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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세아트는 스페인 정부 산하 '''국립산업연구소'''(Instituto Nacional de Industria, INA)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스페인 정부가 관리하는 국영기업의 형태로 스페인 정부와 6개의 스페인 은행이 공동 출자하여 초기 설립하였다. 사업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스페인 정부와 국립산업연구소는 완성 자동차를 만들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술이전을 해줄 해외 자동차 업체를 공개 입찰했다. 공개 입찰 결과 스페인 과달라하라 지역에 공장을 세운다는 계획 등 호의적인 조건을 내건 이탈리아의 [[피아트]]가 최종 결정됐다. 피아트와 최종까지 경쟁한 브랜드는 미래의 모기업 [[폭스바겐]]이었다. 사업파트너로 결정된 피아트는 7%의 세아트 지분을 얻게 되었고 스페인 정부 산하 INI가 51%, 은행연합이 42%의 지분을 소유하였다. 세아트는 2000년까지 연간 생산량이 500,000 대가 넘었으며 2006년까지 총 1,600 만 대 이상의 자동차가 생산되었으며 그 중 마르토렐 공장에서 6백만 대 이상이 생산되었으며 연간 생산량의 3/4이 전 세계 70 개국 이상으로 수출되고 있다. SEAT는 오늘날 자체 자동차를 자체 개발할 수있는 능력과 인프라를 갖춘 유일한 스페인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다.
 
세아트는 스페인 정부 산하 '''국립산업연구소'''(Instituto Nacional de Industria, INA)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스페인 정부가 관리하는 국영기업의 형태로 스페인 정부와 6개의 스페인 은행이 공동 출자하여 초기 설립하였다. 사업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스페인 정부와 국립산업연구소는 완성 자동차를 만들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술이전을 해줄 해외 자동차 업체를 공개 입찰했다. 공개 입찰 결과 스페인 과달라하라 지역에 공장을 세운다는 계획 등 호의적인 조건을 내건 이탈리아의 [[피아트]]가 최종 결정됐다. 피아트와 최종까지 경쟁한 브랜드는 미래의 모기업 [[폭스바겐]]이었다. 사업파트너로 결정된 피아트는 7%의 세아트 지분을 얻게 되었고 스페인 정부 산하 INI가 51%, 은행연합이 42%의 지분을 소유하였다. 세아트는 2000년까지 연간 생산량이 500,000 대가 넘었으며 2006년까지 총 1,600 만 대 이상의 자동차가 생산되었으며 그 중 마르토렐 공장에서 6백만 대 이상이 생산되었으며 연간 생산량의 3/4이 전 세계 70 개국 이상으로 수출되고 있다. SEAT는 오늘날 자체 자동차를 자체 개발할 수있는 능력과 인프라를 갖춘 유일한 스페인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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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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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토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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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와 주요 제조 시설은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업 도시인 마르토렐(Martorell)에 있으며, 연간 생산 능력은 약 500,000대이다. 이 공장은 1993년 2월 22일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국왕 이 개장하여 바르셀로나 자유 항구 (Zona Franca) 해안가에 있는 SEAT 조립 공장과 함께 주요 공장이 되었다. SEAT의 마르토렐(Martorell)과 조나 프랑카(Zona Franca) 단지 사이는 철도 연결이 되어 차량 및 부품 운송을 용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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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토렐의 산업 단지에는 SEAT Sport, SEAT의 기술센터, 연구개발센터(R&D), 디자인 센터, 프로토타입 개발 센터, SEAT 서비스 센터 (또한 판매 후 서비스 부서, 고객 서비스 부서 및 Catalunya Motor 대리점)  및 세아트, [[폭스바겐]](Volkswagen), [[아우디]](Audi) 및 [[스코다]](Škoda) 브랜드를 위한 정품 부품 센터를 통합했다. 이 공장은 현재 Volkswagen-Audi-Espana, SA가 소유하고있는 팜플로나(Pamplona)에 있는 이전 세아트 공장을 지원할 수 있다. 2011 년부터 이 공장은 Audi Q3 소형 SUV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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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 프랑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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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및 조립 시설은 폭스 바겐 그룹 내에서도 가장 최신으로 자체 브랜드뿐만 아니라 폭스바겐, 아우디 등 다른 폭스바겐 그룹 브랜드 자동차를 생한할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몇가지 아우디 모델(예: 아우디 A1, 아우디 A3 스포츠 백, 아우디 Q5 등)의 개발 및 설계와 여러가지 아우디 개발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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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조나 프랑카 단지에는 세아트 트레이닝센터, 조나 프랑카 프레스 숍 공장, 스탬프 차체 부품 생산, 바로셀로나 기어박스 델 프라트 공장이 포함되어 있으며 세아트뿐만 아니라 다른 폭스바겐 그룹 브랜드(VW , Audi 및 Škoda)용 변속 장치를 생산하고 있다. 후자 공장은 고품질 생산 공정과 제품으로 2009년폭스바겐우수상을 수상했다.
  
