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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Japan)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일본 도쿄도 시부야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키타구

일본(日本, Japan)은 동아시아 끝에 있는 섬나라이다. 수도는 도쿄(東京, Tokyo)이다. 태평양에 있는 일본 열도의 네 개의 큰 섬(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과 이들 주변에 산재한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의 전체 면적은 37만 7973 km²이며, 한반도의 약 1.7배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국가가 되었고, 태평양전쟁 후 1947년 현재의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

개요[편집]

일본국(일본어: 日本国 니혼코쿠, にっぽんこく 닛폰코쿠), 약칭 일본(日本, 일본어: 日本 니혼, にっぽん 닛폰)은 동아시아의 일본 열도와 오세아니아의 북부 일대에 위치한 국가이다. 국호인 일본국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성립되었다.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인 일본은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의 섬이 일본 전체 면적의 97%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섬들이 화산 활동을 통해 생겨났다.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600만 명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많다. 도쿄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간토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메트로폴리탄이며, 이 지역에만 4,350만 명(일본 전체 인구의 34.5%)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제정·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법적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하는 천황과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참의원(상원)·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가 공존하고 있다. 현재의 천황은 나루히토, 국회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당이며 내각총리대신은 기시다 후미오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강대국이다. 일본 엔은 세계 무역결제통화 비중의 15~20%를 차지하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아 많은 사람들이 자산 피난처로써 선택하기도 하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이다. 이 때문에 엔화는 미국 달러, 유로와 함께 세계 3대 통화로 꼽힌다. 일본의 GDP는 미국과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이며, PPP는 세계 4위, 금 보유고 세계 8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3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1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은 세계 2위이다. 비서양권 국가 중 유일한 G7 회원국이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주도국, 아시아개발은행(ADB) 설립국이며, 유네스코 예산 분담률 1위, UN 분담률 3위로서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이다.

상징[편집]

국호[편집]

일본의 국호는 일본어 명칭으로 닛폰(일본어: にっぽん) 또는 니혼(일본어: にほん)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한자를 읽는 방식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한자로는 동일하게 일본(日本)이라 표기한다. 보통 닛폰이 공식적인 표기로 많이 쓰이며 주로 엔화와 우표, 그 외에 많은 공공 기관의 명칭이나 체육 행사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니혼은 현대에 이르러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자신을 니혼진(日本人, にほんじん)이라고 호칭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일본어는 니혼고(日本語, にほんご)라고 부른다.

닛폰과 니혼 양쪽 모두 '태양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명칭은 중국 수나라 시대 이후부터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니혼과 닛폰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까지 일본은 주변국으로부터 멸시적인 의미에서 왜(倭) 또는 왜국(倭國, 왜나라)이라 불려왔고 히미코 여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동해희씨국'(東海姬氏國), '동해여국'(東海女國), '여자국'(女子國)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으며 '부상'(扶桑, 일본어: 扶桑 후소)이라고도 하였다. 주로 서양권에서 부르는 명칭인 '저팬', '재팬'(영어: Japan)은 중국 원나라 시대에 동아시아를 순례했던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고대 중국어의 한 갈래인 우어(吳語, 오어)로 일본을 뜻하는 단어인 '지팡구'(Gipangu)라는 단어로 일본을 소개하였고 이것이 수세기 동안 여러 변형을 거친 데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자퐁(Japon)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JP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국(日本国)을 공식 명칭으로 쓰지만, 국제적으로는 약칭인 일본(Japan)을 공식 명칭으로 쓴다. 특별히 대일본제국(Empire of Japan) 시대의 정체와 구별하여 일본'국(国)'이라 표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State of Japan'으로 쓰는 용례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국의 국호는 별도의 법령으로 이 나라를 '일본국'이라고 칭하도록 지정한 것이 아니며, 일본국 헌법에서 일본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가 모두 일본국이라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 중국(People's Republic of China) 등에 비하면 일본의 공식 국호는 매우 간략하다(Japan). 이는 일본이 국가로서 갖는 정체성의 모호함과 무관하지 않은데, 정식 국호에 군주제라는 정치 체제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이는 군주의 정체성(신, 황제 등)을 명백히 정의하지 않는 것이 일본의 정책이므로 굳이 공식 국호에 정치 체제를 나타내는 단어를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 추측된다.

국기[편집]

일장기(日章旗, にっしょうき)

일본의 국기는 일장기(日章旗, にっしょうき, 닛쇼키)이다. 백색 바탕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인 '일장(日章)'을 그려 넣은 깃발이다. 공식적으로는 1870년에 국기로 제정됐지만 깃발 자체의 역사는 훨씬 오래됐다.

일장기의 홍색은 존애(尊愛)와 활력, 백색은 신성(神聖)과 순결을 의미한다.

법적으로는 '일장기'가 공식 명칭이나, 전통적으로 이를 부르던 이름인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가 더 널리 쓰인다. 다만, 일장기는 '기(旗, 깃발)'를 의미하며 '히노마루'라고 칭할 때에는 일장 도안 자체를 이른다. 일본어 '히노마루'는 일본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일본', '일본국', 또는 '일본에서 유래한 무언가'를 은유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국가[편집]

일본의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 きみがよ)이다. 본래의 가사는 고대 일본에서 기원한 단가로, 1880년 독일의 작곡가인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기존의 단가 가사를 기반으로 작곡이 이루어져 1888년부터 일본 제국 시기 국가로 쓰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일본의 공식적인 국가가 아니었으나, 사실상의 국가 역할을 해왔으며, 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에 의해 법적인 국가로 재지정되었다.

노래가 총 11마디로 굉장히 짧다. 또 국가치곤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운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중국 등 반일 감정이 강한 국가에서는 장송곡 같다며 비하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아악의 형태를 기본으로 만들다 보니 일본적인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궁내청 아악부가 아악으로 기미가요를 연주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전통 선율을 국가에 담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국장[편집]

일본 국장

국화문장(菊花紋章, 기쿠카몬쇼) 또는 십육변팔중표국문(十六弁八重表菊紋)은 일본 황실의 가몬으로, '국화문(菊花紋 기쿠카몬' 이나 '국문(菊紋 기쿠몬)'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바 천황이 국화를 좋아해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로 사용했다. 이후 고후카쿠사 천황, 가메야마 천황, 고우다 천황이 이를 자신들의 징표로 계속 사용해 황실의 문장으로 정착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문장이 된 것은 1869년(메이지 2년)의 태정관포령에 의해서이다. 이때, 천황의 문장으로서 "십육변팔중표국문"이, 천황 이외의 황족의 문장으로서 십사변일중이국문(十四弁一重裏菊紋)이 각각 정해졌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황족인 아닌 자가 국화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그 후 완화되었다.

야마토 전함(戰艦大和) 등 일본 제국 해군 군함의 뱃머리에 붙여져 있었으며, 현재도 일본 여권의 표지에 이 문장이 그려져 있다.

지리[편집]

한반도 이남과 일본 열도를 유럽으로 옮겼을 경우의 크기 비교

일본의 영토는 동아시아 동쪽에 길이 3,000여km에 활 모양으로 걸쳐져 있는 일본 열도와 오키나와를 포함한다. 일본의 최동단은 도쿄도 미나미토리섬, 서단은 오키나와현 요나구니섬, 남단은 도쿄도 오키노토리섬, 북단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홋카이도의 벤텐섬이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 연변(沿邊)에 있으며 전체 국토 면적은 37만 7,975㎢로 이는 지구 표면적의 0.07%, 세계 육지 면적의 0.3%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보다 3.7배나 크고 한반도보다도 1.7배나 더 넓으며 영국(24만 3,981㎢)이나 이탈리아(30만 1,340㎢), 독일(35만 7,022㎢)보다도 국토 면적이 더 넓다. 일본을 그대로 미국 동부 연안에 가져다 놓으면 플로리다를 제외한 동부의 모든 주들을 다 덮으며, 유럽에 있는 나라였다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 면적 순으로 7위이다.

4개 섬 가운데 혼슈만 해도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크며, 동시에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제3의 섬인 규슈 섬은 경상도 지역보다 약간 크고, 제4의 섬인 시코쿠 섬은 경상북도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고, 강원도보다 약간 크다. 또 홋카이도는 섬 하나가 대한민국 실효지배 면적의 80% 정도 크기이다.

다만 일본 열도의 대부분은 한반도와 비슷하게 산지라 가용면적은 작은 편으로, 경작 가능한 평야지대의 면적을 따지면 위에 열거한 나라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좁다. 이 때문에 일본도 한국처럼 가용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체감 인구밀도가 꽤나 높은 편이다.

일본 열도는 남북으로 길이가 아주 긴 편으로, 본토로만 따지면 직선 거리 기준 서남단 규슈섬 가고시마현 이부스키(指宿)에서 북동단 홋카이도섬 네무로(根室)까지 1,900km인데, 이는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일본령 전체로 보면, 류큐 열도 최서단이자 일본 최서단인 요나구니(与那国)에서 일본 최동단인 미나미토리 섬(南鳥島)까지의 직선거리는 더 길어 3,140km로 인천국제공항에서 사이판까지의 직선 거리와 맞먹는다.

넓은 국토만큼이나 일본의 자연환경은 아주 다양하고 그 스펙트럼이 넓다. ​국토가 한국의 우하부를 길게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어 일본의 최동단, 최서단, 최남단, 최북단은 모두 남북한의 최 동서남북단보다도 더 극점에 위치해 있다. 일본의 최북단인 벤텐 섬(북위 45도)과 최서단인 요나구니 섬(동경 122도)은 각각 남북한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북위 43도)과 최서단인 비단 섬(신도, 동경 124도)보다도 더 먼 곳에 있다. 이렇게나 다양한 지리적 요건을 갖춘 덕분에 일본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던지 정글이 존재한다던지 등등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운 자연 환경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여행과 관광에서 꽤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하는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은 한대 기후에서의 스키나 유빙 관광, 그리고 아열대 기후에서의 산호초 스쿠버다이빙이 모두 가능한 나라이다.

지형[편집]

유라시아판, 태평양판, 그리고 필리핀판의 판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과 화산활동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본에는 60여 개의 활화산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 세계 활화산의 10% 정도다.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인해 오이타현 벳푸 시의 온천이나 가나가와현 하코네 정의 온천과 같은 대규모 온천이 전국 곳곳에 분포한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후지산은 해발고도 3,776m의 돔 모양 화산이다. 18세기에 마지막으로 분화하였으며 정상에는 칼데라호가 발달해 있다.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에는 데시오(天塩), 키타미(北見), 히다카(日高) 등 해발고도 1,000m급의 높은 산들이 위치한다.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에는 일본알프스(日本アルプス)라고 불리는 높은 산지가 많다. 히다(飛騨) 산맥, 기소(木曽) 산맥, 아카이시(赤石) 산맥을 따라 해발고도 3,000m급의 산들이 즐비하다. 시코쿠에는 시코쿠(四国) 산지가 위치하며, 가장 높은 봉은 해발고도 1,982m의 이시즈치산(石鎚山)이다. 규슈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인 운젠산이 위치한다.

일본은 다양한 해안 지형을 가지고 있다. 지바현의 쿠주쿠리(九十九里) 해안에는 대규모 사빈이 위치하고, 홋카이도 최북단에는 면적 15.2km²의 사로마(サロマ) 석호가 있다. 만 형태의 지형으로는 도쿄도 인근의 도쿄만, 혼슈와 홋카이도 인근의 무쓰만(陸奥湾), 나고야의 이세만(伊勢湾), 오사카부 인근의 오사카만 등이 있다.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상 깊은 계곡을 따라 빠르게 흐르는 짧은 하천이 다수 존재한다. 다만 호쿠리쿠 지방 니가타현, 나가노현을 지나 군마에 이르는 시나노강(信濃川)이나 간토 지방의 군마, 사이타마, 지바, 도쿄도 등을 흐르는 도네강(利根川)은 유로가 300km 이상이다. 유로 길이 200km 이상의 이시카리강(石狩川), 데시오강(天塩川), 키타카미강(北上川) 등도 있다.

토지이용[편집]

일본열도는 태평양 북서부의 융기대(隆起帶)의 정상부가 해면 위에 드러난 것으로, 산림 지대의 비율이 약 76%로 높다.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는 치수 사업, 토지 개선 사업, 간척 사업 등으로 농지를 확보해왔다. 특히 홋카이도 지역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국내 최대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도시 지역 면적은 국토의 5.4%로, 5.5%의 비중인 한국과 유사한 수준이다.

기후[편집]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겨울철 기온 비교. 전체적으로 한국보다는 겨울 기온이 상대적으로 따뜻하나 간토 이북은 한국의 중북부 지방과 위도가 엇비슷하거나 더 높은 관계로 생각보다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으며, 같은 위도의 중동, 남유럽 지역보다는 겨울에 확실히 춥다. 일례로 삿포로는 프랑스 남부인 마르세유와 같은 위도대에 속하고, 도쿄의 경우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와 같은 위도에 있다.

일본은 산지가 많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데,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가장 깊은 내륙은 군마현으로 도쿄 만으로부터 약 120km 떨어져 있다. 길쭉한 나라인만큼 기후분포는 다양하다. 다만 온도의 스펙트럼은 위도에 비해 고도가 높아서 추운 개마고원이 있는 관계로 한국과 비슷비슷한 편.

일본 겨울의 최대의 적은 바람과 난방으로, 안그래도 간척지라 주위에 산이 얼마 없는 도쿄의 경우 바람은 미친듯이 부는데 그걸 막아줄 산이 없다보니 칼바람이 직격으로 들어온다. 또한 난방의 경우 대한민국처럼 바닥을 덥힌다기 보다는 그냥 히터나 라디에이터로 퉁치기 때문에 정말 춥다.

일본에서는 자국, 특히 혼슈의 기후를 3가지로 세분하고 있다.

  • 동해측 기후 - 니가타 등 호쿠리쿠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기후. 여름에는 푄현상의 영향으로 매우 덥다. 반면 겨울에는 쿠로시오 해류의 지류인 쓰시마 난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폭설이 잦다. 연 강수량이 2000mm~3000mm 수준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 중앙 고지 기후 - 나가노, 야마나시 등에서 볼 수 있는 기후, 고원지대 한복판이라 여름이 비교적 서늘하다. 겨울 강수량이 낮지만, 태평양 쪽보다는 눈이 많이 온다.
  • 태평양측 기후 - 도쿄 수도권과 오사카에서 볼 수 있는 기후. 여름에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매우 덥고, 겨울에는 온난건조하다. 이 기후대 중 일부 지역은 온대하우기후를 띤다. 예외로 도호쿠 지역은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으로 여름이 서늘하다.

한국, 중국과 달리 가뭄이나 황사, 미세먼지 문제는 드물다.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포함한 전 국토에 난류의 영향이 지대하여 1년 내내 강수량과 습도가 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처럼 우산을 항상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물을 끓이거나 정수기로 거르지 않고 수도꼭지에서 나온 그대로 마시는 가정집이 많다.

하지만 중위도 대륙 동안에 위치하여 유럽과 달리 연교차는 큰 편인데다 습도까지 합쳐져서 대도시의 여름 폭염 문제는 한국, 중국과 별 차이 없거나 더 심하다.

일반적으로 온대기후가 많지만 홋카이도와 도호쿠 일부 지역은 냉대기후에 속하며, 반대로 오키나와현과 오가사와라 제도는 아열대기후와 열대기후에 걸쳐져 있다.

2018년 7월 23일 기준 일본 사이타마현 쿠마가야시의 기온이 112년 만에 41.1˚C로 치솟았으며, 2020년 8월 17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서도 같은 기온을 기록했다.

재해 및 환경문제[편집]

20세기 일본의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오염 물질들이 무분별하게 배출되었고, 이 때문에 이른바 '일본 4대 공해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석유 콤비나트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황가스와 이산화질소의 영향으로 유행한 '욧카이치 천식', 도야마 현 미쯔이 금속광업소가 방류한 카드뮴으로 인한 '이타이이타이병',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지역 신일본질소회사의 수은 방류로 인한 수은 중독의 '미나마타병', 나가타현에서 '미나마타병'과 유사한 원인에 의해 발생하여 제2의 미나마타병으로 꼽히는 '니이가타 미나마타병'이 대표적이다.

이들 병의 발생으로 인해 산업체에 의한 환경오염이 일본의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1970년대부터 대중적 인식 증가, 환경 관련 정부 기관 설립, 기업의 개선 노력 등으로 문제가 점차 해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4대 공해병의 영향은 존재한다.

