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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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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2월 27일 (월) 10:45 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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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臺灣)
대만 타베이시
대만 신베이시

대만(臺灣)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타이완 섬 또는 대만섬을 중심으로 정의되는 여러 지역의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이라고도 하며 중국어로는 타이완(tái wān)이라고 부른다. 별칭은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을 가리키는 포르모사(Formosa)이다. 수도는 타이베이이며 주요 도시는 신베이시, 가오슝, 타이중, 타이난타오위안 등이 있다.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 푸젠성과 마주하고 있는 나라로 중국 본토에서 약 150㎞ 떨어져 있다. 1885년 하나의 성(省)으로 독립하였고, 청일전쟁 뒤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으며,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이 이전해 와 성립된 국가이다.

중화민국은 2,37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며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국가들 중 하나이며, UN에 소속되지 않은 국가들 중에서는 높은 규모의 경제를 갖고 있다. 중화민국은 수출 중심의 산업화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21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자랑한다. 주로 철강, 기계공업, 전기업, 화학 공업과 제조업 등이 주력 분야이며, 1인당 GDP는 세계 15위 정도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의 자유도, 교육, 복지, 인간 개발 지수를 가지고 있다.

개요

대만은 현존하는 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1912년 건국을 선포한 이후 100년이 넘는 장수 공화국이 되었다. 대만의 헌법상 영토는 중국 대륙을 포함하나,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하여 국민당이 대만으로 정부를 옮긴 '국부천대' 이후 실효 지배 영토는 대만 섬과 그 부속 도서를 포함한 36,197 ㎢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대만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공산당의 미승인단체로 간주하여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만의 국체를 인정하지 않는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이후부터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 대만을 자국의 일개 지방으로 간주하여 이를 부정하는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20세기 후반 냉전이 해소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적 입지가 상향됨에 따라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가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인정한 상태이다. 때문에 현재 대만은 유엔 비회원국, 미승인국이며 수교 국가는 "14"개 남짓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대만은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제1세계 국가들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특별한 외교상의 대우를 받으며, 대만 관계법 및 대만 동맹 보호법과 같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는 한편, 중국에 의해 일부 권리 행사를 방해받고 있음에도 여타 미승인국가들과는 달리 사실상의 주권국가로 인정되고 있다.

국가 상징

국호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이며,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이라고 부른다. 중국이라는 명칭은 이전에는 사용하였으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또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약칭은 ROC이다. 1971년에는 중화민국이 UN 회원국 지위를 버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부르는 빈도가 훨씬 많아지면서, 통상적으로는 중화민국의 현재 남아있는 영토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명을 따서 타이완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 흔해졌다. 과거 냉전시절 미국이나 대한민국 등 친서방 국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공(中共, Communist China)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유중국(自由中國, Free China) 또는 중국이라고도 불렀으나 탈냉전 이후부터는 빈도가 감소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중화민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3년 6월 26일, 덩샤오핑 이론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台灣特别行政區)라는 이름을 제시하였고, 타이완 지구를 홍콩, 마카오와 같은 자국의 특별행정구처럼 간주하고 있다. 이런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화민국은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 또는 中華台北)라는 별칭을 1980년대부터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나 국제기구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단, 세계 무역 기구(WTO)에서 중화민국의 가맹 명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관세영역(臺灣·澎湖·金門·馬祖 個別關稅領域; Separate Customs Territory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 台澎金馬個別關稅領域)이다.

2008년 6월 4일, 어우훙롄(歐鴻煉) 중화민국 외교부장은 국제기구 등에서의 '중화 타이베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반면 중화민국 감찰원에서는 중화민국 행정원의 정부 문서에서 '대만'의 사용 빈도가 높아진 것을 지적하였으며 '중화민국'이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차이잉원 행정부 시대 이후에는 중화민국 대만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도입하였다.

중화민국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TW이다.

국기

대만 국기

대만의 국기는 청천백일만지홍기이다. 국기이자 해군기이다.

