서울의 버스안내양 숫자는 48명이었다. 이렇게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일제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버스안내양은 광복이 되고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남자 차장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서 친절한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었다. 1959년 2월 24일 조선일보는 "24일 교통부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오는 4월 초하루부터 서울 시내를 운행하는 600대 가까운 시내버스의 차장을 모조리 여차장으로 바꾼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남자 차장들에 의하여 가끔 발생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없애기 위해서였다.[2]

직무[편집]

안내양 직무의 가장 중요한 일은 차비를 받는 일이었다. 대개 탈 때는 빨리빨리 많이 태워야 하므로 무조건 밀어 넣고, 내릴 때 차비를 받았다. 간혹 더 이상 자리가 없어 태워 주지 못하면 안내양을 끌어 내리고 타는 사람도 있었다. 막무가내 손님들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으면 힘센 아저씨들이 대신해서 손님들을 밀어 넣어 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안내양들은 버스 문 옆의 양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서 간다. 손님들이 탈 때는 대개 '어서 오세요' 정도의 인사말은 건넸다. 안내양들은 일종의 서비스직이었기 때문에 환영의 인사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내릴 때는 일단 돈을 받는 게 급했기 때문에 인사는 생략했다. 시간에 쫓기니까 빨리빨리 내리게 하고 정확하게 차비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대개 사람들은 버스 안내양을 떠올릴 때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면서 '오라이' 하고 외치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제 오라이라는 말은 버스 안내양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오라이를 외치는 것에도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 타면 문을 닫음과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출입문 옆을 탕탕 두 번 두드리며 '오라잇!' 하고 외친다. 그러다가 멀리서 손님이 뛰어오는 것을 보면 탕 하고 한 번 두드리는데, 그 신호에 기사는 가던 차를 다시 멈춘다. 버스 안내양들이 오라이만 외쳤던 것은 아니다. 요즘은 노선도가 자세하고 또 차내 방송으로 내릴 곳을 정확히 알려 주지만, 당시에는 방송이 없었으므로 계속해서 다음 정차하는 곳을 버스 안내양이 알려야 했다. 사람을 태울 때도 정류장의 사람들에게 버스의 행선지를 알려 주는 것이 중요했다. 또 호객 행위도 해야 했다. 지금은 버스가 회사 소유이지만, 당시에는 지입차들이 많았다. 지입차의 경우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태우는 만큼 수입이 생기기 때문에 무조건 많이 태우려고 했다. 그래서 지입차에 탈 때는 뒤차 배차도 앞차가 까먹었고,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정류장에서 대기하기도 했다. 지입차를 타고 다닐 때는 액수가 모자라면 일을 못 한다고 윽박을 받거나, 중간에 가로채지 않았냐고 의심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버스 내부 청소도 안내양들의 몫이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서둘러 청소를 끝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차 천장을 밤새 다 닦기도 했다. 버스기사는 운전만 할 뿐 나머지 일들은 전부 안내양들의 차지였다. 안내양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그때그때 돈을 바로 사무실에 입금시켜야 했다. 당시 회수권도 일일이 세어서 입금시켜야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 5분, 10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3] 안내양은 하루 18시간 가까이 근무에 시달려야 했고, 평균 1만5,000원 수준의 낮은 임금을 받았다.[4]

처우 개선[편집]

