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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북한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2023년 2월 13일 (월) 16:51 판

북한(北韓, North Korea)
류경호텔(Ryugyong Hotel).이름과 같이 명목상의 용도는 호텔이지만 내부 공사 중단으로 정상적인 숙박시설로는 활용하지 못하고 있고, 실질적으로는 그 거대하고 화려한 외양으로 북한 체제의 선전물처럼 기능하고 있다.
북한 선전매체 '류경'에 올라온 려명거리의 야경.(홈페이지 갈무리)
평양 개선문(사진=노동신문)
단군릉 전경.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북한(北韓, North Korea)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다. 간략히 조선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약칭 DPRK라고 쓴다. 한자로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또는 朝鮮이라고 쓴다. 중국어로는 朝鲜民主主義人民共和国 또는 朝鲜이라고 쓴다. 한반도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 있는 대한민국(ROK)과 구별하기 위해 북조선(North Korea, 北朝鮮, 北朝鲜)이라고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른다. 수도평양(Pyeongyang, 平壤)이다. 광역지자체로는 남포시,개성시, 라선시 등이 있다.

개요

북한은 동아시아 한반도의 북쪽(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소련에 의한 한반도 점령을 계기로 1948년 9월 9일 한반도 북부에 수립되었다.

북한의 체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여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지배하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다른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와 달리 '수령' 중심의 일당독재 체제로서의 특징이 존재한다. 본래 한반도 북부에서 소련의 도움을 얻어 민주주의 공화국을 표방하며 결성되었으나 현 시점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서 한 가문이 세습과 절대적, 강행적 독재를 행하고 있다. 김일성 일가는 자신들에게 충성할 사람들에게는 출세욕을 부추기는 식으로 파격적인 인사 혜택과 물질적 혜택을 주고, 간부부터 일반 주민을 비롯한 다른 정치적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충성파의 힘을 이용하여 이간질시키고 항상 경쟁자보다 먼저 움직이고 끈질기게 행동하며, 권력이 떨어진 서민을 비롯한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통제하여 강력한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통제를 모두 지키면 주민들의 생존이 불가능하므로, 배급제의 붕괴와 시장화와 같은 생존을 위한 변혁이 아래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북한 당국이 '비사회주의'를 한다며 비난할 정도로 북한 주민들은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91년 대한민국과 함께 국제연합(UN)에 동시 가입하였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의 남북협력 사업이 시작되었으나, 북한이 2006~2017년에 총 6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우리 정부가 모든 남북경협사업을 전면 중단한 상태이다. 특히 2016년 이후 국제사회는 유례없이 강도 높은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채택하여 사실상 북한과의 모든 경제 행위를 제한하는 대북제재를 시행하고 있다.

북한에서 월남한 실향민과 그 후손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고, 당장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가 황해도 평산군 출생이고, 백범 김구 또한 황해도 해주시 출신이다. 현대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과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실향민 후손이라는 사실은 유명한데 각각 함경남도황해도계열이다. 북한이탈주민출신 국회의원은 대표적으로 지성호, 태영호 의원이 있다.

이러한 이북출신 인사들의 대한민국 현대사 주도는 5.16 군사정변까지 이어졌다. 5.16 이후 대한민국 군부의 패권은 이북 출신에서 삼남, 그중에서도 경상도로 이전된다.

대한민국의 관점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을 바탕으로 북한을 반국가단체이자 동시에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로 본다. 한국 정치권은 이 두 개의 관점 중 어느 것을 중점으로 북한을 볼 것인가에 대해 크게 대립해왔을 정도로 북한이 한국 정계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헌법 제3조와 제4조 및 관련 법령에 따라, 풀어서 말하자면 사실상의 지방정부와 유사한 정치적 단체가 지배하는 영역을 북한(北韓)이라고 지칭하고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했다.

북한의 헌법에는 영토 조항이 없으나, 조선로동당 규약에서는 한반도 전체와 그 부속도서를 그들의 영토로 주장한다. 실효 지배 면적은 12만 3214㎢ 로 남북한 전체 면적의 약 55%를 차지한다. 쿠바, 불가리아보다 약간 크고, 그리스, 니카라과보다 약간 작은 면적이다.

북한에게 정권 차원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나라는 중국이다.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문화적,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중국군은 한국전쟁 당시 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참전한 혈맹관계이다. 그래서 북한의 미사일과 핵 실험시 UN이 대북제재를 의결할 때마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지위를 활용하여 대북제재에 거부권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북한 정부는 문화적 측면 등을 고려하면 한국을 가장 크게 경계하고 있다. 주민들이 한국 문화를 따라하기 쉬운 것은 물론 한국의 삶 자체가 토지개혁 같은 건국 당시의 역사부터 북한의 선전을 정면으로 반박을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각종 정치적 선전의 아킬레스건이 되기 때문이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 같은 규정에서도 한국 문물을 접하는 것이 가장 처벌 수위가 세다.

명실상부 21세기가 된 현재 시점에서도 모든 개인의 생활조차 국가에의해서 철저하게 감시, 통제, 억압이 이루어지는 지구상에 유일한 완전 전체주의 국가다. 20세기 중반, 후반까지만 해도 이런 국가들이 전 세계에 제법 있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들 중 대다수가 민주화가 이루어지거나 개방정책을 시행하고 자유 탄압을 상당부분 완화하였다. 현재까지도 독재정치를 고수하는 중국, 베트남 같은 국가들도 북한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자유로우며, 북한보다 민주주의 지수가 낮은 미얀마나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조차도 북한보다는 자유롭다. 현재 북한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자유를 탄압하는 국가는 국가라고 보기도 어려운 ISIL 같은 테러단체를 제외하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상징

국호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이 제창한 국호이며, 민주주의정권 건설이론과 인민혁명정부 건설경험에 기초한 북한만의 독창적인 국호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이 국호의 조선 왕조와의 연관성은 물론 고조선과의 연관성도 스스로 부인하고 있다.

실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는 북한을 건국한 정치인들의 일종의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우파 독립 운동가들이 '대한/한국', 간혹 '고려' 같은 국호가 중국에게 잃어버린 국호를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좌파 독립운동가는 봉건 시대의 청산이 독립의 목적이었기에 조선이 조선 왕조만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 '조선'이라는 국호에 호의적이었다. 이에 '조선'과 '공화국'에 대해서는 빠른 합의가 이루어졌다. 조선은 당대에도 한국처럼 한반도의 민족과 문화권을 이르는 말로 통용되었고, 공화국 역시 공산주의자들 입장에서 공화국 말고 다른 체제를 택할 수 없으니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민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박헌영은 자신이 주도해서 1945년에 선포했던 국호인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호했고, 중국 공산당에 몸담았던 북한 정치인들(연안파)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 조선민주공화국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내 김두봉이 1946년에 인민과 민주주의 모두 넣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제안했고 김일성과 소련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 때 소련군 군정의 최고 책임자는 소장이자 제25군 정치위원이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였는데, 김일성을 가르쳤던 인물로서, 레베데프가 남긴 회의록에 따르면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처음 주민들 앞에 섰을 때 김일성을 그 자리에 데려온 인물도 레베데프였다.

레데베프는 김두봉과 김일성의 아이디어에 대해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해 동의했다. 따지고 보면 당시 공산권에서 국호 작명 방식에 따라 지은 이름이긴 한데 보통 민주공화국 내지는 인민공화국이라고 하지 민주주의와 인민 두 단어가 다 들어간 경우는 남예멘으로 불리는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과 에티오피아 공산주의 정권인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과 라오스인민민주주의공화국,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정도이다. 그마나도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라 하지 북한처럼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식 국호가 저렇게 길기 때문에 북한에서 자국의 국호를 줄여 말할 때에는 '조선', '공화국' 등을 사용한다. '조선'이라는 단어 외에 '공화국'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이는데 주로 '우리 공화국'과 같이 쓰인다.

대한민국은 북한을 반국가단체 및 미승인국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조선'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북한'이라고 통칭한다.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북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화돼있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거나 무심한 사람은 북한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북한'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표현을 공적 석상에서는 모멸적으로 받아들인다. 내심 대한민국에 호의적인 사람이라도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추후에 처지가 나빠질 수도 있다. 저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화를 내지 않으면 처지가 나빠지기 쉽다. 북'한'이라는 말에는 한반도 내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을 무단 점령 중인 반국가단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사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싫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치면서 거의 모든 표현을 한국식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북한'이라는 단어는 그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로, 동의어에 불과하다. 북한이탈주민들은 한국인들과 비슷하게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 북한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북한이탈주민이 아니라도, 러시아 영토 같이 북한 당국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진짜 북한 사람도 북한이라고 부르는 걸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사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일반 주민이 '대한민국', '한국'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는 경우도 꽤 있었으니 이를 알아야 파악할 수 있는 '북한'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북한 사람이 다수일 가능성이 높다.

한자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朝鮮(朝鲜, 차오셴)이라고 칭한다. 이성계가 세운 나라 조선은 조선왕조(朝鲜王朝)나 이씨조선(李氏朝鲜) 등의 용어로 구분한다. 그러나 같은 중화권이라도 홍콩, 마카오, 대만에서는 한국(및 서방세력)과 교류가 많은 영향으로 북한(北韓)을 쓴다. 중국에서는 남북관계를 한조관계라고 부르거나 이 나라를 북도 붙이지 않고 그냥 조선이라고 부르는 등 현재의 조선이라는 이름을 이 나라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좀 더 강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일부 조선족 중에는 북한을 '북조선'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는 민족, 문화로서의 조선(조선민족=한민족, 조선반도=한반도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조선(北朝鮮, 기타초센)이라고 일컫는 게 일반적이고, 약칭은 北이 아닌 朝를 쓴다. 한반도 이북 지역은 조선반도의 북부 지역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국처럼 이성계가 세운 나라 조선국은 조선왕조(朝鮮王朝)나 이씨조선(李氏朝鮮) 등의 용어로 구분한다. 하지만 중국과는 달리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한국처럼 남북관계라 한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베트남에서는 Triều Tiên(조선), Bắc Triều Tiên(북조선), Bắc Hàn(북한) 등의 용어를 쓰지만 사회주의 국가여서 그런지 Triều Tiên, Bắc Triều Tiên 등의 용어가 좀 더 일반적.

그 외의 지역에서는 '한국'과 '조선'을 이르는 말이 같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북쪽 한국/조선'에 해당되는 용어를 쓴다. 영어의 North Korea 등이 대표적이다. 영어로 표기하는 정식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이며, 약어로 쓸 경우 DPRK로 쓴다. 북한 여권 문서를 보면 DPR KOREA라는 표기도 사용됨을 알 수 있다. 북한 외부에서는 North Korea도 널리 사용되고, 이를 축약한 NK도 쓰인다. 정부수립 초기에는 유엔도 North Korea라고 불렀다. 물론 동시가입후에는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나 DPRK라고 부른다.

러시아에서는 Северная Корея(북조선/북한), КНДР(Корейская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자) 등의 표현을 쓴다. 둘다 자주 쓰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КНДР가 짧다 보니 뉴스에서는 후자가 조금 더 많이 쓰인다. 발음은 '까엔데에르'.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는 사실 직역하면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며 북한의 정식 한국어 국호와는 좀 다른데, 앞서 언급한 소련군 군정 최고책임자 레베데프가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상하다며 좀 더 보편적인 '인민민주주의공화국'으로 순서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고려항공의 기내 안내에서는 자기를 "Juche Korea"(주체조선)라고 부른다.

ISO 3166-1에 규정된 국가 코드는 3글자는 PRK 이며, 2글자는 KP를 쓴다. 국가도메인도 .kp 를 사용한다.

국기

북한 인공기
북한 국장

1945년 직후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였으나, 정부 수립 이후 인공기로 교체했다. 인공기(人共旗)는 대한민국에서 붙인 이름이며, 북한 내에서 부르는 명칭은 '홍람오각별기(紅藍五角-旗)'나 '람홍색공화국기(藍紅色共和國旗)'이다. 근거법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법이다.

위와 아래에 파란색이 있고 그 사이에 넓은 빨간색이 있으며 그 안에 하얀 동그라미와 붉은 별이 있다. 빨간색은 공산주의와 혁명 그리고 주체사상을 상징하고 파란색은 평화에 대한 염원과 인민의 희망을 뜻한다. 그리고 하얀색은 광명 및 음양사상을 상징한다. 하얀 원 안에 있는 붉은 별은 공산주의의 건설을 뜻하는데 조선인민군의 상징으로도 통한다. 다만 이는 현재의 북한 측에서 내세운 의미이고, 인공기가 제작되었을 당시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내세운 인공기의 의미는 약간 달랐다. 인공기 위와 아래부분의 파란색은 한반도 좌우에 있는 동해와 서해를 의미하고 빨간색 별은 공산주의, 그리고 빨간색 별을 둘러싼 흰색은 공산주의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국장

1948년에 제정하였다가, 1993년에 산 모양을 미세하게 개정하면서 국장 가운데에 있는 산을 백두산이라고 규정하였다. 그 아래 댐은 수풍댐이다. 송전탑은 '북한의 공업력과 노동'을, 붉은 별은 '혁명의 영광'을, 벼 이삭은 '농업과 인민'을 상징한다. 근거법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및 국장법이다.

이처럼 상단에 붉은 별이 있고, 국호나 구호가 적힌 붉은 리본으로 감싼 농작물 이삭이 공업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의 국장은 사회주의 국가들, 특히 구 소련 구성국 또는 위성국가들의 국장의 전형적 형태이다. 쿠바를 제외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런 디자인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많은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한 후 이런 국장을 버린 바가 있다.

국가

국가는 애국가이다.

이 애국가는 의외로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는 내용이 없다. 이 노래가 완성된 1947년에 당시 북한의 정치 구도는 남로당파, 연안파, 갑산파, 소련파 등 어느 정도 다양성이 유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국가 원수도 아니었고, 수상으로 제한적인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애국가의 사용은 소련군 진주 직후부터 논의했는데, 당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아직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1947년 박세영 작사, 김원균 작곡으로 현재 사용되는 곡이 나왔다.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부터 '길이 받드세'의 후렴구는 본래 한 번만 불렀으나 김일성이 노래를 듣고 "우리나라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어떻게 한 번만 부를 수 있겠는가? 라면서 반복하여 두 번 부르도록 고쳤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 북한이 OCA 회원국의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하면서 국기 게양식 때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이 곡이 연주되었다. 물론 대한민국과 북한 모두 교류대회 등에서는 서로의 깃발과 국가를 안 쓰며 한반도기와 아리랑을 쓴다. 2013년 북한에서 개최된 아시아클럽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국적의 김우식과 이영균 선수가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차지한 뒤 북한의 인공기 사용 이후 최초로 북한에서 태극기가 달리고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국화

국화는 목란이다. 산목련(山木蓮)이라고도 불리며 대한민국에서는 '함박꽃나무'라고 한다. 국화가 된 이유는 김일성의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였기 때문이다. 1970년도까진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무궁화가 나라꽃이었다.

