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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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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해안

노예해안(Slave Coast)은 서아프리카 기니만 부근의 해안 지역을 가리킨다. 15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노예무역이 이 부근에서 성행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개요[편집]

  • 노예해안은 서(西)아프리카의 토고에서 니제르강(江) 하구에 이르는 해안지대의 속칭이다. 16세기 이후 이곳에서 노예무역이 성행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으며, 특히 베냉의 위다는 기니만(灣) 연안에서 최대의 노예 수출항이었다. 세네갈에서 가봉 부근까지 이르는 기니 해안은 명칭이 대단히 애매하여, 항해자들이 후추(혹은 곡물)해안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 따위의 명칭으로 지역을 구분하였다.[1]
  • 노예해안은 현재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서부 연안 지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베냉 만과 접한 서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 지대를 가리킨다.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도착한 뒤부터 19세기 초반에 노예 무역이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대서양 연안에서 많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노예무역을 통해 팔려나갔다. 이들 노예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무역선에 실렸다. 인접한 황금해안, 상아해안, 후추해안과 함께 주요 특산물의 이름을 따서 "노예해안"이라고 불렀다. 노예 상인들은 현지의 흑인 부족에게 구식 무기를 주고 다른 부족 세력을 정복하는 대가로 노예를 획득하는 삼각 무역을 전개했다. 이 무역을 통해 팔려나간 흑인 노예들은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에 달했으며 아프리카의 인적, 경제적, 문화적 손실로 이어졌다.[2]
  • 노예해안은 아프리카 서부의 해안지역. 기니만 동부, 베냉만의 볼타강 어귀에서 동쪽으로 나이지리아 베닌시티에 이르는 곳을 가리킨다. 길이 500km. 코코야자와 기름야자 나무가 무성하고 연안에는 토고 로메, 베냉 코토누 · 포르토노보, 나이지리아 라고스 등의 항만도시가 있다.

기니만[편집]

  • 기니만(Gulf of Guinea)은 아프리카 대서양의 상부 기니에서 하부 기니 연안을 따라 만입된 해역이다. 라이베리아 해안 서경 7° 43'의 팔마스곶에서 동경 10°의 가봉에 이르는 광대한 해역을 말한다. 만에는 페르난도포·프린시페·사웅투메·아노번 등의 이 산재한다. 기니만의 중심부에 가까운 나이저강(江)의 하구 부근에 발달한 광대한 삼각주를 따라 서쪽으로는 베냉만(灣), 동쪽으로는 보니(비아프라)만이 전개되며, 볼타강·카메룬강·오고웨강 등이 기니만으로 흘러들고 있다.
  • 기니만 연안은 난류인 기니해류가 흘러 수온이 낮은 벵겔라 해류와 교류하여 이 지방에 영향을 끼친다. 해안선이 단조로워 양항 발달에는 불리하나, 사주(砂洲)와 사취(砂嘴)가 발달해 있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의 무역풍에서 유래한 노예해안·곡물해안·상아해안·황금해안 등의 지명으로 각각 알려졌으며, 연안의 항만설비는 제1차 산품의 수출에만 이용된다.

노예해안의 주변 해안[편집]

  • 상아해안(vory Coast, 象牙海岸)은 서아프리카에 면한 코트디부아르의 해안이다. 15세기 후반 유럽 열강이 상아와 노예를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상아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코트디부아르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코트디부아르 또는 코트디부아르해안이라고도 한다. 최대 너비가 64km를 넘지 않으며 굴곡이 완만한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연평균기온 24~28℃, 연강수량 2,000~3,000mm로 덥고 습하다. 해안의 동쪽 부분은 평평하고 모래가 많으며 서쪽은 바위로 된 작은 벼랑들이 있다. 모래톱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모래톱 뒤에는 깊은 석호가 있다. 1903년에 건설되기 시작한 철도는 이웃 나라인 부르키나파소까지 연결되었고 1950~1954년에는 아비장 항구가 건설되었다.
  • 곡물해안(Grain Coast,穀物海岸)은 아프리카 기니만(灣) 연안 지방 중 시에라리온 남부의 라이베리아와 코트디부아르와의 국경에 있는 팔머스곶(岬)에 이르는 지역의 해안이다. 후추해안(Pepper Coast)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일찍이 15세기 이래 유럽의 선원과 상인들이 이 지역과의 교역품으로, '낙원의 곡물'이라고 부르던 기니 후추·말라게이터 후추를 즐겨 찾던 데서 유래된 호칭이다. 이 해안 동쪽으로는 상아해안·황금해안·노예해안 등이 이어져 있다.
  • 황금해안은 가나공화국의 대서양에 면한 해안지대를 가리킨다. 1471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눈에 띈 것은 해변을 따라 널려 있는 수많은 황금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이곳에서 사금(砂金)을 채취해 가면서 유럽인들 사이에 "황금해안"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막대한 양의 금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프랑스·네덜란드·영국·덴마크·스웨덴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이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오랫동안 각축을 벌였다. 1874년 영국이 식민지로 삼았으며, 이후 영국은 그 지배권을 내륙의 아샨티(Ashanti) 지방까지 확대했고, 다시 북부지방을 편입해서 보호령으로 삼았다. 그 후 이 세 지역은 영국령 토골란드(Togoland)와 함께 1957년 3월 6일 가나(Ghana)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여 영국 연방의 자치령이 되었다가 1960년 정식으로 가나공화국이 되었다. 가나의 수도인 아크라(Accra)로부터 서쪽의 기니만 연안에는 당시 유럽 각국이 쌓은 성채들이 50곳 이상 남아 있으며, 근처의 포트 생자고(Fort St. Jago)는 관광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노예해안에 면한 나라[편집]

