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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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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6일 (월) 14:07 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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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위치
헬싱키
에스포
탐페레
반타

핀란드(Finland, 핀란드어: Suomi)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발트해와 맞닿아 있는 북유럽의 국가이다. 정식명칭은 핀란드공화국(Republic of Finland, 핀란드어: Suomen tasavalta 수오멘 타사발타), 또는 수오미(Suomi:호수의 나라)라고 한다. 수도는 헬싱키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와 함께 흔히 말하는 북유럽 선진국 중 하나로, 북유럽의 노르딕 5개 국가 중 아이슬란드와 함께 공화국이다. 그러나 지리학적으로 스칸디나비아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1155년 스웨덴 십자군에 정복되어 스웨덴 일부로 병합되었고, 1809년 러시아의 자치령인 대공국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독립을 선언하였고 1918년에 공화제를 실시하여 처음으로 독립된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개요

핀란드는 북유럽에 있는 노르딕 국가 가운데 하나다. 발트해, 보트니아만, 핀란드만을 두고서 서쪽으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에스토니아,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노르웨이와 접하고 있다. 핀란드 수도인 헬싱키는 핀란드에서 가장 큰 도시다. 다른 핀란드 주요 도시로는 에스포, 탐페레, 오울루, 투르쿠, 이위배스퀼래, 라흐티, 쿠오피오 등이 있다.

핀란드 인구는 2022년 9월 기준으로 555만 9198명이며, 핀란드 중앙과 남부에 사는 인구 대부분이 핀란드어를 사용한다. 핀란드어는 북게르만어군과 관계 없는 우랄어족의 핀어군에 속한다. 핀란드는 유럽에서 8번째로 큰 국가이며, 유럽 연합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국가다. 핀란드는 의원내각제 국가이며, 310개 지방자치단체가 있으며, 이 가운데 올란드 제도는 자치행정구역이다. 핀란드 전체 인구 가운데 140만 명이 헬싱키 수도권에 살고 있으며, 이 지역은 핀란드 전체 GDP의 30% 이상을 생산한다. 핀란드 공식 언어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한 언어는 스웨덴어로 올란드 제도와 핀란드 중부 해안지역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다. 핀란드인 절대 다수는 핀란드 복음루터교회를 믿고 있다.

핀란드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9000년 경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5200년에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핀란드에 들어왔고, 전부문화가 농업과 함께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이어졌다.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때 핀란드는 발트 지역 및 페노스칸디아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이 시기에 핀란드에는 3개의 주요 문화권이 형성되었는데, 그 문화권은 남서핀란드 문화, 해메 문화, 카렐리야 문화이다. 13세기부터 핀란드는 북방 십자군과 스웨덴의 식민지로 스웨덴에 병합되었다.

1809년 핀란드는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1906년 핀란드는 유럽에서는 최초로 모든 성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세계에서 최초로 모든 성인들에게 공직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핀란드는 핀란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1918년 핀란드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과 독일 제국의 지지를 받는 백핀란드로 분열되어 내전을 겪었다. 핀란드 왕국이 일시적으로 수립되었지만, 1919년 핀란드 헌법이 도입됨에 따라 핀란드는 공화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핀란드는 소련과 겨울 전쟁 및 계속 전쟁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카렐리야, 살라, 쿠사모의 일부와 페차모주소련에 할양했다.

1950년대까지 핀란드는 농업 국가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전쟁 배상을 요구함에 따라 핀란드는 산업화를 시작했다. 핀란드는 노르딕 모델에 기초한 복지 국가를 만드는 한편,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고소득 국가가 되었다. 핀란드는 국가경쟁력을 평가하는 교육, 경제, 삶의 질, 인간 개발, 시민의 자유 등의 순위에서 상위권에 있다. 2015년 핀란드 세계 인적 자본 지수와 언론 자유 지수에서 1위를 달성했으며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취약국가지수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국가로 꼽혔다. 세계 성별차 보고서에서는 2위였으며, 2018년과 2019년에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1위를 달성했다.

핀란드는 1955년 유엔에 가입했으며 중립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1948년 핀란드-소련 조약을 통해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은 핀란드 국내 정치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핀란드는 1969년 경제협력개발기구, 1994년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 1995년 유럽 연합, 1997년 유럽-대서양 동반자 의회, 그리고 1999년 유로존에 가입했다.