중국 국민당의 깃발, 즉 당기(黨旗)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에서 비롯되었다. 기(旗)를 붙이지 않고 靑天白日滿地紅(청천백일만지홍)이라고만 해도 역시 중화민국의 국기를 뜻한다. 또 편의상 청천백일기라고도 부르지만, 앞서 밝혔듯이 엄밀히 말해서 청천백일기는 중화민국 국기 좌측 상단의 캔턴(canton) 부분에 해당하는, 푸른 색 바탕의 하얀 해를 도안으로 하는 깃발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천백일기는 중국 국민당의 당기이고, 대만 해군 함수기(艦首旗, naval jack)로도 쓰이는 깃발이다.

1992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인식하는 현대의 한국인들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그냥 '대만 깃발'이고 오성홍기가 '중국 깃발'인 것으로만 알고 있겠지만, 사실 이쪽이 중국 입장에서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깃발이다. 신해혁명, 장제스의 북벌, 중일전쟁, 국공내전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1949년에 만들어진 오성홍기가 아니라 이 깃발 아래에서 겪었다.

이름이 아주 직관적이다.

  • 청천(靑天): 푸른 하늘. 좌상단의 푸른 영역
  • 백일(白日): 흰 태양. 푸른 영역 가운데 태양 무늬
  • 만지홍(滿地紅): 꽉 차게 붉은 땅. 배경 붉은색.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청천백일기를 좌측 상단에 놓고 나머지 부분은 붉은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인 민족, 민생, 민권을 상징하는 색깔인 파란색, 빨간색, 흰색으로 구성되어있다. 파란색은 삼민주의의 민족 그리고 자유를, 빨간색은 삼민주의의 민생 그리고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사람들의 피와 박애를, 흰색은 삼민주의의 민권 그리고 평등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또한 하얀 태양의 12갈래는 24시간 쉬지 않고 강해지자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뜻을 상징한다.

국장

대만 국휘

중화민국의 국장은 국휘(國徽)라 부르며 청천백일만지홍기에도 있는 청천백일(靑天白日)을 사용한다.

대만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인 중국 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 및 휘장과는 도안이 약간 다르다. 중국 국민당 당휘는 흰 태양의 햇살 문양의 크기에 정확히 맞춰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라면, 중화민국의 국장은 햇살에서 바깥 쪽으로 여유를 두어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며 연원은 당휘와 같다.

이외에 대만군과 정부 상징으로서 국장 다음으로 자주 쓰이는 매화 문장이 있다. 매화의 다섯 갈래 꽃잎은 오권분립을 상징하며, 총통부 및 행정각부(원)의 상징에 들어간다. 이외에 매화문이 응용된 문양이 육해공군의 부대마크, 지방행정기구의 기와 휘장, 관무서(關務署; 관세청) 휘장, 국도(國道) 표지, 중화 타이베이 기와 휘장 등에 포함되어 있다.

국가

국가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 국가(中華民國國歌)'이며, 비공식적으로 가사 첫 행을 따서 '삼민주의가(三民主義歌)'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민정부 시절부터 국가로 지정되었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국가로 이어져오고 있다.

작사자는 쑨원이다. 1924년에 쑨원이 광저우에 있었던 황푸군관학교에서 한 연설 내용을 48자로 요약한 것이다. 다만 이 연설문 자체는 쑨원 본인이 쓴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을 작사자로 넣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물론 요약자도 따로 있고. 요약한 사람은 네 명인데, 각각 후한민(胡漢民), 다이지타오(戴季陶), 랴오중카이(廖仲愷), 사오위안충(邵元沖)이다.

1928년에 작곡가 청마오윈(程懋筠)이 이 가사에 곡을 붙였고 이 노래는 중국국민당 당가로 사용되었다. 1930년에 장제스가 중화민국의 국가로 지정하였다. 대만 정부가 내놓는 공식 자료에는 청마오윈 작곡, 쑨원 작사, 장제스 지정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공식 자료에는 최초로 이 곡을 불러서 녹음한 가수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이후 국부천대 이후인 현 대만에서도 쭉 사용되고 있다.