 
== 주요인물 ==
 
== 주요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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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트와의 파트너십 ===
 
=== 피아트와의 파트너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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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트의 조나 프랑카 공장의 공사는 1950년에 시작되었고, 개업일은 3년 뒤인 1953년 6월 5일이었다. 마르케 역사상 최초로 생산된 차는 1953년 11월 13일 생산 라인에서 나온 SEAT 1400 모델이며 번호판 B-87.223이 장착되었다. 이후 몇 달 동안 공장의 생산량과 인력은 생산 과정에서 현지에서 제조된 구성 요소의 구현과 함께 크게 증가하여 한 부분 및 다른 부분의 수입을 제한하여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스페인 공급 업체 산업의 발전을 추진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 경제를 복원하는 데 있어 국가 자동차 제조업체로서 SEAT가 맡은 핵심 역할을 해나가려 했다. 1954년까지 스페인제 부품의 사용이 전체의 93%로 증가했고, 이듬 해 1955년 5월 5일 정식으로 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EAT가 출시한 첫 모델은 고급차로 간주되어 가격이 비싸고, 스페인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당장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SEAT는 비스쿠터(Biscúter)처럼 현지 시장에 등장한 간단하고 저렴한 디자인과 경쟁하기 위해 두 번째 더 경제적인 모델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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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트가 1975년 최초의 자체 개발 모델인 SEAT 1200 Sport를 선보일 기술적 성숙도와 전문성을 갖추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파트너인 피아트의 라이선스를 빌린 스타일 모델을 제조해야 했다. 또는 자체 범위의 필요에 따라 재개발을 진행했다. 세아트 독점 파생 상품의 첫 번째 예는 SEAT 600을 기반으로 한 Fiat 범위에 동급 모델이 없는 SEAT가 자체 개발한 자동차로 1963년 9월에 SEAT 800을 출시했다.
  