국가 상징

국호

현재 국제적으로 쓰이는 '핀란드'란 이름은 스웨덴어 국명으로 최소 13세기부터 쓰였고 '핀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원래 '핀란드'라는 이름은 지금의 핀란드 영토 중 투르쿠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 해안을 가리키던 명칭으로 수세기 동안 핀란드를 지배한 스웨덴이 핀란드 영토 중 맨 처음으로 정복한 지역이었다. 이후 스웨덴이 동쪽과 북쪽으로 진출해 정복하면서 '핀란드'는 지금의 핀란드 일대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핀란드어로는 수오미(Suomi)라고 하는데, 핀이나 수오미나 본래 뜻과 어원이 명확하진 않다. 수오미는 슬라브어나 발트어로 '땅'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왔으며 사미(Sámi)인과 관련있다는 설도 있다. 사미어로 핀란드는 수오프마(Suopma)라고 한다. 민간어원에 따라서 '호수의 나라'를 뜻한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호수는 핀란드어로 '얘르비(järvi)'라고 부르며 이 단어도 핀란드 내에서 지역명 등에 매우 자주 쓰인다.

같은 핀-우그리아어파 계열 언어인 에스토니아어에선 소메(Soome), 카렐어에선 슈오미(Šuomi), 라트비아어에선 소미야(Somija), 리투아니아어에선 수오미야(Suomija)라고 하나 '핀랸디야(Финляндия, 러시아어)', '핀란(Finland, 노르웨이어)', '핀란트(Finnland, 독일어)', '핀란디아(Finlandia, 이탈리아어)', '팽랑드(Finlande, 프랑스어)', '핀니아(Finnia, 라틴어)'와 같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핀란드를 핀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부른다.

과거에는 한자로 분란(芬蘭)이라고 적기도 했으나 현재 한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국기

국기
핀란드 국장

핀란드의 국기는 Siniristilippu(청십자기)라고도 불리며, 20세기 초부터 사용하였다. 흰색 배경에 파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특징이다. 1918년 법률적으로 공식적인 핀란드의 국기로 인정되었다.

핀란드의 국기는 일반 국기와 국가 기구에 의해 사용되는 국기로 구분된다. 모든 핀란드 국민들은 필요에 따라 일반 국기를 게양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 정부 국기는 국가 조직체를 제외한 어떤 단체나 사람들의 경우 그 사용이 제한되어 있다. 이 깃발은 파란 십자 가운데에 국장(붉은 정사각형 바탕의 바닥에 타타르인의 굽은 칼이 놓여 있으며, 유럽의 칼을 들고 있는 금색 사자)이 추가되어 있다.

핀란드의 국기는 스칸디나비아 십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많은 핀란드 애국자들이 나라를 위한 특별한 국기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결국 19세기의 디자인을 다시 채택했다. 국기의 파란색은 핀란드의 수많은 호수와 하늘을, 흰색은 겨울의 눈에 덮인 하얀 토지를 의미한다. 이 색상 조합은 핀란드의 각종 정부 기관, 군사 기관, 마을에서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 왔다.

국장

1580년, 스웨덴 왕 요한 3세가 자신의 왕자시절 영지였던 핀란드를 대공국으로 격상시키면서 확립했다. 기원은 13세기의 스웨덴 국왕이었던 에리크 10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의 문장은 스웨덴 웁살라 대성당에 있는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석관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의미는 스웨덴의 상징물인 사자가 한 손에는 서쪽 스웨덴을 상징하는 직선 검을 휘두르고 있고 두 발은 동쪽 러시아를 상징하는 곡선 검 시미터를 밟고 서 있는 것이다. 다분히 스웨덴 기준이고 러시아 입장에선 좀 기분나쁠 수도 있겠으나, 핀란드가 오랫동안 스웨덴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1809년,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에 넘어간 뒤에도 러시아를 상징하는 쌍두독수리의 가운데에 작게 남았고 독립 후 국장으로 확정되었다. 군주제 분위기가 나는 국장이지만 공화국인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국가

핀란드의 국가 제목은 '우리의 땅(Maamme)'이다. 핀란드어에서 maa는 '땅, 나라' 등을 의미하고, -mme는 접미어로 '우리의'라는 의미를 가진다. 1848년에 스웨덴계 핀란드인 요한 루드비그 루네베리(Johan Ludvig Runeberg)가 작사했고, 독일계 핀란드인 프레드리크 파시우스(Fredrik Pacius)가 작곡했다. 원 가사는 스웨덴어로 쓰여 있었으며, 이후 파보 카얀데르(Paavo Cajander)가 핀란드어의 가사로 개사했다. 가사는 11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일반적으로 1절과 11절만 불리고 있다.