지리

지형

대만 지형

타이완은 동아시아에 속하며,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동중국해한반도, 오키나와와 동쪽으로는 약 110km 떨어진 곳에 오키나와 제도의 요나구니섬과 태평양을, 서쪽으로는 타이완해협과 중국 대륙을 바라보고 있다. 타이완해협의 평균 거리는 약 200km이지만, 가장 좁은 지점은 타이완 신주현(新竹縣)에서 푸지엔성 핑탄섬(福建省平潭島)까지 약 130km이다. 남서쪽으로는 남해와 광둥성(廣東省) 해안까지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바시해협(Bashi Channel)을 사이에 두고 필리핀과 접해 있다.

타이완 본섬의 총면적은 36,188㎢이며 남북의 길이는 394km이다. 남북이 좁고 길게 뻗어 있기 때문에 고구마 지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이며, 산지, 언덕, 분지, 고원, 평원 등이 주를 이룬다. 산지와 언덕의 비율이 전체 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타이완 섬의 중앙산맥을 중심으로 산맥이 남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타이완의 산맥은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해판의 충돌로 인해 만들어졌으며, 주로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다. 주요 산맥은 크게 중앙산맥(中央山脈), 슈에산산맥(雪山山脈), 위산산맥(玉山山脈), 아리산산맥(阿里山山脈), 해안산맥(海岸山脈), 지아리산산맥(加里山山脈)으로 나뉜다. 중앙산맥은 타이완의 지붕이라고 불릴 만큼 타이완에서 가장 길고 큰 산맥이다. 북쪽의 쑤아오(蘇澳)부터 남쪽의 어롼곶(鵝鑾鼻)까지 타이완섬을 관통하는 330km의 길이를 자랑한다. 슈에산산맥은 타이완 북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산댜오자오(三貂角)에서 남쪽으로는 줘수이강(濁水溪) 까지의 180km 길이로 뻗어있다. 위산산맥은 중앙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줘수이강과 슈에산산맥, 남쪽으로는 가오슝시의 경계까지 놓여있다. 아리산산맥은 위산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줘수이강 상류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정원강(曾文溪) 상류까지 다다른다. 해안산맥은 화롄강 하구에서 남쪽으로 타이동까지 약 148km에 달해 뻗어있는 산맥으로 북쪽보다 남쪽이 더 높다. 지아리산 산맥은 슈에산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비토우쟈오(鼻頭角)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난터우현(南投縣)과 줘수이강 상류까지 뻗어있는 180km 길이의 산맥이다. 과거에는 슈에산산맥의 지파로 생각했으나, 지질이 슈에산산맥과 다르고 아리산 산맥과 비슷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따로 분류하고 있다.

타이완은 강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하천망이 잘 발달해 있다. 중앙산맥이 본섬 중부에서도 약간 동쪽에 위치해 있어 대부분의 강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나간다. 가장 긴 강은 줘수이강이며 가장 폭이 넓은 강은 남부의 가오핑강(高屏溪)이다. 면적과 길이가 모두 세 번째인 강은 북부지역의 단수이강(淡水河)이고 이 밖에도 크고 작은 강들이 있다. 타이완에는 자연산 호수가 많지 않으며, 가장 큰 호수는 르웨탄호(日月潭)이다. 그 밖에도 운석 충돌로 만들어진 지아밍호(嘉明湖)가 있다. 타이완은 가파른 지형을 지녔기 때문에 홍수와 가뭄에 취약했다. 저수지와 댐을 건설해 물 공급을 해결하였다. 쩡원댐(曾文水庫)이 가장 크며, 그 밖에도 약 100여개가 넘는 저수지이 있다.

