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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하여 1952년 4월 28일에 주권이 회복되었고, 이 때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일본의 외교는 대미의존과 경제 중심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일안전보장조약은 일본은 미국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평화 헌법으로 인한 안보의 공백을 미일 동맹이 보완해온 것이 전후의 역사이며, 군사비 지출을 줄이면서 경제 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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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55년에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자유주의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공업국가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가입으로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UN 중심주의,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는 대국민적인 안보투쟁에도 불구하고 1960년의 미일안보조약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수교하였다. 1971년 중국의 UN 가입을 계기로 국제정치는 다극화 시대로 이행하였고, 1972년의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아시아에는 새로운 외교정세가 진전되었다. 일본은 역시 같은 해 9월에 총리의 중국방문으로 중일간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1974년에는 일본·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정기항공로가 개설되고, 1978년 10월에는 중공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1980년 5월에 총리 화궈펑(華國鋒)이 방일(訪日)하는 등 양국관계의 급속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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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1990년대 초 걸프전쟁을 계기로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국제분쟁 해결에 참여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정에 공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급속히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1992년 6월 UN평화유지활동(PKO)법을 제정하여 패전 후 처음으로 자위대 해외파병의 길을 터놓았다. 이 법안에 입각하여 캄보디아, 모잠비크, 자이레 등에 자위대가 파견되었다. 또한 2001년 10월에는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마련하여 미군에 대한 후방지원 형태로 자위대를 인도양에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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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G8, G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 가맹국이며, 서방7개국 정상회담 G7에 참여하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이다. 현재 전 세계 195개국에 일본대사관이 있으며, 157개국이 일본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41개 국제기구가 일본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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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취임한 아베 내각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추구하는 한편, 외교안보정책의 포괄적 기본 지침인 국가안보전략의 채택과 그 제도적 기반으로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발족시켰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과 국내정치 변동이라는 국내외적 상황 속에서 미일동맹을 재편하고, 국내적으로는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하며, 중국의 부상에 대해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며,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지구적 차원의 협력을 추구하는 다차원적인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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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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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고대부터 각종 문화의 전파와 무역을 비롯한 많은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백제는 고대 일본에 중국 문물을 많이 전파하였다. 고려 시대 후반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서는 쓰시마섬과 규슈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倭寇)가 각종 약탈을 일삼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 시대 중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중세와 근세기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 파견으로 다시 한일 교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 등장한 일본 제국이 1910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병합한 뒤 1945년까지 35년 동안 폭악한 식민 통치를 행하고 현대에도 일본의 여러 우익 인사들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도발을 주창하면서 양국의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본에서도 반한감정을 가진 일부 일본인들이 반한시위를 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일본에 의해 제기되는 '''독도 분쟁'''과 [[동해]]의 이름에 대한 분쟁 등의 이슈를 안고 있다. 2009년에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한 이후 이루어진 양국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다수가 더 악화된 한일 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 응답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위안부에 대한 역사왜곡으로 일본정부는 유엔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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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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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패전 이후 연합군 점령 아래에 놓였고,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주도하의 전후 개혁 속에서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일본국헌법의 9조에는 전쟁을 포기하고, 교전권을 부인하며, 군사력을 보유하거나 유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에 일본의 전후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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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8일 맥아더 서한에 따라 7만 5천 명의 경찰예비대가 만들어졌다. 이는 한국 전선으로 주일미국이 급파된 데 따른 일본의 안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이 조직은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보안대'로 변경하였고, '자위대'로 다시 변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의 모든 운용비용은 방위성에서 나온다. 자위대는 "일본의 평화와 독립을 지키고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위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며, 필요에 따라 공공질서 유지에 임한다."고 되어 있다. 방위성(防衛省, Ministry of Defense)은 일본의 행정기관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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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강화조약 조인과 동시에 체결한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제1조에는 "일본은 미군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여(허락)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인한 안보 공백을 미일동맹으로 보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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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일본의 국방비는 486억달러로, 미국 6,846억달러, 중국 1,811억달러, 사우디아라비아 784억달러, 인구 605억달러, 영구 548억달러, 프랑스 523억달러에 이어 세계 7위 수준으로, 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0.94%의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은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에 따라 GDP의 1%범위에서 방위비를 억제해 왔으나, 최근 일본자유민주당 내에서 헌법개정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력 대폭 강화'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비 증액 또한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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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0일 (금) 16:02 판

일본(日本, Japan)

일본(日本, Japan)은 동아시아 끝에 있는 섬나라이다. 수도는 도쿄(東京, Tokyo)이다. 태평양에 있는 일본 열도의 네 개의 큰 섬(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과 이들 주변에 산재한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의 전체 면적은 37만 7973 km²이며, 한반도의 약 1.7배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국가가 되었고, 태평양전쟁 후 1947년 현재의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

개요

일본국(일본어: 日本国 니혼코쿠, にっぽんこく 닛폰코쿠), 약칭 일본(日本, 일본어: 日本 니혼, にっぽん 닛폰)은 동아시아의 일본 열도와 오세아니아의 북부 일대에 위치한 국가이다. 국호인 일본국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성립되었다.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인 일본은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의 섬이 일본 전체 면적의 97%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섬들이 화산 활동을 통해 생겨났다.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600만 명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많다. 도쿄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간토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메트로폴리탄이며, 이 지역에만 4,350만 명(일본 전체 인구의 34.5%)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제정·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법적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하는 천황과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참의원(상원)·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가 공존하고 있다. 현재의 천황은 나루히토, 국회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당이며 내각총리대신은 기시다 후미오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강대국이다. 일본 엔은 세계 무역결제통화 비중의 15~20%를 차지하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아 많은 사람들이 자산 피난처로써 선택하기도 하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이다. 이 때문에 엔화는 미국 달러, 유로와 함께 세계 3대 통화로 꼽힌다. 일본의 GDP는 미국과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이며, PPP는 세계 4위, 금 보유고 세계 8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3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1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은 세계 2위이다. 비서양권 국가 중 유일한 G7 회원국이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주도국, 아시아개발은행(ADB) 설립국이며, 유네스코 예산 분담률 1위, UN 분담률 3위로서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이다.

