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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시넷
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2월 26일 (일) 17: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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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프랑스 위치 지도

프랑스(France) 위치
에펠탑
파리 개선문
파리 시내
마르세유 항구 도시
샹젤리제
몽생미셸섬

프랑스(France)는 유럽 대륙의 서부, 지중해대서양 사이에 위치한 나라이다. 프랑스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공화국(la République française)으로, 수도는 파리(Paris)이다. 동쪽은 이탈리아·스위스·독일, 북동쪽은 룩셈부르크·벨기에와 접하고, 북서쪽은 영국해협을 건너 영국과 마주하며, 서쪽은 대서양, 남쪽은 지중해스페인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행정구역은 최상위 단위로 레지옹이 있는데, 프랑스 본토에 13개의 레지옹이 존재하고 이와 별개로 해외 레지옹이 있다. 레지옹 아래 하위 행정구역으로 프랑스 전역에 약 100개 정도의 데파르트망이 있다. 데파르트망 아래 최하위 행정단위인 코뮌이 있다.

개요

프랑스는 대서양과 지중해에 걸친 서유럽의 본토와 전 세계 대양에 산재한 다수의 해외 영토로 구성된 공화국이다.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의 강대국이며, 유럽에서 3위 이내 순위권에 들어가는 경제 대국이자 선진국이다. 비옥하고 광활한 영토에서 비롯된 생산력과 인구를 바탕으로 프랑크 왕국 때는 동로마 제국과 더불어 유럽의 패권을 다투었고 분열 이후 프랑스 왕국 시절에는 신성로마제국과 유럽의 패권을 다투었으며, 영국이 18세기부터 대두한 후에는 영국과 세계 각지에서 겨루며 패권을 다투었다. 상당히 단순하게 이야기한 것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만큼 강력했던 것은 맞다고 할 수 있다.

면적은 본토 551,695km², 해외 영토까지 합쳐 672,051km²로 한반도의 3배에 달하며,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해외 영토 덕에 세계 최대의 배타적 경제수역 면적을 자랑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대체로 지형이 평탄하고 비옥하여 일찍이 농경이 발달했다. 유럽, 대서양, 북해, 지중해의 중심에 있고, 인접한 주변 국가들이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의 네임드 국가들이 많다 보니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전파했기 때문에 문화적 영향력이 크다. 프랑스가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던 19세기에는 프랑스 문화가 전세계로 뻗어나갔기 때문에 20세기 이전 세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함께 시민혁명의 발상지이자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고대부터 자리잡고 있던 갈리아족(켈트족), 카이사르를 필두로 하여 로마 제국에서 올라온 라틴족, 나중에 대규모로 이주해 온 게르만족이 섞여서 이뤄졌으며,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킹 지파인 노르만족도 노르망디에 정착하면서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프랑스인이 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이민족들이 계속 영역으로 들어왔고, 19세기부터는 서유럽,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로부터 이민도 엄청나게 받았기 때문에 다민족 국가다. 과거에도 이민을 오거나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세계대전이 모두 끝나고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았을 시기에 온 것이다.

유엔 상임이사국이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다. 국제통화기금 투표권은 세계 5위, 금보유고는 세계 4위다. 국방비는 세계 5위, 무기 수출은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고 핵무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기술 보유국이다.

국가 상징

프랑스 공화국 국기
프랑스 국장
프랑스공화국 로고

국호

프랑스라는 이름은 라틴어 'Francia'로부터 유래하였다. 글자 뜻대로 하면 프랑크의 땅을 의미한다. 한 이론에 따르면, 고대 게르만어에서 프랑크는 노예처럼 일하는 것에 반대되는 '자유로운'이란 뜻이다. 이 말은 여전히 프랑스에서 프랑(franc)이란 단어로 남아있으며, 2000년대에 유로가 사용되기 전까지 사용된 프랑스 통화로도 쓰였다.

프랑크족이 주로 사용하던 도끼인 프랑시스카를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옛 게르만어인 'frankon'에서 유래해서 프랑크족이란 이름이 붙었고 프랑스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프랑크족이 사용하였다 하여 프랑시스카라고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 프랑시스카가 라틴어의 형태를 한 단어라는 점에서 프랑크인들이 자신들의 무기에 라틴어 이름을 지어줄 이유가 없으니, 로마인들이 그 무기를 사용하는 종족의 이름을 따서 무기에 라틴어 이름을 붙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프랑시스카에서 프랑크가 나왔다기보다는 프랑크에서 프랑시스카가 나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경우 프랑크인들은 이 무기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이 어원은 프랑스 안에서도 꽤 유명해서 비시 프랑스가 자국의 대통령기로 쓰기도 했다.

중화권과 베트남에서는 법국(法國)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발음은 파궈(중국어 보통화), 팝꿕(광동화), 팝(베트남어)으로 각기 다르다. 한국어권에서도 쓰였으나, 최근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불란서(佛蘭西)", "불랑서(佛朗西)", "불랑국(佛浪國)"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헌종실록의 프랑스측이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1847년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은 자신을 "대불란서국(大佛蘭西國) 수사 총병관(水師總兵官) 납별이(拉別耳)" 라 소개하였다. 그밖의 문헌에는 "대불랑서국(大佛朗西國)", "불랑국(佛浪國)" 등으로 나와있다.

일본은 1858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래,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불란서(佛蘭西)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현대 일본에서는 후란스(フランス)라고 표기된다.

국기

프랑스 국기(Drapeau de la France), 통칭 삼색기(Drapeau tricolore)는 프랑스의 국기이며 파랑, 하양, 빨강의 세로선으로 된 삼색기이다. 3색은 자유, 평등, 우애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훗날 프랑스 혁명의 모토에 따라 덧붙인 의미이고, 원래는 파리의 시기(市旗)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랑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빨강은 성 디오니시우스를 상징한다.

국장

국장 한가운데 있는것은 파스케스로 로마 공화국 당시 최고 지위였던 집정관의 경호원들이 들고 다니던것.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한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이자 군가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의용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만들어진 까닭에 매우 호전적인 가사가 특징이다.

기타

프랑스의 상징으로 갈리아의 닭(Coq gaulois)으로 불리는 국조(國鳥)인 수탉이 있다. 라틴어로 Gallus는 수탉, Galus는 갈리아를 의미해서 갈리아를 통치했던 로마 지배층이 갈리아를 닭으로 지칭하는 습관이 있었다.

마리안(Marianne)도 프랑스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여신, 프랑스 유로 동전의 여자, 프랑스 우표의 여자가 바로 마리안이다. 프랑스 정부 홈페이지에도 마리안이 들어가 있다.

프랑스축구협회의 상징이 수탉이고 정부의 비공식 마스코트는 마리안이다. 다만 수탉과 마리안은 모두 프랑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상징은 아니다.

지리

프랑스 행정 지도 (데파르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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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국토는 북위 42도~ 북위 54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럽 대륙 서단의 지협부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632,734 km²이다. 전체적으로는 대각선이 1,000 km인 육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갖추고 있다.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북해와 접해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로는 동쪽의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북동쪽의 룩셈부르크, 벨기에, 남쪽의 스페인, 남서쪽의 안도라, 남동쪽의 모나코가 있다. 또한, 대륙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하고 있다. 이 뛰어난 교통 상의 위치로 해서 유럽 문명의 십자로라는 말을 들어 왔고 항상 그 중심이 되어 있었다. 해외 영토는 브라질과 수리남, 네덜란드의 해외 영토인 신트마르턴과 국경을 접한다.

지형

몽블랑산

프랑스의 지형은 크게 산지평지로 나눌 수 있다. 산지는 이탈리아·스위스 국경지대에 높이 솟아 있는 알프스와, 에스파냐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의 2대 습곡산맥(알프스 조산운동으로 형성되었음) 이외에도 고생대 석탄기(3억 5,000만년 전)의 헤르시니아 조산운동에 의하여 형성된 아르모리캥산지, 중앙부의 마시프상트랄(중앙 산지), 북동부의 보주·아르덴산맥 등 준평원화한 노년기 산지가 있다.

동부의 쥐라산맥은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높은 산지이며 알프스 조산운동으로 형성되었다. 중앙산지 북부의 오베르뉴 고지(高地)·보주산맥과 중앙산지 사이에 있는 랑그르 고지도 헤르시니아 산계의 잔편(殘片)에 속한다. 평지로는 파리분지·아키텐분지와 같은 구조분지, 손강(江)·론강(江)이나 라인강(江) 연안의 알자스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지구성(地溝性) 평야, 강가에 발달해 있는 곡저(谷底)평야, 론강 하구에서 피레네산맥에 걸친 지중해 연안, 플랑드르해안, 코르시카섬의 동해안에 펼쳐진 연안평야가 있다.

알프스산맥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북쪽으로 휘었다가 활 모양을 이루며 동쪽으로 달리지만, 프랑스알프스는 지중해에 육박하는 해안 알프스로부터 몽블랑 산군(山群)으로 이어져 남북으로 달린다. 이 산맥은 신생대 제3기의 대규모 조산운동으로 생긴 습곡산맥인데 그후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프랑스알프스의 평균고도는 1,100m로 스위스알프스의 1,800m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러나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 솟아 있는 몽블랑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최고봉이다. 이 몽블랑 산군에는 몽블랑을 비롯하여 에귀유베르트(4,122m)·그랑조라스(4,208m) 등의 화강암 침봉군(針峰群)이 솟아 있을 뿐만 아니라, 보송·메르드글라스·제앙 등의 빙하가 발달되어 있으며 권곡(圈谷)·U자곡(字谷)·현곡(懸谷) 등의 빙식지형이 도처에 남아 있다. 레만·안시·부르제 등의 빙식호도 산재해 있어 고지대의 초원(alp)과 더불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산풍경이 펼쳐진다.

피레네산맥은 프랑스·에스파냐 국경에 가로놓여 있으며 대서양의 비스케이만(灣)과 지중해 쪽의 리옹만(灣)을 연결하는 전장 440km의 대산맥이다. 알프스와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으나 정상은 알프스에 비하여 낮다. 중앙의 주능선은 화강암질의 고생층으로 이루어지고 남북의 산록에는 중생층과 고(古)제3기층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과거의 빙기(氷期)에는 넓은 범위에 걸쳐 빙하가 발달되어 있었으나 산악 빙하는 산맥 중앙부의 북사면(北斜面) 상단 일부에 존재할 뿐 현재는 빙식지형이 적다. 최고봉은 아네토(3,404m)이고 가론강(江)의 수원(水源)은 여기서 시작된다. 산지의 사면을 흘러내리는 가론강에는 거대한 폭포를 수반하는 급류가 많다.

쥐라산맥은 프랑스 알프스 북서쪽, 스위스·독일·프랑스에 걸쳐 있으며 알프스 조산기에 퇴적층, 특히 석회암으로만 습곡이 이루어진 산맥이다. 이 산맥에서는 많은 하천이 발원하여, 도처에 계곡이 발달되어 있고 석회암 동굴·종혈(縱穴)·지하하천도 발달해 있다. 최고봉은 크레드라네즈(1,723m)이다.

마시프상트랄은 헤르시니아 조산기의 고생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랑스를 남북으로 양분(兩分)하는 대(大)산괴이다. 북서쪽 루아르강(江) 유역의 평야와 남서쪽 가론강 유역의 아키텐분지, 동쪽의 론강 하곡 사이에 걸쳐 전개되어 있으며, 면적 약 8만 5000㎢로 국토 총면적의 1/6을 차지하고 프랑스의 주요 하천과 그 지류의 분수계(分水界)를 형성한다. 이 산지는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화산대(火山帶)를 포함하고 있으며, 르퓌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돔 모양의 화산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평균고도는 900m 내외이며, 주봉(主峰) 몽도르의 한 봉우리인 퓌드상시(1,886m)가 최고봉이다.

중앙산지의 남부 코르스 지방에는 타른강(江)이 석회암 대지를 침식하여 이루어진 계곡의 절벽이 발달되어 있다. 루아르·알리에·셰르·크뢰즈강(江) 등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아르모리캥산지도 고(古)습곡산맥인데, 고생대 말기부터 준평준화·곡동(曲動) 등을 거쳐 제3기의 융기작용으로 평균고도 177m의 완만한 구릉지대를 형성하였다.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사이에는 함몰(陷沒)저지인 렌분지가 펼쳐져 있으며 빌렌강(江)이 횡곡(橫谷)을 형성한다.

보주산맥라인강을 따라 달리는 남북 125km, 동서 40∼90km의 산지이다. 북부는 사암질(砂岩質)의 구릉, 남부는 결정질(結晶質) 암석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높은 지형인데 빙식지형이 남아 있다. 최고봉은 발롱드게브빌레르(1,424m)이다. 동쪽은 단층애(斷層崖)를 이루며 라인 지구대로 이어진다. 아르덴산지는 벨기에로부터 뻗어 나오며 평균고도 400∼600m로 북서부는 낮고 남동부로 갈수록 차차 높아진다. 이 지역도 고생대의 산지가 준평원화하였다가 다시 융기한 곳인데 예로부터 전략상의 요지이다.

아르덴고원과 보주산맥으로 대표되는 북동부 지역에는 3개의 낮은 '통로', 즉 프랑스 북부평원·로렌 지방·벨포르 통로가 있어 역사적으로 독일군의 침입로가 되어 왔다. 파리분지는 서쪽으로 아르모리캥산지, 동쪽으로 보주산맥, 남쪽으로 중앙산지, 북쪽으로 아르덴고원, 북서부는 영국해협에 둘러싸여 있는 구조분지인데, 동서 400km, 남북 350km, 면적 18만㎢로 프랑스 전국토의 1/3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중생층·제3기층이 평균 900m의 두께로 퇴적되어 있다. 수도 파리가 있는 프랑스의 심장부이기 때문에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라고 불리며 파리 남동쪽의 가디네는 해발고도가 2,664m에 달한다.

파리분지 동부에서는 제3기의 침식면을 나타내는 판상(板狀)의 경암층(硬岩層)이 연층(軟層)과 교대로 노출되어 구릉을 이루는 케스타 지형이 나타난다. 이 분지는 안쪽(파리 쪽)으로 완만한 사면을 이루고 동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며, 센강(江)의 여러 지류는 파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영국해협으로 흘러든다. 아키텐분지는 북쪽의 아르모리캥산지, 동쪽의 마시프상트랄 남쪽의 피레네산맥에 둘러싸여 3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은 비스케이만에 면하고 있는 충적분지이다. 파리분지와는 푸아투 안부(鞍部)의 관문으로, 지중해 해안과는 카르카손의 관문으로 통한다. 지질 구조는 파리분지보다 훨씬 단순하여 거의 수평인 제3기층이 면적의 약 3/4을 차지한다.

