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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모터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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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모터컴퍼니(Austin Motor Company)
오스틴모터컴퍼니(Austin Motor Company)
허버트 오스틴(Herbert Austin) 창립자

오스틴모터컴퍼니(Austin Motor Company)은 1905년 허버트 오스틴(Herbert Austin)이 설립한 영국자동차 회사이다. 줄여서 오스틴(Austin)이라고도 한다. 영국의 국민 소형차인 오스틴 세븐(Austin seven)을 생산했으며, 모리스(Morris)의 모회사인 너필드(Nuffield)와 합병하여 브리티시모터(BMC)로 재탄생한 후 오스틴 미니(Austin mini)를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상하이자동차(SAIC)에 속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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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편집]

오스틴모터컴퍼니는 1905년 허버트 오스틴영국롱브리지(Longbride)에 설립한 자동차 회사이다. 오스틴은 미국포드(Ford) 모델T(Model T)처럼 값싸고 튼튼한 오스틴 미니를 만들어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1914년 오스틴은 텐(Ten), 트웬티(Twenty), 써티(Thirty) 등의 모델을 출시하였다.[1] 오스틴모터컴퍼니 최초의 차인 텐에는 5리터의 4행정 모델로 체인드라이브가 장착되었고 5년 동안 200대가 판매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틴은 영국 정부와 계약하여 대포와 항공기 엔진, 군용트럭 등을 공급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하여 고용인원이 2500명에서 2만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공로로 허버트 오스틴은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오스틴모터컴퍼니는 1920년대 초 재정 위기를 겪은 후 소형차 제작을 시작했다. 그렇게 1922년 오스틴의 최고 인기 모델인 세븐(Seven)을 출시하였다. 크고 비쌌던 당시 차들에 비해 작고 저렴한 이 차가 출시되자 신문들은 '백만 인의 자동차'라고 보도했다. 4기통 747cc 엔진으로 최고시속 80km를 달릴 수 있는 차였다. 세계 명차의 하나로 손꼽히며, 첫 판매가 시작된 1922년부터 1939년까지 29만 대가 생산되었다. 영국에서의 인기를 넘어 세븐은, 프랑스에서는 로젠가르트(Rosengart), 독일에서는 비엠더블유(BMW), 미국에서는 벤텀(Bantam), 일본에서는 닷선(Datsun)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져 소형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에서 수출되는 차량의 절반이 오스틴 차량일 정도로 성장했다. 1952년 오스틴은 모리스(Morris)의 모회사인 너필드(Nuffield)와 합병하여 브리티시모터(BMC; British Motor Corporation)가 되었다. 같은 해 BMC는 일본 닛산(Nissan)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으로 1953년부터 1959년 사이 닛산자동차는 2만 855대의 오스틴 차량을 조립, 판매했다. 1966년 BMC와 프레스드스틸(Pressed Steel)은 재규어(Jaguar)와 합병하여 브리티시 모터 지주회사(BMH)를 세웠다. BMH는 1968년 레일런드 모터스(Leyland Motors)와 합병했고, 오스틴은 BLMC(British Leyland Motor Corporation)에 소속되었다. 1988년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 1994년 비엠더블유(BMW), 2000년 MG 로버그룹에 차례로 매각된 이후 2005년 중국의 난징자동차(Nanjing Automobile)가 오스틴 브랜드와 롱브릿지의 공장을 소유하게 되었으나, 곧 모회사인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갔다.[2]

설립배경[편집]