상징

국호

일본의 국호는 일본어 명칭으로 닛폰(일본어: にっぽん) 또는 니혼(일본어: にほん)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한자를 읽는 방식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한자로는 동일하게 일본(日本)이라 표기한다. 보통 닛폰이 공식적인 표기로 많이 쓰이며 주로 엔화와 우표, 그 외에 많은 공공 기관의 명칭이나 체육 행사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니혼은 현대에 이르러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자신을 니혼진(日本人, にほんじん)이라고 호칭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일본어는 니혼고(日本語, にほんご)라고 부른다.

닛폰과 니혼 양쪽 모두 '태양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명칭은 중국 수나라 시대 이후부터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니혼과 닛폰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까지 일본은 주변국으로부터 멸시적인 의미에서 왜(倭) 또는 왜국(倭國, 왜나라)이라 불려왔고 히미코 여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동해희씨국'(東海姬氏國), '동해여국'(東海女國), '여자국'(女子國)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으며 '부상'(扶桑, 일본어: 扶桑 후소)이라고도 하였다. 주로 서양권에서 부르는 명칭인 '저팬', '재팬'(영어: Japan)은 중국 원나라 시대에 동아시아를 순례했던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고대 중국어의 한 갈래인 우어(吳語, 오어)로 일본을 뜻하는 단어인 '지팡구'(Gipangu)라는 단어로 일본을 소개하였고 이것이 수세기 동안 여러 변형을 거친 데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자퐁(Japon)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JP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국(日本国)을 공식 명칭으로 쓰지만, 국제적으로는 약칭인 일본(Japan)을 공식 명칭으로 쓴다. 특별히 대일본제국(Empire of Japan) 시대의 정체와 구별하여 일본'국(国)'이라 표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State of Japan'으로 쓰는 용례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국의 국호는 별도의 법령으로 이 나라를 '일본국'이라고 칭하도록 지정한 것이 아니며, 일본국 헌법에서 일본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가 모두 일본국이라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 중국(People's Republic of China) 등에 비하면 일본의 공식 국호는 매우 간략하다(Japan). 이는 일본이 국가로서 갖는 정체성의 모호함과 무관하지 않은데, 정식 국호에 군주제라는 정치 체제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이는 군주의 정체성(신, 황제 등)을 명백히 정의하지 않는 것이 일본의 정책이므로 굳이 공식 국호에 정치 체제를 나타내는 단어를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 추측된다.

국기

일장기(日章旗, にっしょうき)

일본의 국기는 일장기(日章旗, にっしょうき, 닛쇼키)이다. 백색 바탕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인 '일장(日章)'을 그려 넣은 깃발이다. 공식적으로는 1870년에 국기로 제정됐지만 깃발 자체의 역사는 훨씬 오래됐다.

일장기의 홍색은 존애(尊愛)와 활력, 백색은 신성(神聖)과 순결을 의미한다.

법적으로는 '일장기'가 공식 명칭이나, 전통적으로 이를 부르던 이름인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가 더 널리 쓰인다. 다만, 일장기는 '기(旗, 깃발)'를 의미하며 '히노마루'라고 칭할 때에는 일장 도안 자체를 이른다. 일본어 '히노마루'는 일본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일본', '일본국', 또는 '일본에서 유래한 무언가'를 은유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국가

일본의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 きみがよ)이다. 본래의 가사는 고대 일본에서 기원한 단가로, 1880년 독일의 작곡가인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기존의 단가 가사를 기반으로 작곡이 이루어져 1888년부터 일본 제국 시기 국가로 쓰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일본의 공식적인 국가가 아니었으나, 사실상의 국가 역할을 해왔으며, 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에 의해 법적인 국가로 재지정되었다.

노래가 총 11마디로 굉장히 짧다. 또 국가치곤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운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중국 등 반일 감정이 강한 국가에서는 장송곡 같다며 비하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아악의 형태를 기본으로 만들다 보니 일본적인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궁내청 아악부가 아악으로 기미가요를 연주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전통 선율을 국가에 담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국장

일본 국장

국화문장(菊花紋章, 기쿠카몬쇼) 또는 십육변팔중표국문(十六弁八重表菊紋)은 일본 황실의 가몬으로, '국화문(菊花紋 기쿠카몬' 이나 '국문(菊紋 기쿠몬)'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바 천황이 국화를 좋아해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로 사용했다. 이후 고후카쿠사 천황, 가메야마 천황, 고우다 천황이 이를 자신들의 징표로 계속 사용해 황실의 문장으로 정착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문장이 된 것은 1869년(메이지 2년)의 태정관포령에 의해서이다. 이때, 천황의 문장으로서 "십육변팔중표국문"이, 천황 이외의 황족의 문장으로서 십사변일중이국문(十四弁一重裏菊紋)이 각각 정해졌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황족인 아닌 자가 국화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그 후 완화되었다.

야마토 전함(戰艦大和) 등 일본 제국 해군 군함의 뱃머리에 붙여져 있었으며, 현재도 일본 여권의 표지에 이 문장이 그려져 있다.

지리

한반도 이남과 일본 열도를 유럽으로 옮겼을 경우의 크기 비교.

일본의 영토는 동아시아 동쪽에 길이 3,000여km에 활 모양으로 걸쳐져 있는 일본 열도와 오키나와를 포함한다. 일본의 최동단은 도쿄도 미나미토리섬, 서단은 오키나와현 요나구니섬, 남단은 도쿄도 오키노토리섬, 북단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홋카이도의 벤텐섬이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 연변(沿邊)에 있으며 전체 국토 면적은 37만 7,975㎢로 이는 지구 표면적의 0.07%, 세계 육지 면적의 0.3%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보다 3.7배나 크고 한반도보다도 1.7배나 더 넓으며 영국(24만 3,981㎢)이나 이탈리아(30만 1,340㎢), 독일(35만 7,022㎢)보다도 국토 면적이 더 넓다. 일본을 그대로 미국 동부 연안에 가져다 놓으면 플로리다를 제외한 동부의 모든 주들을 다 덮으며, 유럽에 있는 나라였다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 면적 순으로 7위이다.

