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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해시넷
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7일 (화) 11:55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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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위치
리스본
아마도라

포르투갈(Portugal)은 남유럽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 공화국(포르투갈어: República Portuguesa 헤푸블리카 포르투게자, 영어: Portuguese Republic)이며 수도는 리스본(Lisbon, Lisboa)이다.

1143년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 15~16세기에는 남미의 브라질 등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건설해 거대 제국이 되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침입과 1822년 브라질의 독립 이후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1910년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채택했다.

개요

포르투갈은 유럽 서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이베리아 반도의 서부와 북대서양 상의 군도들을 그 영토로 한다. 국토의 총 면적은 92,090 km²로, 동쪽과 북쪽은 스페인, 서쪽과 남쪽은 대서양을 맞댄 대륙부와 대서양 상의 두 자치지역인 아소르스 제도마데이라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이름은 제2의 도시 포르투의 라틴어 이름 "포르투스 칼레"(라틴어: Portus Cale)에서 유래하였다. 포르투갈은 온난한 항구라는 뜻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의 국경 안에 포함된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거주해 왔다. 갈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 같은 켈트인들은 후에 로마 공화정에 통합되었고, 이후 수에비족과 서고트족 같은 게르만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부터는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기독교도의 헤콩키스타 도중에 초기엔 갈리시아 왕국, 후엔 레온 왕국의 일부로 포르투칼레 백국(포르투갈어: Condado de Portucale 혹은 Condado Portucalense)이 성립된다. 1139년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과 1143년 독립 승인, 1249년 국경의 확립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국가로 거듭난다.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대항해 시대 탐험의 결과로, 포르투갈은 서양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포르투갈 제국은 사상 첫 세계 제국이었고, 1415년 세우타 정복[8]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 반환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식민지 제국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국제적 중요성은 19세기, 특히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왕가는 추방되어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권위주의 정권인 이스타두 노부가 형성되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종식되어 마지막 해외 주였던 모잠비크, 앙골라 등이 독립하게 된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비교적 HDI와 1인당 GDP가 낮지만 선진국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인간 개발 지수 역시 "매우 높음" 수준에 속한다. 삶의 질은 19위로, 세계적으로도 최상 수준의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가장 세계화되고 평화로운 나라에 속한다. 포르투갈은 국제 연합 (UN), 유로존, 솅겐 조약을 포함한 유럽 연합 (EU),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CPLP)의 창립 회원국이며,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국가 상징

국호

현행 정식 국호는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통해 최초로 사용된 '포르투갈 공화국(República Portuguesa [ʁɛˈpuβlikɐ puɾtuˈɣezɐ])'이다. 약식 국호인 '포르투갈(Portugal [puɾtuˈɣaɫ])'은 중세 포르투갈의 중심지였던 포르투의 라틴어 명칭인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래했다. 정식 국호상에서 쓰인 표현인 포르투게자(Portuguesa)는 형용사인 포르투게스(Português)의 여성형 표현이며,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의 형용사형인 포르투칼렌시스(Portucalensis)에서 유래한다.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서기 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하였고, 1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더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1067년 아들 가르시아 2세에게 영토를 주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이라고 명명하였다. 수에비족의 통치하에 있던 5세기에 이미 히다티우스(라틴어: Hydatius)는 수에비족의 왕 레키아르(라틴어: Rechiar)가 도피한 장소를 "포르투칼레"(라틴어: Portucale)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Rechiarius ad locum qui Portucale appellatur, profugus regi Theudorico captivus adducitur: quo in custodiam redacto, caeteris qui de priore certamine superfuerant, tradentibus se Suevis, aliquantis nihilominus interfectis, regnum destructum et finitum est Suevorum" ("포르투칼레라고 불리는 곳으로 도망간 레키아르는 포로가 되어 테오도릭에게로 끌려갔다. 감시 속에 붙잡혀 있었고, 비록 몇몇은 죽었지만 이전 전투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수에비족은 항복하였다. 이렇게 수에비 왕국은 파괴되어 종식되었다.")