== 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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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트는 1957년에 조나 프랑카(Zona Franca) 공장 지역에 세아트 트레이닝 센터(SEAT Training Center)를 설립했다. 이 기관은 자격을 갖춘 인력 교육을 담당하고 전문 기술 인력에 대한 자동차 산업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기관이다. 같은 해, 역사적인  SEAT 600이 출시되었는데 이 차는 말 그대로  스페인을 모터로 작동시킨 스페인의 많은 가정을 위한 최초의 자동차로 기적의 상징이 되었다.
=== 마르토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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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와 주요 제조 시설은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업 도시인 마르토렐(Martorell)에 있으며, 연간 생산 능력은 약 500,000대이다. 이 공장은 1993년 2월 22일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국왕 이 개장하여 바르셀로나 자유 항구 (Zona Franca) 해안가에 있는 SEAT 조립 공장과 함께 주요 공장이 되었다. SEAT의 마르토렐(Martorell)과 조나 프랑카(Zona Franca) 단지 사이는 철도 연결이 되어 차량 및 부품 운송을 용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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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급증으로 연간 생산량 증가가 잇따라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규모의 경제는 비용 절감과 가격 인하를 실현하면서 수요를 갱신하고 SEAT의 이익과 함께 매출을 끌어올렸다. 1964년 6월 29일, 이 브랜드는 마드리드에 새로운 본사를 열었고, 마드리드는 1972년까지 이 회사의 유일한 일반 관리 사무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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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출시된 SEAT 850 Sport는 SEAT의 첫 번째 쿠페 모델이었다. 스페인 국내 시장용 자동차를 생산한지 14년 만인 1967년, 스페인에서 파사-르노(FASA-Renault), 시트로엥-히스파니아(Citroën-Hispania), 오티(Authi), 바레이로스(Barreiros) 등 주요 경쟁사들보다 앞서 세아트의 성공은 스페인 최대 자동차 메이커로, 전적으로 현지화된 생산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해 1948년 피아트사와 체결한 원래 라이선스 계약의 기간인 스페인으로부터 SEAT 자동차 수출 제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피아트사와 스페인 산업부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대가로 피아트는 보유 지분을 7%에서 36%로 늘리고, 동시에 정부 보유기관이 보유한 지분도 51%에서 32%로 축소하기로 했다. 나머지 32%는 스페인 주요 6개 은행이 가져갔는데 균등하게 7%씩 보유하고 있던 이전의 42%보다 감소했다. 비록 대주주는 아니지만, 피아트가 사업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이 거래는 또한 SEAT의 성장과 새로운 모델(아마도 SEAT 133)) 개발을 돕기 위한 피아트의 다양한 언더테이션을 포함했다. 1967년 12월 6일, 세아트는 자체 고객금융회사인 휘그니시에라 세아트(Financiera SEAT, SA'(Fiseat))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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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6일, 독자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아트는 신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인프라 구축에 착수했다. 1972년, 이 브랜드는 마르토렐에 있는 미래기술센터 부지에 임시 시설을 마련했고, 1973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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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기간 동안 제조업체는 1971년 해안가에 위치한 바르셀로나 공장에서 발생한 파업과 심각한 홍수로 인해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에 스페인 전체 생산량의 58% 이상인 28만2,698대를 생산하여 계속해서 스페인 자동차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1000명 당 81대에 불과한 스페인 자동차 판매량은 더욱 성장할 것으로 보여 세아트는 여전히 보호가 심한 스페인 자동차 시장에서 현지 생산 설비의 설립이나 확대를 고려하는 다른 주요 제조업체들과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전망에 직면했다. 1973년, 세아트와 시트로엥-히스파니아는 공동 출자하여 전륜구동 자동차에 사용되는 필수 부품인 등속조인트(Constant-velocity joints)를 생산하는 산업체 메카니카스 데 갈리시아(Mecánicas de Galicia, SA)의  비고(Vigo) 소재 공장을 설립하였고, 그 당시에 사용이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세아와 시트로엥-히스파니아뿐 아니라 포드 에스파냐에도 부품을 공급하게 될 이 공장은 1986년 말 다국적 기업인 GKN에 이전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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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스페인 주 당국으로부터 오티(Authi) 소유 공장 노동자들의 일자리 구출을 보장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 세아트는 파산한 오티의 모회사인 영국 레이랜드 자동차 회사(BLMC)와 협의에 나서면서 이에 대한 GM의 관심은 제쳐두고 스페인에서의 브랜드 운영을 인수하게 되었다. 미국 자동차 회사가 스페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피아트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이 회담은 1975년 7월 세아트가 BLMC로부터 Authi 브랜드와 1억 5천만  페세타에 대한 자산을 인수하는 계약이 발표되면서 끝났다. Landaben 공장의 강제 인수는 또한 Zaragoza 신공장을 건설하려는 세아트의 계획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Manresa의 Authi 공급업체 공장이 1억5천만 페세타에 코케타(Cometsa)라는 회사로 이전되었지만 팜플로나의 Landaben공장은 SEAT의 소유권하에 남아 1976년 2월에 SEAT 자동차만 생산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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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는 세아트의 리스회사 리세아트(Liseat)가 설립되었고, 1979년에는 바르셀로나 인근 엘프라트 델 로브레가트(El Prat del Llobregat)에 기어박스, 기어 메커니즘, 차동 생산 전문 공장으로 Gearbox del Prat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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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트와의 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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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세아트의 대주주인 스페인 정부와 피아트 자동차 사이에 자금과 통제에 관한 광범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세아트는 부분적으로 1970년대의 석유 위기와 스페인의 GM에 대한 보호주의 정책의 종료, 또한 피아트 이익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피아트가 기여할 준비가 되지 않은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했다. 1982년, 그 결과는 거의 30년 만에 피아트와의 관계를 끝마친 것으로, 스페인 경제에 우호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다소 놀라운 결정이었고 스페인은 1977년 이후 유럽 경제 공동체에 속했다.  
  