4개 섬 가운데 혼슈만 해도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크며, 동시에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제3의 섬인 규슈 섬은 경상도 지역보다 약간 크고, 제4의 섬인 시코쿠 섬은 경상북도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고, 강원도보다 약간 크다. 또 홋카이도는 섬 하나가 대한민국 실효지배 면적의 80% 정도 크기이다.

다만 일본 열도의 대부분은 한반도와 비슷하게 산지라 가용면적은 작은 편으로, 경작 가능한 평야지대의 면적을 따지면 위에 열거한 나라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좁다. 이 때문에 일본도 한국처럼 가용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체감 인구밀도가 꽤나 높은 편이다.

일본 열도는 남북으로 길이가 아주 긴 편으로, 본토로만 따지면 직선 거리 기준 서남단 규슈섬 가고시마현 이부스키(指宿)에서 북동단 홋카이도섬 네무로(根室)까지 1,900km인데, 이는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일본령 전체로 보면, 류큐 열도 최서단이자 일본 최서단인 요나구니(与那国)에서 일본 최동단인 미나미토리 섬(南鳥島)까지의 직선거리는 더 길어 3,140km로 인천국제공항에서 사이판까지의 직선 거리와 맞먹는다.

넓은 국토만큼이나 일본의 자연환경은 아주 다양하고 그 스펙트럼이 넓다. ​국토가 한국의 우하부를 길게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어 일본의 최동단, 최서단, 최남단, 최북단은 모두 남북한의 최 동서남북단보다도 더 극점에 위치해 있다. 일본의 최북단인 벤텐 섬(북위 45도)과 최서단인 요나구니 섬(동경 122도)은 각각 남북한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북위 43도)과 최서단인 비단 섬(신도, 동경 124도)보다도 더 먼 곳에 있다. 이렇게나 다양한 지리적 요건을 갖춘 덕분에 일본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던지 정글이 존재한다던지 등등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운 자연 환경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여행과 관광에서 꽤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하는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은 한대 기후에서의 스키나 유빙 관광, 그리고 아열대 기후에서의 산호초 스쿠버다이빙이 모두 가능한 나라이다.

지형

유라시아판, 태평양판, 그리고 필리핀판의 판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과 화산활동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본에는 60여 개의 활화산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 세계 활화산의 10% 정도다.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인해 오이타현 벳푸 시의 온천이나 가나가와현 하코네 정의 온천과 같은 대규모 온천이 전국 곳곳에 분포한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후지산은 해발고도 3,776m의 돔 모양 화산이다. 18세기에 마지막으로 분화하였으며 정상에는 칼데라호가 발달해 있다.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에는 데시오(天塩), 키타미(北見), 히다카(日高) 등 해발고도 1,000m급의 높은 산들이 위치한다.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에는 일본알프스(日本アルプス)라고 불리는 높은 산지가 많다. 히다(飛騨) 산맥, 기소(木曽) 산맥, 아카이시(赤石) 산맥을 따라 해발고도 3,000m급의 산들이 즐비하다. 시코쿠에는 시코쿠(四国) 산지가 위치하며, 가장 높은 봉은 해발고도 1,982m의 이시즈치산(石鎚山)이다. 규슈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인 운젠산이 위치한다.

일본은 다양한 해안 지형을 가지고 있다. 지바현의 쿠주쿠리(九十九里) 해안에는 대규모 사빈이 위치하고, 홋카이도 최북단에는 면적 15.2km²의 사로마(サロマ) 석호가 있다. 만 형태의 지형으로는 도쿄도 인근의 도쿄만, 혼슈와 홋카이도 인근의 무쓰만(陸奥湾), 나고야의 이세만(伊勢湾), 오사카부 인근의 오사카만 등이 있다.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상 깊은 계곡을 따라 빠르게 흐르는 짧은 하천이 다수 존재한다. 다만 호쿠리쿠 지방 니가타현, 나가노현을 지나 군마에 이르는 시나노강(信濃川)이나 간토 지방의 군마, 사이타마, 지바, 도쿄도 등을 흐르는 도네강(利根川)은 유로가 300km 이상이다. 유로 길이 200km 이상의 이시카리강(石狩川), 데시오강(天塩川), 키타카미강(北上川) 등도 있다.

토지이용

일본열도는 태평양 북서부의 융기대(隆起帶)의 정상부가 해면 위에 드러난 것으로, 산림 지대의 비율이 약 76%로 높다.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는 치수 사업, 토지 개선 사업, 간척 사업 등으로 농지를 확보해왔다. 특히 홋카이도 지역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국내 최대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도시 지역 면적은 국토의 5.4%로, 5.5%의 비중인 한국과 유사한 수준이다.

기후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겨울철 기온 비교. 전체적으로 한국보다는 겨울 기온이 상대적으로 따뜻하나 간토 이북은 한국의 중북부 지방과 위도가 엇비슷하거나 더 높은 관계로 생각보다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으며, 같은 위도의 중동, 남유럽 지역보다는 겨울에 확실히 춥다. 일례로 삿포로는 프랑스 남부인 마르세유와 같은 위도대에 속하고, 도쿄의 경우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와 같은 위도에 있다.

일본은 산지가 많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데,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가장 깊은 내륙은 군마현으로 도쿄 만으로부터 약 120km 떨어져 있다. 길쭉한 나라인만큼 기후분포는 다양하다. 다만 온도의 스펙트럼은 위도에 비해 고도가 높아서 추운 개마고원이 있는 관계로 한국과 비슷비슷한 편.

일본 겨울의 최대의 적은 바람과 난방으로, 안그래도 간척지라 주위에 산이 얼마 없는 도쿄의 경우 바람은 미친듯이 부는데 그걸 막아줄 산이 없다보니 칼바람이 직격으로 들어온다. 또한 난방의 경우 대한민국처럼 바닥을 덥힌다기 보다는 그냥 히터나 라디에이터로 퉁치기 때문에 정말 춥다.

일본에서는 자국, 특히 혼슈의 기후를 3가지로 세분하고 있다.