오늘날 빌라노바드가이아인 "칼레"(라틴어: Cale)는 이미 고트족 시기에 "포르투칼레"(라틴어: Portucale)로 알려졌다. 841년 작성된 문서에서는 갑작스럽게 "포르투갈"(portugalense) 주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는 루고의 주교의 통치권을 확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Totius galleciae, seu Portugalensi Provintiae summun suscipiat Praesulatum." ("그가 갈리시아 주와 포르투갈 주의 모든 최고 행정부의 자리에 임할 것.")

캄펠루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의 기증서

하지만 "포르투갈"이 오늘날의 포르투에 정박해서 정착한 그리스에서 온 우두머리 고이델 글라스(아일랜드어: Goídel Glas, 라틴어: Gathelus, 포르투갈어: Catelo 카텔루)가 지은 "포르토가텔루"(Portogatelo)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장의 요소로써, 포르투갈의 이름은 초대왕인 아폰수 엔리케스가 1129년 캄펠루(포르투갈어: Campelo)에 위치한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포르투갈어: Igreja de São Bartolomeu de Campelo)에 보낸 기증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국어권에서는 포르투칼로 많이 불리고 있다. 앞의 'ㅌ' 이 유기음이라서 뒤의 'ㅋ' 도 덩달아 유기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르' 까지 '루' 로 바꿔 포루투갈로 부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 '투' 에서 어느 쪽에 강조를 하면서 부르느냐에 따라 이렇게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어 북부 방언을 제외한 어떤 언어에서도 포르투칼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다.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일반화되어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대학 교수가 수업 자료에 포르투칼이라고 써 놓는 경우도 있다. 포루투칼도 가끔 보인다. 또한 한자 음차로는 포도아(葡萄牙)라고도 한다.

국기

포르투갈 국기
포르투갈 국장

포르투갈의 국기는 2:3으로 분할된 초록과 빨강의 직사각형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고 분할선 중앙에는 포르투갈의 문장이 들어 있다. 문장 안쪽에 있는 파란색 도형은 본래 국왕이 쓰던 방패에 장식된 파란색 십자가였으나 십자가의 문양이 훼손되어 5개의 분할된 방패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후 방패 문양에 빨강 가장자리와 노란 성채를 더한 형태로 포르투갈 문장이 완성되었다. 1495년 왕정 시기부터는 문장 위에 왕관이 씌워졌고 1835년 마리아 2세 치하에서는 문장 바깥에 흰색과 파란색 배경을 사용했다. 1910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된 이후엔 왕관이 지워졌고 배경이 지금의 초록과 빨강으로 바뀌었으며 포르투갈 문양 바깥에 혼천의가 채워졌다. 초록은 희망을, 빨강은 1910년 10월 5일 혁명에서 흘린 피를 나타내고 혼천의는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이룩한 포르투갈의 위대한 역사를 의미한다.

국장

포르투갈의 국장은 1911년 6월 30일에 공식 제정되었다. 현재의 국장은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계기로 포르투갈에서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새로 제정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노란색 혼천의가 그려져 있으며 혼천의 안에는 빨간색 방패가 그려져 있다. 빨간색 방패 바깥쪽에는 7개의 노란색 작은 성이 그려져 있으며 방패 안쪽에는 하얀색 바탕에 5개의 파란색 작은 방패가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노란색 올리브 가지가 감싸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국기를 구성하는 색인 초록색과 빨간색 두 가지 색으로 구성된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혼천의는 대항해시대의 천체 관측 기구이자 항해 도구로 포르투갈 선인들의 측량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이룩한 포르투갈의 위대한 역사를 의미한다.

빨간색 방패 바깥쪽에 그려진 7개의 노란색 작은 성은 아폰수 3세 시대였던 1249년에 일어난 무어인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되찾은 7개의 성을 의미하며 방패 안쪽에 그려진 5개의 파란색 작은 방패는 1139년에 일어난 오리케 전투에서 아폰수 1세가 5명의 무어인의 왕들을 죽이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왕의 문장으로 사용했다는 설과 예수 그리스도의 5개의 성흔을 의미한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국가

포르투갈의 국가는 'A Portuguesa'이다. 앙골라-모잠비크 방면에 있던 포르투갈군을 철수하라는 영국의 최후통첩을 포르투갈이 받아들여 철수하게 되면서 반영 감정이 극도로 심할 때 작사 및 작곡된 국가로, 이후로도 왕정 시기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가 마누엘 2세 강제 퇴위 후 국가로 지정되었다. 라 마르세예즈만큼은 아니어도 "대포에 맞서 전진하라"는 호전적인 가사가 돋보인다.