1961년 버스안내양 제도가 재도입되었다. 버스안내양의 대부분은 지방에서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누이들이었다. 고향 가족의 생계까지도 책임지던 씩씩한 아가씨들이었다. 버스는 대부분 발 디딜 틈 없이 만원이었다. 작은 체구로 손님들을 버스 속으로 야무지게 밀어 넣고, 정작 자신들은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가기도 했다. 똑같은 직업인데도 시대가 변하면서 1920년대의 버스안내양과는 처우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당시 버스안내양들을 차장이라 불렀다. 저임금에 하루 18시간 가까운 노동도 벅찬데 욕설을 퍼붓는 취객, 짓궂은 손장난을 하는 승객, 아이의 차비를 내지 않으려는 엄마, 회수권 열 장을 교묘하게 잘라 열한 장으로 만든 학생들 등 수많은 불량 승객들과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안내양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일은 몸 수색이었다. 속칭 삥땅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루의 업무가 끝난 후 받는 몸 수색에 대해 대부분의 안내양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몸 수색을 하는 사람이 거의 남자 직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이때 안내양들은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다. 어느 회사에서나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감독이라는 사람들을 통해 검신을 하였고, 이러한 검신에 대한 불만이 많았지만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1971년 YWCA에서 조사한 버스 업체는 전국에 55개 회사 중 기숙사가 있는 곳은 40개, 세면장은 31개뿐이며 남녀 공동 숙소도 5곳이나 되어 불안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숙소나 세면장이 있는 것도 대부분 협소하고 불결해서 오히려 각종 병의 온상이 될 우려가 있을 정도였다. 매우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 안내양들은 과중한 근무와 수면 부족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만성적인 질병을 가지게 되었다.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해서 오는 위장병, 불결한 환경에서 오는 감기, 편도선염, 그리고 항상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생긴 허리, 어깨 다리 등의 신경통, 동상, 피부병 등은 안내양들이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질병들이었다. 당시 자동차 노조 서울버스 지부서 56개 회사 4천여 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버스 안내양의 34%가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고 있을 정도였다. 안내양들은 자정까지 근무하는 격무로 피로에 지친 데다 온수 시설의 미비로 발을 씻지 못하고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고 근무 중에 기숙사 출입을 금하고 있어 땀에 젖은 양말을 갈아 신지도 못한 채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 계속 근무해 손발이 얼어 터져 동상에 걸리기 쉬운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 또 당시 겨울에는 방한화와 장갑이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동상 환자가 생기기도 하였고, 여름에는 무좀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신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안내양들의 열악한 대우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9월 22일 서울시에 '여차장들의 생활시설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서울시는 한 달이 안 돼 '버스 안내원 후생시설 개선대책'을 부랴부랴 내놓았는데 숙소·휴게실·교양실·운동시설·위생시설 등 5가지 시설을 기준으로 버스회사의 등급을 매겨 시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업체는 면허취소 등 본보기로 강경 조치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외에도 주당 근무시간은 48시간, 좌석버스 근무자의 경우 하루 일하면 하루 쉴 수 있었고 시내버스 근무자는 이틀 일하면 하루 쉴 수 있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서울시가 제시한 모범 기준일 뿐 현장의 근무 여건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숙소에 완전보일러설치가 된 몇 안 되는 버스회사가 모범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2][5]

폐지[편집]

1970년대 중반 5만 명에 육박했던 안내양은 1982년 9월 10일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하면서 줄기 시작했다. 안내양이 지키던 문 하나뿐이던 시내버스앞문이 달리고, 그리로 승객들이 돈을 내게 된 것이다. 수십 년의 역사를 지닌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군에 종말의 기운이 비치기 시작한다. 버스 회사들은 다투어 버스 안내양들을 해고했고 그들을 위해 지었던 기숙사를 서둘러 두들겨 부수거나 다른 용도로 대체했다.[6] 1984년부터 버스에는 하차지점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버스벨이 개설되어 승객이 하차하기 직전에 버스벨을 누르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되었다. 버스안내양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1987년 말 3만 여 명에 달했던 버스안내양은 1989년 4월 김포교통 소속 130번 버스안내양 38명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버스안내양의 평균 연령은 18세였다. 1961년 1만 2,560명이던 안내양은 1971년 3만 3,504명, 1970년대 에는 5만 여 명까지 증가했지만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줄고, 1989년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되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에는 태안·보령 등 지역에서 버스안내양이 되살아나 노인·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승하차를 돕고, 지역의 관광안내도 하는 홍보대사 노릇을 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생전 처음 보는 버스 안내양의 모습에 신기해하기도 한다. 짙은 자주색 상하의에 모자를 쓴 복장까지 예전 버스안내양과 비슷하다.[2]

각주[편집]

  1. 안내양〉, 《네이버 지식백과》
  2. 2.0 2.1 2.2 남애리, 〈버스안내양〉,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3. 이가연, 〈버스에 매달린 버스 안내양〉, 《부산역사문화대전》
  4. 류호 기자, 〈'오라이~' 이어 '짤랑' 소리도 안녕…사라진 버스의 옛 추억〉, 《한국일보》, 2021-08-28
  5. 김미정, 〈18시간, 만원 버스 그리고 몸 수색〉, 《우리역사넷》
  6. 고용노동부, 〈'버스안내양'을 기억하시나요?〉, 《네이버 블로그》, 2012-11-0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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