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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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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스페인어: Paraguay, 과라니어: Paraguái, 영어: Paraguay)는 볼리비아와 더불어 남아메리카에 있는 내륙이며 공식 국명은 파라과이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del Paraguay, 과라니어: Têta Paraguái, 영어: Republic of Paraguay)이다. 파라과이 강이 지나며,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와, 동북쪽으로는 브라질과, 북서쪽으로는 볼리비아와 맞닿아있다. 남아메리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나라라서, 때로는 "아메리카의 심장"(Corazón de América)으로 불리기도 한다.

개요[편집]

파라과이 국기

지도[편집]

역사[편집]

식민지배 전후[편집]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파라과이는 숲이 우거졌고 비옥한 땅이었다. 그곳에서 半유목 생활을 하며 과라니어를 쓰는 부족들이 살았으며, 용맹한 전사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1525년 에스파냐 A.가르시아가 파라과이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로 1536년부터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1537년 8월 15일 아순시온에 에스파냐 탐험가 후안 데 살라사르 이 에스피노사가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18세기 남아메리카에 정착한 예수회의 선교지였으며, 에스파냐 식민지의 지방 중심지가 되었다. 동부 파라과이에 예수회 공회도소가 설치되어 150여년간 번성했으나 1767년에 에스파냐 왕가가 예수회를 추방했다. 파라과이는 1811년 5월 14일에 에스파냐 지역 정부를 전복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편집]

독립 후,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를 중심으로 독재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노력을 했다. 그의 아들인 C.A.로베스동안에도 외국자본을 들어오게 하여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삼국동맹전쟁[1]에서 5년간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1870년에 패배하여 나라가 파괴되고 인구가 크게 줄었다. 특히 파라과이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이 전쟁에서 전사하였으며 파라과이 남자인구의 90%에 달하는 인구가 이 전쟁을 목숨을 잃어 수많은 전쟁미망인이 양산되기도 했다. 파라과이는 과거 전체가 파라과이의 영토였던 이구아수 폭포의 상당 부분을 뺏기는 등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영토를 크게 잃었다. 그리고 친아르헨티나, 친브라질로 대립하다가, 1930년대 차코 전쟁[2]에서 파라과이는 볼리비아를 무찔렀다. 파라과이는 차코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되찾았으며, 평화의 대가로 영토를 더 얻었다.

역사가와 교육자, 정치가들은 파라과이 역사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나라의 역사적 사건, 특히 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서술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난다. 콜로라도당과 자유당은 파라과이 역사의 독특한 공식 서술을 유지했다. 1869년 아순시온 점령 당시 브라질 제국군은 파라과이 국립 문서기록소 자료를 찾아 히우 지 자네이루로 가져가서 비밀로 지켰으며, 그래서 파라과이의 식민 시대와 초기 역사를 연구하기는 힘들다.

스트로에스네르 정권과 민주화[편집]

1949년 콜로라도당의 페데리코 차베스(Federico Chaves)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5년 후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3]장군의 쿠데타로 물러나고 말았다. 새 대통령 스트로에스네르는 군사독재정치를 실시했으며, 반대자를 탄압하고 파라과이에서 쫓아내는 등 가혹한 통치를 하였다. 또한 부정선거를 통해 무려 7번이나 재당선되었다. 1980년대 후반 아들인 구스타보에게 세습을 시도하다가 이에 분노한 안드레스 로드리게스(Andrés Rodríguez)장군의 쿠데타로 추방당했다. 새 대통령 로드리게스는 민주화 정책을 실시했으나 스트로에스네르와 마찬가지로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1992년 대선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자신이 지지한 와스모시 몬띠(Wasmosy Monti)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로써 차베스 이후 39년 만에 민정을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와스모시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미지를 완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지만, 군의 방해와 경제 사정 악화 등으로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는 등 테러의 위험에 둘러쌓이게 된다. 1998년 라울 꾸바스(Raúl Cubas)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르가냐부통령의 암살과 오비에도장군의 권력남용 등에 대한 책임으로 7개월만에 파면당하고 말았다. 1999년 곤살레스 마끼(González Macchi)가 권한을 승계받았지만, 뇌물수수와 국가이미지 실추 등으로 지지율을 잃고 말았다. 2003년 새로 선출된 니까노르 두아르떼(Nicanor Duarte)는 부패추방으로 높은 지지율을 얻었으나, 경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지지율이 떨어지고 말았다. 2008년 페르난도 루고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61년 만에 좌파정권 복귀를 이루었고,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루고는 41%에 가까운 득표율로, 콜로라도당의 블랑카 오벨라르는 약 31%에 그쳤다. 무토지 농민 시위의 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루고 대통령이 탄핵되고 2012년에 페데리코 프랑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2013년 8월 15일 오라시오 카르테스가 당선되어, 5년 만에 콜로라도당 정권 교체를 따라 복귀하게 되었다.

지리[편집]

파라과이는 파라과이 강을 기준으로 동부 지역(공식적으로는 동부 파라과이Paraguay Oriental이며, 파라네냐paraneña라고도 한다)과 서부 지역(공식적으로는 서부 파라과이Paraguay Occidental이며 차코Chaco라고도 한다.)으로 나뉜다.

남동부 국경은 파라나 강이며, 브라질과 파라과이 사이에 이타이푸 발전소가 있다. 이 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수력 발전소로 파라과이에 필요한 모든 전력을 공급한다.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이타이푸 댐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 댐 전력에서 50%의 권리를 가진다. 파라과이는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의 15% 정도만 소비하기 때문에[1] 나머지 전력은 브라질에 판매한다. 파라냐 강의 다른 거대 수력 발전소로는 야시레타 댐이 있는데,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공유하고 있다.

지형은 동쪽에는 초지와 숲이 울창한 언덕으로 되어 있고, 서쪽은 저지의 습지 평야이다.

기후는 온대 기후로, 동부 지역은 강수량이 상당하나 서쪽 끝으로는 반-건조 기후를 보인다. 남동부는 열대 우림이 울창하고 토양이 비옥한 데다 강수량이 풍부하고(연 1,700mm), 농목축업이 발달하여 전체 인구의 96%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 반면, 북서부는 완전한 평원이지만 비가 불규칙하게 내릴 뿐만 아니라, 건조한 초원과 밀림으로 덮여 있고 투수성(透水性)이 강한 사력층(砂礫層)으로 이루어진 불모지대이다. 미국계 석유회사들은 이 지역의 석유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미국의 군용비행장 등 군사시설이 있다. 연평균기온은 24.5℃이다.

인구[편집]

파라과이인의 90% 이상이 황인종계인 과라니족등의 인디오과 스페인인 사이의 혼혈(메스티소)이다.

스페인어와 과라니어가 공용어이다. 원주민들은 모헤뇨어도 사용한다.

각주[편집]

  1. 삼국 동맹 전쟁〉, 《위키백과》
  2. 차코 전쟁〉, 《위키백과》
  3.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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