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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는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 주었고,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분가했다.
 
스페인,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는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 주었고,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분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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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리아 테레지아 여제.jpg|썸네일|300픽셀|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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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 개혁, 30년 전쟁, 제2차 빈 공방전과 대 튀르크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친 오스트리아는 4국 동맹 전쟁(171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37년) 등을 수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특히 대 튀르크 전쟁에서 맹활약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16세기에 쉴레이만 1세에게 빼앗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수복하여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였고 인구 수천만명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도 이 시기부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해서 1683년에는 110,000명, 1804년에는 230,000명이 될 정도였다.
  
이후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 개혁, 30년 전쟁, 제2차 빈 공방전과 대 튀르크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친 오스트리아는 4국 동맹 전쟁(171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37년) 등을 수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특히 대 튀르크 전쟁에서 맹활약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16세기에 쉴레이만 1세에게 빼앗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수복하여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였고 인구 수천만명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도 이 시기부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해서 1683년에는 110,000명, 1804년에는 230,000명이 될 정도였다.
 
[[파일:마리아 테레지아 여제.jpg|썸네일|300픽셀|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그러던 중 카를 6세가 1740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승자로 선언하고 사망하자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회를 노린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고 슐레지엔을 상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백년간의 적대 감정을 버리고 루이 15세의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포위 전선을 구축했다.
 
그러던 중 카를 6세가 1740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승자로 선언하고 사망하자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회를 노린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고 슐레지엔을 상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백년간의 적대 감정을 버리고 루이 15세의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포위 전선을 구축했다.
  

2023년 2월 24일 (금) 15:15 판

오스트리아
비엔나
린츠
잘츠부르크
그라츠

오스트리아(독일어: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 Austria)는 중앙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 공화국(독일어: Republik Österreich 레푸블리크 외스터라이히)이다. 수도는 최대 도시인 이다.

1156년 바벤베르크가문의 공국으로 건국된 후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1867년 형성된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을 이끌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왕가와 제국이 해체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1938년 독일에 합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1945년 연합국의 점령을 거쳐 1955년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가지고 독립주권을 회복하였다.

개요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남동쪽, 정확하게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로 중부유럽에 있는 국가이자 서유럽에도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는 국가다.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서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과 이웃하고 있다. 국토면적은 83,879㎢로, 국토가 알프스 산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숲의 국가이며 덕분에 낙농업과 겨울스포츠가 성하다. 인구는 2021년 기준 약 9,043,072명이다.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를 비롯한 우리가 아는 수많은 모든 고전음악가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음악의 나라이자, 현대 언어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현대물리학의 격전장이었던 비엔나 써클과 논술에도 출제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아르누보의 주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근대건축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 미술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한 갈래인 정신분석학의 거장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경제학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보디빌딩계 전설이라고 불리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고향이다. 또, 흔히 독일인으로 생각하는 나치의 최고지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의 고국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퍼스트레이디 프란치스카 도너 리도 오스트리아인이다. 2019년 기준 노벨상 수상자는 22명으로 세계 10위를 기록했으며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빈 대학교는 2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민족과 언어에서 독일과 동질적이어서 통일이 담론으로 떠오르거나 실제로 합치기도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다시 갈라졌고, 분리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6년 이전까지는 독일과 역사를 공유하며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이탈리아, 등 웬만한 유럽국가들의 역사에도 걸치고 있어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서양사에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19세기말 ~ 20세기 시작기에는 문명사적으로 가장 활기찬 곳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인해 제국에서 소국으로 몰락하면서부터 점차 암울해지기 시작하고, 1934년부터는 히틀러 동조 세력에 휘둘리다가 1938년 병합되어 나치 독일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패배하여 4개 승전국에 의해 분할점령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후 해방되어 베를린과 함께 냉전의 최전방이었다가, 유럽연합이 동구권으로 확대되면서 동유럽과 만나는 중유럽의 관문으로 경제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타 유럽 국가들을 떨게 만들고 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제국으로서의 옛 영광을 생각한다면 현대의 오스트리아는 상대적으로 세계의 중심권에서 벗어나 있기에 다소 초라해 보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철강과 기계공업 위주의 탄탄한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한 높은 국민소득과 충분한 복지예산을 갖춘 살기 좋은 최상위 선진국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EU에 가입한 것 외에는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으며 수도 빈의 유엔기구 도시(UNO City)에 국제 원자력 기구 (IAEA), 유엔 마약 범죄 사무소 (UNODC) 등이 본부를 두고 있어 국제회의와 분쟁조정의 무대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상징