마르토렐의 산업 단지에는 SEAT Sport, SEAT의 기술센터, 연구개발센터(R&D), 디자인 센터, 프로토타입 개발 센터, SEAT 서비스 센터 (또한 판매 후 서비스 부서, 고객 서비스 부서 및 Catalunya Motor 대리점)  및 세아트, [[폭스바겐]](Volkswagen), [[아우디]](Audi) 및 [[스코다]](Škoda) 브랜드를 위한 정품 부품 센터를 통합했다. 이 공장은 현재 Volkswagen-Audi-Espana, SA가 소유하고있는 팜플로나(Pamplona)에 있는 이전 세아트 공장을 지원할 수 있다. 2011 년부터 이 공장은 Audi Q3 소형 SUV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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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회사와의 협업이 종료되면서 1982년 SEAT 로고가 변경되었고  같은 해에 피아트의 개입이 없는 새로운 SEAT 로고 아래의 첫 번째 자동차 Rayton Fissore가 Martorel의 기술 센터와 협력하여 스타일링한 세아트 론다(SEAT Ronda)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모델의 출시로 인해 피아트사가 세아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이유는 이 차가 피아트 자동차인 리트모(Fiat Ritmo)와 너무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세아트의 당시 사장인 후안 미겔 앙투안자스(Juan Miguel Antoñanzas)는 밝은 노란색 피아트 리트모와는 다른 모든 부품을 사용하여 제조한 론다를 언론에 선보여 그 차이를 부각시켰다. 사건은 결국 파리의 중재회의소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1983년 두 차간의 차이가 론다를 리트모(Ritmo)로 보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선언하여 세아트에 유리한 분쟁으로 종결시켰다.  
  
=== 조나 프랑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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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스바겐 그룹 자회사 ===
개발 및 조립 시설은 폭스 바겐 그룹 내에서도 가장 최신으로 자체 브랜드뿐만 아니라 폭스바겐, 아우디 등 다른 폭스바겐 그룹 브랜드 자동차를 생한할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몇가지 아우디 모델(예: 아우디 A1, 아우디 A3 스포츠 백, 아우디 Q5 등)의 개발 및 설계와 여러가지 아우디 개발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바르셀로나 조나 프랑카 사이트에는 세아트 트레이닝센터, 조나 프랑카 프레스 숍 공장, 스탬프 차체 부품 생산, 바로셀로나 기어박스 델 프라트 공장이 포함되어 있으며 세아트뿐만 아니라 다른 폭스바겐 그룹 브랜드(VW , Audi 및 Škoda)용 변속 장치를 생산하고 있다. 후자 공장은 고품질 생산 공정과 제품으로 2009년폭스바겐우수상을 수상했다.
 
  
 
== 판매현황 ==
 
== 판매현황 ==

2020년 11월 2일 (월) 16:02 판

세아트(开沃汽车, SEAT)
세아트(开沃汽车, SEAT)

세아트(SEAT, 西亚特)는 스페인의 유일한 양산형 자동차 생산 판매 기업이다. 현재 폭스바겐 그룹 산하의 자회사로 편입되어 있다. 정확히 아우디 앤 람보르기니(Audi And Lamborghini)에 속해 있으며 본사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마르토렐(Martorell)에 있다. 1950년 5월 9일에 카탈루냐 지역인 바르셀로나 근처의 마르토렐에서 국영 기업체인 'Sociedad Española de Automoviles de Turismo'(에스빠냐 투리스모 자동차 회사)로서 설립되었다. 이를 줄여서 세아트(SEAT)라고 부르게 되었다. 초기에는 피아트의 모델들을 라이센스 생산하다가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피아트의 차량을 라이센스해서 세아트 브랜드로 바꿔서 판매, 수출만을 해오다가 1982년에 최초의 독자개발 모델인 론다(Ronda)의 생산을 시작으로 이비자(Ibiza) 등의 독자 모델을 개발,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나 1986년에 폭스바겐이 세아트의 주식 75%를 인수하면서부터 폭스바겐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며 1990년에는 폭스바겐이 세아트의 지분 99.99%를 인수하여 완전 자회사화하게 되었다. 2020년 10월 1일부터 웨인 그리피스(Wayne Griffiths)가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개요