  • 동해측 기후 - 니가타 등 호쿠리쿠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기후. 여름에는 푄현상의 영향으로 매우 덥다. 반면 겨울에는 쿠로시오 해류의 지류인 쓰시마 난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폭설이 잦다. 연 강수량이 2000mm~3000mm 수준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 중앙 고지 기후 - 나가노, 야마나시 등에서 볼 수 있는 기후, 고원지대 한복판이라 여름이 비교적 서늘하다. 겨울 강수량이 낮지만, 태평양 쪽보다는 눈이 많이 온다.
  • 태평양측 기후 - 도쿄 수도권과 오사카에서 볼 수 있는 기후. 여름에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매우 덥고, 겨울에는 온난건조하다. 이 기후대 중 일부 지역은 온대하우기후를 띤다. 예외로 도호쿠 지역은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으로 여름이 서늘하다.

한국, 중국과 달리 가뭄이나 황사, 미세먼지 문제는 드물다.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포함한 전 국토에 난류의 영향이 지대하여 1년 내내 강수량과 습도가 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처럼 우산을 항상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물을 끓이거나 정수기로 거르지 않고 수도꼭지에서 나온 그대로 마시는 가정집이 많다.

하지만 중위도 대륙 동안에 위치하여 유럽과 달리 연교차는 큰 편인데다 습도까지 합쳐져서 대도시의 여름 폭염 문제는 한국, 중국과 별 차이 없거나 더 심하다.

일반적으로 온대기후가 많지만 홋카이도와 도호쿠 일부 지역은 냉대기후에 속하며, 반대로 오키나와현과 오가사와라 제도는 아열대기후와 열대기후에 걸쳐져 있다.

2018년 7월 23일 기준 일본 사이타마현 쿠마가야시의 기온이 112년 만에 41.1˚C로 치솟았으며, 2020년 8월 17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서도 같은 기온을 기록했다.

재해 및 환경문제

20세기 일본의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오염 물질들이 무분별하게 배출되었고, 이 때문에 이른바 '일본 4대 공해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석유 콤비나트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황가스와 이산화질소의 영향으로 유행한 '욧카이치 천식', 도야마 현 미쯔이 금속광업소가 방류한 카드뮴으로 인한 '이타이이타이병',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지역 신일본질소회사의 수은 방류로 인한 수은 중독의 '미나마타병', 나가타현에서 '미나마타병'과 유사한 원인에 의해 발생하여 제2의 미나마타병으로 꼽히는 '니이가타 미나마타병'이 대표적이다.

이들 병의 발생으로 인해 산업체에 의한 환경오염이 일본의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1970년대부터 대중적 인식 증가, 환경 관련 정부 기관 설립, 기업의 개선 노력 등으로 문제가 점차 해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4대 공해병의 영향은 존재한다.

유류 파동도 일본 정부가 부족한 천연 자원 상황에 걸맞은 에너지 절약을 장려하도록 하는 데 큰 요인이 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크게 부상하는 환경 문제로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대기 오염, 쓰레기와 화학 물질의 관리, 물의 부영양화, 기후 변화, 그리고 국제적인 환경 보존 움직임에 대한 협력 등이 손꼽히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환경 친화적인 기술 발달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혼다토요타의 하이브리드 및 전기자동차는 높은 연비와 적은 환경오염 물질의 유출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은 친환경적인 생체 연료, 하이브리드 체계, 효율적인 경량 소재 등의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일본은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중대한 성과를 창출하였는데, 탄소 배출을 세계적으로 줄이기 위해 이루어진 1997년의 교토 환경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활약하였으며 교토 의정서의 서명에 앞장서 조약 하에 기후 변화의 억제를 위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에 대해 책임져왔다. 대표적인 예로 고이즈미 내각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쿨 워크 캠페인에 따라, 관공서 내에서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여 에너지 사용량 감소를 도모한 바가 있다. 또, 산업체들은 강제적인 법령 하에 온실 가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갖은 노력의 결과로, 일본은 2005년 측정된 환경 지속 가능성 지수에서 30위를 차지하였으며, 2012년에는 환경성과지수(EPI)에서 23위를 기록했다.

지진

2011년에 발생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 대지진)은 15,897명이 사망하고 2,534명이 실종된 대규모 자연재해로 리히터 규모 진도 7에 달하였다. 진원은 후쿠시마현 앞바다였지만, 일본 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에 영향을 미쳤다. 해당 지진으로 인해 미야기현, 이와테현, 후쿠시마현 등지에서 최대 0.84m에 달하는 지반 침하가 발생하였고, 최고 40m 높이의 쓰나미가 육지를 덮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진원과 가까운 해안에 위치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가 쓰나미의 영향으로 피해를 입어 결국 노심이 용융되었다. 이 때문에 세슘(137Cs, 134Cs), 스트론튬(90Sr), 코발트(60Co), 트리튬(3H)을 포함한 방사선 오염물질이 주변 토양과 해양 환경에 악영향을 주었다.

역사

607년에 건립된 호류지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역사는 보통 일본 열도의 역사와 동일시되지만 엄밀히 '일본'이라는 국호는 8세기 전반에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와 일본 열도의 역사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다.

일본의 역사의 시대 구분은 고고학과 역사학 구분으로 나뉜다. 고고학에서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선토기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 그리고 역사 시대로 일반적으로 나누는 한편, 역사학 상에서 시대 구분은 일반적으로 고대(아스카 시대 및 그 이전 ~ 헤이안 시대), 중세(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 근세(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근현대(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이다.