국호

오스트리아에서는 자국을 독일어로 '동쪽의 국가'를 뜻하는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라 부른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오스트리아(Austria)는, 과거 명칭인 오스타리히(Ostarrîchi)를 당대 공용어인 라틴어로 옮겼을 때 아우스트리아로 표기되었고 이를 영어로 읽은 것이 넘어온 것이다. 한자로는 음차하여 오지리(墺地利)라 쓰는데, 이런 표현은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다. 북한은 1999년 경까지 공식적으로 문서나 신문과 방송 모두에서 '오지리'라고 불렀다. 다만 첫 글자 오(墺)자는 지금도 신문 기사 제목에서 사용한다.

동쪽의 국가라는 명칭은 976년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 제국(Kaiserreich)의 최동단 변경백으로써 행정구역이 설치된 것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원래 명칭을 해석하면 '국가 동부 변경백주' 라는 대단히 사무적인 뜻이 된다. 즉 원래는 '동쪽의 국가'가 아니라 '나라의 동쪽'이란 뜻이었다.

명칭이 비슷한 호주(오스트레일리아)는 오세아니아의 영어권 국가고 오스트리아는 유럽 중부의 독일어권 국가다. 이 두 나라는 로마자 표기 자체가 서로 유사해 영어권에서도 흔히 혼동된다. 두 나라 이름 모두 라틴어 기원인데, 사실 원래라면 각각 동쪽과 남쪽을 뜻하는 접두어가 붙어 혼동될 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외스터라이히를 라틴어로 동쪽을 뜻하는 오리엔스(oriens)라고 하지 않고 아우스트리아라고 표기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이는 고대 독일어의 동쪽을 나타내는 오스트(ost)와 라틴어의 남쪽을 나타내는 아우스테르(auster)가 같은 인도유럽어 어원을 공유하였기 때문에 게르만에서 오래 전부터 이 둘이 혼동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되었을 때 동쪽의 땅을 아우스트라시아라고 부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외스터라이히를 번역할 때 '동쪽'을 염두에 두고 오스트리아로 번역했지만, 결과적으론 '남쪽의 땅'을 의미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이름이 유사해졌다. 하필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미지의 남방대륙'이란 개념에서 따와서 라틴어의 남쪽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두 국가를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아서 오스트리아에 캥거루 없음(No kangaroos in Austria)이라고 쓰여진 것까지 나오고, 티셔츠나 머그컵 등으로 기념품도 나올 정도다.

두 국가의 주한 대사관이 모두 한 건물에 있다. 종로구 교보빌딩에 있는데 주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이 19층,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이 21층에 있다.

국기

오스트리아 국기
오스트리아 국장

오스트리아의 국기(國旗)는 위로부터 빨강·하양·빨강이 배치된 가로형 국기로써, 현재의 패턴은 프리드리히 2세 공작(公爵)이 1230년에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 배경은 1191년 레오폴트 5세 공작이 십자군 전쟁 당시 프톨레마이스 전투에서 적군의 피를 뒤집어서 갑옷 위에 걸친 흰 겉옷이 허리띠 부분을 제외하고 빨갛게 물들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한다. 유엔 건물이나 정부 기관에서는 국기 중앙에 검은색 독수리 문장이 삽입된 기를 사용한다. 가로세로 비율은 2:3이다.