지리

포르투갈의 지형도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아소르스 제도의 피쿠산
포르투갈의 배타적 경제수역

포르투갈의 대륙부는 유럽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오직 스페인 한 국가와 국경을 접한다. 대륙부의 국토는 가장 중요한 하천인 테주강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북쪽은 내륙으로 이 지역에서 농업이 발달한 사이사이 낀 고원을 가진 산악지역의 풍경을 보인다. 남쪽으로는 알가르브 지방까지 드문드문 산맥이 나타나는 평원이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다른 주요 하천으로는 테주강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발원하는 도루강, 미뉴강, 과디아나강 등이 있다. 이들 강 사이사이로 강줄기가 포르투갈 영토 내에서만 흐르는 강이 있다. 이러한 강으로는 보가강, 사두강 등이 있으며, 더불어 이러한 포르투갈 내에서만 흐르는 강 중 가장 긴 몬데구강은 포르투갈 대륙부에서 가장 높고, 포르투갈 내에서는 아소르스 제도피쿠 산 다음으로 높은 세하다이스트렐라 산맥(해발 1,993m)에서 발원한다.

아소르스 제도는 대서양중앙해령의 열곡에 위치하며, 1563년 상미겔섬 분화와 1957년의 파이알섬 서쪽 면적이 늘어난 카펠리뉴스 화산 등 몇몇 섬에서는 최근에도 화산활동을 보여줬다. 동조앙드카스트루 퇴(堆)(포르투갈어: Banco D. João de Castro)는 테르세이라섬상미겔섬 사이 해저 14m 깊이에 위치한 거대 해저화산이다. 1720년 분화를 시작하면서 섬 하나가 생성되어 수 년 동안 수면 위에 남아 있었으며, 새로운 섬이 머지 않은 미래에 솟아 오를 가능성이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곳인 피쿠섬의 피쿠산은 해발 2351m에 달하는 화산이다.

대서양 중앙해령의 열곡 지대에 위치한 아소르스 제도와 달리, 마데이라는 아프리카 판 안쪽에 위치하며 지각판 이동이 아닌 열점 활동으로 생성되었다. 이러한 안정적이고, 지각판 내부에 위치한 까닭에 포르투갈에서 지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다. 증거가 있는 마지막 화산 분출은 약 6000년 전 마데이라섬에서 일어났으며, 현재는 도로 터널 또는 본섬 내륙의 물 저장 갱도 굴착 과정에서 배출된 화산가스나 뜨거운 탄산수 같은 간접적 형태의 화산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마데이라에서 가장 높은 곳은 후이부 봉으로 해발 1862미터로, 이는 포르투갈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이다.

포르투갈은 본토 1230 km, 아소르스 667 km, 데제르타스 제도, 셀바젱스 제도, 포르투산투섬을 포함한 마데이라가 250km로, 긴 해안을 갖는다. 이러한 해안은 다양한 절벽과 모래사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을 형성하고 있다. 암석으로부터 생성된 본토의 해안과 달리, 포르투산투섬에는 조개껍질과 같은 유기물로 만들어진 9km에 달하는 사구가 있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포르투갈 해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아베이루 가까이 위치한 보가강 하구의 아베이루 히아(포르투갈어: ria de Aveiro)로, 길이 45 km, 최대 폭 11km에 달하며, 어류와 해양 조류가 풍부하다. 4개의 수로 사이에 여러 크고 작은 섬들이 있고, 4개의 강이 대서양으로 접어든다. 또한 사취가 형성되어 석호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포르투갈의 해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약 1,683,000 km²에 달하는 배타적 경제 수역을 갖는다.

기후

알가르브 지방의 전형적인 해안 중 하나인 도나아나 해변.