선사시대

혼슈, 시코쿠, 큐슈에서 문자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역사'에 앞선 시대, 즉 선사시대는 이와주쿠 시대(岩宿, 구석기), 조몬(繩文), 야요이(彌生), 고훈 문화의 순으로 변천하였다. 각각의 시대를 이와주쿠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 역사에서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는 일본의 신석기시대를 조몬 토기의 보급에서 연유하여 조몬(繩文) 시대라고 부른다. 수렵과 채집을 기초로 하며 움막을 지었으며, 큰 마을을 조성할 때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둥근 범위에 집을 세웠다. 조몬인은 나무 열매 등을 채집하고 사슴이나 멧돼지, 토끼 등을 사냥하는 한편 물고기를 잡는 등 식료 채집으로 살았다. 전 세계적으로 식료 채집에서 식료 생산으로의 전환은 6천~1만년 전에 실현되어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돌입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식료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조몬 문화가 계속되다가 2천여 년 전에 농경문화가 성립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의 야요이 시대는 금속기를 사용하며 도검(刀劍) 등의 무기와 제기(祭器)를 제작하였다. 이 때는 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 전환되어 용수로나 둑 두렁을 완비한 논농사와 조 등을 경작하는 밭농사가 시작되었다. 야요이 문화에는 벼농사 외에도 청동·철·유리·베·명주 등 중국과 한반도에서 많은 제품과 기술 지식 사상이 전해졌다. 농경의 신을 위한 제사가 수행되었으며, 청동과 철이 동시에 출현하여 칼 종류가 석기에서 철기도 바뀌었다. 돼지와 닭을 사육하였으며, 생산력이 급증함에 따라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고, 농경사회가 성숙하여 마을에서 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싸움도 벌어졌다.

본토가 야요이 문화에 들어선 뒤에 홋카이도에서는 조몬 문화와 마찬가지의 석기를 이용하는 식료채집 문화가 계속되었고, 본토의 야요이 문화와 비교해 이를 속(續)조몬문화라고 한다. 이때 어로나 수렵 채집 뿐 아니라 수수·피·메밀을 재배하였다. 오키나와의 속조몬문화에서는 8~10세기에 벼·보리·조·콩을 재배하였고, 13~14세기 본격적인 농경사회에 들어갔다.

야요이 마을에서는 유력자들도 고향마을의 집단묘지에 묻혔지만, 이러한 마을을 몇 개 합친 '국'의 '왕'이나 그게 가까운 사람들은, 집단묘지와는 다른 묘역이나 흙을 쌓아올린 분구묘에 묻혔다. 4세기부터 6세기 말까지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 고분이 등장하는 시대를 야요이 시대에서 이어지는 고훈시대(古墳時代)라고 부른다.

고대

일본의 고대사회는 4~5세기경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지배하는 통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야마토 정권은 율령제도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갖추었고, 대륙으로부터 율령제와 불교뿐 아니라 철제무기와 같은 선진문물을 수입하며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소국의 수장들은 조정 내부에서 귀족계급을 형성하여 성(姓:가문의 세습적인 칭호)을 수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의 삼국과 인적 물적 교류를 하며 중국에 견수사와 견당사를 파견해 적극적으로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4세기 말엽에 백제에서 한자와 유교가 전래되고, 6세기 중엽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국내의 제반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었다. 쇼토쿠태자의 통치 시기에 불교가 융성하고 호류지 5층 목탑 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아스카 시대는 일본 역사의 시대구분 중 넓게는 아스카(飛鳥)에 궁궐과 도시가 세워진 592년부터 710년까지의 118년을 가리키며, 이전에는 고훈시대와 합쳐 야마토시대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고훈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7세기 말에서 9세기 말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는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고, 덴무(天武)천왕은 중앙집권적 율령체제를 확립한다.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의 원칙으로 농민은 일정한 토지를 배당받아 조(租)·용(庸)·조(調)의 세(稅)를 부담하였다. 당(唐)의 문화를 흡수한 조정은 710년 나라(奈良)에 도읍 헤이조경(平城京)을 세웠다. 8세기에는 두 권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편찬되었다. 794년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쿄토)으로 천도하기까지의 약 80년간을 나라시대라고 부른다. 나라시대에 일본은 백제와 활발히 교류했고, 백제 멸망 후 그 유민이 다수 일본으로 건너가 한학, 유학, 불교 및 회화, 불상조각, 사찰건축 등의 문화예술, 관개, 축조기술 등을 전하였다.

794년 간무왕(桓武王)이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도쿄)로 천도한 때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막부(幕府)를 개설한 1185년까지를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781년에 즉위한 간무왕은 도읍을 헤이안으로 옮기고 새 궁궐을 창건하고 도시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중앙권력 세력이 점차 약화되며, 후지와라 가문이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절대적인 외척으로 군림한다. 천황이 미성년자일때는 섭정(攝政), 성년이 된 후에는 관백(關白)이라는 이름의 후견인으로 정치를 좌우하였다. 귀족과 사원이 세력을 강화하면서 대규모 사유지 장원(莊園)을 확대하였다. 궁정을 중심으로 문화가 융성하여 귀족들 사이에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났고, 한자를 응용한 일본식 문자인 가나(假名)가 유행하였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가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10세기부터 12세기에는 중앙집권적 율령국가의 지배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지방관이 관리하는 영지들이 중앙귀족이나 지방의 호족, 사원 등의 지배를 받는 장원으로 포섭되었다. 농민이나 호족들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하였고 '재지(在地)무사'들은 서로 연계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미나모토(源)일족과 다이라(平)일족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였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시(平氏) 일족을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를 개설함으로써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중세시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고, 스스로 최고통치자이 쇼군(將軍)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에 충성을 맹세한 부하들을 군사와 경찰권을 가진 슈고(守護)와 치안 및 세금을 담당하는 지토(地頭)로 삼아 각지에 파견하였다. 1221년 천황 측과 막부 측이 정면충돌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막부가 승리하자, 막부의 통치권이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3세기 말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몽골족의 원(元)나라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을 감행하였다. '신풍(가미카제)'이라고 불린 태풍의 도움으로 원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통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였고, 막부 반대 세력을 규합한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에 의해 1333년 막부는 붕괴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이후 고다이고 왕은 관료국가의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무사 출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막부 타도의 성과를 독점하려는 천황에 실망하고 무사를 규합하였다. 그는 새로운 천황을 세우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고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 남쪽 요시노로 탈출해 또 하나의 조정을 세웠고, 남과 북에 각각 조정이 존재한 '난보쿠초 시대(남북조시대)'는 14세기 말까지 약 60년에 걸쳐 이어졌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난보쿠초(남북조)를 통일시켰으며 로쿠온지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막부가 파견한 지방관이 현지에서 이른바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는 독자적인 영주로 변신하고, 8대 쇼군 요시마사(義政)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닌의 난이 10년 이상 계속되면서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중앙권력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지역을 지배하던 당시의 실력자를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라고 부르며, 이들이 활약한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의 약 150년간의 혼란기를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근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누르고 에도 막부를 건설하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 말기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속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등장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을 위해 기존의 악습과 적폐를 파괴하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였다. 히데요시는 통일을 완성하고 새로운 지배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이에야스는 이를 계승해 새로운 통일정권의 정치와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안정화하다.