마시프상트랄에서 서류(西流)하는 강과 피레네로부터 북류(北流)하는 강의 대부분은 가론강에서 합류하는데, 가론강은 분지의 중앙을 북서쪽으로 관류하며 하류에서는 지롱드강(江)이 되어 넓은 하구(河口)를 이루면서 비스케이만으로 유입한다. 비스케이만 연안에는 사구(砂丘)·석호(潟湖)·습지가 발달해 있다. 파리분지·중앙고지의 동사면(東斜面)과 쥐라산맥·알프스산맥 사이에는 남북 방향의 론·손 지구가 있으며, 론강은 지중해로 흘러들면서 넓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특히 마시프상트랄의 남쪽에는 상당한 규모의 해안평야가 전개되어 지중해 연안의 평야지대, 즉 좌안(左岸)의 프로방스, 우안의 랑그도크의 좁고 긴 두 해안평야를 이룬다. 그러나 알프스산맥이 지중해에 임하는 지역에는 평야가 아주 적다. 한편 코르시카섬은 산지가 많으며 최고점은 2,710m의 친토산(山)이다.

기후

프랑스의 기후는 유럽 기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기후는 보통 해양성·대륙성·지중해성으로 나누어지는데, 프랑스에는 이 세 가지 기후가 모두 나타난다. 이는 산지의 위치·높이와 더불어 기후에 지역차가 나타나는 요인이 된다. 겨울에는 쥐라·알프스·마시프상트랄 등의 산지가 고기압 지역이 되는데, 때에 따라서는 아조르즈 고기압, 아시아 대륙 고기압과 연속하여 기압의 산맥을 형성한다. 이때 기압 산맥의 양쪽, 즉 영국·지중해는 저기압이 되고 사이클론성(性)의 바람이 자주 분다.

비스케이만(灣)에서 발생하는 사이클론은 이따금 카르카손 관문을 거쳐 지중해까지 도달하는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영국해협 쪽으로 향한다. 이 사이클론으로 말미암아 겨울에도 비가 오는 경우가 많으며, 미스트랄이라고 불리는 차가운 북풍이 부는 것도 이 사이클론 때문에 발생하였다. 여름이 다가오면 고기압은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이 기간 동안 알프스에서는 비가 내린다. 이와 함께 사이클론의 경로도 북쪽으로 옮아간다. 따라서 프랑스의 중부나 동부에 내리는 여름비는 주로 국지적 대류(對流) 현상에 의한 것이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 지중해안에도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봄은 아주 짧으며 5월에 들어서면 이미 건조한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 여름에는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의 남서부로 밀려가는 안티아조르즈사이클론의 영향으로 서해안에 약간의 비가 올 뿐 일조량이 가장 커진다. 그러나 비스케이만의 냉수대(冷水帶) 때문에 기온은 그리 많이 올라가지 않는다. 한편 피레네의 서부에서는 가을에 강수량이 가장 많지만 여름에 호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또한 아키텐분지·파리분지의 한복판은 건조하며 주변지역으로 나갈수록 강수량이 많아진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2,000mm인데 강수량이 많은 곳은 피레네 서부, 마시프상트랄·보주·알프스 산맥 등의 높은 지대이다. 기온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특히 리비에라 해안의 겨울 기온이 높으며 북쪽으로 갈수록 기온은 떨어진다. 이밖의 산지에서도 기온은 낮아진다. 연평균기온을 비교하자면 몽블랑산 정상이 -6.5℃로, 이는 샤모니몽블랑보다 23.6℃나 낮은 기온이다. 또한 클레르몽페랑(388m)이 10℃인 데 비해 퓌드돔산(1,468m)은 3℃이다.

식생

프랑스의 삼림은 5만 8천 평방마일의 규모를 차지마며, 총 국토면적의 약 20%로 영국의 5%보다 훨씬 많지만, 독일의 27%보다는 적다. 삼림은 동부의 보주산지 일대에 많이 형성되어 있다. 빙기 한랭기의 프랑스는 현재의 스칸디나비아와 마찬가지로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었다. 기후가 온난·습윤해짐에 따라 낙엽활엽수림으로 바뀌어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다면 지중해 연안의 특히 건조한 지역, 대서양 연안의 돌출지역, 고지, 석회암지역, 늪을 제외한 프랑스의 전 국토는 낙엽활엽수림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보주·쥐라·알프스·피레네산맥 등에는 지금도 침엽수림이 남아 있다. 이들 고산지역 삼림 한계의 위쪽으로는 초지가 전개된다.

프랑스 남서부의 란덴스(Landes)에 약 3,680 평방마일에 달하는 해양 소나무로 뒤덮인 숲이 있다. 이 숲은 서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 숲에서 나오는 소나무는 전 유럽으로 수출된다. 휴양지의 편의시설, 오두막 등에 사용된다.

침엽수로는 소나무가 많고, 낙엽활엽수로는 떡갈나무가 많다. 이밖에 낙엽활엽수로는 물푸레나무·너도밤나무·개암나무·미루나무 등이 많다. 지중해안 저지에는 건조한 여름이 길어서 낙엽활엽수림은 형성되지 않으며, 상록활엽수와 관목이 대신 들어서 있다. 즉 올리브·협죽도·측백나무·주목 등 지중해 식생을 나타낸다. 이중 올리브나무는 지중해 지역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리비에라 해안(Côte d'Azur)은 겨울에도 따뜻하고 바람이 막히는 위치에 있으므로 오렌지가 재배된다. 이밖에 외래종의 야자나무·아카시아·유칼리 등이 많아, 열대 경관을 나타내며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 바르 데파르트망(Bar Department)에서는 코르크나무가 많이 재배된다. 지중해 지역에서는 일단 삼림이 파괴되면 초원이 되지 않고 관목이 자란다.

프랑스의 광범위한 국토의 대부분은 풍부한 영양을 지닌 토양으로 뒤덮여있다. 온화화 기후조건에서 자라는 낙엽성 삼림의 토양은 훌륭한 농업적 가치를 지닌다. 프랑스 북서부의 높은 강우량과 다소 서늘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탄산염과 미네랄 등이 침식되어 다른 지역보다 더 높은 산도를 가진 갈색 토양이 생성된다. 북유럽 토양의 특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서식 동물

프랑스에 서식하는 동물군은 대체로 다른 서유럽 국가와 비슷하다. 몸집이 큰 포유류로는 붉은 사슴, 노루, 그리고 멧돼지가 있으며 이들은 프랑스인들이 즐기는 사냥에서 그 대상이 되곤 한다. 알프스 산맥에는 카모이크(chamoix)와 아이벡스(ibex)가 희귀종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설치류로는 산토끼와 토끼가 있으며, 프랑스의 숲과 들판에서 종종 발견된다. 육식동물에는 여우, 야생 고양이가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 종에는 오소리, 수달, 비버, 거북이, 갈색 곰이 있다. 바다표범은 프랑스 해안에서 거의 사라졌다. 프랑스에 서식하는 조류는 서유럽 국가들과 비슷하며 남부 지역에서는 플라밍고, 이집트 독수리, 벌잡이새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자원

프랑스의 로렌 일대의 철광은 유럽 최대의 것으로, 프랑스의 선철(銑鐵) 생산량은 오랫동안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를 달린다. 철광은 쥐라기층의 중부와 하부 사이에 있다. 로렌 일대의 철광과 벨기에 국경의 석탄은 넓은 면적에 걸쳐 산재해 있어 집중적 공업지역을 형성하기에는 불편하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소도시 국가가 생겼다. 이와 같은 사실은 큰 지리적 의미를 준다. 즉 프랑스는 소(小)도시 국가이고 이들 소도시들이 이따금 전통 있는 공업을 이루어 주변 농촌지역의 중심지가 되어 온 것이다. 바로 이 점으로 도시와 농촌인구의 균형이 유지되고 자급자족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벨기에 국경 부근의 노르파드칼레주(州) 파드칼레·노르 데파르트망(Department) 지역에서는 프랑스 전체 석탄 생산량의 42%, 동쪽의 로렌과 모젤 지역에서는 32%를 생산하며, 그밖에 소규모의 석탄 생산지로는 생테티엔, 루아르, 블랑주, 아키텐, 프로방스, 오베르뉴, 도피네 등이 있다. 석유·천연가스는 피레네 산록의 라크에서 산출, 정제되어 송유관으로 수송된다. 이밖에 보즈의 암염(岩鹽)·칼리염(鹽)은 독일에 버금가는 생산량을 보인다. 식용염(食用鹽)의 대부분은 바다에서 얻고 있다. 프로방스에서는 보크사이트가 유명하다. 알프스·피레네·마시프상트랄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은 발전수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 일대는 프랑스의 주요 전원(電源)지대이다.

역사

웨르킨게토릭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모습

프랑스에는 본디 갈리아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기원전 51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여 로마 제국에 정복당했으며, 이후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급격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프랑크족들이 476년에 이주해,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번영하였다. 허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이후에는 내전이 일어났고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이 분리됐다. 이 나뉜 왕국들 중 서프랑크 왕국이 987년에 프랑스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프랑스 왕국은 필리프 2세의 지배 하에 중세 유럽 주요 강대국로 급부상하였으며, 르네상스 기간에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더욱 발전하여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세력이 나뉘어 격렬한 내전을 벌이고, 17세기 경에야 절대 왕정 치하에서 안정을 찾는다. 특히 태양왕이라 불렸던 루이 14세 때에는 유럽에서 가장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들 중 하나였다. 18세기 후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며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선사시대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

프랑스 국토에 인류가 정주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에서도 이른 편에 속한다. 구석기시대의 여러 문화의 명칭(무스티에·오리냐크·마들렌 등)은 모두 프랑스의 지명(地名)에서 유래한다. 아키텐주(州) 도르도뉴현(縣)의 크로마뇽에서는 현생인류(現生人類)의 인골(人骨)이 발견되었고, 이들 크로마뇽인(人)이 남긴 동굴과 벽화는 남서부(특히 베제르 하곡의 라스코 동굴) 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는 다른 인종이 북부 프랑스에 들어왔는데, 브르타뉴 지방에 남아 있는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 즉 카르나크의 열석(列石), 바욘의 돌멘·멘힐·크롬레크(스톤서클) 등이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BC 1800년경에는 그들의 자손으로 추정되는 남서부 지방의 이베리아인, 알프스를 넘어 침입한 리구리아인(人), 북동부 지방에 이주해온 벨기에인(人) 등이 청동기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 뒤에 도나우강(江) 방면으로부터 켈트인(人)이 북프랑스로 이동해 들어왔다. 철기시대에 이르면 프랑스 중부는 거의 켈트계(系) 갈리아인(人)에 의해 점령당하게 된다. 또한 지중해안에는 페니키아인(人)이 무역을 하러 나타났다. BC 600년경에는 그리스인(人)이 마실리아(마르세유)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리스 문화 전파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BC 2세기부터는 로마의 세력도 침투해 왔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유사 이전부터 인종의 집합소였다.

프랑스 역사의 시작

BC 58년부터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BC 52년 갈리아의 족장 베르생제토릭스(Vercingetorix)의 반란에도 갈리아는 로마화되어 갈로로망 문화이 탄생했다. 150년경부터는 남부에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고 리옹에서는 박해도 있었다. 3세기 중엽, 게르만인의 부족 중 하나인 프랑크족이 갈리아 지방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5세기가 되자 반달(Vandale·)수에비(Suebi)·알란(Alan) 등 여러 종족이 이주해 왔고 서고트족은 툴루즈에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부르군트족도 알자스로부터 론강·손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427년 프랑크족의 살리 지족이 북동부에 침입하여 로마의 동맹군으로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로마와 게르만의 연합군은 451년 훈족의 왕인 아틸라의 침략을 격퇴하였으나(카탈라우눔의 싸움), 서로마는 얼마 안가 멸망하였다. 481년 살리 지족의 클로비스(Clovis)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고, 로마 정권 최후의 갈리아 지방 통치자였던 시아그리우스(Siagryus)를 격파, 로마의 지배를 벗어난 후 정통파로 인정된 그리스도교인 아타나시우스교(Athanasius)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분할상속제 때문에 왕국이 분열되고, 7세기 말부터는 무능한 왕들이 속출하여 실권은 궁재(Major Domus, 서양 중세 최고의 궁정직)의 손으로 넘어갔다.

궁재직은 피핀(Pipin)가문의 독점물이 되어 있었으며, 칼 마르텔(Carl Martell)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으로부터 침입한 이슬람교도의 군대를 투르·푸아티에 싸움(Tours-Poitier,732)에서 격파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략을 저지하였다. 그의 아들 피핀 3세(Pippin III)는 75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름으로써 카롤링거 왕조를 창건하였다. 카롤링거 왕조는 고대 상업에 의존하고 있던 메로빙거 왕가와는 달리, 토지 및 농업경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중세의 폐쇄적 자연경제 사회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피핀의 아들인 샤를마뉴는 대제국을 구축하고, 로마 교황과 제휴하는 한편 문화를 크게 신장시켜, 그의 시대는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불렸다. 843년 샤를마뉴의 세 손자가 국토를 3국으로 나뉘는 베르됭 조약을 체결하고, 루트비히왕(Ludwig)은 나중에 독일이 된 동프랑크 왕국을, 카를 2세는 론강, 손강을 포함하는 서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로타르는 제국의 중앙 부분을 갖게된다. 이 조약으로 인해 카를대제의 대제국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와 같은 세 지역의 구분은 현재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중 샤를 2세가 차지한 서프랑크(Frank Occidentalis)가 현재 프랑스의 모체이다.

프랑스의 탄생

아비뇽 교황청
잔다르크의 오를레앙 입성

9세기부터는 노르만인(人)의 침략이 활발해졌으며, 한때 파리가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지방 호족에 의한 봉건적 분권주의가 점차 진전되어 카롤링거왕조는 쇠퇴하였으며, 카를 3세(肥滿王) 대신 파리백(伯) 외드(재위 888∼898)가 왕위에 올라 로베르왕조(외드의 아버지인 로베르 르 폴의 이름에서 유래)가 성립되었다. 이후 10세기 말에 이를 때까지 로베르와 카롤링거 왕조는 북(北)프랑스의 지배를 둘러싸고 분쟁을 계속하였다. 외드의 동생의 손자인 위그 카페는 마침내 987년 카페왕조를 창시하고 프랑스 왕이 되었다. 여기서 프랑크 왕국이 멸망하고 프랑스의 역사가 시작된다.

카페왕조 초기의 왕들이 실제로 지배한 곳은 아직 파리 주변부뿐이었다. 각지에서는 귀족들이 세력을 다투었으며, 왕권에도 대항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봉건사회가 성립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클뤼니에서 시작된 수도원개혁운동(10∼11세기)은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클레르몽 종교회의(1095)를 계기로 십자군이 결성되었고, 로마네스크에 이어 고딕 양식의 교회가 장중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주로 프랑스제후·기사가 중심이 된 제1차 십자군(1096∼99)은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제2차 십자군(1147∼49)에 루이 7세, 제3차(1189∼92)에는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가 참가하였다. 필리프 2세는 또한 영국의 플랜태저넷가(家)와 싸움을 벌여 실지왕(失地王) 존으로부터 노르망디·멘·앙주·푸아투를 회복하였다.