특기사항으로, 에스토니아 국가와 후렴구가 핀란드는 두 번, 에스토니아는 한 번인 것만 빼면 완전히 동일한 멜로디를 사용한다. 가사는 핀란드 쪽이 좀 더 빨리 제정되었다.

비공식 국가 취급받는 음악으로는 핀란디아가 있다.

지리

핀란드의 지형도
라플란드
핀란드 남동부의 풍경
북부 카렐리야의 삐에리넨호(Pielinen)

핀란드는 약 60°~70°N의 위도와 20°~32°E의 경도 사이에 놓여있으며 세계에서 최북단 국가 중 하나이다. 핀란드는 북쪽은 노르웨이,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은 보트니아만, 남쪽은 발트해, 남쪽은 핀란드만과 맞닿아 있다. 보스 만 건너편은 스웨덴, 핀란드 만 건너편은 에스토니아다. 동쪽에서 남쪽 걸쳐 러시아와 육로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반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발트해를 중심으로 페노스칸디아 순상지의 일부를 차지하는 핀란드는 오랫동안 기반암이 삭박(削剝)되어 낮고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기반암은 선(先)캄브리아대의 결정암과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기에는 전국토가 스칸디나비아 빙상(氷床)으로 뒤덮여 빙식(氷蝕)을 받았으며 빙상이 물러간 뒤에는 많은 퇴적물이 남아 있었다. 그 후 짧은 기간 동안 하천의 침식이 있었으나 심하지 않았으므로 퇴적물은 빙상이 물러날 당시의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빙상에 의한 퇴적지형에는 빙상의 이동방향을 나타내는 오스와 빙상후퇴(氷床後退)의 정체기를 나타내는 단퇴석렬(端堆石列)이 있다. 오스는 빙하기에 빙하 밑바닥에 흐르고 있던 강의 지반에 모래와 자갈이 조금 쌓여 있는 높은 지대이며 에스커(esker)라고도 한다.

오스는 북서쪽에서 남동방향의 것이 많고, 남부에는 '살파우셀케(Salpausselk)'라고 불리는 두 줄의 단퇴석렬이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으며 이곳에 도로나 취락이 생겨났다. 빙상의 후퇴와 육지의 상승에 의한 해안선의 변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현재는 빙상이 소실됨으로써 아이소스타시(isostasy:地殼平衡說)적인 융기가 계속되어 남해안에서는 연 4mm, 발트해의 깊은 곳에서는 연 12mm 정도 상승을 계속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남해안과 서해안에서는 새로운 해안평야가 생기고, 섬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 빙식으로 생긴 요지(凹地)는 물이 가득 채워져 호수가 되었으며, 호수의 면적은 국토 면적의 10%에 이른다. 국토의 최고봉은 북서쪽 국경 부근의 할티아툰투리산(1,324m)이며 200m가 넘는 지역은 북부와 동부 지역뿐이고 평균 높이는 150m이다. 이것은 유럽 전체의 평균높이 330m의 절반 이하이다.

핀란드는 호수와 섬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와 섬이 많다. 호수 187,888개와 섬 179,584개가 있다. 사이마호는 유럽에서 4번째로 크다. 핀란드에 있는 큰 호수는 다음과 같다.