오다 노부나가는 효율적으로 화승총 부대를 운용하고, 성 아랫마을인 조카마치에 무사를 상주시키는 상비군 체제를 마련하는 등 탁월한 군사전략을 발휘하고, 1573년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1582년 교토 혼노지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상인과 직인, 그리고 무사를 조카마치에 거주하게 하고, 농민소유의 무기를 회수하는 도수령(刀狩)을 내려 무사와 농민을 분리하는 등 봉건적 토지소유제 확립과 신분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1590년에 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93년, 1597∼98년의 두 차례의 조선침공에 실패하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江戶:현재의 도쿄도)에서 묵묵히 세력을 키운 끝에,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패권을 장악하였다. 1603년 초대 쇼군으로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 일명 에도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로부터 1867년 11월 조정에 대한 정권을 반환한 대정봉환 까지의 약 260년 동안을 에도 시대(江戶時代)라고 한다.

도쿠가와는 막부의 쇼군으로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타 다이묘들을 압도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봉건제도의 강화를 도모하여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막번 체제(幕藩體制)를 확립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확립하였다. 전국에는 다이묘가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지방 영지인 250여 개의 번이 존재하였다. 막부는 그리스도교를 엄금하고 쇄국을 단행하였다. 250개 번 사이에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무가제법도, 즉 다이묘를 포함한 무사들이 지켜야 할 내용을 규정한 법을 만들었다. 또한 각 번들의 다이묘들이 1년 단위로 자신의 번과 에도를 번갈아 거주하도록 하는 참근교대제를 통해 각 번의 권력 자체를 감시한다. 천황과 조정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서양 각국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전개된 19세기, 미국은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개국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흑선을 몰고 온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굴하여, 일미화친조약과 일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다른 열강과도 유사한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이에 여러 번에서 막부의 개항에 반발하였고, 개항 과정에서 천황의 재가를 받지 않은 것을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격렬한 내분 항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사쓰마번과 조슈번 등의 하급무사들을 중심으로 외세 배격 운동인 존왕양이운동이 발발하였다. 정권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막부는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하고, 이로써 에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근대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년~1912년)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을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후, 조정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신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라고 정하였다. 과거의 신분제 대신 호적법을 제정하는 등 봉건제를 폐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교육과 징병, 세금제도를 정비하며 부국강병 및 문명개화를 추진하였다. 단발령, 우편과 화폐제도 정비, 철도 부설, 태양력 채용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토 히로부미 주도로 1889년 제국헌법이 제정된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과정을 말하며, 메이지(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간주한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10년 조선 강제병합하였으며, 서양과의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고,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 천황제국가를 확립하고 탈아입구, 즉 뒤처진 아시아에서 탈피해 구미열강의 일원이 되자는 노선에 따라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 지배의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경제는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며 세계 열강과 어깨를 겨루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일본의 경제 지표는 곤두박질하였고, 물가가 폭등해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며, 1923년에는 관동대진재의 발생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27년 일본 금융공황, 1929 세계 대공황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대륙침략을 꾀하는 군국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한편 그런 동안 1925년 보통선거법 제정이나 라디오 방송의 시작, 정당 정치의 진전, 신문과 잡지 등의 대중매체의 확산, 중산층의 소비가 증가하였다. 당시 정치ㆍ사회ㆍ문화 등 각 방면에 나타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향의 움직임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다이쇼大正(1912~1926)라고 불기기도 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1945년 9월 2일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웠고,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침략 행위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제정하여 정당과 의회가 해산되고 사상과 언론뿐 아니라 생활에 대한 통제도 한층 강화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해외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남아시아로 침략을 확장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고,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일본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전투와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에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은 NHK라디오 방송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현대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했고, 1947년 상징천황제와 전쟁포기, 봉건제 폐지의 내용을 담은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한국의 6·25전쟁에 의한 특수 경기로 경제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1952년의 대일강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였다. 1964년 도쿄에서 개최된 제18회 올림픽경기대회는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이었으며, 일본이 전후사회에서 부흥하였음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의 고도경제성장 기간 동안 세탁기·냉장고·흑백TV가 '현대판 3종 신기'라고 불리며 소비사회를 이끌었다. 1972년까지 아마미 제도, 오키나와현의 영토권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부동산과 주가가 크게 부풀려지는 버블경제를 경험하였다.

1989년 히로이토(裕仁) 천황의 사망으로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였고, 연호는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平成)로 바뀌었다. 한편 거품경제 붕괴와 함께 1992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하고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에 빠졌다. 한편 1988년 리크루트스캔들이나 1992년 도쿄사가와규빈(佐川急便) 사건 등으로 정치 불신이 극에 달해, 일본자유민주당은 1993년 중의원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고, 야당연립정부인 호소카와(細川)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1955년 11월부터 1993년 8월까지 38년 가까이 지속된 자민당 단독정권, 이른바 '55년 체제'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연립정권시대가 개막되었다. 정치개혁의 중심과제는 정치부패 방지와 정권교체를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이었으나, 정치개혁 관련 4개 법안 성립 후 호소카와 내각은 급속히 구심점을 잃었다. 1994년 6월에는 자민당, 사회당, 신당사키가케 등의 연립정부가 수립되었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다. 종전 50년이었던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하는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1995년 1월 17일 진도 7.2의 한신·아와지대지진이 발생하였다. 한신대지진은 사망자 6437명, 부상 4만 3792명, 피난소 생활 30만명 이상, 주택피해 약 64만동, 이재민 30만명 이상, 피해총액 약10조엔으로 관동대진재 이래 사상 최대의 지진 피해를 기록하였다. 지진 직후 도로·철도·전기·수도·가스·전화 등 라이프라인이 단절돼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혀 기능하지 못하였다. 한신고속도로는 10여 곳이 붕괴되었고, 산요신칸센도 끊겼다. 인공섬인 포트아일랜드와 롯코아일랜드(고베시 히가시나다구에 있는 580ha규모의 인공섬)는 지반 액상화로 크게 침하하였다. 고베시 나가타 구 등 목조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화재로 인한 피해가 집중되었다.