필리프 2세의 손자 루이 9세는 성왕(聖王:Saint Louis, 재위 1226∼70)으로 불렸는데, 그의 정책은 '법에 의한 평화'를 기본으로 '봉건제도하의 왕권'을 완성시키고 파리조약, 아미앵의 중재로 해묵은 영국·프랑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한편 법조행정과 문화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파리를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제7차(1248∼54), 제8차(1270) 십자군을 조직하였으나 원정 도중 튀니지의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카페왕조의 전성기는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 때이다. 그는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분쟁을 일으켜 교황을 굴복시키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 자신의 지배 아래 두었다. 이것이 이른바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1309∼77)인데, 그 당시 필리프 4세는 신하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승려·귀족·평민의 대표를 소집하여 '삼부회(三部會)'를 개최하였다.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함에 따라 직계 카페왕조는 단절되고 필리프 4세의 조카 발루아백(伯) 필리프 6세가 발루아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와 에드워드 2세의 아들)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백년전쟁(1337∼1453)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열세에 몰렸다. 1346년의 크레시 싸움과 이듬해의 푸아티에 회전에서 패배하여 장 2세가 포로가 되었으며, 흑사병과 심한 기근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악화(惡貨)가 주조되어 경제도 혼란에 빠졌다. 이 때문에 에티엔 마르셀의 난(亂)과 자크리(Jaquerie)라고 불리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왕세자에 의해 진압되고 샤를 5세(賢明王:재위 1364∼80)가 즉위한 뒤 한때 안정을 회복하는 듯하였으나 1407년 이후 국내의 귀족은 부르고뉴파(派)와 아르마냐크파(派:오를레앙파)로 완전히 분열되어 내전으로 발전하였으며, 부르고뉴파는 영국과 결탁하였다.

이 때 아르마냐크파를 구원한 사람이 잔 다르크로, 부르제에 후퇴해 있던 샤를 7세는 1429년 잔 다르크의 힘으로 오를레앙을 공략,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그녀가 죽은 뒤 영국군은 프랑스 영토에서 추방되었다. 백년전쟁으로 제후세력이 쇠퇴되고 상비군이 창설되었으며, 왕실 재정의 확립이 이루어져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국가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

성왕 루이는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프랑스의 문화적 확장을 목격했다.
위그노 전쟁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년 7월 14일
태양왕 루이 14세.

샤를 7세(勝利王)는 국토를 확보한 후 관료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개혁하는 한편 상비군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 다음의 루이 11세(재위 1461∼83) 시대에는 최강의 귀족 부르고뉴 공가(公家)가 멸망한 데 이어 아르투아 백령(伯領)·프랑슈콩테·앙주·멘·프로방스도 왕령에 병합되어 절대왕권의 기초가 다져졌다. 그의 아들 샤를 8세는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루이 12세(발루아오를레앙家, 재위 1498∼1515) 와 프랑수아 1세(발루아-앙굴렘家, 재위 1515∼47) 때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었다. 또 당시 신대륙과의 무역이 이루어져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어 프랑수아 1세(1515∼47)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놓고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다투어 패하였으며, 합스부르크가(家)와의 항쟁도 격화하였다.

한편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1520년경부터 프랑스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장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칼뱅주의가 형성되었다. 칼뱅은 파리에서 추방되어 제네바로 피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신구 양파의 분쟁이 심해졌다. 16세기 후반에는 8차례나 종교전쟁(위그노전쟁:1562∼98)이 일어났다. 종교적 분열은 마침내 성(聖)바르톨로메오의 학살과 같은 대참사까지 야기시켰다. 1589년에는 앙리 3세가 암살되었고 성왕(聖王) 루이 9세의 후예 부르봉가(家)의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재위 1589∼1601)가 왕위를 계승, 발루아왕조가 종식되고 부르봉왕조가 창시되었다.

앙리 4세는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낭트칙령'(1598)을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내란을 수습하였다. 그는 쉴리를 등용하여 프랑스의 재건에 힘썼으며,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고 부르봉왕조의 기초를 세웠으나 열광적인 구교도에게 암살되었다(1610). 그의 아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내에서는 귀족 신교도를 억압하고 밖으로는 합스부르크가(家)에 대항하여 30년전쟁에 참가하는 등 절대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이어서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시대에는 유년기에 '프롱드의 난(亂)'(1648∼53)이 일어났으나 섭정모후(攝政母后:안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이 교묘하게 평정하고, 대외적으로는 피레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에스파냐에 대하여 우세한 위치를 유지하였다.

1661년 국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뒤 재정총감(財政總監) 콜베르는 중상주의(重商主義)정책을 시행하여 부국강병과 해외식민에 노력하였다. 한편, 이 당시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궁정문화가 개화되고, 고전주의문학이 확립되었으며 파리에는 문학 살롱이 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는 '태양왕(太陽王)'이라고 불렸으며,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문화국이 되었다. 이로써 17세기는 '루이 14세의 세기'라 불리게 되었으며, 부르봉 왕권은 국내외에서 이른바 '빛나는 군림(君臨)의 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왕권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외전쟁(플랑드르전쟁·네덜란드침략전쟁·팔츠전쟁·에스파냐계승전쟁)과 낭트칙령의 폐기에 따른 신교도·상공업자의 망명 등으로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다. 루이 14세의 증손인 루이 15세(재위 1715∼74)의 치세는 초기의 섭정(오를레앙公 필리프) 시대부터 파란을 안고 있었다. 존 로에 의한 경제개혁의 실패, 궁정의 재정낭비, 7년전쟁(아메리카·인도에서 일어난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 1756∼63)에 패배한 결과 식민지를 상실하는 등 국위가 실추되었다. 국내에서도 계몽사상이 침투, 신흥 부르주아지의 성장이 이루어져 '구(舊)제도(Ancien Regime)'를 타파하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의 손자 루이 16세(재위 1774∼92)는 우둔하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지나친 낭비로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튀르고·네케르 등을 등용, 재정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헛되이 끝나고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곧 이어 제3신분 의원에 의해 '국민의회(國民議會)'의 성립이 선언되었으며,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에 의해 탈취됨으로써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였다.

프랑스 혁명시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89년 여러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고 '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 파리로 연행된 국왕 일가는 외국으로의 도피를 기도하였으나 실패(바렌 도피사건)함으로써 더욱 국민의 신임을 잃었다. 헌법제정의회는 1791년 9월 헌법을 공포하였고,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792년 지롱드 내각의 성립과 동시에 혁명에 반대하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습격사건이 일어났으며 국왕 일가는 탕플 감옥에 유폐되었다. 국민공회(國民公會)는 ‘1791년 헌법’과 왕권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의회에서는 지롱드당(黨)과 자코뱅당(黨)이 대립하였으나 혁명군은 각지에서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1793년 국왕은 반혁명을 기도하였다는 죄목으로 단두대(斷頭臺)에서 처형되었고, 의회에서는 지롱드당이 추방되었으며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가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공포정치의 시작으로, 왕비를 비롯한 당통·에베르 등의 반대파가 잇달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1794년 7월 '테르미도르(Thermidor:熱月)의 반동(反動)'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자코뱅 클럽은 폐쇄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유산층과 토지를 가진 농민들을 기반으로 하는 총재정부(總裁政府:Directoire)가 성립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승리(1796∼97)로 명성을 올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총재정부에 위기가 닥치자 돌연 이집트 원정에서 귀국하여, 1799년 11월 ‘브뤼메르(Brumaire:霧月)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정부(統領政府:또는 執政政府, Consulat, 1799.11∼1804.5)를 조직하였다.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공화력(共和曆) 8년의 헌법을 제정하고 재정·행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나폴레옹은 1802년에 종신통령이 된 데 이어 1804년 3월에는 '나폴레옹 법전'을 공포하고 5월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제1제정(1804∼14)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大)제국을 구축하였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1805)에서 패배함으로써 영국 본토 침입이 좌절되었으나, 울름·아우슈테를리츠·예나·아우에르시테프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을 누르고 라인 연방(1806∼13)을 결성(신성로마 제국의 멸망)하여 친족들을 각지의 왕으로 앉혔다. 영국·오스트리아는 이에 대항하여 7차례나 대(對)프랑스 대동맹(大同盟)을 결성하였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大陸封鎖令:1806)으로 이에 맞섰으나 에스파냐의 반(反)프랑스 전쟁(半島戰爭:1808∼14), 러시아 원정의 패배(1812)와 독일해방전쟁(1813)에서 열세에 놓이게 된 데다 1814년에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 엘바섬[島]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루이 18세가 복위한 후 1815년 2월 엘바섬을 탈출, '100일 천하'를 이루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추방되었다. 유럽 제국은 빈 회의를 열고 메테르니히의 보수주의를 확립하였으며, 프랑스는 탈레랑이 주장하는 정통주의를 기초로 부르봉왕조가 부활하여 루이 16세의 아우인 루이 18세(재위 14∼24)와 샤를 10세(재위 24∼30)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왕정복고시대(王政復古時代:15∼30) 초기에는 극단적인 왕당파(王黨派)가 구(舊)제도의 부활을 기도하였으나 이미 확립된 부르주아지 체제를 뒤엎을 수는 없었으며, 리슐리외·드카즈 등 온건 왕당파(doctorinaire:일명 純理派)를 중심으로 입헌왕정(立憲王政)이 진척되었다. 그러나 과격 왕당파의 리더인 아르투아백(伯)이 샤를 10세로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망명귀족에 대한 재산 배상 등 반(反)혁명입법이 성안됨에 따라 시민들의 불만·항의가 고조되었다.

1830년 언론통제를 기도하는 '7월칙령'을 계기로 '7월혁명'이 일어났다. 7월 27∼29일은 '영광의 3일간'이라고 불리며, 국왕은 영국으로 달아났고 오를레앙공(公)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였다. 혁명의 영향은 대단히 컸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주의·국민주의의 기풍이 널리 파급되었다. 왕정복고(王政復古)와 마찬가지로 7월왕정(1830∼48)은 ‘제한선거왕정(制限選擧王政)’이었다. 당시는 산업혁명의 진전기(進展期)에 해당하여 상업·금융 부르주아 세력이 커졌다. 예술 분야에서는 낭만주의의 전성기를 맞았고 사상계(思想界)에는 공상적 사회주의가 나타났다.

정치적으로는 은행가와 주주(株主) 부르주아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시민 계층은 보통선거와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848년 기조 내각이 물러서고 2월혁명이 발발하였다. 그 결과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제2공화정이 성립하여 빈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로써 시인(詩人) 라마르틴과 사회주의 이론가인 루이 블랑을 포함한 임시정부에 이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농민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파를 추방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3세(재위 1852∼70)라 칭하였다. 이 제2제정기(帝政期)는 해외발전의 시대에 해당하는데, 크림전쟁(1853∼56)으로 러시아를 압도하고, 중국(당시는 淸) 원정(1857∼60), 수에즈 운하의 건설(1859∼69), 니스·사부아(사보이)의 병합(1860)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파리시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공업 생산은 금속공업에 중점을 두었으며 산업혁명은 완성기에 들어갔다. 철도망은 널리 보급되었고 만국박람회(1855∼67)를 개최하였다. 초기의 전제제정기(專制帝政期:1852∼67)는 황제의 실질적인 독재시기로, 반대파의 활동은 가혹하게 억압되었다.

1860년부터는 자유주의적 개혁운동이 강해졌고, 자유제정기(自由帝政期:1867∼70)에는 의회제도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자유무역제도가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반대세력의 정치활동과 노동운동도 부활되고 현실주의·자유주의 문학이 문단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부르주아 체제의 퇴폐적 현상도 심화되었다. 1867년의 경제공황으로 혼란이 가중되자, 기회를 노리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에스파냐 왕위계승문제를 계기로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을 유발시켰다. 이미 전열을 정비한 프로이센군(軍)은 몰트케의 신속한 작전으로 곧 프랑스를 침공, 나폴레옹 3세는 세당에서 포로가 되었고 패보(敗報)를 들은 파리 시민들은 혁명을 일으켜 공화제를 선언하였다(제3공화정).

1871년 3월 파리 코뮌 참여자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

그 결과 임시 국방정부가 조직되어 파리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에게 4개월 동안 저항하였으나 마침내 굴복하고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1871). 그 동안 국방정부의 파리 국민군 무장해제 시도를 계기로 '파리코뮌'의 혁명정권이 성립되었으나, 프로이센과 정부군의 공격으로 2개월 만에 붕괴되고, 1871년 8월에는 급진 공화파의 레온 강베타와 타협이 이루어져 티에르(1871∼73)가 대통령이 되었다. 1873년 마크마옹(1873∼79)이 제2대 대통령이 된 뒤에는 왕정복고의 조짐이 보였다. 공화파와 왕당파 간의 대립 속에서 1875년까지 과도정권이 이어지다가, 1875년 대통령제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프랑스는 100년에 걸친 혁명 끝에 공화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제3공화정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독일 비스마르크(Bismarck)의 허락 하에 기존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베트남, 마다가스카르, 북서아프리카 등에서 식민지 팽창 정책을 추진하면서 영국과 충돌을 일으켰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후퇴하면서 진정되었다. 1890년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실각 된 이후 독일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1894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이어서 영국·프랑스 협상(1904), 3국협상(三國協商:1907)을 체결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三國同盟:82)에 대항하였다.

세계대전과 프랑스

제2차세계대전시 독일군과 대치하는 미군장교와 프랑스 레지스탕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기뻐하는 파리 시민들.

20세기에 들어오자 프랑스에서는 독일을 적대시하는 과격한 민족주의(쇼비니즘)가 더욱 강해졌으며, 2차례에 걸친 모로코 사건(1905. 11)이 발생하였다. '애국자' 대통령 푸앵카레(재직 1913∼1920)는 사회당을 포함한 거국일치 내각(擧國一致內閣)을 조직하였고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돌입하였다. 마른전투(장군 조프르 지휘, 1914년 9월), 베르전투(장군 페탱 지휘, 1916년 2∼6월) 등 초기에는 고전하며 독일군이 파리 근교까지 진격하였으나, 러시아군이 독일 동부로 파고들 때 프랑스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1915년 독일 해군은 해전을 주도한 영국에 밀려 해상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잠수함을 무기화하여 '무제한 잠수함전(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을 전개해 연합군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프랑스가 대독 연합군의 주축이 되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포슈(Foc) 연합국 총사령관이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승전국이 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정적 손실이 있었다. 1930년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극우파 쿠데타 기도와(1934년), 좌파 연합의 인민 전선 정부의 수립(1936년), 1938년 공산당 탈퇴에 따른 붕괴 등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는 가운데 나치 독일은 전쟁을 위한 재무장을 하였다.

1939년 히틀러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폴란드에 침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소련과 비밀협정을 맺은 독일이 1940년 5월, 중립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를 공격하여 방어선이 무너지고 6월 10일 이탈리아가 참전하자 폴 레노(Paul Raynaud) 총리가 사퇴하며 6월 22일 휴전을 선포한다.