포르투갈은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며,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남쪽은 "Csa", 북쪽은 "Csb"로 분류된다.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갖는 나라 중 하나로, 포르투갈 본토의 연 평균 온도는 북부 내륙 산악지역이 13 °C, 남부 과디아나강 유역이 18 °C 정도의 다양성을 보인다. 북부 지방 고지대와 최북단 해안 지방, 중부 지방에서의 여름은 온화한 편이다. 가을과 겨울은 보통 바람이 많이 불며, 비가 많이 내리고 선선하다. 중부와 북부 지방의 주에서 가장 추우며, 이들 현 가운데 일부에서는 가장 추운 기간 중에는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 남부 지방의 도시에서는 온도가 0 °C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며, 대개의 경우 5 °C 정도에서 머문다.

보통 봄과 여름에 낀 달에는 날씨가 맑다. 온도는 건조한 7, 8 월에 가장 높은데, 심한 날의 경우 포르투갈 대부분 지역에서 간간히 최대온도가 40 °C를 넘으며, 알렌테주 지방 내륙에서는 이러한 일이 더욱 빈번히 발생한다. 여름에는 최근 기상 연구 보고서 기록의 도루강 계곡의 코아 계곡 선사유적 공원의 예와 같이 50 °C까지 올라갈 수 있다. 테주강과 도루강 유역과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연 평균 기온이 20 °C에 달할 수 있기도 하다.

최고 기온은 상조앙다베스케이라히오다드스에서 기록된 50.5 °C 다. 총 연평균 강수량은 북부 산악지방에서 3,000mm를 조금 넘고, 알렌테주 지방 남부 지역에서 600mm에 못 미치는 등의 편차를 보여준다. 일조 시간은 연 2500~3200 시간으로, 평균적으로 겨울엔 일일 4~6시간, 여름엔 일일 10~12시간 정도이며, 남동부 지역에서 최대, 북동부 지역에서 최소 값을 보인다.

눈은 북부 지방의 구아르다 현, 브라간사 현, 빌라헤알 현, 비제우 현 등 4개 현에서는 주기적으로 내리며, 남쪽으로 갈수록 빈도는 줄어들며, 알가르브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를 찾아 볼 수 없다. 겨울에 세하다이스트렐라 산맥, 세하두제레스 산맥, 세하드몬테지뉴 산맥 같은 제한된 곳에서 온도가 영하 10 °C까지 내려가고, 자주 눈이 내리며, 이들 장소에서는 10월부터 5월 사이에도 눈이 오기도 한다.

생물다양성

페네다-제레스 국립공원(Peneda-Gerês National Park)의 알베르가리아 숲.
알가르브 지방의 카멜레온.

기후와 지리적 다양성은 포르투갈의 식물상을 형성하였다. 포르투갈의 산림은 경제적인 이유로 소나무 (특히 "피나스터소나무" 및 "돌소나무" 종), 밤나무 ("유럽밤나무"), 코르크나무 ("Quercus suber"), 털가시나무 ("Quercus ilex"), 포르투갈오크 ("Quercus faginea"), 유칼립투스가 널리 퍼져있다.

포유류 동물군은 매우 다양해, 여우, 오소리, 이베리아스라소니, 이베리아늑대, 들염소 (Capra pyrenaica), 야생고양이 (Felis silvestris), 토끼, 족제비, 이집트몽구스, 사향고양이 및 더 많은 동물을 포함하고, 페네다-제레스 국립공원과 가까운 미뉴강에서는 회색곰이 가끔씩 나타난다. 포르투갈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는 철새들에게 중요한 경유지로, 상비센트 곶이나 세하드몬시크 산맥과 같은 곳에서는 가을에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봄에는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수천마리의 새를 감상할 수 있다. 포르투갈에는 약 60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며, 이들 중 235종은 텃새이며 거의 매년마다 새로운 종이 등록된다.

포르투갈에는 100여 종이 넘는 민물 어류가 서식하며, 테주국제자연공원의 거대한 유럽왕메기(Silurus glanis)에서 서부 지역의 작은 호수에서만 사는 작은 고유종까지 다양한 보습을 보여준다. 이들 중 몇몇 특정 희귀종은 서식지 감소, 오염, 가뭄 등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멸종 위협에 처해있다. 포르투갈의 해양은 세계에서도 풍부한 생물다양성을 보여주는 곳 중 하나다. 해양생물종은 정어리 (Sardina pilchardus), 가랑어, 대서양고등어를 포함해 수천 종에 이른다.