유류 파동도 일본 정부가 부족한 천연 자원 상황에 걸맞은 에너지 절약을 장려하도록 하는 데 큰 요인이 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크게 부상하는 환경 문제로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대기 오염, 쓰레기와 화학 물질의 관리, 물의 부영양화, 기후 변화, 그리고 국제적인 환경 보존 움직임에 대한 협력 등이 손꼽히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환경 친화적인 기술 발달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혼다토요타의 하이브리드 및 전기자동차는 높은 연비와 적은 환경오염 물질의 유출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은 친환경적인 생체 연료, 하이브리드 체계, 효율적인 경량 소재 등의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일본은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중대한 성과를 창출하였는데, 탄소 배출을 세계적으로 줄이기 위해 이루어진 1997년의 교토 환경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활약하였으며 교토 의정서의 서명에 앞장서 조약 하에 기후 변화의 억제를 위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에 대해 책임져왔다. 대표적인 예로 고이즈미 내각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쿨 워크 캠페인에 따라, 관공서 내에서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여 에너지 사용량 감소를 도모한 바가 있다. 또, 산업체들은 강제적인 법령 하에 온실 가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갖은 노력의 결과로, 일본은 2005년 측정된 환경 지속 가능성 지수에서 30위를 차지하였으며, 2012년에는 환경성과지수(EPI)에서 23위를 기록했다.

지진

2011년에 발생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 대지진)은 15,897명이 사망하고 2,534명이 실종된 대규모 자연재해로 리히터 규모 진도 7에 달하였다. 진원은 후쿠시마현 앞바다였지만, 일본 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에 영향을 미쳤다. 해당 지진으로 인해 미야기현, 이와테현, 후쿠시마현 등지에서 최대 0.84m에 달하는 지반 침하가 발생하였고, 최고 40m 높이의 쓰나미가 육지를 덮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진원과 가까운 해안에 위치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가 쓰나미의 영향으로 피해를 입어 결국 노심이 용융되었다. 이 때문에 세슘(137Cs, 134Cs), 스트론튬(90Sr), 코발트(60Co), 트리튬(3H)을 포함한 방사선 오염물질이 주변 토양과 해양 환경에 악영향을 주었다.

역사[편집]

607년에 건립된 호류지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역사는 보통 일본 열도의 역사와 동일시되지만 엄밀히 '일본'이라는 국호는 8세기 전반에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와 일본 열도의 역사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다.

일본의 역사의 시대 구분은 고고학과 역사학 구분으로 나뉜다. 고고학에서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선토기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 그리고 역사 시대로 일반적으로 나누는 한편, 역사학 상에서 시대 구분은 일반적으로 고대(아스카 시대 및 그 이전 ~ 헤이안 시대), 중세(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 근세(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근현대(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이다.

선사시대[편집]

혼슈, 시코쿠, 큐슈에서 문자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역사'에 앞선 시대, 즉 선사시대는 이와주쿠 시대(岩宿, 구석기), 조몬(繩文), 야요이(彌生), 고훈 문화의 순으로 변천하였다. 각각의 시대를 이와주쿠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 역사에서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는 일본의 신석기시대를 조몬 토기의 보급에서 연유하여 조몬(繩文) 시대라고 부른다. 수렵과 채집을 기초로 하며 움막을 지었으며, 큰 마을을 조성할 때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둥근 범위에 집을 세웠다. 조몬인은 나무 열매 등을 채집하고 사슴이나 멧돼지, 토끼 등을 사냥하는 한편 물고기를 잡는 등 식료 채집으로 살았다. 전 세계적으로 식료 채집에서 식료 생산으로의 전환은 6천~1만년 전에 실현되어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돌입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식료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조몬 문화가 계속되다가 2천여 년 전에 농경문화가 성립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의 야요이 시대는 금속기를 사용하며 도검(刀劍) 등의 무기와 제기(祭器)를 제작하였다. 이 때는 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 전환되어 용수로나 둑 두렁을 완비한 논농사와 조 등을 경작하는 밭농사가 시작되었다. 야요이 문화에는 벼농사 외에도 청동·철·유리·베·명주 등 중국과 한반도에서 많은 제품과 기술 지식 사상이 전해졌다. 농경의 신을 위한 제사가 수행되었으며, 청동과 철이 동시에 출현하여 칼 종류가 석기에서 철기도 바뀌었다. 돼지와 닭을 사육하였으며, 생산력이 급증함에 따라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고, 농경사회가 성숙하여 마을에서 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싸움도 벌어졌다.

본토가 야요이 문화에 들어선 뒤에 홋카이도에서는 조몬 문화와 마찬가지의 석기를 이용하는 식료채집 문화가 계속되었고, 본토의 야요이 문화와 비교해 이를 속(續)조몬문화라고 한다. 이때 어로나 수렵 채집 뿐 아니라 수수·피·메밀을 재배하였다. 오키나와의 속조몬문화에서는 8~10세기에 벼·보리·조·콩을 재배하였고, 13~14세기 본격적인 농경사회에 들어갔다.

야요이 마을에서는 유력자들도 고향마을의 집단묘지에 묻혔지만, 이러한 마을을 몇 개 합친 '국'의 '왕'이나 그게 가까운 사람들은, 집단묘지와는 다른 묘역이나 흙을 쌓아올린 분구묘에 묻혔다. 4세기부터 6세기 말까지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 고분이 등장하는 시대를 야요이 시대에서 이어지는 고훈시대(古墳時代)라고 부른다.

고대[편집]

일본의 고대사회는 4~5세기경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지배하는 통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야마토 정권은 율령제도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갖추었고, 대륙으로부터 율령제와 불교뿐 아니라 철제무기와 같은 선진문물을 수입하며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소국의 수장들은 조정 내부에서 귀족계급을 형성하여 성(姓:가문의 세습적인 칭호)을 수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의 삼국과 인적 물적 교류를 하며 중국에 견수사와 견당사를 파견해 적극적으로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4세기 말엽에 백제에서 한자와 유교가 전래되고, 6세기 중엽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국내의 제반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었다. 쇼토쿠태자의 통치 시기에 불교가 융성하고 호류지 5층 목탑 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아스카 시대는 일본 역사의 시대구분 중 넓게는 아스카(飛鳥)에 궁궐과 도시가 세워진 592년부터 710년까지의 118년을 가리키며, 이전에는 고훈시대와 합쳐 야마토시대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고훈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7세기 말에서 9세기 말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는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고, 덴무(天武)천왕은 중앙집권적 율령체제를 확립한다.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의 원칙으로 농민은 일정한 토지를 배당받아 조(租)·용(庸)·조(調)의 세(稅)를 부담하였다. 당(唐)의 문화를 흡수한 조정은 710년 나라(奈良)에 도읍 헤이조경(平城京)을 세웠다. 8세기에는 두 권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편찬되었다. 794년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쿄토)으로 천도하기까지의 약 80년간을 나라시대라고 부른다. 나라시대에 일본은 백제와 활발히 교류했고, 백제 멸망 후 그 유민이 다수 일본으로 건너가 한학, 유학, 불교 및 회화, 불상조각, 사찰건축 등의 문화예술, 관개, 축조기술 등을 전하였다.

794년 간무왕(桓武王)이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도쿄)로 천도한 때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막부(幕府)를 개설한 1185년까지를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781년에 즉위한 간무왕은 도읍을 헤이안으로 옮기고 새 궁궐을 창건하고 도시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중앙권력 세력이 점차 약화되며, 후지와라 가문이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절대적인 외척으로 군림한다. 천황이 미성년자일때는 섭정(攝政), 성년이 된 후에는 관백(關白)이라는 이름의 후견인으로 정치를 좌우하였다. 귀족과 사원이 세력을 강화하면서 대규모 사유지 장원(莊園)을 확대하였다. 궁정을 중심으로 문화가 융성하여 귀족들 사이에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났고, 한자를 응용한 일본식 문자인 가나(假名)가 유행하였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가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10세기부터 12세기에는 중앙집권적 율령국가의 지배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지방관이 관리하는 영지들이 중앙귀족이나 지방의 호족, 사원 등의 지배를 받는 장원으로 포섭되었다. 농민이나 호족들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하였고 '재지(在地)무사'들은 서로 연계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미나모토(源)일족과 다이라(平)일족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였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시(平氏) 일족을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를 개설함으로써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중세시대[편집]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고, 스스로 최고통치자이 쇼군(將軍)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에 충성을 맹세한 부하들을 군사와 경찰권을 가진 슈고(守護)와 치안 및 세금을 담당하는 지토(地頭)로 삼아 각지에 파견하였다. 1221년 천황 측과 막부 측이 정면충돌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막부가 승리하자, 막부의 통치권이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3세기 말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몽골족의 원(元)나라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을 감행하였다. '신풍(가미카제)'이라고 불린 태풍의 도움으로 원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통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였고, 막부 반대 세력을 규합한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에 의해 1333년 막부는 붕괴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이후 고다이고 왕은 관료국가의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무사 출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막부 타도의 성과를 독점하려는 천황에 실망하고 무사를 규합하였다. 그는 새로운 천황을 세우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고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 남쪽 요시노로 탈출해 또 하나의 조정을 세웠고, 남과 북에 각각 조정이 존재한 '난보쿠초 시대(남북조시대)'는 14세기 말까지 약 60년에 걸쳐 이어졌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난보쿠초(남북조)를 통일시켰으며 로쿠온지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막부가 파견한 지방관이 현지에서 이른바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는 독자적인 영주로 변신하고, 8대 쇼군 요시마사(義政)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닌의 난이 10년 이상 계속되면서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중앙권력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지역을 지배하던 당시의 실력자를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라고 부르며, 이들이 활약한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의 약 150년간의 혼란기를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근세[편집]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누르고 에도 막부를 건설하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 말기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속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등장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을 위해 기존의 악습과 적폐를 파괴하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였다. 히데요시는 통일을 완성하고 새로운 지배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이에야스는 이를 계승해 새로운 통일정권의 정치와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안정화하다.

오다 노부나가는 효율적으로 화승총 부대를 운용하고, 성 아랫마을인 조카마치에 무사를 상주시키는 상비군 체제를 마련하는 등 탁월한 군사전략을 발휘하고, 1573년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1582년 교토 혼노지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상인과 직인, 그리고 무사를 조카마치에 거주하게 하고, 농민소유의 무기를 회수하는 도수령(刀狩)을 내려 무사와 농민을 분리하는 등 봉건적 토지소유제 확립과 신분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1590년에 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93년, 1597∼98년의 두 차례의 조선침공에 실패하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江戶:현재의 도쿄도)에서 묵묵히 세력을 키운 끝에,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패권을 장악하였다. 1603년 초대 쇼군으로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 일명 에도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로부터 1867년 11월 조정에 대한 정권을 반환한 대정봉환 까지의 약 260년 동안을 에도 시대(江戶時代)라고 한다.

도쿠가와는 막부의 쇼군으로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타 다이묘들을 압도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봉건제도의 강화를 도모하여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막번 체제(幕藩體制)를 확립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확립하였다. 전국에는 다이묘가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지방 영지인 250여 개의 번이 존재하였다. 막부는 그리스도교를 엄금하고 쇄국을 단행하였다. 250개 번 사이에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무가제법도, 즉 다이묘를 포함한 무사들이 지켜야 할 내용을 규정한 법을 만들었다. 또한 각 번들의 다이묘들이 1년 단위로 자신의 번과 에도를 번갈아 거주하도록 하는 참근교대제를 통해 각 번의 권력 자체를 감시한다. 천황과 조정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서양 각국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전개된 19세기, 미국은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개국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흑선을 몰고 온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굴하여, 일미화친조약과 일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다른 열강과도 유사한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이에 여러 번에서 막부의 개항에 반발하였고, 개항 과정에서 천황의 재가를 받지 않은 것을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격렬한 내분 항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사쓰마번과 조슈번 등의 하급무사들을 중심으로 외세 배격 운동인 존왕양이운동이 발발하였다. 정권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막부는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하고, 이로써 에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근대[편집]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년~1912년)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을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후, 조정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신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라고 정하였다. 과거의 신분제 대신 호적법을 제정하는 등 봉건제를 폐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교육과 징병, 세금제도를 정비하며 부국강병 및 문명개화를 추진하였다. 단발령, 우편과 화폐제도 정비, 철도 부설, 태양력 채용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토 히로부미 주도로 1889년 제국헌법이 제정된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과정을 말하며, 메이지(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간주한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10년 조선 강제병합하였으며, 서양과의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고,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 천황제국가를 확립하고 탈아입구, 즉 뒤처진 아시아에서 탈피해 구미열강의 일원이 되자는 노선에 따라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 지배의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경제는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며 세계 열강과 어깨를 겨루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일본의 경제 지표는 곤두박질하였고, 물가가 폭등해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며, 1923년에는 관동대진재의 발생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27년 일본 금융공황, 1929 세계 대공황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대륙침략을 꾀하는 군국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한편 그런 동안 1925년 보통선거법 제정이나 라디오 방송의 시작, 정당 정치의 진전, 신문과 잡지 등의 대중매체의 확산, 중산층의 소비가 증가하였다. 당시 정치ㆍ사회ㆍ문화 등 각 방면에 나타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향의 움직임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다이쇼大正(1912~1926)라고 불기기도 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1945년 9월 2일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웠고,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침략 행위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제정하여 정당과 의회가 해산되고 사상과 언론뿐 아니라 생활에 대한 통제도 한층 강화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해외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남아시아로 침략을 확장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고,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일본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전투와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에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은 NHK라디오 방송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현대[편집]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했고, 1947년 상징천황제와 전쟁포기, 봉건제 폐지의 내용을 담은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한국의 6·25전쟁에 의한 특수 경기로 경제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1952년의 대일강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였다. 1964년 도쿄에서 개최된 제18회 올림픽경기대회는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이었으며, 일본이 전후사회에서 부흥하였음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의 고도경제성장 기간 동안 세탁기·냉장고·흑백TV가 '현대판 3종 신기'라고 불리며 소비사회를 이끌었다. 1972년까지 아마미 제도, 오키나와현의 영토권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부동산과 주가가 크게 부풀려지는 버블경제를 경험하였다.

1989년 히로이토(裕仁) 천황의 사망으로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였고, 연호는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平成)로 바뀌었다. 한편 거품경제 붕괴와 함께 1992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하고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에 빠졌다. 한편 1988년 리크루트스캔들이나 1992년 도쿄사가와규빈(佐川急便) 사건 등으로 정치 불신이 극에 달해, 일본자유민주당은 1993년 중의원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고, 야당연립정부인 호소카와(細川)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1955년 11월부터 1993년 8월까지 38년 가까이 지속된 자민당 단독정권, 이른바 '55년 체제'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연립정권시대가 개막되었다. 정치개혁의 중심과제는 정치부패 방지와 정권교체를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이었으나, 정치개혁 관련 4개 법안 성립 후 호소카와 내각은 급속히 구심점을 잃었다. 1994년 6월에는 자민당, 사회당, 신당사키가케 등의 연립정부가 수립되었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다. 종전 50년이었던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하는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1995년 1월 17일 진도 7.2의 한신·아와지대지진이 발생하였다. 한신대지진은 사망자 6437명, 부상 4만 3792명, 피난소 생활 30만명 이상, 주택피해 약 64만동, 이재민 30만명 이상, 피해총액 약10조엔으로 관동대진재 이래 사상 최대의 지진 피해를 기록하였다. 지진 직후 도로·철도·전기·수도·가스·전화 등 라이프라인이 단절돼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혀 기능하지 못하였다. 한신고속도로는 10여 곳이 붕괴되었고, 산요신칸센도 끊겼다. 인공섬인 포트아일랜드와 롯코아일랜드(고베시 히가시나다구에 있는 580ha규모의 인공섬)는 지반 액상화로 크게 침하하였다. 고베시 나가타 구 등 목조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화재로 인한 피해가 집중되었다.