프랑스 본토를 점령한 나치의 괴뢰정권인 비시정부가 원수 페텡(Pétain)의 지휘로 수립되었다. 런던으로 망명하였던 드골 장군이 라디오를 통해 '자유 프랑스'의 결성과 항전을 역설하며 국내에서도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드골이 수립한 망명정부가 연합국의 협력으로 인해 승인되고 프랑스 식민지와 본토의 레지스탕스를 규합하면서 파리가 1944년 8월 해방되었다. 종전 후 프랑스는 전승국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실제로 제3공화국은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비시정부의 수립으로 인해 1940년에 막을 내렸으나, 제3공화국의 헌법은 1945년 10월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제4공화국

1945년 10월 국민투표로 제3공화국의 헌법이 폐지되고 1946년 10월 새 헌법이 채택되면서 의원내각제 형태의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쟁 후 재건 사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요와 물자의 절대량의 부족은 계속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국민의 파업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 부흥계획이라 일컫는 미국의 원조인 마셜 플랜으로 경제 부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호적인 세계경제 질서에 힘입어 프랑스는 사회 안정을 달성하고 30년간 고성장을 지속하였다. 1945년부터 1975년까지 이 기간을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 으로 통칭한다. 또한 프랑스는 1948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부흥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혼란이 지속되었다. 서로 이질적인 정당의 연립으로 구성된 정부가 붕괴를 거듭하였다. 제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뱅상 오리올에 이어 르네 코티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알제리전쟁, 인도차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군소 정당이 분립되며 정국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1958년 5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협상하려는 정부에 반발하는 알제리 주둔 군부의 쿠데타 조짐으로 프랑스가 위기에 처하자, 코티 대통령은 드골 장군에게 사태 수습을 요청하였고, 드골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며 재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제4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프랑스 제5공화국

샤를 드골 대통령

1958년 9월 28일 국민투표를 통하여 제5공화국의 헌법이 채택되고 샤를 드골은 19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른바 '드골 헌법'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권한을 가진 드골 대통령은 1962년 알제리에 독립을 부여하며 알제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드골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되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대통령상을 구현하고, 독자적인 핵 계획을 추진하였다. 1966년, 독립 방어 체제의 추구를 목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하며 군사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었다. 프랑스와 독일 간 관계 개선을 필두로 하여 유럽 국가 간 협력을 추진하였으며, 현재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구 식민지국들과 새로운 우호관계를 구축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대외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또한 국가주도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프랑의 국제 화폐화 및 상품시장 관세화, 유럽공동시장 가입 등 대외개방 조치를 단행하였다. 드골은 1965년 12월 재선되었지만 1968년 대대적인 총파업과 학생 시위로 인해 난국을 맞았다. 1969년 4월 지방행정 개혁과 상원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1969년 4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드골 정부 하에서 총리를 역임하였던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드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기본적으로는 드골 정책을 견지하였지만 더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호응하고자 노력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유럽경제공동체에 영국이 가입하게끔 많은 도움을 주었고, 유럽 공동의 로켓발사 계획을 주도할 프랑스 기업을 출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언론통제 완화 등의 정책은 드골주의를 표방하는 우파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퐁피두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1974년 4월, 갑작스러운 퐁피두 대통령의 사망으로 후임을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우파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재임 중에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강화해 유럽연합으로 발전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국가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G7 창설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81년 5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이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 최초의 좌파 정권이 성립되었다. 취임 후 미테랑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여 원내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였다. 1986년 3월 선거에서 우파연합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파 대통령과 우파 총리라는 '좌우동거체제'를 2년간 만들어냈다. 미테랑은 1988년 5월 재선되었으며 독일 통일의 격변과 탈냉전시기 변화 속에서 유럽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유럽 연합을 설립하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1991년 12월 타결되고 1992년 9월 프랑스는 국민투표를 거쳐 조약이 비준되어 1993년 유럽연합 발족을 성사시켰다. 1995년 5월 신드골주의자인 파리 시장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14년간 계속된 좌파 대통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국영기업 사유화, 조세감면, 지방분권화 등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며 국민들의 민심을 사로 잡는 듯하였으나,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과 실업률 증가, 그리고 2003년 폭염 피해 등으로 인해 국민들이 반발하였고, 대통령과 총리의 지지도는 하락하였다.

2007년 5월 취임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의 정체성 회복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외치며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쳤다. 장관 15명 중 7명을 여성으로 영입하고 세네갈, 모로코 등 출신 정치인을 기용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집권 초 사르코지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35시간 탄력 근무제, 조세감면, 연금 개혁, 헌법 개정, 치안 강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강력한 개혁 정책에 기인한다. 그러나 2007년 시작된 세계금융위기에 대응한 개혁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2008년 말부터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다. 2010년 사르코지 정부는 프랑스에 살고있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출신 집시와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고 집시촌을 철거하는 등 강경한 이민정책을 추진하여 국민의 민심을 사로 잡기도 했으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업률 상승과 경제위기 지속으로 인해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됐다.

'무너진 경제살리기'를 표방한 올랑드 대통령은 높은 실업률과 계속되는 낮은 경제성장률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경제 회복 및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으나 노동자 계층,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동부 지역 등이 극우 지지로 돌아서는 현상이 발생하며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임기 말에도 실업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파리, 니스 등지의 테러로 인해 국가 정세가 불안해졌다. 이민자들의 국적을 박탈하는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추진하면서 좌파 지지층의 불만도 높아졌고 10% 미만의 지지율을 보였다.

올랑드 대통령 시절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하며 사회당 정부의 중도우파적 정책들을 펼쳤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연합 잔류와 자유무역, 개방경제와 문화적 다원주의 등을 내세웠다. 당선 이후부터 노동법 개정을 시작으로 세제개혁, 국영철도공사 개혁, 연금개혁 등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전통적인 시장경제주의자인 마크롱은 행정 현대화, 공무원 감축을 통해 재정 적자를 축소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마크롱 대통령 취임 이후 프랑스의 실업률은 금융위기 이후 10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하였으며 실업률 또한 큰 폭으로 하락하였다. 과감한 노동개혁을 통해 프랑스 강성 노조를 무너뜨렸고 실업급여 개혁까지 추진하였다. 또 출범 직후 부유세를 폐지하여 '자산에 대한 연대세(ISF)'를 없앴다. 이는 부유세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자산가와 기업가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방침이었다.

정치

프랑스 의사당

프랑스는 대의민주주의 국가이자 단일 대통령제 공화국이다. 현존하는 국가들 가운데 가장 일찍 세워진 공화국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공화정의 특성 상당수가 프랑스에서 유래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프랑스 공화국은 1958년 9월 28일에 국민투표에서 통과된 헌법을 기반으로 하는 제5공화국 체제이며, 이전의 불안정했던 3공화국과 4공화국 체제에 비하여 훨씬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함께 행정부의 권한 역시 입법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비대해진 형태를 띠고 있다.

프랑스 행정부의 최고 지도자이자 국가 원수는 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며, 국민들이 매 5년마다 선출한다. 또한 정부 수반이자 행정부의 책임자는 프랑스 총리이며, 대통령에게 임명을 받아 정부와 내각을 이끌어나간다. 프랑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권한이 있으며, 그 외에도 국민투표를 실시할 권한, 고위 판사들과 공직자들을 임명할 권한, 국제 협약을 체결하거나 종결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프랑스군의 최고 통수권자이기도 하다. 한편 총리는 공공 정책을 결정하며, 외무를 책임지는 대통령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내무에 신경을 많이 쏟는 편이다.

한편 프랑스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이다. 하원의원들은 직접선거를 통하여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하원은 ‘국민의회’라고도 하며, 국민을 직접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투표를 통하여 정부를 강제 해산할 권리가 있다. 한편 상원의 경우, 상원의원 역시 국민들에 의한 투표로 선출되며 임기는 6년으로 매 3년마다 절반씩 의원들을 새롭게 교체한다 상원은 상대적으로 하원에 비하여 입법권한이 적으며, 하원과 상원의 의견이 충돌할 경우에는 하원에게 최종 결정권한이 있다. 상원과 하원이 합쳐져 프랑스 의회를 이루는데, 의회는 재정, 법, 정치, 군사 등 대부분의 정부 정책들을 심의하고 통과시켜주는 역할을 하나, 일부 세부사항들의 경우에는 행정부에서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폭풍이 몰아치기 전인 프랑스 3공화국 시절까지만 해도 프랑스 정계는 공화당 등 급진 포퓰리즘 정당들이 의석 상당수를 얻어내면서 활개를 치곤 하였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후 국민들이 나치즘 등의 실체를 보며 크게 실망한 탓에 급진주의 정당들은 그 세를 잃었으며, 이후 프랑스 정계는 노동자 인터네셔널 프랑스 지부, 그리고 이를 계승한 프랑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당들과, 그리고 프랑스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 계열 정당들로 양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2017년에는 급진중도주의 정당인 전진하는 공화국이 사람들의 큰 지지를 얻으며 공화당과 사회당을 모두 제치고 정계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정치 변동
  • 절대 왕정: 루이 14세부터 루이 16세까지
  • 제정 : 1804년부터 1815년까지, 1852년부터 1870년까지
  • 입헌 군주제: 1815년부터 1848년까지
  • 공화정: 1792년부터 1795년까지, 1848년에서 1852년까지, 1871년부터 현재
  • 현재 프랑스 제5공화국은 1958년 10월 8일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주요 정당

2017년 기준으로 프랑스 국민의회의 의석 순으로 정렬하였다. 577석으로, 현재 여당은 전진하는 공화국!이다.

  • 전진하는 공화국!(REM, 집권 여당) 309석
  • 공화당(RP. 현재 제1야당이며, 기존의 대중운동연합이 명칭을 변경한 중도우파정당.) 112석
  • 민주운동(MoDem, 제2야당) 42석
  • 사회당(PS. 현재 제3야당이며,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중도좌파정당.) 30석
  • 민주당-무소속 연합(UDI. 우파성향의 민주당과 무소속계열의원들의 연합정당.) 18석
  • 녹색당(EGP. 68혁명의 기수 다니엘 콘-벤디트가 이끄는 중도좌파, 녹색주의 지향정당.) 17석
  • 좌익급진당(RL. 사회자유주의 정당.) 3석
  • 좌파전선(LF. 공산당의 색채가 짙은 극좌정당.) 10석
  • 국민연합(RN. 급진적 민족주의 정당.) 8석

행정구역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이다. 프랑스의 기초 지방자치 단체는 코뮌으로, 파리, 리옹, 마르세유와 같은 도시도 하나의 코뮌을 이루고 있다. 여러 코뮌들을 묶어 캉통을 이루며, 여러 칸톤이 모여 아롱디스망이 되고, 아롱디스망이 모인 것은 데파르트망이라 한다. 몇 개의 데파르트망이 모여 레지옹을 이룬다.

2016년 프랑스는 18개의 레지옹(Régions)으로 나뉘어 있고, 이들 중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 13개가 유럽 본토에 자리하고 있으며 나머지 5개는 해외에 위치하고 있다. 레지옹들은 또 101개의 데파르트망(Départements)으로 나뉘며, 알파벳 순으로 번호를 부여받아 분류된다. 이 번호들은 현재도 우편 번호 등에 쓰이고 있었으며, 예전에는 차량 번호에 쓰이기도 하였다. 총 101개의 데파르트망들 중에서 해외에 위치한 5개는 데파르트망인 동시에 레지옹이기에 해외 데파르트망(Départements D'outre-Mer)이라고도 부르며, 유럽 본토에 있는 레지옹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유럽 연합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해외 레지옹에는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레위니옹, 마요트 등이 있다.

101개의 데파르트망들은 335개의 아롱디스망(Arrondissements)으로 또 나뉜다. 아롱디스망의 하위 행정구역은 총 2,054개의 캉통(Canton)로 나뉜다. 이와는 별개로 아롱디스망은 또 최하위 행정구역 단위인 36,658개의 코뮌(Commune)으로 나뉜다. 다만 파리, 마르세유, 리옹과 같은 대도시들은 시급 아롱디스망이라는 특수한 행정 구역으로 나뉜다.

해외 영토

18개의 레지옹에 추가하여, 프랑스는 총 5개의 해외 집합체(Collectivité D'outre-Mer)를 소유하고 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생마르탱, 생바르텔레미, 생피에르 미클롱, 왈리스 퓌튀나가 바로 이 해외 집합체에 속한다. 이 해외 집합체들은 프랑스의 일부로 인정받기는 하지만, 생마르탱을 제외하고는 유럽연합의 일부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태평양에 있는 왈리스 퓌티나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CFP 프랑을 통화로 사용하며, 유로의 가치와 대단히 밀접하다. 해외 레지옹은 유로를 사용한다. 특별 공동체(Collectivité Sui Generis)는 누메아 협정에 의해 가장 큰 자치권을 보장 받고 있는 지역으로, 누벨칼레도니가 이 지역에 속한다. 자체 군대를 운용하고 여러 오세아니아 지역 기구에도 독자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는 해외 집합체와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유로를 사용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원하면 독립이 가능하며 이미 여러 번 독립에 대한 주민 투표를 시행했는데 반대가 더 많아 독립하지는 않고 있다. 가장 최근의 투표는 2018년에 있었으며 이때도 부결되었다. 2020년과 2022년에 다시 독립에 대한 주민 투표가 예정되어 있다. 해외 영토(Territoire D'outre-Mer; TOM)는 무인도거나 거주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으나 계속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들이 파견나가 있는 것이라서 공식적으로는 무인도 취급인 지역이다. 클리퍼턴섬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이 이에 속한다.

레지옹 지방 단체 지도. 흰색 지방은 특별 지위 단체로, 이전의 레지옹 역할을 한다.  
데파르트망 지방 단체(하늘색) 및 데파르트망 등급의 특별 지위 단체 (푸른색).png  
코뮌으로 나눠진 프랑스 본토 지도  

외교

프랑스는 UN의 창립국이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영구 이사국들 중 하나이기도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프랑스는 선진국들의 모임인 G7, 세계무역기구, 태평양 공동체(SPC), 인도양 협의회(COI)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또한 카리브 국가연합의 가맹국이기도 하며, 전세계 84개국에 달하는 프랑스어 사용 국가들의 모임인 프랑코포니의 종주국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전세계 3위로 많은 공관들을 두고 있으며, OECD, 유네스코, 인터폴, 국제도량형기구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국제기구들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전후 프랑스의 외교는 유럽연합과 유럽 국가들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연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 이래 프랑스는 독일과 관계를 개선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을 이끄는 쌍두마차 격의 지위를 얻어내었으며, 60년대 내내 유럽 전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지우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방법을 통하여 유럽의 종주국 지위를 차지하려 들기 시작하였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 간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거나 악화된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련과 제2세계 국가들 등 공동의 적이 남아있었던 터에 군사적, 경제적으로는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하였다. 프랑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나, 드 골 대통령이 미국과 영국이 갈수록 밀착하는 모습을 비판하고, 이 때문에 미국에게 프랑스 군을 포함한 나토 군대의 합동 지휘권을 넘겨주기를 거부하면서 프랑스군은 독립적인 지휘계통을 따로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2009년 4월 4일에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NATO의 합동지휘체계에 재가입할 것을 천명하면서 프랑스군의 지휘 체계 역시 다시 NATO의 지휘 하에 소속되었다.