영국 태생의 오스틴 설립자 허버트 오스틴(Herbert Austin, 1866~1941)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호주에서 사업을 하던 삼촌을 따라 영국을 떠났다. 호주에서는 자동차 부품을 포함한 기계류를 생산하던 울슬리(Wolseley)라는 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했다.[3] 1889년 울슬리가 영국으로 공장을 이전하자 오스틴은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이곳에서 부품 불량률을 낮추는 등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초고속 승진을 해 최고책임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때 오스틴은 유럽과 미국에서 자동차 열풍이 거세다는 사실을알고 자동차 산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5년 삼륜의 2인승 자동차를 첫 제작한 그는 1900년엔 1기통4륜구동 자동차를 만들어 전국경주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즈음 울슬리는 다른 회사에 경영권이 넘어갔고 새로운 오너와 불화를 겪었던 오스틴은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오스틴은 1905년 영국 롱브릿지에 자신의 공장 오스틴모터컴퍼니(Austin Motor Co)를 세웠다. 그의 작품으로는 직렬 4기통 엔진을 갖추고 출력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텐(Ten), 트웬티(Twenty), 서티(Thirty) 등이 있었다. 특히 주요 도시에 최초의 쇼룸과 정비소, 렌터카 시스템 등을 만들어 통합서비스를 하는 선진기법도 적용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른 자동차 메이커들과 마찬가지로 대포와 군용차 생산에 집중하면서 사세를 키워나갔다. 하지만 전쟁 이후 불경기가 겹쳤고 새롭게 시장 판로를 개척하려던 트럭트랙터의 판매는 저조했다. 회사의 위기였다. 시장에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신차 출시가 유일한 해법이었다. 당시 여전히 자동차는 서민들에게 사치품이었다. 이들에게는 주로 모터사이클이나 이륜차 옆에 장착하는 차인 사이드카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오스틴은 싸고 실용적이며 단단한 소형차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특히 미국도로를 점령하며 당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포드(Ford) 모델 T(Model T)에 대적할만한 걸작이 필요했다.[3] 그리고 1922년 기존 모델에 쓰이던 직렬 4기통에 최고출력 12마력짜리 엔진을 사용한 트웰브(Twelve)를 내놓았다.

트웰브와 같은 해인 1922년에는 그동안 오스틴이 창업자로서 꿈꾸어 왔던 "제대로 된 대중차"인 오스틴 세븐을 출시할 수 있었다. 세븐은 1차 세계대전이 갓 끝난 시기였던 그 당시의 영국에 잘 부합한 덕분에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1939년까지 총 29만 924대나 되는 수를 판매했으며, 일본닷선독일비엠더블유(BMW), 미국의 아메리칸 밴텀 등이 라이센스를 따 가기까지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를 비롯한 여러 군수용 운송수단들을 생산했고, 오스틴이 세상을 떠났던 1941년에는 누적 생산대수가 86만 5천대까지 이르렀다. 1947년에는 100만번째 오스틴 자동차가 생산되었으며, 1952년에 200만번째 차가 생산되었다. 또한 이때는 오스틴 A90 아틀란틱이나 오스틴 메트로폴리탄과 같은 차들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등, 나름대로의 수출 중심 업체로 번성하기도 했다.[4]

세븐의 폭발적인 인기로 영국 자동차 수출 물량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며 탄탄대로를 걷던 오스틴은 1952년 모리스의 모회사인 너필드(Nuffield)와 합병하면서 BMC(British Motor Corporation)로 재탄생했다. 합병 이후에도 오스틴의 엔진을 단 모델들이 속속 공개됐고 시장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이 무렵 영국은 석유 수입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집트수에즈운하 국유화 조치와 제2차 중동전쟁의 여파 탓에 기름값은 치솟았고 석유 수입이 제한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2차 세계대전 후 복구 등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자동차 시장은 소형화, 그리고 실용화가 대세가 됐다. 그러나 당시 이른바 버블카(Bubble car)로 불렸던 3륜 소형차들은 사람들의 다리 역할은 했지만 성능과 안전성 면에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당시 영국의 최대 자동차 회사였던 BMC의 회장 레너드 로드(Leonard Lord)는 결함이 많은 버블카의 인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세계 최고의 소형차를 개발하겠다는 결심을 굳혀갔다.

