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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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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해협

강화해협(江華海峽)은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海峽)이다. 남북 방향으로 길죽하게 생겨서 마치 "소금강" 같다고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강화해협은 강이 아니라 바다이기 때문에, 염하라는 말이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개요[편집]

  • 강화해협은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이다. 염하(鹽河)라고도 한다.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차가 커서 물살이 빠르다. 이 해협을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가 해협 위에 건설되여 있다.[1]
  • 강화해협은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 약 20㎞를 흐르는 물길인 강화해협은 전근대~근대기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물길 중 하나였다. '염하'라 불리는 이곳은 넓은 곳이 약 2㎞, 좁은 곳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손돌목으로 불리는 험난한 여울목이 있어 위험한 물길이었다. 그렇지만 지리적으로 한강하구와 가까워 경강(京江 : 서울 뚝섬에서 양화진 사이 한강 물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각광받았다. 염하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병인양요 당시 강화를 침공한 프랑스군이 강화해협을 그린 해도에 '소금 끼 많은 강(Rivière Salée)'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시초라 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그려진 해도를 일본이 입수한 후 프랑스어로 기재된 'Rivière Salée'를 염하(鹽河)로 직역하면서 굳어지게 됐다. 이에 대해 혹자는 염하가 최초로 땅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창지개명(創地改名)이라고도 한다.
  • 강화해협은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강화해협의 북쪽으로는 한강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예로부터 한국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2]

강화 갑곶돈[편집]

  • 강화 갑곶돈(江華 甲串墩)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84년 8월 1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6호 갑곶돈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강화 갑곶돈으로 변경되었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 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용두돈대[편집]

  • 용두돈대(龍頭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이다.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이다. 염하 건너편 덕포진 언덕 위에는 손돌풍 전설의 주인공 손돌의 묘가 있다.

광성진포대[편집]

  • 광성진포대(廣城津砲臺)는 경기도 강화해협(江華海峽)이 면한 광성보(廣城堡)에 설치되었던 포대.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에 큰 활약을 하였다. 1866년(고종 3) 9월 프랑스 함대는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에 항의하여 광성진 포대를 공격하였으나 조선군에 의하여 패퇴당하였으며, 1871년(고종 8) 4월에 미국 함대는 셔먼호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광성진에 침입해 왔다.

강화 덕진진[편집]

  •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은 조선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이다.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김포 덕포진[편집]

  • 강화의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통하여 수도 서울로 진입하려는 외세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조선시대의 군영이다. 1981년 9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소재하며, 지정면적은 4만 8794㎡이다. 설치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이미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廣城) ·덕진(德津) ·용두(龍頭)의 여러 돈대(墩臺)와 함께 이곳에도 돈대가 축성되었으며, 1866년(고종 3)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는 프랑스 함대와, 1871년 4월 신미양요(辛未洋擾) 때는 미국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1980년 포대 ·돈대 및 파수청(把守廳) 터의 발굴조사에서 1874년에 만든 포와 포탄,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 및 주춧돌과 화덕 등이 출토되었다. 파수청은 유구(遺構)로 보아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추정된다.

강화해협의 역사[편집]

  • 강화도와 김포 사이 좁은 바다를 강화해협(江華海峽)이라고 한다. 염하(鹽河)라고 흔히 부른다. 고려 때도 조선 때도 염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단초는 병인양요 시기이다. 프랑스군이 지역 주민에게 바다 이름을 물었다. 주민이 짠 물, 짠 강, 뭐 이런 식으로 대충 대답했던 모양이다. 프랑스군은 ‘짠 강’을 직역해서 'Rivière Salèe'라고 해도(海圖)에 기록했다. 'salèe'는 소금을 치다, 짜다, 그런 뜻이다. 'Rivière'는 강, 하천이라는 의미이다. 강화를 침공했던 프랑스군 중에 쥐베르라는 군인이 있다. 쥐베르는 강화해협 물이 아주 짭짤하다며 현지인들이 이름을 적절하게 잘 지었다고 했다. 프랑스군이 강화해협에 '짠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조선을, 강화도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는 의도였다는 분석도 있다.
  • 고려시대에도 강화해협을 강(江)으로 불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강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갑곶강(甲串江)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신문에도 '갑곶강'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인조는 강화해협을 장강(長江)이라고 했다. 병자호란기 강화 함락 때 강화에서 순절한 이시직도 유서에 '장강(長江)'이라고 썼다. 병인양요 후 일본군은 프랑스군이 제작한 강화 해도를 입수해서 자기네 글로 번역했다. 'Rivière Salèe'는 소금 염(鹽) 자를 써서 염하(鹽河)로 직역했다. 이렇게 해서 '염하'라는 명칭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연미정[편집]

  • 연미정(燕尾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시대의 누정이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강화해협〉, 《위키백과》
  2. 염하(鹽河)〉,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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