1990년대 초에 프랑스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지하 핵실험을 시행한 것을 두고 국제적으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한편 프랑스는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던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영국과 관계가 한시적으로 악화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옛 아프리카 국가들과 여전히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상아만과 차드 등지에 여전히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군을 파병하고 있다. 최근에는 말리 북부 지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말리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를 위시한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이 말리 군대를 도와 파병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중세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유럽대륙의 주도권 및 식민지 쟁탈을 놓고 서로 적대국인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앙탕트 코르디알(entente cordiale) 정책을 펴면서, 러일 전쟁 이후 영국 및 러시아와 동맹(삼국 협상)을 맺게 된다.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관계에서는 보조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근대 독일의 성립이후 보불전쟁, 1, 2차 세계 대전 등에서 독일과 대립하였으나, 전후에는 유럽통합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 및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 냉전시기에 샤를 드골은 국제패권구도가 미국-소련의 양강구도로 편성되면서 프랑스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으며, 이에 따라 서방국가이지만 소련과의 국교를 수립, 중화인민공화국의 UN대표권 승인(1964년 1월에 국교 수립) 등 중립적인 외교를 표방하였다.

옛 식민지국가들과도 프랑코포니를 통하여 일정부분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으나, 알제리 독립전쟁을 통해 많은 유혈사상자를 낸 알제리와의 관계는 역사문제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에서 현대 프랑스 역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지부티는 프랑스로부터 1977년에 독립하였는데, 프랑스와 지부티 간의 군사적, 경제적 조약들을 통해, 지부티에게 안보와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중동문제에 있어서는 미국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정책을 어느 정도 비판하고 있다. 아시아권 국가 중에서는 경제적으로 중국, 한국일본과의 외교를 중시한다. 1799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략하였다. 그의 군사들은 룩소르와 카르낙에서 고대 이집트의 사원을 발견하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로제타석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하게 된 중요한 단서였다. 미국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우방국이나,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프랑스가 비판하면서 외교관계는 잠시 소원해졌다가 부시가 물러난 후에 오바마 대통령 임기 기간동안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프랑스와 시종일관 우방국으로서 나폴레옹이 집권할 때 스페인의 식민지로 프랑스의 영향권이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한 것에 반발을 일으켜 유럽 내에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는 시종일관 우방국으로서 첫 월드컵에도 프랑스가 참가한 것부터 포클랜드 전쟁에서도 프랑스는 아주 노골적으로 아르헨티나의 편을 들기까지 했으며 이에 프랑스는 아르헨티나에 엑조세를 공짜로 주기까지 했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을 맺었다.


서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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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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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관계

프랑스는 서유럽 국가 중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나라이다. 1835년(헌종 1) 한국명 '나백다록'이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 모방(Maubant)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 땅을 밟은 이래 1836년에는 조선 주교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한국명 범세형(范世亨)]와 신부 샤스탱(Chastain)이 잠입,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탄생시키는 등 포교활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1839년 주교 앵베르, 신부 샤스탱, 모방 등이 사학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참수된 데 이어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 때는 주교 베르뇌(Berneux)를 비롯한 7명의 신부가 참형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독 로즈(Roze)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한강 하구까지 침입,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흥선대원군이 몰락한 뒤 서유럽 제국에 문호를 개방한 것을 계기로 1886년에는 프랑스의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와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만식(金晩植) 사이에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 및 통상장정(通商章程)·선후속약(善後續約) 등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국운 쇠퇴와 일제의 강점으로 공식관계는 끊어진 채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 채널로서 이용되는 데 그쳤다.

한국과 프랑스의 본격적인 우호관계는 8·15광복 이후 1949년 2월 정식국교가 수립되고 양국의 상주공관이 설치되고 난 뒤부터 시작된다. 6·25전쟁 때에는 UN군의 일원으로서 전투 병력을 파견한 혈맹이었으며, 외교적으로는 우방국으로서 경제·과학기술·문화협력 등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교 이후 관세협정(1963)·민간항공협정(1974.6) 등이 체결되었다.

한편, 1985년 4월 파비위스(Fabius) 총리가 프랑스 총리로는 처음으로 내한하였다. 1989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하여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첨단기술 이전 등 합의)을 가졌으며, 1995년 3월 김영삼 대통령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1999년 6월 선준영 외교통상부 차관이 제 8차 한·불 정책협의회 참석차 파리를 방문하였다. 1998년과 1999년에는 김종필 국무총리, 2000년과 2002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91년 총리 로카르, 1993년 대통령 미테랑, 2000년에는 대통령 시라크가 방한하였다. 2011년 5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2013년 11월과 2016년 6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였다. 2015년 11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한하고, 2018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는 등 양국 정상 간의 교류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1979년 투자보장협정 1981년 이중과세방지조약을 체결하였다. 1981년 과학기술협력협정, 2007년 사회보장협정, 2009년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을 체결하였다. 1989년 10월부터는 한국인들의 프랑스 입국 비자발급제도가 폐지되었다.

2019년 프랑스의 대한국 수출액은 전년 대비 43.2% 감소하여 약 58억 3,2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최근 2년간 프랑스의 대한국 주요 수출 품목은 화장품, 가방, 의약품, 집적회로 반도체, 항공기, 항공기 부품, 보석, 승용차, 펌프, 자동차 부품 등이었다. 2019년 프랑스의 대한국 수입액은 약 37억 2,4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전년 대비 50.2% 감소한 수치였으며 프랑스는 한국과의 무역에서 21억 8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최근 2년간 프랑스의 대한국 주요 수입 품목은 승용차, 축전지, 전기자동차, 집적회로 반도체, 자동차 부품, 합성수지, 제어용 케이블, 항공기 부품, 원동기, 타이어 등이 있었다.

2017년 기준 프랑스의 대한국 투자 누적 금액은 77억 4,000만 달러이며, 한국의 대프랑스 투자 누적 금액은 25억 3,000만 달러에 달한다. 2019년 프랑스에 거주 중인 재외동포의 수는 약 29,000명으로 집계되었다.

프랑스와 북한은 수교를 맺지 않았다. 1968년 9월 프랑스에 북한 민간무역대표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1976년 6월 통상대표부로 격상되었다. 1984년 12월 1일 자로 파리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를 일반대표부로 승격시켜, 북한은 외교적 지위만 갖지 않을 뿐 기능 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일반 대사관에 준하는 대표부를 두게 되었다. 1991년 2월에는 1976년 11월에 설치된 주 프랑스 유네스코(UNESCO) 대표부와 일반대표부를 통합하였으며, 2011년 10월에는 북한에 프랑스 협력사무소가 개설되었다.

국방

국가헌병대

프랑스 군대(Forces armées françaises)는 프랑스의 정규군으로, 프랑스의 대통령이 최고 통수권자이다. 크게 프랑스 육군(Armée de Terre), 프랑스 해군(Marine Nationale),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 프랑스 타격군(Force Nucléaire Stratégique), 프랑스 국가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로 편제가 나뉘어 있다. 이들 중 프랑스 타격군은 비대칭무기와 핵무기를 전담하고, 국가헌병대는 교외 지역에서 경찰의 업무를 맡아보기도 한다. 국가헌병대는 기본적으로 군에 속해있기에 프랑스 국방부의 명령을 받으나, 경찰의 성격도 분명하게 띠고 있기에 내무부의 통제를 받기도 한다. 현재 프랑스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한 군사 조직들 가운데에 하나이며, 특히 유럽 연합에서는 가장 거대한 군대이다.

국가헌병대의 일부인 기동 헌병대(Gendarmerie mobile)는 대한민국에도 존재하는 전투경찰처럼 국내에서의 각종 시위 등을 진압하기 위한 군인들로 이루어진 시위 진압 전문부대로서 시위대의 규모가 커서 이들로는 도저히 제압이 어려울 경우에는 국가 경찰 소속의 시위 진압부대와 같이 폭동을 진압하기도 하며 해당 부대 내에는 대테러부대인 GIGN과 시위 진압 전용 장갑차들로 구성되어 있는 GBGM이 배속되어 있다. 인원은 지역헌병 다음인 16,108명으로 많아 국가헌병대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예하에 안전특수대, 헌병특경대, 헌병낙하산중대, 산악구조부대, 동굴구조대, 공화국수비대, 항공수송대, 대통령경호단 등을 두고 있다.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라고 하는 조직은 파리에 있는 대통령궁인 엘리제 궁과 국회의사당, 총리관저 등 주요 시설들 및 국립 은행에서 화폐 수송시의 경비와 검문검색 등을 담당하는 경비 전문 헌병 조직으로서 수비대 휘하에는 본부를 비롯하여 2개의 보병 연대와 기병 연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폴레옹 1세 시절의 근위대였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를 계승한 부대라고 하며, 따라서 공화국 친위대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헌병 항공대(Gendarmerie de l'Air)는 헌병들, 특히 대테러 부대 소속 대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각종 항공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단,규모가 750명 정도로 비교적 적다보니 주둔지도 두 곳뿐이다. 항공 수송 헌병대(Gendarmerie des Transports Aériens)는 민간 공항 및 공군 기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이 담당하는 공항은 프랑스의 대표 공항들이며 지방 공항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자치경찰 등이 담당하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평시에는 프랑스 교통부 장관의 관리 하에 있다고 한다. 프랑스 국가 헌병대는 프랑스 전역과 식민지 등을 주 활동범위로 두고 있는 까닭에 2011년 기준으로 무려 9만 8155명이 프랑스 국가 헌병대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러한 수치는 프랑스군에서 육군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군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샤를 드골(R-91)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프랑스에는 프랑스 외인부대라 하여 전세계 140여개국에서 지원한 외국인들을 받아 이들로만 자치적인 군대 조직을 운영하는데, 이들은 복무 기간이 끝나면 프랑스 시민권이 주어진다.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독특한 구성으로, 이와 비슷한 조직을 운영하는 나라로는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정도가 있다. 2002년 1월 1일부터 프랑스 정부는 모병제(지원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상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며,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과 함께 1960년대 이래 핵보유국으로 인정을 받아온 국가이다. 2018년 프랑스의 국방비는 63.8억 달러로, 프랑스 GDP의 2.3%에 달하며 세계에서 5번째로 국방비 지출이 많은 나라로 떠올랐다. 현재 프랑스는 362,485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406대, 군용기 1,757대, 군함 289척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공군은 미라주와 라팔 등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소 항공방위산업체는 뉴론(Neuron) UCAV(무인공격기)를 개발하였다. 프랑스는 그외에도 조기경보통제기, 정찰위성 등을 보유하고 있다. 전략 원자력 잠수함과 탄도미사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등 무서운 핵전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이미 샤를 드골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는 등 세계적인 핵강국이지만, 핵전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탓에 여전히 핵전력은 강화시키고 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편제를 바꾸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는 등 이전 시절에 비해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군사력이다.프랑스 군대(Forces armées françaises)는 프랑스의 정규군으로, 프랑스의 대통령이 최고 통수권자이다. 크게 프랑스 육군(Armée de Terre), 프랑스 해군(Marine Nationale),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 프랑스 타격군(Force Nucléaire Stratégique), 프랑스 국가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로 편제가 나뉘어 있다. 이들 중 프랑스 타격군은 비대칭무기와 핵무기를 전담하고, 국가헌병대는 교외 지역에서 경찰의 업무를 맡아보기도 한다. 국가헌병대는 기본적으로 군에 속해있기에 프랑스 국방부의 명령을 받으나, 경찰의 성격도 분명하게 띠고 있기에 내무부의 통제를 받기도 한다. 현재 프랑스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한 군사 조직들 가운데에 하나이며, 특히 유럽 연합에서는 가장 거대한 군대이다.

국가헌병대의 일부인 기동 헌병대(Gendarmerie mobile)는 대한민국에도 존재하는 전투경찰처럼 국내에서의 각종 시위 등을 진압하기 위한 군인들로 이루어진 시위 진압 전문부대로서 시위대의 규모가 커서 이들로는 도저히 제압이 어려울 경우에는 국가 경찰 소속의 시위 진압부대와 같이 폭동을 진압하기도 하며 해당 부대 내에는 대테러부대인 GIGN과 시위 진압 전용 장갑차들로 구성되어 있는 GBGM이 배속되어 있다. 인원은 지역헌병 다음인 16,108명으로 많아 국가헌병대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예하에 안전특수대, 헌병특경대, 헌병낙하산중대, 산악구조부대, 동굴구조대, 공화국수비대, 항공수송대, 대통령경호단 등을 두고 있다.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라고 하는 조직은 파리에 있는 대통령궁인 엘리제 궁과 국회의사당, 총리관저 등 주요 시설들 및 국립 은행에서 화폐 수송시의 경비와 검문검색 등을 담당하는 경비 전문 헌병 조직으로서 수비대 휘하에는 본부를 비롯하여 2개의 보병 연대와 기병 연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폴레옹 1세 시절의 근위대였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를 계승한 부대라고 하며, 따라서 공화국 친위대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헌병 항공대(Gendarmerie de l'Air)는 헌병들, 특히 대테러 부대 소속 대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각종 항공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단,규모가 750명 정도로 비교적 적다보니 주둔지도 두 곳뿐이다. 항공 수송 헌병대(Gendarmerie des Transports Aériens)는 민간 공항 및 공군 기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이 담당하는 공항은 프랑스의 대표 공항들이며 지방 공항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자치경찰 등이 담당하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평시에는 프랑스 교통부 장관의 관리 하에 있다고 한다. 프랑스 국가 헌병대는 프랑스 전역과 식민지 등을 주 활동범위로 두고 있는 까닭에 2011년 기준으로 무려 9만 8155명이 프랑스 국가 헌병대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러한 수치는 프랑스군에서 육군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군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프랑스 외인부대라 하여 전세계 140여개국에서 지원한 외국인들을 받아 이들로만 자치적인 군대 조직을 운영하는데, 이들은 복무 기간이 끝나면 프랑스 시민권이 주어진다.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독특한 구성으로, 이와 비슷한 조직을 운영하는 나라로는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정도가 있다. 2002년 1월 1일부터 프랑스 정부는 모병제(지원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상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며,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과 함께 1960년대 이래 핵보유국으로 인정을 받아온 국가이다. 2018년 프랑스의 국방비는 63.8억 달러로, 프랑스 GDP의 2.3%에 달하며 세계에서 5번째로 국방비 지출이 많은 나라로 떠올랐다. 현재 프랑스는 362,485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406대, 군용기 1,757대, 군함 289척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공군은 미라주와 라팔 등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소 항공방위산업체는 뉴론(Neuron) UCAV(무인공격기)를 개발하였다. 프랑스는 그외에도 조기경보통제기, 정찰위성 등을 보유하고 있다. 전략 원자력 잠수함과 탄도미사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등 무서운 핵전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이미 샤를 드골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는 등 세계적인 핵강국이지만, 핵전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탓에 여전히 핵전력은 강화시키고 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편제를 바꾸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는 등 이전 시절에 비해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군사력이다.

경제

라데팡스(La Défense)는 유럽 최대 규모늬 특구목적 비즈니스 구역이다.

2020년 기준의 명목 GDP로 환산했을 시 프랑스는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다.