소형차 개발에 착수한 지 8개월 만에 실험용 차가 제작됐다. 이 차를 직접 몰게 된 레오나드 로드 회장은 큰 만족감을 보였고 1959년 8월 26일 미니는 세상에 공개됐다.[5] 이것 역시 제대로 된 대중차였던 세븐과 마찬가지로 영국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1965년에는 롱브릿지 공장이 약 37만 7천대의 차를 생산하면서 최대 연간 생산대수를 기록했고, 미니와 BMC ADO16을 비롯한 베스트셀러 소형차들이 성과를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BMC는 제정 부족으로 정부로부터 수 차레 지원을 받아야만 했으며 결국 1968년에 이르러 영국 정부의 제안으로 로버(Rover)와 트라이엄프(Triumph) 고급차상용차를 생산하던 레일랜드와 합병하면서 브리티시레일랜드(British Leyland)가 설립되었다. 이때도 오스틴 브랜드는 계속 살아있었지만 BL이라는 거대 기업이 겪어야만 했던 회사 임원들의 끊임없는 불화와 갈등, 파업이 유난히 심각했던 1970년대 영국에서도 더욱 두드러지는 수준의 파업사태, 끝없이 떨어지는 품질과 생산대수로 인해 엄청난 수난을 겪었고, 이때 출시된 오스틴 알레그로 등의 차들은 심각한 디자인과 품질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1974년 말에 회사 전체가 파산했으며, 라이더 리포트라는 제안에 따라 BL은 국유화되기에 이른다. 물론 국유화 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오스틴에게도 한 줄기 빛이 있었는데, 1980년에 출시된 슈퍼미니급 소형 해치백인 오스틴 메트로(Austin Metro)가 크게 히트하면서 한동안 오스틴과 BL의 돈줄이 되어 준 덕분이였다. 새 경영자인 마이클 에드워즈(Michael Edwards)의 경영 하에서, BL은 불필요한 살을 걷어낸 뒤 오스틴로버그룹(Austin Rover Group)으로 재정리되었고, 모리스(Morris)와 트라이엄프(Triumph), 재규어(Jaguar) 브랜드를 정리한 뒤 오스틴과 로버(Rover), MG(Morris‘ Garage), 랜드로버(Randrover), 그리고 레일랜드 브랜드로 차기 라인업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1983년에는 알레그로의 후속으로 오스틴 마에스트로 준중형 해치백이 생산되었고 잠시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지만 파업과 품질 문제에 또다시 휘말렸고, 이듬해에 출시된 중형 세단 오스틴 몬테고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1988년에는 마거릿 대처 내각의 민영화 정책에 따라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ritish Aerospace)로 매각되었다. 1986년에 로버 그룹(Rover Group)으로 개명한 것과 어울리도록 하고 제품을 고급화하고자 로버 브랜드와 혼다(Honda)와의 기술제휴 관계에 집중하기로 한 에어로스페이스의 정책에 따라 1987년에 오스틴 브랜드는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기존에 오스틴 브랜드로 생산했던 메트로와 마에스트로, 몬테고는 저가 라인업의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모델명으로만 죽 생산되었고 마에스트로와 몬테고는 1994년에 이름 그대로, 메트로는 로버 100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1997년에 최종 단종되었다. 이후 상표권은 로버 그룹의 본체를 인수한 SAIC가 소유하고 있었으나, 곧 모회사인 상하이자동차 산하로 넘어갔다.[4]

대표 차량[편집]

오스틴 세븐[편집]

오스틴 세븐(Austin seven)

오스틴 세븐(Seven)은 자동차 후진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영국에 자동차 대중화를 이끈 자동차이다. 영국의 일반인들은 꿈꿀 수도 없었던 사치품 자동차를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생활용품으로 바꿔놓은 차다. 값싸고 실용적이며 조그마한 세븐은 영국의 승용차 시대를 열었고 나아가 전 세계 자동차 산업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세븐은 1922년 세상에 공개되었다. 696㏄ 직렬 4기통의 세븐은 이듬해 747㏄로 업그레이드했다. 4기통 수냉식 엔진에 4륜 브레이크, 그리고 지붕유리가 있었다. 내구성도 튼튼했다. 값이 싸고 실용적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출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에서는 ‘100만인의 차’라는 호평을 내놓기도 했다. 세븐의 출시는 모터사이클이나 사이드카의 인기를 위협했고 결국 세븐의 등장으로 이들은 얼마못가 시장에서 점차 모습을 감췄다. 세븐은 특히 포드의 T모델처럼 구조가 단순해 정비가 쉬웠다. 이 덕분에 영국을 벗어나 타국에서도 쉽게 조립이 가능했다. 세븐은 프랑스에서는 로젠가르트(Rosengart)라는 이름으로, 독일에서는 비엠더블유(BMW) 딕시, 미국에서는 벤텀(Bantam), 일본에서는 닷선(Datsun)으로 팔리기 시작하며 이른바 대박을 쳤다.