국조

북한은 국조(國鳥)로 참매를 채택하였다. 2007년 11월 김정일의 지시로 국조 선정 과정에 착수했으며, 2008년 4월 24일 참매를 국조로 지정하였다.

기타 국가상징

2018년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국가상징이 추가되었고, 이것이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를 통해 '새로 제정된 우리의 국가상징'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다. 공개된 국조, 국견, 국수, 국주 가운데 국조인 참매는 김정일이 정한 참매를 그대로 유지했고, 나머지 국견(개), 국수(나무), 국주(술)가 상징으로 새로 지정되었다. 이들 국가상징은 공개 이후 북한의 관영매체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김정은이 변심하지 않는 이상 적어도 그의 통치 시대 내에는 유지될 것으로 추정된다.

  • 국견 : 국견(國犬)으로 풍산개를 채택하였다. 북한 측 자료에 의하면 2014년 11월 국견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국수 : 국수(國樹)로 소나무를 채택하였다. 북한은 소나무가 사시사철 푸르고 생활력이 강한 나무로서 오랜 역사적 기간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나무로 됐다고 주장했다. 북한 측 자료에 의하면 2015년 4월에 국수로 정해졌다고 한다.
  • 국주 : 북한은 특이하게 나라의 대표 술인 국주(國酒)도 채택하였다. 국주는 '평양소주'다. 사실 김정일 때 국주로 지정된 것으로, 2009년 9월 29일 당시 새로 건설된 대동강식료공장을 방문하여 '평양소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를 국주로 정하는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지리

위치와 면적

북한의 남쪽 경계는 1948년 9월 9일부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8선(북위 38˚선)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로는 군사분계선이다. 북으로는 대략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인접한다. 국토 북단은 북위 43˚ 00' 36"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남단은 북위 37˚ 41' 00"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서단은 동경 124˚ 18' 41"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동단은 동경 130˚ 41' 32" 라선시 우암리이다. 면적은 123,138 km²로, 한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영역과 거의 같다. 이를 따르자면 영토의 남단은 북위 33˚ 6' 3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동단은 동경 131˚ 52' 40"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바뀌게 된다. 이 영토의 면적은 222,209.231 km²이며 한반도 본토를 제외한 섬은 5,974.655 km²이다. 섬을 포함한 남북의 최장 거리는 1,127.16 km, 동서의 최장 거리는 645.25 km이다.

지질과 토양

북한의 지질은 대부분 화강암·편마암·석회암으로 백악기(白堊紀) 이후에 일어난 융기작용으로 지표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남부지방에는 선(先)캄프리아기의 변성퇴적암과 두 개의 큰 고생대층(古生代層)이 분포되어 있고 평양부근을 비롯한 곳곳에 비교적 큰 중생대층(中生代層)이 산재한다. 따라서 해성층(海成層)과 육성층(陸成層)이 많은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지질구성에 의해 지하자원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북한의 지질은 크게 다섯 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 화강편마암계: 회색화강편마암 또는 고구려화강암이라고 한다. 주로 평북·함남·자강·양강도에 분포한다.
② 변성퇴적암: 함남·함북에 넓게 분포하며 이 지질층으로 구성된 마천령계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암층이다.
③ 평안계(平安系): 주요 분포지는 평남 북부 평양 부근, 함남의 남단부, 강원 북부, 황북 남부, 함북 북부 등지이다. 이 지질층은 연료로 쓰일 수 있는 무연탄이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다.
④ 상원계(祥原系): 평남 상원 북쪽으로 굴곡하여 길게 분포되어 있으며 주로 황남·황북 지질층이 이에 속한다.
⑤ 대동계(大同系): 평안계의 분포지역과 관계없이 여러 지역에 소규모로 분포한다.

북한지역의 토양은 북부의 백두용암지대와 개마고원, 무산고원 등 고지대에는 화산에서 분출된 암석들을 주성분으로 한랭다습하여 형성된 토양(삼림 포졸)이 분포되어 있다. 이 토양은 부식층이 얇아 빗물에 유실되기 쉬우나, 북서지대의 남부와 동부산악지대의 북부지역에 분포된 석회암지대는 부식질이 적고 붉은 색에 점성이 강한 테라로사로 덮여 있다.

지형

북한 지형도

한반도의 북부에 위치한 북한은 북부 지역과 동부 지역의 고도가 높고, 서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고도가 낮은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북동부 지역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을 비롯하여 관모봉(2,540m), 북수백산(2,512m) 등 2,000m급의 높은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북한의 전체적인 지형은 북부와 동부가 높고 서부와 남부가 낮아지는 동북고 남서저의 형태로 전체면적의 약 8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평균 해발고도는 약 440m이고 1,000m 이상 되는 지역은 12.8%이며, 2,000m가 넘는 지역은 0.26%로 저산성산지이다.

백두산(2,744m)을 비롯하여 관모봉(2,540m)·차일봉(2,504m) 등 2,000m 이상이 되는 산들이 60여 개가 솟아 있고 동북산악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마고원은 해발평균고도 1,000m가 넘는 고지 준평원을 형성하고 동부산악지대에는 태백산맥이 동해쪽으로 치우쳐 북부서~남남동 방향으로 뻗는 가운데 금강산(1,638m)이 솟아 있다. 북한의 지형은 장기간 거듭된 지각운동과 침식·퇴적작용으로 산지·평야·계곡·해안·고원 등의 변화가 매우 심한 것이 특징이다.

백두산은 신생대 제3기 말~제4기 초에 시작된 화산활동으로 형성되었다. 고도가 높은 용암대지(개마고원의 일부를 형성)와 분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된 칼데라호(천지) 등 다수의 화산지형이 관찰된다.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은 대한민국 수준원점(해발고도 0m인 기준 지점) 기준으로 2,744m이고 북한 수준원점 기준으로는 2,750m이다.

평야

험준한 북동부 지역과는 달리 서해안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황해도 재령강 하류의 재령평야, 평양시 대동강 하류의 평양평야, 황해북도 해안의 연백평야, 평안북도 청천강 하류의 운전평야, 평안북도 압록강 하류의 함흥평야 등이 있다. 동해안에는 금야평야, 수성평야, 어랑평야 등 소규모 해안평야들이 산재한다.

하천

북한의 긴 하천들은 대부분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반면,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들은 두만강을 제외하면 대부분 짧다. 길이가 400km 이상인 대하천으로는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803.3km)과 두만강(547.8km), 그리고 평양직할시를 관통하는 대동강(450.3km)이 있다. 이들 강은 높은 산맥과 고원 등으로 경사가 심한 지형을 따라서 흐르기 때문에 상류는 유속이 빠르고 수량이 풍부하여 동력자원으로서 가치가 크다. 강원의 50여 개의 강·하천, 함북의 어랑천, 길주 남대천, 함남 북대천, 성천강, 용흥강 등은 동해로 흐르고 그 밖의 대부분의 하천은 서쪽으로 흐른다.

압록강은 허천강(226km)·장진강(266.3km)·부전강(124km)·자성강(109.1km) 등을 비롯하여 100km가 넘는 여러 개의 하천들과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강어귀 일대에는 위화도·유초도·비단섬과 같은 섬들이 있다.

바닷물이 미치는 구간은 강어귀로부터 약 63km이다. 압록강 중류에는 백리호수를 수원으로 하는 운봉발전소가, 하류에는 수풍발전소가 있으며, 압록강의 본류와 지류에는 잉어·열목어·은어 등 약 107종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두만강 유역에는 길이 5km 이상 되는 하천들이 150여 개로 중국의 해란강(海蘭江)·쑹화강(松花江) 등이 두만강으로 유입되고 강어귀에는 전형적인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으며 산천어·연어·화어 등 40여 종의 물고기들이 있다.

두만강의 물길은 공업용수, 관개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동강은 길이 5km 이상되는 하천이 388개이며 황해 밀물의 영향을 받을 경우에는 평양 부근은 1~2m, 강어구 부근은 4~5m로 높아진다. 대동강 유역에는 60여 종의 어류가 살고 있고 소나무·이깔나무·전나무 등 산림자원이 비교적 풍부하다.

기후

북한 전역은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대부분 냉대기후에 속한다. 단, -3°C 기준으로 강원도 동해안은 온대기후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연교차가 30~40°C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큰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통념과 다르게 여름 기온은 개마고원이나 함경도 동해안을 빼면 서울과 1~2°C 가량의 차이밖에 나지 않고, 심지어 북한에서도 겨울이 추운 만포시가 40.7°C를 기록한 적도 있다. 개마고원 일대라도 아주 높은 곳을 제외하면 강원도 태백 같은 곳과 여름 날씨가 비슷하다. 게다가 압록강 유역의 경우 대륙성 기후 탓에 무지막지한 폭염에 시달리기도 한다. 두만강 유역의 경우도 압록강과는 1~2°C 가량의 차이가 있기에 폭염이 있다.

겨울은 워낙 잘 알려져있다시피 황해도나 동해안의 남쪽을 제외하면 남한보다 대체로 훨씬 더 춥고 길다. 청진시만 해도 어린이날이 지나서야 벚꽃이 필 정도이다. 한 술 더 떠서 개마고원 일대에서는 9월부터 5월까지 아예 겨울이다. 만주 상당수 지역보다는 비교적 따뜻하지만, 밴쿠버를 제외한 캐나다의 도시 지역 정도로 추운 곳이 많다.

한반도 자체가 겨울 기온은 전세계 동위도나 동해발고도 지역 중 가장 낮다. 서유럽에서 대한민국과 같은 겨울 기온을 가진 곳은 최소 북위 60도 이북으로 올라가야 한다. 심지어 서울은 북위 69도 도시 노르웨이트롬쇠와 겨울철 기온이 비슷할 정도이다. 그래도 여름도 덥고 극심하게 건조한 것은 아니라 스텝 기후 같은 지역과 비교하면 개마고원을 제외하고 근대까지 인구밀도가 높은 축에 속했다. 서유럽에서 인구밀도가 높은 베네룩스도 북위 50도 정도다. 가장 추위가 심한 곳은 백두대간 인근이다. 강원도 최전방은 개마고원 다음으로 추우며, 겨울에 평안북도가 따뜻한 경우도 많다. 더 위로 올라가면 그야말로 서구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추위가 등장한다. 이런 북한의 매서운 추위를 우습게 봤다가 큰 낭패를 본 사건이 바로 장진호 전투다.

당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측은 북한의 기후에 무지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한반도의 면적이라고 해봤자 플로리다 주보다 약간 더 크고 미국에서도 선 벨트라 불리는 캘리포니아와 동위도 상에 있으니 여름은 덥더라도 겨울은 따뜻한 곳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장진군은 1월 평균기온이 -15.5℃로 알래스카 급 맹추위를 자랑하는 곳이었고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미군은 방한장비를 챙기지 못해 장비가 손상되거나 동파, 혹은 얼어죽는 일이 매우 많았다.

장진군 외에도 삼지연시, 대홍단군, 갑산군, 중강군, 백두산 같이 1월에 평균 기온이 -20℃ 언저리까지 떨어지는, 알래스카 뺨칠 정도로 추운 곳도 많다. 이런 곳은 북한 사람조차도 추위를 호소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특히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고 해발고도가 높은 개마고원 일대에 많다. 중강군에서는 1933년 1월 13일에 -43.6℃까지 떨어져 한반도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했고, 1997년 1월 2일에는 백두산 정상부에서 비공식적으로 -51.0℃가 관측되기도 했다. 다만 장진군이나 그 이상 수준의 추위에도 외국에는 하얼빈, 노보시비르스크, 위니펙처럼 대도시가 있는 경우도 존재하기도 한다.

자강도를 제외한 평안도나 황해도, 동해안 일대는 개마고원 일대보다는 따뜻하다. 그래도 청진과 평양의 1월 평균은 -5.3, -5.8℃로 강원도 춘천시, 철원군[83] 수준이고, 나선은 -7.1℃로 강원도 최전방 지역과 비슷하게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이 이남은 대체로 경기도, 강원 영서 지역의 중부나 남부와 겨울의 기온이 비슷하다. 즉 황해도 남부나 동해안의 도시들은 대체로 해주(-3.5℃), 김책(-3.8℃)이나 함흥(-4.1℃)처럼 덜 춥다. 원산(-2.3℃)은 서울과 1월 평균 기온이 비슷하고, 휴전선 바로 위의 고성군 장전읍(-0.9℃)은 대전이나 충남 서해안과 1월 평균 기온이 비슷하다. 북한에서 강원도가 따뜻하게 인식된다는 것은 백두대간 서쪽의 전방이 아니라 그 동쪽이다. 더 추워졌다는 말이 있으나 대한민국 기상청은 2021년 1991년~2020년 북한의 기온도 지구온난화로 상승했다고 한다. 특히 한파일수 감소가 휴전선 이남보다 3배 이상 심하다. 다만 이상기후가 심해져 매우 춥고 매우 더운 날이 더 많아지는 건 맞다. 2010년대 들어 평안도 일대의 서한만이 평년보다 심하게 얼어붙거나, 여름에 간혹 긴팔 입는 혜산 같은 곳이 38℃를 기록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탈북은 김정은 정권 들어 기후와 무관하게 단속이 극심해져 김정일 정권 때보다 절반 가량 줄고, 코로나 시국에는 코로나를 구실로 휴전선 마냥 국경에 접근조차 제대로 못하게 해 탈북이 심히 줄었다.

그리고 강수량은 함경남북도와 량강도는 함흥과 백두산 일대를 제외하면 많아야 700mm로 적은 편이라 벼농사보다는 감자나 옥수수 같은 밭농사를 짓기에 좋다. 특히 개마고원 일대는 동해로 흐르는 오호츠크해의 한류 영향으로 강수량이 적고 일교차가 매우 커서 질 좋은 감자가 난다고 한다. 대홍단 감자라는 동요가 괜히 나온게 아니다. 나머지 지역은 평양이나 남포 등 대동강 하류가 개마고원 수준은 아니여도 평평한 지형 탓에 800mm 가량으로 좀 강수량이 적지만 주로 벼농사를 한다. 이 지역에 인접한 백령도가 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것과 비슷한 형태다. 평안북도가 인근보다는 강수량이 많긴 하지만 경상북도 수준의 강수량을 보인다. 가장 강수량이 많은 강원 동해안 지역은 1500mm 가량의 남해안의 평균 수준의 강수량을 나타낸다.