올랑드 정부의 경제장관이었던 에마뉘엘 마크롱이 주도한 경제 개혁의 성과가 가시화되고, 또 유럽연합과 세계 경제의 성장세에 탄력을 받아 2017년 이후 프랑스 경제는 오랜 불황에서 벗어나 상승세를 타고 있다. 2017년 2.3%, 2018년 1.7% 성장하며 강한 회복세를 보였고, 2019년 1분기 실업률은 2009년 이후 최저치인 8.7%로 낮아졌다. 2019년에는 미중 무역전쟁 등으로 전반적인 무역이 위축되면서 1.3%로 둔화되었지만 독일(0.6%)이나 이탈리아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은 편이다. 그리고 2019년 11월 실업률이 8.4%로 나아지면서 10년만에 최저치를 나타냈다. 다만 이는 영국이나 독일 같은 주변국들에 비해 여전히 매우 높은 실업률이다.

프랑스 경제가 코로나19 사태의 충격파로 2020년 1분기에 6%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7월 31일에 코로나19의 여파로 프랑스 경제가 지난 2분기에 비해 -13.8% 성장했다.

2021년 7월 15일에 프랑스 재정 적자가 예상보다 더 활발한 경제 재가동으로 세수가 많이 늘어나 상당폭 줄어들 전망이라고 브뤼노 르메르 재무장관이 의회에서 말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제성장률이 2021년에는 잠정치가 프랑스 7%, 스페인이 5%를 나타냈다.

2022년 10월 11일 발표된 IMF 경제전망에 따르면, 2022년도 프랑스 경제성장률은 2.5% 정도로 전망된다. 7월 전망보다 0.2%p 상향된 수치로, 독일 전망치가 0.3%p 상향되어 1.5%, 미국 전망치가 0.7%p 하향되어 1.6%인 것과 비교하면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준수한 편이다. 다만 7월 전망치에 비해 0.4%p 상향되어 2022년도 경제성장률이 3.6%로 예상되는 영국보다는 낮다. 프랑스의 2023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0.7%로, 3달 전 전망치보다 0.3%p 하향되긴 했지만, 독일 전망치가 1.1%p, 유로존 전망치가 0.7%p 하향된 것과 비교하면 하향폭이 적은 편이다. 다만 3달 전 전망치보다 0.2%p 하향에 그친 영국보다는 하향폭이 큰 편이다.

코로나 발병 이후부터 2022년까지 상황을 보면, G7에 속하는 유럽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선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은 서유럽 주요국가중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지난 10년간 상승세가 가장 높긴 했다. 대졸자 초봉은 2010년 기준 약 29,000유로(한화 3,800만 원)이다. 전체 산업별 평균 임금은 2010년 기준으로 24,000유로(한화 3,200만 원)이다.

41,760달러에 달하는 국민소득에 비해 급여가 많이 짜보일지도 모르겠는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게 프랑스의 어마어마한 (준)조세부담이다. 프랑스는 고용주가 계약서 상의 임금을 지급할 때 이 임금의 40%를 사회보장세(그냥 세금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로 납부해야 한다. 즉 고용주의 실질적인 부담은 임금의 140%인 셈. 사실상 절반 가까이를 정부가 추가로 뜯어가는 셈이니 상대적으로 고용주 부담이 낮은 국가에 비해 급여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끝이냐고? 물론 그럴 리가. 40% 뜯어서 계산된 임금에 근로자 몫으로 급여 기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략 25%를 또 뜯어간다. 이건 어디까지나 소득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뜯어가는 사회보장세이고 소득세는 별개이다.(그냥 간단하게 생각해서 만약 연봉을 4,000만원 정도를 받으면 사회보장+소득세를 합쳐 1,600만원 정도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항공, 명품패션, 농식품, 원자력-에너지, 종합화학(화장품-제약), 자동차(세계 11위 자동차 생산국), 일반기계(2011년 수출 620억 달러, 세계 7위 점유율 4.4%), 관광, 금융업, 건설업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언급된 분야들은 프랑스가 세계에서 1~3위를 다투는 분야이다.

농업

Verzenay에 있는 샴페인 포도원

농업이 발달해 있으며 유럽 국가들의 식량을 책임지고 있는 농업 강국이다. 식량자급률만 해도 세계 최고수준으로 무려 300%를 넘는다. 순수 곡물 자급률은 190%. 당연히 해외로 많은 농축산물이 수출되는 나라이다. 프랑스 농업력은 마지막 양키 금융가라 불리던 미국의 존 피어폰트 모건이 보불전쟁에서 참패한 프랑스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 결단을 내린 근거 중 하나가 됐는데, 그 정도로 오래 전부터 엄청난 양과 질의 농산물을 쏟아내는 걸로 유명했다.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수요와 인기가 높은 농축산물 품종을 사실상 거의 대부분 풍족하게 생산하고 있다.

농업의 비중은 다른 선진 공업국에 비해 큰 편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업국인 동시에 농업국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프랑스 전체 농경지 면적은 약 2,700만 헥타르이며 이는 프랑스 영토의 54% 수준이다. 또 EU 전체 회원국이 보유하고 있는 총 농경지의 1/3을 차지한다.

농업은 19세기 이래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도 소농경영을 근간으로 해왔으나 지금은 기계화 중심의 대규모 농업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농업경영의 통합이 촉진되어 농가수가 크게 줄어드는 경향으로, 농촌인구의 도시 유출이 현저하다. 프랑스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의 종류는 대단히 풍부하다. 유럽 최대의 농업국으로 주요 식량은 거의 자급자족하며, EU 여러 나라에 대한 식량공급국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옥수수·감자·사탕무·포도주·낙농제품 등이다. 특히 포도주 생산은 세계 제1위이며, 다음으로 밀·식용육의 생산이 많다. 국토의 25%가 목초지인 프랑스는 소와 말 사육을 비롯한 축산업도 활발하며, 이밖에 국토의 약 25%가 임야이기 때문에 송진·테레빈유(식물의 수지를 증류하여 얻는 휘발성 기름)·목재·호두나무 등의 임산물이 산출된다. 2016년 기준 프랑스는 세계 제 6위의 농업 생산국이며 EU 농업 분야 총 생산의 17%를 차지한다.

패션

명품 패션과 미용 부분에서 독보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 만큼 세계 1위 자리를 오랜 시간 동안 지켜왔다. 프랑스 명품 기업의 2011년 매출액은 430억 유로에 달했고 내수시장에서의 직, 간접적 매출 규모는 150억 유로이며 사치품 생산분야에서 약 17만 명이 일하고 있다. 로레알, LVMH, 에르메스, 샤넬, 케링 같은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거대기업에서부터 고야드포레르빠쥬같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소업체들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한다. 특히 이탈리아가 2010년대 들어 경제위기로 나라 전체가 휘청이며 명품산업도 많이 죽은 편이라 프랑스의 지위는 더욱 독보적이다.

항공우주산업

에어버스다쏘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항공우주산업은 프랑스 제조업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2017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항공우주산업은 690억 달러로 세계 2위의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직·간접적으로 25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고 미국에 위치한 항공산업 자문 업체 AeroDynamic Advisor의 분석에 따르면 항공기 제조와 생산액에 있어 프랑스는 세계 1위를 차지한 미국 다음으로 여겨지며 유럽 내에서 유일하게 군용기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마지막 국가라고 한다. 덕분에 프랑스는 항공기 제조뿐만 아니라 부속 부품 제조에도 독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수출도 여객기, 군용기, 로토크래프, 미사일 시스템 등 매우 다양하다. 항공우주산업은 2012년 프랑스 수출의 11.6%를 점하여 203억 유로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으며 2013년 1월~7월 프랑스 수출의 11.7%에 달하는 296억 유로를 수출하여 129억 유로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방위산업

프랑스 정부는 1936년을 시작으로 민간회사에서 담당하던 방위산업 대부분을 국유화하여 정부가 능동적으로 육성시켜왔다. 프랑스 방위사업청(Direction Generale de l’Armament)은 방위산업의 연구, 발전, 생산 모든 분야를 총괄감독하고 있고, 이는 프랑스 방위산업이 성공할 수 있던 이유로 지목되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프랑스는 유럽연합 내에서 유일하게 육해공 방위 물자를 미국에 의지하지 않고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성장했고, 2021년 기준으로도 냉전의 종식과 함께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에 맞혀서 끝없이 발전에 힘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방위산업 거래양은 미국, 영국, 러시아 다음으로 가장 많으며, 2020년 기준으로도 미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양을 수출하여 세계 3위를 기록했다. 방위산업의 규모나 기술력으로 보나 프랑스는 군사강국인 미국과 러시아 바로 다음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가 아무리 발전을 꾀한다 해도, 미국과 러시아는 고사하고 새로 부흥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데는 한계가 따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산업 계획이 바로 범-유럽 방위산업 통합 정책이다.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유럽 만의 방위산업 체계를 확립시켜 연구와 생산을 동기화시키자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제 무기가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인기 높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미국과 러시아 견제에 있다. 아무리 미국과 러시아 제품이 좋다 해도, 미국과 러시아에만 의존했다가는 미국과 러시아 정부의 외교정책 급변으로 공급이 중단될 위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을 이어서 유럽연합도 프랑스 중심의 방위산업 동일화를 추진하자는 것이다.

자동차

OICA에 따르면 2019년 프랑스는 약 220만 대를 생산하여 세계 10위를 기록하여 EU 내에서 독일스페인 다음으로 생산량이 높았다. 또 CCFA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에 프랑스 자동차 산업은 1,053억 유로의 매출액과 320억 유로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르노는 일본의 닛산미쓰비시와의 기업연합을 통해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라는 2022년 기준 세계 생산량 4위의 초거대 다국적 기업으로 활동하는 중이고, 푸조시트로엥 그리고 피아트, 크라이슬러로 구성된 다국적 기업인 스텔란티스 그룹 역시 건재하다. 이들 업체는 르망 24시, F1, 랠리에서의 실적이 증명하듯 독일 업체를 제외하면 우위를 가진 완성차 업체가 없을 정도의 우수한 기술력을 자랑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대중적으로 잘 팔릴 만한 디자인이 아닌, 자기들이 만들고 싶은대로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일본차 못지않게 난해한 디자인과 고평가된 유로화로 인해 세계 시장에서 상당히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하지만 점차 보편지향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면서 독일과 일본 회사들에게 다시 도전하는 중이다.

다른 자동차산업 강국들에서 보기 힘든 프랑스 자동차산업의 독특한 특성이라면 대형차 모델과 프리미엄 브랜드를 지니고 있는 독일, 일본, 미국, 한국, 영국과는 달리 현재 프랑스 자동차 브랜드 중에 준대형차 이상의 체급을 가진 차량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까다로운 자동차 법규 등 높은 규제장벽으로 인해 세금이 많이 부과되기 때문이다. 부가티와 같은 하이퍼카 브랜드가 존재하기는 하나, 이 역시 주로 수출로 물량이 거의 나간다. 이 부분에서는 프랑스가 유독 튀는 부분이다.

에너지

세계 1위의 발전량을 가진 회사인 EDF가 프랑스 회사로 원자력 발전소의 비중이 84.7%나 되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생산한 많은 전력 에너지를 타국에 수출하여 돈을 벌고 있다.

또한, 프랑스 회사인 토탈은 엑슨모빌, BP 등의 세계 7대 글로벌 메이저 정유사 중 하나이다.

다만 화석연료 자원은 상당히 빈약하다. 2차대전 후에도 알제리를 놔주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도 이부분의 영향이 크다. 영국과 노르웨이정도를 제외한 유럽국가들이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긴 하다.

건설

프랑스 회사인 Vinci(뱅시,빈치)는 세계 건설사 순위 2위이다. 순위가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TOP3 안에는 든다.

관광

세계 관광기구에 따르면 전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 국가는 프랑스이며 관광국 세계 1위라고 한다. 2018년 기준 연간 약 9천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했다.

운송교통

프랑스 고속열차 TGV
Millau Viaduct 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이다.

프랑스의 철도망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모두 국유화하여 프랑스 국유철도회사에 통합되었다. 주로 파리에서 다른 도시로 나가는 노선들이 대부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철로가 거의 파괴되었지만 전후의 경제계획으로 재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전화 보급 사업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용도가 낮은 농촌 지역의 철도가 폐쇄되었다. 철도는 종합역이 없고 6개의 종착역과 4개의 교외선 종점이 있다. 각 역의 주변은 1968년부터 실시된 새 도시계획에 따라 부도심을 형성하였다.

1980년대 초부터 파리와 여러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테제베(trains à grande vitesse, TGV)가 개통되었다. 프랑스 남동부 지역, 특히 리옹과 지중해 연안 도시들은 교통을 이용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이용빈도가 높았다. 1994년 런던, 제네바, 로잔, 브뤼셀을 있는 고속 열차가 개통되었다. 런던과 파리를 잇는 유로스타(Eurostar)는 해저터널을 사용하여 약 3시간만에 두 도시를 연결한다. 2018년 기준 연간 약 9백만 명이 유로스타를 이용한다.

국내 도로망은 17세기 루이 14세 시대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잘 정비된 나라에 속하였다. 세계대전 중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 후 완전히 정비되어 세계에서도 자랑할 만한 도로망을 갖추었다. 프랑스의 고속도로인 오토루트(Autoroute)는 프랑스 전국을 연결하며 1960년대 중반부터 건설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경제 발전 속도를 높이고 많은 운송용 차량을 수용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고속도로 교통량은 1970년 이후 2010년대에 들어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차량의 약 5 분의 1이 상업용이다. 증가하는 교통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간선도로와 고속도로를 포함하여 총 약 965,000km에 달하는 광범위한 도로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민간기업이 투자하고 운영하며 통행료를 부과받는다. 파리, 리옹, 마르세유 및 릴과 같은 대규모 도시 중심에 초점을 맞춘 초기의 지역 네트워크뿐 아니라 수도에서 뻗어 나오는 방사형 경로를 확장하였다. 2020년 기준 프랑스의 오토루트는 전국적으로 건설되어 전국의 도시들을 잇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인 Millau Viaduct를 소유하고 있으며 Pont de Normandie 와 같은 많은 중요한 다리를 건설했다 .

프랑스의 대표적인 교통 운영기관으로는 프랑스 철도 협회 (Société Nationale des Chemins de Fer Français), 프랑스 국유 철도(Société Nationale des Chemins de fer Français), 국영 항공사인 에어프랑스, 파리교통공단(Régie Autonome des Transports Parisiens)이 있다. 수도 파리에는 촘촘한 네트워크가 조성되어 있고 다양한 교통 수단이 운영된다.

1939년 이후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없어지고 1900년에 건설된 지하철(Métro de Parissms)은 16개 주요 노선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으며, 요금이 싸고 빨라 평일에는 매일 500만 명이 이용한다. 14개의 노선을 가지고 있는 지하철은 파리 시내와 교외 일부를 연결한다. 2017년 기준 302개의 역이 있다. 생-라자르역(Saint-Lazare)과 하우스만 생-라자르역(Haussmann Saint-Lazare), 아브르 코마르탱역(Havre-Caumartin), 오베르역(Auber), 오페라역(Opéra) 등 파리 도심에 있는 역들은 역간 거리가 가까워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는 RER(Reseau Express Regional)는 파리 도심에서 교외 지역을 연결한다. RER은 총 5개의 노선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지하철과 RER은 파리교통공단이 운영한다.