1700년부터 1918년까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를 국기로 사용하였다. 위로부터 검정·노랑이 배치된 가로형 국기였는데, 해군은 이 기를 계양하지 않고 현재 국기의 패턴 가운데에 왕관을 씌운 문장을 삽입한 기를 고집하였다. 해군의 기는 1786년에 제정되었고, 1915년에는 헝가리의 문장이 추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현 국기 패턴이 국기로 다시 채용되었다. 1934년에 제정된 정부 깃발은 중앙에 삽입된 문장이 지금과는 달랐다. 1938년에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국기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국기가 부활하였다.

국장

오스트리아의 국장은 1919년에 처음 제정되었다. 현재의 국장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시대에 사용된 국장을 수정한 것으로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 수립된 1945년에 제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국장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발행하는 대내외적인 공문서에 사용된다.

금색 발톱과 부리를 가진 검은색 독수리의 머리 위에는 세 개의 성곽 모양을 한 금색 왕관이 씌워져 있다. 왼쪽 발톱에는 낫을, 오른쪽 발톱에는 망치를 잡고 있으며 발톱 양쪽에는 끊어진 쇠사슬이 묶고 있다. 독수리 문양 가운데에는 오스트리아의 국기 문양의 방패가 그려져 있다.

독수리는 오스트리아의 주권을, 왕관은 오스트리아의 중산층을 상징한다. 낫은 농업, 망치는 공업을 상징하며 끊어진 쇠사슬은 나치 독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국가

국가는 1946년에 지정된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e, Land am Strome)다.

지리

오스트리아는 국토의 3분의 2가 알프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악 국가이다. 전체 면적은 83,879㎢로 스위스의 두 배 정도의 크기이다. 국토 면적의 약 2%가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높은 산악 지형을 이루고, 헝가리와 접경 지역인 남동쪽은 평원과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서부의 린츠에서 동부의 을 경계로 도나우강이 흐르며, 강의 북쪽으로는 독일과 접한다. 빈 북동부에는 해발고도 200~400m 높이의 낮은 구릉지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은 도나우강의 지류인 인강(Inn), 무르강(Mur), 드라바강(Drava)이 만든 골짜기에 의해 각각 북알프스, 중앙알프스, 남알프스로 구분된다. 북알프스와 남알프스는 주로 석회암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알프스는 화강암·편마암·운모편암 등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알프스와 남알프스의 석회암 알프스는 험준한 데다 암벽이 노출되어 험한 산릉(山陵)을 이루고 있다. 약 2,700~2,900m 정도까지는 눈이 쌓여있으며, 그보다 높은 곳은 두꺼운 빙하를 이룬다. 해발 3500m 이상의 고봉이 35개가 있는데, 최고봉은 호에타우에른산맥의 높이 3,798m의 그로스글로크너산(Großglockner)이다. 알프스 산중에는 U자곡·현곡·빙퇴석·양배암 등 빙하가 만든 다양한 침식지형을 볼 수 있다.

기후 및 식생

오스트리아의 서쪽은 해양성기후로 서풍이 불어 온난하고 강수량이 동부에 비해 풍부하다. 반면 동쪽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북서풍 혹은 북풍이 강하게 불며, 적은 강수량을 보인다. 겨울에 사하라사막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으로 인해 푄 현상이 발생하여 급격한 날씨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며, 이로 인해 남부 알프스에 눈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겨울철 차갑고 건조한 대륙성기후는 해양성기후로 인해 내린 눈을 녹지 않도록 하여 스키 등 겨울스포츠 활동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한다. 여름은 따뜻한 편이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지에는 해발고도 1,000m 이하에서 너도밤나무와 같은 활엽수림을 볼 수 있다. 침엽수로는 가문비나무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해발고도 1,350m까지 소나무과의 수목이 자란다. 삼림한계는 설선 아래 약 750m 가량으로 7월 기온 10.6°선과 거의 일치한다.