식물

북한에는 약 20종의 침엽수와 140종의 활엽수가 분포한다. 개마고원과 백두산 주변의 고지대에는 전나무, 가문비나무, 소나무 등의 침엽수가 넓게 분포하여 한국과 이질적인 산림 경관을 보이지만, 그 외 지역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밖에도 700여 종의 약용식물, 200여 종의 산채류, 450여 종의 공업용 식물 등 경제적으로 유용한 식물이 풍부하다. 용도별로는, 섬유 및 제지식물로는 분비나무·가문비나무·황철나무·닥나무·노박덩굴 등이 있고 유지식물로서 잣나무·가래나무·호두나무·초피나무 등이 있으며, 산과실나무로서는 밤나무·돌배나무·들쭉나무·살구나무·머루·다래·산딸기 등이 있다. 물감원료를 얻는 나무로서 시닥나무·신갈나무·떡갈나무 등이 있고, 특수용재를 얻는 나무로서는 참대·오동나무·횡경피나무 등이 있다.

1990년 국토 면적의 약 68%를 차지했던 북한의 산림면적은 지속적인 산림 벌채로 인해 2015년 약 42%로 크게 줄었다. 이에 따라 2015년부터 산림복구 10개년 계획을 시작하여 2019년까지 연간 0.4%씩 산림면적이 증가해왔다. 이는 축구장 면적(0.825ha)을 기준으로 할 시 연간 약 3만 개의 축구장 크기의 산림이 증가한 셈이다. 그러나 산림복구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도시 및 관광·특구지역에서 활발히 진행된 반면, 지방이나 산간지방은 산림 황폐지가 방치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산림벌채 및 훼손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동물

북한지역에는 척추동물이 1,000여 종 있으며, 그중 100여 종은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종이다. 대표적인 동물로 호랑이·사슴·노루· 표범·곰·늑대·산양·멧돼지·스라소니·수달너구리·오소리·두더지·토끼·족제비·고슴도치·다람쥐 등이 있다. 북한은 이러한 동물들과 이로운 식물들을 보호증식하기 위해 백두산 특별보호구 등 6개의 자연보호구를 설정해두었을 뿐만 아니라 14개 지역의 동물보호구와 14개 지역의 식물보호구를 설정하였다.

지하자원

북한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고 예상되는 지하자원. 북한 경제와 외화벌이 수출 산업을 떠 받치는 가장 중요 산업이다.

대한민국 에너지 경제연구원 2015년 자료의 내용으로 보면 북한에 부존된 광종은 약 500종이지만 산업적으로 유용한 광물은 200여종이며, 이중에서 경제성이 있는 광물이 20여종 이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국제시세나 채산성을 고려하면 남북 경협이나 통일 후의 활용 가치는 매우 회의적이다.

자연재해와 환경문제

1990년대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1995년경 식량 생산량이 평소의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하였고, 이로 인해 약 25~69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기근의 원인으로는 빈번한 자연재해, 북한의 외교적 고립, 농업 정책의 비효율성 등이 거론되나, 궁극적으로는 토지 황폐화와 식량 생산 저하 사이의 악순환에 기인한다고 평가된다. 토지가 황폐화되면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는데, 이를 증대시키기 위해 다시 과도한 토지 개간이 발생하여 토지가 더욱더 황폐화되는 것이다. 토지 황폐화는 식량 생산량 감소뿐만 아니라 토양 유실, 산림 파괴 등 다양한 환경문제를 야기하였다.

전 지구적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북한 역시 다양한 환경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평균 기온과 폭우의 강도 증가 등 자연재해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2016년 여름 함경북도 지역에서 기록적인 대홍수가 발생하여 두만강 수위가 대폭 상승하였고, 이로 인해 수백 명의 사망자와 7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자연재해 관련 사망자 수와 국내총생산(GDP) 손실에 바탕을 둔 기후 리스크 산정에 따르면, 2009년에 전 세계 2위, 2013년에 전 세계 7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북한은 기후변화의 영향에 취약하다.

북한에서는 공업 시설 가동률에 따라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기오염 물질의 양이 달라진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이 미약하게나마 활성화되어 에너지 소비와 대기오염 물질이 증가하였다. 평양직할시에서는 2008년 기준 아황산가스의 농도가 서울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 등 특히 석탄에 의한 대기 오염이 심각한 상황이다. 북한 내부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 물질과 더불어 중국에서 발원하는 황사와 미세먼지의 영향도 큰 편이다.

역사

1945년 9월 2일 이전

1910년 경술국치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에게 35년간 주권을 빼앗겼던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이후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독립국가의 건설을 의미하는건 아니었으며, 연합국의 핵심 축인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 속에서 연합국의 점령지였던 한반도는 끝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북한은 1945년 9월 2일 이전 한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간주한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조선은 모두 이 국가가 통치하는 지역의 일정 부분을 통치한 국가다.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있는 단군릉이 있다. 북한에서는 이를 고조선의 지도자였던 단군(과 그의 부인)의 능이라고 주장한다. 함경남도 금야군 비단리에 있는 소라리토성도 대표적인 고조선 유적이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명성왕의 묘라 추정되는 북한의 국보 36호 동명왕릉과 고구려의 궁이었던 국보 2호 안학궁터와 국보 8호 대성산성 복원물과 더불어 북한의 국보 공동 2호 보통문, 국보 4호 대동문, 국보 19호 을밀대 등의 고구려 장안성에 관련된 유적도 남아있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에 의해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의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발해의 수도인 5경중 남해부는 남경이라 불렸으며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하였다. 황해도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개성역사유적지구는 2013년 6월 23일, 제3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프놈펜 회의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와 최윤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조선의 중심권역이었던 경기도, 충청도 출신을 가리키는 기호인과 평안도, 황해도, 개성을 출신은 가리키는 서북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11년(순조 11년)에 평안도의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정주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맞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9월 2일 이후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우자 평안남북도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조선반도 적화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조선반도 북부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지고나서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47년 2월 최고의결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와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군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사회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 날을 인민정권 창건일, 다른 말로 9.9절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6.25 전쟁

6.25 전쟁 - 폐허에서 구조 화물을 뒤지는 여인

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6.25 전쟁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후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조선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개성시(개풍군), 한강&임진강 하구, 옹진반도, 함박도, 연백군를 상실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속초시, 설악산, 화진포, 대붕호 (파로호), 철원평야, 양양 낙산사를 상실하게 되었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의 시작

김일성

북한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계열, 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해 혁명의 단계가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넘어왔음을 명확히 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시다"라는 내용에서 '서울'을 '혁명의 수도'인 '평양'으로 바꾸었다.
  •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 명시
  •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의 확립
  • 주체사상의 헌법 규범화
  • 국가주석제 도입 및 권한 강화
  • 집단주의 강조(조직적체계)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사회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학자 김당택은 주체사상 채택을 비판하였다. 그는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김정일 정권

김정일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갔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1994년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한다고 했을 때 전쟁 위기가 최고조였다.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미군과 맞설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이 없고 비축물자도 없고, 전투 의욕도 상실한 상태였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한편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7월 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으며 10월 13일 핵 실험을 실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시에서 만나 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한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수립된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대한민국 국적의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가 관광 도중 총살되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에는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고, 5월에는 핵실험을 강행했다. 또한 2010년 3월 26일 북한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연이어 11월에는 휴전협정 이후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여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김정은 정권

김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4개월 뒤인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신설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2012년 7월 1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정은에게 기존 대장 계급에서 2단계 높은 원수 칭호를 부여할 것을 결정했다. 원수 칭호는 이미 사망한 김일성·김정일에게만 부여된 대원수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이전까지는 리을설이 유일했었다. 원수 바로 아래 계급인 차수는 보직 해임된 리영호를 포함하여 현재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12월 1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은하 3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2013년 2월 12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리히터 규모 4.9 (미국 지질조사국은 리히터 규모 5.1)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동년 3월, 북한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했다.).

12월 3일, 김정은은 정권 내 제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에게 정치적 숙청을 단행해 축출했다. 이어 12일, 사형을 선고하고 즉결 집행으로 장성택을 제거했다. 그러나 고모 김경희에 대한 처분은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이후 2016년, 조선로동당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위원회 비서국을 정무국으로 바꿈에 따라 김정은은 당 제1비서에서 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당 비서직은 당 부위원장직으로 탈바꿈 되었다. 뒤에 열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서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로 개편하고 김정은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2019년에는 차기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함에 따라 대대적인 인사가 이루어졌는데 기존에 있던 원로 정치인 대부분이 일선에서 은퇴하였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내각 총리가 국무위원회 위원을 겸직하게 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일인 독재체제가 더욱 확고해졌다.

2017년 9월 3일에 12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6차 핵실험에 감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합중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를 시작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를 촉구를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대북 제재와 함께 포용정책을 병행하면서 김정은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하키팀 등에서 단일팀과 예술단 공연 등을 하면서 2018년 4월 27일에 대한민국과 정상회담을 하여 비핵화 의지를 밝히며, 풍계리 핵 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기지를 폭파 및 폐쇄하였다. 2018년 6월 12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미국 CIA조사에서 풍계리와 동창리 이외 미사일기지와 핵 실험 장소를 비밀리에 더 보유 및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고체 연료를 사용한 미사일 시험 발사도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에만 5월 4일에 1발 (고도 60여km, 사거리 240여km), 5월 9일에 2발 (고도 45~60여km, 사거리 420여km 및 270여km), 7월 25일에 2발 (고도 50여km, 사거리 600여km), 7월 31일에 2발 (고도 30여km, 사거리 250여km), 8월 2일에 2발 (고도 25여km, 사거리 220여km), 8월 16일에 2발 (고도는 30여㎞, 사거리 230여㎞)등을 발사하였다.

대한민국의 킬체인체계 하의 미사일방어체계와 사드는 액체연료는 잘 감시, 탐지, 타격 할 수 있지만, 고체연료는 감지가 매우 어렵고, 고도를 낮추면, 방어체계에 노출되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특정지역을 타격 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군은 이를 노리고 미사일 개발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정치

정치이념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정치·외교·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유일한 지도이념이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핵심 통치이념으로서 북한정치체제의 규범적 지침이자, 지도적 강령으로 기능한다. 인간중심의 철학에 기초하며,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보고, 개개인의 사고방식까지 규정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인간의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와 행위에 의해 경제구조와 사회와 역사가 변화한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이후 선군정치가 북한정치의 전면에 부상하였다. 경제난 속에서 생존을 위한 권력의 근간이 당보다는 군에 의존하게 되었다. 선군사상은 김정일 시기에 추가된 통치이념으로서, 주체사상과 함께 노동당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2009년 개정 헌법에 명시되었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예술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사회주의 체제의 옹호를 핵심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체제

북한의 정치 체제는 노동당, 입법부·행정부·사법부를 포괄하는 국가기구, 그리고 군대의 3개의 큰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한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노동당은 최고의 위상과 권한을 지닌 권력의 원천으로 국가기관이나 특정 단체보다 상위에 위치한다. 그리고 모든 정책들은 당의 지도와 통제 아래 추진된다. 당이 정책결정 기능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상황에서 입법부 기능의 최고인민회의, 행정부 기능의 국무위원회와 내각, 사법부 기능의 사법검찰기관(중앙재판소, 중앙검찰소)은 각각 법 제정과 집행 및 해석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책들은 당의 지도와 통제 하에 추진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권력분립, 견제와 균형은 찾아보기 힘들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노동당 규약, 헌법 등에 명시하고 있다. 노동당 규약 53조에는 "인민정권은 당의 령도밑에 활동한다."를, 헌법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를 규정하고 있다. 군(軍)도 '당의 군대'로 규정되어 있는 바, 노동당 규약 47조는 "조선인민군은 국가방위의 기본력량, 혁명의 주력군으로서 사회주의조국과 당과 혁명을 무장으로 옹호보위하고 당의 령도를 앞장에서 받들어나가는 조선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다. 조선인민군은 모든 군사정치활동을 당의 령도 밑에 진행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치권력

2008년 김정일의 뇌졸중 발병 후 2009년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金正恩)이 후계자로 내정되었다. 2010년 9월에는 김정은이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고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정치국 위원에 선임됨으로써 후계 구도가 확정되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한 뒤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4년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김정은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재추대되었다(2014.4.9.). 이어 2016년 최고인민회의서는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로 확대·개편하고, 김정은을 국무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2016.6.29.). 2019년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김정은을 국무위원장의 재추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무력 최고사령관' 및 '전체 조선인민의 최고대표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사실상 북한 권력의 완전한 세습 완성이 확인되었다.

행정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계급 정당'인 동시에 '수령의 당'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북한의 정치사전에 의하면, "당이란 일정한 계급의 리익을 수호하며 그의 요구와 지향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계급의 선봉대이다. 로동계급의 당은 수령의 혁명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선진투사로서 조직되며 수령의 혁명사상을 지도지침으로 하고 수령의 유일적 령도밑에 혁명과 건설을 진행한다."고 언급하고 있고 2021년에 개정된 노동당 규약 전문에서도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들을 영원히 높이 모시고 수반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하게 결합된 로동계급과 근로인민대중의 핵심부대, 전위부대"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북한에서 노동당은 수령체제 내에서 수령의 영도를 받아 인민대중에 대해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당의 위상과 관련해 북한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상 독점적 당 지위 규정은 노동당이 북한 권력의 산실임을 명백히 하고 있으며, 당이 여타 기관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 구조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노동당은 "근로대중의 모든 조직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형태의 혁명조직"이며, 기타 각종 정치조직들을 영도하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조선노동당의 이념과 목표는 역대 당대회를 통해 계속 수정되었다. 제1차 당대회(1946.8)와 제2차 당대회(1948.3)에서 채택한 규약은 당의 이념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규정하고 투쟁목표를 통일정부 수립에 두었으나, 제3차 당대회(1956.4) 규약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혁명전통을 접목시켰고, 당의 최종목표를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두었다. 제4차 당대회(1961.9) 규약에서는 당이 항일투쟁에서 이룩한 혁명전통의 계승자임을 강조하였으며, 제5차 당대회(1970.11) 규약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김일성 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표방하였다가 제6차 당대회(1980.10)에서는 김일성 주체사상만을 유일한 당이념으로 명문화하고 최종목표를 전한반도의 공산주의사회 건설과 사회 전체의 주체사상화로 변경하였다. 제7차 당대회(2016. 5)를 기점으로 김정은에 대해 '위대한 영도자'라는 칭호를 통해 김일성·김정일과 동일한 수령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어 2019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여 김정은의 공식 직책인 국무위원장에게 국가의 대표로서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한편 노동당의 위상에 관하여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노동당이 북한 최고의 권력임을 헌법상에 규정하고 있다. 이어 제8차 당대회(2021.1)에서 개정된 당규약에서는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재확인하고 '선군정치'를 대신해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를 기본 정치방식으로 제시하였다.