버스는 300여 개의 노선이 있으며 장거리 운행도 하고 있다. 시 외곽을 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으며, 간선국도와 연결되어 있다. 국영철도망을 통해 고속열차가 파리∼리옹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를 연결한다.

항공화물 및 여객 수송용 운송수단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해마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맞아들이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항공운송은 큰 신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유럽 각지는 물론 북아메리카·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중근동·극동에도 취항한다. 파리 근교에 2개의 공항이 있다. 프랑스 국제공항인 샤를드골공항은 파리 중심에서 북동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74년 개항한 이 공항은 서유럽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전체 프랑스 여객의 약 3분의 2를 수용한다. 1932년 개항한 파리 오를리 공항(Aéroport de Paris-Orly)은 주로 국내선을 운용하며 일부 해외 노선을 취항한다. 파리를 중심으로 약 20km 떨어져 있으며 남쪽에 위치한다. 파리의 북동쪽으로 11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르부르제(Le Bourget) 공항은 1919년에 개항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공항이다. 오를리 공항의 개항 이후 가까운 유럽 국가들로 취항하였고 샤르드골 개항 취항과 함께 운항 업무를 중단하였다. 터미널은 항공박물관으로 꾸몄고 공항 활주로는 개인용 여객기와 에어쇼로 이용된다. 니스와 마르세유, 리옹, 리옹, 보르도, 툴루즈 및 스트라스부르에 지방 공항이 있다.

또한, 내륙교통 수단의 하나로 내륙의 작은 하천을 이용하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해운도 대외 수송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나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프랑스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항구도시 르 아브르(Le Havre)는 화물을 하역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독일·벨기에·지중해를 잇는 운하가 발달되어 있다.

무역

프랑스는 전 세계의 무역을 주도하는 무역 선진국으로 특히 기계, 화학 및 화학 제품, 열대 농산물, 의류 및 직물과 같은 전통적인 산업 제품이 주요 수출품이다.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았던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무역 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프랑스 관광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비상품 거래, 특히 관광으로 인한 긍정적 인 균형과 함께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 회원국이기 때문에 회원국가와의 무역에 있어서 관세 혜택을 받는다. 1968년부터 회원국들 간 동일한 관세 제도를 운영하고 이를 준수하고 있다. 수출입 시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하는 등의 관세 혜택을 받는다. 대외무역의 4/5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이루어지며 수출입의 3/5 이상이 EU 국가를 대상으로 한다. 21세기에 들어 프랑스 무역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프랑스 제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대 하기 위한 무역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EU, 유럽국가들과의 거래 이외에도 일본이나 미국과의 FTA를 체결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30년까지 에너지를 제외한 무역 분야에 무역수지 균형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스와 석탄의 매장량이 적기 때문에 석유와 화석 연료는 수입에 의존한다.

국제통화기금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9년 프랑스의 수출액은 전년 대비 2.9% 감소하여 5,697억 3,200만 달러를 기록하였으며, 수입액은 전년 대비 4.7% 감소한 6,511억 7,9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2018년 프랑스의 주요 수출국은 독일이 15%(약 832억 1,000만 달러)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미국 8%(약 453억 1,000만 달러), 스페인 7.9%(약 443억 2,000만 달러), 이탈리아 7.6%(약 427억 5,000만 달러), 벨기에 7.2%(약 403억 2,000만 달러), 영국 6.8%(약 383억 9,000만 달러), 중국 4.4%(약 246억 2,000만 달러), 네덜란드 3.7%(약 208억 6,000만 달러), 스위스 3.4%(약 189억 달러), 폴란드 2.1%(약 11억 9,000만 달러) 순으로 나타났다. 주요 수출 품목은 기계류·원자로·보일러 12%, 운송수단 9.9%, 항공기 9.2%, 전기·전자장비 7.9%, 의약품 6%, 플라스틱 4%, 향수 및 미용제품 3.5%, 음료 및 식초 3.4%, 화석연료·원유·증류제품 3.3%, 광학기기 및 의료기기 등 3%, 철강 2.9% 등이 있었다.

2018년 프랑스의 주요 수입국 역시 독일이 16%(약 1,022억 5,000만 달러)로 가장 큰 거래규모를 차지하였다. 이외 중국 9.1%(약 590억 4,000만 달러), 이탈리아 7.8%(약 504억 1,000만 달러), 벨기에 7.2%(약 464억 달러), 스페인 6.6%(약 429억 달러), 미국 6.4%(약 415억 8,000만 달러), 네덜란드 4.6%(약 300억 5,000만 달러), 영국 3.8%(약 242억 8,000만 달러), 스위스 2.7%(약 176억 4,000만 달러), 폴란드 2%(약 127억 달러), 일본 1.8%(약 118억 7,000만 달러), 러시아 1.8%(약 118억 1,000만 달러) 순으로 비중을 차지하였다. 주요 수입 품목으로는 기계류·원자로·보일러 13%, 운송수단 11%, 화석연료·원유·증류제품 11%, 전기 및 전자장비 8.8%, 플라스틱 3.9%, 의약품 3.8%, 항공기 3.2%, 광학기기 및 의료기기 등 3%, 유기화학물질 2.5%, 철강 2.1%, 의류 1.9% 등이 있었다.

인문사회

인구

프랑스는 2023년 1월 기준으로 인구가 약 68,042,591여 명에 달하며, 세계에서 20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유럽 기준으로는 러시아와 독일의 뒤를 이은 3위의 인구 대국으로, 유럽 연합 내부에서만 따졌을 때에는 독일에 이은 2위의 인구 대국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선진국들의 예외라고 불릴 정도로 출산율과 결혼율이 타 선진국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 프랑스의 출생률은 2006년 이래 유럽 연합의 인구 증가를 홀로 떠받칠 정도로 굉장히 높은 축에 속하였으며, 2006년과 2016년 사이에는 EU 전체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수 증가를 보이기도 하며, 이민이나 월경 등 외부 요소가 아닌 출산에 의한 인구 자연증가로 인하여 인구가 증가한 유럽 연합 4개국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는 1973년의 베이비붐 이래 가장 높은 수치였으며, 1994년에 합계출산율이 1.7명이었던 것에 비하여 2010년에는 2.0명까지 증가하면서 굉장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다만 2021년 1월에는 출산율이 1.84명 정도로 하락하였으며, 이 때문에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최저 출산율인 2.1명에는 못 미치는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프랑스는 출산율 부문에서 EU 전체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아무래도 보건복지의 발전과 수명 증가로 인한 고령화 현상 자체는 프랑스도 피해갈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평균 연령은 약 41.7세 정도이며 프랑스 인구의 5분의 1 정도가 65세 이상일 정도이다. 한편 평균 수명은 82.7세로, 세계에서 12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인구 증가는 매년 약 0.6% 정도였으며, 2011년 이래로는 조금 줄어들어 0.4%과 0.5%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민자들이 동부와 남부에서 밀려오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2010년의 경우에는 프랑스 도시권에서 출생한 신생아들 가운데에 27%의 부모들 중 최소한 한 명이 해외 출신이라고 한다.

민족

현재 프랑스인 대부분은 켈트족과 골족들로부터 유래하였으며, 그 외에도 로마 제국 시대에 유입된 라틴 계열과 프랑크 왕조 시대에 유입된 게르만 계열이 조금씩 섞여 있다. 중세 시기 동안에는 수많은 국가들과 먹고 먹히는 과정을 반복하고, 전쟁을 통하여 인구 유입과 유출이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점차 민족 구성이 타 유럽 국가들과 섞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서쪽으로는 브르타뉴인들이, 남서쪽으로는 아키텐인들이, 북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북동쪽으로는 알레만인들이, 남동쪽으로는 리구리아인들이 조금씩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50년대부터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대규모의 이민이 일어났는데, 이후 평등을 추구하는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면서, 정부 차원에서 국민들을 민족이나 종족에 따라 인구조사를 실시하는 것을 법적인 차원에서 금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프랑스의 민족 구성은 대부분 개인 기업에서 행하는 것이다. 2004년 기준으로 프랑스 도시권에서는 약 85%가 백인종이었으며, 10%는 북아프리카인, 3.3%가 흑인, 그리고 1.7%가 황인종이었다고 전한다. 2008년 조사에 의하면 가장 많은 이민자 집단은 50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인들이며, 그 뒤를 400만 명 정도의 북아프리카인, 250만 명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인들, 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 20만 명의 터키인들이 뒤따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그리스 등 타 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들도 있다고 전한다.

고대에 갈리아라고 불리던 이 지역에 살던 켈트족 계열의 골족과 그 후에 로마의 지배를 거치면서 라틴족, 주변의 민족인 게르만족(프랑크족, 부르군트족, 프리슬란트족, 앵글족, 색슨족)·노르만족(데인족, 노르게족)·켈트족(브리튼족, 픽트족, 게일족)과 융화하여 오늘날의 프랑스인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실증적·합리적이다.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 지방에는 체격·용모 등이 프랑스인과는 다른 바스크인이 살고 있다.[16] 프랑스 국경 근처에는 독일인, 룩셈부르크인, 왈로니족, 플란데런족 등이 거주한다. 현대에는 EU권내의 각 국가로부터 이주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의 북아프리카와 세네갈, 기니 등의 서아프리카 및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옛 식민지 국가의 사람도 다수 거주하며, 특히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 벨라루스, 러시아, 슬로바키아 같은 동유럽에서 온 슬라브계 민족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언어

고대 갈리아 프랑스인이 사용하던 골어는 라틴어로 대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라틴어에서 발전한 프랑스어가 국가언어가 되었다. 영국에 이은 식민제국건설로 인하여 프랑스는 이에 따라 국제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가 형성되었다. 프랑스인의 프랑스어에 관한 애정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켈트어 계통의 브레통어, 로망스어 계열의 오크어, 게르만어 계열의 알자스어 등의 각 지역어가 있으나, 프랑스의 강력한 1언어정책으로 인하여 소수어에 대한 공적 지위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프랑스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전 세계 인구는 약 2억 9,000만명으로 추산된다(아프리카 24개국, 캐나다 퀘벡 지역, 유럽 일부지역 포함).

한국에는 개화기 시절 한국이 서구 국가들과도 교류를 시작하면서 소개되기 시작했다. 1880년 펠릭스 클레르 리델 주교에 의해 최초의 한불사전인 한법자전에 편찬되었고, 1901년 샤를 알레베크에 의해 불한사전인 법한자전이 편찬되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서울 정동에 설립된 관립 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교육

18세기 말에 설립된 파리의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 ENS)는 세계 어느 기관보다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프랑스는 중세를 통해 오랫동안 성직자에게 한정되었던 교육을 15세기 말에 이르러 파리대학교를 창설함으로써 일반에게 개방하려 했다. 르네상스에 의해 이와 같은 경향은 보다 더 강해졌으나 17세기에는 예수회가 상아탑을 고수하였다. 한편 그동안 라블레·몽테뉴·데카르트·파스칼에 이어 볼테르 및 백과전서파(Encyclopédiste) 등이 해석과 이론면에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여 다음 세대 교육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백과전서파는 18세기 프랑스의 지식인 그룹으로서, 영어로 작성된 기술, 과학, 예술분야의 백과사전을 번역하고 개정하는 작업을 하였다.

18세기에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과 과학·기술의 경험주의라는, 언뜻 모순되는 2개의 경향이 교육의 사상과 방법에도 나타났다. 교육이 진실로 대중에까지 보급된 것은 대혁명 때부터이며, 그때까지 남성의 반, 여성의 3/4이 문맹이었던 프랑스에서 1791년 전체 국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선언되고 탈레랑·콩도르세·라카나르 등에 의해 새로운 일반교육방침이 작성, 실시되었으며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808년에는 나폴레옹이 ‘제국대학’을 창설, 여기에서 국가교육제가 확립되었으며, 1850년에 이르러 사립교육을 허가하였다.

현재의 교육제도는 제3공화국의 교육제도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1880년에는 여성에 대한 중등교육의 기회가 열렸고 다음해에는 초등교육의 무상이, 1882년에는 그 의무조항 및 교내에서 종교교육의 금지조항이 제정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교육의 원칙은, 교육의 자유, 즉 공·사립 교육의 공존, 무상 공교육의 원칙, 공교육과 종교의 무관성, 모든 공적 자격은 공개시험을 통해서 국가로부터 발급된다는 4가지이다. 영재교육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교육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랑즈뱅의 개혁, 제5공화국이 수립된 뒤 1959년의 개혁을 거쳐 1968년 봄 소르본 학생들을 중심으로 야기된 ‘5월 사태’를 계기로 큰 변화를 겪었다.

또한 1969년 6월에는 인구 증가에 따른 학교의 증설, 기술·직업교육, 사립학교 및 외국과의 협력사업 등의 책임을 맡는 각외장관이 따로 임명되었다. 한편 교육부가 관할하는 교육 이외에 농림·노동자 양성 및 청소년·스포츠 담당 국무장관 등이 담당하는 각 분야의 교육부문, 그리고 국방·문화·사법·공업발전·과학연구 등을 담당하는 부처에도 각각 교육 부문이 있다. 의무교육은 10년(6∼14세)이고 유치원에서 중등교육·직능교육까지 무료이다.

대학교육은 약간의 등록금을 받는 이외는 무료이며, 사립학교도 있으나 소수이다. 초등교육은 6∼10세, 중등교육은 콜레주(Collège)(11∼14세)와 리세(Lycèe)(15∼18세)로 이루어진다. 콜레주에서는 프랑스어, 수학, 고대 언어문화, 물리화학, 예술사 등 인문학과 과학 등을 중점적으로 학습하며 컴퓨터 활용 능력도 함양할 수 있도록 한다. 콜레주 과정을 마치고 국가고사인 브레베(Brevet)를 통과하면 과정을 수료할 수 있다. 리세에서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거나, 기술 자격증 취득과 같은 취직 준비교육을 실시한다. 리세를 마치고 선택한 계열의 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èat)에 합격하면 통학 구역 내의 희망하는 대학으로 진학한다.

프랑스의 대학교는 일반 공립대학교(Université)와 그랑제꼴(Grandes Ecole)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공립대학교는 대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이름 붙인다. 수도 파리에는 파리 1대학부터 13대학까지 13개의 대학교가 있다. 그랑제꼴은 엔지니어링, 경영 등 하나의 과목에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는 곳이며, 매년 졸업생의 수가 100명에서 300명 정도로 규모가 작은 학교이다. 선발시험을 거쳐 입학할 수 있는 명문 대학을 통칭하는 비공식적 개념이다. 그랑제꼴 준비반인 프레파(Prèparatoire)에 입학하여 2년의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 그랑제꼴 선발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랑제꼴에 해당하는 학교는 파리정치대학(Science Politique),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 국립행정학교(ENA) 등의 전문학교가 있다. 국립행정학교에 진학하면 고급관료가 되는데, 그들은 정·재계에 있으면서 지도층을 구성한다.