  • 네시호
  • 빠이엔네호
  • 사이마호(Saima)
  • 오리호
  • 삐에리넨호
  • 오울루호
  • 로카호
  • 이나리호

핀란드 국토의 4분의 1 정도는 북극권에 있어 여름에는 백야 현상이 관찰된다. 핀란드 최북단에서는 여름에는 73일 동안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51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기후

핀란드의 날씨는 정말 괴팍하기로 유명하다.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받는 지역치고는 추운 편에 속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남부는 Dfb, 중북부는 Dfc로 연중 내내 강수가 있고 여름이 선선한 냉대기후에 해당된다. 본토 전지역이 죄다 냉대기후에 속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에스토니아와 핀란드가 유일하다. 일단 위치부터가 몹시 북쪽인 데다가 대륙에 있기 때문이다. 헬싱키의 2월 평균기온은 바다의 영향으로 -4.7℃을 띄어 비교적 따뜻하다. 한국과 비교하면 제천과 비슷하다. 하지만 남부 지방이라도 탐페레의 2월 평균기온은 -6.9℃로 상당히 춥다. 북쪽으로 갈수록 추위는 심해져 로바니에미의 1월 평균기온은 -11.8℃에 달한다. 핀란드에서 가장 춥다는 우치오키(Utsjoki)의 경우 1월 평균 기온은 -14.0°C. 12월~1월 한겨울철 고위도에서는 아침시간 기온이 -30℃ 정도인건 우스울 정도다. 참고로 핀란드의 역대 최저기온은 1999년에 기록된 -51.5°C 이다.

매서운 바람은 없지만, 냉기가 바닥부터 올라와 발바닥이 시려울 정도다. 거기에 지형도 비교적 평탄하고 대부분의 도시가 호숫가에 위치해있어 습도가 연일 80%대일 정도라 체감온도도 춥다.

단순 수치로만 보면 상당히 춥게 보이지만, 북위 60°~ 70°의 높은 위도를 감안하면 인접한 러시아에 비해 덜 추운 편이라 볼 수 있다. 캐나다, 러시아처럼 대륙성 기후가 아니라 연교차가 작아서 그런 것도 있기에 이들과 비교했을 때 연평균 기온은 영상 2도 정도로 겨울 기온에 비해 의외로 따뜻한 편이 아니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처럼 연교차가 동위도에 비해 작은 만큼 여름도 크게 덥지 않다.

핀란드는 북유럽 극지로서 겨울엔 극야로 인해 해가 뜨지 않는 나날이 이어진다. 특히 핀란드에서도 중남부 지역인 탐페레만 해도 12월엔 해가 10시에 떠서 2시에 진다. 로바니에미 근처로 가면 아예 해가 뜨지 않은 채 몇 달씩 지난다. 대신 여름에는 정반대로 백야로 인해 몇 달씩 해가 지지 않으며 남부지역 또한 새벽 2시 반에 떠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진다.

역사

선사 시대 ~ 중세 시대

중세 지도에 실린 핀란드, 카르타 마리나(1539년)의 일부다.
서기 814년 북유럽


빙하기 때 핀란드 땅을 뒤덮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석기시대인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첫 거주자들은 수렵채집인들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5300년 즈음부터 토기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랄어족의 일파인 핀-우그리아어파 사용자들이 동쪽으로부터 핀란드에 들어온 때는 석기시대 무렵이었을 터이다. 핀란드어와 북부의 소수민족인 사미족이 사용하는 사미어는 둘 다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

기원전 3200년 무렵 핀란드 남부에 전부(전투용 도끼) 문화, 혹은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신석기 시대 농경문화가 시작한 듯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북부와 동부 사람들은 주로 수렵과 어업으로 먹고 살았다.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500년)와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서기 1200년)에는 스칸디나비아와 루스 북부, 발트해 연안지방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3세기 이후로는 수장과 같은 귀족 집단이 있었음을 화려하게 장식된 무덤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에도 핀란드는 중앙권력사회로 발전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는 각 족장들이 난립하는 일종의 군장국가들이 존재했다. 바이킹들은 오늘날에 핀란드에 해당하는 지역에 우랄어족 핀인들을 정기적으로 공격하여 노예로 삼았고, 핀란드 동부에서는 카렐인들과 이조라인들이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교류와 충돌을 반복했다.

바이킹 시대 이후 핀란드 사회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는 가톨릭이 전래되고 스웨덴 왕국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12세기 중엽 스웨덴 국왕 에리크 9세십자군이 핀란드에 진입해옴으로써 가톨릭이 전파되었다고들 여겼는데,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11세기부터 전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3세기에 스웨덴이 핀란드 땅을 완전히 정복하여 19세기 초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스웨덴 국왕이 통치하였다.