세아트는 스페인 정부 산하 국립산업연구소(Instituto Nacional de Industria, INA)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스페인 정부가 관리하는 국영기업의 형태로 스페인 정부와 6개의 스페인 은행이 공동 출자하여 초기 설립하였다. 사업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스페인 정부와 국립산업연구소는 완성 자동차를 만들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술이전을 해줄 해외 자동차 업체를 공개 입찰했다. 공개 입찰 결과 스페인 과달라하라 지역에 공장을 세운다는 계획 등 호의적인 조건을 내건 이탈리아의 피아트가 최종 결정됐다. 피아트와 최종까지 경쟁한 브랜드는 미래의 모기업 폭스바겐이었다. 사업파트너로 결정된 피아트는 7%의 세아트 지분을 얻게 되었고 스페인 정부 산하 INI가 51%, 은행연합이 42%의 지분을 소유하였다. 세아트는 2000년까지 연간 생산량이 500,000 대가 넘었으며 2006년까지 총 1,600 만 대 이상의 자동차가 생산되었으며 그 중 마르토렐 공장에서 6백만 대 이상이 생산되었으며 연간 생산량의 3/4이 전 세계 70 개국 이상으로 수출되고 있다. SEAT는 오늘날 자체 자동차를 자체 개발할 수있는 능력과 인프라를 갖춘 유일한 스페인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다.

시설

마르토렐

본사와 주요 제조 시설은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업 도시인 마르토렐(Martorell)에 있으며, 연간 생산 능력은 약 500,000대이다. 이 공장은 1993년 2월 22일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국왕 이 개장하여 바르셀로나 자유 항구 (Zona Franca) 해안가에 있는 SEAT 조립 공장과 함께 주요 공장이 되었다. SEAT의 마르토렐(Martorell)과 조나 프랑카(Zona Franca) 단지 사이는 철도 연결이 되어 차량 및 부품 운송을 용이하게 한다.

마르토렐의 산업 단지에는 SEAT Sport, SEAT의 기술센터, 연구개발센터(R&D), 디자인 센터, 프로토타입 개발 센터, SEAT 서비스 센터 (또한 판매 후 서비스 부서, 고객 서비스 부서 및 Catalunya Motor 대리점) 및 세아트, 폭스바겐(Volkswagen), 아우디(Audi) 및 스코다(Škoda) 브랜드를 위한 정품 부품 센터를 통합했다. 이 공장은 현재 Volkswagen-Audi-Espana, SA가 소유하고있는 팜플로나(Pamplona)에 있는 이전 세아트 공장을 지원할 수 있다. 2011 년부터 이 공장은 Audi Q3 소형 SUV도 생산한다.

조나 프랑카

개발 및 조립 시설은 폭스 바겐 그룹 내에서도 가장 최신으로 자체 브랜드뿐만 아니라 폭스바겐, 아우디 등 다른 폭스바겐 그룹 브랜드 자동차를 생한할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몇가지 아우디 모델(예: 아우디 A1, 아우디 A3 스포츠 백, 아우디 Q5 등)의 개발 및 설계와 여러가지 아우디 개발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바르셀로나 조나 프랑카 단지에는 세아트 트레이닝센터, 조나 프랑카 프레스 숍 공장, 스탬프 차체 부품 생산, 바로셀로나 기어박스 델 프라트 공장이 포함되어 있으며 세아트뿐만 아니라 다른 폭스바겐 그룹 브랜드(VW , Audi 및 Škoda)용 변속 장치를 생산하고 있다. 후자 공장은 고품질 생산 공정과 제품으로 2009년폭스바겐우수상을 수상했다.