세븐은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민수용차 생산이 중단된 1939년까지 총 29만여대가 팔리며 영국의 국민차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소형차로 등극했다. 이 기간 중 영국에서 수출된 자동차 물량의 절반 가량이 세븐이었다고 한다. 세븐은 오스틴을 갑부에 자리에 올려놓게 되는데, 세븐을 1대 생산할 때마다 전 세계에서 2파운드의 로열티가 들어왔다고 한다. 재밌는 사실은 세븐의 엔진 설계를 20세도 안된 젊은이가 맡았다는 점이다. 오스틴은 회사의 경영위기 파해법으로 세븐을 구상할 때 18세 청년 스탠리 에지(Stanley Edge)의 도움을 받았다. 오스틴은 자신의 시골집에서 이 청년과 당구대를 작업대 삼아 세븐을 개발했다고 한다. 또한 이 엔진의 마력은 7마력이 아닌 10마력에 달했으며, 세븐이라는 이름도 당시 엔진 출력으로 부과되던 자동차 세금제도에 따라 7파운드의 세금을 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세븐이 완벽한 자동차라고 하기에는 단점도 많았다. 앞·뒤 차축을 묶는 프레임이 없다보니 진동이 심했고 회전시에도 차가 쉽게 기우뚱거렸다. 또한 무거운 클러치 페달로 조작이 쉽지 않은데다 진동의 영향으로 브레이크 케이블이 늘어져 제동이 어려웠다. 아무튼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매력적인 요소를 갖춘 세븐은 전 세계적으로 모델 T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특히 경주에도 곧잘 출전했는데, 당시엔 많은 레이서들이 구조가 간단한 세븐을 쉽게 개조했다고 한다.[6]

오스틴 FX4[편집]

오스틴 FX4(Austin FX4)

오스틴 FX4(Austin FX4)는 1958년부터 40여 년간 영국 런던의 택시용으로 생산된 차량이다. 두꺼비와 유사한 외양에 검정색 페인트를 뒤집어써 블랙캡(black cab)이라 칭하는 런던 택시의 일종이다. 반세기 가까이 런던 택시의 대표 모델로 운영된 FX4는 1958년에 처음 출시되었다. 1948년에 나온 FX3의 후속 모델격인데, 외관은 FX3을 현대화했을 뿐 형태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뜻 전고가 높은 왜건의 형태이지만, 일반적인 왜건과 달리 승객용 뒷좌석뒷바퀴 부분까지 뒤로 많이 물러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개발은 오스틴모터컴퍼니와 딜러 겸 투자자인 만 & 오버튼(Mann & Overton), 차체 제작업체인 카보디즈(Carbodies)가 함께 했다. 기본 디자인은 오스틴의 에릭 베일리(Eric Bailey)가 했고, 차체 생산을 맡은 카보디즈의 제이크 도널드슨(Jake Donaldson)이 양산을 고려해 스타일을 다듬었다. 펜더차체의 일부가 되는 등 1950년대 영국 고급차의 분위기를 따르면서도 높은 보닛과 세로로 긴 그릴, 두 개의 원형 헤드램프, 펜더 형태를 단순화한 옆 부분 등 옛 차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 바탕이 되는 섀시는 FX3의 것을 이어받아 개선한 정도였고, 실내를 비롯해 여러 부품은 오스틴의 대형세단인 웨스트민스터의 것을 활용했으니 기술적으로도 앞선 부분은 없었다. 특수 시장에 한정적으로 판매되는 모델인 만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0년대 이후 생산 주체가 바뀌면서도 FX4는 1997년까지 계속 생산되었다. 다만 40여 년간의 생산량은 7만 5,000여 대로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런던에서 운행한 택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어서, 런던을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7]

오스틴 프린세스[편집]

오스틴 프린세스(Austin Princess)