2010년 개정된 당 규약은 30년 만에 개정된 것으로 북한 현실과 규범을 일치시키기 위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당의 위상과 관련하여 국가영도조직으로서의 노동당의 위상을 강화하였고, 국가최고 정치조직, 혁명의 참모부인 노동당의 국가 영도기능을 세부적으로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군사·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국가부문에 대한 당의 지배력을 명문화하였다. 북한 내부현실을 반영하는 노동당의 목적도 변화하였다.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완전승리에서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로,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 건설에서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2012년 당 규약의 핵심은 전문에서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당의 지도이념 또한 김일성-김정일주의라고 명기하였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체제의 합리화를 위해 당 규약이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당 규약 개정을 통해 김정은에게 노동당 위원장직을 부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김정은의 유일영도체제를 완비하였다.

입법 및 사법

입법

북한은 194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하면서 채택한 최초의 헌법을 ‘인민민주주의헌법’이라고 부르고 이후 4차례 개정하였다. 이어 1972년에 새롭게 개정한 헌법부터는 '사회주의헌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후 총 14차례 헌법을 개정하였는데, 1998년 개정헌법은 '김일성헌법', 2012년 개정헌법부터는 '김일성-김정일헌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회주의 헌법의 특징은 사회주의제도를 법적으로 정착시키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강화한다는 명문으로 국가 기관 체계를 주석 중심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주석과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를 신설하고 종래의 내각을 단순한 행정집행기관인 정무원으로 격하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와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는 등 국제정세와 안보환경이 급변하자 1992년 4월 9일 제9기 제3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종전의 헌법을 대폭 개정한 전문 7장 171조의 새로운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이후 1998년 전문 7장 166조로 개정하였고, 2009년과 2010년에 다시 전문 7장 172조로 개정하였다.

1992년의 개정헌법은 이념과 지도노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침으로 명시함으로써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부각하는 한편, 국방이라는 별도의 장을 신설, 군의 사명을 사회주의 제도의 보위에 두고 4대군사노선의 관철을 명시함으로써 사회주의체제의 고무를 위한 군의 역할과 성격을 헌법에 구체화하였고, 당이 국가를 영도한다는 조항을 신설하여 당우위노선을 재확인하였다.

1998년 개정된 헌법은 서문을 신설하여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영구 주석'으로 추앙하면서 북한의 헌법이 김일성헌법임을 명기하였다. 또 주석제와 중앙인민위원회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국방위원회와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각각 분산한 것이 특징이다. 기존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를 승격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두고 대외 국가대표기관의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명목상 국가 수반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2009년 개정된 헌법은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모두 삭제하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최고영도자로 명시한 것이 특징이다. 또 국방위원장이 국가의 전반사업을 지도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국방위원회가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다.

2016년 개정된 「김일성·김정일 헌법」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함께 ‘영원한 수령’으로 표기하였다.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에 대해 ‘위대한 영도자’라는 칭호를 통해 김일성·김정일과 동일한 수령의 지위를 부여하는 한편, 2019년 8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2차 회의를 통해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에서 국무위원장에게 국가를 대표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사법

1948년 9월 북한정권 수립이후 내각의 사법성과 국가검열성이 사법·검찰업무를 각각 지도·감독하였다. 이후 1959년 8월 사법성과 국가검열성의 폐지로 사실상 이들 관할업무가 최고재판소와 최고검찰에 이관되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신헙법 채택으로 최고재판소, 최고검찰소의 명칭을 중앙재판소, 중앙검찰소로 각각 변경하여 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가 모든 법령의 해석권을 갖게 되어 모든 사법·검찰기관의 사업을 지도감독하게 함으로써 사법부에 대한 독립성이 완전 상실되었다.

국방

2023년 2월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건군절 열병식에서 북한 군인이 미사일총국 깃발(흰색 원)을 들고 있다. 북한이 북한군 부대들을 새로운 정세환경에 맞게 확대 개편됐으며, 이에 따른 군기(軍旗)들도 개정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부대들이 어떻게 확대 개편됐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

군사 정책기조

북한의 군사정책 기조는 국방자위 원칙을 표방하면서 대남한 우위의 군사력을 건설·유지하는 데 있다. 중·소에 의존한 북한의 군사력 건설이 이처럼 자위원칙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조성된 정세와 관련된 국방력 강화문제'를 토의하고 인민경제의 발전에서 일부 제약을 받더라도 우선 군사력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국방에서의 자위원칙을 결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원칙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데 의미가 있으며, 구체적인 실천방도로 체계화한 것이 4대군사노선으로 북한은 이 노선을 1963년부터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 군의 역할은《조선노동당 규약》에 제시되어 있는데, '당의 군대', '혁명의 군대', '수령의 군대'로 규정하여 체제와 최고 통치자를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북한의 군은 수령을 옹위하고 체제의 보호를 위해 질서를 위지하는 정치적인 역할이 있다.

군대는 기본적 역할인 영토를 보존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고지도자와 '혁명적 수뇌'를 지키는 것을 군의 우선적인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군은 정치적인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이는 김정일의 '선군정치', '선군사상'에 잘 나타나 있는데, 국정 운영에 있어 국방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통치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를 계승한 김정은도 2016년 국방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을 확대하여 국무위원회를 신설하여 위원장에 올랐다. 국무위원회는 군사, 국방의 기능에 통일, 외교, 안보는 물론이고 경제 분문까지 총괄하는 실질적인 북한의 최고 기구가 되었다.

북한은 1962년 12월 노동당 중앙위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국방 병진노선이 채택하면서 '전군 간부화', '전민 무장화', '전국 요새화'를 제시하였다. 이후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전군 현대화'가 추가되면서 이를 북한의 기본적인 군사노선인 '4대 군사노선'이라고 한다. 이는 1990년 이후 자위적 군사노선의 기초가 되고 있다.

김일성 시기에는 전후복구와 4대 군사노선의 제시를 통해 독자적인 군사력 건설과 병력 증강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전쟁 발발 이전 20만 명 수준이던 북한군 규모는 전쟁 이후 1955년에는 40만명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력과 장비 증강이 이루어졌고, 전쟁 이후 북한에 주둔하던 중국인민지원군이 철수할 때 군사물자의 상당 부분을 무상 양도했다. 1960년대 이후 북한은 군수산업 분야를 국가의 주요 경제 부문으로 규정하고 제2기계공업성(1967년) 신설 및 제2경제위원회(1972년)로의 확대·재편을 단행하며 군사중심의 국가정책에 집중했다.

김정일 시기에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고립의 위기 속에서 이를 돌파해나갈 핵과 미사일 개발과 같은 비대칭 전력 육성을 시작한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1998년에는 인공위성 개발을 명분으로 대포동-1호를 발사했고, 2006년에는 대포동-2호를 발사를 시도했다. 2009년에는 우주개발을 명분으로 은하-2호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다. 또한 2000년대 중반부터 고체연료 미사일(KN-02)개발을 시도했다. 한편 2006년 10월 9일 제1차 핵실험, 2009년 5월 25일 제2차 핵실험을 단행하며 핵개발도 본격화했다.

김정은 정권의 군사 정책의 특징은 핵·미사일 고도화이다. 김정은은 집권 4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경제건설 및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 채택하였다. 이후 영변 핵시설의 전면 재가동과 지대지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연장키고, 고체 연료 미사일 개발에 집중하면서 실제로 무기의 고도화에 성공하였다. 특히 북한은 화성-10형, 화성-12형, 화성-14형, 화성-15형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하면서 미국을 본토 타격 능력을 과시하였다. 또한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인 북극성과 이를 개량한 지대지 탄도 미사일의 발사도 감행하여 국제사회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김정은의 군사 정책은 초기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여, 핵무력을 강화하면서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을 제시하였다(2013년). 이어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로 확대 개편하면서 군사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2016년). 이후 2018년 당중앙위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결정서를 통해 병진노선의 완성과 함께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집중'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였다. 2021년 초 제8차 당대회에서 개정한 당규약에는 국방력 강화를 명시하고 사업총화보고에서도 여러 가지 전략무기나 핵잠수함 등을 언급하며 국방력을 계속 강조하는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4대 군사노선의 기초 위에 '인민군대의 강군화를 위한 군건설의 전략적 노선'을 마련하여 차별화된 군사정책을 제시하였다. '정치사상 강군화', '도덕 강군화', '전법 강군화', '다병종 강군화'의 4대 전략적 노선은 2015년과 2019년 두 번의 신년사를 통해 김정은위원장의 주요 군사 정책으로 강조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인민군 창건 71주년을 맞아 인민무력성을 방문하여 "정치사상 강군화, 도덕 강군화를 쌍기둥으로 틀어쥐고 사상사업을 공개적으로 다각적․입체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라고 지시하면서 '정치사상 강군화'를 통한 사상무장을 특히 강조하였다. 또한 '전법 강군화'와 '다병종 강군화'를 통해 핵․미사일 전력에 보조를 맞추고 군수 공업을 육성과 국방 과학 발전을 통해 군사 부문 전반에서의 현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의도를 여러차례 피력하였다.

김정은 시기는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성공하였다. 2013년 2월(제3차 핵실험)부터 2017년 9월(제6차 핵실험)까지 핵능력 고도화를 위한 핵실험을 지속했고, 2016~2017년 기간 동안 화성-10, 화성-12, 화성-14, 화성-15형과 같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미사일 시험을 통해 미국 본토에 대한 타격능력을 과시하였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북극성 시험 발사도 지속하며 군사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2019년에는 신형 전술무기 4종을 선보이며 전술적 타격능력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군사 체계

북한의 군사기구는 당조직을 통한 정치지도체계와 군조직을 통한 군사지휘체계로 이원화되어 있다. 북한의 주요 군사기구로는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무위원회와 군총정치국, 군 총참모부, 국방성 등이 있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조선노동당의 최고 군사 기구로 군사 분야의 모든 사업을 총괄하며 군사노선과 정책을 결정하고 군수공업을 포함한 국방사업전반을 담당한다. 국무위원회는 2016년 개정된 헌법에서 국방위원회를 개편하여 조직된 기관으로 북한의 최고 정책 지도 기관이다. 2019년 8월 개정된 헌법에서 국무위원회를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고 국가주권의 최고 정책적 지도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국가의 무력을 지휘 통솔하는 총사령관의 지휘를 가진다. 총정치국은 군의 당 조직과 정치사업을 관장하는 당의 집행기구이다. 총참모부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실제로 집행하며 당의 지시에 따라 무력 전반을 총지휘하는 최고 군사집행기관이다. 국방성은 대외적으로 군을 대표하며 군 관련 대외업무와 군수 및 재정 등 군정기능을 수행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역할과 권한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군사 규모과 군사력

북한 군의 규모는 상비군으로서 육군 110만여 명, 해군 6만여 명, 공군 11만여 명, 전략군 1만여 명으로 총 128만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규군 128만여 명 이외에도 교도대 60만여 명, 노농적위군 570만여 명, 붉은 청년근위대100만여 명, 호위사령부 등 준군사부대 32만여명 등 가능한 동원병력이 762만여 명에 이른다. 북한은 14세부터 60세까지 전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762만여명을 교도대, 노농적위군(직장 및 지역 단위 조직), 붉은청년근위대(고급중학교 군사조직), 준군사부대 등에 동원시키며 예비전력을 구성하고 있다. 유사시 정규전 부대의 전투력을 보강할 수 있는 교도대는 60만 여명에 달하며, 정규군에 준하는 훈련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군의 계급은 군관 15종, 하전사 8종으로 나누어져 있다. 군관의 경우는 대원수, 원수, 차수, 대장, 상장, 중장, 소장, 대좌, 상좌, 중좌, 소좌, 대위, 상위, 중위, 소위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전사는 특무상사, 상사, 중사, 하사, 상급 병사, 중급 병사, 초급 병사, 전사로 구분하고 있다.

지상군은 총참모부 예하에 10개의 정규 전·후방군단, 91수도방어군단, 고사포군단, 1개 기갑사단, 6개 기계화보병사단, 1개 포병사단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해군은 해군사령부 예하 동·서해 2개 함대사령부, 13개 전대, 2개의 해상저격여단으로 편성되어 있다. 북한은 2014년 기존의 전략로케트사령부를 전략군으로 확대·개편하여 육·해·공군에 이은 제4군종으로 핵·미사일을 담당하는 별도 의 군종사령부로 운용하고 있으며, 사령부 예하 13개의 미사일여단을 편성하고 약 1만명 수준의 병력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전략군은 중국군의 로켓군, 러시아군의 전략미사일군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전략적 공격능력을 보강하기 위해 핵, 탄도미사일, 화생방무기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전략무기 확보를 위해 핵, 탄도미사일, 화생무기 등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북한은 총 6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아울러 장거리미사일도 수차례 발사하였다.