주요인물

역사

세아트 설립

스페인 내전 이후 약화된 스페인 시장에서 외국 기업들이 보여준 관심 부족은 현지 이익에 기회를 열었다. SEAT는 1940년 6월 22일, 스페인 은행 '방코 우르퀴조(Banco Urquijo )'와 산업기업그룹 ( Hispano-Suiza , Basconia, Duro-Felguera, SE de Construcción Naval, Euskalduna , SE de Construcciones Metálicas, Fundiciones Bolueta, Echevarría 등)은 스페인 자체의 대량 생산 자동차 메이커 설립을 목표로 'Sociedad Ibérica de Automóviles de Turismo'(SIAT)를 설립했다. Banco Urquijo의 초기 프로젝트는 SEAT 자동차 회사를 완전 민간 기업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941년 이후 곧 국립산업연구소는 1942년 1월 3일 프랑코 정부가 내린 결정을 따랐다. 새로운 국가 자동차 브랜드의 목표는 스페인에서 외국 디자인과 부품을 조립하는 또 다른 라이센스 자동차 제조업체가 아니라 스페인 내에서 설계부터 조립까지 전체 제조 공정을 통째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자동차 양산 개발에 대한 국가의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초기에 현금, 주식, 채권 및 로열티를 대가로 기술적으로 그리고 자체 모델로 기여할 외국 파트너를 찾는 것이 행동의 과정이 되었다. 나머지 유럽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스페인 자체가 내전으로 폐허가 되면서 프로젝트는 지연되었지만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았다.

현재 명칭의 SEAT는 1950년 5월 9일, 국립산업연구원(INI)의 'Sociedad Española de Automóviles de Turismo, SA'(SEAT)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으며, 초기 자본금은 약 6억 페세트에 달한다. 거의 360만 유로로 주당 1,000페세타 60만주 형태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국가 경제의 기본 구조를 개조해야할 때 SEAT의 탄생은 스페인 정부와 6개의 스페인 은행('Banco Urquijo', ' Banco Español de Crédito (Banesto) ', ' Banco de Bilbao ', ' Banco de Vizcaya, Banco Hispano-Americano ','Banco Central')은 스페인의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를 되살리기 위해 외국 동맹국과의 협력을 촉구, 우선 협상 대상자는 독일의 폭스바겐과 이탈리아의 피아트였다. 피아트는 스페인 남북전쟁에서 파괴된 과달라하라에 '피아트 히스파니아' 공장을 세우는 계획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낙찰됐다. 피아트가 프랑스 기업 심카(Simca)와 협업한 것은 피아트의 국제 프로젝트 관리 능력을 입증했다. 이탈리아의 반회전 자동차 시장에서의 피아트의 경험은 스페인에서 가장 쉽게 이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졌는데, 당시 두 곳 모두 비슷한 도로 조건뿐만 아니라 저소득층과 제한된 자동차 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피아트가 12마력 이하 차량 시장을 장악했는데, 이는 당초 스페인의 주요 시장 부문이 될 것으로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대적인 경제적 고립은 이탈리아를 손상시켰고 피아트는 이탈리아 밖의 기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47년 방코 우르키조 그룹은 S.I.A.T. 사업을 부활시켰고, 이듬해 INI가 51%의 지배지분을 보유할 것이라는 이해와 함께 '국가간 국제간 거래'에서 기업의 집중적인 접근방식을 보존하는 신설회사에서의 지배행위로 성공적으로 회담이 종료되었다. 파트너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는 기술 지원을 받는 대가로 7%의 지분을 제공받았다. 이렇게 SEAT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가장 큰 고용주로서 국가의 경제 회복을 재창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대부분 농촌 경제였던 것의 산업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 초대 사장은 스페인의 항공기 제조업체인 콘스트루시온스 아에로나우티카스 SA(CONSTRUCCIONES Aeronáuticas SA)에서 온 산업 및 항공 엔지니어, 조종사, 사진작가인 호세 오르티즈-에차귀에 푸에르타스(José Ortiz-Echagüe Puertas)로 CEO 직책을 맡아 왔으며 1976년에 SEAT 명예 종신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피아트와의 파트너십