역사

오스트리아 성립

오스트리아 지역은 과거에는 켈트족이 살던 땅으로 켈트족이 세운 노리쿰 왕국이 있었다. 노리쿰 왕국은 기원전 1세기 말에 고대 로마에게 점령되었으며 그 자리에 노리쿰 속주가 세워졌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게르만 바바리족(Bavarii)이 오스트리아에 정착했으며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훈족의 등장으로 로마는 오스트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동고트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이 차례대로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어서 아바르 칸국이 오스트리아 지역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 시기를 전후로 슬라브족이 유입되었다. 슬라브족은 아바르 칸국에 저항하여 사모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프랑크 왕국은 오스트리아 지역을 동방 유목민들과의 완충 지대로 삼아 변경주를 설치하고 바이에른 공국에게 관리를 받기 시작한다. 이후 독일 왕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서 오스트리아 지역은 주변에 등장한 헝가리 대공국을 상대하는 역할을 해왔다.

바벤베르크 가문의 통치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의 대관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때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는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마침내 하인리히 2세를 굴복시킨 오토 2세 황제는 976년 바이에른 공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이에른 공국의 남쪽과 동쪽을 각각 케른텐 공국,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으로 분리시켰다. 이 두 개의 국가는 현재의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지역이었다.

이 중 (Wien)을 둘러싸고 있는 '오스트리아 변경백국'(Markgrafschaft Österreich)에서 오스트리아라는 명칭이 나왔다. 당시 이 지역은 과거 고지대 독일어로 Ostarrîchi라고 불렸으며 여기서 현재 독일어로 오스트리아를 지칭하는 Österreich가 유래했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국기인 적백적 문양은 합스부르크 시대 이전에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의 문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이 만들어졌을 때 황제 오토 2세는 바벤베르크 가문(Die Babenberger)의 레오폴트 1세를 오스트리아 변경백으로 임명했고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바벤베르크 가문은 레오폴트 4세와 하인리히 2세의 시대인 1139년부터 1177년까지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을 겸임하기도 했다.

1156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Privilegium Minus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변경백국에서 공국(Herzogtum Österreich)으로 승격시켰다. 그동안 바이에른 공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과 동등한 공국이 되면서 바이에른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1180년 신성로마제국은 케른텐 공국의 동쪽 지역을 분리하여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형성했다. 1192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을 겸임하면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과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통합되었다.

1243년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베르크 가문은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끝을 맺게 되고 오스트리아 공국은 공작 직위가 비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작

오스트리아가 공위시대(Interregnum, 1243 ~ 1278)를 맞은 시기는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1254 ~ 1273)와 시기가 겹치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혼란과 함께 오스트리아도 혼란에 빠졌다. 이때 여러 유력 가문들이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시도했는데 바덴(1248~1251)의 체링겐 가문에 이어 중부 유럽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프르셰미슬 왕조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했다.(1251 ~ 1278)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위시대는 1273년 스위스 일대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 루돌프 4세가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선출되면서 종결되었다. 도나우강 유역으로 확장을 원했던 루돌프 1세는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를 전사시키고 그가 차지했던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차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91년 스위스가 반란을 일으켜 결국 1315년 떨어져 나가게 되고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가문의 본토로 여기게 되었다.

1335년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병합되었다.

1356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공포하며 그동안 관례적으로 이어오던 선제후를 7명으로 명문화하여 고정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7인의 선제후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공작 루돌프 4세는 장인인 황제 카를 4세에게 불만을 품고 1156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오스트리아를 변경백국에서 공국으로 승격시킬 때 내린 문서(Privilegium Minus)를 위조하여 Privilegium Mainus를 작성한 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 4세는 이것을 위조로 판정하여 루돌프 4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140년 바이에른 공국에서 독립했던 티롤 후백국이 상속 문제로 혼란을 겪자 루돌프 4세는 1363년 티롤 후백국의 백작 부인 마르가레테에게 접촉하여 티롤 후백국에 대한 상속권을 얻어냈다. 1364년 루돌프 4세는 크라인 변경백국을 크라인 공국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369년 마침내 티롤 후백국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병합되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는 잘츠부르크 주를 제외한 현재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모든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잘츠부르크는 교회에 소속된 영지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성립과 합스부르크 제국