타이완은 네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다양한 해안지형을 가지고 있다. 북부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수심이 매우 깊다. 북부 해안은 대개 암석으로 되어 있고, 동쪽으로 향하면서 가파른 경사가 있는 단층해안으로 바뀐다. 동부 해안은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데 50km만 떨어져도 수심 4,000m에 달할 만큼 매우 깊다. 남쪽으로는 필리핀과 사이에 있는 바시 해협이 있는데, 폭이 약 300km이고 깊이는 약 3000m에 달한다. 이 해안은 주로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다보면 수심이 5000m까지 향하는 남중국해와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 서쪽의 타이완해협은 사면의 바다 중 제일 얕은 편이며 평균 수심 60m이기 때문에 서부 해안은 모래, 석호, 진흙 등으로 구성된다.

토지이용

타이완은 국토의 3분의 2 이상이 산지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산지를 덮고 있는 산림지역은 68.5%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중앙산맥이 자리한 중앙부와 경사가 급해 토지이용이 불가능한 동부 해안에 넓게 분포한다. 타이완의 식생 종류는 고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대나무, 야자수, 열대 상록수 등은 저지대에서 자라고 아열대 상록수림은 고도 600m에서 1,800m 사이에 분포한다. 그 위로 1,800m에서 2,400m까지는 활엽수가 주로 발견되고 2,400m 이상부터는 침엽수림이 자리한다. 본섬 이외의 작은 섬들에서는 바람이 강해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

도시지역과 농업지역은 각각 9.9%, 13.2%에 불과하고 본섬의 서부 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 동부 해안에 위치한 좁고 긴 열곡은 주로 농경지로 활용하고 있다.

타이완은 화산 기원의 섬이기 때문에 토양의 생산력은 풍부한 편이다. 그러나 폭우와 장기간의 관개로 인해 생산력이 많이 저하되어 이모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료가 필요하다.

기후

국토 면적에 비해 높은 고도는 타이완의 기후를 다양하게 만든다. 남부의 해안가는 열대기후를 보이는 반면 북부와 중부 지역은 아열대기후에 속하고 또 중부의 산지 지역은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타이완 동쪽을 흐르는 따뜻한 쿠로시오해류가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고 연평균 기온은 북부지역은 22℃, 남부지역은 24℃ 정도이다.

5월부터 9월까지 약 5개월간 지속되는 여름은 매우 덥고 습하며 낮 기온이 35℃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여름 중 가장 더운 7월의 평균 기온은 28℃에 달한다. 반면, 12월부터 2월까지 지속되는 겨울은 짧고 평균 12~16℃ 정도로 온화하다. 눈은 겨울에 중부의 고산지대에만 약간 내릴 뿐이다.

타이완은 연중 강수량이 많아 연간 약 2,600mm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일반적으로 고도가 더 높은 중앙의 산지와 동부 지역이 더 많은 비를 경험하지만, 계절풍에 따라 그 분포는 달라진다. 겨울에는 남동풍이 불어 북부 지역은 꾸준히 비가 내리지만 중부와 남부 지역은 대부분 화창하다. 하지만 여름에는 계절풍의 방향이 바뀌어 이와 반대 상황이 펼쳐진다.

또 타이완은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태풍의 주요 경로이기 때문에 태풍이 자주 지나간다. 태풍 시즌은 6월에서 9월에 평균 7~8회 찾아오며, 해안과 높은 산들이 함께 있는 지형 때문에 강한 비가 내린다. 본섬 이외 연안 섬들의 기후는 중국 남동부 해안의 기후와 비슷하다.