사회보장

프랑스는 19세기에 '상호원조회사'(공제조합)가 있었고, 현재는 1만 4000개의 조합이 2200만 명의 조합원을 포용하면서 강제보험을 보완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 각국에서는 사용자 과실(過失)의 입증을 배제하는 노동재해보상입법(勞動災害補償立法)이 채택됨에 따라 프랑스에서도 1898년 4월 노동재해보상법이 시행되었다. 이어서 1910년에는 1930년의 ‘사회보험법’에 흡수된 '근로자·농업종사자 퇴직연금법' 등이 성립되고, 또 1932년에는 가족수당법이 제정되었다.

프랑스에서 사회보험의 제도화는 유럽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나 가족수당에서는 벨기에와 함께 선구자 구실을 하였다. 프랑스는 1935년 이래 사망률이 출생률을 상회하게 됨으로써 '인적 자원의 조성'이라는 측면에서 1938·1939년 가족수당제도가 대폭 수정되었으며, 특히 1939년 7월의 '가족법전(家族法典)'은 그 적용대상을 종래의 임금노동자는 물론 자유업자·자영업자 등에게까지 확대하여 실질적으로 그 범위가 전국민을 포함하게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보장제도의 골격은 1945·46년에 거의 확립되었다. 종전에 시행되던 사회보험법·노동재해보상법·가족수당법 및 노령 피고용자수당에 관한 일련의 입법은 1945년 10월 4일의 '사회보장의 조직에 관한 법률'로 통합되었고, 이어서 보험법으로서 '상공업 피고용자에게 적용되는 사회보장제도를 규정한 1945년 10월 19일의 법률', 노동재해보상법으로 '노동재해·직업병에 관한 입법의 수정·통합과 이를 사회보장 조직에 통합시키기 위한 1945년 10월 19일의 법률', 가족수당법으로서 ‘가족급여제도로 정한 1946년 8월 22일의 법률과 사회보장의 특별 송사에 관한 1946년 8월 22일의 법률’이 제정되어 현행 사회보장제도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입법을 통하여 사회보험과 여러 가족수당의 운영을 일원화하는 방침이 정해졌으나, 1949년 2월에 가족수당금고가 설치되고, 1952년에는 많은 부담금 취급조합 등이 창립됨에 따라 이 원칙은 무너지게 되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후 이른바 '1967년의 개혁'이 이루어져, 종래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대폭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종래 재정을 총괄하던 전국사회보험금고에 대신하여 질병보험금고, 노령보험금고, 가족·급여금고를 설치하였으며, 비농업수공업 및 독립근로자도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개혁의 정신은 사회보장을 프랑스 국내에 있는 모든 고용자에게 의무화하고, 그 운영은 사회보장 전국금고의 독립화 계획에 따라 국가의 직접관할을 피하여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의 상호부조제도의 전통에 바탕을 둔 자주적 성격을 존중하도록 하였다. 일반보험의 재원은 고용자와 피고용자로부터, 노동자재해보상보험과 가족수당은 고용자에게서 징수된 보험료만으로 충당한다. 역사도 길고 독창적인 프랑스의 사회보장 취급금액은 국가예산의 절반이나 되며 조직이 복잡하지만, 주요 수당의 지급비율이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제조합에 의한 질병수당의 보완, 퇴직연금 보완제도에 의한 노령연금의 보조 등도 사회보장제도와 공존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의 모든 국민은 가족수당, 퇴직연금,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는다. 가족수당은 1세기에 걸친 인구 정체의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고려된 만큼 종류도 많으며, 지출금액도 전체 금액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전·출산·산후수당 등은 부수 의료비와 관계없이 지급되고, 또 수입과 자녀수에 대응하는 주거수당이 있다. 그리고 특징적인 수당으로 가족수당 이외에 단일급여수당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주부수당으로, 자녀의 양육을 위해 주부가 근무를 단념해야 할 경우 그 가계를 보조하는 취지에서 자녀수에 따라 부수입의 상한을 넘지 않는 가정을 대상으로 지급한다.

그밖에 철도·버스 운임의 할인도 프랑스 가족수당제도의 목표를 명료하게 반영하고 있다. 2018년 기준 프랑스의 사회보장 지출 비중은 33.4%이며 이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사회보장제도는 매우 광범위 하며 출생부터 사망까지 프랑스인의 삶을 책임진다. 제도 또한 매우 수평적이며 국가가 지원하고 고용주와 근로자가 일부를 부담하는 형식을 가진다. 전 국민의 최저생활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빈곤층에 매달 300~500유로를 지급한다.

종교

1905년 정교분리법이 공포되었으며 1958년 제정된 헌법에서 프랑스는 비종교적 공화국임을 천명하였다. 1978년에 개인의 종교는 사생활 관련 정보로서 수집이 금지됨에 따라 공식적인 통계는 집계되지 않는다.다만 추정치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체 인구의 63-66% 정도의 인구가 로마가톨릭 신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약 10%만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가한다. 프랑스 북서부의 브리타니-벤데(Brittany-Vendée)와 동쪽의 그랑테스트, 보주(Vosges), 쥐라(Jura), 리옹, 알프스 북부 지역은 타지역보다 로마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높다. 이슬람교 신자는 7~9%로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에 거주하던 이민자들이 프랑스 본토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이외 불교 0.5~0.75%, 유대교 0.5~0.75%, 기타 0.5~1.0%, 무교는 23~28%에 달하였다.

문화

프랑스는 지난 수백년 동안 서양 문화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동시에, 문화적 초강대국으로 군림해 왔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 이름을 떨쳤기에, 오늘날 프랑스는 풍부한 문화와 유산을 지닌 국가로 여전히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는 전국을 통틀어 무수히 자리잡은 문화유산과 유적지 덕에 해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프랑스의 박물관수는 1,200여개를 넘으며 매년 50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것으로 집계된다. 프랑스 정부는 중요 문화유산을 직접 관리하는데, 이를테면 국가 사적지 85곳을 관할할 의무를 지닌 국가유적센터를 설립해두고 있다. 여기에 등록 문화재로 총 43,180건을 지정해두고 있으며 그 유형은 주거용 건축물 (고성), 종교용 건축물 (성당, 바실리카, 교회), 조각상과 기념비, 정원 등이다.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된 프랑스의 문화유산은 총 45곳으로 집계된다.

문학

프랑스 문학은 프랑스 국민들이 갖는 국가적 자부심이자 유럽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요소이다. 프랑스 문학이라 함은 프랑스와 아프리카, 벨기에, 캐나다, 모로코 등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프랑스어로 작성된 문학작품을 말한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인 프랑스어는 프랑스 정신을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11세기부터 중세 프랑스어로 쓰여진 프랑스 문학은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토착어 문학 중 하나였다. 15세기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등으로 인해 명성이 가려졌지만, 16세기부터의 프랑스 문학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체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 이 시기에는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운동으로 프랑스 또한 신구교의 분란에 놓였고, 당시 프랑스 문학은 사회제도와 구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 18세기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은 유럽 전역과 미국 문학 전통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 프랑스 문학이 퍼지며 유럽대륙 밖에 프랑스어가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대중교육 지침에 따라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문학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의 교육기관에서는 프랑스의 고대 소설, 시, 연극 등을 교육하며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문화 예술 기구는 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와 프랑스 연구소(Institut de France)이며 문학 작가와 시민들을 대상으로 대중적인 행사와 교육을 제공한다.

프랑스는 노벨 문학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국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01년 시인 르네 쉴리프뤼돔은 프랑스에서 첫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1904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1915년 로맹 롤랑, 1985년 클로드 시몽, 2014년 파트릭 모디아노 등의 문학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술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미술관으로 여겨지며, 최대 규모, 최다 관광객 규모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미술의 기원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미술과 플랑드르 미술이 전래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중세 프랑스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장 푸케는 이탈리아로 처음 여행을 가서 초기 르네상스를 접한 최초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기 퐁텐블로파 회화는 프리마티초, 로소 피오렌티노 등 프랑스로 건너온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의 유명 화가였던 니콜라 푸생클로드 로랭도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17세기부터는 프랑스 회화가 주류로 부상하면서 고전주의를 통해 차별화되기 시작하였다. 1648년 장바프티스트 콜베르는 프랑스 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루이 15세의 명으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창립하였으며, 1666년에는 이탈리아 예술계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위해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도 설립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예술가들은 옛 바로크 양식을 좀 더 수정 계승한 로코코 양식을 발달시켰다. 이 시기 궁정에서 활동하던 앙투안 와토, 프랑수아 부셰, 장오노레 프라고나르가 프랑스의 대표 화가로 거듭났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예술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나폴레옹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선호하여 자크루이 다비드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는가 하면, 예술계에 큰 영향력을 구가하던 미술 아카데미는 아카데미즘이라는 주류 양식을 정의하게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예술 창작의 중심지로 거듭났으며,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미술을 지배하는 두가지 사조로 테오도르 제리코외젠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그 다음으로 카미유 코로, 귀스타브 쿠르베, 장프랑수아 밀레로 대표되는 사실주의가 부상하였고, 궁극적으로 이는 자연주의로 진화하게 된다.

클로드 모네

19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 회화의 영향력이 한층 더 두터워지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인상주의와 상징주의라는 새로운 양식의 회화가 발달한 것이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는 카미유 피사로,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꼽힌다. 이들의 뒤를 이은 폴 세잔, 폴 고갱, 툴루즈로트렉, 조르주 쇠라 등의 2세대 인상파 화가들은 아방가르드 미술에도 한몫하였으며 앙리 마티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과 같은 야수파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로 넘어가면서 파리에 거주하던 조르주 브라크파블로 피카소가 입체주의를 개척하였다. 또한 빈센트 반 고흐,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같은 당대 화가들도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프랑스의 각 박물관들도 이 시기부터 회화와 조각품의 수집에 나서게 되었는데, 프랑스 정부가 소유한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모나리자 등의 18세기 이전 옛 명작들을 구입 및 인수받아 오늘날의 초대형 컬렉션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 국가 소유 미술품 가운데 인상파와 야수파 회화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 미술을 정리하기 위한 대책으로 오르세 미술관이 1986년에 설립되었다.

모더니즘 이후 현대미술은 프랑스 국립 근대미술관이 관할하고 있으며 1976년 조르주 퐁피두 센터로 이전하였다. 이들 세 국립미술관은 한 해 17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명실상부 프랑스의 대표 미술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 파리에 함께 위치한 대표적인 국립미술관으로 그랑팔레와, 시립미술관인 파리 현대미술관이 있다. 파리 외에도 유럽과 프랑스 회화를 아우르는 미술관이 각 도시마다 설립되어 있으며 리옹 미술관, 릴 미술궁전, 루앙 미술관, 디종 미술관, 렌 미술관, 그르노블 미술관이 대표적이다.

건축

생루이의 생트샤펠 성당. 프랑스 종교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중세 시기 프랑스에서는 각지의 봉건 귀족들이 권력 과시를 위하여 요새화된 성채를 지었는데, 프랑스어로 '샤토' (Château)라 하는 이들 고성 중에서 현전하는 대표 작품으로 시농성, 앙제르성, 뱅센성, 카타르성 등이 있다. 이 당시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주류를 이루던 로마네스크 건축을 따랐으며, 대표적인 건물로는 유럽 최대의 로마네스크 교회인 툴루즈의 생세르냉 대성당, 클뤼니 수도원 유적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뒤를 이은 고딕 양식은 본래 '프랑스식' (Opus Francigenum)이라 불리던 양식으로서, 일드프랑스 지방에서 처음 유래하여 전 유럽에 퍼져나간 최초의 프랑스 고유의 건축양식이 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북부에는 초창기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대성당이 다수 자리잡고 있는데, 고딕 양식의 시작점이 된 생드니 대성당은 물론 샤르트르 대성당, 아미엥 대성당도 중요한 대표작이며, 프랑스 국왕의 즉위식이 열리던 렝 대성당도 빠질 수 없는 프랑스 고딕양식의 예시이다. 교회 뿐만 아니라 종교 관련 시설에도 고딕 양식이 적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로는 아비뇽의 교황궁이 있다.

15세기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프랑스 건축의 발전사도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하였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프랑스 궁정으로 초청되어 프랑스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루아르 계곡에는 왕궁이 여럿 지어지게 되었는데, 1450년 몽소로성을 시작으로 샹보르성, 셰농소성, 앙부아즈성이 그 예시다.

르네상스의 뒤를 이어 중세가 끝날 무렵에는 바로크 건축이 기존의 고딕 건축을 대체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바로크 건축은 종교 건축보다는 세속 건축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 바로크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베르사유궁이 있다. 베르사유궁의 확장 공사의 설계를 맡은 쥘 아르두앵 망사르는 바로크 시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건축가로 떠올랐으며, 앵발리드의 돔 설계에도 참여하였다.

요리

프랑스 요리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아 그야말로 고급 요리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다. 요리는 3시간이 넘는 저녁식사로 유명하다. 치즈포도주, 바게트가 널리 알려졌으며, 에스카르고, 푸아그라, 송로버섯, 오뇽 그라티네 수프, 뵈프 부르기뇽 등이 프랑스의 특색이 담긴 요리라 할 수 있다.

바게트는 정말 밥처럼 먹는다. 프랑스인들은 바게트를 한 덩이 떼어내서, 부드러운 부분이 위로 가고 딱딱한 껍질이 아래로 가게 해서 먹는다. 이렇게 먹어야 입 안이 안 까진다. 그리고 각종 요리를 먹고 나면 나오는 기름[10]도 바게트로 닦아내서 먹기도 한다.

프랑스 식품법도 요리에 매우 까다로워서 빵과 와인의 조건을 엄격하게 규정해놓았다. 바게트는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로만 만들어야 한다던가, 와인은 순수하게 포도만 써서 만들어야 한다던가….

프랑스에서 빵의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보니 프랑스 정부는 경연대회를 통한 빵홍보를 하고 있다.

스포츠

프랑스는 하계올림픽을 1900년, 1924년에 개최하였으며 2024년에도 개최할 예정이다. 이들 세 대회 모두 파리에서 개최하였으며, 2024년 대회로 파리는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픽 3회 개최 도시가 된다. 동계올림픽의 경우 초대 대회인 1924년 샤모니 동계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이후 1968년 그르노블, 1992년 알베르빌 대회를 개최하였다. 프랑스 선수단은 사이클과 핸드볼에서, 동계 종목에서는 알파인스키에서 강세를 보인다.

프랑스에서 최고 인기 스포츠는 축구이다. 프랑스는 FIFA 월드컵을 2회 (1938년, 1998년) 개최하였으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8년과 2018년 2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축구 다음으로 인기있는 스포츠는 럭비이다. 다만 장마리 르 펜과 같은 프랑스의 극우 민족주의자 내지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럭비가 선수들의 대부분이 백인이기 때문에 축구보다 더 좋아한다는 의견도 있다.

야구의 경우 국내리그인 다비시옹 엘리트가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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