외교

외교정책

북한 외교정책의 기본 이념은 자주·평화·친선이다. 외교정책의 기본 이념은 당 규약,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북한 조선노동당 당 규약은 대외정책의 기본 이념을 '자주, 평화, 친선'이라고 밝히고, 대외정책에서 특히 "반제 자주력량의 단결 강화,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책동 반대,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 《사회주의 헌법》도 제17조에 당 규약의 세 가지 가치를 대외활동의 원칙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평등과 자주성, 호상존중과 내정불간섭, 호혜의 원칙"과 "내정 간섭 반대" 및 "자주권과 민족적, 계급적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헌법에 명시된 외교정책 수립 기관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이다. 1998년 헌법 개정시 국가주석 직책이 폐지된 이후부터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북한 헌법은 국무위원장의 외교 분야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한편 외무성은 외국과의 국교 수립, 협정 체결, 재외공관 운영 등을 맡고 있다. 민간 외교는 주로 당 외곽단체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등이 담당하며, 조선직업총동맹 등기타 근로단체들도 관련 분야의 대외활동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데탕트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국제정치를 해방과 혁명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북한 '자주', '평화', '친선'을 외교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한다. 이러한 노선은 당규약과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데, 조선노동당 당규약은 대외정책의 기본 이념을 '자주, 평화, 친선'이라고 규정하면서 "반제 자주력량의 단결 강화,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책동 반대,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또한 헌법 제17조에서도 당규약에서 제시한 세 가지 원칙을 외교정책의 기본이라고 재천명하면서 "평등과 자주성, 호상존중과 내정불간섭, 호혜의 원칙, 내정 간섭 반대, 자주권과 민족적, 계급적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 등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 대서방 외교를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방문, 미국·소련 화해 등 동서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면서부터다. 북한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자극되어 71년 11월 노동당 제5기 3차전원회의에서 대(對)서방 접근을 정당화하는 '당면한 제문제의 전술적 전환'을 결의하였다. 북한의 대서방 외교방식은 민간 수준의 민간외교방식과 정권 차원의 외교적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북한의 최대 우방국이자 대부분의 경제 지원을 받아오던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국가들의 붕괴는 북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였다. 반면 한국은 1990년대 초 중국 및 소련과의 외교를 정상화하였다. 이러한 국제 질서의 변화가 북한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데 경제 발전과 체제 안정을 우선하는 '실리외교'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이후 북한의 핵문제와 대북제재의 해결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집중하였다.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체제 안전보장과 대북제재 해결을 통한 경제 발전 추구 전략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김정일 정권은 2000년대 초반 남북관계 개선과 함께 유럽연합 25개 회원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이탈리아와 대사급 외교관계로 발전시키고 공식적인 외화 결제 수단을 기존 달러에서 유로화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핵문제로 인한 대북제재와 인권 문제 등으로 더 이상 발전적인 외교적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에도 적극적 나서 각국의 대표들이 북한에 초청하여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이 역시 국제사회의 외교적 고립으로 실패하였다. 특히 북한의 연이는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가 계속되면서 국제사회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특히 2016년 이후 북한을 대상으로하는 대북제재는 더욱 견고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2018년 1월 신년사를 기점으로 유화적인 외교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018년 2월 평창에서 개최된 제23회 동계올림픽경기대회에 특사단을 보내 북·미,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사전대화를 시작하였다. 2018년 유화적인 협상국면이 조성되면서 북한은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한반도 주변국들과의 정상회담을 진행하였다. 북한은 북·미 정상회담과 북·중 정상회담, 북·러 정상회담에서 공통적으로 비핵화 의제를 다루는 한편, 체제 안전보장의 문제도 함께 제기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와 2018년 6월, 2019년 2월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및 2019년 6월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진행하였다. 한편 중국과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시진핑 주석과 5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2013년 이후 한동안 소원했던 북·중 관계의 전통적인 유대관계를 회복하였다. 2020년에 들어와 북한은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한층 더 공고하게 해 나가면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포함한 대미 외교노력도 기울였으나, 북미간의 실질적인 대화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은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대외활동의 자주적 원칙하에 전략적 대미관계,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반제자주역량전략 강화를 재강조하였다. 특히, 북중 친선관계 발전을 사회주의 발전의중요한 축으로 재규정하고, '강대강, 선대선'을 대미관계의 원칙으로 표명하였다.

외교 활동

북한의 주요 외교활동은 김일성의 방문외교를 통해 추진되어 왔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6·25전쟁 남침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이래 10회의 소련 방문, 13회의 중국 방문, 그 밖에 동유럽권을 2회, 아프리카를 1회 순방하였다. 정권수립 초기에는 소련에 치중하다가 중국의 6·25전쟁 참전을 계기로 중국에도 같은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중·소 분쟁으로 북한은 자주노선을 선언하며 중·소간을 저울질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줄타기외교를 전개하였다.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한 것을 계기로 소련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으나 1961년 7월 북한이 소련, 중국과 각각 군사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의 대(對)중·소관계는 다시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1962년 10월의 쿠바사건과 중·소국경분쟁은 중·소관계를 악화시켰고 북한은 다시 중국으로 기울었으며, 1967년 흐루쇼프의 실각과 1965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북한은 소련으로 기울었다.

북한의 7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차질을 빚어 3년씩 연장되고 1965년 2월 소련의 총리 코시친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북한은 한동안 친소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의 대중·소관계는 안정되었고 자주노선도 점차 정착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은 1980년 10월 제6차대회에서 ‘사회주의 국가와의 단결강화 및 친선협조 관계의 발전’을 내세우면서 중·소와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중국으로부터는 이념적인 결속을, 소련으로부터는 경제, 군사적 실리 지원을 추구하는 등 대중·소 실리추구외교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소련이 개혁·개방노선을 채택하고 1990년 9월 한·소간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자 북한은 소련에 대해 배신행위라고 비난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11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독립국가연합(CIS)이 출범하자 모든 공화국들과 수교함으로써 구소련권과의 관계 재정립에 주력하였으며, 1992년 8월 한·중수교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여전히 중국과의 기존 유대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동유럽외교도 중·소관계의 변화 속에서 대소관계와 함수관계를 가지고 변화해 왔다. 북한의 대 동유럽권 관계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참여와 협조를 명분으로 하여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 및 기술원조를 획득하기 위한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중·소분쟁에서 북한은 동유럽국가와는 다른 공산대국을 추종함으로써 북한과 동유럽의 관계는 다소 소원하였으나 북한의 대중·소관계가 균형적 관계로 급진전되었고 중·소분쟁 시기에 대소 자주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루마니아와의 관계도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1972년 2월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방문과 때를 같이하여 북한은 외교부장 허담을 단장으로 하는 정권대표단을 소련·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동독일·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에 순방시켜 동유럽국가와의 상호정책 지지를 다짐하였고, 1978년 베트남 공산화 직후 김일성이 중국·루마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를 방문, 루마니아와는 장기무역협(1976~1980)을 체결하였고 불가리아와는 10년간의 경제 및 과학기술협조의정서(1976~1985)를 조인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와는 상호경제협동위원회 설치에 합의하였다.

특히 1984년 5월 김일성은 소련 방문을 마친 뒤 곧이어 폴란드·동독 등 동유럽 7개국을 순방하고 동독 및 불가리아와 우호 및 협력조약을 각각 체결한 것을 비롯하여, 여타 국가와도 경제·과학·기술협조강화에 합의하였다.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을 계기로 정치면에서는 3자회담 지지확보 등으로 동유럽국가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고 경제면에서는 당면한 경제난을 타개하고 경제계획 달성을 위해 사회주의권 중에서 경제사정이 나은 동유럽국가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개혁과 민주화가 추진되고 1989년 2월 헝가리를 선두로 하여 1990년 이후에는 모든 동유럽권 국가들과 한국이 수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북한이 그 동안 누려온 독점적 외교무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체제 안전과 유엔과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평화협정 체결은 북한 대미외교의 핵심 의제 중 하나이다. 북한은 1990년대부터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핵문제와 관계 정상화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김정은 집권 이후 2012년 초 북한과 미국은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미국의 대북지원 재개에 동의하는 「2.29 합의」를 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다시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이 합의는 파기되었다. 북한은 2018년 들어 트럼프 행정부와 적극적인 비핵화와 체제 보장 협상을 추진하였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두정상은 공동선언문에 북·미 양국이 '평화와 번영에 부합하는 새로운관계 설립', '지속·안정적 평화체제 구축' 등에 합의 하였다. 하지만 북·미는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범위 등에 대한 입장차로 인해 합의문 도출에 실패하였다. 이후 북·미 간에는 일정기간 소강·교착 국면이 지속되고 있으며,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미국에 대해 '적대시 정책 철회'를 재차 강조하면서 '강대강, 선대선' 원칙을 표명하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북핵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대북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제시하였고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북한의 대중국 외교는 정권 수립 이후 중국과의 관계가 때로 소원해지기도 했지만, 북한과 중국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순치 관계로 표현될 만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냉전 시기 북한은 중국과 사회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혈맹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북·중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외교 기조 또한 이념보다 실리를 추구하였다. 중국은 1991년부터 북한과의 교역에서 사회주의 진영 경제의 틀 안에서 유지해 온 구상 무역을 포기하고 경화 결제를 요구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중국이 1992년 8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북·중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하면서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한은 중국과의 협력으로 2012년 강성국가 건설 완성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북·미 대화 및 6자회담 재개를 통해 유엔 안보리대북제재를 완화하고자 했다. 김정은 체제의 대중외교는 ‘북·중 친선 우호 협력’의 목표 아래 추진되어 왔다. 중국의 시진핑 체제는 북한과 혈맹보다 정상국가 관계를 지향하면서도 자국의 경제발전과 안보를 위해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도발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북한체제의 불안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대해서는 미온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북한이 2013년 제3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중국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은 2017년 북한의 제6차 핵실험 이후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2375호 채택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북한은 중국과 5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우호적인 북·중 관계를 강화하였다. 특히 2019년 6월 시진핑 주석이 취임 이후 최초로 평양을 방문하고, 북·중 양국은 문화 및 인적교류도 진행하였다.

북한과 일본 간의 관계는 1970년대 동서 간 화해 무드와 미·중 우호협력관계 발전, 남북대화 추진 등을 배경으로 다소간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양국은 1990년대부터 수교 문제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2002년 9월 17일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평양 정상회담에서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 납치문제 등으로 북·일관계는 진전되지 못하였다. 김정은 체제의 대일본 외교는 경제적 실리 확보와 중국 의존 일변도 정책의 탈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북한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다원화된 외교를 추진하였고, 일본도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납북자 문제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북일 관계는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일본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유엔 대북제재에 동참하는 한편 독자제재를 추진하였다. 2018년 이후에도 북·일 관계는 큰 진전이 없었다.

북한과 러시아는 냉전시기에 전통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1996년 북·러 경제공동위원회 개최 등 경제협력 관계가 본격화되면서 북·러 간의 정치 관계도 차츰 회복되었다. 2000년 《조·러우호선린협조조약》이 체결되어 북·러 관계는 이념에 기초한 정치·군사 동맹 관계에서 벗어나 경제협력 파트너로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양국간 협조와 상호 협력, 북한 미사일 문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러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2001년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한·소 수교 이후 소원해 있던 북·러 관계를 정상화하고 러시아와 외교·경제 등 협력 체제를 구축하였다. 북한은 2018년 이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외교장관이 방북하여 푸틴 대통령의 친서를 통해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하고, 2019년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고위급 인사들의 왕래, 무역·경제 및 과학기술에 관한 협력, 한반도 정세 평가 및 양국 간 소통 등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서 논의하고, 회담 직후 푸틴 대통령은 북한의 체제 안전보장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 영토는 조선반도와 부속영토로 하므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국가단체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현 실효지역은 미수복영토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자국을 조선(朝鮮), 공화국, 조국, 혹은 북조선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때부터 국무원 고시에 의하여 확연한 구분을 위해 조선이란 명칭을 금지하고 북한(北韓)이라는 명칭만 쓴다.

양측의 관계는 70년대 이전에는 6.25 전쟁 등의 여파로 적대적이었고, 70년대 이후 5년 이내의 주기로 화해와 대립을 반복하였다. 한국 정치권에서 이 정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큰 상황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조선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화를 통해 통일을 하자는 주장, 이 정부가 없어져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주장,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 등이 대립하고 있다. 남북은 대화를 하며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와 같은 방안이 논의된 적도 있으나, 이것이 다시 무산되다가 대화가 추진되기도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남북 관계에서 일어난, 기존의 남북 관계를 바꾼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968년 1.21 사태
  •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 1983년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 1996년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 1999년 제1연평해전
  • 2000년 남북정상회담
  • 2002년 제2연평해전
  • 2007년 남북정상회담
  • 2010년 연평도 포격전
  • 2015년 서부전선 포격 사건
  • 2018년 남북정상회담
  •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사건

행정구역

북한의 행정 구역

북한의 행정 구역은 1직할시, 3특별시, 9도, 2지구, 1특구로 나뉜다. 수도는 평양시이며, 면적 상으로 국토의 1%이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해당 부분은 6과에서 관리한다.

자신의 실효 통치 지역에는 최말단의 20~40가구 규모의 '인민반'을 제외하면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량강도 혜산시 혜산동",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처럼 보통 3단계의 행정구역이 있다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인민반까지 적어서 주소를 나타내면 북한 매체의 경우 보통 "함경남도 단천시 송파리 30인민반"처럼 나타낸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읍 아래에 리를 두지 않으며 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많은 곳 중 군 아래나 소수의 도 직할 '지구'에는 읍·리와 비슷한 격의 "로동자구"를 두는데, 북한 지도에는 XX로동자구를 XX구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도 급의 위상을 갖는 도시로 평양시, 남포시(2010년 이후), 라선시(2010년 이후), 개성시(2019년 이후)가 있다. 이런 시의 법적 지위를 묘사할 경우에는 '직할시'나 '특별시'로 부른다. 다만 주소나 지명을 언급할 때는 '평양시', '개성시'처럼 부른다. 함흥시, 청진시, 신의주시, 원산시처럼 이런 시 중 일부보다도 규모가 더 큰 시도 존재하며, 라선은 웬만한 도소재지에 해당하는 시보다 인구가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 직할시
  • 특별시
  • 지구
  • 특구

경제

북한의 국내 총생산 (GDP). 2016년 기준 북한 GDP: 약 160억 달러,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 GDP: 약 50억 달러
미국 항공우주국이 2000년에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북한 대부분의 지역이 어둡게 나타난다.
2015년경의 청진시 수남시장
2014년 완공된 대표적 치적사업물인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지금은 폐쇄된 개성공단.
2017년 초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신의주시

부분적인 시장화 정책이 도입되었으나, 전반적인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인당 GDP는 구 공산권 국가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경제상황이 어떠한지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북한의 1인당 명목상 GDP는 2012년 기준 583달러, 인구는 약 2500만 명이며 수도 평양의 인구는 약 300만, 국내 총생산은 약 123억 달러로 추계되고, 이것은 남한 1인당 국민소득의 40분의 1, 국내 총생산이 남한의 80분의 1에 해당하며 2012년 UN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80위인 개발도상국이다. 곽인옥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북한 내부 현금보유액은 총 1,000억달러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그 중 민간 부문에서는 430억 달러, 정부 부문이 700억달러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평양 주민의 100만 명이 부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3만 달러 이상인 경우가 많으며 평양 외곽 지역까지 따지면 100만 명 보다도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GDP 규모로 따지면 평양만 2,700달러가 넘는다. 평양시는 상류층인 왕돈주와 대돈주와 중돈주가 합하여 5%이고 중류층인 소돈주가 15%가 있고 중산층인 돈주급은 20%가 존재하고 있다. 그 반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 지방에는 대돈주 2부류와 중돈주를 합한 상류층은 1.7%가 존재하고 중류층인 소돈주는 4.5%가 존재하며 특히 돈주급은 전체 지방의 2%가 존재한다. 즉 지방은 대돈주와 중돈주 그리고 소돈주를 포함한 상류층 5%, 돈주급과 중간층을 포함한 중류층 25%, 150달러를 버는 하류층 70%로 구성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그 후의 통제경제는 일관해서 중공업의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를 중시해 왔다.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5개년 계획, 1961년 7개년 계획, 1971년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력을 보였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폐쇄적이고 선전선동을 앞세운 공산권 국가들이 경제성과를 대외에 과도하게 과장한 사례가 많은데 소련만해도 경제성과를 5배이상 허위로 대외에 알렸던 걸 감안할 때 60~7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개한 경제성과는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일제시대 건설된 산업시설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에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60~70년대까지 공업부분의 경제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북한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을 시행했고, 1980년대 동구권과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노선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우호가로 거래하던 호혜가 사라졌고 소련과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원조와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당시 주요 1차 자원을 동구권에 의존해왔던 북한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이는 1차 자원 생산지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 중공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한 북한에는 큰 경제적 위기였다. 그리하여 1987년 제3차 7개년 계획과 여러 발전 운동-천리마 운동-자력갱생 등으로 계획경제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2003년의 국내총생산(GDP)은 228억 5,000만 달러로 추계된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개방과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상황을 이겨냈지만 북한은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은 계속해서 가중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난은 북한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었다. 북한 정권은 1993년 공식적으로 계획경제의 실패를 자인했다.