일본 사회는 한신대지진에 이어 옴진리교 사건으로 큰 혼란을 겪었고, 다시 자민당이 집권하며 1996년 1월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2001년 4월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郞)는 '구조개혁없이 경기회복 없다'는 슬로건으로 도로관련 4개 공단, 석유공단, 주택금융공고, 우정(郵政) 분야 3개 사업 둥 민영화를 포함해 '성역없는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구조개혁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고이즈미 내각은 약 80%의 경이적인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제88대, 제89대 총리를 연임하며 규제 개혁을 이끌었으나, 복지부문 축소와 양극화 심화의 문제를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2009년에는 민주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하토야마 유키오가 93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하토야마는 '메이지 유신 이래 관저주도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주도로 바꾼다.'라고 선언하며 시민주도 정치로의 전환을 정권의 축으로 내걸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발생한 일본 관측 사상 최대인 리히터 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사망자는 1만9689명이며, 행방불명자는 2563명이다. 피난소 생활자수는 46만 8699명, 가설주택수는 5만 3316동이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이바라키현에서 지진 후 2년 동안 11만명의 인구가 줄었다.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현 오쿠마마치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에서 지진과 지진해일로 인해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며, 인류 역사상 2번째 7등급 원자력 사고이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2012년12월 26일 자유민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취임하며 관저주도 정치 속에 아베노믹스를 이끌었다. 아베 총리는 모리모토학원, 가케학원 등의 의혹 속에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도쿄올림픽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7년 8개월 일본 최장수 총리로 사임하였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에 이어 2021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100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정치[편집]

일본은 입헌군주제로, 천황은 국가의 상징일 뿐 아무런 권한이 없다. 2019년 나루히토 천황이 즉위했다. 일본의 정치 체제는 1946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기초하여 구성되어 있다. 일본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의회제)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통치체제는 의원내각제로 2012년 이후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이 이끄는 자유민주당과 공명당 연립정부가 집권하다가 아베의 지병이었던 위염이 악화되어 사퇴했고 2020년 9월에 스가 요시히데가 제99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집권하게 되었고, 그 후 지지율이 하락하자 1년만에 사임, 2021년 10월에 기시다 후미오가 제10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천황제[편집]

제126대 천황(금상천황) 나루히토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은 천황을 신앙적 존재로 두면서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그러나 1867년 에도막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면서 막부 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이 선포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발표된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国憲法)', 이른바 메이지헌법은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규정하고, 막강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문무관 임면 및 육해군 통수, 외국과의 조약 체결과 전쟁, 강화 등의 거의 모든 권한이 천황에 집중되었고, 해산권도 주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 평화헌법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 상징천황제를 공표하였다. 전후 일본헌법 1장은 천황에 대한 규정이며,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지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그리고 제4조에는 "(천황이) 국사에 관한 행위를 행하지만,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천황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는 일본 천황의 조상신으로 여겨지며, 역사적·문화적으로 일본 천황이 한 핏줄이라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은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황의 재임에 따르는 원호는 일본에서 서력만큼 일반적으로 널리 쓰인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연호는 메이지(明治)기 1868~1912년, 다이쇼(大正)기 1912~1926년, 쇼와(昭和)기 1926~1989년, 헤이세이(平成)기 1989~2019년이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2019년 5월 1일에 126대 천황으로 즉위한 나루히토 천황이며, 연호는 '레이와(令和)'이다.

입법부[편집]

일본 국회의사당
일본 국회의사당

국회는 '국권의 최고기관'으로 규정되어 입법기관이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으로 구성된다. 중의원은 하원,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하며, 주권자인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다. 양원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각각 사무국과 법제국이 있다.

국회는 총리지명권, 중의원의 내각 신임 또는 불신임의 의결권 등을 가진다. 그리고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으로서 모든 법률안을 심의·의결하는 권한을 가진다. 의안의 제출권은 내각(총리)·의원 양자가 가지나 예산안 제출권은 내각만이 가진다. 또 조약의 승인도 국회의 권한에 속한다. 3권분립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회는 국정조사권, 재판관의 탄핵재판권을 가지나, 반대로 내각의 중의원 해산권, 최고재판소의 법령 위헌심사권에 의해 견제되고 있다. 예산안 심의·총리지명·조약비준, 총리대신의 지명, 내각불신임 등에 있어 중의원의 의결이 참의원보다 우선한다. 중의원은 해산이 있으며, 중의원은 의원수 480명에 임기 4년이며, 참의원은 의원수 247명에 임기 6년이다.

1955년에 일본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쳐져 일본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이 창당되었고, 이후 자민당은 지속적으로 여당 자리를 지켜오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 함께 이른바 '55년 체제'를 구축하였다. 1993년에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연립 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당 우위 정당제가 처음으로 붕괴하였다.

2021년 10월 31일에 치루어진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전체 456석 중 261석을 차지하고 공명당이 32석을 차지하여 자민당 공명당 연립여당의 의석수는 총 293석으로 집계되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96석을 얻었고, 극우 성향인 일본유신회가 41석을 확보해 공명당을 제치고 제3당으로 약진하였다.

행정부[편집]

행정권은 내각·지방 공공 단체·행정기관이 담당한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이하 국무대신으로 조직되어 행정권의 행사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진다. 내각은 행정 사무 이외에 법률 집행, 외교 관계의 처리, 조약 체결, 예산 작성, 정령(政令) 지정 등의 업무를 부담한다. 내각총리대신은 국회가 국회의원 중에서 지명하고, 일본 천황이 임명한다.

한국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인 반면 일본은 국회의원들 중에서 선출된 제1여당의 대표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한국 대통령은 5년간 1번의 임기를 갖는 단임제지만, 일본은 의원내각제로서 총리의 임기가 헌법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 1955년부터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당칙’에는 총재의 임기는 3년이고 3회에 걸쳐 재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최대 9년이 총재의 임기가 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약 7년 8개월(2012.12.~2020.9.)의 일본에서 가장 오랜 기간 총리직을 맡았다. 현재의 내각총리대신은 100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이다.

사법부[편집]

헌법 제76조에 따라 모든 사법권은 최고재판소 및 법률에 의거한 하급재판소가 보유한다. 모든 재판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직권을 행사하며, 헌법과 법률에만 구속된다.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최고재판소 장관과 14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장관은 내각의 지명에 따라 천황이 임명하고, 임명 후 최초로 실시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심사에 부쳐지며, 그로부터 매 10년 경과시 최초 중의원 총선거 때 다시 국민심사에 회부된다. 14명의 재판관은 내각이 임명한다. 일본의 하급재판소는 제2심인 고등재판소와 제1심인 지방·가정·간이 재판소로 구성된다. 하급재판소의 재판관은 최고재판소가 지명하고 내각이 임명하며, 임기는 10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정당과 선거[편집]

국회의원, 도도부현 및 시정촌의 각 수장과 의회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만 20세 이상의 남녀 전원에게 선거권을 주는 보통 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다. 피선거권은 참의원 의원 및 도도부현 지사는 만 30세, 그 외에는 만 25세 이상인 사람에게 주어진다. 보통 양원 의원과 도도부현 지사 및 의회 의원들은 특정한 정당의 당원 또는 그 정당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시정촌의 수장과 의회의원들은 무소속이거나 지역 소규모 정당 소속인 경우가 많다.

한편 일본의 주요 정당은 오랫동안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55년 체제 이후 2009년까지, 2012년부터 총리대신을 배출한 자유민주당과 현재 연립내각을 함께 구성 중인 공명당이고,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이다.

외교[편집]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하여 1952년 4월 28일에 주권이 회복되었고, 이 때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일본의 외교는 대미의존과 경제 중심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일안전보장조약은 일본은 미국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평화 헌법으로 인한 안보의 공백을 미일 동맹이 보완해온 것이 전후의 역사이며, 군사비 지출을 줄이면서 경제 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1955년에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자유주의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공업국가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가입으로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UN 중심주의,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는 대국민적인 안보투쟁에도 불구하고 1960년의 미일안보조약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수교하였다. 1971년 중국의 UN 가입을 계기로 국제정치는 다극화 시대로 이행하였고, 1972년의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아시아에는 새로운 외교정세가 진전되었다. 일본은 역시 같은 해 9월에 총리의 중국방문으로 중일간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1974년에는 일본·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정기항공로가 개설되고, 1978년 10월에는 중공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1980년 5월에 총리 화궈펑(華國鋒)이 방일(訪日)하는 등 양국관계의 급속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초 걸프전쟁을 계기로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국제분쟁 해결에 참여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정에 공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급속히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1992년 6월 UN평화유지활동(PKO)법을 제정하여 패전 후 처음으로 자위대 해외파병의 길을 터놓았다. 이 법안에 입각하여 캄보디아, 모잠비크, 자이레 등에 자위대가 파견되었다. 또한 2001년 10월에는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마련하여 미군에 대한 후방지원 형태로 자위대를 인도양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G8, G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 가맹국이며, 서방7개국 정상회담 G7에 참여하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이다. 현재 전 세계 195개국에 일본대사관이 있으며, 157개국이 일본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41개 국제기구가 일본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2012년 취임한 아베 내각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추구하는 한편, 외교안보정책의 포괄적 기본 지침인 국가안보전략의 채택과 그 제도적 기반으로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발족시켰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과 국내정치 변동이라는 국내외적 상황 속에서 미일동맹을 재편하고, 국내적으로는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하며, 중국의 부상에 대해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며,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지구적 차원의 협력을 추구하는 다차원적인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한일관계[편집]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고대부터 각종 문화의 전파와 무역을 비롯한 많은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백제는 고대 일본에 중국 문물을 많이 전파하였다. 고려 시대 후반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서는 쓰시마섬과 규슈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倭寇)가 각종 약탈을 일삼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 시대 중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중세와 근세기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 파견으로 다시 한일 교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 등장한 일본 제국이 1910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병합한 뒤 1945년까지 35년 동안 폭악한 식민 통치를 행하고 현대에도 일본의 여러 우익 인사들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도발을 주창하면서 양국의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본에서도 반한감정을 가진 일부 일본인들이 반한시위를 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일본에 의해 제기되는 독도 분쟁동해의 이름에 대한 분쟁 등의 이슈를 안고 있다. 2009년에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한 이후 이루어진 양국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다수가 더 악화된 한일 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 응답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위안부에 대한 역사왜곡으로 일본정부는 유엔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국방[편집]

일본은 패전 이후 연합군 점령 아래에 놓였고,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주도하의 전후 개혁 속에서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일본국헌법의 9조에는 전쟁을 포기하고, 교전권을 부인하며, 군사력을 보유하거나 유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에 일본의 전후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8일 맥아더 서한에 따라 7만 5천 명의 경찰예비대가 만들어졌다. 이는 한국 전선으로 주일미국이 급파된 데 따른 일본의 안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이 조직은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보안대'로 변경하였고, '자위대'로 다시 변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의 모든 운용비용은 방위성에서 나온다. 자위대는 "일본의 평화와 독립을 지키고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위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며, 필요에 따라 공공질서 유지에 임한다."고 되어 있다. 방위성(防衛省, Ministry of Defense)은 일본의 행정기관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격이다.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강화조약 조인과 동시에 체결한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제1조에는 "일본은 미군이 주둔하는 권리를 허여(허락)하며, 미국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주일미군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인한 안보 공백을 미일동맹으로 보완해왔다.

2019년 일본의 국방비는 486억달러로, 미국 6,846억달러, 중국 1,811억달러, 사우디아라비아 784억달러, 인구 605억달러, 영구 548억달러, 프랑스 523억달러에 이어 세계 7위 수준으로, 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0.94%의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은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에 따라 GDP의 1%범위에서 방위비를 억제해 왔으나, 최근 일본자유민주당 내에서 헌법개정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력 대폭 강화'의 움직임과 함께 방위비 증액 또한 거론되고 있다.

행정구역[편집]

일본의 행정구역은 도도부현으로 나뉜다.

현재 일본의 행정구역은 1도(都, 도쿄도), 1도(道, 홋카이도), 2부(府, 오사카부와 교토부), 43현(일본어: 県)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상으로 별도의 정령지정도시, 중핵시, 특별구로 정해진 경우를 뺀 모든 도시는 모두 도도부현에 속하며 더 작은 행정 단위인 시정촌(市町村 시초손)과 도시와 시골을 몇 개씩 묶어 정리한 군이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시정촌의 대대적인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도도부현을 도주(道州) 형태로 바꾸는 것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

도쿄도[편집]

도쿄의 야경

도쿄는 일본 혼슈 섬의 중앙, 간토 지방의 남서부에 있는 일본의 수도이다. 17세기 당시 에도라고 불리던 이 지역에 막부가 들어선 이후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서 발전해 왔고, 산업과 인구도 집중되어 있다. 전국에서 세 번째로 면적이 작은 지자체로서 2000m급 산에서 오가사와라 제도와 같은 아열대 섬들까지 다양한 지형 분포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 면적은 작지만 범위는 상당히 넓어 일본의 최동단과 최남단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인구는 약 1,300만 명으로 일본 총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구 과밀을 막기 위해 정부는 부도심의 개발과 더불어 도쿄 23구 이외 지역에 침상 도시를 건설하고 있다. 간다, 신주쿠, 아키하바라, 시부야, 긴자 등의 여러 거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소이며 도쿄역 인근의 니혼바시는 도쿄를 기준으로 한 거리 측정의 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쿄는 한 때 지나친 개발로 인해 규슈와 더불어 각종 환경 오염의 온상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스미다 강의 정화 등을 비롯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홋카이도[편집]

삿포로시에 있는 시계탑

혼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인 홋카이도는 일본의 최북단에 있으며 홋카이도라는 본 섬과 주변의 작은 섬들을 관할하고 있다.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넓으며 일본 전 면적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홋카이도는 냉대 기후에 속해 겨울에는 날씨가 아주 춥고 여름에는 예외적으로 장마 기간이 없다.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해 있다. 혼슈의 아오모리 현과는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세계 최장 해저 터널인 세이칸 해저 터널을 통해 해저 철도로 이어져 있다.

원래 홋카이도는 아이누 모시르(Ainu mosir)라고 불리며 고대 이후 수렵을 주로 하는 아이누 족이 사는 땅이었으며, 15세기 무렵부터 혼슈의 일본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해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한 개척사의 창설로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져 다수의 일본인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1869년에 오늘날의 홋카이도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눈 축제로 유명한 삿포로와 라벤더로 알려진 무로란이 잘 알려져 있고, 시레토코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후쿠 지방[편집]

눈 덮인 자오 산맥.

혼슈의 동북부에 있다. 남북으로 뻗어 있는 오우 산맥을 중심으로 태평양 쪽과 동해 쪽으로 세부 지역을 구분한다. 오우 산맥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산맥들이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주요 도시들이 태평양과 동해, 그리고 몇몇 분지 지역을 따라 편중되어 있는데, 동해 쪽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태평양 쪽은 자주 냉해나 지진 해일의 피해를 입는다.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겨울이 길고 여름은 서늘하고 짧다. 고대 이후 정치의 중심지였던 긴키 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개발이 지체되었다가, 에도 시대 이후에 벼농사 지역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현재도 공업보다는 농업이 활발한 지역으로, 개발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이 잘 보존되어 온천과 지역 축제 등 관광 자원이 풍부하다. 아오모리 현과 아키타 현에 걸쳐 있는 시라카미 산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되어 있으며 아오모리 현 지역산 사과가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간토 지방[편집]

요코하마시 일대의 저녁노을

혼슈 중앙에 있다. 이바라키 현, 도치기 현, 군마 현, 사이타마 현, 가나가와 현, 지바 현이 도쿄 도를 에워싼 형태로 수도인 도쿄가 그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1을 도맡고 있으며 도쿄와 접하고 있는 사이타마 현, 지바 현, 가나가와 현의 세 현은 출퇴근이 가능한 이른바 수도권으로서 다양한 철도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고, 베드타운들이 많다. 이 때문에 도쿄 도를 포함한 사이타마, 지바, 가나가와 세 현은 일본 전체 인구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중심부에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평야 지대인 간토 평야가 있고, 유역 면적이 가장 넓은 도네 강이 흐르고 있다. 주변부에는 산악이나 온천 등 자연 관광지가 많이 있는데 특히 도치기 현 닛코시의 동조궁 등을 비롯한 명승지와 신사, 사찰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주부 지방[편집]

일본 알프스의 히다 산맥.

혼슈의 중부에 있으며 그 때문에 주부 지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부 지방은 동해 쪽의 호쿠리쿠 지방과 태평양에 접한 도카이 지방, 중앙 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고신에쓰 지방으로 나뉘는데, 고신에쓰 지방과 중앙 고지에는 히다 산맥, 기소 산맥, 아카이시 산맥 등 해발 3000m급 산맥들이 존재한다. 주부 지방 남북에 걸쳐 있는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이 일본 열도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다. 일본 알프스 등 산악 관광지가 많고, 기후 현과 도야마 현의 시라카와고와 고카야마의 갓쇼즈쿠리 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간사이 지방[편집]

오사카 성 일대

혼슈의 중서부에 있는 지방으로 긴키 지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효고 현 및 교토 부의 북부는 동해와 접해 있고, 오사카 부와 효고 현 남부는 세토 내해, 미에 현과 와카야마 현은 태평양과 접해 있다. 고대 시대부터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지역으로 교토 부를 중심으로 비와호, 요도가와 강, 세토 내해 등을 이용한 수운이나 육운을 통해 전국으로의 교통망이 발달하였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가 많으며 특히 나라 현과 교토 부 등에서 메이지 시대 전까지 천황이 천년 이상 기거해 왔다. 1868년 천황이 도쿄에 옮겨 살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은 상실하였으나, 대신 오사카에서 고베에 이르는 지역이 대규모 공업 벨트로 발달하게 되었다. 나라 현에 소재한 아스카 촌 및 요시노 정 일대, 나라 시내의 문화재들과 호류지 주변의 불교 건축물들, 교토 부와 시가 현 일대의 고도(古都) 시대 사찰과 문화재, 나라 현과 와카야마 현, 미에 현 일대에 자리잡은 기이 산지의 나치 폭포, 영지와 참배길, 효고 현의 히메지 성이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다.

