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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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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프로
드니프로 위치

드니프로(우크라이나어: Дніпро, 러시아어: Днепр, 영어: Dnipro, 문화어: 드네쁘르)는 우크라이나 중남부에 위치한 도시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약 98만 명이다. 키이우, 하르키우, 오데사에 이어 우크라이나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며 드니프로강 연안에 있다. 구 소련 시절 중공업과 미사일 개발의 핵심도시로 발전했고 우크라이나의 산업, 교통의 중심지이다.[1]

개요[편집]

드니프로는 드니프로강을 따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Київ, Kyiv)로부터 남동쪽으로 391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10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약 98만 명이다. 이 도시가 처음 요새화된 마을의 형태를 갖춘 것은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인 도시 건립 연도는 1776년으로,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Ⅱ)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 지역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다. 새로운 행정구역인 노보로시야현(縣; Guberniya, 러시아 제국의 행정구역 단위)의 총독으로 부임한 그리고리 포툠킨(Григорий Потёмкин)의 지시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도시는 예카테리나 2세를 기리는 예카테리노슬라프(Ekaterinoslav)로 명명됐다. 러시아 혁명 후인 1926년 도시 옆을 흐르는 드네프르강과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자였던 흐리호리 페트로우시키(Григорій Іванович Петровський)의 이름을 따서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Дніпропетро́вськ)로 개명된 이곳은 소련의 핵공학, 무기, 우주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 요지가 되었다. 군수산업 때문에 1990년대까지는 폐쇄적인 성격이 강한 도시였다. 특히 탄도 미사일 제조사인 유즈마시(Yuzhmash)가 본부를 두고 있어 폐쇄 도시로 지정됐다. 2016년 5월 19일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는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을 드니프로로 바꾸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드니프로는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한 물류 중심지이자 다양한 전선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의 수용소로 빠르게 발전했다. 2022년 3월 15일 러시아의 미사일이 드니프로 국제공항을 강타하여 활주로가 파괴되고 터미널이 파손되었다. 공격은 2023년에도 계속되었으며 공격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2023년 1월 14일 아파트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40명이 사망하고 7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6명이 실종된 것으로 보고되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드니프로는 드니프로강이 사마라강과 합류하는 지점의 양안(兩岸)에 건설됐다. 드니프로의 시내 중심부는 드니프로 고지대의 일부인 우안에 주로 위치한다. 북서쪽에서 흘러 내려온 드니프로강은 이 도시를 끼고 남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가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흑해로 이어진다. 강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드니프로 남동쪽의 아조프 고지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드니프로는 전반적으로 건기가 따로 없이 습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름에는 인접한 지중해성 기후대의 영향을 받아 뜨겁긴 하지만 다른 계절에 비해 건조한 편이다. 덥고 건조한 여름과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그리고 비교적 습한 봄과 가을 등 4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드니프로의 여름은 7월 낮 평균기온이 24~28℃이고 종종 32~36℃까지 올라갈 만큼 덥다. 겨울에는 1월 낮 평균기온이 –4~0℃로 아주 춥지는 않지만, 눈이 오지 않고 바람이 강하게 불면 체감기온이 극도로 떨어질 수 있다.

역사[편집]

드니프로에는 중세부터 수도사들이 살았다. 9세기경 비잔틴의 수도사들은 드니프로강변 모나스티르스키섬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1240년 타타르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고지대인 드니프로강 우안(右岸)에 살던 타타르인들은 15세기 초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의해 쫓겨났다. 15세기 중반 아조프해(Sea of Azov) 북쪽에 살던 노가이(Nogai)인과 크림 한국(Crimean Khanate)이 이 땅을 침략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크림 한국은 드니프로강과 드니프로강의 지류인 사마라(Samara)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현재의 드니프로 시 경계선을 국경으로 정하는 데 합의했다. 나중에 자포로지아 카자크(Zaporozhian Cossacks)라고 불리게 된 새로운 세력이 나타난 것은 이때였다. 카자크 부대의 잇따른 습격과 전투로 이 지역은 황폐화됐다.