역대 스웨덴 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 영토를 확장했다. 자세하진 않지만 스웨덴의 섭정 비르예르 백작이 1238년, 혹은 1249년에 십자군 원정으로 핀란드 지배의 터를 단단히 다졌다. 1249년 무렵에는 도미니코회가 핀란드에 들어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3세기 무렵에는 투르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는데, 주교 중 상당수는 스웨덴인 또는 개종한 핀인으로 채워졌다. 비슷한 시기 에스토니아인 대신 독일인만 주교로 임명되던 에스토니아에 비하면 핀란드의 상황이 비교적 나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핀인 지방 유력자들은 스웨덴 왕국에 봉건적 의무를 수행하였으나, 화전농업이 주가 되던 핀인들의 생활 양식 때문에 농노제는 확립되지 않았다. 스웨덴의 영향은 점점 강해져 스웨덴인은 핀란드 남서부와 북서쪽 해안가, 올란드 제도, 투르쿠와 올란드 제도 사이 여러 섬에 주로 정착하였다. 투르쿠는 스웨덴 왕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독일인 상인들과 장인들도 투르쿠에 거주하였다. 하지만 투르쿠 밖의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스웨덴어는 핀란드의 다른 지역에서도 높은 계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다. 지배 계층은 스웨덴인과 독일인 귀족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스웨덴계 핀란드인 하위 귀족들도 생겨났다.

한편 핀란드 동쪽의 카리알라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에게 지배를 받았다. 카렐인은 언어나 유전 그룹에서 핀란드인과 가까운 관계로,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국은 핀란드와 카리알라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1299년 스웨덴은 비보리 요새를 세워 핀란드 동부 국경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 분쟁은 1323년에 뇌테보리(Nöteborg)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일단락되었으나, 곧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가 '이단 집단'을 정벌하려 '십자군 원정'을 시도하였다.

뇌테보리 평화조약의 해석을 두고 보트니아 만(灣)의 북쪽 해안과 핀란드 동부 사보(Savo) 땅은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사이 최고 분쟁지역이 되었고 그 후로도 때때로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스웨덴 왕국은 1380년대에 내전에 휩싸였다. 결국 덴마크 왕국의 마르그레테 1세가 스웨덴 귀족들에게 지원받아 1389년 스웨덴 국왕 알브렉트를 몰아내었고, 마르그레테 1세의 후계자 포메른의 에리크가 1397년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왕으로 즉위할 적에 핀란드도 편입되었다.이후 130년간은 (스웨덴과 핀란드를 모두 다스리던) 스웨덴 귀족들과 덴마크 사이 마찰로 점철되었다. 핀란드도 이따금 이런 분쟁에 휘말렸지만 15세기는 대체로 안정되고 풍족한 시기였다. 인구는 증가하였으며 경제는 발전하였고 14세기 초 파리 대학에 핀란드 출신 학생들이 다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동쪽 국경의 사정이 달라졌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하여 통일된 러시아 국가의 기초를 다졌고, 곧 스웨덴과 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1495-97년에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는데 비보리 요새가 포위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16세기 ~ 18세기: 스웨덴 제국, 이성의 시대

1658년 로스킬레 조약 이후의 스웨덴 제국

1521년, 칼마르 연합은 결국 와해되었고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을 안정된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핀란드를 이에 포함시켰다. 그의 지배 아래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한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공이 컸다. 아그리콜라는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하여 1551년 출판하였다. 또 국가 행정도 크게 개혁되었다. 1550년에는 헬싱키가 건설되었다. 하지만 헬싱키는 건설 후 처음 2백년 동안은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1560년 구스타브 바사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세 명이 돌아가며 왕이 되었다. 에리크 14세는 영토 확장 정책을 펴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스웨덴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 후 160년간 리보니아를 두고 스웨덴과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다. 핀란드인들은 징집과 높은 세금으로 크게 고생하였다. 결국 1596년에 칼 9세의 사주를 받아 '곤봉 전쟁'이라 불리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는 시기스문드 지지 주지사였던 클라우스 플레밍에 의하여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6세기에는 농경지가 확대되었다. 스웨덴 왕실은 사보 지역의 농민들이 핀란드 중부를 개간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사미인은 밀려나고, 카렐인들은 수렵, 어업지대를 빼앗기기도 했다. 1580년대에는 핀란드인 농민과 카렐인 간에 게릴라식 유혈 충돌도 벌어졌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스웨덴의 군대를 유럽 최고 수준으로 훈련시키고 핀란드를 동방 전초 기지로 활용하였다. 리보니아 정복은 완수되었으며 당시 내분 상태이던 루스 차르국의 이조라(Ижора)가 스웨덴에게 넘어가면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가 육로로 연결되었다. 1630년에는 스웨덴군이 유럽 중부에서 한창 벌어지던 30년 전쟁에 개입했다. 이 때 핀인으로 이루어진 경기병대 '하카펠리타트'(Hakkapeliitat)는 용맹성과 잔혹성으로 악명을 떨쳤다.