주고쿠 지방[편집]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는 원폭 돔

혼슈 서쪽 끝에 있는 지방이다. 중앙의 주고쿠 산지를 경계로 동해와 접한 지역은 산인 지방, 세토 내해에 접한 지역은 산요 지방으로 구분하며 두 지역은 기후와 풍토에 큰 차이가 있다. 산인 지방은 평야가 적고 해안선이 단순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데에 비해 산요 지방은 평야가 많고 복잡한 해안선과 많은 섬들이 있으며 연간을 통해 비가 많이 내린다. 세토 내해 쪽에는 석유 콤비나트 등 공업 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산인 지방의 돗토리 현 해안에는 일본에서는 극히 드문 모래 언덕인 돗토리 사구가 있다. 히로시마 현의 원폭 돔과 이쓰쿠시마 신사, 시마네 현의 이와미 은광은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시코쿠 지방[편집]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하는 세토 대교

혼슈의 서남쪽에 있는 시코쿠섬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섬 지대에 해당하는 지방이다. 동쪽은 기이 수도를 사이에 두고 긴키 지방, 북쪽은 세토 내해를 사이를 두고 주고쿠 지방 서쪽은 분고 수도를 사이에 두고 규슈와 맞닿아 있다. 험준한 산지가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기후는 북쪽과 남쪽이 크게 차이 나는데, 북쪽 지역은 비가 적어 여름에는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며 남쪽 지역은 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내리고 자주 태풍이 상륙한다. 오랫동안 혼슈섬과 세토 내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세토 대교를 비롯한 세 코스의 다리가 건설되어 도로와 철도로 혼슈와 연결되어 있다.

규슈와 오키나와 지방[편집]

후쿠오카 돔

일본의 최서남단에 있는 규슈와 오키나와를 포함하는 지방이다. 중국이나 한반도, 동남아시아와 가까워 고대부터 외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에도 시대 이후 쓰시마섬은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와 중국의 무역선이 많이 입항하였고, 히로시마와 더불어 원자 폭탄의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기타큐슈시에서 후쿠오카시에 걸쳐있는 기타큐슈 공업 지대에 중공업, 화학공업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국의 중심지로 중국과 교역 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에도 시대에 사쓰마 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메이지 시대의 류큐 처분과 더불어 사실상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972년 반환되었지만 현재까지 오키나와의 대부분은 주일 미군의 기지로 활용되고 있어 산업을 위한 용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관광을 주요 수입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에서 주일 미군 기지가 차지하는 용지를 다시 환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이 때문에 입장이 서로 다른 미국 및 현지 주민과 계속 마찰을 빚고 있다.

경제[편집]

일본은행의 전경

현재 일본은 명목 국내총생산(GDP) 세계 3위에 자리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경제대국이다. 또한 구매력 평가 세계 4위, 외환보유고 세계 2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1위, 무역 규모 세계 4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3위, IMF 투표권 세계 2위 국가이며, 대한민국과 함께 비서양권에서 둘 뿐인 대형 선진국이다. 비서양권 국가로서는 최초의 OECD 가입국이자 유일한 G7 회원국이기도 하다. 일본 엔은 미국 달러, 유로와 함께 세계 3대 통화로서 신뢰도 높은 안전 자산으로 취급받고 있다.

일본은 지진 등 지각활동이 활발한 탓에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상당한 규모의 은 보유국이었고, 덕분에 15세기 센고쿠 시대 때부터 포르투갈 등 일부 서양 국가들과 교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동전의 재료로 쓰이는 구리도 풍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17세기 이후 에도 막부 시기에는 화폐 경제를 통한 상업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쇄국을 유지하면서도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와 부분적으로나마 교류하면서 꾸준히 서양 세계와 접촉해왔다.

19세기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서구 열강들에게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처음엔 물가가 폭등하는 등 혼란을 겪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가 진척되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이후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려 개항 이후 처음으로 무역흑자국이 되는 데에 성공했으며, 질적으로도 중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다시 무역적자국으로 되돌아갔고, 설상가상으로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터지면서 일본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군부를 중심으로 전쟁을 통해 식민지를 확장하여 경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1931년 만주를 점령하면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군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일본은 1937년엔 중국 본토를 겨냥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엔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며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전선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광기는 1945년 일본이 미국에게 핵 두 방을 얻어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결국 끝이 났다.

전후 일본 열도는 미국에게 점령되었다. 미국은 일본군과 재벌을 해체하며 일본을 전쟁하지 않는 농업국가, 즉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려 했으나... 1950년 이웃 한반도에서 북한남한을 기습 남침하며 6.25 전쟁이 터졌고 이는 일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다.

미국이 드넓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병참기지로는 일본이 낙점되었고, 덕분에 일본은 한국에 군수물자를 신나게 수출하며 경제 재건에 성공하였다.

6.25 전쟁을 계기로 고도 성장을 시작한 일본은 무역 장벽, 기술·경영 혁신,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대 후반엔 아시아 제1의 경제대국 자리에 올랐고, 1969년엔 서독을 제치고 제1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두 차례의 오일 쇼크에도 불구하고 산업 구조를 성공적으로 개편하며 구미 선진국들을 상회하는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이러한 일본의 가파른 상승세에 긴장한 미국 등 구미 선진국들은 일본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는데, 1985년엔 일본의 수출경쟁력을 낮추기 위해 일본 엔의 가치를 절상하는 플라자 합의를 일본에 요구하였고 결국 일본이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 정부는 플라자 합의로 인한 수출경쟁력 약화를 상쇄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의 주식 및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거품경제가 시작되었다.

1987년 일본의 국민소득은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이듬해 1988년엔 무려 미국을 따라잡으며 국민소득 세계 4위에 올랐고, 소련을 추월하며 국내총생산 세계 2위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1년 일본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며 거품경제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엔 미국, 유럽도 불황이긴 마찬가지였고, 소련은 아예 체제가 무너져 버렸기에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와중에도 일본은 1995년까진 안정적인 경제성장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1995년 기준 일본 국내총생산은 미국의 71.1% 수준으로 미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 경제에 진짜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부터였다. 1997년 외환위기 등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일본 또한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에 소비세 인상까지 겹치며 일본 국민들의 소비 심리가 위축되어 내수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결국 1990년대부터 일본 경제는 길었던 고도 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잃어버린 n년, 즉 저성장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나마 2001년 집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 불황에서 벗어나나 싶었지만, 2008년 미국발 대침체의 영향이 일본에도 불어닥치자 또다시 주저앉으며 이듬해 중국에게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여기에 2011년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최악의 재앙이 연달아 터지면서 일본 경제는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했다. 아베 내각이 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해 무제한 양적완화를 필두로 한 아베노믹스를 시행하면서 일본 경제는 점차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본의 주가 지수인 닛케이 225는 아베 집권 전과 비교했을 때 2.1배 이상 상승하였고, 잃어버린 n년 돌입 이후 최고치인 24,000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국내총생산, 실업률 등 대부분 경제 지표들이 아베 내각 기간에 줄줄이 신기록을 경신했다.

아베 내각은 2020 도쿄 올림픽을 통해 올림픽 특수를 노림과 동시에 일본이 기나긴 불황에서 벗어났음을 세계에 과시하려 했으나,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올림픽이 1년 연기, 무관중으로 개최되며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현직 일본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는 일본의 임금 수준이 거의 30년째 정체되어 있다는 문제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세우고 있는데, 향후 일본 경제의 귀추가 주목된다.

2021년 기준 일본 기업 시가총액 1위 기업은 도요타자동차이며, 2위 기업은 소니그룹이다. 일본의 명목GDP의 산업별구성비의 추이를 살펴보면 2013년 서비스업이 19.9%, 제조업이 18.5%, 그 외 산업이 18.9%로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주요하다. 제조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식료품이다. 또한 국내생산액의 산업별 비율을 보면 제조업이 30.8%를 차지한다.

제조업[편집]

일본 시가총액 1위이자 폭스바겐 그룹과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다투는 기업이 토요타인 것에서 짐작가능하지만 자동차 산업이 독일과 경합하는 초강세이고, 이에 걸맞게 관계 후방산업들도 독일과 나란히 세계 최고를 달린다. 중국 업체들의 물량공세에 밀려 세계 최고 자리에서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고는 하는 철강산업도 실제로는 생산량 기준 세계 2~5위, 매출 기준으로는 세계 1~3위의 일본제철을 비롯해 실속있는 회사들이 여럿 존재하여 여전히 건재하다. 다만 국가별 생산량은 중국에 밀려서 2위가 되었고, 기업 별 생산량에서도 중국 업체들이 1~2위로 올라온 상황이다. 그러나 조선업은 1990년대 이래로 한국 기업들에게 시장을 잠식당하며 1위를 내준 이후, 2010년대에는 중국 기업들의 점유율 증가에 크게 규모가 줄었다.

일본의 전자산업은 1990년대까지 세계 일류였지만 그 후로 일반 소비자 대상 제품은 긴 침체기를 겪었고, 이후 일본 기업들은 산업의 중심을 B2B로 바꿔나갔다.[7] 아이디어 상품을 중심으로 하는 신생 벤처 기업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성 업체들의 가전이나 스마트폰 같은 경우 내수중심으로 시장 타겟이 축소됐고 생산라인은 대부분 해외 공장으로 오프쇼어링이 됐다. 카메라는 이 와중에도 선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본의 컨슈머 제품이다. 캐논, 니콘, 소니, 올림푸스, 파나소닉, 시그마같은 기업들이 유명하다. 스마트폰이 발전하면서 갈수록 카메라 시장이 축소되고 있지만 워낙 시장 지배력이 높은 데다가,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도 결국은 일본 회사들의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장의 수익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런 카메라 회사들이 기존의 광학, 필름, 센서 기술력을 살려서 영상 촬영 장비, 렌즈, 반도체 제조장비 및 재료, 화장품, 의료기기, 자율주행 자동차, 항공/우주 산업에도 진출하여 성과를 내고 있어서 지속적으로 유지 혹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일본 기업들은 필기구, 복사기, 스캐너, 프린터, 복합기, 그래픽 태블릿, 음향 관련 장비 등 학습용품과 사무용품 그리고 생산성 도구 시장에서도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의 B2B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공장자동화(FA)인데, 이는 일본이 오랜기간 정밀 제품들을 생산해온 제조강국이었기 때문에 이쪽 노하우를 한국, 중국은 잘 못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야는 미국, 독일과 경쟁한다. 미쓰비시전기나 오므론같은 곳이 유명하고 당연히 공장에 들어가는 산업용 로봇도 화낙이 업계 1위를 달리는 것을 비롯하여 일본 업체들이 전세계 점유율 70~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업용 센서 쪽도 키엔스 같은 곳을 중심으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세계의 10대 반도체기업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을 정도로 반도체 강국이었지만 2019년에는 이 6개 중에 도시바 하나만 남았다. 도시바도 분식회계 사건 이후로는 사정이 좋지 않다. 반면에 시스템 LSI나 센서시장 상황은 아까말한 산업용 수요도 있고, 일본이 강한 자동차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사정이 훨씬 나아서, 차량용 반도체와 같은 시스템LSI 쪽은 르네사스가 순위권 제조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고, 센서시장에서는 카메라 센서의 호황에 힘입어 소니가 1위를 달린다.

일본은 산업 포트폴리오의 다양화/고도화의 척도로 쓰이는 ECI(Economic Complexity Index, 경제 복잡성 지수)에서 1995년부터 줄곧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제조업에 있다. 전술하였듯 다양한 분야의 제조업에서 뚜렷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다. 더불어 유난히 일본이 1위를 독주할 수 있었던 것은 ECI의 계산 과정에서 척도로 쓰이는 산업별 복잡성 지수인 PCI(Product Complexity Index)에서 최상위권을 구성하는 광화학 필름, 공작기계 핵심 소재, 우주-항공장비 부품, 자율주행차, 로봇,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이는 광화학 소재를 일본이 거의 독점[8]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PCI는 단순히 제조기술의 복잡함만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며, 독점성이 높을수록 진입 장벽(생산 노하우 필요)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여 몇몇 품목의 경우 실제 제조기술의 난이도보다 개별 PCI가 높게 잡힐 수 있다는 한계점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금융업[편집]

  • 은행: 미쓰비시UFJ은행이 국내 1위, 세계 5위 규모 은행이고 중국 은행들을 빼면 세계 1위다. 미쓰비시는 대침체 때 휘청거린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를 인수했다. 과거 일본 최대 은행이었던 유초은행과 미쓰비시UFJ에는 뒤지지만 서로 피튀기는 2위싸움을 펼치는 미즈호 은행과 미쓰이스미토모은행도 세계 20위권 안에 들어가는 메가뱅크다.
  • 증권사, 투자은행: 노무라 증권이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노무라 증권은 2008년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의 사업 대부분을 인수했다.
  • 보험회사: 생명보험에서는 간포생명이 강세를 띠고 손해보험에서는 도쿄해상홀딩스가 강세를 띤다 그러나 재보험에서는 일본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미국 AIG나 영국 로이드와 계약을 하는게 대부분이다. 일본은 천재지변이 많아 보험사들 손해율이 높은 편이라 생명보험, 손해보험사는 큰데 재보험 업체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해 90년대 이후 메가뱅크의 탄생으로 본격적으로 일본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된것이 금융업이다.

버블붕괴로 큰 타격을 입었던 산업이지만 은행 합병을 통해 위기를 잘 극복했다. 또한 일본의 막대한 경상수지에 이바지 하고 있다. 다만 사모펀드 쪽은 전반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러나 소프트뱅크라는 벤처 캐피털계의 세계적인 큰 손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다.

일본은 세계 최대 규모의 연기금인 GPIF를 운영하고 있다. 총 자산은 2019년 3월 말 기준으로 162조 엔으로 우리나라 국민 연금 규모의 2배 이상이다. GPIF는 운용 자산의 1/4을 주식에 투자하는데 투자를 시작한 2001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660조원의 흑자를 내고 있다. 운용 금액이 원체 많다보니 분기 당 이익이나 손실이 조 단위를 우습게 넘긴다.

IT[편집]

IT 기반 기술이나 투자 금액에 비해 초고속 인터넷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대체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0년대부터 이뤄진 대규모 투자를 통해 개선이 이뤄지고 있으나, 한국이나 대만, 홍콩, 싱가포르 같은 여타 동아시아권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다소 떨어진다. PC 보급률의 경우 전체적으로 보면 수치상 한국, 미국과 큰 차이가 없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가구 PC 보급률은 일본 81.7%, 한국 80.6%, 미국 72%이다. OECD 통계에서 가장 최근 비교 가능한 년도인 2018년을 기준으로 하면 가구 PC 보급률은 일본 74%, 한국 72.4%이다. 다만 PC 보급률 자체는 낮지 않지만 그중 데스크톱 PC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은 편이고, 평균적인 사양도 한국이나 대만보다는 다소 낮은 편이다. 일본의 PC시장은 노트북 컴퓨터와 태블릿 PC가 주류를 잡고 있다. 또한 현금 없는 사회를 위한 인프라 보급률 및 사용률 또한 2010년대 후반 이후 크게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동아시아권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런 민간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뒤쳐지는 IT 접근성 및 사용률 그리고 인식 면에서는 마찬가지로 크게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독일과 강한 유사점을 보인다.

한국은 1989년 교육용컴퓨터, 1998년 국민PC 등 정부에 의한 PC 보급정책이 가동되면서 보급률을 크게 끌어올린 반면, 일본은 별다른 정책적 배려가 없는 상황에서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MS-DOS, Windows 등 국제 플랫폼의 보급이 지연되었다. 여기에 i-mode로 피처폰이 전 국민 IT를 책임지는 상황이 되어 PC는 더욱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었다. 의료체계를 전자화 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의료계가 고연령대인 것이 문제가 돼서 무산된 적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인터넷 인프라 커버리지가 한국보다 다소 떨어진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앞서 ISDN을 보급하는 등 앞선 면을 보여줬으나[12] 몇년 후 한국이 ADSL 방식으로 고속 인터넷을 보급하면서 역전당했고, 한동안 한국보다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는 평가를 얻었다. 인프라를 너무 일찍 갖춘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이후 단독주택 위주의 주거 환경을 활용한 FTTH 보급에 박차를 가했고,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인프라 여건이 크게 개선됐지만, 아직도 한국에 비하면 전국에 골고루 초고속급 유선 인터넷 망이 갖춰졌다 보긴 힘들다.