오스틴 프린세스(Austin Princess)는 1947년에 출시된 대형 고급 자동차로 당시 오스틴을 대표하는 플래그십 모델이었다. 오스틴 프린세스는 전형적인 영국 대형 살룬의 전통을 따랐지만 고가의 벤틀리(Bentley)와 견주어 가격이 낮아 '서민을 위한 벤틀리'로 불렸다. 하지만 결코 검소한 차는 아니었다. 그 당시 프린세스의 가격은 약 2,000파운드로 중·대형차인 오스틴 식스틴보다 3배나 비쌌다. 비록 프린세스가 서민을 위한 벤틀리로 불렸지만 오스틴모터컴퍼니의 회장 레너드 로드는 벤틀리와 경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일화로 레너드 로드 회장은 스타일리스트 딕 버지(Dick Burzi)에게 벤틀리의 B윙과 같은 엠블럼을 주문한다. 그 결과 플라잉 A라는 오스틴의 엠블럼이 탄생되고 프린세스의 라디에이터 위에 심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1946년 롤스로이스(Rolls-Royce), 벤틀리와 같은 고급차차체를 코치빌드했던 반덴플라스 회사를 인수한다. 그리고 반덴플라스는 프린세스를 아름답고 우아하게 탄생시킨다. 오스틴은 1947년 프린세스1을 시작으로 1950년 프린세스2를 거쳐 1953년 프린세스3을 출시한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페이스리프트된 프린세스는 1956년까지 총 2,000대가 생산된다. 비록 프린세스가 일반 고객을 상대로 뛰어난 흥행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리무진 렌터카 회사나 공식적인 행사용으로 외교관이나 고위급 관료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초기 프린세스는 두 개의 다른 인테리어로 제공됐다. 하나는 운전석뒷좌석 사이를 슬라이딩 유리 칸막이로 나눈 리무진 타입과 다른 하나는 세단형 살룬 타입이다. 또한 1952년 오스틴모터컴버니는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거리를 늘린 프린세스 롱휠베이스 모델을 추가로 출시한다. 이때 영국 왕실에서 이 프린세스 롱휠베이스를 수차례 주문하면서 이 모델은 순식간에 명성을 얻는다. 이후 프린세스 롱휠베이스는 1968년까지 총 4,000대 이상 판매되면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프린세스 롱휠베이스 모델이 나오기 전에 프린세스에게도 흑역사가 있었다. 바로 1947년 엘리자베스(Elizabeth) 공주와 필립(Philip) 왕자의 결혼 선물 중 하나가 프린세스가 아니라 그 동생뻘인 오스틴 쉬어라인이었다. 오스틴모터컴퍼니는 프린세스 롱휠베이스 모델을 계속 생산하면서 1956년 프린세스3을 대체하는 프린세스4를 출시한다. 프린세스4는 코치빌더 반덴플라스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으로 탄생되었다. 그만큼 가격 또한 비쌌다. 당시 프린세스4의 가격은 약 3,500파운드로 프린세스 롱휠베이스 버전보다 무려 1,000파운드 높게 책정되었다. 이 가격 포지셔닝은 알비스(Alvis), 브리스틀(Bristol), 라곤다(Lagonda) 등 고급차 자동차 업체들과 경쟁하는 가장 치열한 위치였다. 또한 프린세스4는 외부적으로 제2차 중동전쟁을 맞이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슬프게도 이 모델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프린세스4는 1959년 단종될 때까지 겨우 200대도 채 안 되게 판매되었다.[8]

오스틴 앰배서더[편집]

오스틴 앰배서더(Austin Ambassador)

오스틴 앰배서더(Austin Ambassador)는 오스틴모터컴퍼니가 브리티시레일랜드 산하의 브랜드로 있을 때 생산했던 중형차이다. 앰배서더는 프린세스의 개선형 차량으로, 1982년에 출시되었다. 해치백이 없는 세단 형태로만 판매되었고, 도어 및 내부 구조가 계승되었으며, 측면부는 프린세스를 계승하여 완벽한 신차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앰배서더가 출시되기 4개월 전에 프린세스는 단종되었다. 앰배서더는 모리스 이탈과 로버 SD1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차량이었다. 좌핸들 사양이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양산되지 않았고, 판매 역시 영국 시장에서 우핸들 사양만 존재했던 탓에 수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생산은 영국 옥스포드 지역의 코울리 공장에서 이뤄졌다. 파워트레인의 경우 전작인 프린세스처럼 2.2L I6 엔진이 탑재되지 않은 것이 차이점이었으며, L, HL, HLS 사양에 1.7L 및 2.0L O-시리즈 I4 엔진이 탑재되었다. 2.2L 6기통 엔진이 사라진 이유는 보닛을 더 낮고 평평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효과를 보았지만 반대로 와이퍼를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단점이 생겼다. 이전의 2.2L 사양 대신 HLS 및 반덴 플라(Vanden Plas) 사양이 적용되었으며 이중 카뷰레터 방식의 2.0L I4 엔진이 탑재되었다. 1983년에는 2.0L HL 사양이 이중 카뷰레터 사양으로 향상되었으며, 이와 함께 4단 수동변속기와 B-W형 3단 자동변속기만 탑재되었는데, 다른 BL공사 차량들에는 5단 수동변속기가 달려 있었다.