재해 및 환경문제

타이완은 서쪽과 북쪽의 양쯔판(Yangtze Plate), 북동쪽의 오키나와판(Okinawa Plate), 동쪽과 남쪽의 필리핀변동대(Philippine Mobile Belt) 사이에 위치해 있어 큰 지진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평균적으로 매년 100회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고 약 5~10년에 한번 정도 강진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지진 피해 사례 첫째는 1999년 9월 21일 난터우현 지지진(集集)을 진앙지로 한 규모 7.7의 강진이 있다. 일명 '921 대지진', '지지 대지진'이라고 하는데 2415명 사망, 29명 실종, 11305명 부상 등 인명 피해와 당시 3647억 타이완달러(NTD)의 재산 피해가 있었다. 다음으로 2016년 2월 6일 가오슝시 메이눙구를 진앙지로 한 6.6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지진은 가오슝에서 일어났지만 인접한 타이난시의 피해가 컸다. 1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17층 규모의 빌딩이 무너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2018년 2월 6일에는 화리엔에서 규모 6.4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화리엔의 호텔, 건물, 병원 등이 무너지거나 피해를 입었다. 17명이 사망하였으며, 280명의 부상자, 88명 이상의 실종자들이 생겼다. 이후 8개월 뒤 2018년 10월 화리엔에서는 6.0 규모와 5.7 규모의 지진이 더 일어났다.

그 밖에도 타이완에서는 높은 인구밀도와 집중된 공업지대로 환경오염 문제도 겪고 있다. 20세기 후반 타이완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과 늘어나는 차량으로 대기오염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1987년 행정원에 환경보호청이 설립되면서 무연 휘발유 사용을 의무화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는 대기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 공장 폐수 및 미처리 하수의 수질오염, 원자력 발전 및 방사성 핵폐기물 처분 문제, 산성비 등이 주요 환경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1995년부터 타이완 시민사회는 이러한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다양한 환경보호 캠페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후 변화로 인한 타이완의 평균 기온은 지난 100년 동안 1.4도가 상승하였는데, 이는 전 세계 평균 기온 상승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이에 정부는 2005년 탄소 배출량 수치를 기준으로 2030년까지 20%, 2050년까지 50%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역사

대만의 역사(臺灣의 歷史)가 문헌상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624년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타이완섬(臺灣島)에 진출하여 점거하면서부터이다. 물론, 그 전에도 타이완 원주민들이 정주, 생활하여 왔다. 다만, 한족(漢族)이 본격적으로 타이완에 이주한 것은 유럽인들이 타이완섬을 점거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이전까지 타이완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原主民)들의 섬이었다.

따라서, 타이완의 역사는 크게 16세기 이전 시기,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 정씨 왕조 시기, 청나라 시기, 일본제국 식민지 시기, 중화민국 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16세기 이전

대만은 구석기시대 말기(5만년전 ~ 1만년전)에 이미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증거는 명확한 편인데, 이 시대의 유물들은 말레이계 원주민이 남긴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진수가 지은 《삼국지》에서 오나라가 종종 이주(夷洲)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고 이 때 위온과 제갈직을 시켜 백성을 징발해 오기도 했다. 《수서》에는 "유구국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건안군(建安郡)(현재의 푸젠성)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중국측 학자들은 이를 대륙과 타이완 사이의 교류 증거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주(夷洲)나 류구국(流求國)이 타이완을 지칭하는지 확실치 않고 《수서》의 류구국(流求國)은 류구국(琉球國,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1360년에 원나라는 펑후 제도(澎湖)에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복건의 천주(泉州)에 예속시켜 통치하였다. 이것이 타이완 지역(타이완섬 서쪽의 "펑후 제도"에 한정된 것임)이 중국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최초의 기록이다.

1590년에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루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타이완섬을 보고 "포르투갈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란 뜻)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타이완섬을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한다.

16세기까지 타이완섬에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들이 섬 전역에 널리 분포하여 거주하였으며, 한족 이주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인 17세기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타이완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타이완 이주도 시작되었다.

대두 왕국

대두 왕국(중국어 간체자: 大肚王国)은 평포족(平埔族) 중 파포라족(巴布拉族), 바브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則海族), 호아냐족(洪雅族)이 16세기 중엽(1540년대)에 세운 과족군집왕국(跨族群準王國)으로 모든 부락의 대표로써 대두번왕(大肚番王)을 선출했다. 이 부족연맹의 국가는 청나라 옹정제까지 이어가다 1732년에 사라지게 된다.