또한 특히 포르투갈의 서부 해안에서는 용승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바다의 영양과 생물다양성을 매우 풍부하게 해준다. 포르투갈의 보호 구역은 페네다-제레스 국립공원부터 이스트렐라 산맥 자연공원에 걸친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1곳,자연공원 (parque natural) 13곳 (가장 최근엔 2005년 지정), 자연보호구역 (reserva natural) 9곳, 천연기념물 (monumento natural) 5곳, 경관보전 지역 (paisagem protegida) 6곳이다. 2005년 이스포젠드 해안경관보전 지역(포르투갈어: Área de Paisagem Protegida do Litoral de Esposende)이 "해안선과 물리적, 미학적, 경관적 자연요소의 보존"을 위해 북부해안 자연공원(포르투갈어: Parque Natural do Litoral Norte)으로 승격되었다.

역사

원래는 포르투갈 백국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시작했다. 포르투갈 백국이라는 명칭에서 보다시피 국가원수의 작위가 고작 백작에 불과할 정도로 낮았으며 사실상 스페인에 얹혀서 월세방을 사는 것과 비슷한 신세였다. 국토 역시 지금의 포르투갈을 2등분해서 북쪽만 해당되었으며 현재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포르투갈 백국 시절 당시에는 되려 무어인의 영토였다. 그러던 포르투갈이 헤콩키스타를 거처 남쪽으로 점점 성장해 오늘날의 국토 모습을 갖췄다.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이후 전 세계를 누비면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로 점령하면서 포르투갈 제국으로 대표되는 식민제국의 서막을 열기도 했다. 당시 교황의 중재 아래 스페인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해서 전 세계를 양분할 정도의 해양 강대국이었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인도의 고아, 중국의 마카오 등이 포르투갈 식민지였다.

하지만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부작용도 많이 생겨났다. 주앙 6세 시절에는 페드루 왕세자가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을 차지하고 1822년에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의 이류 국가로 전락해서 강대국들 간의 패권 경쟁에서 소외되었다. 그나마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지역과 동티모르, 마카오 등 아시아 일부 지역의 식민지 해외 영토들만을 유지하면서 20세기까지 유지했지만 이 와중에 혁명과 군부 쿠데타, 36년간 집권한 독재자 살라자르와 카에타누 치하의 독재 정권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저지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현지 독립 운동 세력들의 무장 투쟁이 거세게 불타오르면서 수렁에 빠진다. 식민지 전쟁에 막대한 국가 재정과 병력들이 투입되면서 힘이 상당히 분산되었고 결국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민주화가 되었다. 새로 들어선 민주 정부가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고 철군하면서 1974년 기니비사우의 독립을 시작으로 1975년 모잠비크,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앙골라가 독립했다. 그리고 1999년 마지막으로 남은 해외 영토인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모두 반환되었다.

식민지 역시 이중 식민지를 했는데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 브라질의 식민지 우루과이라서 우루과이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의 식민지였으며 우루과이의 입장에서 본 포르투갈은 주인님의 주인님이었다. 물론 나중에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했다.

기원과 초창기

기원전 3천년에 지어진 Alcalar의 거석 기념물

포르투갈의 역사는 이베리아반도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선사시대에 이동해 온 켈트족 문화는 기원전 12세기에 이주해 온 페니키아 문화, 기원전 8세기에는 그리스 문화와 결합되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속주가 되어 '루시타니아(Lusitania)'로 명명된 포르투갈은 라틴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속어로서 포르투갈어가 발전했다. 또한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 등에서 로마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들어온 게르만계 서고트족은 포르투갈에 기독교 왕국을 건설했다. 711년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알안달루스(al-Andalus) 이슬람 왕국을 세우자 기독교인들은 북서부로 후퇴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설하고 명맥을 유지하였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후 기독교도들의 국토 회복운동(헤콩키스타)을 주도하였고, 포르투갈은 이러한 국토회복운동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백작이었던 비마라 페레스(Vimara Peres)는 자신의 군대로 현재 포르투갈 북부를 북과 남으로 구분하는 두로강(Duro) 이북 지역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수복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3세는 868년 페레스를 백작에 봉하고 이 지역을 영지로 하사하였다. 페레스가 이슬람인들을 몰아내고 세운 포르투(Portus)와 칼레(Cale) 두 도시의 이름을 따서 '포르투칼레(Portucale)'로 부르다가 '포르투갈리아(Portugália)'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포르투갈의 시초이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924년 레온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의 딸을 부르고뉴의 앙리와 혼인시키고 포르투갈 백작에 봉했다. 앙리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Afonso Henriques)는 테호강 북쪽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추종자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1143년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고 1179년 교황청의 확인을 받아 정식으로 포르투갈 왕국이 탄생하였다. 이후 아폰수 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종교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무어인들로부터 남부를 정복해 나갔다. 1249년 최남단의 알가르브(Algarve)를 정복해 오늘날 포르투갈 경계를 이루는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하면서 포르투갈의 국토 회복운동이 완료되었다. 남부의 실질적인 회복운동이 종교기사단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부에는 봉건적 귀족령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북부에는 일찍부터 자유농민에 의하여 집약적인 농업 경영이 이루어졌다.