헤드램프 등 일부 부품들은 모리스 이탈과 공유했으며, 실내 장식을 포함한 일부 부품들은 오스틴 알레그로와도 공유하였다. 실내는 프린세스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다할 만한 부분이 적었으며 최고급형인 HLS 사양에 타코미터가 없고 저렴한 가격에 비해 너무 볼품없는 장비들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전면 도어 가죽 정도만 프린세스와 공유했으며 섀시의 뒷부분은 통풍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으며 C필러에는 통풍을 위한 창문 정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량의 전장은 4,550mm, 전폭은 1,760mm, 전고는 1,400mm, 휠베이스는 2,670mm, 공차중량은 1,263kg이었다. 판매량은 상당히 저조했는데 전작인 프린세스의 형편없는 실내 장비들, 낮은 신뢰성, 지루한 이미지와 주행 특성, 낮은 성능과 딱딱한 핸들링이 단점으로 부각된 요소들을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1984년 3월까지 43,427대가 제조된 후 단종되었다. 현존하는 차량은 23대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후속 차종은 없었지만, 오스틴 몬테고 및 일부 로버 600 라인업들이 이 포지션을 담당하기도 했다.[9]

오스틴힐리 스프라이트[편집]

오스틴힐리 스프라이트(Austin-Healey Sprite)

오스틴힐리 스프라이트는 오스틴힐리(Austin-Healey)에서 판매하던 소형 로드스터이다. 오스틴힐리는 BMC의 오스틴 디비전과 도널드 힐리(Donald Healey)의 합작으로 1952년 설립한 영국의 스포츠카 메이커이다.[10] 두 회사의 합작 아래 스프라이트가 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유행했던 스포츠카들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영국 소형 스포츠카 중에서도 전설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부품들은 BMC의 다른 자동차와 호환이 되게 디자인되었고, 엔진 역시 BMC 가 만들어놓은 엔진을 그대로 사용하는 등, 모든 면에서 최대한 저렴하도록 제작된 차량이다. 스프라이트의 특징적인 전조등 디자인 역시 원래는 람보르기니(Lamborghini) 미우라(Miura)나 포르쉐(Porsche) 928와 비슷한 접이식 전조등을 달려다가, 기술적 문제 및 예산 문제로 인해 개구리눈 형상으로 고정된 것이다. 이 때문에 스프라이트는 영국에선 '개구리눈', 미국에선 '벌레눈' 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스프라이트는 투철한 절약정신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발 및 생산되었다. 그럼에도 스프라이트는 대량 생산된 스포츠카 최초로 유니바디 설계방식을 채택하여 가벼운 무게와 튼튼한 강도를 가졌다. 물론 유니바디 설계 때문에 자동차에 트렁크가 없었다는 엄청난 단점이 있긴 했다. 수납 공간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수납을 위해서는 앞좌석을 접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스프라이트는 영국 로드스터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스프라이트의 경쟁차인 재규어(Jaguar) D 타입, 콜벳(Corvette) 스팅레이 등의 스포츠카가 있었다. 이 둘은 스프라이트와는 다르게 매우 거대했을 뿐 아니라 가격마저 굉장히 비쌌다. 이들을 상대로 스프라이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가격이었다. 비슷한 때 등장했던 영국산 스포츠카인 MG MGA 트윈-캠도 가격으로 따지면 스프라이트의 두배 정도였다. 당시의 국민차포드(Ford) 앵글리아(Anglia)나 모리스 마이너를 구입할만한 돈으로 가격이 두 배나 혹은 세 배에 달하는 차량들의 재미를 선사했으니, 오스틴-힐리 스프라이트는 실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프라이트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바로 타고난 운전 성능에도 있다. BMC에서 그대로 차용한 엔진은 43 마력을 냈는데, 이는 대우자동차㈜티코(Tico)보다도 훨씬 못한 출력이다. 그럼에도 유니바디 디자인의 차체 덕분에 가벼웠던데다 엔진 자체도 매우 작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출력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무게도 가볍고 출력도 적당하니, 스프라이트는 손쉽게 작은 가격으로도 더 비싼 스포츠카에 걸맞는 재미를 잡아내는데 성공했고, 그 운전 성능을 꿰뚫어본 캐롤 쉘비는 스프라이트를 레이싱 운전교습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차량으로 쓰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스프라이트가 소형 스포츠카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 평가했다. 비록 스프라이트가 소형 로드스터의 유행을 꽃피운 주인공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국식 소형 스포츠카 중에서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던건 스프라이트가 유일했다. 다른 차량들은 그저 스포츠카의 유행에 편승할 뿐이었지만, 그 유행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여 누구든지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춰준 차량이 바로 스프라이트인 것이다.[11]