일본 사회는 한신대지진에 이어 옴진리교 사건으로 큰 혼란을 겪었고, 다시 자민당이 집권하며 1996년 1월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2001년 4월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郞)는 '구조개혁없이 경기회복 없다'는 슬로건으로 도로관련 4개 공단, 석유공단, 주택금융공고, 우정(郵政) 분야 3개 사업 둥 민영화를 포함해 '성역없는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구조개혁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고이즈미 내각은 약 80%의 경이적인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제88대, 제89대 총리를 연임하며 규제 개혁을 이끌었으나, 복지부문 축소와 양극화 심화의 문제를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2009년에는 민주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하토야마 유키오가 93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하토야마는 '메이지 유신 이래 관저주도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주도로 바꾼다.'라고 선언하며 시민주도 정치로의 전환을 정권의 축으로 내걸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발생한 일본 관측 사상 최대인 리히터 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사망자는 1만9689명이며, 행방불명자는 2563명이다. 피난소 생활자수는 46만 8699명, 가설주택수는 5만 3316동이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이바라키현에서 지진 후 2년 동안 11만명의 인구가 줄었다.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현 오쿠마마치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에서 지진과 지진해일로 인해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며, 인류 역사상 2번째 7등급 원자력 사고이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2012년12월 26일 자유민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취임하며 관저주도 정치 속에 아베노믹스를 이끌었다. 아베 총리는 모리모토학원, 가케학원 등의 의혹 속에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도쿄올림픽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7년 8개월 일본 최장수 총리로 사임하였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에 이어 2021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100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정치

일본은 입헌군주제로, 천황은 국가의 상징일 뿐 아무런 권한이 없다. 2019년 나루히토 천황이 즉위했다. 일본의 정치 체제는 1946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기초하여 구성되어 있다. 일본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의회제)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통치체제는 의원내각제로 2012년 이후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이 이끄는 자유민주당과 공명당 연립정부가 집권하다가 아베의 지병이었던 위염이 악화되어 사퇴했고 2020년 9월에 스가 요시히데가 제99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집권하게 되었고, 그 후 지지율이 하락하자 1년만에 사임, 2021년 10월에 기시다 후미오가 제10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천황제

제126대 천황(금상천황) 나루히토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은 천황을 신앙적 존재로 두면서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그러나 1867년 에도막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면서 막부 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이 선포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발표된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国憲法)', 이른바 메이지헌법은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규정하고, 막강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문무관 임면 및 육해군 통수, 외국과의 조약 체결과 전쟁, 강화 등의 거의 모든 권한이 천황에 집중되었고, 해산권도 주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 평화헌법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 상징천황제를 공표하였다. 전후 일본헌법 1장은 천황에 대한 규정이며,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지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그리고 제4조에는 "(천황이) 국사에 관한 행위를 행하지만,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천황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는 일본 천황의 조상신으로 여겨지며, 역사적·문화적으로 일본 천황이 한 핏줄이라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은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황의 재임에 따르는 원호는 일본에서 서력만큼 일반적으로 널리 쓰인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연호는 메이지(明治)기 1868~1912년, 다이쇼(大正)기 1912~1926년, 쇼와(昭和)기 1926~1989년, 헤이세이(平成)기 1989~2019년이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2019년 5월 1일에 126대 천황으로 즉위한 나루히토 천황이며, 연호는 '레이와(令和)'이다.

입법부

일본 국회의사당
일본 국회의사당

국회는 '국권의 최고기관'으로 규정되어 입법기관이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으로 구성된다. 중의원은 하원,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하며, 주권자인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다. 양원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각각 사무국과 법제국이 있다.

국회는 총리지명권, 중의원의 내각 신임 또는 불신임의 의결권 등을 가진다. 그리고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으로서 모든 법률안을 심의·의결하는 권한을 가진다. 의안의 제출권은 내각(총리)·의원 양자가 가지나 예산안 제출권은 내각만이 가진다. 또 조약의 승인도 국회의 권한에 속한다. 3권분립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회는 국정조사권, 재판관의 탄핵재판권을 가지나, 반대로 내각의 중의원 해산권, 최고재판소의 법령 위헌심사권에 의해 견제되고 있다. 예산안 심의·총리지명·조약비준, 총리대신의 지명, 내각불신임 등에 있어 중의원의 의결이 참의원보다 우선한다. 중의원은 해산이 있으며, 중의원은 의원수 480명에 임기 4년이며, 참의원은 의원수 247명에 임기 6년이다.

1955년에 일본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쳐져 일본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이 창당되었고, 이후 자민당은 지속적으로 여당 자리를 지켜오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 함께 이른바 '55년 체제'를 구축하였다. 1993년에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연립 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당 우위 정당제가 처음으로 붕괴하였다.

2021년 10월 31일에 치루어진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전체 456석 중 261석을 차지하고 공명당이 32석을 차지하여 자민당 공명당 연립여당의 의석수는 총 293석으로 집계되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96석을 얻었고, 극우 성향인 일본유신회가 41석을 확보해 공명당을 제치고 제3당으로 약진하였다.

행정부

행정권은 내각·지방 공공 단체·행정기관이 담당한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이하 국무대신으로 조직되어 행정권의 행사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진다. 내각은 행정 사무 이외에 법률 집행, 외교 관계의 처리, 조약 체결, 예산 작성, 정령(政令) 지정 등의 업무를 부담한다. 내각총리대신은 국회가 국회의원 중에서 지명하고, 일본 천황이 임명한다.