항로 개척과 해외 진출

1498년 5월 20일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
바스코 다 가마

국가 통일을 완성한 포르투갈의 1차적 목표는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279년 왕위에 오른 데니스 1세(Denis I)는 포르투갈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대학을 설립하는 등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다. 또한 귀족과 교회의 특권을 점차 폐지하는 등 왕권 강화에도 기여했다.

포르투갈이 대내외적으로 튼튼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과 치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383년 페르디난도 1세(Ferdinando I)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카스티야 왕국은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해 병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의회를 열어 자체적으로 아비스(Aviz) 가문의 주앙을 왕으로 추대했다. 왕으로 추대된 주앙 1세(João I)는 영국과 윈저조약(Treaty of Windsor)을 체결하고 알류바로타(Aljubarrota)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을 대파하고 왕위를 지켜냈다.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주앙 1세리스본의 상인계급과 결탁하여 유럽 최초로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아비스 왕가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해상무역을 통해서 발전한 것처럼 해상무역을 발전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슬람의 오스만튀르크가 기독교 유럽의 지중해 무역을 막고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 경쟁에 뛰어들어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황금, 노예, 향료 무역을 보장해 줄 인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은 주앙 1세의 아들인 항해왕 엔히크(Henrique)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488년 포르투갈의 바르돌로뮤 디아스(Bartolemeu Dias)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잇따라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희망봉에 도착했다. 1492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디난도 5세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인도라고 믿었던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경쟁에서 뒤처진 것을 느낀 카스티야 왕국은 교황청을 사주해 1494년 포르투갈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브라질 동부지역을 경계로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의 아프리카 및 아시아는 포르투갈이 세력권을 가지도록 하는 일종의 신사협정이었다. 신사협정이 체결되면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무역 거점을 확보해 나갔다.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1498년 인도에 도착하였다. 1500년에는 브라질에 도착해 식민지로 삼고 1514년에는 중국과 일본에 도착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고 향신료 무역을 통해 왕가와 귀족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포르투갈은 해양왕국으로 성장했다.

포르투갈 제국(1415~1999)의 지도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사금과 노예의 획득, 향료를 비롯한 몇 가지 농산물의 수입에 주력하였으며, 수도 리스본은 각지로부터 유입된 부(富)의 집산지로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부는 왕실과 귀족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들의 낭비와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귀금속을 비롯한 부가 국외로 유출되어 국내 부르주아는 형성되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의 해외 진출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수반되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반종교 개혁의 중심으로서 가톨릭교회 세력이 강화되었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슬람, 인도, 고딕 양식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 마누엘 양식이 확립되는 등 포르투갈의 독자적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하였다. 〈우스루지아다스〉로 유명한 국민시인 카몽이스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1572년에 출판된 이 불후의 명작은 포르투갈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비견되는 웅장한 국민적 서사시이며, 그 주제는 바스코 다 가마의 항로 발견 등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것이다.