오스틴 미니[편집]

오스틴 미니(Austin mini)

클래식카 고유의 DNA를 가진 오스틴 미니(Austin Mini)는 가장 영국적이면서 유럽의 멋을 제대로 담은 차다. 영국 코미디 TV 프로그램 시리즈이자 주인공인 미스터 빈(Mr. Bean)[12]의 차로 유명한 미니는 아담하면서 앙증맞은 사이즈와 달리 영국을 넘어 전 세계를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었다. 미니는 등장부터 획기적인 기술력으로 인정받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한 성능을 뽐내고 있다. 한 세기를 넘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차’, ‘세기의 유럽차’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959년 8월 26일 미니는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미니는 오스틴 세븐(Austin seven)과 모리스 미니 마이너(Morris Mini Minor)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미니의 이름은 레오나드 로드 회장이 이시고니스에게 미니어처와 같은 작은 크기의 자동차를 개발해 달라고 해서 명명됐다고 한다. 1961년 미니는 최고시속 112㎞/h의 속도를 냈고 핸들링이 특히 좋았다. 미니를 몰아 본 많은 사람들은 특유의 스포티한 주행성능과 탁월한 공간 효율성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최신 기술에 높은 실용성을 보유하고도 가격이 저렴해 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차체 밖으로 드러난 접합부 때문에 초기 모델은 방수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미니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받게 된 데는 랠리에서 거둔 탁월한 성적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경주차 제작자인 존쿠퍼(John Cooper)가 기존의 미니를 튜닝해 997㏄ 배기량에 65마력, 최고시속 137㎞/h 로 끌어올렸다. 1963년에는 성능을 대폭 개선한 쿠퍼 S(Cooper S)도 생산됐다. 이러한 성능 개선으로 몬테카를로 랠리의 3회 우승 등 랠리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작지만 강한 이미지의 미니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클래식카로 입지를 굳혀갔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1969년 영화 ‘이탈리안 잡’에서, 영국 BBC의 코미디 ‘미스터 빈’과 2002년 ‘본 아이덴티티’에 모습을 드러내며 식지 않는 인기를 반영했다. 이후 미니는 영국의 로버(Rover)로, 다시 1990년대 말 비엠더블유(BMW)에 인수되면서 포드 모델 T와 함께 ‘20세기의 유럽차’로 선정되는 등 명성을 21세기에도 이어가고 있다. 2001년 뉴 미니가 출시돼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은 전 세계를 무대로 쿠페해치백, 컨버터블, 로드스터, SUV 등 다양한 모델들이 출시되고 있다.[13]

각주[편집]

  1. 오스틴 ( Austin )〉, 《두산백과》
  2. 오스틴 ( Austin )〉,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3. 3.0 3.1 안광호 기자, 〈38. 국민車로 등극한 영국의 영웅 ‘오스틴 세븐’〉, 《경향신문》, 2012-07-11
  4. 4.0 4.1 오스틴 모터 컴퍼니〉, 《나무위키》
  5. 안광호 기자, 〈26. 전 세계를 평정한 작지만 강한 車 ‘오스틴 미니’〉, 《경향신문》, 2012-04-06
  6. 오스틴 세븐 - 국민차로 등극한 영국의 영웅〉, 《자동차대백과》
  7. 류청희 칼럼니스트, 〈(레트로 vs. 오리지널) 15. LEVC TX vs. 오스틴 FX4 '런던의 명물 블랙캡'〉, 《오토헤럴드》, 2022-08-12
  8.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오스틴 최고의 대형 고급 자동차, 오스틴 프린세스-1〉, 《네이버 블로그》, 2019-02-26
  9. 오스틴 앰베서더〉, 《나무위키》
  10. 대니얼, 〈오스틴 힐리 3000 Mark II 딜럭스 로드스터〉, 《네이버 블로그》, 2016-07-20
  11. 부엉부엉이, 〈포르자의 자동차 5 - 오스틴-힐리 스프라이트 Mk. 1〉, 《네이버 블로그》, 2019-08-04
  12. 미스터 빈〉, 《위키백과》
  13. 오스틴 미니 - 작지만 강한 세기의 자동차〉, 《자동차대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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