일본의 콘솔 기기 시장은 상당히 거대한 편이고, 일본 게임 업계가 콘솔 게임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나, 반대급부로 온라인 게임의 점유율이 전체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동아시아권 선진국들에 비해 평균 컴퓨터 사양이 높지 않은 편이다. 싱글플레이를 선호하는 일본인의 정서적 특징도 한몫했다. 다만 이런 콘솔 게임 선호 현상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라서, 미국, 유럽 연합, 영연방 선진국들에서도 콘솔 게임이 PC 온라인 게임에 비해 점유율이 높은 편이다. 주요 게이밍 시장 중 PC 게임이 콘솔 게임에 우위를 점한 지역은 한국, 중국, ASEAN 정도가 꼽힌다.

HTML5로 대표되는 신세대 국제 표준 규격이 일본에도 웹표준으로 자리잡기 이전까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일본 웹사이트들은 순수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간결한 UI가 많았다. 미려하고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는 기술을 적용하다가는 사양이 낮은 PC와 브라우저를 쓰는 다수의 이용자들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IT업계는 주로 기업이나 관공서를 상대로 사업을 해왔고 일반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서비스에 소홀했기 때문에 많이 보수적이었고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변화에 둔감했다. 컴퓨터 부품 대다수가 한국보다 비싸게 책정되어 수입된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이 스마트폰으로 개편되었던 시기에도 얼마간 독자규격의 피처폰 등이 팔리던 곳이 일본이다. 스마트폰 체제로 변환된 이후 상당히 많은 일본 기업이 자국 시장에서 스마트폰을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초기 애플 아이폰이 2년 가까이 날개 달린 것처럼 팔릴 때 대응을 못하여 스마트폰=아이폰이라는 일본 국민의 인식이 생겨 자국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본 내에서는 아이폰 점유율이 상당히 높다. 해외 시장에서는 중국 스마트폰 브랜드들의 범람 이후 전체 판매량의 50% 정도를 중국 업체들이 나눠 가지고, 25% 정도를 Apple이, 나머지 25% 정도를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시장 구도가 형성되면서 일본 기업 상당수가 스마트폰 제조에서 철수했거나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가전 분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고급~중급 가전 시장은 삼성LG 두 한국 기업들에게 내주었는데, 이후 저가 시장에서부터 하이얼 등 중국 기업들이 치고올라오면서 가전 산업 전반이 레드오션으로 바뀌며 생산 단가가 높고 두드러진 강점이 없던 일본 가전 기업들의 설 자리가 좁아졌다. 2010년대부터는 내수 시장 및 아이디어 시장을 제외하면 세계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이 가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아예 가전 사업에서 철수했던 지멘스, GE 등의 독일, 미국 기업들처럼 일본 가전 기업들도 소비자 가전에서 철수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규모 최소화 과정을 거쳤다. 즉, IT 시장에서 내수 시장 및 벤처 시장을 제외하면 B2C 시장 점유율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 대신 일본 기업들의 전통적 강점을 살려 필수 부품 설계, 제품 설계, 정밀 부품 제조, 소재, 제조설비, 품질관리 등 B2B 시장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일본의 국민 메신저는 소프트뱅크 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네이버(기업)의 자회사로 한국계 기업이었던 LINE이며 기존의 이메일 기반 메시지를 대체했고 금융, 통신 등의 분야에도 진출 중이다. 또한 구글, 아마존닷컴 등 미국 거대 인터넷 기업들의 영향력도 강하고 일본 제1의 포털인 야후 재팬의 검색결과도 얼마전부터 구글이 제공하고 있을 정도로 해외 서비스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이 금액 기준 세계 3~4위의 IT 시장이기에 자생적인 서비스들도 제법 존재하기는 하지만, 국제화 흐름을 잘 탔거나 특수 시장 공략으로 일본 내수 시장과 세계 곳곳에 충성 유저층을 확보해놓은 경우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시장에서 도태되는 중이다. 2000년대까지는 일본판 싸이월드로 불리던 mixi와 동영상 사이트인 니코니코가 유명했으나, 각각 트위터/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밀려 도태됐다. 현재에도 대표적으로 소프트뱅크 그룹이 소유한 야후재팬 및 여타 IT 서비스들 그리고 라쿠텐과 그 산하의 메신저 앱인 Viber, 리크루트 홀딩스 산하의 IT 서비스, 사이버에이전트, pixiv 등이 일본 내에서는 큰 규모를 이루고 있다. 또한 트렌드마이크로를 비롯해 IT 보안 서비스들도 존재한다. 특히 트렌드마이크로와 pixiv 등의 IT 서비스들은 국제화 흐름에 잘 올라타서 동아시아에서 혹은 국제적으로 제법 인지도와 사용자를 확보해놨다. 이 때문에 최근 일본의 산업과 사회 흐름을 보면 IT 분야에서만은 잘라파고스라는 말이 무색하다. 한국이 네이버나 카카오 등 내수 특화 자국 기업들이 중심을 차지하면서 갈라파고스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만 이쪽은 제1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이 상당히 예외적인 국가로 취급 받는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싱가포르 등 영연방 선진국들은 물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유럽 선진국들에서도 Google, Apple, Microsoft, 페이스북 산하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계 IT 기업들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자생적인 인터넷 서비스가 강한 지역은 러시아, 중국 같은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많다. 그나마도 폴란드, 체코 등 유럽연합에 들어간 국가들은 구사회주의권이어도 미국 기업 의존도가 높다. 물론 한국도 야후 코리아나 라이코스가 ADSL이 주류였던 시절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성공 사례처럼 무조건 일반화를 할 수는 없고, 201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 넷플릭스 열풍을 중심으로 점점 더 개방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있어서 딱잘라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대체적인 경향은 일본과 한국의 IT 업계 동향에 확실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추정 시가 총액이 1조 원을 넘는 비상장 기업을 가리키는 유니콘 기업이 적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이는 일본 국내 사업으로도 충분히 회사 유지가 가능하고, 굳이 해외에 진출한다면 주변국이자 일본과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많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 태국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일정 규모의 시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유럽 연합, 영국, 중국 등 다른 거대 시장에 진출하려는 의지가 적어서 유니콘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경우가 적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신흥 기업들이 증권시장에 상장하기 쉬운 일본 금융 시장의 구조적 특징과 상장 기업이 되는 것을 선호하는 일본 IT 업계의 문화적 특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신흥기업을 위한 도쿄증권거래소 마더스(Mothers, Market of the high-growth and emerging stocks)시장 진입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많은 수의 일본 내 신흥 IT 기업들이 상장을 통해 자본을 확보하고 있다. 즉, 회사 설립 이후 상대적으로 이른 기간 안에 상장을 하기 때문에 비상장 거대 기업인 유니콘 기업의 수가 적은 것이다.

반대로 일본을 대표하는 초대형 IT 대기업 소프트뱅크 그룹 등은 전 세계의 유니콘 기업에 투자하고 IPO에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덕분에 2020년 순이익이 50조 원을 기록하면서 애플아람코에 이어 세계 3위를 달성했다.

무역[편집]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면직물·생사(生絲)를 중심으로 한 섬유제품이 수출총액의 과반을 차지하고, 목화를 중심으로 한 섬유원료가 수입총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당시의 주요 무역상대국은 아시아 제국, 특히 중국이었고, 생사수출과 목화수입이 많은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전후에는 중화학공업의 현저한 발달로 해서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중화학공업의 현저한 발달로 해서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및 전자장비, 기계류, 광학장비, 철강 순으로 주종을 이루었다. 수입은 원유, 섬유류 기계류, 수산물, 반도체와 전자부품, LNG 순이다.

무역수지는 오랫동안 순조로이 흑자가 지속되어왔으나,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나 원유가격의 급등 등으로 해서 1980년에는 약 113억 달러의 입초(入超)를 기록하였으나 1992년에는 수출 3396억 달러, 수입 2330억 달러로 1070억 달러의 사상최고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1999년 이후 미국 및 아시아 경제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과 엔 약세에 따른 수입의 수요 증가로 인해 무역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주요수출국의 수출비중은 미국 22.9%, 중국 13.4%, 대한민국 7.8%, 타이완 7.3%, 홍콩 6.1% 순이다. 주요수입국의 수입비중은 중국 21%, 미국 12.7%, 사우디아라비아 5.5%, 아랍에미리트 4.9%, 대한민국 4.7%, 오스트레일리아 4.4%, 인도네시아 4% 순이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및 전자장비, 기계류, 광학장비, 철강 순으로 주종을 이루고, 섬유제품은 그 비중이 적어졌다. 2016년 기준 일본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 중국, 한국, 대만, 홍콩, 태국의 순이며, 주요 수입국은 중국, 미국, 호주, 한국, 대만, 독일 순이다.

일본의 무역액은 수출은 2007년에, 수입은 2008년에 최고액을 기록했다. 2009년에는 세계금융위기의 영향으로 무역이 크게 감소했고, 2011년 이래 동일본대지진, 유럽연합의 정부채무 문제로 인한 경기악화, 센가쿠열도 영유권문제로 인한 중일관계악화 등으로 수출이 다시 감소한다. 한편, 대지진후에 일시정지한 원자력발전을 대체하기 위한 화력발전용LNG(액화천연가스)를 중심으로 수입이 큰폭으로 증가해(2014년에는 최고액을 기록), 무역수지는 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무역액은 국내외의 경제동향이나 산업구조의 변화의 영향 속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1980년대 이후 일본 무역동향은 다음과 같다.

① 1980~1985년: 자동차나 일렉트로닉스 등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제품의 수출이 증가하고, 국내 호경기로 수입도 증가한 시기다.

② 1986~1987년: 플라자합의 이후 세계적인 엔고로 수출품의 외국통화 판매가격이 올라 수출산업이 부진해지고, 그에 따라 공업원료 사용량이 줄어 수출과 수입이 함께 위축되었다.

③ 1988년~1990년: 토지·부동산 등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거품경제의 호경기 속에서 수출과 수입도 증가하였다.

④ 1991년~1992년: 토지·부동산 등 가격 급락하고, 거품경제붕괴에 따른 불경기로 수출과 수입이 모두 감소하였다.

⑤ 1997~1999년: 아시아 외환위기 속에서 동아시아 수출이 감소하고, 국내 불황으로 수입도 줄어든 시기다.

⑥ 2002년~2007년: 엔화 약세로 수출이 대폭 증가하고, 국내 경기가 대폭 상승하고 수입도 대폭 증가한 시기. 73개월간 지속된 경기 회복 시기로 ‘이자나미 경기’라고 불린다.

⑦ 2009년: 2009년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한 글로벌 경제대불황으로 수출도, 수입도 부진하였다.

⑧ 2011년~2012년: 동일본대지진과 유럽연합의 정부채무 문제에 의한 경기악화, 태국의 대홍수에 의한 생산활동 침체, 센카쿠 열도 영유권문제로 인한 일중관계 악화 등으로 수출이 감소하였다. 대지진 후에 일시정지한 원자력 발전을 대체하는 화력발전용 LNG(액화천연가스)나 원유의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⑨ 2017년~2018년: 중국 경제의 성장 배경으로 수출이 증가하고 자원가격 상승으로 수입도 증가한 시기로, 2018년 무역 총액은 사상 최대인 164조엔을 기록하였다.

⑩ 2020년: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무역이 감소하면서 수출과 수입 모두 감소하였다. 2020년 수출은 전년대비 11% 감소한 68.4조엔, 수입은 전년대비 14%감소한 67.8조엔을 기록하였다.

교통[편집]

신칸센(新幹線)

일본은 철도의 발달이 현저하여 철도망의 밀도는 한국의 2배 가량이다. 신칸센(新幹線)은 일본의 고속철도체계이다. 일본 《전국 신칸센 철도 정비법》 제2조는 신칸센을 "주된 구간을 열차가 시속 200 km 이상의 고속도로 주행할 수 있는 간선 철도"로 정의하고 있다. 철도의 분할 민영화 전까지는 일본국유철도가 운영하였고, 현재는 JR 그룹 5개사가 운영하고 있다. 최초의 신칸센은 1964년 10월에 개통한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도쿄~신오사카, 552.6㎞이다. 고속열차 신칸센은 도쿄와 오사카 사이의 520㎞를 3시간 정도에 달린다. 산요(山陽)신칸센은 도쿄와 하카다를 잇는 노선이며, 열차 종류로는 노조미, 히카리, 코다마가 운행된다. 그 밖에도 규슈신칸센, 홋가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후쿠리쿠 신칸센, 야마가타 신칸센, 아키타 신칸센이 운행된다.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도로 건설이 전국에 고속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일본의 도로는 사도(私道)를 제외하면 지역주민과의 협의 하에 도로법에 따라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직접 관리한다. 일본의 도로망은 도시 및 거점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기능하는데, 2000년대 들어 도로망 건설에 따른 부채와 관리가 지자체의 문제가 되고 있다. 과소지역의 지역활성화를 위해 '관계인구(関係人口)'를 늘린다는 취지에서 최근 도로역이 활성화되고 있다. 일본 도시는 근대화 과정에서 철도역을 중심으로 근대적 상업지구가 형성되고 철도역 주변 지역은 가장 번화한 상점가이자 도시의 중추관리기능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도로역은 철도에 역이 있는 것처럼 도로에도 역을 만들자는 발상에서 시작되었고, 지방 도로역을 지역활성화의 거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일본 전역에 1160개소의 도로역이 분포하며, 도로역을 지방창생과 관광을 더욱 촉진하는 거점으로 육성하고 도로역을 중심으로 지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활력있는 지역을 디자인는 도로역 발전 방안도 공표되었다.

일본항공(주)(日本航空:JAL)을 주축으로 하는 항공교통은 도쿄의 국제공항으로는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 사용되어 왔으나, 국제·국내선 항공기의 폭주로 1978년에 지바현 나리타 시 신도쿄국제공항을 만들었다. 일본 전국 각지에 국제공항이 있으며 한국 여러 도시와 직항이 운행된다. 2019년도 공항별 여객수로 가장 많은 공항은 하네다(羽田)공항, 나리타국제공항, 오사카 시의 간사이국제공항, 후쿠오카시의 후쿠오카공항, 홋카이도 치토세시의 신치토세(新千歳)공항, 오키나와섬 나하시의 나하 공항의 순이다.

세토 대교(瀬戸大橋)는 일본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에 설치된 혼슈(本州) 지방과 시코쿠(四国) 지방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1978년에 착공하여 1988년에 개통되었이는 철도와 도로로 동시에 쓰이는 다리로서 세계에서 가장 긴 교량이다.

과학기술[편집]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 응용과학은 물론이고, 그것의 바탕이 되는 기초과학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내공이 탄탄한 국가이다. 단적인 예시로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수는 2021년 현재, 평화상 및 문학상 수상자 4명에 더해 무려 29명에 달한다. 이는 평화상 1회밖에 수상해보지 못한 한국과 비교하면 단연 압도적인 횟수이며, 아시아내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다. 21세기 이후로 한정할 경우 국가별 노벨상 수상자 수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이어 전세계 3위로, 세계 기준으로도 최상위권이다. 노벨상 외에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의 일본인 수상자도 3명,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도 8명이나 있는 등, 일본의 기초 과학 및 기술력의 내공 수준을 보여주는 여러 권위 있는 상의 수상 사례가 여러 존재한다. 이러한 일본이 가진 과학기술적 위상은 이공계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해온 일본 정부와 학계의 백여 년이 넘는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으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유지시켜주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일본이 근대 과학 기술을 접한 건 에도 시대부터이다. 18세기 경에 네덜란드로부터 근대 과학 연구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을 계기로 서양식 과학 연구를 배우는 '난학(蘭学)'이라는 학문이 발흥하여 일본사상 최초로 근대 과학 연구가 태동하였었다. 비록 난학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흥미로운 유행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에도 막부에 의해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일본인들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 면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과학 연구를 장려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일본 사회가 일찍이 근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고, 열강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인들은 이공계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은 편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로봇공학과 IT, 전자공학, 기계공학, 자동차 공학, 광학 관련 기술이 특히 우수하고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뛰어난 기술력 덕분에 관련 산업도 활발하고 국제적 경쟁력이 높은 편이다. 일본산 산업용 로봇과 기계, 전자기기들은 오래전부터 세계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해 왔으며, 내구성과 신뢰성 등이 전체적으로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일본산 제품은 품질이 높다는 인식을 세간에 심어주었다. 지금도 세계에는 일본제 부품이 없으면 돌아가지 못 할 정도로 일본산 기술에 의지하고 있는 산업들이 많으며, 이는 한일무역분쟁으로 촉발된 기술의 국산화를 부르짖는 여론이 들끓고 있는 대한민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본은 정식 군사 집단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기술집약적 방위산업이 기반이 되어 군사 기술력도 매우 우수한 편이다. 일본의 뛰어난 군사기술력을 보여주는 예시로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 일본은 항공모함을 자체적으로 설계·생산해낼 수 있는 세계의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 세계 최초로 탄소섬유 복합재를 기체에 적용시킨 미쓰비시 F-2의 사례가 유명하다. F-2 개발 당시에는 탄소섬유 복합재를 대량생산 및 일체 성형 하는 기술이 없었는데 이를 일본이 최초로 해내 군사 분야에 접목시킨 것이다. 이 탄소섬유 복합재를 적용한 F-2는 기존의 전투기들보다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좋고, 수리와 정비성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뛰어나니 거의 혁신에 가까운 기술적 진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탐소섬유 복합재 기술은 그 군사기술 강국인 미국이 공식적으로 기술이전 요청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앞서나간 기술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이 개발한 이 기술을 이용해서 보잉 787 드림라이너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 일본 제국의 A6M 또는 '제로센'이라고 불리는 전투기는 개발 당시로써는 매우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전투기였다. 일본 해군으로부터 최대속도 고도 4,000m에서 270노트(약 500km/h) 이상, 상승력 고도 3,000m까지 3분 30초 이내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발주받았지만, 결국 호리코시 지로를 필두로한 설계팀이 개발해내는데 성공하였다. 비록 여러 문제점이 있었고 2차 대전 후기에 들어서는 구형 기체로 전락하였으나, 전쟁 초기 보여준 활약 덕분에 일본 제국의 전투기라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기체이다. 당시 제로센 개발팀은 훗날 신칸센을 제작하는 데에 투입되어 다시 한 번 일본 공업 기술력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게 된다.
  • 탄도미사일의 요격이 가능하도록 하는 BMD 기능을 탑재한 이지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오직 미국과 일본밖에 없다.
  • 또한 이지스 어쇼어에 장착되는 SPY-7 레이더를 개발하는 데에 있어 일본산 기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 1987년에는 일본이 소련에 잠수함의 소음 감축 기술을 몰래 이전해준 일이 발각된 도시바-콩스버그 스캔들이라는 사건도 있었다. 잠수함의 소음을 제거하는 건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탓에 이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가 몇 없다보니 발생할 수 있었던 일이다.