현재 헬싱키 내에 있는 수오멘린나는 6개의 섬에 지어진 18세기 해상 요새로 구성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1648년 30년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스웨덴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전쟁 기간 중 핀란드에서는 몇가지 중대한 발전이 있었다. 1637년-1640년과 1648년-1654년에는 페르 브라헤 백작이 핀란드 총독으로 재임했다. 그는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여러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의 재임은 핀란드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정된다.1640년 브라헤 백작의 건의에 따라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 최초의 대학인 투르쿠에 오보 아카데미(Åbo Akademi)를 세웠다. 오보 아카데미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세운 대학이라는 말이 있다.1642년 드디어 성경 전체가 핀란드어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높은 세금과 계속되는 전쟁, 추워진 기후(소빙하기)로 인해 스웨덴 제국 시대는 핀란드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시기였다. 1655년에서 1660년까지 다시 전쟁이 일어나 핀란드인들은 리보니아, 폴란드, 덴마크의 전장에 보내졌다. 1676년, 칼 11세 치세에 스웨덴은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핀란드 중부와 동부에서는 타르가 대규모로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1697년-1699년에는 기후로 인한 기근으로 인해 핀란드 인구의 30%가 사망했다. 곧이어 스웨덴 왕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시작된 대북방전쟁에서 핀란드의 국토는 표트르 대제가 이끄는 루스 차르국의 대대적 침공으로 일대 타격을 입었다. 18세기 핀란드는 루스 차르국 군대가 점령했으며 비푸리를 비롯한 핀란드의 남동부 일대는 뉘스타드 조약을 통해 루스 차르국에 넘어갔다. 스웨덴은 강대국 지위를 상실하였고 제국을 선포한 러시아는 새로이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스웨덴 권력을 장악한 하타르 당은 러시아 제국이 안나 이바노브나의 사망과 이반 6세의 즉위로 혼란한 틈을 타 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를 지원하여 대북방전쟁의 실지를 되찾으려 했으나 옐리자베타가 너무 빨리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실패로 끝났고, 스웨덴의 속셈을 알아챈 옐리자베타는 1741년에 스웨덴을 침공하였다. 작은 분노(Pikkuviha)로 알려진 이 시기에 많은 핀란드인이 러시아로 끌려가거나 굶어 죽었다. 하타르당이 일으킨 이 전쟁은 1743년 오보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웨덴은 퀴메네 강 동쪽부터 사이마 호에 이르는 영토를 추가로 할양하였다. 이로서 스웨덴이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방어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구스타브 3세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1788년, 예카테리나 2세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상대로 대 러시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무승부에 그쳤으며 전쟁 초반에는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스웨덴과 핀란드의 분기점을 제공하고 말았다.