최초로 요새화된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1635년 폴란드가 코닥(Kodak) 요새를 만들었다. 투르크 및 크림 한국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이 지역 농민들이 카자크의 습격을 피해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1635년 8월 3일 밤, 카자크는 이 요새를 기습해 불태우고 200여 명의 서유럽 용병으로 이뤄진 수비대를 살해했다. 폴란드는 1638년 프랑스인 기술자를 시켜 이 요새를 재건하고 용병 수비대를 두었다. 그러나 1648년 10월 1일 카자크에게 다시 요새를 빼앗겼다. 이후 코닥 요새는 1711년까지 카자크 부대의 수하에 있었다. 하지만 자포리지아 카자크의 준자치 정치공동체인 자포리지아 시치(Zaporizhian Sich)가 차지하고 있던 요새 인근의 영토는 1667년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공동관리를 받게 되었고, 1686년부터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코닥 요새는 1711년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쟁 후 프루트(Pruth) 조약에 따라 파괴되었다. 타타르군 및 오스만제국과 동맹을 맺은 카자크 부대는 러시아군을 시가 지역에서 철수시켰다.

1760년대 후반 지금의 드니프로 중심가에 자포리지아 카자크 마을이 건설되었다. 1768년 제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시작되자 카자크 부대는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이번에는 러시아군과 함께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싸웠다. 이 전쟁은 1774년 러시아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획득한 영토에 노보로시야현이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들고, 자신의 연인이자 귀족 출신의 군인인 그리고리 포툠킨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1775년 총독으로 부임한 포툠킨은 자포리지아 시치를 파괴하고 카자크의 자치권을 없애는 동시에, 이 지역에 도시들을 건설하고 외국인의 이주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공식적인 건립 연도는 1776년으로 공표돼 있으나, 원래의 시가지는 현재의 위치보다 북동쪽, 킬첸강(Kilchen)과 사마라강의 합류 지점에 1777년 건설됐다. 도시는 예카테리나 2세를 기리는 예카테리노슬라프(우크라이나어로는 카테리노슬라프)로 명명됐다. 1782년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인구는 2194명이었다. 그러나 시가지가 습지화하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 정착지는 노보모스콥스크(Novomoskovsk)로 개명되어 남고, 자포리지아 카자크 마을이 있던 현재의 시가지에 1787년 다시 도시가 세워졌다. 도시 건설은 대규모로 진행됐지만 1791년 포툠킨 총독이 사망하면서 예카테리노슬라프의 건설 계획은 많이 축소되었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한 후에는 1797년부터 1802년까지 노보로시스크(Novorossiysk)로 개칭되기도 했다.

도시에 제조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794년 대규모의 국고보조를 받는 직물공장과 실크스타킹공장이 다른 지역에서 이전해오면서부터다. 1797년 당시 직물공장에는 819명의 노동자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여성이 378명, 아동이 115명이었다. 스타킹공장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비율이 더 높았다. 이들의 노동 조건은 가혹했고, 임금조차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다. 도시의 산업은 대부분 농업 원자재 처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1832년에야 겨우 15명의 근로자를 둔 작은 제철공장이 세워졌다. 1796년 드니프로강에 다리가 건설되고 19세기 초에는 무역이 성장했지만 예카테리노슬라프는 여전히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1880년대 철도가 건설되고 도시의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도시는 급격히 발전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의 남서쪽에 있는 크리비리크에서 생산되는 선철(銑鐵)을 현재의 도네츠크(Donetsk)에서 채굴된 석탄으로 녹이려면 두 곳을 잇는 철도가 필요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를 거쳐 드니프로강을 가로질러 두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가 1884년 개통되었다. 1897년 예카테리노슬라프는 러시아 제국에서 트램(전차)을 가진 세 번째 도시가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하면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도 수십 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다쳤다. 반유대주의 물결도 일어났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이후 예카테리노슬라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Ukrainian People's Republic)의 자치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에 잠시 장악됐던 이 도시는 1918년 4월 5일 독일군에 점령됐다. 한동안 무정부 혼란 상태였던 이 도시는 1919년 적군에게 넘어갔다. 1926년 우크라이나의 공산당 지도자였던 그리고리 페트롭스키의 이름을 따서 드니프로페트롭스크로 도시명이 바뀌었다.