2002년 이후에 북한 정부는 식량난과 경제난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2002년 7월 1일에 7.1 경제개혁조치를 실시하여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 관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정부 관리들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에 파견하여 이른바 자본주의 학습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러나 이 조치의 실시 결과로 계획 메커니즘을 제외한 시장형 메커니즘을 전부 무효화 시키면서 경제가 다시 악화되었다.

북한은 장마당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2004년부터 시장을 개장하여 시민들이 생활 소비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시장은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 거리 시장과 만경대 구역에 있는 칠골시장이 있다. 통일 거리 시장은 중국의 상품 및 남한과 미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진품이 아닌 것들도 있다.

하지만 2009년에 북한의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결국 물가가 폭등을 하면서 결국 2010년 2월부터 다시 시장이 개방이 되었고 5월 26일에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서 5.26 지시를 발표하여 부분적인 경제 개혁안들이 실행을 하여 시장경제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였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임수호 책임연구위원의 의견에 따르면, 북한은 생산수단 사유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들의 의무 달성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업소 지표도 확대했으며 특히 농지의 돈을 주고 1년 임대도 가능하다. 현재 북한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향후 개혁 성과에 따라 중국식이나 베트남식 개혁 모델을 따라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혁을 심화시켜나갈 것으로 전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도 시장 경제의 도입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김정은이 단행한 각종 경제개혁조치가 더해진 결과라는 게 많은 탈북자와 전문가의 분석이 더해졌으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사실상 공산주의가 붕괴가 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고 전세계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기아문제

북한의 식량난이 어느 정도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식량난은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식량난이 과장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었다. 1998년을 기점으로 대량아사 사태는 사라졌으나, 만성적인 식량 부족]은 200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2009년 북한은 내각하에 있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을 폐지하고, 민경협 산하에 있던 민족경제련합회(민경련)를 개편해 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로 옮기는 등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하거나 개편했다. 하지만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 개편한다는 설에 대해서 남한 정부나 전문가는 가능성이 낮거나 남북관계 차단의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북은 라면 대량생산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발표했다.

2011년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북한의 기아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중단한 대한민국과 미국 탓이라고 발언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의 월스트릿저널은 원조의 대가로 어뢰와 방사포공격으로 돌려받은 한국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2011년 10월, 유엔 산하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 발레리 아모스 국장은 "현재 북에 필요한 식량 530만t 가운데 100만t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북 어린이 3분의 1이 만성적인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일일 식량 배급량이 600g에서 200g으로, 북에 대한 외부 사회의 지원도 1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고 주장하였다.

유럽연합(EU)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은 17일 세계 식량의 날(10월 16일)에 즈음해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등이 최근 발표한 '글로벌 기아 지수(GLOBAL HUNGER INDEX·GHI)' 보고서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이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5세 미만 아동의 발달장애율이나 사망률은 많이 줄었지만 전반적인 기아지수는 여전히 28.6점으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2015년 이후 북한에 결식자가 거의 없다는 응답도 나왔음을 알수가 있는데 하루 식사를 몇회 했느냐는 질문에 거의 90%는 하루 세끼 이상이라고 답했음을 알수가 있고 주식으로는 백미를 먹었다는 응답이 70%, 고기에 대한 섭취율은 50%가 일주일에 한두번이라고도 하였으며 특히 매일이라고 답한 비율도 상당히 높았다.

전력문제

대한민국 통계청 등에 따르면 2014년 북한의 발전량은 216억 kWh로, 한국의 70년대 후반 1인당 발전량 수준에 불과하고 같은 해 한국의 발전량은 5220억 kWh로, 북한의 24배에 달한다.

북한의 발전설비용량은 2007년 795만kW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들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희천발전소를 비롯한 발전소 잇단 준공으로 2014년 725만kW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 1987년에 발표한 제3차 7개년 계획의 발전 설비 용량 목표치인 1천700만kW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대한민국 통일부가 지난 2013년 탈북자 1,07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 조사를 실시하여 북한 내 공장기업소의 하루 평균 전력 공급 시간은 거의 12시간으로 조사되었다.

전력 공급 중단 시 자체 발전을 통해 전력 공급을 한 곳은 14.9%에 불과하고 2011년 이후 공장 내 생산라인 평균 개수는 거의 19개로, 이 가운데 가동된 라인은 절반 미만에 그쳤다.

문제는 북한 전력 수급의 60%를 담당하는 수력 발전이 가뭄과 겨울철 갈수기 등 기상 여건에 따라 전력 생산이 불안정하다는 데 있고 2015년 북한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2014년에 이어 2015년 6월까지 이어진 가뭄으로 수력발전소의 가동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한도 정책적으로 태양열 이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김정은은 2010년대 중반부터 태양열 등을 활용한 자연 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해 이용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북한에서 태양열 패널 가격은 2 - 3년 전에 비해 많이 내렸고 태양열 발전 시설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이 자유로워 열 효율이 개선돼 패널의 크기나 무게도 줄었으며 웬만한 가정에서는 대부분 태양광 설치가 끝나 수요도 감소세로 보이고 있고 대신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에서 사용하는 대용량 태양열 시설은 늘고 있다.

데일리 NK가 북한의 개성이나 원산 등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평북 염천 등 내륙 산간 도시를 촬영한 사진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세대별 태양광 발전 보급률은 50%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밥은 먹고 살 만한 주민은 거의 모두 태양광 패널을 달며 크기가 작은 건 150W 태양광 패널이고 큰 것은 200 - 250W라고 밝히고 있음을 알수가 있고 사용 시간은 최소 8시간에서 최대 13시간까지 사용을 할 수 있으며 예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전기가 일정하게 안 와서 인버터도 따로 해야 했는데 요즘에는 태양광 패널에 축전지와 인버터가 함께 나온다고 밝히고 중국에서 파는 태양광 패널도 북한 실정에 맞게 인버터가 같이 나와서 이제는 인버터를 잘 안 산다고 밝혔다.

화폐개혁

2009년 11월 30일에 북한은 17년 만에 구 1000원을 신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하였다. 이는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한 2002년 7·1 경제개혁조치 이후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주민들이 보유해 암거래 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 자금을 끌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가구당 구화페 100,000원을 신화폐 1,000원으로 교환해주고 그 외에는 교환해주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서 한 사람당 신화폐 500원(구화폐 50,000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즉 4인가구인 경우 정부으로부터 지급 받은 2,000원과 1,000원(구화폐가 100,000원 이상이 있었을 경우임)을 합한 3,000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은 모두가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점과 구화폐가 단 10,000원도 없던 하위층의 경우엔 공짜돈이 생겼다는 점, 또 2-3,000원정도의 월급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하, 중상위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화폐 교환조건을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여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일의 실정을 숨기기 위해 박남기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초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조선로동당 전 계획재정부장이 '남조선 간첩' 혐의를 받아 숙청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실제는 충언을 하다가 결국 김정일의 분노를 사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음을 알수가 있다.

하지만 2013년 이후 2019년 북한연구학회 추계학술회의에서 반론이 나왔는데 북한이 2013년 이후 극심한 물가 상승을 잡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당국의 통화 정책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왔다.

정연욱 박사에 따르면 쌀 가격 등으로 추정한 북한의 물가 상승률은 2011년 229%까지 폭등했지만, 2014년에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5% 이내로 안정됐음을 알수가 있고 계속 안정중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새로운 중국식 경제개혁 준비를 2011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대외 경제 부서의 과장급 혹은 부원들을 파견보내어 중국식 경제개혁 사업을 지시하였다.

이때 12월 14일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 임대정책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기로 결론내리고 2012년 4월에 경제개혁을 시행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때부터 상무조가 편성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 결국 김정일이 사망하였는데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중단없이 계속 4월로 확정이 되어 추진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한마디 때문에 4월의 경제 개혁 지시가 6월로 미루어져 있었으나 간신히 무마되어 6월에 내각 상무조가 편성이 되어 12.1 경제개혁조치로 시행이 되어 독립채산제 및 포전 담당 책임제 시범 실시를 한 끝에 3월 1일 3.1 경제개혁조치가 실시됨으로 북한 전역에 독립채산제가 실시가 되었다.

2014년 5월 30일에는 김정은이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 내각 기관의 관리들을 모아놓고 5.30 담화를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고 이때 담화는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는 공장, 기업소, 협동조합이 생산 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에 기초해 실제적인 경영권을 갖고 기업 활동을 창의적으로 해 조선로동당과 국가에 지닌 임무를 수행하며, 근로자가 생산과 관리에 주인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게 하는 기업 관리 방법이라고 규정했다.

기업소는 제품 개발권과 품질 관리권, 인재 관리권을 행사해 지식 경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기술, 새제품을 적극 개발하고 제품의 품질을 개선해 기업소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했다.

더불어 과학자와 기술자가 근로자들과 함께 첨단 돌파의 주인으로 내세워 기업소가 새 기술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그리고 차등 임금제를 수립하여 월급을 일한만큼 많이 주어야 하고 공정하게 받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였음을 김정은이 담화로 발표를 하였다.

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의 말에 의거하면 현재 북한의 최대 월급 인상률은 일반 공업인에게는 25배의 월급 인상률이 올라 15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고 일반 편의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서는 10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환산하면 현재 계획형 기업에도 상당한 액수가 인상이 되었으며 현재 가동률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에 60% 가까이 가동률이 올라갔다.

은행에 자금을 예치함으로써 은행이 기업에게 넘겨줌으로 특히 영향력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기반을 담은 규정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위험 요소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투자방식이다.

차후 채무 상환 불응시 현금 계좌 선 압류 및 현금 수입이 들어오는 즉시 선입금되는 조치로 인한 강제 집행을 통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 조항들도 수록이 되어 있다.

특히 고정 자산을 임대하거나 혹은 내각에 관할하에 소규모 기업에게 이관할 수 있음을 차후인 2015년에 공식화하였으며 이를 2015년 기업소법에 명확히 하였다.

교통통신

평양지하철도

북한의 육상수송망은 '주철종도'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철도가 육상수송의 중심이고 도로수송과 해운수송이 이를 보조하는 구조이다. 북한의 수송부문에 대한 기본적 목표는 자력갱생 및 안보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따라서 철도교통 또한 북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자원을 이용함으로써 유사시에는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동원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의 철도정책은 전철화, 표준궤화, 중량화의 3대 정책을 축으로 추진되었다. 철도 중심의 수송체계는 1970년대 후반무렵 철도수송 능력 향상, 전철화, 철도신설 등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갖추어졌다.

2018년 기준 북한의 철도 총연장은 5,289km이며 이중에서 81.2%가 전철화 되어 한국의 73.5%에 비해 전철화율이 높다. 북한이 전철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는 전기기관차의 마력이 디젤기관차에 비해 높기 때문에 경사가 심한 북한 산악지형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석유류를 연료로 하는 디젤 기관차에 비해 수력발전 등으로 전력을 자급할 수 있는 전기기관차를 통해 동력의 자급화를 꾀하고자하는 의도도 있다.

북한의 도로는 철도를 보조하는 운송 수단으로서 철도역과 주변지역간의 연결기능을 담당하며 주로 150~200km 내 단거리 운송 위주로 건설되었다. 2019년 기준 북한의 도로 총연장은 26,180km로 한국의 111,314km 대비 23.5% 수준이다. 그리고 고속도로는 658km로 한국의 4,767km 대비 13.8%이다. 질적인 면에서도 고속도로를 제외한 도로 포장율은 10% 미만이며 간선도로 대부분이 왕복 2차선 이하이다. 또한 노면의 균열이 심하며 평탄성이 낮아 평균 주행속도가 50km/h 이하로 제한적이고, 도로 안전시설 설치도 부족하다.

북부는 고산지대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부에는 동고서저의 낭림산맥이 남북으로 지나고 있어 동서간 연결 도로가 적다. 또한 대부분의 도로는 계곡이나 하천을 따라 건설되어 교량과 터널이 많다. 북한은 초기 도로 건설의 기본 방침으로 산간지대의 교통문제 해결, 농촌경리의 기계화 실현, 농경지를 침범하지 않는 도로 건설, 도로운송은 30km 이내의 단거리 운송에 국한하는 것으로 원칙을 수립하였으며, 현재 국토건설총계획에 근거하여 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북한의 항만시설은 동해의 청진, 나진, 선봉, 단천, 흥남, 원산항과 서해의 남포, 송림, 해주의 9개 무역항과 신의주, 신포 등 15개 연안항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에는 동해안 나진, 선봉, 청진, 단천, 흥남, 원산항과 서해안 해주, 남포, 송림항 등 무역항 9개, 원양수산기지항 5개, 어항 30여개 등이 있다.

무역

냉전시대에 북한 경제는 자립경제발전 노선, 사회주의 우호 무역 방식에 의한 구소련으로부터의 원유 등 전략물자 수입 등의 영향으로 대외무역 의존도가 낮은 수준이었다. 북한의 대외 경제 관계는 북한 내수시장에서 생산되지 않은 생산요소들의 수입을 위해 최소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경제난 이전 북한의 무역액은 1990년 42억 달러가 가장 높은 규모였다.

그러나 1990년대 구소련의 체제 전환과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북한의 대외무역은 1998년 14.4억 달러까지 추락하였다. 북한은 탈냉전 이후 시장경제체제로 단일화된 국제경제 질서 변화에 대응해 새롭게 대외경제관계 구축을 모색해야 했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지 않아 투입 원자재 수입이 어려웠으며, 이와 함께 외화난에 직면하게 되고 무역 부문의 붕괴도 겪게 되었다.

북한의 대외무역은 200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회복세를 나타내 2016년에는 65.4억 달러로 여타 경제부문과 달리 1990년대 이전 보다 증가세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2016~2017년 6차례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 이후 2017년부터 무역액이 감소세를 보이고 있으며,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한번 큰폭으로 감소하였다. ’20년 대외무역 총액은 8.6억달러로 무역수지 적자는 전년 대비 73.4% 감소하였다.