네덜란드 시대

명나라와 정나라 설립자 정성공

162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먼저 펑후제도에 다다르게 되었다. 펑후를 중심으로 교역을 넓혀보려던 네덜란드를 명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펑후전쟁(澎湖之戰)으로 명나라는 네덜란드를 펑후에서 내쫓았다. 네덜란드는 펑후와 마주보고 있던 타이완 본섬의 안핑(安平)지역(현재 타이난, 臺南市)에 정착해 젤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 안핑구바오)와 소규모 거주지를 세웠다. 1626년에는 스페인이 현재의 지룽과 단수이 지역에 정착해 식민정부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내란으로 인해 스페인이 타이완 북부 지역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며 네덜란드가 스페인이 점령한 북부지역까지 진출, 젤란디아 요새를 식민수도로 결정하였다.

1642년부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타이완을 관할하며 중국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및 약재를 수입한 후 일본 및 네덜란드로 재수출하였다. 1644년 만주족이 명나라를 침입하여 중국 대륙이 혼란스럽자 푸젠성 남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중국인에 대한 중과세 정책에 항의한 중국 이주민들이 1652년 봉기하였고,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1662년 청나라 지배에 항거하며 명나라 재건을 도모하던 정성공(鄭成功)이 등장하면서 네덜란드 잔류세력을 물리치고 안핑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정씨왕국

정씨왕국은 1662년(남명 건평)에 정성공(鄭成功)의 군대가 타이완에서 네덜란드의 군대를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명나라는 1644년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였지만, 명나라 황제의 유신(遺臣)들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를 내걸고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정성공은 그 지도자 중 하나였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타이완 해협에서 무역업과 해적 행위로 큰 돈을 번 해상 모험가였는데,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사를 하면서 일본의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정성공이다.

정성공은 청나라 군대와 9개월 간의 싸움 끝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타이완으로 쫓기게 되었다. 1661년 정성공은 타이완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여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섬의 모든 권리 이양을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성공은 타이완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자: 东都, 정체자: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온 푸젠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어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662년 6월에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자, 그의 아들 정경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64년에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올랐고, 정성공의 반청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 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성의 일부 지역을 공격하여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타이완 통치는 21년 만인 1683년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타이완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 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강희대만여도(康熙台湾舆图)는 청조시대 대만의 산천·교통·군사·사회 등 생활을 묘사하였다.

청조시대

청나라는 대만을 복속시킨 후 푸젠성의 관할 아래 두었다. 청나라의 병합 이후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섬으로 이주하는 한족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대부분은 타이완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푸젠성 남부와 광둥성 동부 출신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만 이민을 금지했으나, 실효성이 없어 1732년에 이민 제한을 해제하였다. 현재 대만 주민의 약 85%를 차지하는 한족계 본성인(本省人)은 대부분 이 시기에 타이완에 이주한 한족의 후손들로, 오늘날에도 해당 지역의 방언인 민남어 또는 객가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

청조 시대의 이민 초기에는 여성의 도항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남녀비가 치우쳐 한족과 평포족 간의 통혼이 빈번히 이루어졌고 청의 관청에서는 조직적으로 대만 원주민에게 성씨나 가계도, 족보 등을 주어 한화(漢化)를 권장함으로써, 섬의 평지에 한족들과 섞여 살던 평포족은 한족과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과는 달리 평포족은 대만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타이완은 주로 농업과 무역으로 발전했으며, 1858년 청나라가 제2차 아편 전쟁에 패하여 톈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타이완에서도 타이난의 안핑 항(安平港)과 지룽 항(基隆港)이 개항되었다.