드니프로페트롭스크는 1941년 8월 26일부터 1943년 10월 25일까지 나치 점령하에 있었다. 이곳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벌어져, 1942년 2월 도시의 유대인 인구는 3만여 명에서 702명으로 줄었다. 1944년 7월 소련의 국방위원회는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항공기 공장이 있던 곳에 대규모의 군비제조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1945년 12월 독일군 포로 수천 명이 이 공장을 짓는 데 동원됐다. 이것이 드니프로페트롭스크 자동차공장의 시작이다.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곳에서 로켓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도록 고도의 자격을 갖춘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에게 비밀 특훈을 시키도록 했다. 1954년 이 자동차공장에는 미사일과 로켓을 만들기 위한 비밀 설계 사무소 '남부'(러시아식 약자로 KBYu)가 만들어졌다. 수백 명의 물리학자, 엔지니어, 기계 설계 전문가들이 이 사무소에 합류하기 위해 모스크바와 다른 대도시에서 드니프로페트롭스크로 이주해왔다.

1951년 이 공장에서 처음 제조된 미사일의 사거리는 270km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4년부터 1971년까지 소련의 저명한 과학자이자 우주발사체 설계 전문가인 미하일 얀겔이 이 공장과 KBYu를 진두지휘하는 동안 기술은 급격히 향상됐다. 이곳에서 생산된 탄도미사일용 엔진은 사거리가 사실상 무제한일 정도로 강력했고, 이것은 소련 최초의 우주선 발사체에 사용되었다. 이 공장의 공식 명칭은 1966년 남부기계건설공장, 러시아어로는 약칭 유즈마시(Yuzhmash)로 바뀌었다.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장기 집권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트 쿠치마(Леонід Кучма) 전 대통령은 바로 유즈마시의 수석 매니저 출신이다.

얀겔 사후에도 1980년대까지 이 공장에서는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s)에 쓰인 다양한 기술장치들이 제조되는 등 소련의 전략 및 우주 미사일 설계와 제조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러한 내용은 유즈마시의 대외 보고서에는 담겨 있지 않았다. 이 공장의 근로자와 그 가족들은 이곳의 진짜 생산품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일반 소형 기계나 농업용 트랙터, 주방 장비 등을 제조하는 공장이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1959년 드니프로페트롭스크에 외국인의 방문을 금지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 후인 1987년에야 이 도시는 외국인에게 다시 문을 열었다.

2013년 11월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던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친러 정책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유로마이단(Euromaidan:친유럽 시위) 사태는 드니프로페트롭스크로도 확산됐다. 2014년 1월 26일 반(反) 야누코비치 시위대 3000명이 시내의 지방정부 청사를 점거하려다 실패하자, 이틀 후에는 야누코비치 정부를 지지하는 공공부문 근로자 2000명이 무기한 집회를 시작하는 등 친서방 세력과 친러 세력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표출됐다.

2014년 2월 22일 드니프로페트롭스크 시장은 야누코비치 대통령과의 정치적 결별을 선언했고, 시의회 역시 일부에서 제기된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의 분리, 독립 주장에 선을 그었다. 이날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시내 중심의 레닌 광장은 유로마이단 기간 동안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독립영웅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레닌 동상들도 철거되었다. 2016년 5월에는 도시명도 드니프로로 개칭되었다.[3]

경제[편집]

드니프로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산업 중심지 중 하나다. 거대하고 다양한 에너지 자원 덕분이다. 인근의 수력 발전소와 석탄 · 천연가스 · 철광석 등이 기반이다.

드니프로의 산업은 주철, 압연금속, 파이프, 일반 산업 및 농업 기계장비, 트랙터, 트롤리 버스, 냉장고, 화학제품 등 중공업 부문이 주를 이룬다. 가장 크고 오래된 공장은 드니프로 금속공장이다. 그 밖에 목공, 경공업, 식품공업 등의 시설들이 있다. 드니프로의 공산품들은 50여 개국으로 수출된다.

드니프로는 또한 교통의 요지다. 돈바스-크리비리크와 하르키프-헤르손 철도 노선이 이곳에서 드니프로강의 수상 노선과 교차한다. 12개의 화물역과 3개의 여객역이 있으며, 이 도시의 항구는 드니프로강에서 가장 큰 항구 중 하나다.[4]

지도[편집]

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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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드니프로〉, 《위키백과》
  2. 드니프로〉, 《나무위키》
  3. 드니프로〉, 《요다위키》
  4. 드니프로(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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