세아트의 조나 프랑카 공장의 공사는 1950년에 시작되었고, 개업일은 3년 뒤인 1953년 6월 5일이었다. 마르케 역사상 최초로 생산된 차는 1953년 11월 13일 생산 라인에서 나온 SEAT 1400 모델이며 번호판 B-87.223이 장착되었다. 이후 몇 달 동안 공장의 생산량과 인력은 생산 과정에서 현지에서 제조된 구성 요소의 구현과 함께 크게 증가하여 한 부분 및 다른 부분의 수입을 제한하여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스페인 공급 업체 산업의 발전을 추진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 경제를 복원하는 데 있어 국가 자동차 제조업체로서 SEAT가 맡은 핵심 역할을 해나가려 했다. 1954년까지 스페인제 부품의 사용이 전체의 93%로 증가했고, 이듬 해 1955년 5월 5일 정식으로 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EAT가 출시한 첫 모델은 고급차로 간주되어 가격이 비싸고, 스페인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당장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SEAT는 비스쿠터(Biscúter)처럼 현지 시장에 등장한 간단하고 저렴한 디자인과 경쟁하기 위해 두 번째 더 경제적인 모델이 필요했다.

세아트가 1975년 최초의 자체 개발 모델인 SEAT 1200 Sport를 선보일 기술적 성숙도와 전문성을 갖추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파트너인 피아트의 라이선스를 빌린 스타일 모델을 제조해야 했다. 또는 자체 범위의 필요에 따라 재개발을 진행했다. 세아트 독점 파생 상품의 첫 번째 예는 SEAT 600을 기반으로 한 Fiat 범위에 동급 모델이 없는 SEAT가 자체 개발한 자동차로 1963년 9월에 SEAT 800을 출시했다.

세아트는 1957년에 조나 프랑카(Zona Franca) 공장 지역에 세아트 트레이닝 센터(SEAT Training Center)를 설립했다. 이 기관은 자격을 갖춘 인력 교육을 담당하고 전문 기술 인력에 대한 자동차 산업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기관이다. 같은 해, 역사적인 SEAT 600이 출시되었는데 이 차는 말 그대로 스페인을 모터로 작동시킨 스페인의 많은 가정을 위한 최초의 자동차로 기적의 상징이 되었다.

수요 급증으로 연간 생산량 증가가 잇따라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규모의 경제는 비용 절감과 가격 인하를 실현하면서 수요를 갱신하고 SEAT의 이익과 함께 매출을 끌어올렸다. 1964년 6월 29일, 이 브랜드는 마드리드에 새로운 본사를 열었고, 마드리드는 1972년까지 이 회사의 유일한 일반 관리 사무소였다.

1967년에 출시된 SEAT 850 Sport는 SEAT의 첫 번째 쿠페 모델이었다. 스페인 국내 시장용 자동차를 생산한지 14년 만인 1967년, 스페인에서 파사-르노(FASA-Renault), 시트로엥-히스파니아(Citroën-Hispania), 오티(Authi), 바레이로스(Barreiros) 등 주요 경쟁사들보다 앞서 세아트의 성공은 스페인 최대 자동차 메이커로, 전적으로 현지화된 생산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해 1948년 피아트사와 체결한 원래 라이선스 계약의 기간인 스페인으로부터 SEAT 자동차 수출 제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피아트사와 스페인 산업부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대가로 피아트는 보유 지분을 7%에서 36%로 늘리고, 동시에 정부 보유기관이 보유한 지분도 51%에서 32%로 축소하기로 했다. 나머지 32%는 스페인 주요 6개 은행이 가져갔는데 균등하게 7%씩 보유하고 있던 이전의 42%보다 감소했다. 비록 대주주는 아니지만, 피아트가 사업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이 거래는 또한 SEAT의 성장과 새로운 모델(아마도 SEAT 133)) 개발을 돕기 위한 피아트의 다양한 언더테이션을 포함했다. 1967년 12월 6일, 세아트는 자체 고객금융회사인 휘그니시에라 세아트(Financiera SEAT, SA'(Fiseat))를 설립하였다.