항공우주 관련 기술력도 한 수 하는 나라인데, 이미 일본은 1970년에 자력으로 인공위성 오스미(おおすみ)호를 발사하여 스페이스 클럽에 세계에서 4번째로 들어갔으며, 이는 중국보다도 이른 것이었다. 덕분에 일본이 운용 중인 발사체의 기술은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부문들에서는 중국보다도 더 뛰어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러시아 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일본도 인공위성과 탐사선 로켓 발사 경험이 생각보다 상당히 많으며, 그 때문에 발사체 관련 기술 노하우가 꽤나 노련하고 인류 문명의 우주 개척 역사에 일본이 남긴 발자취도 상당한 편이다. 일본의 항공우주 기술력 중에서 단연 가장 돋보이는 업적 중 하나로, 세계 최초로 소행성 표면의 물질을 채취해 온 탐사선인 하야부사 1호가 있다. 소행성의 물질을 채취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이냐면, 간단히 말해서 소행성이 태양계의 탄생, 그리고 나아가서 지구 생명체 발현의 원리에 대한 물음을 해결해줄 수 있는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천체이기 때문이다. 즉, 태양계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의 비밀을 풀 열쇠를 일본이 세계 최초로 손에 넣었다는 뜻이므로 값지고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가 없다. 소행성 표면 물질은 우주선(宇宙線) 등에 의해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1호의 후속 프로젝트로 발사된 하야부사 2호는 한 술 더 떠서 소행성에 다시 가서 소행성 표면에 인공 크레이터를 만들고 소행성의 지하 물질의 시료를 채취해왔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건 마치 지상에서 총을 쏴서 총알이 화성까지 도달하게 만들고, 그것을 다시 지구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기술이라 특히 더 대단한 일이다. 그 외에도 세계 최초의 태양광 추진 범선인 이카로스, 세계 최초의 온실가스 모니터링 지구관측 위성 이부키호 등도 다 일본에서 발사한 것들이며, 이들은 모두 오직 일본산 기술로만 제작된 것들이다.

또한 대부분의 항공기를 독자개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이다. 상술했듯 대전기부터 다양한 군용기를 생산해왔고, 엔진, 레이더, 항법장치, 전자장비같은 초고난도 기술이 집약된 부품도 자체적으로 개발생산이 가능하다. 일본의 항공기 부품 및 완제기 제작사는 미쓰비시 중공업, IHI, 신메이와, 스바루 주식회사, 가와사키 중공업 등 다양하며, 이미 이 기업들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기업들이다. 주로 전투기는 미쓰비시 중공업, 엔진은 IHI, 수송기, 초계기, 헬기 등은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제작된다. 일본은 군용기를 도입할 때는 대부분 라이센스 생산을 거친다. 면허생산으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항공기 제조기술에 크게 신경쓰고 있다. 현용 항공자위대의 전투기 모두 자국산 내지 면허생산 기체이다.

민항기 분야에도 일본은 1960년대에 일찍이 YS-11을 개발하면서 민항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수 십년 후인 2010년대 미쓰비시 스페이스젯을 만들어냈다. 90인승 리저널 제트여객기인 이 기종은 타 항공사보다 연비를 20%개선하고 소음도 40%로 낮추었지만 수 차례 납품이 지연되었고, 급기야 코로나19의 여파로 항공산업계에 크나 큰 타격을 입으면서 수주전에 큰 난황이 들이닥쳤다. 결국 끝내 미쓰비시 스페이스젯의 개발을 취소했다고 한다. 성능 자체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시장성을 잘못 타고난 것이였다.

군용기 부문에선 아시아 정상급이다. 당장 중국은 카피품이 대부분이며, 항공기 개발 진입이 늦은 한국은 이제 막 걸음마를 땐 상황이다. 비록 완전한 스텔스 전투기는 아니지만 X-2라는 기술실증기를 내놓아 일본의 항공기술력을 증명해낸 바 있다. 타국에서 전투기 등을 개발하고자 하면 주요 부품들을 미국 등 다른 기술선진국들에게 수입해오는 반면 일본은 모든 장비를 독자적으로 타국의 도움없이 만들어낼수 있는 손에 꼽히는 나라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세계 최초로 113번 원소를 발견하여 자국의 이름을 따서 '니호늄'이라고 명명하게 되는 영예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니호늄은 아시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발견한 원소이며, 일본이 기초과학이 얼마나 발달한 나라인지 다시 한 번 증명해주는 사례가 되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이 발표한 국가별 과학기술논문 발표수에선 일본은 2016년 발표에선 세계 3위, 2018년 발표에선 세계 6위였고, 일본 문부과학성의 과학기술백서에 의하면 국가별 논문수에서 04-06년도 2위에서 14-16년도 4위로 국가별 논문 상위 10% 피인용지수 자료에서 일본은 2003~5년 세계 4위에서 2013~15년 세계 9위였으며 2015년 기준 세계 논문 수 점유율은 5% 가량으로 세계 5위에 해당한다. 총무성의 과학기술지표 2018에 의하면 '정수카운트법'을 기준으로 한 논문량은 세계 5위, '분수카운트법'을 기준으로 한 논문량은 세계 4위이며 연구 관여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대신 지식창출공헌도가 높은 편이다. 반면 상위 1% 논문수는 세계 9위로 논문량에 비해 낮아 임팩트가 큰 논문에 대한 관여도는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 네이처 인덱스 논문 기여도 국가 순위에서는 미-중-독-영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전년도에 비해 경쟁력이 3.0% 가량 하락했다고 하나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에 비하면 하락 폭은 덜하며 대한민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한 편.

일본이 기초과학 강국이라 할 수준임은 확실하나 몇 가지 상황으로 보았을 때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상당히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에 일본의 독립행정법인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인 이화학연구소나 여러 상위권의 국립대학은 기업(산업계)들과의 협력을 늘리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즉, 최근의 노벨상 수상에만 주목하여 취하지 말고, 현재의 연구환경 악화를 직시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노벨상이 대개 오래 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케이스가 많으므로, 최근 일본인 수상자가 많았던 것은 버블경제 시절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과 그에 따른 빵빵한 연구 인프라의 영향 덕택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국공립대학은 2004년에 법인화를 거치고나서,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운영비 교부금이 감소하는 추세이다.[95] 2002년경부터 일본의 논문 국제경쟁력은 저하하기 시작하여, 2013년에는 인구 당 논문수가 세계 35위로, 선진국에서는 최저수준을 기록했고, 과학저널 네이처는 2017년 3월 23일호에서 일본의 과학력이 저하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의 학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1,#2 이를 두고 일본의 교수들은 취업을 위해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당연시되고 있으나, 정작 박사까지 진학하는 인구 수가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2018년, 일본정부는 과학기술백서를 통해 일본의 과학기술에 대해서 '기반적인 힘이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고 자인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4년 부터 일본 정부는 슈퍼글로벌대학 사업을 시행하며 대학들의 글로벌화, 진출 등을 지원하고 있으며,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혼조 다스쿠 교토대학 교수는 일본 정부에 연구비 지원을 늘려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예산 853억원 가량을 증액하고 추가예산까지 더해 100억엔이 넘는 예산을 지원할 계획에 있는 등, 일본 정부도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2021년, 발표된 네이처 인덱스에 의하면 전년 대비 포인트가 4.2%나 상승하며 발표 이후 처음으로 포인트 상승 전환에 성공했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을 일본인(日本人)이라고 한다. 일본에는 소수민족인 류큐인과 아이누족 또한 존재하며 재일 한국-조선인이나 화교의 인구도 많다. 이들과 구분되는 일본 주류 민족은 야마토 민족(大和民族)이다.

일본의 인구는 2022년 기준 약 1억 2,421만 명으로 세계 11위, 아시아 6위 규모이며, OECD 국가 중에서는 미국, 멕시코 다음으로 많다.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약 2.44배 많으며, 세계에서 가장 넓고, 일본보다 50배 가까이 넓은 러시아보다는 약간 적고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를 합한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많은 인구는 풍부한 노동력과 거대한 규모의 내수 시장 등으로 이어져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1800년대 일본은 중국, 인도 제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의 인구대국이었다. 19세기 말 일본은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으면서 많은 인구가 있어 산업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의 인구만 해도 7,500만 명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에 적절한 인구였다. 그리고 1967년에 인구 1억 명을 돌파해 강력한 내수시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1975년부터 출산율이 인구유지선보다 낮고 총인구는 2005년 고점을 찍고 감소 추세다.

2005년까지 증가하던 인구의 절대 수치와 달리 일본의 인구 순위는 이전부터 떨어졌는데, 일본의 산아제한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949년으로, 이게 제대로 효과를 봐 이미 1950년대 중반에 출산율이 2명대로 떨어져 아시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나라가 되었다. 50년대 말~60년대 초 일본의 출산율은 2명대 초반였는데 당시 일본보다 출산율이 낮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 (다만 60년대 중후반엔 유럽, 소련, 북미의 출산율이 1명대 후반까지 떨어졌다.)

일본의 인구 밀도는 334명/km²으로 한국(527명/km²)보다 낮으나 총면적에서 홋카이도의 험지와 나머지 세 섬의 산간지대를 뺀 평야, 즉 실질 가용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아 한국보다는 아니지만 체감상으론 꽤 빡빡하다. 일본의 평지면적은 33%대이며 일본 국토 중 농지면적이 13%다. 경지단위 면적당 인구밀도는 세계적으로 높다. 또 한반도와 혼슈의 면적이 비슷한데 혼슈에는 한반도보다 3,000만 명이 더 산다. 7,591만 명이 3대 도시권(도쿄, 오사카, 나고야)에 집중하고 그중 도쿄권에 4,350만 명이 산다. 도쿄권 전체의 면적은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3분의 1정도, 인구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보다 800만 명 적다. 이게 도쿄가 체감상으로 더 빡빡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래서 도쿄는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탄이 되었다. 또 단독주택을 선호하는 일본인의 생활방식과 목조 건물을 많이 지었던 역사 때문에 그 드넓은 간토평야가 녹지 하나 없이 건물로만 채워진 곳이 많아 난개발 문제로 골치를 앓는다. 하지만 총 면적의 20%를 넘고 대한민국 면적의 약 4/5에 상당하는 홋카이도 거주자는 2022년 기준 대한민국의 1/9 수준인 535만명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불균형하게 인구가 분포한다.

노인 인구가 매우 많아 현재 세계 1위의 초고령화 국가다. 출산율은 2차대전 이후부터 이미 낮은데 평균 수명은 꾸준히 세계 1위라 당연하다. 특히 일본은 의학 분야에서 경쟁력이 상당히 높으며 의료보험도 상당히 잘 구축되어 있고 선진국 중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자산 빈부격차를 보여 국민 개개인도 이것저것 치료 수단을 시도할 여지가 있다.

1990년을 전후해 노령 인구(65세 이상)가 10%를 넘고 생산 인구가 감소해 그동안 쌓아온 거품이 터지고 경제가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2022년 기준 일본의 노령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9%으로 이는 주요 선진국 중 최고다. 하지만 낮은 출산율과 까다로운 이민정책으로 인해 고령화율의 상승 속도는 여타 선진국보다 더 높다. 이는 일본 경제의 활력을 갈수록 떨어뜨리고 미래를 어둡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는 인구 감소로 인구가 1억 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2016년에는 처음으로 신생아 수도 100만명 이하가 되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빈 집이 수도권에서 늘어나고 있다. 인구가 감소하면서 일본 정부는 노동력 해결을 위해 은퇴 연령을 70세로 올리고 정규직 사원이 부업을 할 수 있게 허용하는 등 온갖 고육책을 내놓고 있다. 이미 일본에서는 인력 부족이 시작되어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난민 신청자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70세 이상 인구도 20% 돌파했다.

2020년에 교도통신이 미국 워싱턴대학 연구진을 인용해 보도한 인구 추계치에 따르면, 현재 1억 2,500만 명인 일본의 인구는 2100년에는 6,000만 명으로 절반 가량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언어[편집]

일본 전체 인구의 99% 이상이 일본어를 제1국어로서 사용하고 있다. 일본어는 화자와 청취자의 상대적인 지위를 구분하는 경어, 동사의 형태나 교착어 체계 등 일본 사회의 계층적인 특성을 반영한다. 또, 대표적인 일본어 사전인 신센고쿠고지텐에 따르면 한자·한문·중국어를 뿌리로 하는 단어가 전체 어휘의 49.1%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본어 토박이말이 33.8%로 뒤를 이었고, 영어를 비롯한 기타 외국어에서 유래된 외래어가 8.8%를 차지하고 있다.

문자는 한자와 가나를 기본으로 하며 이외 라틴 알파벳, 아라비아 숫자가 혼용된다. 류큐어는 오키나와에서만 한정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지역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한편 홋카이도 지방에서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아이누어는 메이지 시대 이후 이루어진 사용 탄압과 혼혈의 증가 등으로 인해 사용 인구가 점점 노령화되고 줄어들고 있다. 한편으로 영어는 많은 공·사립학교에서 일본어와 함께 정규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종교[편집]

일본에서는 헌법 3장 20조에 따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기 때문에특별히 지정된 국교(國敎)는 존재하지 않고, 국가의 행사 또한 종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따라서 학교에서도 강제 종교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일본의 주된 종교들은 신토불교이며 일본인들의 90% 이상이 신토를 믿고 있다 일본에서 종교는 생활의 일부로 섞여있으며, 여러 개의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흔하다. 이런 경향은 결혼식은 교회나 성당에서 치르고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치르는 생활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밖에 기독교(基督敎,그리스도교,크리스트교/christ敎)의 교파로서 천주교회와 일본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 등이 있는데, 개신교로는 1940년대에 일본 제국 정부의 주도로 여러 교파가 강제로 통폐합된 일본기독교단에서 비롯하여 일본 제국 패망 이후 갈라져나온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회, 구세군, 그리고 한국 개신교도들이 만든 재일대한기독교단과 여러 선교 단체들이 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천리교,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창가학회 등이 새롭게 등장했다. 1990년대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들어왔지만, 아직 이슬람교 신자들은 소수이다.

일본에서는 2개 이상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신앙 마찰이 발생하기도 한다.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나 신흥종교인 통일교도 납치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019년 12월 31일 기준 일본 문화청 종교통계조사에 따르면 18만 828개의 종교법인이 있으며, 그 중 문부과학대신관할 종교법인은 신도계 212곳, 불교계 477곳, 기독교계 327곳, 기타 종교 119곳이다. 도도부현지사 관할 종교법인은 신도계 8,446곳, 불교계 76,660곳, 기독교계 4,467곳, 기타 종교 14,103곳이다.