19세기: 러시아 제국령 핀란드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과 우호 관계를 맺게 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친영국, 반나폴레옹 국가였던 스웨덴으로 하여금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대륙봉쇄령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다. 나폴레옹을 혐오하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영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자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1808년 2월 21일 스웨덴을 침공하여 핀란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던 스웨덴은 러시아 제국군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1809년 9월 17일 체결된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토르니오강무오니오강 동쪽의 모든 스웨덴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었다. 1809년 3월 29일 포르보에서 핀란드 귀족들의 신분의회에서 알렉산드르는 스스로 핀란드 대공을 겸임하는 동군연합 형태의 핀란드 대공국을 창설하여 핀란드를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알렉산드르는 직접 다스리는 유라시아의 여러 소수민족 지역들보다 더 높은 자치권을 핀란드에 부여했으며 1772년에 제정된 구스타브 3세의 헌법을 비롯해 정치, 행정, 사법, 사회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지 않고 루터교의 지위가 인정되었으며 심지어 공식 언어도 스웨덴어가 유지되었다. 심지어 1812년에는 러시아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 핀란드(Ста́рая Финля́ндия)로 알려진 비보르크 현(Выборгская губерния)과 고글란트를 핀란드 대공국에게 되돌려주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이렇게 핀란드를 유화적으로 대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핀란드는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사회와 제도가 선진적이었고, 지나치게 무단정치를 시행하면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 여론이 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수도 투르쿠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핀란드의 수도를 스웨덴에 가까운 투르쿠에서 좀 더 동쪽에 있는 헬싱키로 옮겼고, 헬싱키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초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핀란드인의 여론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헬싱키의 랜드마크인 헬싱키 대성당이 바로 이 시기 러시아가 핀란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어준 것이다. 러시아의 국교인 정교회 성당도 아닌 루터교 교회인데도.

이렇게 식민지가 아닌 동군연합으로 통치를 시작했고 초기 핀란드 자치에 호의적이었던 알렉산드르 1세 시기까지만 해도 스웨덴 시절과 달리 핀란드에게 높은 자치권을 주었고 스웨덴 시절에 비해 불만이 크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틈을 타 아르세니 자크렙스키(Арсе́ний Андре́евич Закре́вский) 총독은 핀란드를 러시아와 동화시키는 것을 적극 추진했다. 많은 유럽 국가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타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러시아는 전제군주제를 고집했고 이것에 대한 핀란드인의 불만은 상당했다. 특히 1848년 혁명은 이러한 불만을 확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핀란드어 사용 움직임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1849년에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핀란드 민족주의의 대두를 불안하게 여기던 러시아 제국 정부와 친 스웨덴 성향의 스웨덴계 귀족들은 핀란드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핀란드의 여러 지식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후 북유럽에서 등장한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쇠퇴,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관용 정책과 근대화 정책을 계기로 핀란드 민족주의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아버지의 암살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반동 정책과 강력한 소수민족 러시아 동화 정책,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탄압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많은 핀란드인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직접 지배 정책은 알렉산드르 3세에 뒤이어 즉위한 니콜라이 2세 치세에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결국 핀란드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했다.

1892년 핀란드어는 드디어 스웨덴어와 비교할 만한 공식 지위를 얻게 되었고 곧 핀란드어가 정부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원 국회가 출범하여 보통 선거제로 뽑혔는데,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독립과 내전

1918년 헬싱키에서 일어난 핀란드 내전 말기에 백승 퍼레이드를 이끄는 총책임자로서 핀란드 군 지도자 겸 정치가인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본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핀란드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정타로 1917년 2월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었고 이는 동군연합이라는 핀란드 통치 구조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는 핀란드를 달래기 위해 1899년 이후 핀란드의 자치를 축소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를 모두 폐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1917년 6월 완전한 주권 달성을 당의 목표로 선언, 결국은 독립해서 1918년까지 잠시 독일의 보호국 핀란드 왕국이 수립되었고, 독일계 헤센카셀 가를 핀란드 왕가로 추대하는 입헌군주국을 계획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핀란드는 완전 독립을 이루었고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러시아가 내전을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 적위군과 백위군으로 갈라져 핀란드 내전이 벌어졌다. 여기에 소련과 독일 제국이 서로 지원하면서 전쟁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군대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적위군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병력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았고, 군대 체계가 잘 갖춰진 백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얻은 많은 피해로 적은 인원수가 파견되긴 했지만 독일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었다. 내전 기간 중에는 백위군이 저지른 학살로 전쟁이 일어났던 1월~5월 사이에 적위군과 혁명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이 5만 명 이상 사망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2%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반발했다. 이후 핀란드의 정치가 민주적으로 정착되자 다양한 정치집단이 나타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유럽에 퍼졌던 극단주의적인 정치 상황에서도 핀란드인들은 극우 정당에 준 지지율은 많아야 5~6%에 불과했다. 이때 백위군을 지휘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은 제2차 세계 대전 후반에 대통령 직위를 수행하기도 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

핀란드와 소련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특히 내전 이후 핀란드 내에는 반공 감정이 강했다. 하지만 소련은 핀란드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였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복원하려는 야심으로 이오시프 스탈린겨울전쟁을 일으켰다. 이미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중부유럽, 동유럽, 북유럽의 일부를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이후, 스탈린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에게도 영토 일부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는 이를 거절하였고 1939년 겨울전쟁이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소련은 발트 3국과 마찬가지로 핀란드도 간단히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으나 핀란드는 국가의 생존을 걸고 저항하였다.