열강의 포르투갈 침공과 재건

제1대 폼발 후작은 주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계몽된 전제군주로서 포르투갈을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16세기 말에는 스페인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계기는 1578년 세바스티안왕(Sebastian)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한 것이었다. 이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스페인의 필리페 2세가 포르투갈을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어 1640년까지 포르투갈을 지배했으며 포르투갈이 강력한 해양왕국의 지위를 잃은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스페인에 통합된 포르투갈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왕이 존재하지 않고 외교권을 잃어 해상무역에서도 점점 네덜란드영국에 밀리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1640년 왕으로 추대된 브라간사 공작 8세는 프랑스 및 영국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그 결과 1668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왕정복고와 독립을 인정하는 리스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1595년부터 1664년까지 진행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제외한 식민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상업적 이익을 상실하였다. 17세기 후반 브라질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포르투갈 왕실의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절대왕권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축적된 국부의 대부분이 화려한 왕실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면서 경제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1755년 리스본 지진
1808년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출발

18세기 포르투갈은 폼발 후작(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의 시대였다. 그는 주제 1세(José I, 재위 1750~1777)의 신임을 얻어 1755년 총리가 되었다. 그는 경제, 군대,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한편 1755년은 수도 리스본에 대지진쓰나미가 발생해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대재앙을 맞은 해기도 하였다. 폼발은 파괴된 리스본을 1년 안에 재건해 냄으로써 리스본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리스본 재건에서 자신감을 얻고 주제 1세의 신임을 획득한 폼발이 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1758년에는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는데 폼발은 여기에 연루된 타보라 가문(Tavora)의 가족 대부분과 아베이로 공작(Duke of Aveiro) 등 의심받은 귀족들 대부분을 공개 처형하고 재산은 왕실에 귀속시켰다. 한편 암살 시도와 연루되었다고 의심받은 예수회 역시 국외로 추방되고 교회 등 모든 재산은 왕실에 귀속되었다. 이 사건을 해결한 폼발은 1770년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폼발은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귀족을 제거하면서 다른 귀족들의 저항을 잠재울 수 있었다.

포르투갈도 유럽을 휩쓴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차례로 격파한 나폴레옹은 1806년 대륙봉쇄령을 선포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패한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켜 경제적으로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포르투갈은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을 침공해 점령했다. 포르투갈 왕실은 즉각 브라질로 왕실을 이전하고 영국과 함께 항전을 계속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영국은 장군을 섭정으로 파견해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이에 왕가는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고 브라질에 남아 브라질-포르투갈 연합왕국을 선포하고 계속해서 브라질에 머물렀다. 영국의 섭정이 계속되자 포르투갈 국내에서는 1820년 영국의 섭정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주앙 6세는 포르투갈로 돌아왔으나 아들인 페드로를 브라질에 남겨두었다. 이후 브라질에서는 페드로를 왕으로 옹립해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1825년 브라질은 독립하고 주앙 6세는 상징적으로 브라질의 황제가 되었다.

포르투갈 공화국의 탄생과 독재 정권 출현

에스타두 노부(1932~1968) 시기 포르투갈을 통치한 안토니우 살라자르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해 갔다. 프랑스 혁명사상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도 근대화를 겨냥한 여러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 산업기반이 취약하여 중산층의 성장이 어려웠으므로, 중앙은행 설립 등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으며, 반대로 19세기에는 정치,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중에 1908년 국왕 카를로스 1세(Carlos-I) 부자가 암살되었고,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 혁명이 일어나 카를로스 1세를 승계한 마누엘 2세가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포르투갈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공화국 탄생 이후에도 쿠데타가 되풀이되어 15년 동안 45번이나 정부가 바뀌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참전함으로써 국력은 피폐해졌고 경제적 위기는 극도로 심해졌다. 전쟁 막바지인 1919년에는 북부 지역에서 왕정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르투갈은 승전국이 되었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 속에 있었다. 이를 틈타 1926년 민족주의 우파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코스타(Alfonso Costa) 독재 정권이 출현하였으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실각하였다. 새로운 정부에서 재무장관이 된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는 전세계적인 대공황 속에서도 극단적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포르투갈의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국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1932년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직에 올랐다.

총리가 된 살라자르는 '에스타도 노부(Estado Novo: 새로운 국가)'라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33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살라자르의 새로운 국가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조합국가를 모방한 것으로 강력한 공화제적 조합국가였다. 그는 자신의 국민연합당 이외의 정당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비밀경찰과 검열제도를 통해 감시하고 통제하는 등 36년 동안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포르투갈은 살라자르의 독재체제 속에서 경제성장을 꾸준히 이룩했다. 하지만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 등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막기 위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살라자르 통치 말기에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의 독재는 결국 1969년 신병으로 사임하면서 끝이 났다. 후계자가 된 가에타노(Marcelo Gaetano) 총리는 내부적으로 독재체제를 유지했고, '세계 최후의 식민지제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으면서도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탄압정책을 계속했다.