1874년에 일본 제국에 의해 모란사 사건이 일어났고, 청불 전쟁(1884 - 1885)시기에는 프랑스 함대가 타이완 북부의 공략을 꾀했다. 이에 청나라는 타이완 방위를 위해 류명전(劉銘傳)을 파견했다. 종래 푸젠성에 속하고 있던 타이완이 푸젠타이완 성으로 승격되어 1887년부터 시행[4]에 들어갔는데, 류명전은 초대 타이완 순무(臺灣巡撫, 지방장관)가 되어 타이완 전역의 실효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충분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고 타이완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통치 시대

1911년 대만이 포함된 일본 지도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섬과 펑후 제도는 일제에 할양되었다. 일제는 타이완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50년간 타이완 주민들을 식민지배했다.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 타이완에 대하여 일본 본토와는 다른 식민지법을 적용하다가 1922년부터는 일본과 같은 법제도를 적용하면서 동화정책을 폈다. 이러한 동화정책은 법제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식민지의 "일본화"를 꾀하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식민지배과정에서 타이완의 철도나 도로 등 기반시설과 교육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타이완 개발은 궁극적으로는 타이완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고 타이완을 류큐(오키나와현)와 같이 일본의 완전한 일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정책의 영향과 잔재는 오늘날에도 타이완에 많이 남아 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일제는 총력전 체제화를 진행하였고 타이완 총독부 역시 이른바 황민화 정책에 따른 동화정책을 강화하여 타이완 내에서 중국어 신문을 금지하고 타이완사람들에 대하여 일본어 사용과 창씨 개명을 강요했다. 또 일제 육군과 해군에 대한 지원병 제도를 도입해 타이완 주민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식민 지배 초기에 타이완 주민들은 일본 제국에 맞서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895년에는 타이완 민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등 식민지배 초기에는 일제에 대한 조직적 무장투쟁에 나섰으나, 1915년 타파니 사건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항일 무장투쟁은 약화되었다. 1930년에는 타이완섬 중부에서 원주민족인 타이야 족에 의한 항일 봉기 사건인 우셔 사건이 발생했다.

중화민국 시대

장제스(蔣介石)는 1925년부터 1975년 사망할 때까지 국민당의 지도자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대만을 연합국에 양도한 후 중국 국민당이 인수하게 되었다. 타이완 사람들은 초기에는 국민정부를 환영하였으나 이들의 부패와 고압적인 태도에 점차 불만이 많아지게 되었다. 1947년 2월 28일 담배를 팔던 노파가 담배를 강제 몰수한 공무원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하게 되면서 이 쌓였던 불만들이 분출하게 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이 불만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1949년 국민당은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8년 해제될 때까지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전쟁에 대비한 '비상체제'에 도입하게 되었다.

1960년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경제부흥정책을 실시하여 연간 평균 9.3%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하게 되면서 타이완은 UN에서 나가게 되었으며, 연이어 미국과 일본과 단교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장제스가 사망하였고, 뒤를 이은 장징궈(蔣經國) 총통은 계엄령을 철폐하고 타이완을 개방하는 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장징궈 총통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 경제정책 및 민주화 정책은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이어받았다. 1989년 복수정당을 허용하였고, 1992년 최초 입법원 직선, 1994년 타이완 타이베이 시장 직선, 1996년 최초의 총통 직선 등 민주화를 진정시켰다. 2000년에는 타이완 최초로 야당 민주진보당의 주석인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당선됨으로써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천 총통은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 쪽에 한 나라씩 존재한다는 '일변일국(一邊一國)' 정책을 발표하며 탈중국화와 타이완 의식의 국가화 작업을 실시해나갔다. 그러다 2008년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당선되면서 다시 중국과의 교류를 진전시켰다. 갑작스러운 중국과의 교류 확대는 타이완 청년들과 사회운동의 반발을 샀고, 이는 2014년 3월 해바라기 운동(太陽花 學生運動)으로 이어졌다. 11월의 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하며 2016년 다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주석의 총통 당선까지 연결되었다. 차이잉원 정부는 중국 의존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남아시아,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신남향정책'을 추진하며, 미국, 일본과의 관계도 개선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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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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