소련군은 수가 적은 핀란드 국방군을 무시했다가 물량 공세로 겨우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이 합병한 핀란드의 영토에는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다. 독소전쟁이 개전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점령당한 땅을 회복했지만, 추축국이 패배할 듯하자 소련과 휴전하고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서 역으로 독일군을 몰아냈다. 일부 병사는 한때는 적이었던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 공방전까지 참여하기도 했고 소련 편에서 싸웠던 핀란드 공산군도 있었다. 반대로 핀란드가 소련과 협상하자 독일군 내에 있던 핀란드인들 대다수는 자국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며 독일군에 남아 베를린 결전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1944년 3월 말에 이루어진 모스크바 휴전 회담 때 소련은 6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배상금 이외의 조건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4월 12일에 핀란드 국회는 소련의 강화 조건을 모두 거부했다. 소련은 핀란드가 독일과 동맹 파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9월 15일까지 독일군 병력을 핀란드 영토 내에서 축출하는 조건으로 재강화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5개월 후 강화회담이 다시 열렸다. 소련은 이전과 같은 조건에 해군 기지 임차, 병력 감축 등의 요구 사항을 추가했지만 전쟁 배상금은 3억 달러로 줄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미국-소련 간 냉전이 일어나려는 상황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마셜 플랜을 거부했고, 소련에는 배상금 3억 달러를 5년 만에 모두 지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양도한 지역들.

전후 재건은 점차 이루어졌다. 전후 핀란드의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하여 구 소련과의 친선 관계 유지에 최선을 다했으나 오히려 서유럽과의 관계가 더 긴밀했고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핀란드를 서방과의 무역창구로 이용하려는 구 소련의 경제정책에 따라, 주요 무역국가는 소련이었는데, 소련과의 원만한 무역관계는 핀란드가 경제발전을 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중립적인 관계를 통해 서방측과의 교역도 계속하면서 소련으로부터 여러 가지 우방국의 혜택을 받아서 낮은 가격으로 원유나 지하 자원을 공급받아 1970년대 오일 쇼크가 벌어졌을 때도 핀란드는 다른 국가들보다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기도 해서 핀란드와 소련은 서로 많은 무역을 했다. 핀란드는 소련과 두 번째로 많은 무역을 했는데,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목재가 많이 수출되었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와 에스토니아 SSR의 위치는 핀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서구 세계의 문화가 동구권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냉전 기간에는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마셜 플랜을 포기했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 등을 하지 않는 대신 T-72 전차와 MiG-21 전투기 같은 소련 무기로 군대를 무장했다.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수 있는 주장, 학설 등은 자체적으로 자제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거나 유화적으로 지내면서도 공산화하지는 않는 것을 '핀란드화'(독 Finnlandisierung, 영 Finlandization)라고 칭하기도 했다.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은 1956년부터 1982년까지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이었다.

냉전 시기에는 서유럽 자유진영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국의 지위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난민들이 핀란드로 유입되기도 했고, 소련 쪽에서 망명한 이들도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핀란드에 정착하곤 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이란 등의 정치 망명객들이 선호하는 곳이기도 했다.

1990년대 전반에 공산권이 붕괴하고 소련이 해체하자 소련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던 핀란드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워졌고, 소련에서 독립한 핀란드 옆 에스토니아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좋지 않은 상황에도 1990년대 말부터 핀란드는 다시 회복을 시작했다. 1995년 1월 1일 핀란드는 스웨덴,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아직도 러시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고, 워낙 두 국가가 생활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러시아인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켜 러시아와는 마냥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상 러시아와 여전히 교류를 하고 있기는 하다. 냉전이 끝난 현재는 유럽연합 가입국으로 레오파르트2와 F/A-18이 주전력이 되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핀란드에서도 스웨덴과 함께 NATO에 가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고, 러시아의 공갈협박에도 불구하고 5월 12일 NATO가입을 공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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