부동산

일단 기본적으로 북한 당국에서 진행하는 모든 건설사업에는 군이 개입되어 있다. 조선인민군은 사실 군사 훈련보다 건설 작업에 더 많이 투입된다. 북한 국영매체조차 '국영-건설 역군'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때문에 인건비가 안들고 자재비만 드는 데다가 최근 들어 경제 발전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북한에서 건설 사업을 성공시키게 되면 고수익과 명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이미 북한 곳곳에서 주택 부족을 타개하고자 주민들이 불법으로 규정된 주택 매매 그 자체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적어도 1974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함북 경원군 아오지리에서 청진으로 이사하며 집을 1천5백원 받고 팔았다."고 할 정도로 이런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평양 광복거리의 아파트는 7백 달러, 당시 북한 돈으로 60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취재 당시 이야기인지 평양 광복거리 아파트는 40평형이 3천달러정도에 거래된다고 하였다. 평양에서는 고급아파트의 경우 방3칸짜리는 3천달러, 2칸짜리는 2천5백달러 정도고 통상 5백~3천달러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평안남도 안주에서는 20평 아파트는 통상 1천~1천2백원, 단독주택은 1만원 정도에 거래된다고 한다. 자강도의 중심 도시 강계에서는 2칸집이 약 1만5천~2만원에 거래되며 화장실 딸린 2칸 집은 2만5천원 정도라고 한다. 개천에서는 아파트가 통상 1만원 정도에 매매된다고 한다. 특히 국경도시인 신의주시에서는 2칸 짜리 독채의 경우 3만~7만원 정도인데, '직장을 다니면서 집을 만들어 파는 사람도 있다.'라고 전하며 이 시기에 이미 집장사가 북한에서도 존재했다고 전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 특성상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기 때문에 보통 공무원이나 국가가 주인으로 명시되어있다. 문제는 정작 사유재산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거래가 되긴 하지만 아파트 양도를 위한 체계가 제대로 없다는 것이다. 같은 구역내에서 집을 맞교환하는건 법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거래하는 듯하다.

남한은 고층으로 갈 수록 가격이 높아지는 경향이 많은 반면, 북한은 저층일 수록 비싸다. 전기가 공급되는 시간이 한정되기 때문에 엘레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고 양수기도 작동하지 않아 수도도 끊기기 때문에 고층일 경우 엄청난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1~2층보다는 5층 정도가 비싼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한 중국과 북한 국경지역의 주택은 다른 지역보다는 가격이 나간다고 한다. 중국 휴대전화를 이용할 수도 있고, 중국을 통해 사업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도인 평양보다는 낮다. 혜산의 고급아파트가 3만 달러 정도이지만, 평양의 만수대 지역에는 10만 달러에서 가장 비싼 건 25만 달러까지 한다고 한다.

2019년에는 대북제재 여파로 평양의 아파트 가격은 많이 하락하였고, 몇 달 만에 반값이 된 아파트도 존재한다고 한다.

인문사회

주민

한반도 지역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한반도 북부에는 과거 퉁구스계 민족(말갈족·여진족 등)의 유입이 잦았으나, 한국 전쟁 이후 외부 민족 유입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현재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한민족이며, 매우 소수의 외국인 거주자(주로 중국인, 그 밖에 러시아인, 몽골인 등)가 있다. 그리고 1950년대~1970년대에 월북한 대한민국 주민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인구

2017년 북한의 조선중앙연감은 북한의 인구를 2015년 기준 2503만명이라고 적시하였다. UN이 2019년에 한 추계로는 2020년 기준 인구는 2,577만 8,815명이다. 국내 학자들도 UN에 제출한 자료가 사실이라면 이 정도 인구가 된다고 본다. 북한 당국이 공표한 인구는 가장 최신인 2008년 인구가 2,405만 2,231명이다. 대한민국(남한) 인구의 절반, 남북한 전체 인구의 1/3에 조금 못 미친다.

다만 인구의 경우 이석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와 같이 진지하게 인구의 왜곡 가능성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연구 결과에서는 1,900만명 미만으로 표기된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전자가 맞다. 소수의 화교를 제외하면 한민족으로 구성된 단일 민족 국가이다.

언어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한글로 표기된다. 표준어는 문화어라고 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방언에 바탕을 둔 언어를 표방한다. 표기상 한자의 사용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두음법칙(예: 북-녀자, 남-여자)과 사이시옷(예: 북-시내물, 남-시냇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모의 사전 배열 등에서도 대한민국과 차이가 있다. 어휘는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활용한 어휘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 외래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어, 러시아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일상 생활,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와 통역 없이 소통이 가능하나 의학 용어와 같은 기술적 어휘에는 차이가 커 이 부분은 의사소통이 어렵다.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나 중국과의 경제교류 등의 교류강화로 중국어를 많이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는 소련 해체 이후 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지역 방언으로 방언연구회(2001)의 구분에 따르면 서북 방언, 동북 방언, 중부 방언이 통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교육

북한 교육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한다. 또한 북한의 교육제도는 문맹률을 낮추어 사회주의를 건설을 위한 인재 양성에 목적을 두고 있다. 북한의 모든 교육기관은 조선노동당의 지도와 감독을 받는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모든 정책을 결정하며, 당중앙위 산하에 있는 과학교육부에서 세부 계획을 수립한다. 시도 지방의 교육행정 기관과 모든 학교 당의 감독을 받는 구조로 되어 있다.

김정은 정권 이후 '전반적 12년제 의무교육 강령'이 발표면서 학제를 개편하였는데, 소학교를 4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중학교 6년을 초급중학교 3년과 고급중학교 3년으로 세분화 하였다.

북한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토플 응시자 평균점수는 2006년의 경우 120점 만점에 평균 69점으로, 대한민국의 72점, 일본의 65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

학생들의 지능 선발 및 교육을 위해 과외 교육 기관인 학생소년궁전과 학생소년회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기관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운영되며, 평양시와 지방을 통틀어 약 2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면 대부분 이곳에 가서 오후 5시까지 과외 학습을 받고 하교한다.

평양시의 학생소년궁전은 대표적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다. 그중에서 평양학생소년궁전은 김일성 주석에 의하여 1965년에 세워지고, 평양시 중구역에 있다. 두 번째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1988년에 세워져 현재 만경대구역에 있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은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탑식으로 건설되어 있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 곡선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 외에 평양시 승호구역에 승호학생소년회관이 있고, 자강도에는 배움의 천리길 학생소년궁전과 평안북도 정주시에 정주학생소년회관, 그리고 황해북도 개성시에 개성학생소년궁전과 량강도 삼지연지구에 삼지연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고등교육의 중심 기관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이며, 이 외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있다. 또한, 라디오와 인터넷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김일성방송대학이 마련되어 있다. 대학교는 약 280여 곳이 있으며 30만 명 이상이 배우고 있다.

사회통제

북한에서 노동당은 최고 권력기관으로 행정·사법·입법부의 상위에 위치한다. 기관의 간부들은 노동당 당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모든 기관에는 각기 당위원회가 조직되어 당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

일반주민들을 직접통제하고 있는 노동당의 하부조직은 도·시(구역)·군당위원회와 최일선 조직인 당 세포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당조직은 주별로 학습자료를 만들어 토요일에는 노동당 본부로부터 하부 지방 당조직, 내각․군․보위․보안 등 모든 권력기관들과 일반 주민들에게 김일성·김정일 ‘노작’, 당정책 해설, 자본주의 병폐 등 주민사상교육을 정례적으로 실시해오고 있다. 특히 상·하반기별로 3~4일의 당원 집중학습기간을 정해 놓고 당원들에 대한 사상교육과 총화를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당적 통제 이외의 주민통제 방법으로 조직생활을 통한 통제를 꼽을 수 있다. 모든 주민들은 직업총동맹(직총), 김일성-김정일주의 청년동맹(청년동맹), 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여맹) 등 노동당 외곽단체인 각종 사회단체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며, 이 단체들은 노동당을 정점으로 그 지도·감독을 받고 있어 주민들은 이중으로 당의 통제를 받고 있는 셈이다. 또한 정치 사찰기관들이 주민들의 동태를 감시·통제하여, 반당·반혁명세력과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동향을 감시·통제하는 정치사찰 기관으로는 국가보위성과 군인들의 사상동향을 감시하는 군 보위국이 있다. 이 기관들은 주민들과 군인들의 사상 동태를 감시하고 반당·반혁 명 세력을 색출하기 위한 목적을 두고 있다.

국가안전보위성는 형사재판 제도와 별개로 운영되는 북한 최고의 정치사찰 전담 기구로서 정치사상범의 감시, 구금, 체포, 처형 등을 자체로 결정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국가안전보위성는 김정은 위원장 신변 호위, 각급 행정기관 내의 수사, 사회단체·공장·기업소 감시, 북송교포 감시, 우편검열, 유무선 통신 도청, 비밀문서 관리, 장병 동태 감시를 포함하여 온갖 반체제적․반국가적․반사회적 행위들과 요소들을 척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국가보위성은 중앙에서부터 도·시(구역)·군 및 리·동, 기관·기업소 및 군부대(군보위국)에 이르기까지 요원을 파견하여 행동을 감시하고있다.

사회안전성은 공공질서의 유지·강화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산보호 기능을 수행하며 주민들의 개인의 신원조사와 경제적 통제 및 사생활 감시와 사회질서 및 치안유지를 맡고 있다. 특히 평양시와 평안북도 신의주, 양강도 혜산 등의 북중국경도시들과 황해북도 개성, 강원도 고성 등의 군사분계연선 지역들에는 군․보안 기관의 엄격한 심사절차를 거쳐 승인을 받은 후에 이동할 수 있다. 사회안전성은 각 도와 시(구역)·군에 보안국, 보안서를 두고 있으며 분주소(파출소)를 운영하고 있다. 보안원은 현역 군인이나 제대군인 가운데 출신성분과 당성을 고려하여 선발한다.

이 밖에도 5호담당제, 인민반과 각종 학습반을 통하여 이중삼중으로 통제하고 있다. 5호담당제는 전체 가구를 5호씩 나누고, 그 속에 충성분자 1가구씩을 배치하여 주민들의 비행을 감시하도록 하는 통제 수단이다. 5호담당제는 1958년 7월부터 1973년까지 실시되었으나 지금은 폐지된 상태이다. 인민반은 통상 20~30가구로 구성되며 반장과 선동원 등이 감시·감독한다.

인권

세계 유수의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북한의 인권상태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인구의 0.85% 정도인 15만 4천여 명의 주민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이 재판 없이 이들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곳에서는 심문, 강간, 고문, 강제노동, 의료 서비스 배제, 강제낙태, 생체실험 등이 행해진다. 또한 이곳에서 그들은 결혼의 자유도 박탈당하며 턱없이 낮은 식량배급을 받고,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된다.

또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북한이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아편 재배에 어린이를 동원하고 있는 실태를 지적하였으며, 同 위원회에 출석한 북측 대표단은 유사시 미성년 아동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할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북한에는 평안남도 개천(14호 관리소)과 북창(18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15호관리소), 함경북도 화성(16호 관리소), 청진(25호 관리소), 회령(22호 관리소) 등 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

종교

기본적으로 북한은 종교를 '미신'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은 종교가 반동적이고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며,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어 혁명 의욕이 상실되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북한의 철학사전에서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어떤 종류의 종교도 현실이 인간의 의식에 환상처럼 왜곡되어 반영된 것으로 그 내용은 '전체가 허위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국제사회는 종교의 자유 보장을 인권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이에 북한은 헌법에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리용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며 형식적으로 종교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에서 천도교는 민족종교로 인식되어 다른 종교에 비해 그나마 활성화 되 어 있는 종교이다. 그러나 천도교는 북한 주민들에게 종교적 활동보다는 정치 단체로서의 활동이 더 많이 인식되고 있는 편이다. 한편 북한의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1946년 발족)에 속해 있다. 이 연맹은 조선불교도연맹(1945년 발족), 조선카톨릭협회(1988년 발족), 조선천도교중앙위원회(1946년 발족)와 더불어 조선종교인협의회(1986년 발족)를 구성하고 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북한에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교회가 2,850여 개에 달했으나, 현재 북한의 공식교회는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2개뿐이다.

1955년경에는 북한에서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이 사라졌거나 지하화 되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종교 자체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1972년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북한 내에도 종교 활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그간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하던 이른바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을 재개시켰다. 2000년 6·15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활성화되고 한국 민간단체들의 교류지원이 확대되면서 북한 종교단체들도 한국 종교단체들과의 교류·협력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주로 북한지역에서 종교행사들을 개최하면서 북한이 필요한 물자나 설비 등을 지원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명절

북한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국가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을 말하며 시기는 대한민국과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2일까지로 대한민국의 신정(1월 1일)보다 오래 휴식을 취한다. 국가명절은 대표적으로 8개를 기념하는데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16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노동절(5월 1일), 조국 해방일(8월 15일), 공화국 창건일(건국일,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10월 10일), 사회주의헌법절(12월 27일)이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까지는 연속적인 축제기간이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

기념일으로는 노동자들의 의무 휴식을 위한 농업근로자절(3월 5일), 어부절(3월 22일), 탄부절(7월 7일)이 있고, 조선광복회 창건일(5월 5일), 철도절(5월 11일), 국제아동절(6월 1일), 김일성 서거일(7월 8일),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일(10월 17일), 학생독립기념일(11월 3일)이 있다.

문화

문화 활동은 북한 정부에 보호되고 장려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역사 박물관이나 영화관, 도서관이 정비되고 있다. 정부는 국립의 교향악단, 극장, 무용단 등을 갖고 있다. 북한은 모든 면에서 군사문화와 연관 짓고 있으며 농사나 공장에서의 물자 생산을 "농업전투", "공업전투", "생산전투" 등의 단어로 표현할 만큼 아주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인뿐만 아니라 철도공무원도 군대식 계급을 부여(역장 – 대위, 차장 – 소위, 개찰담당 – 상등병, 기관사 – 중사 등)할 정도이다.

예술

문예활동은 당책 구현, 공산주의 선전, 공산주의적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와 주체사상 강화 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정책 또한 선전과 선동의 일환으로서 문학이나 예술을 이용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이른바 공산주의헌법 45조에 규정되어 있는 `민족적 형식에 공산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공산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방법이 그 기조가 된다.