  •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 of Nigeria)은 서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니제르 공화국, 북동쪽으로는 차드 공화국, 동쪽으로는 카메룬 공화국, 서쪽으로는 베냉 공화국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서양의 기니만을 면하고 있다. 36개의 주와 1개의 연방 수도 지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이지리아에 있는 라고스는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권이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나이저강 유역과 해안평야, 동부의 산지, 북부의 하우사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지대는 열대우림이고 내륙부는 열대 사바나로 북쪽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줄어든다. 나이저강 삼각주는 석유 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심각한 기름 유출과 같은 환경 문제들이 여러 번 일어나 갈등을 일으켰다. 나이지리아의 주요 환경 문제로는 하수 처리와 같은 폐기물 관리, 탈산림화와 토양 열화, 기후 변화 등이 있다.
  • 토고(Togo)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灣) 연안에 있는 나라로, 1885년 토고 해안에 대한 독일의 지배권이 국제적으로 최초로 인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프랑스 협정으로 영토가 분할되었고 동부의 프랑스령 토골란드 지역이 1946년 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 1960년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토고공화국(Togolese Republic)이다. 북쪽으로 부르키나파소, 동쪽으로 베냉, 서쪽으로는 가나와 접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분할된 영토 중 서부의 영국령 토골란드와 골드코스트는 가나의 일부가 되었다. 국토가 남북으로 좁고 긴 형태이기 때문에 기니만에 면한 해안선은 56km로 짧으며 수도인 로메가 자리 잡고 있다. 토고는 국토가 남북으로 좁고 긴 형태이기 때문에 기니만에 면한 해안선은 56km에 불과하다. 해안에는 연안주(沿岸洲)가 발달하였으며, 맹그로브를 비롯하여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다. 내륙지대는 대부분 구릉성의 토고 산지이다. 식생은 남부에서 북부에 걸쳐 열대우림으로부터 전형적인 삼림 사바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 베냉(Benin)은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에 면한 나라이다. 1851년 프랑스 보호령이 되어 1892년 프랑스에 의해 다호메이 식민지로 건설되었다가 1904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 편입되었다. 1960년 다호메이(Dahomey)로 독립하였고 1975년에 지금의 국명으로 바꾸었다. 베냉의 동쪽은 나이지리아, 북쪽은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서쪽은 토고에 접한다. 니제르와의 국경에는 나이저강(江), 부르키나파소와의 국경에는 볼타강(江)의 지류가 흐르고, 북부에서 발원하는 오크파라강(江)이 국토를 거의 남북으로 관류(貫流)하여 기니만(灣)으로 흘러든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위도와 지형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3개 자연지대가 나타난다. 베냉에 유럽인이 내항(來航)한 것은 15세기 무렵부터이며, 17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영국·프랑스 3국이 본격적인 노예무역 기지를 건설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다호미족(族) 혹은 폰족의 아보미 왕국 등 많은 왕조가 있었으나, 프랑스는 1851년 아보미조(朝)의 왕(王) 게조와 조약을 체결하고 보호령(保護領)으로 하여 야자유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노예해안의 역사[편집]

  • 16세기에 포르투갈 제국의 탐험가들이 노예해안의 라고스와 칼라바르에서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남부 나이지리아의 주민들과 직접 교역을 했다. 유럽인과의 해안 교역은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작이기도 했다. 칼라바르는 대서양 노예무역 시기에 가장 큰 노예 무역 항구 가운데 한 곳이 됐다. 그 밖의 주요 노예 무역 항구로는 라고스의 바다그리와 비아프라만의 보니섬이 있었다. 이 시기에 주요 항구와 내륙지를 잇는 노예 무역로가 여러 개 만들어졌다. 노예 무역에 참여했던 왕국 가운데 남쪽의 베닌 제국과 남서쪽의 오요 제국, 남동쪽의 아로 연맹이 활발하게 참여했다. 베닌 제국은 19세기까지 존속했으며, 오요 제국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영토가 가장 넓었다.
  • 북쪽에서는 하우사인들의 도시 국가들이 끊임없이 싸우고 카넴-보르누 제국이 쇠퇴하는 동안 풀라인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풀라인들의 지도자 우스만 단 포디오가 하우사 왕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중앙 집권화된 소코토 칼리파국을 세웠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공용어는 아랍어였으며 우스만 단 포디오와 그의 자손들은 전사들을 모든 방향으로 보냈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남쪽으로는 오요 제국의 일부를 점령하고 대서양에 도달하고자 이바단을 향해 나아갔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술탄들은 점령지에 종주국을 세우고 이슬람 문명을 전파하고자 에미르들을 보냈고, 에미르들은 무역과 노예 제도로 부와 권력을 얻었다. 189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예 인구는 소코토 칼리파국의 영토에 집중적으로 있었으며 그 수는 약 200만 명이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1903년에 유럽 열강에 무너지기 전까지 식민지 시대 이전의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가장 큰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1807년에 영국이 대서양 노예무역을 금지한 뒤로 밀수꾼들은 해안에서 현지 노예 상인들과 불법으로 노예를 매매했다. 영국은 1851년에 라고스를 포격하며 현지의 권력 투쟁에 개입했고, 노예무역에 우호적이던 코소코왕을 폐위하고 영국에 우호적이던 아키토예를 왕으로 세운 뒤 1852년 1월 1일에 라고스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조약을 맺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노예해안(Slave Coast, 奴隸海岸)〉, 《두산백과》
  2. 노예 해안〉,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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