1789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1438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알브레히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에 오르고 이어서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대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마침내 다시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100년전 선조 루돌프 4세가 위조한 Privilegium Mainus을 승인했다. 이것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은 1453년 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Österreich)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인구는 2,000,000명 정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이 되기 충분한 인구였다.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대공국이 되어 선제후국을 포함한 다른 공국들과는 격이 다른 특권적인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고 이미 인구 수만 명을 보유했던 빈도 인구 이 시기에 위상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 황제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감한 결혼 정책 덕분에 유럽 각지에서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아 일거에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샤를 공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부르고뉴 공국은 그의 유일한 자녀인 딸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상속되었다. 마리는 프랑스 왕국의 압박으로부터 부르고뉴 공국을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 본토와 저지대 지방을 아들 필리프가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왔다.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의 아들 필리프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가톨릭 공동왕(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국왕)의 계승자 후아나 왕녀와 결혼시켰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페인을 획득했다. 필리프의 맏아들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합스부르크 영지를 모두 지배하면서 카를 5세(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가 되어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제국의 수장으로 등극하였다.

자신과 아들의 결혼을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던 막시밀리안 1세는 노년에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의 안나 공주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1526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후사없이 전사하면서 이미 1521년에 형 카를 5세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받았던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으로 선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획득한 영토는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중부 유럽에서 광활한 크기를 자랑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토를 확보해 나간 오스트리아는 수천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다. 이들 동유럽 영토들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고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결혼 정책과 상속을 통해 이어받은 영토로 성립된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군연합 상태로 여러 지역이 한 군주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일 뿐, 내부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국가와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이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느슨한 연합 체제로 이어진 것은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이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페인,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는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 주었고,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분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이후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 개혁, 30년 전쟁, 제2차 빈 공방전과 대 튀르크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친 오스트리아는 4국 동맹 전쟁(171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37년) 등을 수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특히 대 튀르크 전쟁에서 맹활약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16세기에 쉴레이만 1세에게 빼앗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수복하여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였고 인구 수천만명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도 이 시기부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해서 1683년에는 110,000명, 1804년에는 230,000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카를 6세가 1740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승자로 선언하고 사망하자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회를 노린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고 슐레지엔을 상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백년간의 적대 감정을 버리고 루이 15세의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포위 전선을 구축했다.

이때 이 동맹국들의 지도자들이 여성들이라,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세 자매의 패티코트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패배로 끝날 만한 상황이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필사적이었던 기동 덕분에 시간을 6년이나 끄는데 성공했고 러시아에서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 출신의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여 전쟁을 중단했다. 때문에 전쟁에 지쳐 있던 다른 동맹국들도 철수해 버렸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어쩔 수 없이 슐레지엔을 포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30여년에 걸쳐 프로이센을 본딴 개혁을 시작하며 내정에 힘썼고 동유럽으로 진출하여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 서북부를 빼앗아 부코비나 공국으로 명명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을 손에 넣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181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

나폴레옹 전쟁 중이었던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칭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무색해지자 황제인 프란츠 2세는 기존의 동군 연합 상태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806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배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제1제국과 동맹국들에게 영토를 할양해야했다. 1809년에 오스트리아는 복수를 위해 다시 참전했다가 또 다시 영토를 빼앗겼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빈 회의에서 전쟁 중 손실한 월경지에 대한 대가로 이탈리아 북부와 달마티아를 차지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대주교가 다스려 온 잘츠부르크는 다른 주교령들처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이 1803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자 통치자인 콜로레도 대주교[9]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빈으로 도피했다. 오스트리아는 잘츠부르크를 선제후령으로 만들고 친척인 토스카나 대공국에게 하사했으나,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기 속에 오스트리아 제국(1805년), 바이에른 공국(1809년)을 거쳐 빈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빈 회의 이후 50여년 동안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통일 독일의 구축과 자국 내의 오스트로슬라브주의, 헝가리 독립 운동, 이탈리아 반도의 카르보나리 당과 같은 사상들을 모두 억누르며 1848년 혁명에도 제국 유지에 성공했다. 그러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프랑스 제2제국-사르데냐 왕국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에게 패배하면서 독일 내 영향력과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세력이 축소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방이던 가톨릭 국가 바이에른 왕국 또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독일 팽창은 저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전쟁에서 패배한 후 헝가리 왕국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헝가리 분리파에게 이중 제국을 제안한다. 양쪽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이중 제국을 세우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분리파 사이의 협상은 대타협이라 불린다. 이렇게 변화한 시기인 1867년 오스트리아 지역의 인구는 4,500,000명으로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에 보스니아를 합병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세르비아 왕국의 격렬한 반발을 가져왔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 세르비아의 후원자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국 독일 제국이 가담하고,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와 벨기에,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한 영국이 참여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