북한은 연극을 "인간의 생활과 배우 연기를 통하여 무대적 형상으로 펼쳐 보여주는 극예술의 기본 형태"로 정의한다. 북한에서 연극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지만 1970년 이후 점차 그 중요성이 낮아지고 있다. 김정일 시대에는 선군담론과 함께 군인, 군인가족이 주인공인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주요 내용은 김정일과 당을 위한 군인들의 영웅적 투쟁이며 희극성을 특징으로 한다. 김정은 위원장 시대에도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연극은 경희극과 같은 희극 공연이다. 공연의 특징은 화려해진 의상과 무대장치를 들 수 있다. 2016년 창립 70주년을 맞는 국립연극단은 김정일의 현지지도 30년을 기념하며 평양 국립연극극장에서 5대 혁명연극 중 《혈분만국회》를 공연하는 등 혁명연극의 재공연에 주력하고 있다.

북한은 무용을 "인간의 사상감정과 생활을 예술적 율동으로 반영하는 예술형태"라고 정의하며 형식적 측면에서는 민족의 정서와 색채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 고전무용의 춤사위가 동작의 기본을 이루지만 형식에서 신체미, 율동미와 더불어 힘, 규모, 조직을 과시하는 특징이 있다.

북한이 자랑하는 4대 무용명작 《눈이 내린다》, 《조국의 진달래》, 《키춤》, 《사과풍년》은 모두 혁명무용으로 불리는 현대무용이다. 북한 무용의 특징은 전투성이 짙고 선동하는 동작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북한은 집단체조(매스게임)를 공연예술 형식으로 만들어 국가기념일이나 국빈 환영식에 수만명이 동원된 화려한 집체예술을 연출하고 있다.

체육

북한의 체육정책은 주민들을 공산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투사형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우상화와 국방력 강화의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정치외교수단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며, 반미사상, 대남전략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다. 체육정책의 기준은 공산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들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일 개교한 평양체육대학과 1977년에 설립한 중앙체육학원, 그리고 73년부터 각 도에 1개교씩 설치한 고등전문학교를 두고 있으며,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에 체육학부가 있다. 최대의 체육시설은 김일성경기장이며, 그 밖에 지방도시인 혜산· 함흥· 사리원· 원산· 신의주 등지에 경기장을 두고 있다. 실내체육관으로는 배구· 농구· 탁구· 체조 등 11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는 원산· 남포· 함흥· 강서 체육관 등이 있다.

문학

북한의 문학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이며, 일제강점기 1920년대 활동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통칭 카프)이라는 문단이 전신이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 사실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면서 지식인들을 개몽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60년대에 숙청당한 한설야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가입했다. 한설야의 작품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읽을 정도로 해금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저서 문학예술론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고쳐서라도 읽게 하면 좋다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문학 2003년 5월호는 한설야의 작품 《승냥이》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행적을 찬양하는 문화를 "수령형상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졌다. 이 문화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북한이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한편, 역사 문학이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문학, 외국 문학이 있는데, 역사 문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홍명희와 그의 손자 홍석중이다. 홍명희의 작품인 "림꺽정"은 조선 전기의 도적인 임꺽정을 그린 역사적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제국주의에 맞써 투쟁한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도 역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로써, 그도 역시 북한 문학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소설로는 중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시인으로는 조기천과 백하와 신흥국 등 이 있는데, 조기천은 시 "백두산"과 "휘파람"으로 유명하다. 북한의 신흥시인 신흥국은 얼마 전 음력설에 풍경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북한의 문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본따 만든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은 당과 깊이 연관되어 당의 통제를 받으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북한의 문예정책은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인데 한설야는 1953년 9월 26일 전국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보고에서 "우리의 문학예술은 당적인 문학예술"이라고 천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조선문학> 1953년 10호, 125쪽).

음악

악단으로는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조선인민군군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등이 있다. 근래 들어서는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그리고 청봉악단 등이 창단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반면, 북한의 여러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가수 안재욱의 노래를 부르다가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

평양시에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윤이상 (尹伊桑)의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다.

대부분 북한의 노래는 혁명가요와 선전가요들이 많지만, 꽤 서정적인 노래도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다시 만납시다〉, 〈우리 민족 제일일세〉, 〈반갑습니다〉는 보천보전자악단의 단원인 여성가수 리경숙이 부른 노래로 조선민족제일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며, 〈 기러기떼 날으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의 주제곡이다. 이밖에 혁명가요로 〈적기가〉, 〈총동원가〉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실미도》라는 영화를 만들 때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쓰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소동이 있었다.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이미 부른 노래를 전자악기로 연주한 경음악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격대 말파리 달리네〉, 〈통일아리랑〉, 민요 〈바다의 노래〉가 있다.

영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데 애를 써서, 자신이 직접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영화는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일제강점기 때 생애를 그린 《조선의 별》, 1992년에 해외동포들의 행적을 그린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예술영화 《온달전》, 스포츠를 장려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만든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 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 때 도적, 임꺽정을 배경으로 하는 예술영화 《림꺽정》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에서는 정책을 따르도록 선동하거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상향시키려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과학영화가 방송되고 있는데, 관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의 20시 보도가 끝나기 전에 과학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방송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 〈평양의 4계절〉, 〈강냉이오사리종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콤퓨터상식〉, 〈우리나라의 최초의 철갑선-거북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자〉, 〈3·26전선공장이 어떻게 모범기업이 되었는가〉, 〈조선의 천연기념물 클락새〉, 〈룡정어를 많이 기르자〉, 〈우리나라의 저작권소유법〉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의 17시 보도 이후 방영되는 아동영화가 인기가 많다. 아동영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어린이가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그림을 그려서 만들거나, 인형극을 통해 만드는 경우가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영화는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최근 컴퓨터를 이용해서 새로운 아동영화를 제작하는 중이며, 이 촬영소에 대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직접 기자들이 취재하기도 했다. 아동영화의 문학은 촬영소의 영화문학가가 담당하지만,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을 기념하여 전국 아동영화문학현상모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당선된 문학작품이 아동영화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아동영화의 대사는 방송연극단에서 담당한다.

아동영화의 내용은 도덕, 예절, 과학기술에 관해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아동영화는 다부작 아동영화인, 《령리한 너구리》와 《소년장수》가 있다. 그 중 《령리한 너구리》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과학의 원리로 쉽게 풀이해 과학 교양을 어린이들에게 함양시키는 아동영화이며, 《소년장수》는 "간약한 호비와 착한 쇠매의 결전"이 내용으로, 권선징악을 주요 내용으로 삼은 아동영화이다. 이외에도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딸이 인삼을 찾아 험난한 일을 하는 《산삼꽃》과 교통질서에 대한 캠페인 만화인 《교통질서를 잘 지켜요》, 그리고 온갖 나쁜 일을 저질러 동물을 괴롭히다가 고슴도치에게 혼줄이 나는 《호랑이와 고슴도치》, 분도기(표준어: 각도기)를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연필포탄》,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꾀로 늑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승냥이를 이긴 너구리》, 돌고래를 훈련하여 경제활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려는 《곱등어를 기르는 소년》 등이 있다. 2008년,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의 부총장 김관선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하는 아동영화를 창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각종 영화 음악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이 제작하고 있다.

음식

옥류관의 외부 모습
평양 옥류관 냉면
평양 옥류관 빈대떡(녹두지짐)

북한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음식은 평양냉면 (平壤冷麵)이나 조선인삼 (朝鮮人參)이 유명하다. 북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식당은 옥류관청류관, 평양메기탕집, 평양숭어국집 등이 있는데, 평양냉면과 평양온반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이다. 옥류관은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6.15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녁만찬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는 자주 개를 잡아먹지 않으나,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락랑구역의 평양단고기집과 중구역의 고려단고기집이 있다. (보신탕을 단고기로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요리사에게 단고기로 부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경제난을 타파하고, 외화를 모으기 위해 해외에서 소수의 식당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계가 제일 많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도 북한 식당이 존재한다. 해외의 식당들은 북한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온 유학생이나 국내의 요리사들이 직접 그 식당에 가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식당들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주한 재중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손님들이 적은 편이다(대표적인 해외 식당은 "해당화"와 "목란관"이 있다. 중국 심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만든 김치를 파는 "평양김치대리소"라는 가게가 있다.).

과학기술

정책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제27조는 "국가는 언제나 기술발전문제를 첫자리에 놓고 모든 경제활동을 진행하며 과학기술 발전과 인민경제의 기술개조를 다그치고 대중적 기술혁신운동을 힘있게 벌려 근로자들을 어렵고 힘든 노동에서 해방하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를 줄여나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50조는 "국가는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세우며, 선진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고 새로운 과학기술분야를 개척하여 나라의 과학기술을 세계적 수준에 올려 세운다."라고 하고 있고, 제51조는 "국가는 과학기술발전계획을 바로 세우고 철저히 수행하는 규율을 세우며 과학자, 기술자들과 생산자들의 창조적 협조를 강화하도록 한다."라고 각각 규정하였다.

북한의 과학기술정책은 당 중앙위원회의 과학교육부가 중심이 되어 결정한다. 일단 당에서 과학기술정책 방향이 제시되면 내각의 국가계획위원회 과학기술계획처에서 당 정책과 합치되도록 작성되어 국가과학원 및 각급 연구기관과 각 성에 시달된다.

국가과학원 및 각급 연구기관은 하달된 기본정책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연구개발 목표를 각 부문별로 수립하여 연구소·대학·고등전문학교 등에 하달하고 구체적인 연구과제를 설정하여 각 직할 연구소에서 자체연구를 추진하게 하는 동시에 타부서에 속하는 연구기관의 연구에 대하여 협의·조정한다. 한편 각 성은 해당분야의 구체적인 연구개발 목표를 수립, 공장 및 농장에 시달하여 각각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IT

김정은 시대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강국을 "과학기술과 생산이 일체화되고 첨단기술산업이 경제장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자립경제강국, 지식경제 강국"이라고 설명한다. 2019년 개정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서는 과학기술력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자원"으로 정의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 북한의 주요 과학기술 정책은 ①전 분야에 과학기술 도입 ②과학자 우대 ③과학기술 인재 양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 분야에 과학기술 도입을 위해 북한은 전 부문의 CNC화, 무인화를 촉구하고 2015년부터는 정보화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과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평양에 은하과학자거리(2013), 위성과학자주택지구(2014), 미래과학자거리(2015), 과학기술전당(2015) 려명거리(2017) 등 대규모 과학자 살림집과 과학자 전용 편의시설을 건설하였다. 또한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위해 국가과학원,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등 과학연구기관과 각 대학의 역할을 강조하고 공장, 기업소 대상으로 사이버 강의를 실시하면서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다.

주요 연구기관

국가과학원은 북한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으로서 평양시 은정구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2년 10월 9일[과학원 조직에 관한 내각결정 183호]로 창립되었다. 북한은 1982년 4월 과학원을 정무원의 행정부서로 격상시킨 바 있으며, 1994년 2월에는 국가과학원으로 개칭, 각 부·위원회 산하 연구기관들을 통합하면서 기구를 확대하였으며,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 명칭을 다시 과학원으로 환원하면서 일부 조직을 분리하였다. 그 후 2005년 11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는 과학원을 국가과학원으로 하고, 내각과 해당기관에서 후속 실무대책을 세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정령을 발표하였다.

과학원의 기구로는 1실, 21국, 21위원회의 기술·행정부서가 있고 그 아래에 직할연구소인 은정분원, 7개의 분야별 연구분원, 지방의 함흥분원, 자체 실험기구를 생산하는 종합공장과 천문대, 중앙과학기술통보사를 두고 있다.

농업과학원은 1952년 3월 농업성 중앙농업연구소와 과학원 농업연구소가 통합되어 농업연구과학원으로 발족하였으며 1958년 8월에는 농업과학위원회로 되었다가 1963년 8월 다시 농업과학원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농업과학원은 1994년 2월 국가과학원 확대 개편시 국가과학원 산하기관이 되었다가 1998년 9월 내각 개편시 과학원에서 분리되어 농업성 산하 연구기관으로 되었다. 농업과학원의 기구로는 3실, 6처, 5국의 기술·행정부서가 있고 산하에 직할연구소, 18개의 지방분원, 1개의 종합시험장과 5개의 전문시험장 그리고 원종장과 수의약품종합제조소, 자재상사, 설계사업소가 있다.

의학과학원은 1958년 6월 과학원 산하의 의료과학연구소 및 약초원과 보건성 산하의 의학분야 연구소를 통합하여 의학과학연구원으로 발족하였으며, 1963년 11월 의학과학원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본원은 1994년 2월에 다시 의학과학연구원으로 그 명칭이 환원되면서 국가과학원 산하기관이 되었다가 1998년 9월 내각 개편시 과학원에서 분리되어 보건성 산하 연구기관으로 되었다. 의학과학원은 현재 산하에 18개의 직할연구소와 2개의 분원과 의약품자재관리소, 의학도서관, 의료기기 생산공장 등을 두고 있다.

과학자

북한의 과학기술 교육체계는 11년제 의무교육을 받은 이후 정규교육과정과 비정규교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규교육과정으로서의 고등교육기관은 3∼4년제 단과대학, 4∼6년제 대학 등으로 되어 있으며 의무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을 입학시켜 인민경제 각 부문의 현장기술간부·전문가·기술자 등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 및 과학부문의 중간 핵심간부 후보를 육성하는 기관으로는 연구원·박사원(2∼3년) 등이 있다. 비정규교육과정은 의무교육을 마친 후 공장대학과 각 대학에서 생산과 사무에 종사하면서 교육을 받는 체계이다. 현재 북한에는 주요 공장과 기업소 및 산업지구에 공장대학이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수재교육기관으로는 1984년에 설립된 과학기술 중심의 평양 제1고등중학교가 있다. 제1중학교는 과학기술과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재양성기지’를 마련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84년 평양에, 1984년 각 도 소재지와 특별시에, 1999년에는 전국 시군구역에 1개교씩 신성되었다. 교육은 일반 중학교와 다른 특수교재로 이루어지며 학교 내에서도 수학이나 과학 관련 수재반이 또 다시 편성되기도 한다. 제1중학교를 비롯한 수재 학교 학생들은 농촌 지원이나 군 입대를 면제받기도 하여,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진학하고 졸업 후 과학기술 분야 중요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북한의 고급기술자 및 과학자의 양성기관은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건설대학, 평양체신대학, 청진광산금속대학 등 16개의 공업대학이 그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부분 공업지역에 분산되어 그 지역 특성에 맞는 극히 전문화된 과목만 교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들 공업대학은 소재지역의 공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완전한 산·학협동체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의 박사원과 연구원은 각각 박사과정과 학사과정(우리의 석사과정에 해당)을 가지며 대학뿐만 아니라 각종 과학원 산하 연구소에도 설치되어 있다. 북한에는 박사·학사 등의 학위 외에도 원사·명예원사·후보원사 등 명예칭호가 있는데, 이는 학위보다 한 단계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 명예칭호 가운데 원사는 과학발전에 가장 크게 공헌한 원로학자를 과학부문위원회에서 추천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학위학직 수여위원회에서 최종결정하여 수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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