한국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인 반면 일본은 국회의원들 중에서 선출된 제1여당의 대표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한국 대통령은 5년간 1번의 임기를 갖는 단임제지만, 일본은 의원내각제로서 총리의 임기가 헌법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 1955년부터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당칙’에는 총재의 임기는 3년이고 3회에 걸쳐 재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최대 9년이 총재의 임기가 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약 7년 8개월(2012.12.~2020.9.)의 일본에서 가장 오랜 기간 총리직을 맡았다. 현재의 내각총리대신은 100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이다.

사법부

헌법 제76조에 따라 모든 사법권은 최고재판소 및 법률에 의거한 하급재판소가 보유한다. 모든 재판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직권을 행사하며, 헌법과 법률에만 구속된다.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최고재판소 장관과 14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장관은 내각의 지명에 따라 천황이 임명하고, 임명 후 최초로 실시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심사에 부쳐지며, 그로부터 매 10년 경과시 최초 중의원 총선거 때 다시 국민심사에 회부된다. 14명의 재판관은 내각이 임명한다. 일본의 하급재판소는 제2심인 고등재판소와 제1심인 지방·가정·간이 재판소로 구성된다. 하급재판소의 재판관은 최고재판소가 지명하고 내각이 임명하며, 임기는 10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정당과 선거

국회의원, 도도부현 및 시정촌의 각 수장과 의회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만 20세 이상의 남녀 전원에게 선거권을 주는 보통 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다. 피선거권은 참의원 의원 및 도도부현 지사는 만 30세, 그 외에는 만 25세 이상인 사람에게 주어진다. 보통 양원 의원과 도도부현 지사 및 의회 의원들은 특정한 정당의 당원 또는 그 정당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시정촌의 수장과 의회의원들은 무소속이거나 지역 소규모 정당 소속인 경우가 많다.

한편 일본의 주요 정당은 오랫동안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55년 체제 이후 2009년까지, 2012년부터 총리대신을 배출한 자유민주당과 현재 연립내각을 함께 구성 중인 공명당이고,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이다.

외교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하여 1952년 4월 28일에 주권이 회복되었고, 이 때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일본의 외교는 대미의존과 경제 중심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일안전보장조약은 일본은 미국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평화 헌법으로 인한 안보의 공백을 미일 동맹이 보완해온 것이 전후의 역사이며, 군사비 지출을 줄이면서 경제 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1955년에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자유주의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공업국가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가입으로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UN 중심주의,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는 대국민적인 안보투쟁에도 불구하고 1960년의 미일안보조약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수교하였다. 1971년 중국의 UN 가입을 계기로 국제정치는 다극화 시대로 이행하였고, 1972년의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아시아에는 새로운 외교정세가 진전되었다. 일본은 역시 같은 해 9월에 총리의 중국방문으로 중일간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1974년에는 일본·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정기항공로가 개설되고, 1978년 10월에는 중공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1980년 5월에 총리 화궈펑(華國鋒)이 방일(訪日)하는 등 양국관계의 급속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초 걸프전쟁을 계기로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국제분쟁 해결에 참여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정에 공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급속히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1992년 6월 UN평화유지활동(PKO)법을 제정하여 패전 후 처음으로 자위대 해외파병의 길을 터놓았다. 이 법안에 입각하여 캄보디아, 모잠비크, 자이레 등에 자위대가 파견되었다. 또한 2001년 10월에는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마련하여 미군에 대한 후방지원 형태로 자위대를 인도양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G8, G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 가맹국이며, 서방7개국 정상회담 G7에 참여하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이다. 현재 전 세계 195개국에 일본대사관이 있으며, 157개국이 일본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41개 국제기구가 일본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2012년 취임한 아베 내각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추구하는 한편, 외교안보정책의 포괄적 기본 지침인 국가안보전략의 채택과 그 제도적 기반으로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발족시켰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과 국내정치 변동이라는 국내외적 상황 속에서 미일동맹을 재편하고, 국내적으로는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하며, 중국의 부상에 대해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며,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지구적 차원의 협력을 추구하는 다차원적인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한일관계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고대부터 각종 문화의 전파와 무역을 비롯한 많은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백제는 고대 일본에 중국 문물을 많이 전파하였다. 고려 시대 후반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서는 쓰시마섬과 규슈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倭寇)가 각종 약탈을 일삼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 시대 중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중세와 근세기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 파견으로 다시 한일 교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 등장한 일본 제국이 1910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병합한 뒤 1945년까지 35년 동안 폭악한 식민 통치를 행하고 현대에도 일본의 여러 우익 인사들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도발을 주창하면서 양국의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본에서도 반한감정을 가진 일부 일본인들이 반한시위를 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일본에 의해 제기되는 독도 분쟁동해의 이름에 대한 분쟁 등의 이슈를 안고 있다. 2009년에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한 이후 이루어진 양국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다수가 더 악화된 한일 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 응답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위안부에 대한 역사왜곡으로 일본정부는 유엔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국방

일본은 패전 이후 연합군 점령 아래에 놓였고,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주도하의 전후 개혁 속에서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일본국헌법의 9조에는 전쟁을 포기하고, 교전권을 부인하며, 군사력을 보유하거나 유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에 일본의 전후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8일 맥아더 서한에 따라 7만 5천 명의 경찰예비대가 만들어졌다. 이는 한국 전선으로 주일미국이 급파된 데 따른 일본의 안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이 조직은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보안대'로 변경하였고, '자위대'로 다시 변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의 모든 운용비용은 방위성에서 나온다. 자위대는 "일본의 평화와 독립을 지키고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위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며, 필요에 따라 공공질서 유지에 임한다."고 되어 있다. 방위성(防衛省, Ministry of Defense)은 일본의 행정기관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격이다.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강화조약 조인과 동시에 체결한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제1조에는 "일본은 미군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여(허락)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인한 안보 공백을 미일동맹으로 보완해왔다.

2019년 일본의 국방비는 486억달러로, 미국 6,846억달러, 중국 1,811억달러, 사우디아라비아 784억달러, 인구 605억달러, 영구 548억달러, 프랑스 523억달러에 이어 세계 7위 수준으로, 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0.94%의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은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에 따라 GDP의 1%범위에서 방위비를 억제해 왔으나, 최근 일본자유민주당 내에서 헌법개정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력 대폭 강화'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비 증액 또한 거론되고 있다.

행정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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