1919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없어지고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거쳐 1919년 10월 21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고 인구는 1919년 기준으로 6,800,000명에 불과했다. 위 지도의 붉은 선 안쪽이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로 통합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과 많은 영토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담과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던 프로이센이었다. 그래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과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모두 독일 민족(독일어권)의 공화국이 되어 버린 전간기에 독일-오스트리아 통일론이 강하게 부상했다.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의결되기도 했지만 독일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협상국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

그래서 나치 독일이 민족 통합의 기치를 내세우며 오스트리아 내에 나치당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안에서 이미 이탈리아의 후원을 받으며 권력을 구축한 파시즘 정권(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탄압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4년 돌푸스를 암살하였고, 뒤이어 집권한 쿠르트 슈슈니크는 나치당에 대한 제한을 풀었다. 이 기회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독일과의 합병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 3월, 결국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왔고,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독일-오스트리아의 합병(안슐루스)을 선언한다. 이런 행각은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관계를 냉각시켰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국경에 집결했으나, 결국 외교적인 협상 끝에 이탈리아의 양해를 얻고 무마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다시 참전해 패배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독일과 같이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이 분할 점령해서 군정 통치를 했다. 다시는 독일과 통일하지 않고, 영구 중립국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1955년 독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1955년에 6,900,000명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고 더 이상 많은 성장을 하지 않았다.

현대 오스트리아

유엔 빈 사무국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비슷하게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 4개국으로 분할 통치되어 연합국 점령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국력의 차이가 있으며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을 선포한 점 등을 고려하여, 연합국은 점차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화적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보수당과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으로 구성되어 소련과 스탈린의 지지를 받고 있던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권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나, 카를 레너 수상이 스탈린의 꼭두각시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처럼 아예 국가를 반으로 갈라 새로운 서구식 정부를 세우자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연합국 측에서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침공당해서 강제로 전쟁에 참여한 국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 5월 15일에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연합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획득해 내었고, 그해 연합국 군대가 모두 철수하고 난 10월 26일에 오스트리아 의회에서는 ‘영구 중립국’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 날은 아직도 오스트리아의 국가기념일로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를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워진 공화국과 구분하여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1920년과 1929년의 헌법에 기반하고 있으며, 1945년에 다시 한 번 개헌을 했다. 이 시기 이후로 오스트리아 정치는 2개의 정당이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고 있는데, 하나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고 나머지 하나가 오스트리아 국민당이다. 1945년 이래 단일 정권이 등장한 적은 1966-1970년의 국민당 정부, 1970-1983년의 사회민주당 정권, 이 2번 밖에 없었다. 나머지 시기의 경우에는 주로 대연정을 맺거나 다른 군소정당들과 연정을 맺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94년의 국민투표를 거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아 1995년 1월 1일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양대 정당인 오스트리아 국민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오스트리아의 군비 증강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현행 체계 유지를 원하는 반면, 중도우파 정당인 군비 증강을 통해 유럽의 군사 정책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원한다. 현재 오스트리아는 유럽 연합을 통하여 평화유지 임무를 하고 있으며, NATO에도 참여하고 있다. 2011년에 리히텐슈타인이 셍겐 조약에 가입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

경제

인문사회

문화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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