카네이션 혁명과 이후

마리우 소아레스는 1976년 포르투갈의 첫 민주적 총리로 선출되었다.

살라자르와 가에타노에 의해 40여 년 이상 계속된 독재 체제는 '카네이션 혁명(Revolução dos Cravos)'이라 부르는 1974년 4월 일어난 군부의 무혈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민주화를 목표로 좌파 소장파 장교들에 의해 발생한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고 1975년까지 모든 해외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군부는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독재 정권을 유지해 왔던 국민연합당은 해체되고 새로운 정당들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쿠데타 후 대통령에 취임한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은 좌파의 압력으로 1974년 9월 사임하고 프란시스코 다 코스타 고메스(Francisco da Costa Gomes)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5년 3월에는 스피놀라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더욱 좌경화되었고 최고군사혁명 평의회(Junta de Salvação Nacional)를 통해서 국가를 통치했다.

1976년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명문화한 신헌법이 채택되어 4월 포르투갈 국민들은 50년 만에 민주적 방법으로 제헌의회 선거를 치렀다. 선거에서 사회당이 득표율 34.9%로 107석을 획득, 제1당이 되어 입법의회(정수 263석)가 탄생했다. 7월에는 마리우 소아레스(Mário Soares)를 총리로 하는 사회당 단독내각이 발족함으로써 단원제 의회제 민주주의의 형태가 성립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토지개혁이나 산업의 국유화 등을 명문화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헌법이었다. 정부 구성 역시 사회당은 민주대중당(현재의 사회민주당) 및 군부와 협력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카네이션 혁명을 완수한 군부는 이들 정당보다도 훨씬 급진적이어서 공산당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를 우려한 사회당과 민주대중당이 이탈하여 연립정부를 붕괴시키면서 정국은 더 혼미해졌다. 게다가 군부 내의 우파 세력이 반격하는 등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심했다.

카네이션 혁명 이후 집권한 사회당 주도의 정부는 경제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1979년 보수파 연합의 민주동맹(AD)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보수파 정권은 국유화 정책의 완화, 농민이 접수한 농지의 일부 반환 등 자유경제 체제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1976년 헌법을 개정하였다. 1986년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도 가입해 EEC로부터 기금(구조기금과 결속기금)을 받아 경제발전을 가속화하고 기업들은 유럽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되면서 경제적 안정을 이룩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주도로 양당체제가 이룩되면서 정치적으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과 2002년에는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고 동티모르 역시 독립이 승인되어 식민지를 모두 잃고 순순한 유럽국가로 돌아갔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사회당이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무능을 보이는 틈을 타서 사회민주당이 지방과 중앙정부에서 정권을 획득했다. 사회민주당은 인민당과 함께 중도우파 정부를 구성해 정국의 안정을 이룩했다. 2004년에는 총리였던 바로수(José Manuel Barroso)가 유럽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사회민주당은 국내외적으로 포르투갈을 안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에는 성장에 집중해서 선진국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고 한 동안 국내 산업이 막장세를 달려 가던 브라질로부터 이민자가 들어오는 등의 호황을 누리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화 위기를 맞아 경제가 급속히 안 좋아지면서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처럼 심각한 혼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중에 있다. 이웃 스페인보다 체감 경기는 조금 낫고 실업률과 청년 실업률이 스페인보다 양호한 편이다. 다만 이건 노동 인구가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으로 빠져나간 영향도 크다. 2010년대 전반기에만 60만명이 빠져나갔고 출산율도 1명대 초반으로 떨어져서 사회 전체의 고령화도 가속화되어가는 중. 그래도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동티모르에서 노동 인구를 인도해 오는 것으로 어떻게든 막아 보고 있다. 2014년 이후부터는 원자재 가격 하락의 여파로 브라질과 앙골라의 경제가 급속히 침체되면서 이민 행렬은 잠시 줄어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이기는 하고 없던 일자리가 생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태가 좋아지기 위해서 많은 정책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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