교육[편집]

도쿄 대학은 일본 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학교로 평가받고 있다. 도쿄 대학의 상징으로 알려진 야스다 강당의 모습
‘자유로운 학풍’을 건학 정신으로 삼고 있는 교토 대학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 등 현대 학교의 개념이 일본에 첫 소개된 것은 1872년 메이지 유신 이후였다. 1947년 이후, 일본의 의무 교육 기간은 만6세부터 만15세까지에 해당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9년이다. 의무 교육을 마친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문부과학성에 의하면 2005년 기준 대략 75.9%의 고등학생이 대학교, 단기 전문 대학교를 비롯한 상위 학교로 진학하였다.

일본의 교육은 고등 교육 기관으로의 입학을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한 체계이다. 따라서 선호하는 대학이 편중되어 있는데, 그 중 도쿄 대학과 교토 대학이 최상위 순위를 차지하고 있어 경쟁이 심하다. OECD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제 학생 평가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일본은 세계 6위를 차지하였다.

일본의 교육 체계는 6-3-3-4제로,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으로 되어 있다. 새 학기는 4월에 시작된다.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되는 영아 때부터 아이를 맡겨서 사회적인 교육과 보육이 이루어지는 후생노동성 산하의 탁아소(託兒所)와 같은 보육 시설이 있고, 대한민국이나 여러 다른 나라들같이 만 3세부터 본격적인 전문 교육 기관으로 문부과학성의 관리를 받는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 만 6~7세부터는 초등학교와 같은 개념인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입학 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설 학원인 주쿠(塾) 등의 보충 학습, 심화 학습 등을 비롯한 사교육이 지나치게 성행하여 학교 수업이 경시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정부 또한 공교육 정상화를 도모하기 위해 제도의 개선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또 학교를 비롯한 사회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집단 따돌림인 이지메도 문제가 되고 있어 등교 거부, 자살, 히키코모리, 오타쿠와 같은 사회 문제가 발생하자 이에 대한 대안을 위해 대한민국의 대안 학교와 동일한 개념인 프리스쿨과 같은 교육 시설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대학교는 4년제 대학인 '대학'과 2년제 대학인 단기 대학, 전문 학교가 있으며 4년제 일반 대학은 학부제, 2년제 단기 대학은 학과제로 운영되고 있다.

방송과 언론[편집]

국경없는 기자회는 2022년 연례 언론 자유 지수에서 일본을 71/180로 평가 했다. 일본은 "미디어 다원주의의 원칙"을 존중하지만 시스템은 "기자 클럽"의 전통으로 인해 "프리랜서와 외국 기자에 대한 차별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일본은 국경없는 기자회가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Press Freedom Index에서 매년 상위권에 링크되고 있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있었다. 한때 11위까지 올라갔었으며 2011년 ~ 2012년 순위에서도 일본은 22위로 44위인 한국에 비해 높았으나 아베 신조의 재집권 이후 언론 장악 움직임에 의해 언론의 자유는 하락해버렸다.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아사히 신문에 대해, 아베 총리는 "정권타도가 사시(社是)인 신문"이라면서 매도했고, 온라인에서는 넷 우익을 필두로 날조신문으로 매도하고 있다. 아베 정권의 희대의 악법인 특정비밀보호법 때문에 1년만인 2013년엔 54위로 추락해버려 같은 기간 사이좋게 50위로 내려온 한국에게 추월당해 버렸다. 이 순위는 2002년 집계 이후 일본이 기록한 가장 낮은 순위며 한국에게 역전당한 것은 2005, 2006년에 이어 3번째 2015년에는 둘이 사이좋게 60위, 61위를 다투고 있다. 2018년 언론자유지수에서는 한국이 43위, 일본이 67위를 기록했다. 2017년 11월, 유엔 인권이사회가 특정비밀보호법으로 인한 보도의 자유 위축 문제에 대한 지적과 언론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권고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2009년~2015년 뉴욕타임스 도쿄지국장이었던 언론인 Martin Fackler는 '진실을 전하지 않는 일본의 신문'(「本当のこと」を伝えない日本の新聞), '아베정권에 넙죽 엎드린 일본의 미디어'(安倍政権にひれ伏す日本のメディア) 등의 집필과 강연활동 등을 통해 일본언론의 자유도가 낮은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일본의 활자 언론은 기사를 기고할 때 정보의 출처나 기자를 적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정보를 창작해도 별 문제가 없는 이상한 풍토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언론이 정보를 의도적으로 곡해, 창작해내는 상황도 발생했고, 결국 2017년에 백악관에서 직접 일본 언론에 대해 한마디를 할 정도로 국제적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일본의 전국지(全国紙) 신문으로는 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산케이 신문이 있다. 이 5개 신문을 5대지(五大紙)라고도 하며, 이들 모두가 지상파 TV 방송, 라디오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에 영향력이 막강하다. 방송 체계는 공영 방송인 일본방송협회(NHK)와 민간 방송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데, NHK는 수신 계약을 맺은 일본 국민들에게 수신료를 받는 대신에 광고를 내보내지 않고 있다. 민영방송은 닛테레(요미우리신문), 도쿄방송(마이니치신문), 후지 TV(산케이신문), 테레비 아사히(아사히신문), TV 도쿄(니혼게이자이신문), 독립 UHF 방송국 등이 있다.

언론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의 경우 언론사 대부분이 민간 소유이고 광고/구독 수익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정부는 언론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력이 거의 없지만 정부는 언론에 대한 간접적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일본 방송국 NHK는 공기업이며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해외 NHK를 제외하고 주로 라이센스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그러나, NHK의 총재 이사회에 의해 임명 총리와 예산은 일본의 국가 의회에 의해 승인된다. 요약하자면, 일본 정부의 영향력에 대한 주요 비판은 전통적인 기자 클럽 시스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유대는 큰 문제다. 또한, 5개 기업 그룹인 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산케이 신문, 그리고 니케이 지배 신문의 소유는 기업의 독점을 초래한다.

국가 차원의 인터넷 검열이 없어 검열이 심한 주변국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기한 넷 우익들의 활동 등으로 인해 마냥 자유로운 분위기는 아니다.

의료[편집]

각종 보건 관련 지표들에서 일본은 매우 우수한 수치들을 보이고 있어, 보건 수준이 전세계에서 가장 양호한 축에 속하는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9년 미시간 대학교 존 크레이튼 캠벨 교수는 일본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강한 집단이라고 평가하였으며, 랜싯에서 1990년부터 2016년까지 195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8년 기대 인적자본 평가에서 일본의 기대 인적자본의 질이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된 것도 이러한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일본인들의 기대 수명(life expectancy)은 2019년 기준 84.3세로 전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출생시의 건강 기대수명(Healthy life expectancy)도 74.1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한때 서구권에서는 일본인의 장수 비결이 무엇인지 연구를 하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은 장수국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면서도 출생아 1000명 당 영아 사망률은 2.6명으로 전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선진적이고 잘 갖춰진 의료복지 체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라고 평가받고 있다. 2005년 일본은 GDP의 8.2%를 의료비로 지출했는데, 그 중 약 83%가 정부 지출이었다. 일본인은 건강 상태에 관심이 많아 평균적으로 1년에 14회 건강검진을 받는데, 이는 미국의 거의 4배에 달한다. 일본인들의 알츠하이머병 발병률은 선진국들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일본 내 성인 에이즈 감염자 수는 2020년 기준으로 400명 안팎인데, 이 역시 인구 대비로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사회보장[편집]

쇼와기의 사회보장

1931년부터 15년 전쟁기간 동안 사회보장제도가 성립되어 간다. 1938년(쇼와 13)에는 건강보험의 대상을 임금노동자 이외로 넓히는 국민건강보험이 성립하였고, 1941년(쇼와 16)에는 노동자 연금보험제도가 성립하였다.

전후 고도경제성장기에 기업복지와 가족복지에 기반한 일본형 생활보장체제가 확립되었다. 종신고용제도, 연공임금제, 기업별조합을 기반으로 한 기업복지, 성별분업을 기반으로 한 가족복지가 생활보장 체제를 떠받친다.

전후에는 사회권의 보장을 국가의 책임으로 하는, 사회권을 보장한 헌법 25조를 중심으로 복지6법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형식상 성립되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보험의 영역인데, '국민전원보험'과 '국민전원연금이' 세계적으로도 빠른 시기인 1961년(쇼와 36)에 실현되었다. 이는 농민이나 자영업자 등 당시까지의 무보험자, 무연금자까지도 제도에 포섭하는 것이었다. 의료보험은 피보험자와 그 가족의 의료 서비스·요양수당금 등을 지급하는 것으로,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과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건강보험의 두 가지로 나뉜다. 연금보험은 노령·사망에 대해 연금 또는 일시금을 지급하여 본인과 가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보험으로, 임금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후생(厚生)연금·공제조합 연금·은급(恩給)연금 및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제 등이 있다. 그 밖에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용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직했을 때 지급하는 고용보험이 있다.

1961년부터 개시된 소득배증계획은 수출주도형 경제로 완전고용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중소기업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저생산부문의 산업도 보호하는 산업정책을 통해 실업률과 산업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으로 개발거점을 분산하거나 공공투자를 실시하여 지방간의 격차축소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1970년대까지 2% 미만의 저실업률이 실현되었고, 이는 일본형생활보장 시스템의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고도경제성장도 1973년(쇼와48) 말의 석유파동로 막을 내렸다.

1973년 일본은 노인의료무료화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등 '복지원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석유파동으로 고도경제성장이 종료되고, 1979년 일본자유민주당은 '일본형복지사회', 즉 국가가 아니라 사회가 시민생활을 보호하는 복지감축을 지향하였다. 고도성장의 종료와 더불어 공공사업이나 사회보장비의 확대 등이 겹쳐서, 재정긴축이 요구되었고, 1980년대에는 세출삭감을 통한 '증세없는 재정재건'이 기조가 되었다. 우선 사회보장삭감의 초점이 된 것은 고령자 복지였다. 1983년에는 재정위기를 이유로 노인의료비의 무료화가 폐지되고, 초진이나 입원시에 정액의 자기부담이 도입되는 형태로 상품화가 진전되었다.

헤이세이의 사회보장

버블형 도산 이후 사회보장비는 늘어났지만, 가족과 기업을 기반으로 한 일본형 생활보장 시스템은 급속히 붕괴하였. 1994년에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14%를 넘어 '고령화사회'에 돌입하였다. 이 시기 이혼률도 급증하여, 단독세대의 비율이 상승하였으며, 여성의 직장진출이 늘어나는 한편, 합계특수출생률은 1989년의 '1.57쇼크'의 다음해에는 1.34로 떨어져 저출산이 진행되었다. 고용 유동화도 가속되어 비정규고용자가 늘어났다.

1990년대 어린이집 대기아동 문제가 대두하고 1994년에는 엔젤플랜, 즉 '육아 지원을 위한 시책의 기본방향에 대하여'가 발표되고, '긴급 보육대책 등 5개년 사업'이 개시되었다. 1999년에는 '저출산 대책추진 기본방침'이 제시되고, 그 실천방향으로서 '신엔젤플랜'도 발표되었다.

저출산대책과 함께 고령화에 대한 대응도 1990년데 이후 본격화되었다. 1989년에는 고령자보건복지 10개년전략(골드플랜)이 설정되어, 특별양호노인병원이나 데이서비스 등이 정비되고 홈헬퍼를 양성하기 위한 목표가 세워졌다. 1994년(헤이세이 6)에는 골드플랜의 목표치를 상향조정한 신골드플랜이 제정되었고, 이는 1999년의 골드플랜21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입원을 해소하고 지역에서 개호를 촉진하기 위해 2000년부터 실시된 공적개호보험제도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의 전제로서 1998년에는 특정비영리활동촉진법이 성립되고 NPO 법인이 탄생하였는데, 이는 시민섹터가 사회보장의 영역에 참여하여 복지다원주의를 실현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2001년(헤이세이 13)에 발족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은 국채발행액을 30조엔 이하로 억제하기 위해 철저한 세출삭감을 감행하고, 사회보장관계비도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국가 일반회계예산을 중심으로 약1.1조엔(매년 2200억 엔)을 삭감하였다. 고이즈미 정권이 탄생한 2001년부터-2007년은 규제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세출을 삭감하고 사회보장관계비도 대폭 삭감하는 동시에 비정규고용 역시 크게 증가하여 양극화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2009년 탄생한 민주당 하토야마 정권하에서 사회보장은 경제성장이나 재정건전화에 기여한다는 기조로 전환되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쇼크 이후 아베 정권하에서 인구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여성취업과 출산과 육아 지원이 강조되었다.

2012년 8월에는 문부과학성, 후생노동성, 내각부가 공동으로 제출한 자녀·육아 관련 3법(자녀·육아지원법 등)이 성립하였다. 2013년에는 국회의 중의원본회의에서 개정생활보호법이 성립했다. 이는 생활보호자수가 과거최고를 기록하는 가운데 가족부양의무를 강화하고 사회보장비의 삭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2013년 9월의 생활보호수급자는 과거 최대인 159만911세대에 이르렀다. 2013년 7~9월 비정규고용자는 1908만 명으로 노동자의 36.7%를 차지하여 과거최대치를 경신하였다.

아베 신조 정권 하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을 도모하기 위한 개혁의 주진에 관한 법률안'《프로그램 법안》이 성립되었다. 저출산 대책(육아), 의료, 개호분야, 의료보험제도, 연금에 대한 개혁안이 제시되며, '부담능력별' 사회보장제도로의 전환을 축으로 하는 개혁안이었다. 단카이 세대(1947~49년)가 후기고령자가 되는 2025년, 단카이 주니어가 후기고령자가 되는 2050년을 앞두고, 일본은 경제저성장과 저출산 고령화, 인국감소라는 ‘위기’ 속에서 일본은 '복지를 통한 성장'의 과제를 안고 있다.

문화[편집]

문학[편집]

일본 문학의 기원은 구전 문학(口傳文學)에서 비롯하여 8세기 초에 최초의 기록 문학 형태를 갖추었다. 왕실에서 직접 주도하여 712년 신화와 전설에 관한 작품집인 고지키가, 720년에는 역사서인 니혼쇼키가 완성되었다. 또 759년 경에는 일본 최고(最古)의 시집으로 4,500편의 시가 수록된 만요슈가 등장하여 이 시기에 단가(短歌) 형태의 시가 문학이 나타났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 후 헤이안 시대의 귀족 문화에서 문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궁중의 여관(女官)으로, 이 시기에 세이 쇼나곤, 무라사키 시키부 등의 여성 시인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를 거쳐서 17세기에는 마쓰오 바쇼가 17자의 단문 시 형식인 하이쿠를 만들기도 하였다.

근현대 일본 문학은 다양한 사조의 등장으로 문학 작품의 다양성이 강해져 일본 내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대표적인 작가로 미시마 유키오, 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등이 있다. 지금도 히가시노 게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현대에 형성된 염세주의 소설, 추리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증가와 왕성한 문학 창작력으로 일본 국내에서 일본 문학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으며, 대한민국, 중국, 유럽 등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기존의 고정된 작품관에서 서브 컬처 문화 증가와 더불어 라이트 노벨이 등장하였다.

음악[편집]

일본의 전통악기인 태고

일본에서는 전통 음악에서부터 서양의 고전 음악, 팝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CD는 일본에서 연간 4억 5천여장, 테이프는 2,300만 여본이 제작되며 야마하와 같은 악기 제조 업체들이 발전하여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악기사 또한 다른 문화 분야의 역사처럼 오래되었는데, 중국의 《위지왜인전》에는 5~6세기에 한국으로부터 삼국시대 음악이 도래되기 전에도 일본 고유의 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5~9세기에 걸쳐서는 아시아의 주변 여러 나라로부터 대륙계 음악들이 유입되었고, 당나라의 당악과 불교 음악 등이 유입되기도 하였다. 사무라이들의 등장으로 궁정 귀족들이 몰락한 이후에는 향토 음악이 발전하였으며 16세기 후반에는 류큐 열도로부터 샤미센과 기독교 음악이 전래되었다. 메이지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이전의 전통적 음악들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왔으나 양악이 다양한 분야에 유입되면서 잠시 뜸해졌다가 현대에 이르러서 전통 예능 부흥 운동이 일어나 다시 왕성해지고 있다.

보편적인 대중 음악으로는 엔카와 제이팝 등이 있는데 그 중 엔카는 대한민국의 트로트와 비슷한 장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엔카가 시장에서 위력이 약해지고 서양에서 들어온 팝 음악에 일본색에 의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음악 종류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제이팝(영어: J-pop 제이팝, 일본어: ジェイポップ 제이폿푸)이다. 제이팝은 일본의 라디오 방송국 J-WAVE에서 만들어진 용어로서 일본 대중가요에서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음악을 총칭한 장르이다. 제이팝은 1960년대에 활동한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었다. 제이팝이 가지는 일본 시장 규모는 엄청나다. 현재 제이팝을 중심으로한 일본 음반시장의 규모는 약 2조 5천억원으로 환산되며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시장이고 인구 대비 세계최고다. 하지만 여전히 기획상품인 10대 아이돌 스타는 제이팝의 큰 축을 떠받치고 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OST, 뉴에이지 곡을 필두로 하는 음악 장르와 음악가들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히사이시조, 사카모토 류이치, 유키구라모토, 어쿠스틱 카페 등이 있다.