1970년 11월 16일, 독자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아트는 신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인프라 구축에 착수했다. 1972년, 이 브랜드는 마르토렐에 있는 미래기술센터 부지에 임시 시설을 마련했고, 1973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같은 기간 동안 제조업체는 1971년 해안가에 위치한 바르셀로나 공장에서 발생한 파업과 심각한 홍수로 인해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에 스페인 전체 생산량의 58% 이상인 28만2,698대를 생산하여 계속해서 스페인 자동차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1000명 당 81대에 불과한 스페인 자동차 판매량은 더욱 성장할 것으로 보여 세아트는 여전히 보호가 심한 스페인 자동차 시장에서 현지 생산 설비의 설립이나 확대를 고려하는 다른 주요 제조업체들과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전망에 직면했다. 1973년, 세아트와 시트로엥-히스파니아는 공동 출자하여 전륜구동 자동차에 사용되는 필수 부품인 등속조인트(Constant-velocity joints)를 생산하는 산업체 메카니카스 데 갈리시아(Mecánicas de Galicia, SA)의 비고(Vigo) 소재 공장을 설립하였고, 그 당시에 사용이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세아와 시트로엥-히스파니아뿐 아니라 포드 에스파냐에도 부품을 공급하게 될 이 공장은 1986년 말 다국적 기업인 GKN에 이전할 예정이었다

1975년 5월, 스페인 주 당국으로부터 오티(Authi) 소유 공장 노동자들의 일자리 구출을 보장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 세아트는 파산한 오티의 모회사인 영국 레이랜드 자동차 회사(BLMC)와 협의에 나서면서 이에 대한 GM의 관심은 제쳐두고 스페인에서의 브랜드 운영을 인수하게 되었다. 미국 자동차 회사가 스페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피아트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이 회담은 1975년 7월 세아트가 BLMC로부터 Authi 브랜드와 1억 5천만 페세타에 대한 자산을 인수하는 계약이 발표되면서 끝났다. Landaben 공장의 강제 인수는 또한 Zaragoza 신공장을 건설하려는 세아트의 계획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Manresa의 Authi 공급업체 공장이 1억5천만 페세타에 코케타(Cometsa)라는 회사로 이전되었지만 팜플로나의 Landaben공장은 SEAT의 소유권하에 남아 1976년 2월에 SEAT 자동차만 생산을 계속했다.

1977년에는 세아트의 리스회사 리세아트(Liseat)가 설립되었고, 1979년에는 바르셀로나 인근 엘프라트 델 로브레가트(El Prat del Llobregat)에 기어박스, 기어 메커니즘, 차동 생산 전문 공장으로 Gearbox del Prat이 설립되었다.

피아트와의 분쟁

1980년대 초, 세아트의 대주주인 스페인 정부와 피아트 자동차 사이에 자금과 통제에 관한 광범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세아트는 부분적으로 1970년대의 석유 위기와 스페인의 GM에 대한 보호주의 정책의 종료, 또한 피아트 이익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피아트가 기여할 준비가 되지 않은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했다. 1982년, 그 결과는 거의 30년 만에 피아트와의 관계를 끝마친 것으로, 스페인 경제에 우호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다소 놀라운 결정이었고 스페인은 1977년 이후 유럽 경제 공동체에 속했다.

이탈리아 회사와의 협업이 종료되면서 1982년 SEAT 로고가 변경되었고 같은 해에 피아트의 개입이 없는 새로운 SEAT 로고 아래의 첫 번째 자동차 Rayton Fissore가 Martorel의 기술 센터와 협력하여 스타일링한 세아트 론다(SEAT Ronda)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모델의 출시로 인해 피아트사가 세아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이유는 이 차가 피아트 자동차인 리트모(Fiat Ritmo)와 너무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세아트의 당시 사장인 후안 미겔 앙투안자스(Juan Miguel Antoñanzas)는 밝은 노란색 피아트 리트모와는 다른 모든 부품을 사용하여 제조한 론다를 언론에 선보여 그 차이를 부각시켰다. 이 사건은 결국 파리의 중재회의소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1983년 두 차간의 차이가 론다를 리트모(Ritmo)로 보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선언하여 세아트에 유리한 분쟁으로 종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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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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