예술[편집]

일본의 회화 미술은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부처의 그림과 같이 불교와 관련된 그림을 그리는 불화(佛畵)로부터 시작되었다가 10세기부터는 일본 열도의 풍경이나 풍속을 묘사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야마토에(大和絵)라고 불렀다. 한편 전통 회화의 다른 종류인 수묵화는 중국에서 들어와 15세기 경에는 일본 회화의 일부로서 독자적으로 발달하였으며 묵의 진하기를 활용하고 주로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에도 시대의 회화로 오늘날에도 폭넓게 감상되고 있고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우키요에(浮世絵)이다. 민화의 한 양식으로 직접 그리는 육필화 형태로도 제작되었지만 특히 판화(版畵) 형태로 널리 보급되었다.[76]:126 18세기 중엽에 스즈키 하루노부가 창시한 다색쇄 판화로 우키에요는 더욱 번성하였으며 19세기에는 가쓰시카 호쿠사이, 안도 히로시게 등이 등장하여 우키요에의 최전성기를 맞아 우키요에의 화법이 서양으로 알려져 고흐 등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의 예능 공연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무악(舞樂)을 비롯하여 노, 교겐, 인형극, 가부키, 각종 민속예능 등 이른바 전통 예능과 신파·오페라·발레·대중연극 같은 현대 연극 등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일본 연극은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 중국 등 주변의 여러 나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으며 혼합 발달하여 온 것이므로 순일본적인 요소와 외래적인 요소를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다. 무로마치 시대에 간아미와 제아미 부자에 의해 노가 발전하였으며 고전 무대 예술인 가부키의 경우에는 17세기에 등장해 현대에는 여러 상설 극장이 세워져 인기를 끌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서양식 연극이 도입되었으며 이외에 라쿠고나 고단과 같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만담(漫談) 문화도 유명하다.

만화·애니메이션·오타쿠 문화[편집]

일본의 만화는 '망가'(일본어: 漫画 만가')로 불리며 현대 일본 미술과 긴밀히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했다.'그리고 일본 만화의 영향을 크게 받거나, 만화 작품들을 원작으로 해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일본 애니메이션, 즉 '아니메'(アニメ)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 포켓몬스터 등이 큰 인기를 끎과 동시에 망가와 더불어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에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편성되는 비율은 2008년 기준 약 60% (일본 경제산업성)이며 대한민국에서도 각종 케이블 TV 방송국 만화 편성의 주요 시간대를 차지하고 있는 등국제적으로 위상을 굳혀왔다. 하지만 최근 만화 분야는 검열 논란으로 그 세가 약해지고 있다. 망가와 애니메이션은 수년 간 모에 등의 각종 문화적 요소 파생, 라이트 노벨의 발달을 통해 여전히 두터운 오타쿠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렇게 특정 분야에 심취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오타쿠는 일본에서 사회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국제적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이들의 비판 활동을 통해 문화의 질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 자살, 인터넷 중독, 성범죄, 폐쇄성 등을 비롯한 정신 문제 등을 비롯한 각종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기도 한다.

스포츠[편집]

일본의 스포츠 가운데 인기 종목으로 야구·축구·럭비·배구·농구·검도·가라테 등이 있으며 겨울철에는 스키·스케이트·아이스 하키·피겨 스케이팅이 성행하고 있다. 그 중 야구, 축구 등에는 국가대표 팀이나 J리그 같은 프로 경기들도 활성화되어 있으며 텔레비전 등의 수단을 통해 종종 널리 중계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스모는 일본의 대표적인 운동 경기로 여겨져 왔으며] 일본의 대중적인 운동 경기이기도 하다. 유도, 가라테, 검도와 같은 무술 또한 일본 내에서 많은 관람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많은 서양식 경기가 일본에 소개되었으며 정규 교육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야구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각종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자주 연출될 정도로 일본의 국민 스포츠로 간주된다. 일본의 프로 야구 리그는 1936년에 처음 열렸다. 오늘날 야구는 스모와 더불어 일본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운동 경기이다. 일본 야구 선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일본 내 야구 선수 중 가장 높은 몸값을 구가한 스즈키 이치로이다. 스즈키 이치로 이전에는 타이완계 일본인인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외다리 타법으로 명성을 구가하였다.

축구는 1992년 J리그가 창설된 이후 번성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 기업인 토요타는 1981년에 창설되어 2004년에 폐지된 인터콘티넨털컵의 대표적인 스폰서였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높은 수준의 축구 클럽들을 보유한 나라들 중 하나로 AFC 아시안컵에서 4차례(1992년, 2000년, 2004년, 2011년)나 우승한 전적이 있으며 2002년에는 대한민국과 FIFA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다.[221] 일본 축구 대표팀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이후 4회 연속(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으로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에서 16강에 출전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일본의 FIFA 월드컵 최고 성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자 축구 또한 일본에서 인기가 높으며 여자 축구 대표팀은 '나데시코 재팬'(なでしこジャパン)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2011년 독일 여자 월드컵 결승전에서 미국을 누르고 사상 첫 FIFA 여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은 포뮬러 닛폰 대회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 경주 대회로도 알려져 있으며 골프 또한 일본에서 인기 종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골프는 최근 일본의 고령화와 더불어 인기가 줄어들고 있다.

일본은 1964년, 도쿄도에서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1972년에는 삿포로, 1998년에는 나가노에서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2020년에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인해 1년 연기된 2021년에 사상 최초로 홀수해에 열리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대회 정식 명칭은 2020년 하계 올림픽이다. 이로써 일본은 2회의 하계 올림픽, 2회의 동계 올림픽인 총 4회의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요리[편집]

일본 요리

현재에 전해지는 일본의 전통 요리가 발달한 것은 에도 시대로, 일본의 전통 요리로는 연회용 정찬인 가이세키 요리와 혼젠 요리 등이 있다. 가이세키 요리의 경우 우선 국, 생선회, 찜, 구이 등이 먼저 나온 후 마지막에 밥과 쓰케모노가 나오는데 식단에 따라 5첩, 7첩, 11첩 반상이 된다. 또 한국이나 중국처럼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젓가락이 다른 나라에 비해 짧기 때문에 밥이나 국 같은 경우에는 입에 대고 먹거나 마신다. 현대 요리로는 여러 인스턴트 식품이 일본에서 발명되었는데, 1958년 닛신 식품이 최초로 인스턴트 치킨 라면을 발매한 이후 1971년에는 컵라면이 등장하여 대한민국에까지 알려졌다. 인스턴트 식품의 인기가 폭발한 이후에는 냉장고에 보관하는 냉동 식품이 인기를 끌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존재했던 캔(Can)을 플라스틱 포장으로 바꾼 레트로트 식품도 발명되었다. 이처럼 현대의 일본 요리는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는 간이 식품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유명한 요리로는 스시, 전통 술인 사케, 라멘 등이 있다.

축제[편집]

일본에서 축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말인 마쓰리(일본어: 祭まつり)는 신을 맞이하는 종교적인 행사로서 농경 사회에서 풍요로운 생산 등을 기원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지방분권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마쓰리는 지역주민들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농촌지역 홍보와 생산품 판촉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일본의 농촌 각지에서 일어난 무라오코시 운동 과정에서 지역 특유의 마쓰리가 도·농 교류나 마을홍보 및 생산품 판매촉진 등에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마쓰리 부흥의 계기를 제공했고, 현재는 마을에 기념하거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모두 모여 진행하는 행사로 바뀌면서 마을 친목 도모나 지역 페스티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념일과 명절[편집]

기념일

일본의 기념일은 01월 01일 설날, 1월 11일 성인의 날, 02월 11일 건국기념일, 03월 20일 춘분, 5월 3일 헌법기념일, 05월 04일 녹음의 날, 05월 05일 어린이날의 연휴가 일본의 골든위크를 형성한다. 9월의 세 번째 월요일은 노인공경과 장수를 기원한는 경로의 날이며, 09월 22일부터 24일은 추분의 날로 선조를 공경하는 날이다. 11월 03일 문화의 날, 11월 23일 근로 감사의 날 등이 있다.

명절

일본 최대 명절 오쇼가쓰(お正月, 정월)는 양력 정월 초하루인 01월 01일 새해 첫날에 기념하는 일본의 설날이다. 연말연시 연휴를 보내며, 연하장을 주고 받고, 세배를 하고 세벳돈을 받는다. 조니(雑煮)라는 새해 음식을 먹으며, 신사나 절을 방문해 새해의 무사안녕을 빈다.

절분은 입춘・입하・입추・입동의 전날을 가리킨다. 입춘 전날 밤에는 요괴인 오니를 쫒아내기 위해 콩을 뿌리는 풍속이 있다. 오봉(お盆ぼん)은 양력 8월 15일의 전통 명절로, 오봉의 연휴는 일본 여름 휴가의 피크이다. 오봉날의 대표적인 행사 봉오도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춤을 추는 등 여름 축제 마쯔리로 즐기는 이벤트를 열며 불꽃놀이를 하기도 한다.

관광[편집]

온천

일본은 화산, 해안 등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온천이 많아서 자연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교토부, 나라 시, 가마쿠라 시 및 도쿄도 등 옛 정치중심지에는 역사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그 밖에 전국 각지에 성관(城館)·사적을 비롯하여 사사(社寺:神社·寺刹) 등이 많이 있다. 또 도쿄도, 오사카부, 나고야 시 등 대도시에서는 쇼핑과 음식・문화・휴식을 두루 즐길 수 있는 도시적인 관광자원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는 도쿄를 찾는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고, 또한 교토, 오사카, 나라 시·나고야 시, 하코네(箱根), 닛코(日光), 가마쿠라, 이세(伊勢), 고베 시, 히로시마(廣島), 나가사키 시(長崎) 등지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이다. 홋카이도는 도도부현 매력도 랭킹에서 꾸준히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최근 오키나와 관광객 역시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일본은 자연과 문화 분야에 25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993년에 등재된 호류지 5층 목탑과 히메지성, 교토, 나라의 문화재, 류큐왕국의 문화유산, 홋가이도 등의 조몬유적 등 역사적인 유적들, 시라카와고(白川郷)의 집락, 히로시마 원폭돔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의 수가 일본에 방문하는 한국인 수보다 훨씬 많았으나, 이것이 2014년에 역전이 되고, 방일한국인이 두 배 이상으로 역전되어 한일 관광산업이 변화를 겪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수는 1999년 200만 명을 넘어선 이후 매년 230만 명대를 유지해 오다가 2009년부터 300만 명대를 넘어섰다. 2012년 352만 명으로 방한 일본인 관광객 수 최다를 기록하였고, 이후 감소하여 2017년 231만 명이었다. 일본에 방문하는 한국인 수는 2006년 일본 입국 비자 면제, 엔화 환율 하락 및 항공편 확충 등으로 꾸준히 증가하여 2013년 246만 명에서 2016년 509만 명, 2017년 714만 명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대한관계[편집]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수립 이래 정치·군사·사회·문화·경제 등의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교류하며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 후반에는 청·러시아와 함께 일본은 한국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1910년 한일강제합병되고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식민통치에 대한 항일의거 및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벌어졌고,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에는 1938년 '지원병제', 1939년 '징용제'가 실시되어 한국 청·장년에게 병역·노역이 강요되었고, 1942년에는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선언과 함께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한일 양국은 1965년 6월 22일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수교하였다. 이 때 기본조약, 어업협정, 경제협력협정,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문화협정의 5개 협정으로 된 한일협정이 이루어졌다. 1966년 3월에는 무역협정, 1967년 8월에는 항공협정이 체결되었다. 1967년 이후부터는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시켜 연례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1993년 11월 대통령 김영삼과 일본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간의 정상회담에서 경제관계의 균형적 발전을 협의하기 위한 '한·일신경제협력기구(NIEP)'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1998년 10월 대통령 김대중의 국빈 방일시 양국 정상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이에 따른 부속서인 '행동계획'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1999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쉬리》가 13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한국영화들이 일본에 속속 소개되었다. 한일 우호의 정신은 2002년 한일 공동개최된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로 이어졌다.

대일 무역

해방 이후 일본과의 민간무역이 시작되었으며, 공식 통계가 집계된 1957년 대일 수출은 1080만 달러, 수입은 3350만 달러로 무역수지는 2270만 달러 적자였다. 1960년 대일 수출은 2000만 달러, 수입은 7000만 달러로 무역적자는 확대됐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과 청구권협정, 재일한국인 법적지위가 포함된 한일조약이 비준됨으로써 양국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다. 정부는 그 해에 변동환율제를 도입했으며 수입절차 간소화, 수출용원자재의 원활한 도입을 위한 조치, 수출쿼터제 폐지 등의 정책을 마련한다. 1966년 '한일무역협정'이 체결됨으로써 1차 상품 수입 촉진, 결제수단의 다양화 등 정상적인 교역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한국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함께 대일 수입 확대와 부품·소재 의존이 확대되었다. 1971년 대일 수입의 63%가 중화학공업품이었고, 이는 일본에 대한 소재·부품 의존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1968년부터 1977년까지 10년 동안 대일 수입은 연평균 26.1% 증가하였다. 대일 무역적자는 1978년에는 적자가 3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33억5400만 달러), 1984년 적자규모는 50억 달러(-54억4300만 달러) 이상이었다.

정부는 적자 해소를 위해 부품·소재 국산화를 위한 기술 지원을 하고, 2001년에는 《부품·소재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10년간 1조 4000억 원을 투자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한국의 무역 적자 1위 국가로, 일본과 교역에서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연간 200억∼300억 달러 규모의 적자를 냈다.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에서 드러나듯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주요 산업에서 핵심적인 부품·소재의 일본 의존도는 여전하다. 금액 기준 대일 수입의 약 50%가 부품·소재다.

2018년 기준 대일 수입은 546억400만 달러이며 이중 부품·소재는 262억7045만 달러(일본의 대한 수출 기준)다. 같은 해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240억7500만 달러인데 이중 부품·소재 적자는 113억8000만 달러(일본의 대한 수출 기준)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최근 10년 동안 누적 대일 무역적자는 2607억 달러에 달했다. 2021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20년 대일무역적자는 208억4천만달러 이다. 일본으로 수출품은 전년보다 11.8% 급감한 250억8천만달러였으나 일본에서 들여온 수입 물량은 3.5% 소폭 감소한 459억2천만달러로 집계되었다.

일본 재외동포[편집]

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일제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민족집단은 재일조선인, 재일동포, 재일한국인, 재일코리안, 자이니치, 재일한국·조선인 등으로 불린다. 해방 당시 일본에 약 240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하였고, 이 중 95%는 남쪽 출신으로 탄광, 토건, 군수, 항만하역 등의 작업장에서 차별적인 노동환경에 처해 있었다. 해방과 함께 본국으로의 귀환이 추진되었는데, 1947년 당시 60만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남았다. 전후 일본에서 외국인등록자의 압도적 다수는 '한국·조선'사람이었다.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의미하는 '재일', 즉 '자이니치'는 곧 재일조선인을 의미하였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자이니치'사회는 분화하고 있으며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국적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외교부의 재외동포 현황을 보면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는 2019년 기준 824,977명이다.

일본한류[편집]

2003년 방송된 텔레비전 드라마 《겨울연가》는 중장년층 여성을 중심으로 '욘사마' 열풍을 일으키며 1차 한류붐을 형성하였다. 이후 한류의 경제규모는 2003년 8,600만 달러에서 2005년 2억 2,000만 달러로 급증하였다. 2007년부터의 K-pop의 인기로 2010년에는 3억 1,300만 달러규모로 성장하였으며, 2012년에는 K-pop 수익의 80.8%가 일본에 집중되었다. 한류는 IT와 게임, 음식, 관광 등 각종 분야의 콘텐츠를 아우르는 문화산업으로 성장하였다.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1차 한류가 공영방송 NHK에서 시작되었다면, 최근에는 뉴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온라인 플랫폼이 한류 콘텐츠 소비의 중심에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2020년 전국 22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고, 30억 6천만엔의 흥행수입을 얻어 일본에서 공개된 한국영화로서 역대 1위였다. BTS가 2020년2월 발표한 정규 앨범 4집 《맵오브더솔 :7》은 상반기 일본에서 42만9000장이 판매되었다. 일본 가수를 포함해 상반기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해외 가수가 상반기 앨범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것은 1984년 마이클 잭슨의 2집 《스릴러》 이후 36년 만이다. 2020년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사랑의 불시착》, BTS,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드라마와 K-POP, K-문학은 4차 한류붐을 이끌었다.

일본 지도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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